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자유,음악,평화 그리고 역사
우드스탁 센세이션 - 젊음, 자유, 음악, 평화 그리고 역사
마이클 랭 외 지음, 장호연 옮김 / 뮤진트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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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드스탁(Woodstock)'은 뉴욕 북부의 작은 대안 마을의 지명이 아니라 1969년 이후부터는 “페스티벌 역사의 새 패러다임”을 만들어낸 음악과 자유와 평화, 그리고‘문화공동체의 엄청난 에너지’의 집적을 상징하는 고유명사로 기억되고 있다.
이 저작은 바로 1960년대를 풍미하던‘마이클 랭’이라는 한 젊은 히피문화의 주자가 “느슨하고 자유로운 페스티벌”을 열고 싶다는 불가능하기만 해 보였던 전망을 실현시킨 공동체 정신과 유토피아 비전이란 이상을 입증한 마술 같은 음악향연, <우드스탁 1969>의 생생하고 진솔한 기록이다.

미국 남부도시 마이애미 비스케인 만에 위치한‘카운터 컬처’의 거점인 그로브라는 지역에서 헤드숖을 열고 지역밴드를 섭외해 연주회를 여는 것으로 소일하던 청년‘마이클 랭’의 서로 다른 라이프스타일을 존중하고 이들이 만나 하나가 되는 문화공동체의 구상에서 시작된 페스티벌이 어떤 이상과  이를 실현하는데 부딪친 많은 장애들, 그리고 극복과 세세한 준비과정에서부터 행사일인 1969년8월15일부터 8월17일까지 3일간의 경이적이고 비현실적으로만 보이는‘자유’의 대 축제, 그야말로 센세이셔널(sensational)한 그날의 모습들을 그리고 있다.

사실 뉴욕시 북쪽으로 90마일 떨어진 우드스탁에서 이 페스티벌은 열리지 못한다. 우드스탁을 포함하는‘월킬’시의 시민집단과 공권력의 극렬하고 조직적인 반대로 불과 공연을 2개월 남짓 남겨둔 시점에서 중지되는 위기를 맞는다. 이는 1960년대 소비자본주의의 완성으로 소외와 고립의 경험이 양산되자 이로부터의 출구를 찾던 미국 대중문화의 한 돌파구로서의 히피문화에 대한 주류집단과의 갈등의 산물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로큰롤과 히피는 곧 마약과 성, 폭력의 집단이란 왜곡된 시선과 기성질서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하던 당대의 첨예한 접촉점이기도 했을 것이다.

어쨌건‘우드스탁 벤처스’라는 4명의 젊은이들이 합작한 이들의 도전은 우드스탁과의 거리는 멀어졌으나 뉴욕시 북부‘베델’의 600에이커에 달하는‘맥스 야스거’농장의 극적인 장소협조를 받기에 이른다. 역사가 창조되는 장소는 이렇듯 보이지 않는 무언의 힘에 의해 점지되는지도 모를 일이다. 드디어 역사상 전쟁이 아닌 경우로 한 공간에 가장 많은 인파가 모인 것으로 기록될 전례없는 엄청난 에너지와 자유, 멋진 음악의 잔치가 펼쳐질 준비과정의 소소한 부분들이 전달된다. 여기서 대형페스티벌을 기획, 홍보, 제작, 운영에 관련하는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생동감 넘치는 매뉴얼이랄 수 있는 화장실의 수량 선정에서 주차, 섭외, 무대설치, 음식물과 매점, 식수공급, 흥행 등에 이르는 세세한 문제들과 진행과정의 노하우를 얻을 수 도 있다.

행사장에서 반경 20마일 지역의 모든 도로가 차단될 정도였다니 공연 참석자 행렬의 이동은 장관이었을 것이다. 한 장소에 50만 명이 넘는 사람이 모였으니 이들의 안전문제와 먹고 자는 문제는 그야말로 끔찍한 사고의 전조로 여겨진다. 그러나 수많은 군중들은 어느덧 치안을 떠맡고 스스로 규율하고 통제하여 그냥 알아서 돌아가기 시작했다니 자유를 갈구했던, 그래서 스스로 야만인이 되어 진정한 인간의 권리 회복과 해방을 지향했던 소외된 대중들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를 멋지게 보여주었던 모양이다.

