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니티의 다섯 개 역설
앙투안 콩파뇽 지음, 이재룡 옮김 / 현대문학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사회학적 비평이기에는 논의의 범주가 지극히 협소하다. 산업자본주의의 유의어로서의 모더니티를 총합적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그러하지만, 예술사적 범주에 국한하면, 특히 모더니티가 지닌 한계 - 근대적 시간관, 물신주의 및 소비주의, 인간의 소외 등 - 를 극복하기 위한 사조들의 또 다른 한계성을 갈파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책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특수주의적 시각을 버리지 못한 프랑스 자국 및 서구중심주의의 기술이며, 일부 문학이나 건축, 음악분야를 거론하기는 하지만 미술사에 편중되어있어 보편성으로 확대하여 이해하기에는 그 결여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특히 포스트모더니티에 이르면 극단적으로 프랑스적 관점에서 기술되고 있어 저자 스스로의 말처럼 혼란스러움을 조장하여 그 의미를 애써 초기 모더니즘이나 전위주의에 휘감기게 하여 퇴행적 의지로까지 읽힌다.

저자의 시선을 대변하는 서문을 보면‘현대적 전통’이라는‘현대’와‘전통’이 결합한 괴이한 이 언어가 내재하고 있는 모순어법을 통해 모더니티라는 새로움의 시작이 곧 과거가 되고 마는 것과 같이 현대라는 언어가 지닌 과거와의 단절을 통찰하고, 그래서 그 단절 자체가 전통을 구성해버린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 관점은 19세기 보들레르로부터 기원을 찾을 수 있는 모더니티가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자각과 변화를 도모했는지를 관찰하는데 핵심적 의미로 작동하고 있다 하겠다.

보들레르와 마네가 활동하는 19세기는 새로운 시간관의 인식이라 해야 할 것이다. 결국 이러한 속도가 만들어낸 미래성과 미결성, 파편성은 극복되어야 할 문제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맥락의 파악은 진부하기조차 한 분석이지만, 1800년대 중반의 예술이 모더니스트틀이 모던에 대해 어떤 비판적 이해를 지니고 있었는지에 대한 비교적 심층적인 관찰을 가능하게 해준다. 한 예로써 마네의 「풀밭위의 점심 식사」나 「올랭피아」가 역사성을 관심 밖으로 한 것이나 그림의 의미를 그림 자체 안에서만, 즉 표면에 머물도록 의도하였음을 통해 전통적 아카데미즘의 조롱과 시간성을 무시간대로 몰아넣은 일종의 반항을 목격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책을 읽는다면 나름 의미를 지니는 독서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형식의 글쓰기가 전위주의(아방가르드), 추상파와 초현실주의,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는 비평까지 어떤 의미에서는 동어 반복적으로 거듭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모더니스트들의 현실에 대한 반발로서 탈현실화를 외치며 나선 전위주의자들의 공허한 초월, 침묵, 비개인화, 나아가 산업자본주의 사회 속에서의 예술과 시장이라는 제도 자체에 대한 부정을 해독하지만 이 역시‘새로움’에 대한 끝없는 인식의 갈등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 새로움이란 시간관에 대한 갈등, 내면의 시간과 외면의 시간을 타협시키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추상화의 대두로 이어지고, 다분히 실험적이고 지금에서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브루통과 같은 초현실주의자들의 무조건적인 현실세계에 대한 위반의 가치에서 이상한 것에 대한 숭배라는 미학적 모순, 그리고 그 대표주자인 마그리트가 빠진 상투성과 소비사회의 상표처럼 전락하는 운명에서 그 한계를 폭로하기도 한다.

한편 유럽에서 미국으로 그 주도권이 이전된 세계대전 전후시기에 시장의 전폭적 지원 하에 태어난 잭슨 폴록으로 대변되는 추상표현주의의 이미지의 거부, 즉석 실행의 창조행위, 배경과 형상의 구분을 없애는 기획과 바로 그러함으로서 대형 캔버스에 서서 물감을 흘려대는 육체성에서 외부적 관습의 배제라는 의도를 발견한다. 이러한 현상은 엘리트 예술과 대중예술의 일대 교란, 상호 위치 바꿈으로 이어지고 필연적으로 팝아트의 형식을 낳는다. 이것은 예술성의 파괴를 통해 제도와 시장으로 환원되어버린 예술을 부정하겠다고 나선 라우선버그와 같은 팝아티스트가 소비사회에 의존하는 경향이 되고 마는 역설로 이어지는 것은 실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이러한 비판적 예술사조의 발생을 탐사하는 시선에는 어쩔 수 없는 산업자본과 소비자본주의에 포획될 수밖에 없는 예술의 그 내재적 한계를 들추어내는 사례로서 활용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지난한 작업을 통해서 우리가 이해하고 궁극적으로 찾아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면 그리 훌륭한 통찰력을 발견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실망스럽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획기적이거나 단절적인 대전환의 방법론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모더니티가 발생시킨 인간의 파편화와 소외, 물신지상주의가 가져온 폭력적 폐해를 최소한 점진적으로나마 축소시키고 상실한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틈새나 지향점을 발견해내는 것이어야 할 것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낳는다는 것이다.

끝으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 저자는 소비사회의 물신화에 포섭된 단절의 전통에 실망한 예술, 즉 모던한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 포스트모던이란 용어가 모더니티와 단절인지, 연속인지, 긍정인지, 부정인지가 혼돈이라고 말하고 있다. 만일 모던과 결별하겠다는 의미라면 이처럼 모순이 어디있는가고 묻는다. 즉 단절이라는 현대(모던)의 특징을 그대로 반복하면서 구별하려는 것처럼 역설이 어디 있겠느냐는 의미이다. 이 혁신의 논리, 이미 새로움을 표상하는 의미이기에 모던의 반복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하는 의문을 버릴 수 없기도 하다. 어찌 보면 언어의 유희 같기만 하다. 포스트모던을 지향한 건축물들은 절충주의로 나타났고, 단절의 단절을 통합한다는 우스꽝스런 말처럼 그 속을 들여다보면 한없는 모순이 드러남을 알아차리게 된다.  

 

단절을 의미하는 모던을 단절한다면 그것은 바로 모던의 극치 아니냐는 말이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던은 퇴행, 복고를 의미한다는 말인가? 결론적으로 하버마스, 리요타르, , 잔니 바티모등을 인용하면서 포스트모던에 대한 대립된 이론들을 소개하지만, 저자는 보들레르로 회귀한다. 그리고 현대적 환상의 특징이 사상과 예술 사이의 시차라고 말하면서 이 연속적인 사조들의 궁지(窮地)를 인식하는 역사적 의식과 진보의 교리의 존재를 인정할 도리 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패러독스를 외친다. 결국 모더니티의 초기, 19세기 보들레르가 “자유와 숙명이라는 두 개의 모순된 개념이 결국 동일하다는” 신념에 만족해야만 한다는 것인지?  하나의 담론으로서 인식될 수 있는 결론이 지극히 취약하고 산만하다는 단점은 못내 아쉽지만, 모더니즘에 대한 저항의 역사로서 예술 사조들의 다양한 변주의 모습을 파악한 예술비평론으로서는 참고할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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