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아비춤
조정래 지음 / 문학의문학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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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을 읽고는 폭로적이고 저열한 이야기의 재미로 낄낄대는 부류가 있고, 불쾌감이나 분노를 서로 다른 의미에서 느끼는 부류도 있을 것이다. 또한, 화끈거리는 자괴감으로 경제정의와 민주주의의 실천에 대해 깨달음이 있는 부류도 있을 터이다. 그러나 사실 도덕불감증에 걸린 물신주의의 이 사회에서 작가가 기대하는 야만의 역설을 이해하는 층이 얼마나 될지 조바심이 들뿐 아니라, 아마 재벌과 사회권력층의 비리를 훔쳐보는 관음증적 쾌락에 머물러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도 지워버릴 수 없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신자유주의 질서에 포획된 작금의 우리사회는 경제권력을 배제하고서는 정치를 말 할 수 없는 세계이며, 실제 시장경제만능의 자유주의와 경쟁논리의 기반위에 오늘의 정치가 놓여있다 해도 그른 말이 아니다. 다만, 작가는 정치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섰으니 이제 더 이상 경제민주주의의 실현을 뒤로 미룰 수 없다는 관점에서 펜을 들었음을 선언하고, 경제의 민주주의, 즉 경제정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사회의 야만성을 생살 그대로 드러내 보여, 그 적나라한 야만의 역설 속에서 진실을 캐내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 같다.

소설의 중심 사건은 재벌그룹의 탈법과 불법 하에 자행되는 재산상속을 통한 그룹승계, 자산축적으로, 이를 위한 막대한 비자금의 조성, 정계, 관계, 법조계는 물론 언론, 대학까지에 이르는 전방위적 물적 로비의 추악한 양태이다. 그리곤 탐욕을 지켜내기 위해 벌이는 재벌과 그 충견들의 썩은 내 나는 활약상이 천박한 이야기로 화려하게 장식되고 있다. 작중(作中) 재계 1위의 태봉그룹 임원인 1급 로비스트‘박재우’라는 인물을 경쟁그룹인 일광그룹에서 비밀리에 스카웃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정관계 등 전방위 로비에서 실기(失機)하는 탓에 일광의 총수가 형사처벌을 피하지 못했다는 판단에서 대대적인 로비관리조직을 구축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소위‘돈 싫다는 놈’없더라는 물신주의 최고의 신념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높은 자리에 있는 자(者)일수록 뇌물의 경로를 중시하는데 이를 위해 탈 없이 주고받을 수 있는 공직사회의 핵심인물들을 조직에 흡수하는 것이고, 또한 민형사상의 법적 문제를 틀어막기 위해서 검사를 거액으로 스카웃하고, 대학은 사회의 이해관계가 없어 적대적 행위를 할 수 있기에 기부를 통해 행동을 틀어쥐는 행태로 이어진다. 결국 돈 앞에서는 진실과 거짓도 없으며, 선악의 구분도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탈(脫)도덕, 아니 무(無)도덕이라는 자본권력의 실체, 천박한 이 땅의 자본주의의 본 모습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수 천명에 이르는 핵심 로비대상 망을 완성하고, 회장의 직할부대인‘문화개척센터’핵심측근 3인이 회장으로부터 각기 수고의 보상으로 30억원에서 50억원의 특별스톡옵션을 건네받는 장면은 그야말로 노동의 과실이 자본가의 약탈적 잉여로 전환되는 전형적인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을 보여준다. 오직 이기적인 탐욕만이 존재할 뿐 그 어떠한 윤리적, 규범적 논리도 들어설 여지가 없다. 작가는 이들 자본가 충견들의 입을 통해 돈에 환장하는 인간들의 심리상태를 마음껏 조롱한다. 제아무리 도덕군자같은 얼굴하고 있더라도 그 뒤에는 여지없이 천박한 탐욕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소설의 절정은 불법 재산상속과 그룹승계를 완료하였을 때 불거진 일광의 탈법행위에 대한 시민단체와 소수 지식인의 비판인데, 1조원에 이르는 비자금으로 도배질을 당한 정관계와 법조계가 비호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고, 신문지상에 비판의 글을 게재한 대학교수는 재임용에서 탈락하거나, 정의의 심판을 요구하는 검사는 조직에서 버려지는 기이한 현실이 정당화되는 파렴치한 이 사회가 조명되고 있다.
재벌들에 대한 법의 판결문에 항상 등장하는‘국가경제와 사회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라는 터무니없는 구절처럼 사실 웃기는 말도 없을 것이다. 이건 한국사회에 만 있는 아주 독특한 법 윤리인데, 수조원의 불법, 편법, 탈법적 비자금의 축적과 재산상속이 처벌되지 않고 유야무야, 흐지부지 처리되고, 곧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는 것이다.