이 저작에는 당시 페스티벌에 참여했던 청중, 공연준비자, 지원인력, 가수들의 인터뷰를 통해 그날들의 생생한 기억들을 전해주는데, 한결같이 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전체가 하나의 문화공동체가 된 실로 마술같은 유토피아 마을”이라고 일관된 회상을 하는 것을 보면 타락한 자본주의사회에 대한 출구를 찾지 못해 절망하던 이들에게‘우드스탁’은 진정한 출구로 기능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특히 이러한 우드스탁의 문화, 사회정치적 의의에 대한 모습 못지않게 시선을 이끄는 것은 당시 이 페스티벌에 참여했던 가수들과 그룹들의 면모라 할 수 있다. 우드스탁에 참여했는지 혹은 하지 않았는지가 이후 로커들과 그룹사운드의 명성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었을 정도이니 참여를 거부했던 이들에게는 땅을 치는 아쉬움이었을 것만 같다. ‘카를로스 산타나’, ‘슬라이스 스톤’, ‘지미 핸드릭스’, ‘로비 로버트슨’, ‘레본 헬름’, ‘그레이스 슬릭’, ‘폴 버터필드’등 전설적인 유명 밴드와 가수들의 당시 모습을 보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 되어주기도 한다. 어떠한 긴장도, 분노도, 스트레스도 놓아버린 천연의 자유가 온통 화이트레이크에 넘실대는 것만 같은 낙원의 환영이 다 보이는 것만 같다. 참석 군중들의 모습에 떠오르는 한결 같은 환희의 웃음을 머금은 얼굴들과 놀라울 정도로 평온한 모습이 거대한 바다를 이루었다는 증언처럼 그 3일간은 정말 비현실적일 만큼 환상적인 자유가 넘치는 공간이었던 모양이다.

전쟁과 인종차별, 폭력이 넘쳐나던 당대의 기형적인 자본주의 미국사회에 대한 강한‘거부’의 의사이기도 하였으며, 공동체 정신과 이상향에 대한 비전이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다는 거대한 에너지의 실체를 보여준 위대한 사건이기도 하였으리라. 이후 이 정신이 계승되어 오바마의 대통령 취임식장을 ‘워싱턴 우드스탁’이라 명명하였다는 것을 보면 1969년의 우드스탁은“대단한 사회적 실험”으로 유구하게 인류의 중요한 지적 재산중 하나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뉴욕타임스’의 사설처럼 비폭력도 전염성이 있으며, 개인의 존엄을 존중하는 이상을 입증한 실험으로 말이다. 우리의 풍토에서 이러한 문화공동체의 축제를 실현 시킬 수 있는 날이 언제나 올 수 있을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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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킬러 덱스터 모중석 스릴러 클럽 24
제프 린제이 지음, 김효설 옮김 / 비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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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철함이나 지성과는 한참이나 먼 게다가 실수를 해대고 멍청하기 조차한 사이코패스의 살인마라면 분명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다. 더구나 주인공‘덱스터 모건’은 소설 속에서 자신이 쫓는 연쇄 살인범에게 번번이 역습을 당하고 끝내는 본인의 목소리로 “피와 살육의 현장에서 내가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지 않는다는 점이 뭔가 어색”했다며 구경꾼으로 전락하기까지 한다.

