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스 비벤디 -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 유동하는 근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한상석 옮김 / 후마니타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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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문을 열면서 세계의 석학들이 한결같이 외치는 소리는 가치와 문화의 다양성, 진리의 혼돈, 철썩처럼 믿었던 진실의 흔들림으로‘가치는 어디로 가는가?’하는 것이었다. 지구화라는 거센 물결 속에서 마구 뒤섞인 문화와 가치의 충돌과 융합, 그리곤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규칙과 제도들은 사람들에게 잠시도 여유를 주지 않는다. 한 눈을 파는 순간 낙오하고 도태될 각오를 해야 한다. 또한 신자유주의 시장경제라는 자본주의의 파고(波高)는 경제 권력의 지구화를 촉진하고, 미처 지구화되지 못한 정치권력은 지구화된 세계 권력의 방호막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을 기탁하고 의지할 가치의 기준도 상실한 채, 더구나 보호막이 걷힌 벌판에서 스스로 야수에 대적하고 생존해야 하는 극도로 불안한 상태에 놓였다.

‘바우만’의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라는 부제를 지닌 이 저술『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는 이와같은 바로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는 공포, 불확실성의 원인과 이의 규명을 방해하는 걸림돌들을 탐구하고 드러내는 기획이다.
저자는 지금의 지구화는‘부정적으로 지구화된 세상’, 즉 인류의 연대를 약화시키고 파편화시키며, 집단적 방어장치들의 결속력을 약화시켜 개인을 무력화하는, 그래서 두려움의 공포로 자신의 안전에 전전긍긍하는 문제만을 노정시키는 세상으로 인식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지구화가 지향하는 약육강식의 시장경제 압력은 규제의 철폐를 강요하고, 약자들의 집단적 연대를 해체하며, 따라서 개인을 보호하는 국가의 제도적 장치를 점점 와해시킨다. 이로인해 의지할, 보호할 안전지대와 장치들을 잃어버린 개인들은 스스로의 안전벽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결국 국가나 집단의 안전보호 책임이‘개인의 몫’이 되어버렸다고 지적한다.

이와 더불어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의 “자본주의는 자기 꼬리를 잘라먹고 사는 뱀과 같다.”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자신이 뜯어먹던 타자성의 마지막 풀까지 먹어치우고는 굶어죽는 근대성의 치명적 결과로서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는 '인간-쓰레기(Wasted Human)' 를 처리할 배출구의 차단과 공급 불능성의 현실을 적시하고 있다. 지구화가 만들어낸 인간적 유대의 소멸, 연대의 약화는 필연적으로 노동시장의 유연성 강화로 잉여인구를 급격하게 양산하고 있으나, 역으로 전지구화된 세계는 이제 어디에도 배출지, 배출구가 들어설 여지를 없애버려 이미 지구의 관리 능력을 초과하고 있음에도 해결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전지구적 문제를 지역적으로 해결하려는 사이비 해결방책이란 것으로 난민수용소와 같은 격리공간으로 대처하고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으로 근원적 해결책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밖에 인종청소와 같은 부족간 전쟁과 학살, 상호조직의 살해 등으로 잉여 인구를 흡수하는 참혹한 해결이 그나마 현실로 자행되고 있을 뿐인 것이 오늘 인류의 실상이다. 즉 지구화된 문제를 이러한 모순적인 지역의 해결이 아니라 지구화의 문제로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근원적 접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선두주자들인 선진국, 지역 내부적으로는 기득권을 확보한 지배 권력이 후발주자, 약자를 격리하고 배제하는 것이 아닌 공존의 해결책을 내놓는 것이 지속가능한 인류사회를 위한 불가결의 대책임을 인정하는 것은 실로 어렵고 고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잉여인력, 불필요해진 인간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쓰레기 인간의 판정 기준은 갈수록 그 구분이 모호해지고 있다. 오늘의 정상이 내일의 비정상이 되는 잠재적인 인간-쓰레기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제 소수의 권력자들, 특권층을 제외하면 모든 사람들이 쓰레기가 될 개연성에 놓여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자기 자신의 안전을 보호 할 수 있는‘일신의 권리’를 위해서는 게임 참가들을 속박하는 규칙을 만드는‘정치적 권리’를 획득하지 않으면, 이 기초적이고 근원적인 일신의 권리마저 확보키 어려운 것이기에 일신의 권리와 정치적 권리는 필연적으로 공히 확보되어야 하는 개인의 권리라고 주장하며, 이와 더불어 생존의 유지를 위한 실천적 권리인‘사회적 권리’가 없이는 정치적 권리 또한 공허한 것일 수밖에 없기에 이들 세 개의 권리는 시민들을 위한 필수적 권리임을 강조하고 있다.

