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도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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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 할 수 없고 추적 할 수 없는 세상” 을, 그리고 문장으로 성립 될 수 없다는 비루하고 치사하고 더러운 인간의 삶을 읽는다. 그래서 ‘인간’이란, 포괄적 지칭이기에 오히려 예외가 없으며, 써지지 않은 기사였기에 더욱 진실이라고 수용하고 싶어 한다. 아마 50여년이란 삶에서 나름의 이해가 가져다 준 나만의 세상보기 탓일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인물들에서 작중 인물인 출판사 편집자 노목희가 말하는 “그 늙음의 힘과 늙음의 리듬으로 사막을 건너가는 듯” 한 낙타의 모습을 보는 것은 어느덧 스산한 바람과 저마다의 색깔로 퇴락을 준비하는 나뭇잎의 변색 탓일까. 이젠 나,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 세상사를 전하는 매체들의 내용에 존재하는 사람들 속에서 정말 ‘던적스러운’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점에 추호의 의문도 지니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과의 관계가 징글맞게 싫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럼에도 그 하찮음과 사소함의 여정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들이 또한 안타까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생에 대한 동료의식 때문일까.

뭉쳐진 옷소매와 허망한 표정을 하고 있는 ‘장철수’란 인물이 내 뱉는 “이런 세상”은 “모두 저자신의 자리에서 정당했다.”는 망라된 인간들이 벌이는 사회부 사건기자가 보는, 그러나 ‘안 쓴 기사’, 바로 그것이 아닐까. 물론 장철수의 비루하고, 치사하고, 던적스럽다는 ‘인간론’을 배경으로 하는 세상이겠지만.
저마다 자신들의 이해(利害)를 두들겨보고, 이로움을 관철하기 위해 벌이는 행동들의 충돌, 이 충돌의 범위에 존재치 않는 것들은 마치 변사사건의 “접근되지 않는 죽음들”처럼 “삶과 사소한 관련도 없어 보인다.”는 사회부기자 ‘문정수’의 독백과 같은 차원이 아닐까.

단어와 문장 뒤에 숨겨진 조소와 조롱이, 그리고 비틀어진 반어적 문장들에서 “폭발 직전의 위태로움이” 숨겨져 있는 무력감을 엿본다. 그리곤 이 말들이 꼭 내 가슴을 옥죄기만 하는 흐리멍텅한 삶의 이유와 가능성을 쫓는 우울함과 닮아있다고 느낀다.
동료를 배반하고 뱀 섬 앞바다에 가라앉은 미군의 포탄피를 건져 올리는 남자, 그 작은 목선을 타고 물질을 하는 베트남 여자, 개에게 물려 죽은 버려진 자식과 세상의 이목을 피해 숨어버린 여자, 크레인에 깔려죽은 여고생과 그 아비, 화재현장에서 금품을 절도한 소방관, 그리고 사소함과 적의의 들판의 문턱에서 서성이는 남자까지, 또 그리고 자식을 보호하려는 노모의 모정을 “노모의 몽매한 혈육주의”라 규탄하는 ‘노학연대’, 무참히 죽어버린 여자아이를 이권운동의 도구로 삼는 ‘해망연안연대’ 등등, 세상의 모습은 진정 ‘던적’스럽기만 하다.

“너의 죽음으로, 우린 인간의 존엄과 생명의 고귀함을~ (이하 생략)”하는 비석의 위선에서, 미군대변인의 허무맹랑한 선심에서, 정책수립의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며, 이성적 판단이란 결정에서 이미 폭력과 외면이 내재하고 있음을 본다. 세상이란 것은 그 명분을 세우고, 타협이라는 이해관계의 산물을 마련해주면 그 위선에 가려져 모두 정당해져 버린다.
입만 열었다하면 욕을 해대는, 아니 노목희의 말처럼 신음을 뱉어내는 ‘당직차장’처럼, “세상을 찌르고 싶은 욕설이 가득 쌓여” 쩔쩔매는 그 짐승이 다름 아닌 내 모습이라 하고 싶다. 니미~
그렇다고 삶이 희망으로 돌아서는 것도 아닐 터인데 말이다.  그래 “육신의 귀에 들리지 않는 선율에 실려서 흔들리면서 흘러가는 것이” 생명현상이란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정처 없는 형용사처럼 말이다. 전 할 수 없는 세상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이가 떠나버리고, 사건이 없어 취재처를 옮기는 어느 기자의 발걸음을 굳이 새로운 시작이라 하여야 할까....