사실 이러한 요소는 정통 추리스릴러에서는 발견키 어렵다. 다시 말해서 이 소설은 의도적으로‘B’급의 수준으로 낮추어 도덕관이나 정의, 사법 체제등 기존의 질서에 얽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대중적 말하기를 하고 있다 하겠다. 그래서 덱스터의 “모든 이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고 강자들의 인생을 조금이라도 어렵게 만들기 위해 인류가 고안해낸 개념”을 정의(正義)라고 한다는 주장은 세상을 좀 비켜가도 문제가 없는 것 아니냐는 항변을 내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수사경찰인 여동생‘데보라’의 보조격으로 혈흔을 조사, 분석하는 경찰지원인력인‘덱스터’는 타인의 감정에 무관심하고 영혼도 없는 희대의 살인귀다. 물론 악의 무리를 처단한다는 명분이 있지만, 이는 법을 초월한 엄연한 살인행위이고 극형을 피할 수 없는 범죄이다. 소설은 이처럼 주인공의 신분이나 성격에서부터 이미 노골적으로 B급임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골치 아프게 정의론이 어쩌니 법과 연대의 충돌이 저쩌니 하는 지성의 토론을 아예 차단하고 시작하자는 의미라 할 수 있다. 그냥 즐기면 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발산하지 못한 응어리들을 현대인들이여 날려버려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소설이 재미있지 않고 베길 수 없지 않겠는가? 어지간한 잔혹 물들을 능가하는, 만일 영상으로 표현한다면 차마 바라볼 수 없을 정도의 살해 묘사에도 불구하고 엄숙함이나 진지함이 깃들지 않는다. 이 사이코패스 덱스터의 살인에 대한 광적 집착의 설명으로서, 아내‘리타’와의 파리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것의 즐거움이,“인간쓰레기들을 잡아 죽이는 안정되고 정상적인 생활을 재개”하는 것에 대한 기쁨으로 대변되는 식의 일상적 가벼움이듯이 말이다.

사건은 참혹한 치장을 하여 전시하듯이 배열된 사체들의 연쇄적 발견으로 시작된다. 데보라와 덱스터 모건 남매가 이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 중 데보라가 칼에 찔려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 살인범을 쫓던 경찰, 그리고 희대의 살인귀 덱스터가 먼저 당한 것이다. 이처럼 어수룩하고 희극적인 출발은 소설의 배경 설명조차 모순어법을 사용하는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축복 받은 악과 폭력의 땅 마이애미”라는 것이다. 악과 폭력이 축복을 받는 곳이라니? 덱스터에게는 더 할 수 없는 살인행위의 토양이라는 말씀이다. 이 조롱하듯 뒤틀린 이율배반이 소설을 코믹하게 하여 역겨운 장면들을 순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랄 수 있다.

더욱 재미를 배가하는 것은 사이코패스임을 알아본 아버지가 어린시절부터 일찌감치 덱스터를 악을 처단하는 살인자로 키웠다는 것이고, 학대의 상처로 사이코패스가 되어가는 결혼한 아내 리타의 어린 자녀들인‘코디’와‘애스터’에게 덱스터가 자신의 배움을 그대로 전수하는 모습이다. 어린 꼬마 사이코패스들의 앙증맞은 맹목적 살의와 그 활약이라니...
더구나 이야기가 더욱 당혹스럽게 전개되는 것은 동생 데보라를 찌른 범인이라 생각하고 은밀히 살해하여 토막처리한자가 정작 범인이 아니었음이 밝혀지고 난 후의 덱스터의 독백이다. “멍청한 속단이었을 뿐, ~ 실수를 저질렀을 뿐이다. ~ 무고한 사람을 죽였다고 해서 내가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껴야 하나? ”하고 단지 불건전한 기분이 드는 것이라고 자기합리화를 하곤 별일 아니라는 듯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것이다.

그리곤 진범을 쫓지만 연쇄살인범은 오히려 덱스터를 쫓는다. 두 살인마의 싸움. 점입가경이라 할 수 있다. 살인보다는 그 살인행위를 보고 놀라는 사람들의 반응을 즐기는 살인자, 즉 살인행위를 영상예술로 생각하는 살인자다. 최신장비나 치밀한 계획을 세워서 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행복하고 발랄하게 살육의 시간을 즐기는 것을 좋아하는 덱스터와 이 전시예술 살인자‘와이스’의 대결은 그야말로 조마조마한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게 하는 이 작품의 주요 테마들을 구성하고, 덱스터의 숨겨진 정체가 폭로되기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어울려 화려한 서스펜스를 자랑하기도 한다.