성급하지만 이쯤에서 지금의 세상이 유토피아인가, 아니면 지옥인가를 논의할 수 있을 것 같다.“예전의 성벽과 해자와 작은 탑, 총안(銃眼)을 기술적으로 갱신해 놓은”것의 다름 아닌 현대의 구분하고, 격리하며 배제하는 도시 공간의 모습은 곧 지금까지의 한계에 봉착한 쓰레기 처리와 안전망을 상실한 개인으로 야기되는 불안과 안전위협의 공포를 회피하기 위한 분리의 형상이라 할 수 있다. 짜증나고 혼란스러우며 비위에 거슬리는 낯 선 감정은 특권층에게 분리주의적 충동을 자극하고, 함께 지내는 것의 위험을 단절하기 위해 선을 긋고 자신들만의 유배지, 섬을 지향하게 하지만, 이는 생활세계에서 두 범주의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완벽하게 단절하게하고 오히려 적대감으로 광범위한 긴장관계를 강화할 뿐이라고 지적한다. 이질적인 집단에 대한 공포를 회피하기 위해 사람이 앉지 못하도록 비탈공간을 만들고, 가시밭 공간을 조성하며, 순찰 경비원을 세워 접근을 방어하는 공간 분리는 거주자들의 차이에 대한 내성을 오히려 약화시켜 더욱더 위험을 증대시킬 뿐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근대의 관리하고 보호하는‘정원사’의 마음가짐이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자기의 자루를 채워줄 큰 사냥감을 죽이는 것이 유일한 일인‘사냥꾼’의 자세에 밀려나, 모든 사람들이 사냥꾼처럼 행동하도록 요구받거나 강요당하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사냥꾼처럼 행동하지 않으면 사냥감이 되거나 아니면 사냥꾼의 대열에서 추방당하여 인간-쓰레기가 되도록 되어있다. 그래서 이 쓰레기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죽도록 뛰어다녀야 한다. 결코 이 대열을 이탈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소통이 단절되고 입구를 차단하며 서로를 분리하는 것, 사냥꾼으로 영원히 대열을 지켜야 하는 것, 점점 부정적인 지구화로 내모는 신자유주의의 소비자향의 시장경제 사회가 유토피아인가? 사람들은 이제 유토피아는 몰락했고, 종말을 고했다고 선언하기도 한다. 예전의 미래의 행복을 찾아 헤매던 유토피아가 아니라 예상만큼 좋지 않은 현재의 유토피아로부터 도망가는 것, 즉 실패한 유토피아로부터 도망가기에 급급한 것, 유토피아의 실현이라기보다는 유토피아의 뒤를 쫒기에 바쁜 것이라는 다른 표현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세상은 바로 지옥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시간은 계속 흐르므로 파도의 흐름을 타라! 가라앉기 싫은가? 그러면 파도를 타라!” 이 무참한 사냥꾼의 논리가 지옥과 무엇이 다른가. 지옥이라 부르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온갖 종류의 압력에 당당히 맞서 싸우지 않으면, 지역의 그 참혹한 사이비 해결책에, 적대감으로 부글거리는 그 위험천만한 공포와 죽음의 현실을 직면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이 아슬아슬한 잠정적 협정의 세상에서 개인의 확고한 안전과 자유를 확보키 위해 정치적 권리, 사회적 권리를 향한 외침은 더욱 더 크게 외치고 유대와 결속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온통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아우성을 치는 오늘의 우리들이 바로 이미 무력한 사회로 접해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는‘바우만’의 지적은 그래서 더욱 불안하게 유동하는 오늘을 탐구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지구화가 낳은 문제와 지옥 같은 오늘을 극복하기 위한 번뜩이는 통찰과 담론의 세상이 유쾌한 지적 성찰로 잘 빚어진 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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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란
공선옥 지음 / 뿔(웅진)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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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죽음, 이별이란 상실, 그리고 여러 유형의 회한 등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삶에 노출되었을 때, 미처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 쉬이 적응하지 못하고 오랜 방황과 심지어는 죽음까지를 선택하기도 한다. 인생이란 걸 살아오다보니 이러한 때가 역시 나를 피해가지도 않았고, 그 시간을 떠 올리면 지금도 속에서 밀려올라오는 울음이 있다. 더구나 소설 속‘정섭’이란 인물처럼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 단 한 사람에게 이해받고 싶지만”, 내 마음을 보여 줄 단 한 사람이 없어 너무나 쓸쓸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깊은 밤 홀로 이불을 감싸고 억눌렀던 울음을 남 몰래 터뜨렸고 그 후련한 여운에 비로소 정화된 느낌으로 잠에 빠져들기도 했다.

