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아홉 작가정신 소설락 小說樂 2
김도연 지음 / 작가정신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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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나도 모르겠네.’식의 하소연이랄까? 그렇게 된 까닭이 세상의 무분별한 의욕들이 되었든, 인간의 내재적 한계이든, 혹은 그네들이 뿜어대는 광기의 혼란이든 여하튼 어쩌지 못하겠다는 얘기인데, 그래서 어떻다는 것일까? 그저 동류(同類)로서의 공감이면 족하다는 것일까? 아님 이 원인들의 속성이 무엇인지 알아보자는 것인가? 그래서 어렴풋이 알아냈기로 인간이 손을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면 또 어쩌겠는가? 그냥 얘기를 즐기고 너나 나나 같지 아니한가? 라고 푸념을 나누자는 말인가?

 

소설은 이러한 시니컬한 의문들을 연잇게 한다. ‘아흔아홉’이란 헤아리기에는 많은 것 같고, 무언가 여운이 남는 수가 발휘하는 영감이 이 소설로 유혹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숫자에 감추어진 결점을 보지 못한 것은 순전히 내 탓일 것이다. 장점이 곧 단점이 되어 허무하고 공허하고 알 수 없는 것이 되니 말이다. 지금은 터널이 뚫려 구불구불 대관령 고개를 넘어가지 않아도 돼서 아흔아홉 고개가 옛 이야기가 되어버린 그곳이 소설의 배경이다. 하기 좋은 말로 설렁설렁 굽이굽이 고갯길을 넘어가며 강원도 산세와 풍광을 보는 것이 어찌 고달프기만 한 것이냐고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차량으로 오르내려도 그 답답함과 짜증을 이겨내는데 족히 시간이상이 걸리는데 즐거운 고개이기만 하겠는가? 더구나 소달구지나 봇짐을 지고 걷는 옛사람들에게는 더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새로 뚫린 터널과 산 중턱과 중턱을 잇는 수직의 교각이 죽 늘어서 이젠 직선의 도로를 그냥 내달릴 수 있다. 그래서 동과 서를 분리하던 아흔아홉 구비 대관령 고개가 그렇게 어떤 분절을 상징하는 기호의 자리를 고수하지 못한다. 소설은 바로 이 새로운 길과 옛 길들이 우리의 삶에 들어 앉아 시간의 다름, 인식의 다름, 관념의 다름으로 안절부절 못하게 하는 것에 대한 사념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인생이란 것이 이것인가, 저것인가와 같이 선명하다면 무슨 근심이 있고 불안이 있겠는가? 서로 다른 시간, 그 속도의 감각이 여전히 우리들 몸에 새겨진 태고의 시간과 갈등하고 충돌한다. 우린 그래서 방황한다.

 

대관령 옛길과 새 길이 바라보이는 자락에서 서울을 오가는 대학 강사인 남자가 있다. 어느 날 늦은 귀가에 아내의 부재를 발견한다. 그녀가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춘 것이다. 아내가 실종되었다는 얘기다. 이런 남자에게 Y라는 애인이 있다. 아내 눈을 피해 만나는 여자. 새 길은 남자의 바람기에 일조하는 길이다. 휙 달려갔다, 휙 달려오는 길. 사라진 아내는 남자의 외도 길이 달가울 리 없을 것이니 새 길은 삶의 안정을 방해하는 파괴의 기호인 셈이다. 대관령 끝자락에서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 그 정적인 시간의 세계가 속도의 시대에 휘둘리기 시작한 것이다.

 

남자는 실종된 아내를 찾아다니지만 적극적인 행위로서가 아니다. 그럼에도 아내를 기다린다. 그리고 Y의 몸을 생각한다. 정과 동, 빠름과 느림, 직선과 곡선의 혼화(混和)속에서 무엇이 삶의 답인지 식별할 수 없는 것이다. 남자는 아내가 부재한 집에서 홀로이, 때론 친구들과 어울려 술병을 쌓아간다. 이 기다림의 의식이 흐르고 일 년여가 지난 날 문득 아내가 집에 들어선다. 아무 말 없이 여자의 부재로 쌓인 묶은 얼룩들을, 마치 남자의 부정의 흔적을 찾아내 제거해버리려는 듯 꼼꼼히 씻어 내린다. 그리고 Y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전화 속 멀리에서 들려온다. 뱃속의 생명을 지워버린 여자의 흐느낌이.