노예처럼 일해서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가는 대다수 근로자의 고혈인 노동의 과실이 정당한 분배에 소용되지 않고 재벌과 그의 충견들, 부도덕하고 부패한 공직자와 권력자의 자본축적으로 전환되는 것은 아마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도 정의와는 한참이나 이격되었음을 인지할 것이다. 그러나 허연 탐욕의 침을 질질 흘려대는 충견들이 말하듯이 약간의 물질에 영혼을 파는 오늘의 상품화된 인간들은 자신들이 바로 노예임을 결코 알 지 못한다는 지적은 적확하고 또 명백한 진실이라 할 수 있다.
이는“소비의 양식이 일상생활에서 계급의식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피에르 부르디외’지적처럼,‘아파트, 자동차, 적당한 교외의 휴식과 여행’을 확보하자 마치 자신이 스스로를 피지배자로 인식하기보다는 문화적 혜택을 누리는 계급으로 오인하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는 대중의 우매함을 깔깔대며 비웃는 것이기도 하다.
 

더구나 국민총생산, 대외교역규모가 증가했다고 국가경제 발전이 이루어진 것처럼 떠들어대지만 이 논리가 얼마나 기만적인지는 민중이 느끼는 삶의 질은 갈수록 하락하고 있음이 증명하고 있다. 노동잉여가 근로자에게 흘러가지 않고 소수의 자본가에게 탈법적으로 누적되는 시스템에서는 제아무리 국가경제가 신장하더라도 시민의 삶은 결코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소설은 이러한 부정과 부패를 억제하고 투명한 경제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서 시민단체의 역할과 시민의 적극적 참여를 역설하고 있다. 기업의 투명한 경영체계와 정당한 자원배분시스템, 공직사회의 윤리와 기강, 언론 및 대학 등 사회발언의 지배적 권력 등의 오,남용, 왜곡에 대한 시민의 감시체계가 역동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진정한 민주사회로의 성숙을 위한 필수적 수단이라고 말이다.

사회 환원과 분배, 그리고 사회정의라는 이야기만 나오면 펄쩍 뛰는 이 땅의 천민자본주의의 체질이 그네들 스스로 변화할 가능성은 손톱만큼도 없다할 수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천문학적인 비자금이 모아지고 사금고에 차명계좌에 부동산에 해외자산에 은폐되어 축적되고 있을 것이다. 또한 이를 비호하는 도덕이 실종된 공직사회의 네트워크 역시 여전히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들의 계급을 인식하지 못하는 대다수의 대중들은 자발적인 복종과 거수기의 노릇으로 알량한 생계를 이어가며 불의를 옹호하고, 자신을 해치는 시스템을 위해 싸운다. 낯부끄러운 자괴감과 이기주의적 부패자본사회로 변해만 가는 이 사회의 거짓과 악함 그리고 도덕적 불쾌감의 실체를 그네들의 무식하고 파렴치한 언어로 생생하게 그려낸 수작이다. 적나라한 패담(悖談)까지 무릅쓰며 세상에 드러내야 했던 진실의 언어에서 노 작가의 안타까움과 괴로움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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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시간 7일 모중석 스릴러 클럽 25
짐 브라운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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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택’여사가 『타인의 고통』에서 지적하였듯이‘범죄, 절도, 호색, 고문, 사악한 행위, 잔악 행위가 철철 넘쳐흘러대는 뉴스와 이미지들은 사람들의 무감각을 재촉’하고, 지나치게 자극 받은 현대인의 의식을 더 강렬하게 때리는 뭔가가 아니면 붕괴된 감수성을 깨울 수가 없는 세상이다. 그래서 TV등 방송매체는 보다 선정적이고 더 강렬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데 혈안이 되어 급기야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라 하여 실시간의 실제상황으로 시청자의 감각을 극도의 흥분으로 몰아넣는데 이르고 있다.

