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 방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42
김미월 지음 / 민음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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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꿈이 자라났던 방은 몇 번째 방인가요? 순응만을 가리키는 

세상을 벗어나기 위해 꿈이 부정되고 악몽이 되지 않는 세상을 생각하며....

 

 

나는 평범한 사람이다. .... 아니, 평범해 보인다.....”

 

나는 외모도 성격도 삶의 이력도 어느 하나 특별한 구석이 없다.

가장 평범한 사람을 뽑는 대회에 출전한다면 못해도

장려상은 탈 만큼의 우수한 평범함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 28, 29 쪽에서

 

 

나는 소설 속 두 청년의 삶의 시선과 세상과의 부딪힘을 읽으며 기성세대로서의 무기력과 무능함을 다시금 고통스럽게 느낀다. 평범(平凡)과 비범(非凡)을 구분하고,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평범하다 여기도록 훈육되어, 그러한 질서체제를 당연한 삶의 토대로 생각하게 만든, 그 순응의 세계에 이의를 제기치 않도록 세뇌한 기성질서를 변화시키지 못한 책임의 일원임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말이다.

 


병역을 마친 스물다섯 청년 오영대는 부모의 무릎아래를 벗어나 삶의 주체로서 세상에 나아가기 위해 월세 10만 원 짜리 대각선으로만 누울 수 있는 그야말로 오직 잠만 잘 수 있는 방을 얻는다. 그곳에는 가져가겠다고 방치된 앞서 살던 이가 남겨둔 이삿짐 꾸러미가 놓여있고, 그 속에서 두툼한 스프링 노트를 발견한다. 이 노트를 쓴 인물은 김지영이라는 서른 살의 여성이다. 이 작품은 지영이 쓴 일기가 소설 속 소설의 역할을 하는 소위 액자소설의 형식을 하고, 일기를 읽는 영대와 일기 속 지영이라는 두 청년의 삶을 교차하며 청년들이 마주하는 고뇌와 번민을 체험하게 한다.

 

영대는 네 꿈이 뭐야?”라는 물음의 앞에서면 그만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는, “꿈 없이도 지난 25년간 아무 문제없이 잘 살아 왔으며, 그것도 금방 포기해 버리는청년이다. 본인은 이러한 자신을 누구보다도 잘 인지하고 있다. 그렇다고 특별히 이에 대해 어떤 시도를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한편 동해 쪽 바닷가 서점집 딸인 지영은 대학 진학을 위해 스무 살에 삼촌네 문간방에서 시작된 서울 살이가 십여 차례에 걸친 이사의 필연 속에 치러진 서른 살에 이르기까지의 10 년의 일기를 통해 끝없는 꿈의 추구, 자기 안의 특별함을 찾는 걸음이 쓰여 있다.

 

지영의 서른 살은 인류가 결국은 달에 착륙했듯 나도 어느새 서른의 표면에 깃발을 꽂고 말았다. 원치 않는 정복이었다.”, 원치 않는 정복이라 표현하듯 지영의 스무 살에서 서른 살의 시간은 그녀의 거듭되는 이사가 지상에서 점점 아래로 내려가고 일기가 발견된 사람이 눕기조차 불편한 좁아터진 지하의 잠만 잘 수 있다는 방이듯 꿈의 실현과는 멀어 보인다. 그런데 두 인물이 공히 유사한 요소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그저 이웃집 담장을 타고 넘어 온 바람을 따라 춤을 추, 내가 스스로 춤추고 있는 것인 줄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남의 장단, 세상이 가리키는 것 만에 맞춰 춤추는 순응성, 자기 의지를 요구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이렇게, 남의 장단에만 맞추어 살 것을 요구했던 질서가 그들이 세상에 나설 때면 이러한 아이들을 특색없음, 특별한 구석이라곤 없는 인물이라며 내친다. 영대의 자기 인식도 그리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궁금해 한 적도 없고 잃어버린 것들을 아쉬워해 본적도 없었다. 무언가에 사무쳐 본 적도 없으니 뼛속 깊숙이 희열에 젖거나 분노에 떨었던 적도 당연히 없었다.”는 것이다. 부모가 당연히 내주는 학비들, 게다가 기죽이지 않겠다고 주어지는 용돈, 사거나 하고자 하는 어지간한 것들을 부모가 모두 해결해주는 삶, 세상 질서가 가리키는 길을 그저 따라가면 되는 삶에 꿈이란 것이 들어설 여지가 없었음은 어쩌면 그에게 당연한 것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영의 대학 생활이란 것은 내내 봄만 있는 왕국서 온 공주처럼 언제나 밝고 생기 넘치는, 학과 동기 진주와 함께 찾아가게 된 인문학 읽기 동아리 황무지로부터 싹튼 자기 삶에 대한 자각으로 읽힌다. 진주와 황무지 동아리 선배들과의 어울림을 위해 삼촌집 문간방을 나서 하숙집으로 옮기는 행위는 세상의 오의(奧義)를 체득한 듯 삶의 전부처럼 인식되고 그러한 삶에 매몰되어 자기 삶이라는 거대한 책의 주인공임을 망각했음을 보여준다. 목소리에 호소력이 있다는 복학생 선배를 따라 민중가요를 열심히 따라 부르며, 자신의 미덕을 발견해준 사람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동아리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지만, 선배가 진주의 연인임을 알게 되고 지영은 비로소 이들은 결코 주인공과 영원히 함께하는 것이 아닌 등장인물에 불과함을 깨닫게 된다. 타자가 가리키는, 타자에 의해 삶이 좌우되는 삶을 피하고 자신의 꿈, 자기만의 삶을 일궈야한다는 각성이다.