 

오랜 침묵 끝에 집에 돌아온 아내와 남자의 대화는 너무 사실적이어서 비현실적이기조차 하다.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했느냐,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했느냐이다. 여자는 시인하고, 남자는 부인한다. 어렵다. 여자가 기대하는 답변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남자는?

여자는 남자의 애인 Y에게 세 사람이 함께하는 소풍을 제안하고, Y는 흔쾌히 수락하고 이들 셋은 산행을 한다. 두 여자는 자매처럼 손을 잡고 남자를 앞서 거닐고, 남자는 짐 가득한 배낭을 메고 뒤를 따른다. 이 비현실적인 장면이 사실은 우리네 인생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친다. 이걸 확인이라도 시켜주듯이 세 사람의 대화는 소설을, 아흔아홉 구불구불 인생길을 압축한다.

 

“근데 왜 하필 아흔아홉 굽이야?”

“백 굽이라고 하면 허탈하잖아”

“올라가고 싶은 생각도 안 들 것 같아요.” Y가 거들었다.

“아흔 아홉은 허파에 바람 든 사내들을 부르는 고갯길.” 아내의 한탄조였다.

“고갯길을 바라보며 그 사내를 떠나보내는 여자의 한숨 숫자.” Y의 답가였다.

“밤늦게 그 사내가 회한에 젖어 터덜터덜 돌아오는 길.” 그가 목소리를 깔았다.

“에이!” 아내와 Y가 동시에 조소를 보냈다.

“야유를 해도 어쩔 수 없어.” 그는 흰 선을 내려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지금 우리는 몇 번째 굽이를 돌고 있는 거지?” - P 169 중에서

 

채워져서 미리 기를 꺾지 않아 기어오르도록 하지만, 이 유혹이 한숨과 회한의 길인 것이 인생이란 선문답(禪問答)일 것이다. 그런데 남자의 중얼거림이 눈길을 끈다. 누가 뭐라 해도 인생이 그런 것이란 걸 부정할 수 없는 것 아닌가라는 소심한 항변일 것이다. 내 마음 나도 모르겠네, 게다가 지금 어디쯤 인생굽이를 돌고 있는 줄. 결국 이 시니컬한 푸념 자체가 공감이 되고 위로가 되는 것이니, 소설의 시작을 떫게 읽어나가던 시선이 슬그머니 쑥스러워지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어느새 조탁(彫琢)되지 않은 일상의 언어들이 삶의 모습들을 더욱 생생하게 보여주는 문체에도 더욱 정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도 고백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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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고코로
누마타 마호카루 지음, 민경욱 옮김 / 서울문화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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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가의 어떤 작품이든 지지해주고픈 심정이 든다. 늦깎이가 주는 선입견을 일거에 차버리는 공력(功力)을 쌓아온 지난한 노력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고, 도덕적 혐오의 행위가 대체 어떻게 따뜻한 온기와 사랑을 지닐 수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기에 그러할 것이다. 인간에 대한 이 낯선 이해와 발견에 도덕적 이성이 당혹스러워하면서도 매혹되는 것은 가히 작가의 역량이라 말할 밖에 도리가 없다.

 

한편 무엇을 훔쳐보는 관음증적 욕구에 내재된 비틀린 부정(不正)에도 불구하고 이 욕망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무엇이 분명 있다. 그래서 남의 일기를 보거나 누군가의 고백을 듣는 것은 알지 못할 쾌락을 준다. 아마 그것은 당초에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위한 행위가 아니라 자신만을 위한 것이기에 거짓이 개입할 까닭이 없어, 진실이거나 진실에 가까우리라는, 신뢰할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진실의 장에서 살인과 같은 뒤틀린 정서를 발견하게 된다면 그 두려움과 일시에 깨져버리는 안녕의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 가능치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결혼을 약속한 여자가 어느 날 감쪽같이 사라져 실의에 잠긴 청년에게 아버지는 말기 암 진단을 받고, 곧 이어 어머니는 교통사고로 숨지는 가슴 아픈 사건이 연잇는다. 수술을 거부한 채 묵묵히 죽음의 시간을 기다리는 아버지를 뵈러간 어느 날, 청년은 낯익은 가방과 자른 머리카락 뭉치를 발견하게 되고, 이것은 어린 시절 입원치료 후 집에 돌아왔을 때 낯설기만 했던 엄마의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 이어 발견된 노란 봉투 속 4권의 일기장을 넘기기 시작한다. 성별조차 구분할 수 없는 아이의 음울하고 표정 없는 살의와 살인이 여과 없이 기록된 일기, 아니 애써 소설이라 부르고 싶을 살인록(殺人錄)을 마주한다.