작가의 말처럼 “슬픔의 사람이 어떻게 슬픔을 딛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되는가”는 타인의 아픔에 조응하는 낯선 경험에서, 자신이 아프니 다른 이의 아픔을 이해하는 것처럼 다가오는 모양이다. 슬퍼하는 사람들, 바로 오늘의 우리들을 얘기한다. 아이를 잃고, 그 상실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이내 자살한 남편, 어느새 세상에 오직 혼자만이 된 여자의 그 고립이 슬픔을 넘어 두렵기조차 할 만큼 절망적으로 느껴진다. 딱히 전할 의미도 없는 갚을 수 없게 된 인세를 이유로 만난 소설가‘정섭’을 따라 상가(喪家)의 문상을 위해 목포를 향해 가는 여자의 무력감과 연약하고 시린 모습을 그릴 수 있을 것만 같다.

소위‘변명의 여지없는’의도하지 않은 실수로 인해 독일로 떠나버린 아내와 딸을 등지고 세상의 온기를 온통 잃어버린 채 한기에 허우적거리는 중년의 남자, 자신의 삶 속에 꽁꽁 묶여있던 아이와 사랑하는 남편, 장미가 피어나는 그네들의 숨결이 배어든 집조차 훌훌 사라져버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여자, 쇠락하는 항구의 초라한 여관과 오랜 세월 사랑하는 이를 가슴에 묻고 사는 늙은 아낙, 귀머거리 딸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 손끝이 닳아져라 낡은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늙은 아비와 그 속의 울음을 아는 딸의 슬픈 미소가 오랜 세월 수탈과 강요된 희생의 사연을 간직한 항구 목포와 어울려 더욱 애잔한 물결을 일으킨다.

정섭이란 낯선 이를 따라 무작정 내려온 목포, 그리곤 사라진 남자, 갈 곳 없이 찾아든 여관에서 여자는 자살을 시도하고 여관의 노인과 손녀인 여자아이의 미소 속에서 깨어난다. 여자는 허드렛일을 도우며 그네들의 일원으로 주저앉는다. 그래서 가진 이름은 영란여관의 이름을 따라‘영란’이가 된다. 한편 여자를 목포에 두고 떠나온 남자‘정섭’은 사랑하는 이들을 모두 떠나보내고 너무 아파하던 여자의 행동이“나를 좀 도와주세요”라는 노크였음을 깨닫고, 항구의 낯선 거리를 헤매고 있을 것만 같은 여자에 대한 생각으로 향한 목포의 기행은 삶이 척박한 우리네 인생살이, 바로 사람들의 아픔에 공명하는 시간이 된다.