 

이 소설이 문학계간지 세계의 문학2008년 연재되어 2010년 단행본으로 간행되었으니, 지금과 시차가 10여 년이 지났음에도 지영이 묘사하는 시대의 배경에 등장하는 실감나게 제작된 전쟁영화의 세트장같다는 살풍경한 재개발 강제철거의 폭력과 통곡하고 저항하는 이들의 모습은 사실 변한 것이 없음을 발견하며, 내 기억도 소설의 시간 속으로 이입되었다. 운동권 학생인 지영의 어린 시절 친구 을 시위현장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인데, 비록 지영이 자신의 내면인식의 편협성을 후일 발견하기는 하지만, 이러한 운동권 학생에 대한 못마땅함의 견해가 고작 평범한 학우들에게 부채감과 죄의식을 던지는 불편함이요, 학생운동을 집단 속에 익명으로 숨고 싶어서라 매도하는 인식은 지나친 사회정의를 일개인의 보신과 현실도피라는 터무니없는 일반화로 보이기까지 한다.

 

이것은 관이 무당의 아들이라는 콤플렉스, 다시 말해 사회에서 보내는 분별의 시선이 지영에게도 내재하고 있어, 관이 포르투갈의 파두(Fado)에 대해서, 그리고 그 한()의 정서와 저항의 음악에 대해서 말할 때 무당의 아들이 월드뮤직이라니, 그 이질적 조합 앞에 당황하는자신을 발견하는 것에서 그녀의 인식경계가 드러나기도 한다. 사실 이 작품에서 나는 지극히 체제 내적 욕망만을 읽게 되는데, 그것은 지영이나 영대가 쫓는 꿈이 단지 질서가 요구하는 그 내부에 안착하지 못한 외부에서의 방황에 머물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도통 세상의 기성 질서에 대해서는 한 번도 분개해본 적 없다던 영대가 친구 석의 입을 통해 신의 직장은커녕 인간의 직장에도 못 들어간다는 것은 우리가 인간의 자식도 아니라는 증거임을 반복하거나, 샹들리에가 매달린 카페의 천장에 시선을 박고는 어릴 적 꿈을 순간적으로 기억해내는데, 그것이 천장이 높은 회사, 즉 넥타이 매고 감청색 정장을 입고 출퇴근하는 대기업 사원이 되는 것이었다는 회상이다. 꿈 없음은 어쩌면 순응성과 기호만 다른 동의어 아닐까?