 

일기는 죽음이란 평온의 매혹을 떨치지 못하는 애초에 심리적 안정 기제를 지니지 않은 아이의 살인 고백이 이어지고 있다. 아이는 자신에게 결여된 이 정신의 안정 기제를‘유리고코로’라 명명한다. 유년 시절 마음의 위로와 친구가 되어준 인형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아이는 죽음의 안락과 평온에서 유리고코로를 느끼게 되고, 살인을 하기 시작한다. 타인의 죽음이 만들어내는 고요가 결핍된 안정을 가져다주는 것. 일기의 의도를 가늠할 수 없는 청년은 일기 속 아이의 실체에 멈출 수 없는 무엇, 자신과의 희미한 관련을 지각한다. 이 인물은 아버지인가? 어머니인가? 아님 어린 시절 바뀌었다고 생각한 또 다른 어머니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누군가의 소설 습작에 불과한 것인가?

 

소설은 이처럼 이 흐릿하고 음침한 고백에도 모순되게 살인자에 연민을 보내게 되는 당혹의 이야기인 일기를 통해 기록자의 살인 행적과 그 사유들, 혹독한 삶의 시련과 사랑을 알게 된 이후의 절절한 자기성찰, 죽음을 통한 재생의 애절함이 쉬이 외면할 수 없는 동정과 공감의 유혹으로 끌어들인다. 여기에 과거의 기록인 일기와 병행하여 현실의 청년과 아버지, 형제, 사라진 연인, 재정적 압박을 겪으며 교외에 운영하는 청년의 애견 카페와 종업원을 중심으로 기록을 보충하고 가족의 사랑과 유대를 견고하게 드러낸다.

 

네 권의 일기가 읽혀지는 과정에서 마주하게 되는 몇 차례의 전환적 사건들 - 어린 시절의 살인행위의 간접적 희생자와의 우연한 조우, 온전히 진실한 배려의 만남과 결혼, 사랑을 알게 되고 그 행복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죽음이 요구되는 불안한 현실 등 - 과, 이에 못지않은 청년의 현실적 삶에서 벌어지는 불가피한 살의와 미지의 살인까지 더해져 소설은 사건들로 풍부해지고 그 이면의 진실을 쫓는데 더욱 안달을 부추긴다. 사라진 연인과의 재결합은 이루어질까? 일기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청년의 어머니는 그의 기억처럼 바뀐 것일까? 그것은 어떤 의미가 되는 것일까? 와 같은 구조적 매혹과 더불어 손상된 정신에 희생된 인간에게 마음의 평화와 인간에 대한 온기를 돌려줄 수 있는 것은 정말 무엇인지, 사랑이 왜 고귀한 것인지, 가족의 유대란 살아가는 데 무엇인지를 느끼게 해주는 내용적 매력까지 치밀하고 안정된 조화를 보여준다. 꽤 오래 기억될 것 같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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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왕의 고뇌
에밀 아자르 지음, 김남주 옮김 / 마음산책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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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바람이 분다. ~ 오늘 인생의 장미를 꺾어라!”

 

이 작품은 작가와 관련해서 그의 늙음과 죽음에 대한, 특히 자살로 생을 마감한 말년에 대한 의식세계를 엿보게 하는 특별한 관심을 자극한다. 작중의 기성복 바지의 제왕인 여든 네 살 ‘솔로몬’의 늙음에 대한 들끓는 분노와 저항, 그리고 화자인 택시운전사이자 수리공인‘장(자노)’의 자선과 구원의 왕이 되고자 함은 결합하여 죽음에 대한 깨달음, 아니 삶에 대한 이해의 완결을 의미하고자 했던 것 같다. 이 두 인물의 혼합체가‘로맹가리’, 바로 작가 자신이었으리라고 믿고 싶어진다는 말이다.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진 과거의 가수인‘마드무아젤 코라’의 말처럼 “젊음이 너무 일찍 왔다가는 것 같아, 그렇게 쉰 살이 되고 습관을 바꿔야 하는 거지...”에서 노년의 구체적인 위기를 실감하게 된다. 제아무리 마음의 변화 없음을 강변할지라도 시간의 흐름이 새겨진 온 몸의 변화를 인지하는 세상 사람들과 세상은 바뀌어야 함을 종용한다. 그래서 늙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살아야 하는가, 또한 다가온 죽음이라는 운명을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가는 고뇌이고 또 고뇌이다.

