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아홉 작가정신 소설락 小說樂 2
김도연 지음 / 작가정신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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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나도 모르겠네.’식의 하소연이랄까? 그렇게 된 까닭이 세상의 무분별한 의욕들이 되었든, 인간의 내재적 한계이든, 혹은 그네들이 뿜어대는 광기의 혼란이든 여하튼 어쩌지 못하겠다는 얘기인데, 그래서 어떻다는 것일까? 그저 동류(同類)로서의 공감이면 족하다는 것일까? 아님 이 원인들의 속성이 무엇인지 알아보자는 것인가? 그래서 어렴풋이 알아냈기로 인간이 손을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면 또 어쩌겠는가? 그냥 얘기를 즐기고 너나 나나 같지 아니한가? 라고 푸념을 나누자는 말인가?

 

소설은 이러한 시니컬한 의문들을 연잇게 한다. ‘아흔아홉’이란 헤아리기에는 많은 것 같고, 무언가 여운이 남는 수가 발휘하는 영감이 이 소설로 유혹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숫자에 감추어진 결점을 보지 못한 것은 순전히 내 탓일 것이다. 장점이 곧 단점이 되어 허무하고 공허하고 알 수 없는 것이 되니 말이다. 지금은 터널이 뚫려 구불구불 대관령 고개를 넘어가지 않아도 돼서 아흔아홉 고개가 옛 이야기가 되어버린 그곳이 소설의 배경이다. 하기 좋은 말로 설렁설렁 굽이굽이 고갯길을 넘어가며 강원도 산세와 풍광을 보는 것이 어찌 고달프기만 한 것이냐고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차량으로 오르내려도 그 답답함과 짜증을 이겨내는데 족히 시간이상이 걸리는데 즐거운 고개이기만 하겠는가? 더구나 소달구지나 봇짐을 지고 걷는 옛사람들에게는 더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새로 뚫린 터널과 산 중턱과 중턱을 잇는 수직의 교각이 죽 늘어서 이젠 직선의 도로를 그냥 내달릴 수 있다. 그래서 동과 서를 분리하던 아흔아홉 구비 대관령 고개가 그렇게 어떤 분절을 상징하는 기호의 자리를 고수하지 못한다. 소설은 바로 이 새로운 길과 옛 길들이 우리의 삶에 들어 앉아 시간의 다름, 인식의 다름, 관념의 다름으로 안절부절 못하게 하는 것에 대한 사념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인생이란 것이 이것인가, 저것인가와 같이 선명하다면 무슨 근심이 있고 불안이 있겠는가? 서로 다른 시간, 그 속도의 감각이 여전히 우리들 몸에 새겨진 태고의 시간과 갈등하고 충돌한다. 우린 그래서 방황한다.

 

대관령 옛길과 새 길이 바라보이는 자락에서 서울을 오가는 대학 강사인 남자가 있다. 어느 날 늦은 귀가에 아내의 부재를 발견한다. 그녀가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춘 것이다. 아내가 실종되었다는 얘기다. 이런 남자에게 Y라는 애인이 있다. 아내 눈을 피해 만나는 여자. 새 길은 남자의 바람기에 일조하는 길이다. 휙 달려갔다, 휙 달려오는 길. 사라진 아내는 남자의 외도 길이 달가울 리 없을 것이니 새 길은 삶의 안정을 방해하는 파괴의 기호인 셈이다. 대관령 끝자락에서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 그 정적인 시간의 세계가 속도의 시대에 휘둘리기 시작한 것이다.

 

남자는 실종된 아내를 찾아다니지만 적극적인 행위로서가 아니다. 그럼에도 아내를 기다린다. 그리고 Y의 몸을 생각한다. 정과 동, 빠름과 느림, 직선과 곡선의 혼화(混和)속에서 무엇이 삶의 답인지 식별할 수 없는 것이다. 남자는 아내가 부재한 집에서 홀로이, 때론 친구들과 어울려 술병을 쌓아간다. 이 기다림의 의식이 흐르고 일 년여가 지난 날 문득 아내가 집에 들어선다. 아무 말 없이 여자의 부재로 쌓인 묶은 얼룩들을, 마치 남자의 부정의 흔적을 찾아내 제거해버리려는 듯 꼼꼼히 씻어 내린다. 그리고 Y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전화 속 멀리에서 들려온다. 뱃속의 생명을 지워버린 여자의 흐느낌이.

 

오랜 침묵 끝에 집에 돌아온 아내와 남자의 대화는 너무 사실적이어서 비현실적이기조차 하다.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했느냐,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했느냐이다. 여자는 시인하고, 남자는 부인한다. 어렵다. 여자가 기대하는 답변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남자는?

여자는 남자의 애인 Y에게 세 사람이 함께하는 소풍을 제안하고, Y는 흔쾌히 수락하고 이들 셋은 산행을 한다. 두 여자는 자매처럼 손을 잡고 남자를 앞서 거닐고, 남자는 짐 가득한 배낭을 메고 뒤를 따른다. 이 비현실적인 장면이 사실은 우리네 인생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친다. 이걸 확인이라도 시켜주듯이 세 사람의 대화는 소설을, 아흔아홉 구불구불 인생길을 압축한다.

 

“근데 왜 하필 아흔아홉 굽이야?”

“백 굽이라고 하면 허탈하잖아”

“올라가고 싶은 생각도 안 들 것 같아요.” Y가 거들었다.

“아흔 아홉은 허파에 바람 든 사내들을 부르는 고갯길.” 아내의 한탄조였다.

“고갯길을 바라보며 그 사내를 떠나보내는 여자의 한숨 숫자.” Y의 답가였다.

“밤늦게 그 사내가 회한에 젖어 터덜터덜 돌아오는 길.” 그가 목소리를 깔았다.

“에이!” 아내와 Y가 동시에 조소를 보냈다.

“야유를 해도 어쩔 수 없어.” 그는 흰 선을 내려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지금 우리는 몇 번째 굽이를 돌고 있는 거지?” - P 169 중에서

 

채워져서 미리 기를 꺾지 않아 기어오르도록 하지만, 이 유혹이 한숨과 회한의 길인 것이 인생이란 선문답(禪問答)일 것이다. 그런데 남자의 중얼거림이 눈길을 끈다. 누가 뭐라 해도 인생이 그런 것이란 걸 부정할 수 없는 것 아닌가라는 소심한 항변일 것이다. 내 마음 나도 모르겠네, 게다가 지금 어디쯤 인생굽이를 돌고 있는 줄. 결국 이 시니컬한 푸념 자체가 공감이 되고 위로가 되는 것이니, 소설의 시작을 떫게 읽어나가던 시선이 슬그머니 쑥스러워지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어느새 조탁(彫琢)되지 않은 일상의 언어들이 삶의 모습들을 더욱 생생하게 보여주는 문체에도 더욱 정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도 고백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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