이 작품은 죽음이 오락가락하는 위기의 상황에 가둬놓고 생존을 향해 벌이는 인간들의 심리와 행동을 TV등 대중영상매체를 통해 실시간으로 방송하고, 그 상황에 비난과 열광의 모순된 행동을 보이는 시청자들, 현대인의 도덕적 인식세계를 질타하는 작품 군(群)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유사한 작품으로‘아멜리 노통브’의『황산(Acide sulfurique)』이란 작품이 기억되는데, 사람들을 납치하여 인위적으로 폐쇄된 집단수용소라는 세트에 가두어 놓고 폭력과 죽음의 공포를 일상으로 대면케 하고 그 사람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실시간으로 방송하여 시청자의 인기투표로 생사(生死)를 결정하는 사악한 미디어의 탐욕과 인간의 수치스런 심연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충격적인 것이었다.

여기에 더해『24시간 7일(24/7)』은 최후의 1인 이외에는 참여자 모두가 죽음을 맞아야만 하는 극한의 생존게임에 처하게 된 12사람의 이타적 희생과 이기심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성찰하고, 5제곱킬로미터의 폐쇄된 작은 섬에 628개의 카메라 감시망에 갇혀 사투의 생존게임을 벌이는 사람들의 24시간 리얼리티TV프로그램처럼 오직 이익추구 시스템으로서만 작동하는 방송계의 실상을 고발하고, 게임 참가자의 죽음을 결정하는 것, 즉 공동 살인이라는 범죄행위에 참여하는 무수한 시청자들의 투표행위처럼 오늘의 관음증사회가 어느 정도의 도덕적 타락에 이르렀는지를 보여 준다. 또한 과학기술 지상의 망상에서부터, 폭로주의적 저널리즘의 천박함, 인간의 본성에 대한 해결되지 않는 진실, 다수와 소수 선택에 대한 도덕적 딜레마에 이르는 많은 물음들을 담고 있기도 하다.

장르를 굳이 구분하자면 스릴러 문학이라 하여야겠지만, 작품의 주제의식이나 문장의 지적밀도, 수려한 문장이 뿜어내는 문학성에서 완성도 높은 사회소설이라 하여야 할 정도이다. 더구나 방송국의 앵커, 기자, 쇼 진행자로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의 경력은 작품을 보다 사실적이고 역동적이게 느끼게 하며, 드라마적 요소가 폭 넓게 자리하고 있어 재미와 긴장감, 속도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완벽에 가까운 구성을 하고 있다. 상금 200만 달러가 걸려있는 일종의 서바이벌 게임을 표방하는 쇼프로그램에 각기의 사연을 가진 12명이 참가한다. 장소는 자메이카 인근의‘바사 섬’, 24시간 실시간 방송으로 진행되는 리얼리티 쇼 프로그램으로 진행자의 참가자 소개들이 진행되고 7주간의 게임이 시작되려는 찰나 진행자를 비롯한 방송 스탭 전원이 신체가 흐물흐물 녹아내리며 죽는 사태가 발생한다.

가상인지 실제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공포의 혼란에 빠진 참가자들은‘컨트롤(Control: 통제)’이라는 컴퓨터의 명령을 받게 된다. 이들의 모든 행위는 작은 섬에 설치된 카메라들에 의해 빈틈없이 송출되고 외부의 어떤 전파도 섬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차단된다. 매일매일 시청자의 투표결과에 따라 한 사람이 죽어야 하는 살인게임으로 돌변한다. 방송진을 몰살시킨 알 수 없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12명의 참가자는 24시간만 유효한 백신을 얻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다. 시청자가 지목한 최대득표자에게는 추방명령과 함께 백신이 주어지지 않는다. 다만 참가자 개별적으로 극한의 과제를 수행할 경우 획득할 수 있는 구슬상자 한 개당 시청자 득표수의 10퍼센트 감면율이 적용되는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이 생존 게임에서 첫 희생자가 나오고 죽음의 경계에선 이들은 사랑, 회개, 속죄 등을 이유로 지목된 이를 대신하여 백신을 건네주고 희생하는 이타적 행동을 보이는가하면 남의 것을 빼앗고 기만하며 극도의 이기심을 보이거나 죽음에 영혼을 포기하고 여성의 성적착취를 위해 야수로 돌변하는 야만의 본능을 드러내기도 한다. 저마다 최후의 1인이 되어 살아야 할 이유는 있다. 그 살아야 하는 간절한 이유들에 도덕적 우선순위를 누가 결정할 수 있는가? 아니 개인의 생명을 담보로 삶의 순위를 책정할 수 있다는 발상이 가능하긴 한 건가? 하는 질문들이 머릿속을 휘젓게 한다.