 

물론 현실적 삶이라는 마주해야 할 삶의 세계란 것이 이처럼 체제와 질서가 가르쳐 온 그 세계임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고, 그를 위해 자기만의 세상을 열기위해 노력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바로 이러한 삶의 가능성을 기성세대들이 후세에게 말하지 않았다. 꿈은 없고 얕은 욕망만 있었다.”는 영대의 작은 자각처럼, 욕망의 주입만을 이 세계가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수치와 분노를 느끼게 된다. 그러하니 이들은 냉혹한 경쟁질서가 지배하는 세상과 마주했을 때, 불길한 예언만 가득한 참서(讖書)을 읽는 기분을 피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지영의 일기 말미에는 이제 내 고향 바닷가 마을에는 서점이 한 군데도 없다. 엊그제 30년간 버티고 서 있었던 해변서점이 결국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라고 그녀의 의지처(依支處)였던 부모가 더 이상 삶의 방향등이 되지 못함의 상징처럼 적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거대한 책에서 자신과 함께 하리라 여겼던 중요한 등장인물 관이 어린시절 서점 다른 위치에 숨겨놓았다던 책을 끝내 본래의 자리에 돌려놓지 못한다. 아마 영대가 일기의 주인공 지영에 대해 의문을 지니는 그녀는 어쩌다 이렇게 잠만 자는 방에까지 흘러 들어오게 되었을까.”는 이 궁극의 물음은 자신의 친구가 그에게 되돌려주는 너 아직 살아 있잖아라는 말과 어울려 흐릿한 꿈의 가능성을 남긴다.

 

지금 교육계는 부모들의 극한 이기심이 폭력성을 띠고 꿈이 부정된 이 사회의 진면목인 욕망만이 날뛰는 불편한 세계임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15년 전 이 소설의 주인공들과 같은 아이들이 변함없이 양산되고 있음의 실증일 것이다. 이 소설이 지금에도 여전히 영향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이 사회의 병증이 지속되거나 오히려 더욱 악화되고 있음의 반증이라 해도 되지 않을까? 나는 몹쓸 방과 방을 떠도는 사이 내 존재는 점점 비루해지고 더 보잘 것 없어졌다.”는 지영의 자조적 말이 꽤 오랫동안 내 가슴에 남아있을 것만 같다.

 

지영과 영대, 그 누구에게도 끄트머리만 허락하는 세상이 아닌, 누구나 동등한 출발점에서 시작할 수 있도록 작은 힘이라도 지속적으로 경주해야만 할 것 같다. 지영과 영대처럼 20대를 통과하는 청년들에게는 응원을, 그리고 이 시절을 이미 통과한 이들에게는 아릿한 추억을 떠올리는 읽기가 되어 줄 터이다. 회한과 고통 없는 말끔한 시절이 어디 있겠는가? 인생이란 고해(苦海)라 하지 않았던가? 원망과 갈망과 함께 형체 없는 꿈과 함께 흘러가버린 시간이지만 아마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조금은 더 지혜로운 인간으로 성숙하였을 것이다. 사는 사람의 육신과 정신이 깃 든 곳, 일상이 스며있는 방, 우리들 추억 속의 방들, 나는 그 중 몇 번째 방에 나의 꿈이 남아있을까라는 물음을 떠올리며 곰곰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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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오페라 - 아름다운 사랑과 전율의 배신, 운명적 서사 25편
이서희 지음 / 리텍콘텐츠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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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의 배경이 되는 화려한 무대들, 그리고 테마와 관련된 가수들의 복식, 아리아와 합창이 울려 퍼질 때 극장의 관객은 감동으로 전율합니다. 공연이 끝나고 극장을 나설 때도 그 여운이 좀체 사라지지 않고 배역이 열창한 사연들에 이입되었던 감응이 남아 맴돌던 기억을 지금에도 방구석에 앉아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꽤 오랜 시간 공연장을 찾지 않았던 것 같네요. 책의 저자인 예술 큐레이터인 저자는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서 접했던 공연의 혼돈과 감동을 전하고 있는데요, 이후 그의 끝없이 감동의 우물을 찾아다녔던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인 듯합니다.

 