일명 통혁당 사건으로 불리는‘임자도 간첩단 사건’의 희생자 가족인 영란여관의 할머니와 그녀의 아들‘김헌’, 그리고 잔혹한 고문을 피하기 위해 거짓 증언을 할 수 밖에 없었던‘정영술’노인의 회한의 삶, 저마다 사랑과 이별의 아픔으로 곤혹스러워하는 빈약한 우리 민중들의 애환이 도시를 내려다보는 유달산의 구슬픈 노래소리에 묻혀 그렇게 또 그러하게 흘러간다. 부모 잃은 아이의 까까머리에서 나는 어린아이 냄새, 그 슬픈 내음에서 자신의 상처가 어루만져지고, 늙은 아비의 울음 섞인 악기의 소리에서 슬픔을 토닥거리는 위안을 얻는다. 치매 얻은 노파의 웃음과 악다구니의 반복에서 아무에게도 해 끼치지 않고 살았던 우리들의 어머니 모습을 본다. 그렇게 여자와 남자, 우리들은 또 다른 우리들의 슬픔을 보면서 위로하고 위로받으며 살아간다.

생애 어느 한 때, 내 인생이 가장 환히 빛나던 화양연화(花樣年華)의 시절이 있었던가 하는 작품 속 한 구절이 왠지 잊혀지지 않는다. 따사로운 햇살아래 삶이 충만하여 발그레하게 익은 볼을 하고 마냥 즐겁기만 했던 어느 날, 그 어느 시절을 떠 올리려 애쓰는 나를 보게 된다. 영란을 사랑하는 순수하기만 한 청년‘완규’의“대책 없이, 무방비로, 그냥, 좋다고, 헤, 하고” 웃는 그 표정처럼 웃어 보았던 때가 언제인지 아득한 것만 같다. “세상의 아픈 것 짠 것 다 보듬어 불면 큰마음이 될 것이다.”는 영란여관의 안주인이 들려주는 말처럼 삶의 슬픔이란 또 사랑하고 이별하고 상처받으며 이겨내는 것일 것이다. 주류에서 소외된 남도의 항구도시, 목포를 공간적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에서 조폭어로 왜곡된 낯설지만 정감어린 친근한 사투리들과 오래되고 쇠락한 골목길을 닮은 사람들의 사연들에서 살아야만 하는, 아니 살지 않을 수 없는 정말의 위로를 받게 된다. 물리적 삶의 기반도, 정신적 토대도 빈약한 우리네들의 삶을, 우리네들의 등을 따뜻하게 쓸어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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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비지 가든
마크 밀스 지음, 강수정 옮김 / 비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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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들이 발산하는 지성과 유쾌함, 그리고 우아함 때문일까? 작품 전체를 우울한 아름다움이 감아 돈다. 매력적인 사람들, 오랜 세월 지켜온 비밀을 잔뜩 품고 있는 듯한 피렌체 남쪽 투스카니 산자락 거대한 저택과 근처 골짜기에 조성된 작은 숲의 추모정원이 어울려 매혹의 세계로 안내한다.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사랑과 욕망, 질투와 허영, 그리고 죽음의 신화가 잇닿아 있는, 그래서 가벼운 흥분과 설렘, 알 수없는 호기심이 몸을 가득 채운다.

케임브리지大 재학생인‘애덤’은 지도교수인‘크리스핀 레너드’교수가 졸업논문 주제로 제안한 투스카니 지방의 작은 정원을 연구하기 위해 피렌체로 향하고, 교수의 옛 친구인‘프란체스카 도치’여사의 저택이 품고 있는 작은 추모정원의 예술적 진실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다. 1577년‘페데리코 도치’가 직접 설계하고 조성하여, 죽은 아내‘플로라’에게 바쳤다는“추모정원으로 들어가는 길에 빽빽한 호랑가시나무 숲이 위협적으로 조성”되어있어, 입구를 들어서는 순간 무단으로 침입한 듯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무언가의 부정한 의도를 감지한다.