순진하고 어질고 착하기까지 한 연쇄살인범이라는 이 희한한 조화가 이렇게 완벽하게 어울릴 수 있는지 작가의 재치와 해학, 상상력에 그만 홀딱 반하게 되고, 엄숙주의를 완전히 일탈하여 리얼리티를 과대할 정도로 진행시킨 의도적 B급 스릴러의 진수를 보여준다. 정말의 스릴러를 즐기려 한다면 덱스터를 놓치면 안 될 것 같다. 진정 재미를 선사할 줄 아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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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
쑤퉁 지음, 김재영 옮김 / 비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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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의 유일무이한 여(女)황제 이다보니 사적(史的)평가는 물론 다양한 측면에서의 문학적 조명이 넘쳐나는 것은 그 만큼 독특하고 기이하며, 후대의 사람들을 강하게 매혹하는 무엇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보잘것없는 지방향리의 딸로 비, 빈, 첩여, 재인, 미인, 어첩 등 100여명의 후궁전인 ‘액정(掖庭)’에 발 딛은 걸 보면 그 미색이 이미 보통 수준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소설은 당대의 정치사회적 질서를 조명하거나 해서 후궁으로서 또는 여황제로서의 치적(治績)을 열거하는 식의 역사를 이야기로 재탕하는 진부함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오직‘무조(武曌)’라는 한 여인의 권력에 대한 욕망과 성취, 그리고 이를 위해 잔혹함이나 악의 경계를 뛰어넘는 그 집요한 탐욕의 본성에 천착하고 있다. 그래서 인륜과 도덕을 초월하고 생명이나 신의(信義)조차 하잘것없게 만들어 버리는 권력의 갈망이 뿜어내는 소름끼치는 한 여인의 욕망을 쫓아가는 눈길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것을 멈추지 못하게 한다.

‘측천무후’의 지아비였던 당태종 이세민이나 당고종은 우리 역사와는 악연의 인물들이다. 3차례에 걸친 여당(麗唐)전쟁으로 끝내 고구려가 멸망의 길로 들어섰으니, 이 여인네가 암약하던 시절에 그리 여유로운 시선을 보내기는 수월치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무조의 폭정에 대항하던‘장손무기’나 당대의 원로대신‘저수량’, 시중‘한원’,중서령‘내제’와 같은 인물들을 소설 속에서 접하면‘안시성 전투’의 낯익은 인물들인 이들의 전후(戰後) 입지를 살펴보는 흥미로운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시대적으로 우리에게는 커다란 역사적 시련이요, 전환기에 벌어지던 이웃의 이야기다보니 색다른 관점이 자꾸 들어서서 읽기를 방해당하기도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기도 하다.  

어쨌든 소설은 무(武)씨 성을 가진‘미랑’이란 여인네의 불가능해보이기만 하던 권력의 정상에 이르는 기막힌 여정을 안내한다. 종4품 재인(才人)으로 권력에는 한참 먼 거리에 있는 당태종의 수많은 후궁중의 한 여인에 불과하였으며, “새 날이 밝는 건 어제의 죽음을 뜻했고, 적막한 하루가 또 바람처럼 그녀 청춘의 싱싱한 이파리 한 잎을 거두어” 가는 것을 안타까워 할 만큼 잊혀지고 말 운명의 평범한 인생 이상이 아니었다.

태종이 죽자 선왕의 후궁들은 절에 귀의하여 여생을 마치는 것이 당시의 법도였던 모양이다. 무조 역시 비구니가 되어 여타 후궁들과 마찬가지로 옛 황제(태종)의 혼령과 함께 독경이나 외는 삶의 운명만이 남아있었으나 이 여인네는 태종의 아들 고종을 열락의 기억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만큼의 房中術로 사로잡는 장기를 지녔던 듯하다. 특히 화자(話者)의 인칭이 마구 변하는 것도 이 소설의 특징이랄 수 있는데, 바로 이러한 아버지와 아들에 걸쳐 색공(色供)을 벌이는 반인륜적인 행위를 어미인 무조에게 살해당한 비운의 첫째 아들 태자 홍의 목소리로 들려주어 그 섬뜩함과 당혹스러움을 배가시키기도 한다.