책은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곡인 <피델리오(Fidelio)>부터, 헨델이 런던 무대를 위해 특별히 만들었다는 이탈리아 오페라 <리날도(Rinaldo)>, 모차르트와 계몽주의 작가 디 폰테가 만들었다는 보마르셰 원작의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 이탈리아 오페라의 거장 베르디의 <나부코(Nabucco)>, 영어 오페라인 조지 거슈인 작곡의 <포기와 베스(Porgy and Bess)>, 그리고 <마탄의 사수 (Der Freischutz)>, <살로메(Salome)>, 비운의 오페라 작곡가 비제의 카르멘 (Carmen)>에 이르기 까지 엄선된 25편의 작품이 주제별로 구성되어 그 놀라운 감동을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작품의 줄거리와 QR 코드가 붙어있는 주요 곡의 가사, 오페라 전문용어, 그리고 간략한 인문학적 해석이 곁들여져 있는 그야말로 오페라가 실린 방구석에 접하는 오페라 입문 가이드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부분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접했던 아리아들을 품고 있는 익히 잘 알려진 오페라들인데요, 가수의 아리아에 실려있던 옛 감동을 떠올리기도 하고, 제겐 낯선 오페라의 경우에는 당대의 극장에 있음직한 관객들을 그려보기도 하며 줄거리와 가사를 음미해보기도 합니다.

 


제게 인상 깊게 다가온 작품은 혁명지도자인 플로레스탄이 왕당파 교도소장 피차로에 의해 감금되자 그의 아내 레오노레가 피델리오란 남성으로 변장하여 남편을 구출하는 이야기인 <피델리오(Fidelio)>의 오프스테이지(Offstage)에서 향수와 회상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트럼펫 선율의 애절함을 상상해 봅니다.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가 베버의 낭만적 오페라 <마탄의 사수 (Der Freischutz)>와 함께 가장 중요한 오페라 작품으로 여겨진다는 점에 괜스레 뿌듯한 마음이 들기까지 합니다.

 

저는 모차르트 작곡의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에 남다른 애정이 있는데요, 어쩌면 파리 초연에서 루이 16세와 귀족들이 부르르 치를 떨며 분개하던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스토리는 영주의 신혼 초야권이라는 터무니없는 계급의 횡포에 대한 시민적 분노를 집약한 작품으로 로맨스와 정치적 긴장감을 유연하게 녹여낸 작품이랍니다. 당대 신분제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익살과 풍자극이었으니 이 작품이 오늘날 여전히 시민대중의 각광을 받는 것은 그 역사적 배경 탓에 더욱 즐겁습니다. 모차르트는 그의 피아노 연주와 작곡에서의 천재성과 함께 사회적 약자들의 정의에 관심을 가졌던 인물로 보다 가까이 다가옵니다.

 


이와 더불어 그가 생계에 곤란 겪을 때 돈을 벌기위해 마지막으로 대중적 흥행 감각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는 <돈 조반니(Don Giovanni)>에 얽힌 사연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의 내용은 희대의 바람둥이 돈 조반니에 희생된 기사의 묘비인 흰 석상의 유령 이야기로 장르가 다른 여타 작품들에 즐겨 인용되어서 익히 알고 있던 작품입니다. 대중성을 고려한 권선징악이라는 뻔한 테마임에도 이 엄숙하고 비극적인 오페라는 작곡가의 생애와 관련하여 새로운 곡으로 다가옵니다. 또한 주인공의 아리아가 없는 작품으로 만든 모차르트를 한층 고결한 인물로 떠올리게 합니다.

 

한편 대본으로 사용된 원작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살로메(Salome)로 인해 더욱 유명세를 얻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작곡의 오페라 <살로메>는 순수와 타락을 넘나드는 모습으로 그려진 살로메로 인해 더욱 문제적이었다는데요, 쟁반에 받쳐 든 요한의 죽은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낭자한 피와 거기에 입 맞추는 살로메는 그야말로 광기와 폭력성이 넘쳐흐릅니다. 뉴욕 초연 후 곧 바로 공연이 금지되었으며, 영국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비난이 이어졌다는군요. 이성의 도덕적 갈등을 초래하는 이 논쟁적 드라마를 한 오페라는 과연 어떤 것이었는지 정말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마침 대구국제 오페라 축제에서 이 작품을 공연했다는군요.