도심지역에서 악지적응 훈련을 수 십 년을 받았음에도 면역력이 생기지 않는 내 모습에서 작중인물들과 닮아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목구멍 속에 눈보라가 날리는 것”같은 시원한 가을 새벽의 소주 한잔이 생각난다. 점점 나도 새벽 그네처럼 소주에 젖어 드는가보다...
적의의 들판에서 쭈빗거리는 ‘문정수’는 바로 나, 우리들이지 않을까. 이 작품은 내게, 이 가을 체념 아닌 체념의 삶에서, 희망 아닌 희망을 찾게 하는 동반자가 되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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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교양강의>를 리뷰해주세요.
사기 교양강의 - 사마천의 탁월한 통찰을 오늘의 시각으로 읽는다 돌베개 동양고전강의 1
한자오치 지음, 이인호 옮김 / 돌베개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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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의 사기(史記)가 한국인에게 여전히 읽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웃 중국의 고대사이자 그네들 최초의 역사서라는 의미로 시작해서 그 이상의 무엇이 존재하기 때문일 텐데, 사실 중국의 역사학자인 전종서가 언급했듯이 “옛 역사책의 기록은 대부분 팩션(faction)이다.”라는 말은 더구나 사실로서의 진정성을 상실시키는데, 그럼에도 2000년 전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애매하기 그지없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게 한다. 또한, 사기의 본기(本紀)와 열전(列傳)에 기록된 많은 인물들의 흥하고 망하며, 성하고 쇄하는 삶의 이야기이고 여기서 유래하는 오늘날 우리들이 고사성어라고 하는 상황의 이해를 실감나게 하는 소박한 지식의 축적이 전부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머물게 된다.

특히나 사기를 역사서라고는 하지만, 오히려 삶과 처세에 대한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고, 비록 균형적인 관점과 기술을 유지키 위한 노력으로 녹이(錄異)나 수일(搜佚)과 같은 동일한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기록을 모두 남겨 후세의 판단에 맡기는 노력을 하였으나, 사마천 자신의 주관적 기술을 피하지 않았음은 삶의 지침서라고 하기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할 정도이다. 아마도 바로 이러한 교훈적 가치들에서 저자의 말처럼 포전인옥(抛磚引玉)하려는 의도가 이유가 되는 모양이다.

그러나 저자 한자오치(韓兆埼)의 사기에 대한 개괄적 해설서라 할 수 있는 이 저술에서 이러한 삶의 원칙이나 처세술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면면히 20세기를 이어져 온 통치술이자 한국인을 얽어맨 사상적 기원을 발견하고, 당시대에서 조차 비난 받던 제도를 21세기 오늘에도 답습하는 정치꾼들을 떠오르게 하는 것들에서 나는 작은 즐거움을 얻는다.
불과 20세기 초엽까지 우리의 통치술로서의 근간인 유교사상의 본질이 과연 어떤 것이었는가 하는 측면에서, 한 무제(B.C.156 ~ B.C.87)의 패도(覇道)와 왕도(王道)를 병행한 정치술이 기점이 되었다는 것은 의외의 수확이라 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해 이미 孔孟의 순수한 유교가 아니라 한국인을 2000년간 묵어놓은 지배이념이란 것은 유가의 이상이 변질된 것으로서“성직자와 폭력배가 동시에 통치한 것”이라는 적절한 표현이 어울리는 패도정치이념으로서의 유교라는 설명이다. 이는 결국 백성의 교화와 엄격한 법률 통제의 이론적 배경으로 변화하여 처세기술로서 보다 심화 발전하였다는 인상을 준다.

한편 웃지 못 할 발견이랄 수 있는데, 기원전 2세기 전한(前漢)의 형벌 제도 중 마음속으로 비난했다고 심증적 처벌을 하는‘복비(腹誹)’의 일화를 읽으면서, 보도에서 촛불을 켜면 반정부 시위자일거라고 추정하여 연행하는 오늘의 우리사회와 연결되어 그 폭력성과 전제적 권위, 말살된 인권을 보는 것 같아 통증이 일기도 한다.
이와 같이 본 저술,『사기 교양 강의』에서 “이상적인 정치와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무한한 열망”, 그리고 “동시에 그 당시 정치 및 사회 현상에 대한 준엄한 비판”을 읽게 된 것은 지금까지의 사기에 관한 저술들의 논점을 극복하는 수확이랄 수 있겠다.