한편 소설은 인정받지 못하는 사진기자‘터커’라는 인물과, 바사섬에서 벌어지는 생물학적 질병과 인질이 되어버린 게임 참가자들의 문제로 고민하는 대통령을 비롯한 비상기구와 참여자인 사회심리학자‘로릭’을 통해 국가비밀주의와 대중의 알 권리와의 대립, 사회적 지위라는 물질적, 계급적 편견이 야기한 사랑의 파괴에 대해 조명하게 한다. 로릭은 터커를 이용하여 정부의 행동을 은폐할 시간을 벌기위해 허위정보를 제공하지만, 조각들을 들여다보면서 전체를 꿰뚫는 데 익숙한 터커 기자는 바사섬에 벌어지는 살인게임의 진실에 접근한다.

‘근육퇴행위축증’을 앓고 있는 딸의 치료비를 위해 출전한‘다나 커스틴’과 전직 조종사인‘저스틴 루크’와의 죽음의 위기 속에 펼쳐지는 사랑의 숭고함은 인간 이타심으로 승화되어 보여 지고, 독창적이고 무시무시한 시험들로 가득 찬 고도로 정교한 함정들을 모면해가는 과정은 실로 땀으로 손을 흥건하게 적실정도이며, 인간 본성의 결함들을 여실히 드러냄으로써 진실을 보도록 강요 될 때는 수치와 분노가 교차하는 착잡함으로 내몰리기도 한다.

리얼리티 TV 쇼의 악몽을 보여주는 이 작품이 우리들“사회를 비추는 거울을 높이 치켜들어준 셈”이라는 지적이나, 소설 속 사건이 의도하는 희생자는 누구인가? 라는 작중 내용에서, “국민 전체입니다.”라고 하듯이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자못 커다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최후의 1인은 누구일까? 이 살인 시스템의‘콘트롤’, 통제자의 실체는 무엇일까?  낯익은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디테일의 정교함과 스토리의 박진감, 다양한 삶과 죽음에 관한 도덕성의 질문들로 시선을 돌리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 기막힌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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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증을 길들이다 과학과 사회 10
베르나르 칼비노 지음, 이효숙 옮김 / 알마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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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적 감각과 감정으로 느껴지는‘통증(痛症)’이란 것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하면 소위 고통(苦痛)이란 언어로 표현되는 것만큼 생각해 본적이 없다. 다만, 분명 통증을 느끼는데도 불구하고 별다른 신체상 사유가 없다는 진단의 경우 당혹스럽기도 하고, 의료진의 처방이나 치료에 불만족스러웠던 기억이 전부라 할 수 있다. ‘대체 내가 아프다는 데 왜 이상이 없다고 하는거야!’하고 말이다. 이 저술이 매력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처럼 다분히“주관적이고 복합적인 신경심리학 현상”인 통증(douleur)을 현대의학은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의료진의 관점에서부터 철학과 종교, 문학에서 바라보는 통증의 관념, 그리고 이의 치료와 처치방법에 대한 자세와 태도 등 사회 인식의 당위를 제시하고 있다.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차원에서 사람의 온전한 상태를 위협하는 전반적 현상”이라는 고통과는 달리, 통증이란 “세포조직의 실제적 또는 잠재적 상해(傷害)와 관련된 또는 그러한 통증의 표현들로 묘사된 불쾌한 감각적 감정적 경험”이라 정의된다. 결국 통증에 감정적 경험이 포함되는 것처럼 상처나 정신적 고통이 신체적 통증으로 전이되어 다가오는 느낌까지 있다보니 그 범주가 모호해지는 것도 사실이며, 이는 통증이란 환경, 심리적 상황에 따라서도 변화할 수 있는 인지적 감각이라는 말이 된다.