 

이제 이 책의 감상을 맺어야겠습니다. 오페라보다는 아리아의 한 곡인 섬머타임(summertime)으로 보다 더 알려진 조지 거슈인 작곡의 3막 영어 오페라인 <포기와 베스(Porgy and Bess)>는 영화화되기까지 했다는데 이제야 그 원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솔로로 끊어질 듯 다정하게 영혼을 다독이는 섬머타임의 노래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대중음악은 물론 오페라도 역시 대중을 향한 사회적 소통의 매체입니다. 그 음악의 희극적이거나 비극적인 선율과 함께 가수들의 노래와 무대 배경까지도 민중에게 시사(示唆)하려는 것이 있었습니다. <마탄의 사수>처럼 사랑을 위해 영혼을 거래하는 지고한 이야기에서부터 <카르멘 (Carmen)>과 같이 노동자와 하층민의 척박한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은폐된 진실을 환기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바빌론 유수와 같은 고대 역사를 복원해 인종과 민족적 차별의 부당함을 호소하기도 하고, 반면 가부장적 권위나 귀족과 왕의 지배권을 옹호하는 작품도 있습니다. <카르멘>의  '사랑은 반항하는 정신(L'amour est un oiseau rebelle)'을 부르는 엘리나 가랑카(Elina Garanca)의 열정적 아리아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물론 예술 작품을 이념적 가치로 단순히 규정할 것은 아니지만 우리들은 이 걸작으로 꼽히는 오페라들로부터도 끊임없이 메시지를 전달받습니다. 아무튼 이 스물다섯 편의 오페라 안내서는 모처럼 잃었던 감각을 깨워 메마른 제 정서를 조금은 되돌아보게 해 주었습니다. 극장을 다시 찾아 오페라를 감상하기 전 간략한 참고 자료로도 유용하고, 입문자들에게는 오페라에 대한 장벽을 허물고 친근하게 다가가는 경로가 되어 줄 것 같습니다. 내친김에 공연 일정을 찾아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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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의 잡설 - 박상륭 꼼꼼히 읽기
채기병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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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독자들은 문학작품을 읽고 저마다 다양한 감상을 갖게 된다. 그것은 감동과 공감의 감응이기도 하고 이질성과 낯섦, 혹은 도덕적이거나 취향의 거부로 부정과 비판의 소회를 남기기도 한다. 그런데 순순히 읽히지 않거나 이해에 어려움을 주는 작품에는 더더욱 작품과는 다른 엉뚱한 찬양이나 비판이 가해지곤 한다. 대개는 당해 작품을 구성하는 언어, 문장, 사상 등에 대한 결여나 적대하는 무엇이 방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읽나? 무언가 낯선 세계를 그 책을 통해 알고 싶어서가 아닐까? 만일 뻔히 알고 있는 인간들과 세계만을 보려한다면 무엇하러 책을 읽겠는가. 결국 내 밖에 있는 것을 내 안에 수용하기 위한 포용의 일환이 책 읽기 아니겠는가? 작고(作故)한 소설가 박상륭은 항상 내 서가의 한 쪽에 자리잡고 거듭 읽힐 것을 준비하는 하나의 정신적 중추이다. 그럼에도 늘 흐릿한 아쉬움이 남아있는 글이었다. 엔간해서는 한 작가의 작품을 읽기위해 다른 이의 도움을 피하지만 박상륭의 작품을 모두 읽지 않은 내겐 그것은 항상 어슴푸레한 이미지들로만 맴돌았다. 해서 박상륭의 문학을 조명하는 밑그림을 그려주는 저자 채기병 선생의 노고에 도움을 받기로 했다. 변명이 길어졌다.

 


이 책은 저자(채기병)가 머리말에서 명시하듯 소설가 박상륭의 작품들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도록 그 윤곽에 접근 할 수 있도록 하려는 연구보고서 혹은 독서 노트라 할 수 있다. 특히 저자의 생각이나 다른 여느 평자의 글을 일체 반영하지 않고 오직 박상륭의 작픔 속 문장으로만 그 사유체계를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저자의 오랜 노고를 짐작할 수 있다. 나는 박상륭의 방언과 시적 문체, 그리고 선() 수행 같은 일견 자폐적인 형이상학적 담론의 세계를 좋아한다. 그럼에도 박상륭이 발표한 열두 권()잡설(雜說;박상륭은 자신의 소설을 이렇게 부른다)’에 두루 편재하여 하나의 궁극을 말하려는 것을 손에 잡을 수 있을만큼 모두 읽지 못했다. 때문에 내가 눈치 채지 못하는 무엇에 대한 도움은 간절한 것이었고, 이 책은 이러한 흐릿함에 빛을 비추어주는 맞춤의 책이었다고 해야겠다.