조걸위학(助桀爲虐)하는 현 정권의 세력들, 사생취의(捨生取義)는 오간데 없고, 청정무위(淸靜無爲)로 눈 감고 모른 척 나서지 않는 관료와 지식인들이 사기의 처세술만 읽지 말고, 그것이 의미하는 보다 본질적 정신을 헤아릴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진시황제도, 항우도, 유방도, 한무제도 죽었다. 권세와 이익을 좇던 조고와 이사도 죽었다. 사마천 말마따나 태산처럼 무겁게 죽느냐, 기러기 털보다 가볍게 죽을 것인가는 인생관의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삶에는 원칙이 있다. 이 원칙이 사기에는 무수하게 흐르고 있다. 이 저술은 이러한 삶의 지혜를 정확하게 읽어내는 훌륭한 안내서가 되어준다. 독서의 즐거움이 있는 저술이다.

[註]
①포전인옥(抛磚引玉) - 벽돌을 던져 옥을 끌어 들인다.하찮은 의견을 먼저 내놓아 다른 사람들의 귀한 견해를 유도한다는 의미
②조걸위학(助桀爲虐) - 악한 자를 도와 더욱 악행을 저지르는 것
③청정무위(淸靜無爲) - 가급적 조용히 지낸다. 즉, 자신의 안위를 위해 나서지 않음을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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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k3049v 2009-10-07 0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을 위해서 사기를 여러 종류의 여러 권을 읽어보았는데, 이번의 것은 생각의 의미를 알게 해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책과의 다른 점은 텅빈 하늘을 바라보면서 풍족함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책이 아닐까?

필리아 2009-10-07 08:39   좋아요 0 | URL
다른 시각으로 보려고 의도적인 노력을 하면서 읽었죠. 목적을 추구하다보니 특정한 면만을 부각시킨 결과가 되었습니다....
 
카인의 징표
브래드 멜처 지음, 박산호 옮김 / 다산책방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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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 뒤 홍콩의 어느 곳, 소설의 첫 장부터 알 수 없는 추궁과 비열한 살인 장면이 예사롭지 않은 추격의 양상을 암시한다. 게다가 단지 성서에 16줄에 불과한 기술로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살인자가 된 카인의 이야기와 슈퍼맨의 원작자인‘제리 시걸’과 그의 아버지‘미셸 시걸’의 죽음에 얽힌 비밀까지 얽혀들며 현실과 신화적 사건을 오르내리게 한다.

또한 엄마의 죽음을 목격한 아이, 아버지의 구속, 정신적 외상을 지닌 채 거리의 부랑인들을 거두는 청년 칼의 숨겨진 고통을 바라보는 시선도 커다란 하나의 축이 된다.

이처럼 이 작품은 다분히 미국적이고 그네들의 정체성을 유지시켜온 성서와 짧은 역사 속에서 지켜내고 싶은 우상(슈퍼맨)으로서의 충분한 화젯거리를 소재로 하고 있는 본격 범죄추리물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코믹스(Comics)와 영상매체를 오가는 감각적인 작가의 특성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이 한 컷 한 컷 치밀한 구성이 돋보이는데, 근본주의자 광신도 앨리스와 마주한 하퍼 부자와의 팽팽한 긴장의 순간장면들은 가히 헐리웃 영상을 뛰어넘는다.

수감되었던 아버지와의 19년만의 재회, 이들 부자의 앞으로 다가온 은밀한 암시는 미지의 책으로 발길을 인도한다. 이후 작품 곳곳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회한과 갈등이 교차하고, 풀어야 할 미궁 역시 아버지와 아들의 용서와 화해를 들려주지만, 이러한 주제의식을 굳이 의식할 이유는 없다. 이미 강력한 묘사라는 도구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이 작품은 정밀한 퍼즐식 스토리의 전개와 불안, 긴장, 잡힐 듯한 단서, 그리고 의외성과 반전을 거듭하며 독자의 혼을 쏙 빼앗아 가버릴 정도로 완벽하기에 이야기의 지적 전개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즐겁고 재미있는 작품이다.

더구나 마지막에서야 드러나는 예언자의 실체와, 툴레회의 광신자 앨리스를 인도하는 다이어리, 칼이 손에 쥔 제리 시걸의 초판본 만화책, 그리고 의문의‘거짓의 서(The Book of Lies)’, 궁극에는 카인의 징표가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은 작가의 교활한 트릭으로 결코 책을 손에서 떼어놓지 못하게 한다. 카인은 무엇으로 아벨을 죽였을까? 시걸의 초판본 만화책은 무엇을 지시하고 있는 것일까? 제리는 아버지 미셸의 죽음을 목격한 것일까? 하퍼 부자는 카인의 징표를 손에 넣을 수 있을까? 이러한 요소들은 현실적 실제와 허구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더더욱 사실성이라는 진실에 대한 호기심으로 달아오르게 한다.