저술은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다. 통증의 범주와 생리학적 양상 등을 말하는 의학적 검토에서부터, 인간의 삶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와 같은 인문학적 성찰, 그리고 통증의 치료에 대한 의학계의 관심과 발전적 이해의 과정을 통해 보편주의적 윤리로서의 지향점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의 통증에 대한 의료계 및 사회전반이 지향해야 할 전방위적 과제와 목표를 제시하기 위하여 필히 요구되는 윤리적 사상과, 사람 그리고 사람의 삶에 대한 보다 깊은 통찰, 사회의 통합적 공감대의 확대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를 앞에 둔 의사는 단순히 진단을 위한 척도로서만이 아니라 통증은 바로 환자의 어휘이며, 존중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며, 환자는 통증 지속이 곧 병리학적 진행이라는 오해를 불식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또한 통증을 호소하지 못하거나 할 수 없는 소아나 노인, 다중장애인과 같은 의사소통이 힘든 환자들에 대한 진전된 통증의 측정 방법들이 의미하는 휴머니즘의 이해는 물론, 인간 삶에서 통증이 의미하는 그 진정의 유대에 대한 인식을 기초로 사회 및 국가의 통증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와 관심의 당위성을 납득케 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통증의 의료적 이해를 위한 설명 중에서 심각한 정신지체에 운동장애가 결합된 다중장애인인 환자의 경우 통상적으로 알려진 코드에 따라 설명할 줄 모르기 때문에 그들의 통증을 간과할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그네들의 신체와 감성적 징후들을 포착하여 통증을 진단하고 처치하는 전문적 방법들의 소개는 의학이 지금까지의 단순한 생리학적 차원을 넘어서야 하는 것임을 일깨우고 있으며, 임신 24주면 이미 태아의 경우에도 통증감각을 통합하는 수용체는 물론 통증 투사의 주요경로가 완성되고, 기억력까지 획득한다는 연구결과는 태아와 신생아에 대한 통증의 의료적 대처는 물론 생명윤리 차원에서도 중차대한 의료적, 사회적 인식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기도 하다.

특히 환자들의 통증 호소가 의학적인 객관적 징후들에 앞서야 함을 강조하는 일반의(醫)인‘마르탱 빙클레르’가 들려주는 일화는 감동적이다. 통증을 과다하게 표현하는 환자가 있어 과장되고 시끄러운 환자라고 치부하자 아버지가 그에게 호통을 쳤다는 것이다. “너는 그렇게 말할 권리가 없어! 이 사람이 아프다고 말하면 너는 믿어야 해! 의사가 뭐라 해도 통증이 옳아! 네가 그의 말을 믿지 못한다면 너는 직업을 바꿔야 할 것 같다.” 이 치료사로서의 행동원칙은 그가 의사로서 환자를 대하는 일생의 신념이 되었다는 것이다. 치료는 통증이‘진짜’라는 것에 대한 증거를 조건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과연 우리의 의료계 현실은 어떤지 모르겠다.

한편 이 저술의 아주 흥미로운 부분인데, “통증이란 자기 영혼의 위대함을 시험해보고 모두의 눈에 자기 의지의 우월성을 확인 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라고 정의한‘세네카’의 말을 시작으로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스토아적 의연함이나, 18세기 프랑스 외교관이자 정치가였던‘탈레망’의 가혹하고 잔인한 무마취 수술을 견뎌냈던 이야기는‘칸트’가 말했듯이“우리 삶에 대한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은 통증 속에서이고 일종의 인생을 밝혀주는 자극 같은 것”이라는 얘기처럼 통증은 인간 삶의 실제일 것이라는 점에 공감케 된다. 더구나 “자기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기 위해, 또는 남의 고통을 증언하기 위해 하나의 언어를 창조하는 일”이 문학이라고 하면서 들려주는 문학 속의 통증의 이야기들과 온갖 형태의 예술화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가 통증에서 시작된다는 미학적 도전에 관한 담론은 숭고함, 때론 신성화의 언어로, 드라마틱하고 관능적인 인내의 격앙(激昂)으로 인간 삶에 깊숙이 스며드는 통증 해석의 명문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통증은 인간에게 있어 한낱 상해와 관련된 불쾌한 감각적 감정적 경험에 머무는 것이 아닐 것이다. 통증 치료는 그래서 통증 속에 갇혀 고통스러워하는 존재의 짐을 덜어주는 것만큼이나 인간의 유대를 증명하는 것이며, 저술의 말미에서 지적하듯이 치료에 대한 심리학과 학제간의 접근이나 인문학과 철학교육의 의학교육에의 적극적인 확충, 여전히 불충분한 기초 및 임상연구의 강화, 국가적 프로그램의 법적 도입 등을 통한 통증치료에 대한 이해와 관심의 확산은 진정한 휴머니즘의 실천이 될 것이다. 신경생리학, 생체의학, 철학, 종교학, 비교문학을 아우르는‘통증’이란 감각과 감정에 대한 이보다 압도적인 저술은 당분간 없을 것이다. 의료인은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일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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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는 환상 -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세계는 어떻게 달라지는가
알렉스 캘리니코스 지음, 이수현.천경록 옮김 / 책갈피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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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위기다!” 이 급진적인 선언은 2008년 9월 리먼브라더스의 파산을 시작으로 세계의 경제를 위기로 전락시킨 미국 발(發) 금융 붕괴가 의미하는 세계경제에 대한 저자의 분석 결과이다. 그래서 1930년대 대공황 이래 최대 규모의 금융폭락으로 지구경제를 오랜 침체로 몰아넣은 이 사건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본질 자체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렇지 않다면 단순한 경기순환의 일부일 뿐이며, 일부 부패한 거대 금융기업 탓이기만 한 것인지를 추적한다. 또한 시대의 획을 긋는 사건으로 2008년 8월 그루지야와 러시아의 짧은 전쟁이 미국 헤게모니의 최종위기와 세계체제의 전반적 재편의 서막(序幕)을 알린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이었음을 지적하며, 미국주도의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체제의 리더십 약화와 다극화하는 세계의 경제체제를 성찰하고 있다.