 

솔로몬은 이름 없는 사람들, “태어나면서 고통이라는 기성복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종점에 이를 때까지 겸허히 입고 사는 사람들”의 불안을 어루만지는 구호전화를 운영한다. 여든 네 살의 노인은 이 행위를‘명예로운 무엇’을 위한 것이라 하지만, 청년 장의 생각처럼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는 건 그럼으로써 나 자신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즉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 시작되는 고뇌를 피하기 위한 행위일 수 있다. 그러나 생존을 위협받는 다른 종(種)을 생각하면 자신의 개인적 처지가 덜 불행해 보이는 것이 당연하듯이, 점차 인간적인 경의의 의미가 교만에 자리를 내주는 연민을 나누고자 하는 사심 없는 구원의 행위이기도 하다.

 

솔로몬의 제안으로 장은 이처럼 잊혀져가는 사람들에게 선물을 배달하고 급박한 절망을 어루만져주는 구호의 일에 참여하게 되고 한 때 가수였던 예순 네 살의 여인‘코라 라므네르’를 방문한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가수, 홀로 늙음을 온전히 마주해야하는 여자를 위해 장은

“위협적인 환경에 처한 종들을 보호하는 것과 같은 그런 감정”으로 도움을 시작한다.

그러나 망각이라는 부당함에, “덧없음과 먼지, 바람과 같은” 삶의 고뇌를 위로하기위한 장의 방문은 코라에게 예사로운 것이 아니다. “동물적인 자력(磁力)”을 발산하는 청년의 우호적 예의는 한낱 노인이 아니라 여자로서의 억압되었던 불씨를 당기게 한다.

 

여기서 소설 속 인물들, 구호사업을 하는 솔로몬, 사회가 망각한 사람들을 도우려는 장, 청년 장을 통해 삶의 매력과 의욕을 바라보는 코라 모두 자신 대신 타인을 통해 꿈꾸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산다는 것, 늙는다는 것, 죽는다는 것의 무게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에게 정착하지 못하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말이 된다. 그것은 “모든 것을 잃을까봐 너무나도 두려워서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모든 것을 포기하는”, 즉 고뇌를 시작하지 않기 위해서라는 장의 자기해석과 일치한다. 그래서 이들이 타인을 통해서 꿈꿀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것, 자기 자신의 존중과 승인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것은 이 소설의 물음이자 논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이에 대한 답변을 오만하게 몇 마디로 정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분노, 항변, 전면적인 반항에는 희생말고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말처럼 삶과 늙음과 죽음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잘 설명하지는 못할 것이다. 자기 삶의 주장을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것이 지대하다면 너무 우울하지 아니한가? 그래서 인생에서는 타협해야 하고 부분적으로 수리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장의 주장은 나이 들어 고집스러워진 삶의 시선을 바꾸어야 하는 용기와 자세를 일깨운다. 그리고 이것들을 지탱하는 가치로서 자신보다 상대방의 안녕을 원하고 그에게 헌신하고자 하는 것, 어떤 가치에 대한 사심 없고 깊은 집착이라는 사랑(Amour)을 실천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방향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면 포틀래치(Portlach), 즉 신성한 성격의 파괴나 증여라는 지고의 원리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발견은 로맹가리의 죽음을 해석하는 단서처럼 보인다. 조르주 바타이유가 북미 인디언의 증여메커니즘인 포틀래치를 인용하면서 과잉의 신성한 소비, 즉 죽음의 신성성을 말하고, 그리고 두 개체의 하나로의 결합인 사랑의 행위가 곧 죽음의 다른 이면임을 보았듯이 죽음은 신의 세계로의 도달임이라 느꼈으리라는 것이다. 자연사라는 형편없는 삼 등급 죽음을 회피하려는 이 소설 솔로몬처럼, 최고의 죽음을 생각했으리라 여겨지는 대목이다. 이것은 인생에 대한 멋진 수리를 완료하고, 세상을 채우는 허접한 이론들과 끝나버린 이성을 넘어 자기만의 언어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아래 인용문장과 같은 장의 포부와 연결할 수 있을 것 같다.

