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너 매드 픽션 클럽
헤르만 코흐 지음, 강명순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편견과 이기심, 폭력의 행사를 내면의 소리에 충실했다는 진솔함만으로 정당화하고, 그리고 도덕적 동의를 구하는 메스꺼운 얘기다. 더구나 자의식에 대한 도전과 자기 불편을 야기하는 대상에 대해 참지 못하는 기형화된 현대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물론 그 도덕적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넘기면서. 눈에 보이는 현상에만 익숙한 사람들은 그 현상이 왜 발생했는지, 자신은 물론 공동체에게는 책임이 없는 것인지, 개인의 생명과 자유 등 사람으로서 지켜야할 최후의 가치와 같은 본질을 생각지 않는다.

 

왜 노숙자가 존재하고, 왜 기아와 가난에 허덕이는 저개발국이 있는지, 유색인종에 대한 왜곡된 학습이 근절되지 않는지에 대한 성찰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저 불쾌하고 거북하며 자신들의 영역에서 배제시키고 싶은 대상일 뿐이라는 천박한 주류의식에 매몰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을 놓고 마치 가족의 연대와 공공의 정의가 갈등하는 냥 그 본질을 희석하는 것은 진실을 호도하는 것이다. 어떠한 이유로도 타인의 생명을 자기이해만으로 거둘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이 양보할 수 없는 도덕적 진리이다. 이것을 훼손하는 논리는 무엇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는 것 아닌가?

 

1. 타락하는 현대의 가족이기주의

 

아이가 축구공으로 상점의 유리를 깼다. 이때 부모의 행위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아이의 손을 붙잡고 상점으로 달려가 깨진 유리 값을 내던지며 대가를 치렀으니 정당하다고 상점주인에게 큰소리치는 부모여야 할까? 아니면 정중하게 깨진 유리의 문제를 넘어서 아이의 부주의한 행동과 생업에 불편을 끼친 점을 사과하는 모습을 보이는 부모여야 할까? 소설의 화자인 열다섯 살 사내아이의 아비인‘파울’은 돈을 내던지며 아이의 부주의를 항변하는 상점주인에게 폭력의 위협을 가하면서 그것이 자기 아이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하는 자이다. 오늘 우리 사회에도 이런 부모들로 넘쳐나고 있다. 세상에는 물질이외에 어떠한 것도 보상할 가치가 있는 것은 없다고. 상처받는 마음도, 부패하고 부도덕한 정신도 없다고 말이다. 아이의 도덕성은 일차적으로 부모로부터 학습된다.

 

십대들의 파티가 끝나고 귀가하던 중 사촌지간인 세 명의 아이들은 맥주파티를 더 즐기기 위한 현금 인출을 위해 심야에 무인현금출납기가 있는 부스에 들어서려하지만 혐오스런 악취를 풍기며 부스를 차지하고 잠든 노숙자를 발견한다. 강제로 끌어내려다 노숙자의 욕설과 저항을 받은 두 소년은 쓰레기 덩어리와 석유통을 던지는 등 폭력을 가하고 마침내 불을 질러 살해한다. 노숙자의 사망을 확인한 아이들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이어진다. 인출기 사용에 장애가 된 노숙자, 즉 자신들의 쾌락을 방해하는 존재는 생명의 가치가 없는 것이고, 이를 처단한 자신들의 행위는 정당한 보상이라는 것이다.

 

소설은 노숙자 살해에 가담했던 사촌형제인 중산계층의 두 백인 아이와 이들의 행위를 거절한 사촌이 된 아프리카에서 입양된 흑인 아이 부모들의 의식과 행위를 통해 도덕적 정의를 전개해 나간다. 그러나 소설은 모두(冒頭)에서 지적하였듯이 가족연대와 공공선의 충돌이란 딜레마의 장으로 얘기를 이끈다. 이것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이란 불가침의 권리를 은폐하는 그릇된 담론이다. 내 편의와 욕구에 방해가 되는 누구라도 죽일 수 있다면 이 사회란 것이 과연 존재 가능할까? 아마 서로 죽이고 죽이는 보복의 연속으로 오래전에 인류는 멸망했을 것이다. 이것은 가족과 사회가 벌이는 도덕 갈등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아이에게 폭력의 정당성을 가르치는 부모. 자신들에게 불편과 불이익의 환경을 제공하는 대상에게 가하는 폭력은 정당하다는 것인데, 타인의 신체와 생명 보호라는 최우선적 가치에 대한 인식의 강화로 인해 법률에서조차 사력구제(私力救濟)는 인정하지 않는 것이 현실임에도 이보다 더 나아가 자기쾌락을 위해 타인을 향한 자의적인 폭력의 행사를 말하는 것은 도덕적 퇴보도 이만저만이 아니라 할 수 있다.