사실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사적 소유권과 계급의 관계성이나, 이윤의 원천이 되는 잉여가치율, 현대 경제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무산임금노동자를 양산하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존재조건 등에서 자본주의가 내재적으로 자체 붕괴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진부하기조차 하지만, 이 저술이 바로 오늘의 우리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통해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적 불안정성을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그 시사하는 바를 결코 낡은 가치라 외면하기만은 힘들게 한다.

특히 이번 금융붕괴가 가져온 파장은 단지 금융부문뿐만 아니라 산업일반을 포함한 국가경제 전체의 혼란과 침체를 야기했다는 점에서 이것이 자본주의의 구조나 경향과 얼마나 관계가 깊은지를 이해하는 것은 중대한 의미를 지닐 것이다. 결국 회오리처럼 경제전반을 빨아들인 금융의 오늘의 속성을 이해하는 것인데, ‘신용’의 대두와 이에 기반한 금융파생상품은 물론 개인의 신용카드까지 모든 금융주체를 금융의 그물망 속으로 엮어 넣은 오늘의 경제사회의 모습을 보면 굳이 부가설명이 필요치 않음을 이해할 것이다. 더구나 신용의 문제는 부풀려진 자본의 증식으로 인해 생산자들에게 잘못된 가격신호를 보내고 이는 불균형과 과잉축적의 경향을 악화시키는 원인이 된다. 여기에 논의의 타당성과 검증 가능성을 부여하기 위해 저작의 많은 부분을 시장자유주의자들과 케인주의자 및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을 바탕으로 한 경제정책의 이견을 담아내어 실증적인 규명을 하여 이해를 제고시키고 있다.