그리고 작품 전체에 도도히 흐르는, 아들 칼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흐뭇한 안도의 표정, 고통스러웠을 아들을 향한 용서, 아들을 구하기 위해 무모한 저항을 무릅쓰는 부정(父情)은 카인을 용서한 하느님의 선물과 연대하여 감히 거부할 수 없는 사랑과 화해의 메시지를 보낸다. 끊임없이 긴장을 요구하는 스릴러임에도 작품을 휘감아 도는 부자간의 시선과 감정의 교감이 왠지 모를 따뜻한 정감을 느끼게 한다. 신약을 차용한 걸작이 『다빈치코드』라면 『카인의 징표(原題: The Book of Lies)』는 크리스천 미스터리 팩션의 완결판이라 함에 어떠한 손색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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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권력과 욕망을 말하다>를 리뷰해주세요.
건축, 권력과 욕망을 말하다 - 역사를 담은 건축, 인간을 품은 공간
서윤영 지음 / 궁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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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현대사회에 대한 비평이론을 하나쯤 접해보지 않은 이들은 없을게다. 베블런의 그 유명한 『유한 계급론』이나, 발터 벤야민, 장 보드리야르, 미셸 푸코, 피에르 부르디외에 이르기까지.

그래서 권력과 욕망을 말하는 이‘건축’이라는 책자의 이야기들은 무척이나 친숙한 느낌을 준다. 여기저기 수없이 인용되고 각색된 이들의 사상으로 인해 어지간하면 이 책자가 아니어도 숱하게 보아온 논의이기에 그렇다. 구별짓기와 아비투스, 효율적 감시기구인 파놉티콘, 실재를 능가하는 과잉의 이미지 시뮬라시옹 등 굳이 건축전문가가 아니어도 일반 대중들이 익히 잘 알고 있는 내용들을 관점의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다만, 건축가의 시선과 학습이 아니면 알 수 없었던 측면들이 인간의 욕망이 투여된 모습으로서의 건축을 특화하여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움을 상실시키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즉, 유한계급의 과시적 소비를 반영하는 한국의 아파트 구조에 대한 사적, 공적영역의 단계별 이행과정에 대한 설명이나, 근대화에 따른 유럽사회 노동자들의 주택구조 진화과정에서 보여 지는 ‘프티 살롱’이나 ‘스몰 팔러(small parlor)'의 사례와 같은 것이다.
결국은 먹고 살만하면 과시하고 싶어 하며, 자신의 부와 권력을 상징화하려는 욕구가 어떠한 형식으로든 반영되기 마련이며, 이러한 성향들이 다채로운 건축물의 용도에 따라 내재화되고, 표현되어 있는지를 해체해 보는 관점이랄 수 있다.

특히, 이 저작의 재미있는 요소로 꼽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독자들에게 친근한 문학작품을 통한 설명이 그 하나이고, 서양기반의 관점체계에 견주어 한국(동양)의 문화적 기반에 근거한 배경지식을 논의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욕망과 모방소비를 자극하는 수단으로서만 구성되어 있다고 할 만한 백화점의 유래와 공간구성에 이르러서는 일종의 패션잡화점으로 발전한 프랑스의‘마가젱 드 누보테(magasin de nouveautes)’가 집적되어 이루어진 백화점의 건축적 특징,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남산아래(명동)에 세워진‘미츠코시 백화점’을 묘사한 이상의 시(詩)‘건축무한육면각체-마가젱 드 누보트’로 자연스럽게 근대 한국의 상업용 건축물에 대한 특성을 설명하는 것과 같이 대중 친화적 글쓰기가 돋보인다는 것이다.

