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록 문학동네 한국고전문학전집 3
혜경궁 홍씨 지음, 정병설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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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살에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사도세자의 아내이자, 영조의 며느리로, 그리고 정조의 어머니, 순조의 할머니로 살기까지 살얼음판 같기만 했던 18세기 조선왕실을 견뎌낸 여인의 사적(私的)기록이라 하여야 할까? 물론 역자는 사료와 기록들을 바탕으로 개인의 기억이란 사실을 입혀 재구성한 기록이기에 여느 사료에 못지않은 진실성과 사적(史的)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지만, 아버지 홍봉한에 대한 의지가 자못 큰 것이었음을 고려할 때, 그리고 사도세자의 죽음이라는 민감한 정치적 사안으로 가문의 생사가 걸려있음을 감안할 때 객관적이라거나 당파와 사적 이해관계를 초월한 균형적 기록이라 하기에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옳은 시각이리라 생각된다.

이 번역본이 의미를 갖는 것은 다양한 이본(異本)들. 특히 버클리大 소장본인 『보장(寶藏)』의 반영과 기존에 빠져있던「병인추록」을 추가하여 가히 한중록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본 책(冊)의 말미에 실려 있는 병인추록의 내용은 혜경궁 홍씨 자신과 자신의 집안에 끊임없이 모함을 가해온 소위 그의 입장에서 역도들에 대한 패악함과 무도함을 남김없이 드러내어 자신과 가문의 억울함과 부당함을 강력하게 호소하는 것이다. 이는 역자가 임의로 편성한「사도세자」편과「나의 일생」편에 이어 일종의「친정을 위한 변명」편이라 할 수 있는「읍혈록」과 같이 편성된 것처럼 자기방어 또는 정당화라는 변명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중록에 대한 관심은 18세기 내내 조선왕실과 조선정치 사안의 뜨거운 감자일 수밖에 없었던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진실이다. 여기에 정사(正史)로 읽히기에는 사적 판단과 특정 당파의 관점, 정치적 당사자라는 측면에서 무리가 있지만 당대 왕실의 예법이나 사적인 역학관계, 정사에 기록되지 못했던 이면의 진실, 당사자로서의 생생한 증언으로서의 역사적 가치는 귀중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실례로 왕조실록과는 달리 사도세자의 첩실 소생들에게 한낱 밤을 나누어 준 것이 빌미가 되어 역모의 조짐이라고 일파만파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했다는 이야기는 영조와 사도세자를 둘러싼 척실들의 권력투쟁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케 하기도 한다.

사도세자의 뒤주에서의 죽음(임오화변(壬午禍變))은, 왕세자가‘뒤주’에 갇혀 1762년 무참히 죽음에 내몰리게까지 된 과정과 연유의 석연찮음이라 할 수 있다. 혜경궁은 아비 영조와 아들 경모궁(사도세자)과의 불화, 즉 영조의 경모궁에 대한 경시와 불신, 이로 인해 야기된 경모궁의 영조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증, 화병이 광증(狂症)으로 심화되어 불거진 불가피한 결과로 설명하고 있으며, 더구나 사도세자의 생모인 선희궁이 자식의 사사를 간청했을 정도라는 언급은 왕조의 수호라는 명분을 대고 있지만 미심쩍은 대목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결국 250여년이 지난 지금에 우리들은 각 당파의 서로 다른 관점을 볼 수 있다. 노론과 소론의 격렬한 권력투쟁의 희생양이냐, 광증에 시달리는 자식을 없앰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보전키 위한 불가피한 행동이었는가와 같은 주장에서부터 뒤주를 누가 들여왔는가, 영조가 사도세자를 가두는 엄명을 내릴 당시 입회한 자는 누구인가에 이르기까지 분분한 견해들이 있다. 다만, 세자빈으로서 혜경궁이 아비인 홍봉한에 대한 애끓는 효심이나 정치적 조언이나 생존지혜를 공급받고 있었음을 볼 때 행간의 의미를 읽어낼 수 있는 중대한 근거임은 분명하다. 그 역사적 판단은 우리의 몫이다.