400년의 세월을 간직한 작은 정원이 400쪽에 이르는 작품을 가득 채울 정도의 마력을 뿜어내는 것은 예술과 자연이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풍성한 지적 향기 때문일 것이다. 정원에 세워진 조각상들과 부조들의 조사를 위해‘오비디우스’의『변신』과 『달력』을 통해 유추하지만, 죽은 아내를 표현한 조각상의 얌전을 빼면서도 유혹하는 듯한‘추모’와는 조화롭지 못한 몸짓은 더 이상 연구를 진척시키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히아킨토스’,‘나르키소스’,‘아도니스’ 등 전부 비극적으로 죽음을 맞은 부조들을 보면서,‘단테’의 『신곡』, 「지옥편」의 기억에 이른다. 수세기 동안 지켜진 침묵을 풀어내려는‘애덤’의 일과는‘푸생’의 풍경화처럼 펼쳐진 낭만적 배경, “무심한 듯 어떤 허영도 담고 있지 않는”도치여사의 손녀인 아름다운 여인‘안토넬라 볼리’의 사랑의 지원 속에서 한 걸음씩 나아간다.

24살 안토넬라의 나이로 추정해보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1957년이 되고, 독일군이 퇴각할 때 살해되었다는 도치여사의 큰아들‘에밀리오’와 굳게 잠긴 저택 꼭대기 층의 비밀은 시간의 근접성으로 현재화되어 정원의 비밀에 더해 이야기를 더욱 미스터리한 국면으로 이끈다. 죽은 에밀리오의 사진을 애덤에게 보여주는 도치여사의 행동, 유전적 형질표현을 통한 출생의 비밀, 저택과 소유토지에 대한 탐욕을 보이는 둘째 아들‘마우리치오’까지 가세하여 사랑과 상실, 욕망이라는 영원한 인간의 메시지가 도치 저택을 휘감아 돈다.

“이별의 시간이 도래하여 우리는 각자의 길로 헤어지니, 나는 죽고 너는 산다. 어느 것이 더 나은지는 오직 신만이 안다.”는 소크라테스의 웅변이 새겨진 추모정원과 폐쇄된 꼭대기 층은 혐오와 증오를 상기하는 교묘한 상징으로 전환된다. 화려함과 쾌활함의 이면에 간직된 야만의 비밀들이 우아한 지성의 내음에 실려 복선과 반전조차도 예술적 문장을 배반하지 않는다. 달콤 쌉싸래하면서도 조금은 위험한, 그러나 결코 미적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미스터리의 수작(秀作)이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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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록 문학동네 한국고전문학전집 3
혜경궁 홍씨 지음, 정병설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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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살에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사도세자의 아내이자, 영조의 며느리로, 그리고 정조의 어머니, 순조의 할머니로 살기까지 살얼음판 같기만 했던 18세기 조선왕실을 견뎌낸 여인의 사적(私的)기록이라 하여야 할까? 물론 역자는 사료와 기록들을 바탕으로 개인의 기억이란 사실을 입혀 재구성한 기록이기에 여느 사료에 못지않은 진실성과 사적(史的)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지만, 아버지 홍봉한에 대한 의지가 자못 큰 것이었음을 고려할 때, 그리고 사도세자의 죽음이라는 민감한 정치적 사안으로 가문의 생사가 걸려있음을 감안할 때 객관적이라거나 당파와 사적 이해관계를 초월한 균형적 기록이라 하기에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옳은 시각이리라 생각된다.