예로써 시장자유주의자들이 외치는 신자유주의의 주요 목표는 국가의 징세 및 지출 능력의 제한과 억제, 규제완화와 사유화 등의 작은 정부와 경제 불간섭과 같은 방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금융시장이 붕괴하자 세계의 여타 국가들에 규제완화와 공기업화, 재정지출의 삭감을 압박하고 강요하던 신자유주의 선봉장인 미국과 영국은 어떤 행동을 했을까?  정작 자신들이 궁지에 빠지자 미국은 프레디맥, 페니메이, AIG등 금융기업을 인수하여 국유화하였으며, 영국은 스코틀랜드왕립은행과 로이드뱅킹의 최대주주가 됨으로써 재국유화하는 등 저네들이 먼저 신자유주의의 실천을 배척하였다. 결국 국가의 적극적 개입을 통해서 비로소 위기를 모면하였다는 의미로, 이는 시장의 자동조종기능을 외쳐대던 자유주의자들의 소리가 얼마나 허망한 위선인지를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자본주의체제에서 노동생산성보다 낮은 임금을 지급함으로써 생산성의 성과를 자본이 가져가는‘노동착취’와 ‘자본의 가치를 떨어뜨림’으로서만 이윤율을 높일 수 있음은 대개의 사람들이 주지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이윤율 증대 방법이 세계경제 순환의 강력한 축이 되어 작동하고 있음을 미국과 중국이라는 양극단의 경제를 통해 목격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 온다. 일종의 ‘국가자본주의’를 구사하는 중국의 경우 막대한 자본축적은 물론 국민총생산규모에서 일본을 제치고 미국 다음인 세계2위에 올라섰다. 국내소비는 GDP의 절반도 안 되고 빈민이 8억 명에 이르는 후진국인 중국이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자본축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중국 노동자들의 낮은 소비, 즉 노동 착취기반에 서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반면 미국이란 나라가 부채경제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것은 이젠 삼척동자도 아는 얘기다. 동아시아국가들이 착취경제로 쌓아 축적한 자본은 미국의 싸구려 자산과 국채를 사도록 종용되고 또한 달러가치의 하락을 방조함으로써 자신들의 채무를 줄이고 유입된 자본을 마구 써대는 파렴치한 구조이다. 결국 이러한 상시적인 불안정과 불균형의 동반관계와 자본주의의 자기 파괴적 속성은 지속 가능한 체제가 되기에는 본질적인 문제를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서 금융붕괴로 인한 은행 및 기업의 구제금융은 현대 자본주의가 직면한 딜레마를 여실히 보여주기도 한다. 망하는 기업은 파산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국가가 나서서 재정을 투입하여 회생시키는 것이 바른 것인가? 아마 이번과 같은 글로벌화 되어있는 거대금융기업들의 연쇄 적 도산을 그냥 방치했다면 자본가치의 한없는 추락으로 오랜 기간의 심각한 불황을 헤어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대대적인 재정투자로 자본가치의 폭락을 막는 조치는 과잉축적으로 인한 수익성의 위기가 해소되지 않고 위기가 장기화된다는 문제를 갖는다. 이러나 저러나 딜레마를 해소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자본주의가 수십 년간 해결하지 못하고 낑낑대던 근본적 모순”을 드러낸 것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처럼 2008년 금융붕괴가 표상한 세계경제의 혼란은 자본주의가 지닌 구조적 불안정성과 한계라고 지적하면서 자본이 가졌던 권력이 국가로 이동하였다고 주장하며, 현재는 자유시장과 상품화 증대에 따른 고통이 너무 커져 반작용으로 규제강화와 탈상품화 움직임이 출현하는, 아직은 이름이 없는 그 무엇인‘착근된 자유주의’라 명명하면서 시장경제가 헤게모니를 누리던 시대는 끝나고 있다고 단언한다. 그렇다고 딱히 시장경제를 대신할 만한 믿을만한 대안 체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자본주의의 대안 모색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이로서 국유화, 소유관계의 완전 폐지, 자본주의 분업의 전면 타파, 협동적 생산형태와 같은 아주 급진적인 체제의 혁신을 내놓는데, 다분히 마르크스 공산주의의 이상과 결부되어 논의의 실효성에 의문을 낳게 한다. 다만, 경쟁논리가 지배하는 시장경제의 대체안으로서 ‘앨버트’의‘파레콘(참여경제)모델’이나, ‘팻 드바인’의‘협상에 의한 조정’모델의 아이디어를 토대로 한 자원배분의 민주적 발상 등은 미래 인류사회를 위한 중요한 참조가 되기도 한다.

수출주도형 경제가 초래하는‘바닥을 향한 경주’를 막기 위해 수요를 키우려면 소득분배의 형평성 실현 노력이 필요한 것이 당연하며, 따라서 최저임금, 노동조합, 기타 사회보장제도의 확대는 중차대한 요소가 될 것이다. 또한 외국자본의 급격한 유출입으로 막대한 고통을 경험한 우리로서는 강력한 자본통제 시스템의 구축 또한 시급한 것이다. 각국의 자본주의는 더 이상 획일적이지 않다. 네거티브한 러시아나 중국과 같은‘국가자본주의’에서부터 남미 국가들의‘사회주의적 시장경제체제’, 그리고 여러 변형된 자본주의가 공존하고 있다. 국제수준의 자유주의와 국가개입 강화가 결합된 오늘의 착근된 자유주의 체제에서 이미 종주국들도 지키지 않는 신자유주의를 고집하는 우리의 경제체제는 숙고할 당위성이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폐해와 불평등과 불안정에서 인류 사회를 해방시키기 위한 또 하나의 탁월한 담론인 이 저작은 세계체제의 폭넓은 분석의 틀을 제공하여 자기반성과 미래에 대한 귀중한 숙고의 시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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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숨은 그림 읽기 - 보았지만 읽지는 못한 명화의 재발견
전준엽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시대나 사조의 순에 의하지 않고 감상의 느낌이나 이야기와 주제로 구분하여 작품을 소개하고 있는 구성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일부 작가는 서로 다른 감상의 장(Chapter)에서 발견되어 특정 작가의 또 다른 작품세계를 느낄 수 있기도 하다. 대략 60인 남짓한 동서양 화가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지만, 미술작품에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대중에게는 비교적 낯선 조르주 라투르, 자크 루이 다비드, 빌렘 헤다, 마리 로랑생, 카스퍼 다비드 프리드리히 등 화가들의 명화(名畵)세계를 접함으로써 회화 감상의 폭을 확장시켜주는 배려를 느끼게 된다.