한편 나의 일생이라 하여 기술되고 있는 부분은 세자빈 간택의 절차와 과정, 왕실의 어른들인 인원왕후, 정성왕후, 선희궁부터 상궁과 시녀에 이르는 궁중여인네들의 생활상과 위계, 홍씨 가문의 가계와 친정 식구들의 부침, 첩실과 그 소생들에 대한 정실로서의 시선 등이 그려져 있어, 왕실 여성들의 권력과 이해관계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한중록의 사적 가치는 자신과 자신의 홍씨 가문을 변론하는 읍혈록이 아닐까한다. 여기에는 정조의 효심과 정조에 대한 어미로서의 기대가 결합하여 가문의 보호와 적대세력에 대한 증오가 비교적 선명하게 노골적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정성왕후가 죽자 66세의 노인인 영조에 왕후로 등극한 15세의 정순왕후와 그 척족 세력을 비롯한 반대세력 인물들의 면면과 모함의 이야기들, 후일 철종의 할아버지가 되는 은언군, 흥선대원군의 할아버지가 되는 은신군 등 사도세자의 첩실 소생들을‘그것들’, ‘잡것’이라 천하게 지칭하는 것이나, 명문가문을 내세우는 것 등과 같은 엄격한 계층의 구별 짓기, 아버지 홍봉한의 왕실에 대한 충성심과 치적 등을 통해 왕실의 정통성을 수호하기 위한 자신과 자신의 가문에 대한 눈물겨운 고충과 노력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실 혜경궁의 글이 기술하는 내용으로만은 관련 사건에 대한 평가나 세세한 기록을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갈 수 있으나, 관련 글 뒤에는‘한중록 깊이읽기’가 마련되어 있어 보다 심화된 성찰이 가능하도록 돕고 있는 것은 이 책의 커다란 장점이라 할 수 있다.

권력을 위해서 오늘의 아군이 내일은 적군으로 돌변하고, 낯 앞에서와 돌아서서 하는 다른 말, 하물며, 바닥에 손가락 글씨를 써가면서 까지 왕에 간사함을 부려대는 사람들, 하찮기가 이보다 더 할 수 있을까하는 사소한 것들로 정치적 입신을 위해 교언(巧言)을 일삼는 당시의 권신세력들을 보는 것은 일면 참담하기도 하지만, 최고의 권력집단에 있었던 여성의 내밀한 폭로이기에 그 사실성을 직면케 되는 것은 어쩜 후대의 사람으로서 감사해야 할 일이기도 할 것이다. 역사서로 읽을 것인가, 아니면 왕실여성의 회고록이나 자전으로 읽을 것인가는 완전히 독자의 관점에 달린 문제이다. 그러나 이 관점의 선택은 중대한 결과의 차이가 있다. 즉 진실성과 객관성에 대한 사적 판단이 걸려 있기에 그렇다. 비록 픽션이지만 문학작품에서, 드라마와 영화에서, 그리고 인구에 회자되는 많은 구전이야기들에서 영,정조대의 이야기만큼 잘 알려진 것도 없다. 한중록이 비록 정사는 아니지만 그녀의 집필 동기처럼 가장 가까이에서 실제 당사자로서 지켜보고 겪었던 일들이기에 그 믿음을 결코 간과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한중록의 읽기는 바로 그 사실의 근접성에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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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10-29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중록에 대한 판단은 늘 독자의 몫이군요. 문학동네에서 한국 고전문학전집도 나온는걸 필리아님 덕분에 알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필리아 2010-10-29 09:13   좋아요 0 | URL
노론의 수장인 아버지 홍봉한의 영향력을 배제할 수 없는 입장인 혜경궁의 글이기에 그녀의 기술을 전적으로 신뢰하는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죠.../지금까지 출간된 주석본 내지 번역본중 가장 이본을 많이 반영하여 완결성을 높인 책이 아닐까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