자신의 의지에 반하면, 혹은 권력의 길에 장애가 되면, 또한 권력쟁취의 수단을 위해서라면 자식의 살해도 서슴지 않는 무조를 보면 자신이 의도한 목적의 달성을 위해, 달리 말하면 자신의 의도를 현실로 바꾸고 그것을 지속시키기 위해 요구되는 근본적인 힘이라 불리는 권력의 중독성은 가히 잔인함이라는 언어를 초월하는 것만 같다. 고종의 황후 왕씨를 제거하기 위해 자신의 딸을 살해하곤 누명을 씌우거나, 태자에 오르는 아들들의 작은 저항만 있어도 바로 사지로 몰아넣는 어미의 모습은 권력에 대한 무서운 집착을 그대로 대변한다. 결국 고종과 자신의 자식들인 이(李)씨들을 몰아내고 무(武)씨의 왕조를 세우려는 이 여인의 권력에 대한 욕망을 쫓다보면 온 몸에 소름이 돋아난다.

이처럼 측천무후라는 여인은 바로“자신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한 도박판에 누구라도, 그 무엇이라도 내 걸 수 있는 사람”으로 그려지지만, 자신의 여성성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줄 아는 여인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신하들의 충직한 간언은 때때로 곱게 화장한 여인이 베갯머리에서 속삭인 한마디에 미치지 못했다.”는 말처럼 아마 그 유명한‘베갯머리송사’는 예서 유래한 모양이다.

이 밖에 이 소설은 흥미로운 사실들을 무수히 전해주고 있는데, 혹리(酷吏)로 유명한‘내준신’같은 자들의 등용과정이나 이 자가 개발하여 후대에 이용된 각종 형틀과 고문기술에서부터, 무고한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기술과 요령집인 희대의 기서인‘나직경(羅織經)’의 존재를 보면 측천무후가 자신의 권력유지를 위해 어느 정도의 권모술수와 공포정치를 구사하였는지 혀를 내두르게 한다.

게다가 말년에“특별한 약 한 첩 마냥”선물로 바쳐진‘훗날‘설회의’라는 불리는‘풍소보’라는 사내나, 미소년 장창종 형제와의 성희(性戱)는 권력에 심취하여 궁극에는 몰락하고 마는 반복되는 역사의 경험을 노후한 여황제의 그것에서조차 동일하게 발견케 한다. 후궁으로서, 여인네로서 겪어야만 했던 젊은 시절의 모든 비애와 원망을 마음껏 토해내기 위해, 혹여 이처럼 비운 속에 시들어버린 당대의 꽃들에 대한 보상을 위해 벌인 집착이었을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여인도 마침내 세월의 풍파는 견뎌내지 못하고 한 낯 휘몰아치는 바람처럼 사라져 버리고 마니 엄청난 피의 강과 인륜의 파괴위에 선 권력의 영화란 것도 부질없는 것이기는 매 한가지 아닌가?

잔혹한 권력의 속성을 한 여인네의 일생에 담아 담담하고 우아한 필치로 그려낸 역작이다. 7세기 동아시아의 한 궁궐에서 펼쳐지는 이채롭고 내밀한 권력을 향한 암투의 세계를 오늘의 시선으로 새롭게 해석해보는 흥미로움이 있다. “내가 죽이지 못할 자가 없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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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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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집에서 첫 대면하게 되는 단편,「로봇」의 주인공인 여행사 여직원의 “삶이란....젖은 우산처럼...참고 견디는 것”이라는 삶의 체념 같은 우울한 독백은 우릴 에워싸고 있는 인간군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게 한다. 돈으로 섹스를 강요하는 여행사 사장을 벗어나 로봇이라 주장하는 남자와의 일탈이 SF물이면 단골처럼 등장하는‘로봇 3원칙’의 딜레마를 이유로 차이는 장면은 지극히 코믹스럽다. “열정적 사랑은 인간인 당신을 헤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라고. 이 웃기는 기계적이고 계산적인 세상에 결코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듯이 말이다.