또한 선녀와 나무꾼의 구전 설화나 경복궁을 비롯한 조선의 성도(城都) 한양의 도시구조를 통한 권력의 상징적 예화에서 오늘날 남향이나 동향과 같은 주택의 방향에까지 미치는 공간과 건축이 품고 있는 다양한 메시지를 유연하게 전달한다.
책을 닫는 글 말미에 “건축은 미적 감흥을 주기위한 오브제가 아니라, 기능과 구조를 통해 인간에게 실용성을 주기 위한 도구”로서의 면모를 읽어내기 위해 이 책을 저술하였다는 저자의 의도가 충분히 전달되었다 할 수 있는 재치와 지성을 수월한 언어로 담고 있는 대중용 ‘건축 사회학’저술이라는데 공감한다. 우리들이 무의식적으로 바라보는 건물들이 품고 있는 그 비밀스런 메시지들을 이해하고, 나아가 인간과 자연이 교감하는 본연의 의미를 지향하는 인간의 축조물에 대한 바람직한 실현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참고】 로툰다(rotonda) ;

고전 건축에서 원형 또는 타원형 평면위에 돔 지붕을 올린 건축물 혹은 내부 공간. 로툰다는 고대 그리스의 톨로스(tholos)에서 비롯되었음. 고대 로마 건축물에서는 124년경에 세운 판테온, 비첸차에 있는 빌라 로툰다, 워싱턴 D.C,소재 미 국회의사당 중앙 홀, 런던 세인트 폴 대성당 돔이 그 사례로 꼽힌다. [사진: 빌라 로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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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물 검역소
강지영 지음 / 시작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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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쾌하고 유쾌한 소설이다. 무엇보다 재미로 치자면 둘째가라면 조금 억울하다 할 만한 이야기다. 역사기록으로 추정하면 주인공 함복배가 출생한 시기는 1609년이 되고 벨테브레(박연)의 표류시점인 1628년과 소설이 끝나는 시기가 하멜일행이 또다시 제주에 표류하는 1653년이니 조선 중기 45년간의 세월을 담고 있다 할 수 있다.

배내 벙어리인줄로만 알았던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그저 울고 싶지 않았기에 울지 않았고 말하고 싶지 않았기에 말하지 않았을 뿐이라며, 열 살이 되던 어느 날 문득 말문을 틔우는 기이한 주인공의 모습처럼, 소설이 시작하자마자 불과 몇 쪽에 펼쳐지는 반전부터가 이 작품이 예사스럽지 않음을 암시한다.
한양 과거시험장에서의 자리다툼의 해프닝을 시작으로 말단으로 급제하여 제주도 ‘신문물검역소’라는 희한한 이름의 관청으로 부임하는 과정도 어설프기 짝이 없어 주인공 함복배의 인물됨을 한 눈에 알아버리게 한다.

재미의 삼박자는 바로 이 우스꽝스런 명칭의 ‘신문물검역소’와 표류한 서양인 벨테브레(박연)를 중심으로 한, 신문명에 대한 해학이 하나이고, 주인공과 제주관찰사 이상도의 여식 ‘연지’와의 러브라인, 그리고 연쇄살인사건이라는 의외성의 소재로 구성되어있다 할 수 있겠다.
어수룩하기 그지없는 약관(弱冠)의 신문물검역소장 함복배의 좌충우돌하는 인생기록이기도 하지만, 양반과 상놈, 지위의 귀천, 인종의 배타 등을 모두 불식시켜버리는 그의 포용력에서 작가가 말하고픈 인본주의와 평등을 읽을 수도 있다.
그리고 타자, 코길이에서부터 미호, 박연에 이르는 연민과 사랑의 의식은 비록 모두에게서 이해를 획득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속에서 자라나는 관심과 이해가 주변의 사람들을,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보여주기도 한다.

한편, 서사구조의 중추가 되는 혼례를 앞둔 처녀들만 살해되는 연쇄적인 살인사건은 등장인물들 모두를 범인으로 의심케 할 정도로 치밀한 크라임스릴러로 변신케 한다. 또한 21세기 오늘에도 경기(驚氣)를 할 남녀추니가 등장하는가하면 ‘기방 창(倡)’에서 벌어지는 반라의 정사와 마조히즘은 이야기 속으로 독자를 흡입해대는 강한 추동력으로 작동한다.  또한 불아자(不峩者), 곤도미(困導敉), 만앙경(曼坱景)하는 신문물의 그럴듯한 탐색과 함복배의 머리에 갓 대신 씌워진 불아자에서 조선시대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흥겨운 작업 중 하나이다. 
이처럼 이 소설은 흥겨움과 기이함이 발산하는 매혹, 청춘남녀의 그 기묘한 줄다리기식 사랑, 그리고 욕망의 끝이 보여주는 그 적나라한 범죄의 세상까지 아우르면서 우리를 17세기 조선의 제주로 상상력을 이끈다. 능수능란한 작가다. 코믹과 멜로, 서스펜스를 자유자재로 버무려내는 작가의 스토리역량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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