물론, 바로크, 인상주의, 상징주의, 표현주의 등 각각의 미술 사조(思潮)를 대표하는 로렌초 베르니니, 얀베르메르, 외젠 들라크루아, 빈센트 반고흐, 폴 고갱, 오귀스트 르누아르, 프리다 칼로, 클로드 모네, 폴 세잔, 조르주 쇠라, 구스타프 클림트, 에드바르 뭉크, 바실리 칸딘스키 등 화가들과 명작들에 대한 저자의 특별한 감상 포인트와 뒷이야기들이 회화의 감상을 풍성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다만“미술 지식 없어도 쉽게 읽는”명화의 재발견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듯이 감상 포인트까지 일일이 표기하고 있어 작가의 해설이 혹여 독자의 감상을 획일화 할 수 있겠다는 우려도 살짝 들기도 한다.

그러함에도 항상 난감함을 느끼게 하는 화파(畵波)와 시대의 관계성에 대한 무지로 인해 감상의 깊이를 방해 당했던 기억을 하면 해당 작품에 깃든 시대상이나 신화와 전설, 작가의 작업 환경, 사생활, 일군의 화가들의 시대변혁에 대한 저항과 같은 배경 지식은 감상자의 위치에서 고마운 지식이 아닐 수 없다. 성(聖)스러움과 관능의 그 교묘한 경계를 생각하면 떠오르는‘로렌초 베르니니’의 <성 테레사의 법열>이라는 작품에서는 감상이상의 도움을 받고, 정신과 물질, 보수와 혁신의 대비를 비로소 보게 해준‘얀베르메르’의 <저울질 하는 여인>은 그 작품의 해독뿐 아니라 35점에 불과한 희귀성으로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는 의외의 세속적 정보까지도 얻게 된다.

특히 회화의 주류세계에서 벗어나 있던 영국회화를 서구미술의 중심으로 이끈‘폴 내시’를 비롯한 몇 몇 화가들, 여성에 유난히 인색한 미술계에 여성적 감수성 그 자체로 훌륭하게 자신만의 세계를 구현한‘마리 로랑생’의 <코코 샤넬 초상>이란 작품에 얽힌 이야기와 유명한 시(詩) <미라보 다리>의 시인‘기욤 아폴리네르’와의 사랑에 관한 일화는 문학적 감수성까지 자극할 정도이다.

이에 더해 정물화가 독립적인 회화장르로 발달하게 된 대표적 화가인 17세기 네덜란드의‘빌렘 헤다’의 ‘바니스타 정물화’의 미술사적 지식이나, 당대 사교계의 여왕이었던 소설가‘조르주 상드’와 염문을 뿌리기도 했던‘들라크루아’나,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 유명한 에로티즘의 극치를 표현한 <다나에>의 실제인물인“오스트리아의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 불렸던‘알마 말러베르펠’의 일화는 회화 감상을 매력적이고 흥미진진한 세계로 안내하기도 한다.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와 ‘베첼리오 타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비교함으로써 "알몸(Naked)과 누드(Nude)", 즉 매춘부의 알몸과 비너스의 누드라는 모호하기 짝이 없는 형이상학적 구분을 해대는 상투적인 인간의 허위의식을 슬쩍 비꼬아대기도 하고, 사랑, 불안, 장엄, 순수, 기쁨, 슬픔, 경건, 사색 같은 정서와 같이 구체적 형상이 없는 것들의 표현으로서 추상(抽象)이 지니는 의미, 나아가 ‘라울 뒤피’나 ‘바실리 칸딘스키’, ‘로베르 들로네’ 등 회화와 음악의 교류, ‘교향곡 같은 예술적 감흥’의 표현에 이르는 작가들과 작품의 설명에서 회화에 대한 이해의 깊이는 물론 그 친근성을 견인하여 구별짓기로서의 문화의 벽을 허무는 성실한 저자의 노력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특히 저작의 마지막 장에는 우리 전통회화의 장을 따로이 수록함으로써, “일본이 우리 문화와 정신 말살”의 일환으로 우리의 회화를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는 억지를 주입키 위해‘동양화’라고 그 주체성을 상실시킨 용어는 더 이상 지양되어야 할 것이라는 요구는 채색화, 수묵화와 같은 우리고유의 회화특성으로 전환하여 부르는 중요한 각성이 된다. “가장 위대한 예술은 가장 쉬워야 한다.”는 신념을 지켜내면서 이처럼 풍성한 미술의 지식을 품어낸 저술도 흔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대중 독자들을 향한 작자의 애정과 진실이 느껴지는 훌륭한 미술 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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