이처럼 이 소설집에 수록된 13편의 장, 단편(掌, 短篇)에서 한결같이 자신의 기대와는 터무니없이 엉뚱한 상황에 이르는 인물들을 보게 된다. 그네들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결코 그네들 자신이 아니고, 그렇다보니 왠지 세상은 신뢰할 수 없는 불온한 것으로 비추어진다. 결혼을 목전에 둔 후배와의 여행을 강요하는‘한선’이라는 사내나 동해바다로 느닷없이 끌려가는‘수진’의 「여행」이라는 이 희한한 여행기는 그 과정 역시 우발적이지만 폭력과 상처로 귀결되고 홀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쇼핑백의 깨진 사금파리를 움켜쥐는 여자의 불안처럼 희한한 증오만을 남기듯이.

한편 소설들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환경이나 상황을 소재로 하지만, 우리네들의 심상(心相)에 일정하게 은둔하고 있는 감정이나 생각들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서 의외의 결과를 발생시켜 은폐된 진실과 대면케 하는 놀라움이 있다. 그래서인지 진부해 보이는 사람들의 일상에서 의례히 일어나는 이야기들임에도 기이한 매혹을 느끼게 한다. 아마 억눌리고 표현되지 못한 감정의 표현이 야기할 당위적인 기대 결과를 보게 됨으로써 대리 만족, 아니 정화하여 주는 역할까지 하기에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투명하고 깨끗한 피부의 여성을 안내데스크에 앉힌 피부과의 자살 에피소드를 담은「명예살인」이나, 예전의 복수를 위해 코뼈를 부러뜨리는 「오늘의 커피」같은 장편(掌篇)은 입꼬리 올라가는 웃음을 흘리게 한다. 또한 세상 사람들이 반한 자신의 “목소리를 얻기 위해 아무 노력도 한 적이 없음”에도 단지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눈동자에 녹아내리는 사람들의 열광모습에서 언뜻 고딕소설의 섬뜩한 분위기까지 자아내는「악어」라는 작품은 목소리를 잃어버리고 죽은 박제가 되어버리는 장면에서 우연한 기회의 불공평한 미덕을 인정치 않으려는‘존 롤스’의 차등원칙이라는 엄격한 도덕주의를 보는 것 같은 야릇한 진지함까지 읽는다면 지나친 해석이라 할까?

하이델베르크의 한 호텔에서 1년에 한 번씩 만나 정사를 벌이는 두 남녀의 관계를 설명하는“그녀의 그 복잡한 죄책감과 증오, 친밀감에 대한 희구가 뒤섞인, 기이한 감정의 칵테일” 같다는 말은 이 소설집 전체의 내면을 대변하는 느낌이지 않을까 할 정도로 무언가 어울리지 않는 감정들의 집산으로 다가온다. 백화점의 좀도둑이나 잡으면서 사람들의 일상을 쫓는 뱀 같은 형사「조」의 이야기나, 「마코토」의‘지영’처럼 사랑의 요구조차 무의지의 우연성에 의한 결과로 의심하거나, 세상의 권위에 주눅 들어 사는「아이스크림」의 동규, 소비자상담실의 김부장의 모습에서 부조리한 삶의 측은함을 발견하는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산다는 것은 계획이나 의지와는 전혀 다른 예기치 못한 우연의 연속이며, 그래서 오늘과 같이 파편화되고 신경증적인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적당히 체념하고 또 거대한 세상의 흐름 속에 몸을 내 맡겨야 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는 이러한 부조리하고 정의롭지만은 않은 삶의 형상들을 하찮은 해프닝이나 코믹함에 담아 엄숙한 메시지를 의외의 유머로 승화시켜 은근히 저항을 부추기는 것만 같다. 어쩌면“이것은 타락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바른 길을 벗어나 알지 못하는 엉뚱한 길을 우왕좌왕하는 우리네들 모두의 방황에 관한 기록 말이다. 이 소설들에서 나는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거짓 없는 날 것 그대로를 보았다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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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의 하루
홍남권 지음 / 파코디자인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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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1500년 전의 과거를 오늘의 관점으로 이해하려다 보면 국가관, 관습, 문화를 비롯한 인간사유의 이질적 변화로 인해 불가피한 오류가 발생할 여지를 배제하기 어렵다. 해서 오늘날과 같은 뚜렷한 영토의 경계와 민족적 동일성과 같은 근대적 국가의 개념을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을 대하면서 역사인식에 있어 그 진실을 통찰해내는 작가의 시선에서 한낱 기우였음을 알게 된다.