 

“처음부터 자연에서 쓸모를 잃어버린 모든 구조 요청에 응답하고, 나의 전설적인 후의로 그들의 피해를 보상해주고 그들에게 정의를 돌려주리라. 나는 솔로몬 왕이 되리라. 바지의 제왕. 기성복의 제왕도 아니고 아이를 두동강 내라는 고대의 왕도 아닌 명실상부한 진짜 솔로몬 왕이 되리라. 나는 사태를 장악하고 그들의 머리위에 자선과 구원의 비를 내리리라.”

 

이처럼 소설은 늙음, 그리고 죽음을 이해하는 것, 그 삶을 수리하고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진솔한 목소리를 지닌 청년을 매개로 순수하지만 사색적이고, 코믹스럽지만 지적인 문장으로 보통 사람들의 불안과 고뇌를 위무해준다. 평범치 않았던 작가의 면모 때문에 단어 하나조차도 예사롭지 않게 읽게 하며, 이를 돕기라도 하려는 듯 그의 어느 작품보다 따뜻하고 유쾌한 문장과 이야기가 일품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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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2-06-27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 정말 좋군요!! 저도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데 이 리뷰를 읽으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초반이라 잘 안 읽혔는데 "그의 어느 작품보다 따뜻하고 유쾌한 문장과 이야기가 일품인 작품이다."라고 하시니 감동하여 열심히 읽어봐야겠어요.^^
아참! 초면에 인사도 안 드리고,,,^^; 반갑습니다.^^

필리아 2012-06-28 07:22   좋아요 0 | URL
네, 추상적 표현이 배제된 작품이어서 한층 읽기가 수월했던 것 같습니다. 서툰 감상의 표현에 공감의 말씀 고맙습니다. 즐거운 독서가 되시기를...^*
 
디너 매드 픽션 클럽
헤르만 코흐 지음, 강명순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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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편견과 이기심, 폭력의 행사를 내면의 소리에 충실했다는 진솔함만으로 정당화하고, 그리고 도덕적 동의를 구하는 메스꺼운 얘기다. 더구나 자의식에 대한 도전과 자기 불편을 야기하는 대상에 대해 참지 못하는 기형화된 현대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물론 그 도덕적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넘기면서. 눈에 보이는 현상에만 익숙한 사람들은 그 현상이 왜 발생했는지, 자신은 물론 공동체에게는 책임이 없는 것인지, 개인의 생명과 자유 등 사람으로서 지켜야할 최후의 가치와 같은 본질을 생각지 않는다.

 

왜 노숙자가 존재하고, 왜 기아와 가난에 허덕이는 저개발국이 있는지, 유색인종에 대한 왜곡된 학습이 근절되지 않는지에 대한 성찰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저 불쾌하고 거북하며 자신들의 영역에서 배제시키고 싶은 대상일 뿐이라는 천박한 주류의식에 매몰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을 놓고 마치 가족의 연대와 공공의 정의가 갈등하는 냥 그 본질을 희석하는 것은 진실을 호도하는 것이다. 어떠한 이유로도 타인의 생명을 자기이해만으로 거둘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이 양보할 수 없는 도덕적 진리이다. 이것을 훼손하는 논리는 무엇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는 것 아닌가?

 

1. 타락하는 현대의 가족이기주의

 

아이가 축구공으로 상점의 유리를 깼다. 이때 부모의 행위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아이의 손을 붙잡고 상점으로 달려가 깨진 유리 값을 내던지며 대가를 치렀으니 정당하다고 상점주인에게 큰소리치는 부모여야 할까? 아니면 정중하게 깨진 유리의 문제를 넘어서 아이의 부주의한 행동과 생업에 불편을 끼친 점을 사과하는 모습을 보이는 부모여야 할까? 소설의 화자인 열다섯 살 사내아이의 아비인‘파울’은 돈을 내던지며 아이의 부주의를 항변하는 상점주인에게 폭력의 위협을 가하면서 그것이 자기 아이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하는 자이다. 오늘 우리 사회에도 이런 부모들로 넘쳐나고 있다. 세상에는 물질이외에 어떠한 것도 보상할 가치가 있는 것은 없다고. 상처받는 마음도, 부패하고 부도덕한 정신도 없다고 말이다. 아이의 도덕성은 일차적으로 부모로부터 학습된다.

