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슬립
폴 트렘블레이 지음, 이소은 옮김 / 비채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사고의 상처가 남아 한쪽 눈은 아래로 쳐져있고 일그러진 얼굴모양을 감추기 위해 덥수룩한 수염을 기르고 깊숙이 눌러쓴 중절모와 때에 전 트렌치코트를 휘날리는 남자의 모습은 작품의 모두를 장식하는 주인공의 인상처럼 시대착오적이고 인습과는 동떨어진 그 어떤 인물을 상상케 한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기면증이라는 통제불능의 수면증까지 더해 왠지 찌질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는 일이라고는 탐정사무실과는 어울리지 않는 심부름센터를 연상시키는 조잡한 허드렛일을 대행하는 것으로 나이 삼십에 접어든 젊은이의 향기를 도저히 맡을 수 없는 형상이다.

기면증으로 사람과 대화를 하다가도, 목적지에 이동하다가도 수시로 자신도 모르게 수면에 빠져들다 보니 현실과 꿈, 상상과 실제의 경계가 그에게는 늘 애매모호하기 그지없다. 이런 자가 누군가에게서 사건 의뢰를 받아 일을 처리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라고 보이지 않는다. 이 무능해 보이는 탐정‘마크 제네비치’의 생각을 쫓다가는 정말 낭패를 보게 된다. 그의 생각, 기억이란 것은 꿈인지, 상상인지, 가공의 기억인지, 아님 진짜 일어났던 일인지 종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면증에서 깨어나 보니 이런 그의 책상에 여자의 사진이 든 노란 봉투가 놓여있고, 의미라고는 찾을 수 없는 자신의 산만한 메모가 끼적여 있을 뿐이다.

아메리칸 슈퍼스타 결승전에 진출한‘제니퍼 타임스’라는 인기스타의 은밀한 사진이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어린시절 친구였던 명망 있는 지방검사‘빌리 타임스’의 딸이 왜 자신에게 사건을 의뢰했는지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대체 그녀가 자신을 왜 고용한 것인지? 허나 제니퍼의 사인회장에서 조우한 그녀는 마크를 처음 본 사람처럼 낯설어 하기만 한다. 결국 사건이 존재하긴 하는 건지조차 의심스럽기만 하다. 사실 소설의 초반은 이처럼 사건이다 할 만한 단서도, 확증도 없을 뿐 아니라, 사건이 있기나 한 것인지, 탐정이란 자가 사건해결 능력을 가지기나 한 것인지 회의가 치밀어 김빠진 맥주처럼 밍밍한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그러나 아버지의 친구이자 제니퍼의 아빠인 빌리 타임스를 만나 사진을 보여주고 무언가의 실마리를 찾고자하면서부터‘사건’의 뿌연 이미지가 형성되기 시작하고, 급기야는 사진을 자신에게 주며 사건을 의뢰한 것으로 보이는 남자로부터‘그것’을 찾았느냐는 의문의 전화를 받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대체 사건 의뢰자도 모르고, 의뢰 내용도 모르는 사건을 해결하려 한다는 것 자체가, 이거 정말 탐정 소설 맞아? 하는 의문을 불식하기에는 무언가 모자란 것 같다하면서도 어느새 이 무모함 속에서 사건의 점진적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단서와 복선이 깔리고 있음을 직감케 한다. 이 기묘한 전개가 바로 이 작품의 독특한 맛이 되는 것 같다.

또한“내 자신감과 자존심은 지하보다 낮은 곳에서 누가 더 낮은 지 싸우고 있는 중이다.”라고 좌절감에 헤어나지 못하고, 오리무중의 의뢰사건은 자신의 신체나 정신 상태에 비해 버겁기만 해서, 실제 자기 의도와 계획에 의한 어떤 시작도 하지 못한, 즉 “손을 댄 적도 없는 사건에서 손을 떼고 휴가를 가야 할지 모르겠다.”할 정도의 주인공에게서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은 넌센스일 것만 같은 회의를 계속 뿌려댄다. 이런 회의 속에서도 마크의 꿈에 등장하는 아버지와 정원과 창고를 정리하던 애틋한 추억과 그리움의 장면들이나 아버지의 사진관을 그대로 유지하며 운영하는 어머니의 보살핌 같은 우울한 한 폭의 수채화에 현혹되다보면 그 기발한 작가의 암시를 한창이나 뒤늦게 서야 이마를 치고 깨닫게 된다.

어린 시절의 돌이킬 수 없는 일탈이 오랜 세월이 지난다고 잊혀지고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죄의식, 아니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힌 눈동자들이 나를 쳐다보았"고, 누군가가 잃어버린 시간이 담겨있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그 무언의 습속과 형질에는“오래전에 죽은 행복, 파멸, 어리석음이라는 메시지”까지도 전달되는 전율의 진실이 있다. 절름거리며 자기 통제가 불가능한 수면에 시달리는 기이한 탐정의 아슬아슬한 사건의 접근과 마침내 사건의 몸체와 만나 벌이는 승산 없어 보이는 패에 이르기까지 허허실실의 의외의 진전으로 독자의 직관을 기막히게 무너뜨린다. 결핍으로 무장한 탐정, 치밀하고 강인한 탐정의 전형적 이미지를 깨부순 작가의 상상력이 즐거운 작품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매지 2010-10-25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챈들러 때문에 읽어봐야지 하고 챙겨뒀던 책인데,
필리아님 리뷰를 보고 주섬주섬 장바구니로 ㅎㅎ

필리아 2010-10-25 14:27   좋아요 0 | URL
빅스립의 '필립 머로'와는 완전 딴판이죠. 그야말로 리틀슬립의 '마크 제네비치'는 외양으론 찌질이거든요..., 감사합니다. 이매지님~즐거운 독서가 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