 

박상륭의 소설은 실은 기성의 여타 소설들과 다르다. 소설과 경전의 사잇글이라는 작가 자신의 정의처럼 신과 인간, 종교에 관한 고도의 형이상학적 담론을 펼친다. 즉 일종의 법륜(法輪)굴리기의 연속인 탓에 혹자의 비난처럼 자신만의 꿀을 맛보려 토굴 속으로 들어간 자폐자의 웅얼거림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런가하면 또 다른 평자들은 인간에게 던져진 이 유일한 가능성에 대한 치열한 탐구로서 문장은 아름답고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는 신기한 기분이었음을 토로하기도 한다. 이러한 양극단의 감상은 박상륭의 잡설 한 편 한편이 이르고자 하는 마음의 우주, 자아의 완전한 폐기인 위대한 자유의 성취인 해탈을 향한 편린들이기에 큰 그림을 그려낼 수 없는 까닭일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박상륭의 작품을 지식 폭력의 한 전형’, ‘무의미하고 자폐적인 흉물’, ‘교감없이 자신 안에 매몰된 타자부재의 자기탐구 도구일 뿐이라는 비난이 가능해지거나, 그의 시적, 토속적 향취어린 문체의 아름다움과 몽롱한 형이상학의 세계에 매몰되어 감상적 찬양만을 하게 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평가들의 면면은 분명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을 것이다. 이들이 지적하는 요소가 박상륭의 잡설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그러나 이는 그가 토해내는 글의 우주론(혹은 세계관)이나 상징과 비유들, 다분히 세심하고 정교하게 의도된 방언의 사용이나 ~입지, ~구나으?, ~다는다?, ~~라랐. ~입메? 와같은 사용치 않는 종결어미의 사용, 우리말 어법이 파괴된 복합문장, 새로운 합성문자 등의 낯섦이 주는 인식의 거북함과 몰이해 탓이지, 작품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나는 이 책을 읽음으로써 발견하지 못했던 문장들이 지닌 의미를 비로소 파악하게 되고, 또는 명확하게 와 닿지 않았던 달걀모양의 양극을 갖는 타원형(죽음의 한 연구)”이라는 이미지화된 문장의 의미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으며, 작가가 지속적으로 표명하는 마음의 우주가 인신주의(人神主義)와 어떻게 연결되는 개념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고 작가의 우주론에 모두 공감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에는 무분별할 정도로 무수한 종교와 신들이 무차별적으로 하나의 궁극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하여 서로 조력한다. 이를 작가 스스로는 () 종교주의자라 칭하며, 각 종교는 신에 대한 태도가 다를 뿐 지향점은 같기에 종교는 많을수록 좋다는 종교개방주의를 주장하기도 했다. 사실 모든 종교에 개방되었다는 것은 종교가 더 이상 개별 종교의 고유 의미를 잃었다는 뜻이고, 결국은 종교란 없다는 의미와 그리 멀지 않다는 얘기이다. 다만 이들 종교를 통해 이라는 것의 독자적 특성을 차용하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고 내겐 이해된다. 인간의 껍데기를 입어야만 했던 기독(基督)신조차 프라브리티의 차원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필요였음을.

 

아무튼 이 책을 통해 나는 박상륭의 작품 속에 투영되고 있는 오두일체(五頭一體)를 이루는 독특한 시간관, --마음(이를 박상륭은 이라 한다)’을 토대로 하는 그의 인간 진화론적 틀의 규명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잠과 꿈, 해골과 신발 등의 상징어가 지닌 의미를 그의 작품 속 지나쳤던 문장이 설명하고 있었음을 깨우쳤다. 무엇보다 그의 소설집인 평심(平心)의 각 단편마다 등장하여 죽음의 한 연구』 『칠조 어론등 두루 편재하는 프라브리티(pravritti, 色界)와 니브리티(nivritti, 空界)의 잡히지 않았던 관념들을 제법 명쾌하게 이해하게 된 것은 한 정직한 지식인의 지극히 성실한 노력이 만들어 낸 이 책의 덕분이다.