 

십대들의 파티가 끝나고 귀가하던 중 사촌지간인 세 명의 아이들은 맥주파티를 더 즐기기 위한 현금 인출을 위해 심야에 무인현금출납기가 있는 부스에 들어서려하지만 혐오스런 악취를 풍기며 부스를 차지하고 잠든 노숙자를 발견한다. 강제로 끌어내려다 노숙자의 욕설과 저항을 받은 두 소년은 쓰레기 덩어리와 석유통을 던지는 등 폭력을 가하고 마침내 불을 질러 살해한다. 노숙자의 사망을 확인한 아이들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이어진다. 인출기 사용에 장애가 된 노숙자, 즉 자신들의 쾌락을 방해하는 존재는 생명의 가치가 없는 것이고, 이를 처단한 자신들의 행위는 정당한 보상이라는 것이다.

 

소설은 노숙자 살해에 가담했던 사촌형제인 중산계층의 두 백인 아이와 이들의 행위를 거절한 사촌이 된 아프리카에서 입양된 흑인 아이 부모들의 의식과 행위를 통해 도덕적 정의를 전개해 나간다. 그러나 소설은 모두(冒頭)에서 지적하였듯이 가족연대와 공공선의 충돌이란 딜레마의 장으로 얘기를 이끈다. 이것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이란 불가침의 권리를 은폐하는 그릇된 담론이다. 내 편의와 욕구에 방해가 되는 누구라도 죽일 수 있다면 이 사회란 것이 과연 존재 가능할까? 아마 서로 죽이고 죽이는 보복의 연속으로 오래전에 인류는 멸망했을 것이다. 이것은 가족과 사회가 벌이는 도덕 갈등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아이에게 폭력의 정당성을 가르치는 부모. 자신들에게 불편과 불이익의 환경을 제공하는 대상에게 가하는 폭력은 정당하다는 것인데, 타인의 신체와 생명 보호라는 최우선적 가치에 대한 인식의 강화로 인해 법률에서조차 사력구제(私力救濟)는 인정하지 않는 것이 현실임에도 이보다 더 나아가 자기쾌락을 위해 타인을 향한 자의적인 폭력의 행사를 말하는 것은 도덕적 퇴보도 이만저만이 아니라 할 수 있다.

 

소설은 노숙자를 살해한 자신의 아이들에 대한 도덕적 의무를 두고 벌이는 두 가족의 부모들이 보이는 가치의 갈등이라 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소위 주류의 대열에서 이탈한 존재인 노숙자의 죽음은 사회가 주목하는 사건이 아니니 잊혀질 것이라는 전제와 아이에 대한 사랑이란 명분하에 은폐하자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사회에 진실을 밝히고 아이들에게 타인의 살해라는 반인륜적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하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끊임없이 가족연대의 가치우선을 정당화하기 위해 도덕적 책무를 말하는 인물에게 수상 당선을 앞둔 정치가라는 이미지를 덧씌움으로써 정치적 이해를 위해 벌이는 쇼라고 본질을 왜곡시키고 있다. 반대의견을 호도한다고 자신의 말이 진실이 된다는 논리인데 이처럼 터무니없는 몰지각과 무지, 부도덕함을 대면하는 것은 이만저만 곤혹스런 것이 아니다.

 

2. 도덕성을 희석시키는 인종주의와 계급주의

 

소설에서 또 하나 주목케 하는 것은 아프리카에서 입양한 흑인아이에 대한 인식이다. 입양을 박애주의와 도덕성을 입증하는 과시적인 쇼맨십으로 격하시키고, 피부색의 다름과 빈곤국 출신이라는 것이 곧 도덕성의 결여라고 연결하는 편견이다. 중산층과 노숙자가 동등한 생명으로서 부인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종 또한 도덕적, 문화적, 지적 수준에서 다르다는 인식을 배경으로 한다.