이 번역본이 의미를 갖는 것은 다양한 이본(異本)들. 특히 버클리大 소장본인 『보장(寶藏)』의 반영과 기존에 빠져있던「병인추록」을 추가하여 가히 한중록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본 책(冊)의 말미에 실려 있는 병인추록의 내용은 혜경궁 홍씨 자신과 자신의 집안에 끊임없이 모함을 가해온 소위 그의 입장에서 역도들에 대한 패악함과 무도함을 남김없이 드러내어 자신과 가문의 억울함과 부당함을 강력하게 호소하는 것이다. 이는 역자가 임의로 편성한「사도세자」편과「나의 일생」편에 이어 일종의「친정을 위한 변명」편이라 할 수 있는「읍혈록」과 같이 편성된 것처럼 자기방어 또는 정당화라는 변명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중록에 대한 관심은 18세기 내내 조선왕실과 조선정치 사안의 뜨거운 감자일 수밖에 없었던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진실이다. 여기에 정사(正史)로 읽히기에는 사적 판단과 특정 당파의 관점, 정치적 당사자라는 측면에서 무리가 있지만 당대 왕실의 예법이나 사적인 역학관계, 정사에 기록되지 못했던 이면의 진실, 당사자로서의 생생한 증언으로서의 역사적 가치는 귀중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실례로 왕조실록과는 달리 사도세자의 첩실 소생들에게 한낱 밤을 나누어 준 것이 빌미가 되어 역모의 조짐이라고 일파만파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했다는 이야기는 영조와 사도세자를 둘러싼 척실들의 권력투쟁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케 하기도 한다.

사도세자의 뒤주에서의 죽음(임오화변(壬午禍變))은, 왕세자가‘뒤주’에 갇혀 1762년 무참히 죽음에 내몰리게까지 된 과정과 연유의 석연찮음이라 할 수 있다. 혜경궁은 아비 영조와 아들 경모궁(사도세자)과의 불화, 즉 영조의 경모궁에 대한 경시와 불신, 이로 인해 야기된 경모궁의 영조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증, 화병이 광증(狂症)으로 심화되어 불거진 불가피한 결과로 설명하고 있으며, 더구나 사도세자의 생모인 선희궁이 자식의 사사를 간청했을 정도라는 언급은 왕조의 수호라는 명분을 대고 있지만 미심쩍은 대목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결국 250여년이 지난 지금에 우리들은 각 당파의 서로 다른 관점을 볼 수 있다. 노론과 소론의 격렬한 권력투쟁의 희생양이냐, 광증에 시달리는 자식을 없앰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보전키 위한 불가피한 행동이었는가와 같은 주장에서부터 뒤주를 누가 들여왔는가, 영조가 사도세자를 가두는 엄명을 내릴 당시 입회한 자는 누구인가에 이르기까지 분분한 견해들이 있다. 다만, 세자빈으로서 혜경궁이 아비인 홍봉한에 대한 애끓는 효심이나 정치적 조언이나 생존지혜를 공급받고 있었음을 볼 때 행간의 의미를 읽어낼 수 있는 중대한 근거임은 분명하다. 그 역사적 판단은 우리의 몫이다.

한편 나의 일생이라 하여 기술되고 있는 부분은 세자빈 간택의 절차와 과정, 왕실의 어른들인 인원왕후, 정성왕후, 선희궁부터 상궁과 시녀에 이르는 궁중여인네들의 생활상과 위계, 홍씨 가문의 가계와 친정 식구들의 부침, 첩실과 그 소생들에 대한 정실로서의 시선 등이 그려져 있어, 왕실 여성들의 권력과 이해관계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한중록의 사적 가치는 자신과 자신의 홍씨 가문을 변론하는 읍혈록이 아닐까한다. 여기에는 정조의 효심과 정조에 대한 어미로서의 기대가 결합하여 가문의 보호와 적대세력에 대한 증오가 비교적 선명하게 노골적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정성왕후가 죽자 66세의 노인인 영조에 왕후로 등극한 15세의 정순왕후와 그 척족 세력을 비롯한 반대세력 인물들의 면면과 모함의 이야기들, 후일 철종의 할아버지가 되는 은언군, 흥선대원군의 할아버지가 되는 은신군 등 사도세자의 첩실 소생들을‘그것들’, ‘잡것’이라 천하게 지칭하는 것이나, 명문가문을 내세우는 것 등과 같은 엄격한 계층의 구별 짓기, 아버지 홍봉한의 왕실에 대한 충성심과 치적 등을 통해 왕실의 정통성을 수호하기 위한 자신과 자신의 가문에 대한 눈물겨운 고충과 노력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실 혜경궁의 글이 기술하는 내용으로만은 관련 사건에 대한 평가나 세세한 기록을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갈 수 있으나, 관련 글 뒤에는‘한중록 깊이읽기’가 마련되어 있어 보다 심화된 성찰이 가능하도록 돕고 있는 것은 이 책의 커다란 장점이라 할 수 있다.