 

프라브리티의 우주를 지속시키는 살욕(殺慾,파괴)과 생식욕(生殖慾,창조)의 이 상극(相剋)적 질서 체계가 바로 종교적 고행임을, 집 이뤄, 애써 살기의 도()를 닦기엔 열심인, 그것이야말로 참종교 아니었겠는가?”(평심, 두 집 사이-제일의 늙은 아해 얘기)라는 문장처럼, 이 현실의 몸을 지니고 의식을 표현하는 말을 하며 사는 현세적 존재의 비극이자 은총임을 그토록 증명하고 확인하고 싶어 했던 작가의 세계에 어렴풋 다가가게 된다. 사실 일생을 이 하나의 궁극을 위한 잡설 쓰기에 몰두했던 한 인간에게 안타까운 연민을 느끼게 된다. 이 연민이란 어쩌면 그보다는 나를 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프라브리티의 순환 세계를 벗어나기 위한 한 유정(有情)의 지난한 언어의 세계를 본다.

 

상극적 질서가 자연의 도()라면 도는 결코 인()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현세인 이승의 질서가 이런 것이라면 그의 잡설인 칠조 어론(七祖語論 3)의 문장처럼 다만 지나가야 되는 곳이지 머무는 곳이 아니다라는 말에 꾸벅일 도리밖에. 결국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은 고해를 헤쳐 나가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는가? 해서 박상륭의 잡설은 이 저주의 장소를 어떻게 극복하고 은총의 장소로 바꿀 것인가를 탐색하는 과정일 것이라 이해하게 된다.

 

박상륭이 그의 작품 속에서 초지일관 지속했던 삶과 죽음의 문제, 그리고 구원의 문제임을 궁구(窮究)하는, 그의 작품 세계를 보다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도록 하는 성실하고, 정직하며 친절한 저술이다. 박상륭의 작품 앞에서 멈칫거리거나 읽기에 좌절했거나, 혹은 비난의 오독 속에 침잠해 있던 모든 독자들에게 이 텍스트의 활용을 추천한다. 아마 박상륭의 잡설이 하나의 위대한 소설문학 작품으로 다가 올 것임을 확신한다.

 

참혹한 상극의 세계가 노골적으로 펼쳐지는 작금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그 혐오스러움이 애꿎은 내 육신의 살아감을 분노하게 한다. 박상륭이 현실세계의 문제를 외면했다고 하는 지적들은 절반만 옳은 얘기 일 것이다. 물론 그는 이 프라브리티의 세계를 벗어날 궁리만 했으니 그 경계 내에서만 그러했다는 말이다. 때문에 그의 현실 진단은 자기중심적 독해에 머물기도 했다.

 

일례로 세납자들이 세금을 바쳐, 저들의 배를 채워주려면, 얼마나 뼈 빠지게 일을 했어야 했겠는가(평심, 로이가 산 한 삶)”라며 복지사회를 맹렬히 비난하기도 한다. 이는 바로 상극의 질서가, 즉 끝없는 투쟁이 있는 현세가 곧 종교적 고해라는 믿음을 지닌 그였기에 자아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이라는 그의 진화론적 틀에서 그러한 것이지, 배곯으면 배고픔을 느끼는 실재하는 고통을 외면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단편 작품들은 이러한 시선에 대한 응답이기도 할 것이다. 다채로운 고통에 직면한 인간들에 연민과 애틋함, 아픔을 자기의 것처럼 나눈다. 그러나 거기까지.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이것은 그의 글쓰기가 현실인식 능력을 상실한, 자폐적 공간에 함몰된 우아한 판타지에 불과하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한다. 이처럼 문학예술에 대한 세간의 이해는 첨예하게 반목한다. 현실 인식을 투영하지 못하는 것은 문학이 아니라는 비평과 예술은 현실에 없는 것을 상상해 내는 것이라야 한다는 예술 그 자체의 지향성에 대한 옹호가 있다. 박상륭을 읽을지 말지는 그야말로 취향의 문제일 것이다. 읽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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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연 - 에로스의 모든 것에 대한 고찰 서해클래식 20
플라톤 지음, 김영범 옮김 / 서해문집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쾌락을 구속하거나 추방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절제하고 방종에 빠지지 않는

 기술을쾌락의 활용이라 한다면, 스스로 온전히 자신의 주인이 되어 자기를

 배려하는 삶의 방식을  사랑이라 한다.”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란 도덕적 윤리의 완고함 속에서 배타적 금욕과 육체의 향락 사이를 오가는 것이다. 이 두 영역의 적절한 조화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삶은 곧 균열이 가고 추락하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애초부터 육체 없는 사랑을 말하는 것은 공허요, 영혼없는 맹목이기 십상이다. 한편 신체를 멸시하고 영혼의 존귀함만을 내세우던 서구 중세의 암흑처럼 정신과 영혼의 사랑에 매몰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들은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다. 삶의 사랑이란 바로 신체와 영혼 이 둘의 적절한 균형과 조화이다.