즉 19세기 유럽의 우생학에 의한 서구백인의 극단적인 편협성으로의 퇴행인 인종주의가 부활되고, 물신에 의한 화폐적 계급주의로 변질되는 현대 자본주의의 폐해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어떤 도덕적 이슈가 되는 문제에 인종주의와 계급주의의 편견을 덧씌워 상황논리를 조작하는 것이 지배적 위치에 있는 자들이 보이는 일반적 성향이다. 아마 이것이 지금의 유럽 주류사회의 내면에 잠복하고 있는 실체인지 모르겠다. 이 소설이 유럽 독서시장의 장기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도 일종의 묵시적 동의와 공감의 표시라해도 그리 잘못된 판단은 아닐 것이다. 두 백인 아이가 사람을 살해하고 어떠한 죄의식도 없는 본질적 문제보다는 이 아이들이 노숙자를 살해하는 장면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하여 아이들을 협박한 입양된 흑인아이의 부도덕성을 오히려 중대한 부도덕이라 비난하는 파울과 그의 아내의 주장이 바로 그러함을 입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급기야 수상 입후보를 포기하는 기자회견을 자처하면서까지 자신의 아들이 살해 공범임을 밝히고 도덕적 책무를 다하려는 사람을 급습하여 잔혹한 폭력을 행사하는 파울내외의 행위는 오늘의 붕괴된 도덕성의 현실을 보여준다. 이로서 일종의 도덕 고백을 저지한 이후에 파울의 사건 해석은 더욱 자기변호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고착화한다. 얼굴에 지워지지 않는 흉한 상처를 안은 수상 입후보자의 인기하락으로 낙선 된 것을 정의의 귀결인 냥, 가족 연대의 승리인 냥, 이것이 도덕적 딜레마의 궁극적 해결이자 진리인 냥 말하는 것인데, 어느덧 타인의 생명에 대한 본원적 가치는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이 소설은 잘못된 물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의 존엄성을 물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의 불가침적 가치에 대해 물어야 하는 것이다. 결코 가족연대과 공공성, 사회정의 대결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오늘의 주류 유럽인들의 도덕인식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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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4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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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우주만물의 은유. 그 안에 새로움의 열망과 치열한 자기 응시가 있다. 이것을 끊임없이 시도하는 이들이 시인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시인이 될 수 있다. 이미 만물의 하나이니 말이다. 다만 이 새로움을 향한 추구를 하지 않기에 시인이 아닐 뿐이다. 현실에 안주하고, 체제에 순응하면서 길들여짐에 무감해졌기에, 새로움을 말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사회라고 하는 시스템이 정한 공통의 동일한 언어만을 되풀이 하는데 은유가 개입할 여지가 있겠는가? 그러한 삶에 새로움의 감동, 삶의 진지한 열정이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일 게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은유를 말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면 우린 자기만의 고유한 삶을 살아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만의 삶의 방식, 유일한 자기만의 응시, 그것이 새로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다양한 새로움 들이 발산하는 그 찬연한 감동이 세상을 에워싼다면 우리의 귀는 기뻐서 활짝 열릴 것이고, 온 몸의 세포들은 긴장으로 발갛게 달아올라 터지기 일보직전이 될 것이다. 아마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사랑스러워 보일 것이고, 거기에 어떤 폭력과 추오(醜汚)가 있겠는가?

 

태평양 연안의 작은 해안 마을, ‘이슬라 네그라’의 소박한 풍경 속에서 위대한 지성, 시인 네루다와 우편배달부 청년 마리오가 나누는 삶의 교감은 거대한 메타포가 되어 시가 되고, 새로운 감동의 언어가 되어, 비록 "열광적으로 시작해서 침울한 나락으로 떨어지며 끝을 맺는”다는 작품에 대한 작가의 서문에도 불구하고 행복감에 젖어들게 한다. 물론 악명 높았던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로 민중의 자유가 말살되고, 더 이상 시인으로서의 삶이 불가능한 암울한 시대의 도래, 네루다의 쓸쓸한 죽음이 우리를 침울하게 하지만 보잘것없는 어촌의 순박한 청년이 메타포를 말하고 시인의 삶을 살아내는 이야기는 분명 환한 기쁨을 주는 것이다.

 

네루다에게 우편물을 배달하던 어느 날, 차마 네루다의 집을 떠나지 못하고‘돌부처’가 되어 우두커니 서있던 마리오와 네루다의 익살스런 대화는 메타포의 시작을 알린다.

 

"무슨 일 있나?"

"네?"

