황토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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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20세기 근대사는 모멸(侮蔑)의 역사다. 인접국에 침탈당하고, 이데올로기의 최전선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으며, 산업화의 명분하에 독재와 민중의 고통스런 희생이 강요되었고, 권력에 눈먼 군부에 의해 민간인의 무참한 학살이 자행되었던 시기이다. 그리고는 마침내 국가경제의 붕괴로 국제긴급구호자금까지 굴욕적으로 빌려 써야하는 참담함과 민중의 또 한 번의 허리띠 졸라매기라는 고통을 통해서야 가까스로 오욕(汚辱)의 20세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1974년 발표되었던 중편을 21세기 초인 2011년 전면 개작하여 발표하는 작가의 의지는 이 모멸과 오욕에 수반되었던 정리되지 못한 찌꺼기를 그대로 간직한 채 은폐하고 오히려 기득세력이 되어 한국사회를 유린하는 인간들에 대한 상기와, 그 상처를 오롯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민중들의 아픔이란 것은 존재한 적도 없다는 듯이 까마득한 망각으로 접어두고 다시금 오욕의 길로 달려가는 이 사회에 대한 경계일 것이다.
한편은 이미 고인이 되었거나 80~90세의 고령자가 된 20세기를 온통 겪어온 우리의 부모세대들에 대한 연민과 그 아픔의 이해에 대한 요청일 것이다. 역사는 결코 단절된 적이 없다. 오늘의 우리와 우리 사회는 역사의 진실들을 자주 잊곤 한다. 가해자가 권력을 가지면 그 사악한 가해의 진실을 숨기고 지워버리려 한다. 우리들의 앞에는 그러한 자들이 활개치고 뻔뻔스럽게 권력과 부를 차지하고 여전히 민중을 기만하고 있다. 동족을 괴롭힌 가장 파렴치한 인간들을 청산하지 못하고 21세기에 이른 것이다.

소설은 이 오욕의 층위들 모두를 자신의 몸에 그대로 새긴 한 여인을 통해 우리 민중들의 고통과 한(恨)을 처절하게 드러내고 있다. 일제 식민치하에서는 황국신민이 되어야 했고, 그래서 침탈자인 일본인들과 민족을 배신하고 그들의 주구가 되어 동족을 궁지에 몰아넣던 앞잡이들로부터 육신과 정신의 희생을 강요당했으며, 해방의 시기에는 미군정(美 軍政)치하에서 물질과 영혼의 혼란을 겪으며, 이데올로기의 분열이 만들어낸 폭력을 그대로 뒤집어써야 했다.
아리따운 열일곱 처녀, ‘점례’, 20세기를 이 땅에서 그야말로 버텨냈다고 말 할 밖에 없는 그녀의 일생을 좇는 일은 차마 못할 짓이다. 우리의 20세기가 그랬다는 얘기다. 억울하고, 분하고, 고통스럽고, 그러나 어디 하소연 할 곳 없었던 바로 우리들의 어머니, 아버지인 대다수 민중의 삶이란 것이 오직 상처의 수용자로서만 존재하였다는 말이다.

왜(倭)인의 겁탈에 저항했다하여 모진 고문과 죽음에 내몰리고, 끊임없이 수탈당하고 착취당하여 가진 것 없는 민중이, 더구나 어린 여성으로서 이런 궁지를 모면하는 길이란 그 선택의 여지가 극도로 협소해진다. 겁박과 죽음에 몰린 부모를 살리기 위해 일본인 주재소장의 성적 노리개가 되고, 원수의 자식을 낳는다. 그리고 맞이한 해방은 그녀에게 외세에 의한 치욕스런 노리개로부터의 탈출이 아니라, 외려 희생자를 왜놈의 처자로 몰아대고 모욕을 주는 구속과 억압의 연장일 뿐이다.
과거의 흠 아닌 흠을 숨기고 결혼하지만 노동자와 농민, 빼앗기기만 했던 민중의 삶다운 삶을 희망했던 남편은 공산주의자가 되어 떠난다. 이데올로기가 만들어 낸 이 땅의 또 하나의 비극이다.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이었던 남편의 신분은 그녀의 삶을 다시금 파괴 하는데, 권력자들의 탐욕을 이념의 대립이란 것으로 덧씌운 파렴치는 공산주의자의 아내였다는 이유만으로 핍박의 대상이 된다.

보잘것없는 권력까지도 약자의 가녀림과 무지를 이용한다. 상황의 불리는 여성을 쉽게 소유하는 방편이 되고, 점예는 다시금 미군의 아낙네가 되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다. 양갈보, 우린 우리의 형제와 자매의 고통을 지나치게 쉽사리 매도하고, 자신들의 무능과 무기력을 권력자가 아닌 희생자들을 손가락질 하는 것으로 회피하려한다. 식민지약탈자의 노리개로서 출산한 아들, 공산주의자가 되어 떠나버린 남편으로부터 얻은 딸, 미군의 쾌락도구로서 낳은 아들, 이 세 명의 자식은 그녀, 아니 우리들이 겪어야 했던 이 땅의 고통과 모멸의 역사이다. 그러나 우린 이 역사의 상처, 흔적, 의미들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큰 아들‘태순’이 셋째인‘동익’을 향해 내뱉는 빈정거림과 모욕은 그대로 우리와 우리사회의 초상이다. 식민지의 치유되지 않은 태순이란 흔적이 동익이란 서구사대주의를 비난하는 이 아이러니, 또한 혼혈아인 동익의 냉대받는 인간 파편이라는 자기역사의 부정, 어머니 점예와 가족의 부정은 우리의 지배적 의식에 내재하고 있는 몰상식과 몰염치, 은닉된 자기비하의 콤플렉스인 것이다.

정의롭지 못한 사회, 악을 치유하지 않는 사회, 타인의 탓만을 하는 사회, 역사의 진실을 외면하고, 왜곡하는 사회는 결코 오래갈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안으로 계속해서 곪아가다 끝내는 자멸할 것이다. 20세기를 과거사라 치부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지금에도 그 욕된 역사는 계속되고 있으니 말이다. 노 작가가 펜을 다시 들어 37년 전의 작품을 오늘에 다시 쓴 이유는 그래서 의미심장하고 시의적절하다. 이처럼 국민적 기억의 망각을 다시 불러내는 것만으로도 우리들의 역사적 이성을 일깨우는 중요한 작업인 것이다. 기억하자, 외면하지 말자, 그리고 지금이라도 청산하자. 그래야 우리의 후손들이라도 덜 고달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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