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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왕의 고뇌
에밀 아자르 지음, 김남주 옮김 / 마음산책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바람이 분다. ~ 오늘 인생의 장미를 꺾어라!”
이 작품은 작가와 관련해서 그의 늙음과 죽음에 대한, 특히 자살로 생을 마감한 말년에 대한 의식세계를 엿보게 하는 특별한 관심을 자극한다. 작중의 기성복 바지의 제왕인 여든 네 살 ‘솔로몬’의 늙음에 대한 들끓는 분노와 저항, 그리고 화자인 택시운전사이자 수리공인‘장(자노)’의 자선과 구원의 왕이 되고자 함은 결합하여 죽음에 대한 깨달음, 아니 삶에 대한 이해의 완결을 의미하고자 했던 것 같다. 이 두 인물의 혼합체가‘로맹가리’, 바로 작가 자신이었으리라고 믿고 싶어진다는 말이다.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진 과거의 가수인‘마드무아젤 코라’의 말처럼 “젊음이 너무 일찍 왔다가는 것 같아, 그렇게 쉰 살이 되고 습관을 바꿔야 하는 거지...”에서 노년의 구체적인 위기를 실감하게 된다. 제아무리 마음의 변화 없음을 강변할지라도 시간의 흐름이 새겨진 온 몸의 변화를 인지하는 세상 사람들과 세상은 바뀌어야 함을 종용한다. 그래서 늙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살아야 하는가, 또한 다가온 죽음이라는 운명을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가는 고뇌이고 또 고뇌이다.
솔로몬은 이름 없는 사람들, “태어나면서 고통이라는 기성복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종점에 이를 때까지 겸허히 입고 사는 사람들”의 불안을 어루만지는 구호전화를 운영한다. 여든 네 살의 노인은 이 행위를‘명예로운 무엇’을 위한 것이라 하지만, 청년 장의 생각처럼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는 건 그럼으로써 나 자신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즉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 시작되는 고뇌를 피하기 위한 행위일 수 있다. 그러나 생존을 위협받는 다른 종(種)을 생각하면 자신의 개인적 처지가 덜 불행해 보이는 것이 당연하듯이, 점차 인간적인 경의의 의미가 교만에 자리를 내주는 연민을 나누고자 하는 사심 없는 구원의 행위이기도 하다.
솔로몬의 제안으로 장은 이처럼 잊혀져가는 사람들에게 선물을 배달하고 급박한 절망을 어루만져주는 구호의 일에 참여하게 되고 한 때 가수였던 예순 네 살의 여인‘코라 라므네르’를 방문한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가수, 홀로 늙음을 온전히 마주해야하는 여자를 위해 장은
“위협적인 환경에 처한 종들을 보호하는 것과 같은 그런 감정”으로 도움을 시작한다.
그러나 망각이라는 부당함에, “덧없음과 먼지, 바람과 같은” 삶의 고뇌를 위로하기위한 장의 방문은 코라에게 예사로운 것이 아니다. “동물적인 자력(磁力)”을 발산하는 청년의 우호적 예의는 한낱 노인이 아니라 여자로서의 억압되었던 불씨를 당기게 한다.
여기서 소설 속 인물들, 구호사업을 하는 솔로몬, 사회가 망각한 사람들을 도우려는 장, 청년 장을 통해 삶의 매력과 의욕을 바라보는 코라 모두 자신 대신 타인을 통해 꿈꾸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산다는 것, 늙는다는 것, 죽는다는 것의 무게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에게 정착하지 못하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말이 된다. 그것은 “모든 것을 잃을까봐 너무나도 두려워서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모든 것을 포기하는”, 즉 고뇌를 시작하지 않기 위해서라는 장의 자기해석과 일치한다. 그래서 이들이 타인을 통해서 꿈꿀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것, 자기 자신의 존중과 승인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것은 이 소설의 물음이자 논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이에 대한 답변을 오만하게 몇 마디로 정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분노, 항변, 전면적인 반항에는 희생말고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말처럼 삶과 늙음과 죽음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잘 설명하지는 못할 것이다. 자기 삶의 주장을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것이 지대하다면 너무 우울하지 아니한가? 그래서 인생에서는 타협해야 하고 부분적으로 수리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장의 주장은 나이 들어 고집스러워진 삶의 시선을 바꾸어야 하는 용기와 자세를 일깨운다. 그리고 이것들을 지탱하는 가치로서 자신보다 상대방의 안녕을 원하고 그에게 헌신하고자 하는 것, 어떤 가치에 대한 사심 없고 깊은 집착이라는 사랑(Amour)을 실천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방향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면 포틀래치(Portlach), 즉 신성한 성격의 파괴나 증여라는 지고의 원리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발견은 로맹가리의 죽음을 해석하는 단서처럼 보인다. 조르주 바타이유가 북미 인디언의 증여메커니즘인 포틀래치를 인용하면서 과잉의 신성한 소비, 즉 죽음의 신성성을 말하고, 그리고 두 개체의 하나로의 결합인 사랑의 행위가 곧 죽음의 다른 이면임을 보았듯이 죽음은 신의 세계로의 도달임이라 느꼈으리라는 것이다. 자연사라는 형편없는 삼 등급 죽음을 회피하려는 이 소설 솔로몬처럼, 최고의 죽음을 생각했으리라 여겨지는 대목이다. 이것은 인생에 대한 멋진 수리를 완료하고, 세상을 채우는 허접한 이론들과 끝나버린 이성을 넘어 자기만의 언어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아래 인용문장과 같은 장의 포부와 연결할 수 있을 것 같다.
“처음부터 자연에서 쓸모를 잃어버린 모든 구조 요청에 응답하고, 나의 전설적인 후의로 그들의 피해를 보상해주고 그들에게 정의를 돌려주리라. 나는 솔로몬 왕이 되리라. 바지의 제왕. 기성복의 제왕도 아니고 아이를 두동강 내라는 고대의 왕도 아닌 명실상부한 진짜 솔로몬 왕이 되리라. 나는 사태를 장악하고 그들의 머리위에 자선과 구원의 비를 내리리라.”
이처럼 소설은 늙음, 그리고 죽음을 이해하는 것, 그 삶을 수리하고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진솔한 목소리를 지닌 청년을 매개로 순수하지만 사색적이고, 코믹스럽지만 지적인 문장으로 보통 사람들의 불안과 고뇌를 위무해준다. 평범치 않았던 작가의 면모 때문에 단어 하나조차도 예사롭지 않게 읽게 하며, 이를 돕기라도 하려는 듯 그의 어느 작품보다 따뜻하고 유쾌한 문장과 이야기가 일품인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