"전봇대처럼 서 있잖아"

"창처럼 꽂혀 있다고요?"

"체스의 탑처럼 고즈넉해."

"도자기 고양이보다 더 고요해요?"

 

마리오의 말은 이미 새롭다. 사회가 규정한 일상의 언어를 벗어나 자기만의 언어로 말하고 있다. 얽매임에 풀려나 자유로워진 정신의 모습 아닌가? 독창적인 언어, 그만의 정신, 그래서 “나도 시인이나 되었으면.”하는 청년의 말에 네루다는 “계속 우체부를 하는 게 더 독창적이라고.”격려하는 것 아니겠는가? 정작 독창적 언어와 삶을 말하는 시인들이 없는 칠레에서 네루다는 정말의 시인을 알아보았던 것일 게다.

      

그리고 주점 여주인의 딸‘베아트리스’에 매혹된 마리오의 열정은 아예 메타포로 도배질을 한다. 메타포는 독특함, 상상력을 자극하는 자유로움과 새로움으로 그 어떤 것보다 달콤하게 처녀를 휘어잡는다.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우체부의 혀에 현혹된 딸로부터 마리오를 떨쳐내려는 주점 여주인과 마리오의 갈등은 그야말로 언어의 재치와 해학의 향연이 되어 펼쳐진다. 급기야 눈을 피해 조우한 마리오와 베아트리스의 열정적 사랑의 묘사는 해학의 메타포들로 관능을 넘어 기쁨의 지고함으로 승화될 정도이다. 베아트리스에 대한 열망은 그저 노예가 되기를 바라다 못해, “침마저도 정액으로 변화시키기 시작했다.”고 할 정도이니 욕망의 불꽃이 어디까지 당겨졌는지 여러 말이 필요가 없어진다. 점잔빼는 나조차도 상황에 대한 상상과 공감으로 사위에 아랑곳없이 웃어 재꼈으니 말이다.

 

이런 표현은 또 어떨까? “너무도 굳게 침묵을 지켰기에 자신과 비교하면 돌멩이들까지도 수다쟁이 같았다.” 그 침묵이 얼마나 굳고 차갑고 무거웠는지. 이처럼 메타포는 추함, 불안함, 수치심, 은밀함, 탐욕스러움, 등등 온갖 부정의 형상들이 사라지고 유쾌함과 아름다움, 행복감, 진지함, 진솔함을 드러낸다. 투명한 본질의 드러냄, 바로 그것일 것이다. 누군가 정의한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았던 본래의 모습을 보는 것, 그렇기에 새로운 것이고, 진실한 것이며 영원한 언어가 된다.

 

시인이 되는 것, 시인의 언어인 시, 이것은 이처럼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고, 새로운 것이며, 온전한 독창성이자,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자기만의 삶, 즉 자유인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시를 억압하고, 시인의 삶을 방해한다. 1973년의 칠레만 그러할까? 여전히 21세기 우리의 사회도 시인의 언어와 모든 사람들이 시인이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불타는 인내를 지녀야만 빛과 정의와 존엄성이 충만한 찬란한 도시를 정복할 것입니다. 이처럼 시는 헛되이 노래하지 않습니다.”라는 네루다의 노벨문학상 수상연설의 마지막 문장은 시인이라는 치열한 단독성의 삶을 제시한다. 인류의 위대한 시인과 평범한 소시민으로서의 우편배달부의 변화하는 삶의 이야기가 들려주는 진하디 진한 감동에 몸과 정신이 온전히 사로잡힌다. 이 감동은 결코 낭만적 감수성으로서의 감상이 아니다. 세상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숭고한 메타포로서의 치열함과 저항의 정신에 대한 것이다. 오! 십 사년 걸려 쓴 소설. 납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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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2-06-16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도 책도 슬프고 웃기고 아름다웠는데 리뷰를 읽으면서도 그런 감정 여전합니다. 이 작품을 읽고 작가의 작품을 더 보고 싶었졌었어요. 번역된 작품이 더 있는지 확인해봐야겠네요.

필리아 2012-06-16 13:51   좋아요 0 | URL
<빅토리아의 발레>이외에는 이렇다할 국내에 소개된 또다른 스카르메타 작품이 없는것 같습니다. 네루다의 시집조차도 빈곤하기 짝이없죠. 우리 출판시장의 한계인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