권력을 위해서 오늘의 아군이 내일은 적군으로 돌변하고, 낯 앞에서와 돌아서서 하는 다른 말, 하물며, 바닥에 손가락 글씨를 써가면서 까지 왕에 간사함을 부려대는 사람들, 하찮기가 이보다 더 할 수 있을까하는 사소한 것들로 정치적 입신을 위해 교언(巧言)을 일삼는 당시의 권신세력들을 보는 것은 일면 참담하기도 하지만, 최고의 권력집단에 있었던 여성의 내밀한 폭로이기에 그 사실성을 직면케 되는 것은 어쩜 후대의 사람으로서 감사해야 할 일이기도 할 것이다. 역사서로 읽을 것인가, 아니면 왕실여성의 회고록이나 자전으로 읽을 것인가는 완전히 독자의 관점에 달린 문제이다. 그러나 이 관점의 선택은 중대한 결과의 차이가 있다. 즉 진실성과 객관성에 대한 사적 판단이 걸려 있기에 그렇다. 비록 픽션이지만 문학작품에서, 드라마와 영화에서, 그리고 인구에 회자되는 많은 구전이야기들에서 영,정조대의 이야기만큼 잘 알려진 것도 없다. 한중록이 비록 정사는 아니지만 그녀의 집필 동기처럼 가장 가까이에서 실제 당사자로서 지켜보고 겪었던 일들이기에 그 믿음을 결코 간과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한중록의 읽기는 바로 그 사실의 근접성에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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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10-29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중록에 대한 판단은 늘 독자의 몫이군요. 문학동네에서 한국 고전문학전집도 나온는걸 필리아님 덕분에 알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필리아 2010-10-29 09:13   좋아요 0 | URL
노론의 수장인 아버지 홍봉한의 영향력을 배제할 수 없는 입장인 혜경궁의 글이기에 그녀의 기술을 전적으로 신뢰하는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죠.../지금까지 출간된 주석본 내지 번역본중 가장 이본을 많이 반영하여 완결성을 높인 책이 아닐까합니다. 감사합니다.
 
리틀 슬립
폴 트렘블레이 지음, 이소은 옮김 / 비채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사고의 상처가 남아 한쪽 눈은 아래로 쳐져있고 일그러진 얼굴모양을 감추기 위해 덥수룩한 수염을 기르고 깊숙이 눌러쓴 중절모와 때에 전 트렌치코트를 휘날리는 남자의 모습은 작품의 모두를 장식하는 주인공의 인상처럼 시대착오적이고 인습과는 동떨어진 그 어떤 인물을 상상케 한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기면증이라는 통제불능의 수면증까지 더해 왠지 찌질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는 일이라고는 탐정사무실과는 어울리지 않는 심부름센터를 연상시키는 조잡한 허드렛일을 대행하는 것으로 나이 삼십에 접어든 젊은이의 향기를 도저히 맡을 수 없는 형상이다.

기면증으로 사람과 대화를 하다가도, 목적지에 이동하다가도 수시로 자신도 모르게 수면에 빠져들다 보니 현실과 꿈, 상상과 실제의 경계가 그에게는 늘 애매모호하기 그지없다. 이런 자가 누군가에게서 사건 의뢰를 받아 일을 처리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라고 보이지 않는다. 이 무능해 보이는 탐정‘마크 제네비치’의 생각을 쫓다가는 정말 낭패를 보게 된다. 그의 생각, 기억이란 것은 꿈인지, 상상인지, 가공의 기억인지, 아님 진짜 일어났던 일인지 종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면증에서 깨어나 보니 이런 그의 책상에 여자의 사진이 든 노란 봉투가 놓여있고, 의미라고는 찾을 수 없는 자신의 산만한 메모가 끼적여 있을 뿐이다.