 

소설은 노숙자를 살해한 자신의 아이들에 대한 도덕적 의무를 두고 벌이는 두 가족의 부모들이 보이는 가치의 갈등이라 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소위 주류의 대열에서 이탈한 존재인 노숙자의 죽음은 사회가 주목하는 사건이 아니니 잊혀질 것이라는 전제와 아이에 대한 사랑이란 명분하에 은폐하자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사회에 진실을 밝히고 아이들에게 타인의 살해라는 반인륜적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하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끊임없이 가족연대의 가치우선을 정당화하기 위해 도덕적 책무를 말하는 인물에게 수상 당선을 앞둔 정치가라는 이미지를 덧씌움으로써 정치적 이해를 위해 벌이는 쇼라고 본질을 왜곡시키고 있다. 반대의견을 호도한다고 자신의 말이 진실이 된다는 논리인데 이처럼 터무니없는 몰지각과 무지, 부도덕함을 대면하는 것은 이만저만 곤혹스런 것이 아니다.

 

2. 도덕성을 희석시키는 인종주의와 계급주의

 

소설에서 또 하나 주목케 하는 것은 아프리카에서 입양한 흑인아이에 대한 인식이다. 입양을 박애주의와 도덕성을 입증하는 과시적인 쇼맨십으로 격하시키고, 피부색의 다름과 빈곤국 출신이라는 것이 곧 도덕성의 결여라고 연결하는 편견이다. 중산층과 노숙자가 동등한 생명으로서 부인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종 또한 도덕적, 문화적, 지적 수준에서 다르다는 인식을 배경으로 한다.

즉 19세기 유럽의 우생학에 의한 서구백인의 극단적인 편협성으로의 퇴행인 인종주의가 부활되고, 물신에 의한 화폐적 계급주의로 변질되는 현대 자본주의의 폐해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어떤 도덕적 이슈가 되는 문제에 인종주의와 계급주의의 편견을 덧씌워 상황논리를 조작하는 것이 지배적 위치에 있는 자들이 보이는 일반적 성향이다. 아마 이것이 지금의 유럽 주류사회의 내면에 잠복하고 있는 실체인지 모르겠다. 이 소설이 유럽 독서시장의 장기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도 일종의 묵시적 동의와 공감의 표시라해도 그리 잘못된 판단은 아닐 것이다. 두 백인 아이가 사람을 살해하고 어떠한 죄의식도 없는 본질적 문제보다는 이 아이들이 노숙자를 살해하는 장면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하여 아이들을 협박한 입양된 흑인아이의 부도덕성을 오히려 중대한 부도덕이라 비난하는 파울과 그의 아내의 주장이 바로 그러함을 입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급기야 수상 입후보를 포기하는 기자회견을 자처하면서까지 자신의 아들이 살해 공범임을 밝히고 도덕적 책무를 다하려는 사람을 급습하여 잔혹한 폭력을 행사하는 파울내외의 행위는 오늘의 붕괴된 도덕성의 현실을 보여준다. 이로서 일종의 도덕 고백을 저지한 이후에 파울의 사건 해석은 더욱 자기변호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고착화한다. 얼굴에 지워지지 않는 흉한 상처를 안은 수상 입후보자의 인기하락으로 낙선 된 것을 정의의 귀결인 냥, 가족 연대의 승리인 냥, 이것이 도덕적 딜레마의 궁극적 해결이자 진리인 냥 말하는 것인데, 어느덧 타인의 생명에 대한 본원적 가치는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이 소설은 잘못된 물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의 존엄성을 물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의 불가침적 가치에 대해 물어야 하는 것이다. 결코 가족연대과 공공성, 사회정의 대결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오늘의 주류 유럽인들의 도덕인식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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