권력의 역학관계, 인물들의 정당한 반목과 명분, 안시와 고구려 중앙세력과의 느슨한 연결 관계, 전쟁에 참여하는 민족의 다양성, 동북아의 국가질서와 위계, 그리고 고구려와 당의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동북아 최대의 역사적 충돌로서의 이해, 한 중 일을 잇는 거시적 통찰 등 역사를 해석하는 관점에서 탁월하다.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당의 얽힌 이해관계의 냉철한 통찰에서 비롯된 역사적 당위성에 기초한 플롯의 정교함이 소설의 지적 풍미를 한층 높여준다.

수륙 65만 대군을 동원한 당 태종 이세민의 고구려 침입이 안시성 전투를 전환점으로 고구려의 승리로 전해져 오지만 성(城)주‘양만춘’이란 이름과‘혈전’이었다는 정도 이상의 역사적 기술을 배우지 못했던 내겐 이 작품의 세세한 일화들과 그 역사적 배경의 이면에 대한 해석에서 안일하기만 했던 우리네 게으른 역사의식을 새삼 반성케 되기도 한다.
요동성, 건안성, 부여성, 안시성 등 요하를 경계로 한 요동지역에서부터 한수 이북까지의 광활한 영토를 호령했던 고구려의 기상이 어느덧 반토막 난 작은 반도의 영역으로 축소되면서 그 웅원(雄遠)의 기지를 잃어버린 것만 같은 안타까움이 있던 차에 그 체증을 명쾌하게 풀어내는 지성의 정수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준다.

우선 소설은 왜 인구 10만에 불과한 안시성의 공략에 당 군의 총력이 장기간 집중되어야 했는지, 고구려 중앙정권의 지원은 그렇게도 미흡했는지에 대한 역사적 궁금증을 해결해준다. 왕권의 정통성을 상징하는‘평강공주’와 중앙정권을 장악한‘연개소문’과의 갈등과 같은 내부정치의 문제, 안시성의 중요 광물자원의 보고로서의 가치와 생산지로서의 전략적 위치에 대한 발견은 소설이 말 할 수 있는 역사 통찰의 새로운 시선을 제시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이에 더해 소설적 재미를 더하는 허구로서, 이세민의 전쟁 당위성에 대한 주장이나, 백제의 왕자인‘계백’을 통한 위태로운 외교적 실리추구의 거대한 기획으로서의 관점 등은 팩션문학에서 기대 할 수 있는 가치의 최고를 성취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안시(安市)의 성주,‘하루’, ‘봄’을 의미한다는 하루는‘만춘(萬春)’의 이름이기도 하다. 안시성을 일으키고 지켜온 고구려의 어머니, 평강공주와 그 소박한 궁의 모습, 백성의 삶을 우선하는 정치, 자원의 이성적인 관리는 엄청난 정예의 적군을 소수의 응집된 양민들의 힘이 방어하고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인지에 대한 하나의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지도자의 솔선하는 리더십은 손녀인 하루에게 그 전통과 지혜를 엄하게 이전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일반 백성과 평등한 소통과 교우로서의 성장과 엄격함은 오늘의 권력층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남다르게 느껴지게 하기도 한다.

아마 소설적 백미는 이세민의 안시성 공략을 훈수하는 계백의 전술들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에 공격과 방어의 지략을 하루와 계백의 미묘한 애정전선에 가미하여 전설처럼 내려오는‘주필산 전투’, 훗날 적군의 피로 물든‘적원(赤原)’이라 명명된 혈전의 현장이 가슴을 뜨겁게 오르내리게 한다. 작품의 어느 곳에서도 자의적이거나 논설적 장광설을 늘어놓지 않음에도 우리의 역사 성찰을 위한 시선을 한 층 제고시켜주고 있다. 굳이 민족의 자긍심을 주장하지 않지만, 소설의 지적 재미에 빠져있다 보면 어느새 우린 역사의 진실을 마주하고 있음을 발견케 된다. 고구려의 심장, 고구려의 영혼, 아니 한국인의 영혼을 복원하는 역작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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