아메리칸 슈퍼스타 결승전에 진출한‘제니퍼 타임스’라는 인기스타의 은밀한 사진이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어린시절 친구였던 명망 있는 지방검사‘빌리 타임스’의 딸이 왜 자신에게 사건을 의뢰했는지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대체 그녀가 자신을 왜 고용한 것인지? 허나 제니퍼의 사인회장에서 조우한 그녀는 마크를 처음 본 사람처럼 낯설어 하기만 한다. 결국 사건이 존재하긴 하는 건지조차 의심스럽기만 하다. 사실 소설의 초반은 이처럼 사건이다 할 만한 단서도, 확증도 없을 뿐 아니라, 사건이 있기나 한 것인지, 탐정이란 자가 사건해결 능력을 가지기나 한 것인지 회의가 치밀어 김빠진 맥주처럼 밍밍한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그러나 아버지의 친구이자 제니퍼의 아빠인 빌리 타임스를 만나 사진을 보여주고 무언가의 실마리를 찾고자하면서부터‘사건’의 뿌연 이미지가 형성되기 시작하고, 급기야는 사진을 자신에게 주며 사건을 의뢰한 것으로 보이는 남자로부터‘그것’을 찾았느냐는 의문의 전화를 받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대체 사건 의뢰자도 모르고, 의뢰 내용도 모르는 사건을 해결하려 한다는 것 자체가, 이거 정말 탐정 소설 맞아? 하는 의문을 불식하기에는 무언가 모자란 것 같다하면서도 어느새 이 무모함 속에서 사건의 점진적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단서와 복선이 깔리고 있음을 직감케 한다. 이 기묘한 전개가 바로 이 작품의 독특한 맛이 되는 것 같다.

또한“내 자신감과 자존심은 지하보다 낮은 곳에서 누가 더 낮은 지 싸우고 있는 중이다.”라고 좌절감에 헤어나지 못하고, 오리무중의 의뢰사건은 자신의 신체나 정신 상태에 비해 버겁기만 해서, 실제 자기 의도와 계획에 의한 어떤 시작도 하지 못한, 즉 “손을 댄 적도 없는 사건에서 손을 떼고 휴가를 가야 할지 모르겠다.”할 정도의 주인공에게서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은 넌센스일 것만 같은 회의를 계속 뿌려댄다. 이런 회의 속에서도 마크의 꿈에 등장하는 아버지와 정원과 창고를 정리하던 애틋한 추억과 그리움의 장면들이나 아버지의 사진관을 그대로 유지하며 운영하는 어머니의 보살핌 같은 우울한 한 폭의 수채화에 현혹되다보면 그 기발한 작가의 암시를 한창이나 뒤늦게 서야 이마를 치고 깨닫게 된다.

어린 시절의 돌이킬 수 없는 일탈이 오랜 세월이 지난다고 잊혀지고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죄의식, 아니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힌 눈동자들이 나를 쳐다보았"고, 누군가가 잃어버린 시간이 담겨있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그 무언의 습속과 형질에는“오래전에 죽은 행복, 파멸, 어리석음이라는 메시지”까지도 전달되는 전율의 진실이 있다. 절름거리며 자기 통제가 불가능한 수면에 시달리는 기이한 탐정의 아슬아슬한 사건의 접근과 마침내 사건의 몸체와 만나 벌이는 승산 없어 보이는 패에 이르기까지 허허실실의 의외의 진전으로 독자의 직관을 기막히게 무너뜨린다. 결핍으로 무장한 탐정, 치밀하고 강인한 탐정의 전형적 이미지를 깨부순 작가의 상상력이 즐거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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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지 2010-10-25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챈들러 때문에 읽어봐야지 하고 챙겨뒀던 책인데,
필리아님 리뷰를 보고 주섬주섬 장바구니로 ㅎㅎ

필리아 2010-10-25 14:27   좋아요 0 | URL
빅스립의 '필립 머로'와는 완전 딴판이죠. 그야말로 리틀슬립의 '마크 제네비치'는 외양으론 찌질이거든요..., 감사합니다. 이매지님~즐거운 독서가 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