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고코로
누마타 마호카루 지음, 민경욱 옮김 / 서울문화사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작가의 어떤 작품이든 지지해주고픈 심정이 든다. 늦깎이가 주는 선입견을 일거에 차버리는 공력(功力)을 쌓아온 지난한 노력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고, 도덕적 혐오의 행위가 대체 어떻게 따뜻한 온기와 사랑을 지닐 수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기에 그러할 것이다. 인간에 대한 이 낯선 이해와 발견에 도덕적 이성이 당혹스러워하면서도 매혹되는 것은 가히 작가의 역량이라 말할 밖에 도리가 없다.

 

한편 무엇을 훔쳐보는 관음증적 욕구에 내재된 비틀린 부정(不正)에도 불구하고 이 욕망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무엇이 분명 있다. 그래서 남의 일기를 보거나 누군가의 고백을 듣는 것은 알지 못할 쾌락을 준다. 아마 그것은 당초에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위한 행위가 아니라 자신만을 위한 것이기에 거짓이 개입할 까닭이 없어, 진실이거나 진실에 가까우리라는, 신뢰할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진실의 장에서 살인과 같은 뒤틀린 정서를 발견하게 된다면 그 두려움과 일시에 깨져버리는 안녕의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 가능치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결혼을 약속한 여자가 어느 날 감쪽같이 사라져 실의에 잠긴 청년에게 아버지는 말기 암 진단을 받고, 곧 이어 어머니는 교통사고로 숨지는 가슴 아픈 사건이 연잇는다. 수술을 거부한 채 묵묵히 죽음의 시간을 기다리는 아버지를 뵈러간 어느 날, 청년은 낯익은 가방과 자른 머리카락 뭉치를 발견하게 되고, 이것은 어린 시절 입원치료 후 집에 돌아왔을 때 낯설기만 했던 엄마의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 이어 발견된 노란 봉투 속 4권의 일기장을 넘기기 시작한다. 성별조차 구분할 수 없는 아이의 음울하고 표정 없는 살의와 살인이 여과 없이 기록된 일기, 아니 애써 소설이라 부르고 싶을 살인록(殺人錄)을 마주한다.

 

일기는 죽음이란 평온의 매혹을 떨치지 못하는 애초에 심리적 안정 기제를 지니지 않은 아이의 살인 고백이 이어지고 있다. 아이는 자신에게 결여된 이 정신의 안정 기제를‘유리고코로’라 명명한다. 유년 시절 마음의 위로와 친구가 되어준 인형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아이는 죽음의 안락과 평온에서 유리고코로를 느끼게 되고, 살인을 하기 시작한다. 타인의 죽음이 만들어내는 고요가 결핍된 안정을 가져다주는 것. 일기의 의도를 가늠할 수 없는 청년은 일기 속 아이의 실체에 멈출 수 없는 무엇, 자신과의 희미한 관련을 지각한다. 이 인물은 아버지인가? 어머니인가? 아님 어린 시절 바뀌었다고 생각한 또 다른 어머니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누군가의 소설 습작에 불과한 것인가?

 

소설은 이처럼 이 흐릿하고 음침한 고백에도 모순되게 살인자에 연민을 보내게 되는 당혹의 이야기인 일기를 통해 기록자의 살인 행적과 그 사유들, 혹독한 삶의 시련과 사랑을 알게 된 이후의 절절한 자기성찰, 죽음을 통한 재생의 애절함이 쉬이 외면할 수 없는 동정과 공감의 유혹으로 끌어들인다. 여기에 과거의 기록인 일기와 병행하여 현실의 청년과 아버지, 형제, 사라진 연인, 재정적 압박을 겪으며 교외에 운영하는 청년의 애견 카페와 종업원을 중심으로 기록을 보충하고 가족의 사랑과 유대를 견고하게 드러낸다.

 

네 권의 일기가 읽혀지는 과정에서 마주하게 되는 몇 차례의 전환적 사건들 - 어린 시절의 살인행위의 간접적 희생자와의 우연한 조우, 온전히 진실한 배려의 만남과 결혼, 사랑을 알게 되고 그 행복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죽음이 요구되는 불안한 현실 등 - 과, 이에 못지않은 청년의 현실적 삶에서 벌어지는 불가피한 살의와 미지의 살인까지 더해져 소설은 사건들로 풍부해지고 그 이면의 진실을 쫓는데 더욱 안달을 부추긴다. 사라진 연인과의 재결합은 이루어질까? 일기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청년의 어머니는 그의 기억처럼 바뀐 것일까? 그것은 어떤 의미가 되는 것일까? 와 같은 구조적 매혹과 더불어 손상된 정신에 희생된 인간에게 마음의 평화와 인간에 대한 온기를 돌려줄 수 있는 것은 정말 무엇인지, 사랑이 왜 고귀한 것인지, 가족의 유대란 살아가는 데 무엇인지를 느끼게 해주는 내용적 매력까지 치밀하고 안정된 조화를 보여준다. 꽤 오래 기억될 것 같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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