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소설집에서 첫 대면하게 되는 단편,「로봇」의 주인공인 여행사 여직원의 “삶이란....젖은 우산처럼...참고 견디는 것”이라는 삶의 체념 같은 우울한 독백은 우릴 에워싸고 있는 인간군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게 한다. 돈으로 섹스를 강요하는 여행사 사장을 벗어나 로봇이라 주장하는 남자와의 일탈이 SF물이면 단골처럼 등장하는‘로봇 3원칙’의 딜레마를 이유로 차이는 장면은 지극히 코믹스럽다. “열정적 사랑은 인간인 당신을 헤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라고. 이 웃기는 기계적이고 계산적인 세상에 결코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듯이 말이다.

이처럼 이 소설집에 수록된 13편의 장, 단편(掌, 短篇)에서 한결같이 자신의 기대와는 터무니없이 엉뚱한 상황에 이르는 인물들을 보게 된다. 그네들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결코 그네들 자신이 아니고, 그렇다보니 왠지 세상은 신뢰할 수 없는 불온한 것으로 비추어진다. 결혼을 목전에 둔 후배와의 여행을 강요하는‘한선’이라는 사내나 동해바다로 느닷없이 끌려가는‘수진’의 「여행」이라는 이 희한한 여행기는 그 과정 역시 우발적이지만 폭력과 상처로 귀결되고 홀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쇼핑백의 깨진 사금파리를 움켜쥐는 여자의 불안처럼 희한한 증오만을 남기듯이.

한편 소설들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환경이나 상황을 소재로 하지만, 우리네들의 심상(心相)에 일정하게 은둔하고 있는 감정이나 생각들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서 의외의 결과를 발생시켜 은폐된 진실과 대면케 하는 놀라움이 있다. 그래서인지 진부해 보이는 사람들의 일상에서 의례히 일어나는 이야기들임에도 기이한 매혹을 느끼게 한다. 아마 억눌리고 표현되지 못한 감정의 표현이 야기할 당위적인 기대 결과를 보게 됨으로써 대리 만족, 아니 정화하여 주는 역할까지 하기에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투명하고 깨끗한 피부의 여성을 안내데스크에 앉힌 피부과의 자살 에피소드를 담은「명예살인」이나, 예전의 복수를 위해 코뼈를 부러뜨리는 「오늘의 커피」같은 장편(掌篇)은 입꼬리 올라가는 웃음을 흘리게 한다. 또한 세상 사람들이 반한 자신의 “목소리를 얻기 위해 아무 노력도 한 적이 없음”에도 단지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눈동자에 녹아내리는 사람들의 열광모습에서 언뜻 고딕소설의 섬뜩한 분위기까지 자아내는「악어」라는 작품은 목소리를 잃어버리고 죽은 박제가 되어버리는 장면에서 우연한 기회의 불공평한 미덕을 인정치 않으려는‘존 롤스’의 차등원칙이라는 엄격한 도덕주의를 보는 것 같은 야릇한 진지함까지 읽는다면 지나친 해석이라 할까?

하이델베르크의 한 호텔에서 1년에 한 번씩 만나 정사를 벌이는 두 남녀의 관계를 설명하는“그녀의 그 복잡한 죄책감과 증오, 친밀감에 대한 희구가 뒤섞인, 기이한 감정의 칵테일” 같다는 말은 이 소설집 전체의 내면을 대변하는 느낌이지 않을까 할 정도로 무언가 어울리지 않는 감정들의 집산으로 다가온다. 백화점의 좀도둑이나 잡으면서 사람들의 일상을 쫓는 뱀 같은 형사「조」의 이야기나, 「마코토」의‘지영’처럼 사랑의 요구조차 무의지의 우연성에 의한 결과로 의심하거나, 세상의 권위에 주눅 들어 사는「아이스크림」의 동규, 소비자상담실의 김부장의 모습에서 부조리한 삶의 측은함을 발견하는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산다는 것은 계획이나 의지와는 전혀 다른 예기치 못한 우연의 연속이며, 그래서 오늘과 같이 파편화되고 신경증적인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적당히 체념하고 또 거대한 세상의 흐름 속에 몸을 내 맡겨야 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는 이러한 부조리하고 정의롭지만은 않은 삶의 형상들을 하찮은 해프닝이나 코믹함에 담아 엄숙한 메시지를 의외의 유머로 승화시켜 은근히 저항을 부추기는 것만 같다. 어쩌면“이것은 타락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바른 길을 벗어나 알지 못하는 엉뚱한 길을 우왕좌왕하는 우리네들 모두의 방황에 관한 기록 말이다. 이 소설들에서 나는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거짓 없는 날 것 그대로를 보았다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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