 

인간 삶과 세계 모든 것을 면밀하게 뒤지며 철학체계를 정립하려한 플라톤의 철학이론인 대화편 중에서 이 책 향연(symposion)은 아름다움과 사랑의 본성을 사유하며 삶의 방식을 제시한다. 여러 대화중에서 이 철학담론을 함께 모여 먹고 마시다라는 뜻을 지닌 향연이라 명명한 까닭은 비극경연대회 우승을 차지한 아가톤을 축하하기 위한 주연(酒宴)의 성격 이외에는 논의의 주제와 직접적 연관성을 발견할 수 없다. 다만 참석자들이 돌아가며 연설하는 방식의 전경과 한 침상에 두 명씩 비스듬히 기대 누워 수다를 벌이는 당대 향연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느끼는데 조력하는 것 같다. 여기에다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능의 실체 반영이라는 수사는 가당치않은 미사여구로 여겨진다. 민주주의 발달의 문화적 토양이기는커녕 폐쇄적이며 특권적 공간에서 벌이는 귀족과 지배엘리트의 항구적 지배와 담론 결속의 장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심포지온(symposion)의 구성은 도입부주제 연설마무리의 형식으로, 주제를 설정하는 자의 발의와 참석자들의 동의가 있고, 이어 전원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며 연설을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소크라테스의 총합적인 결론이 이루어진다. 사실 이 마무리 이후에 만취한 알키비아데스가 뒤늦게 도착하여 자신의 사랑을 거절한 소크라테스에 대한 조롱 섞인 찬양의 수다가 있는데, 당시 정치귀족으로 권력의 중추인물(참조:펠레폰네소스 전쟁사)이었던 자였기에 끼워 넣은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하게 된다.



1. 에로스(eros)에 대해서

 

대화자는 총 일곱 명이다. 이 중 마무리 연설자인 소크라테스와 불청객인 알키비아데스를 제외하면 다섯 명의 참석자가 중심테마인 에로스에 대한 연설을 한다. 이들 연설의 주요내용을 포함하여 소크라테스는 디오티마의 가르침으로부터 아름다움의 이데아, 인간 삶의 불가피한 필연적 방식을 도출한다.

 

주제 제안을 하는 에릭시마코스의 발의에 소크라테스의 동의 수락의 변은 흥미롭다. 참석자에는 희극작가인 아리스토파네스도 있는데, 두 사람의 경멸과 적의가 번뜩인다. 온통 디오니소스나 아프로디테에게만 관심을 쏟는 아리스토파네스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며 그의 작품을 점잖게 조롱하는 소크라테스를 읽게 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를 소피스트들의 위험스런 입을 지녔다고 자신의 작품에서 폄하하고 적의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요즘 말로하자면 진보의 소크라테스와 수구의 아리스토파네스가 대결하는 양상이다.

 

첫 연설자는 파이드로스로 논지는 에로스는 가장 오래된 자로서 가장 좋은 것들의 근원이며, 아름답게 살려는 사람을 훌륭하게 이끄는 역할을 하는 존재이며, 사랑에서 나온 용기에 대한 특별한 존경과 함께 덕과 행복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가장 영향력 있는 신이라 주장한다. 에로스란 용기와 덕과 행복을 인간에게 견인해주는 신이라는 것이다. 사실 특별할 것 없는 발언이다. 두 번째 연설자는 파우사니아스인데, 에로스는 하나가 아니라며 천상의 에로스와 범속의 에로스로 구분하여 이를 영혼과 육신의 에로스에 단순 대입하여 육체를 사랑하는 범속의 에로스로, 육체적 갈망의 절제와 지성을 좋아하는 천상의 에로스가 공존하고 있음을 설명한다. 그리고는 비난받지 않을 단 하나인 훌륭함(arete; )’을 얻을 목적으로 하는 사랑만이 아름다운 것임을 역설한다. 덕을 얻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만족시켜주는 행위는 전적으로 아름답다는 것이다.

 

이 즈음에서 다시한번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를 대신하여 아리스토파네스를 유머러스하게 저속화시키고 있는데, 연설 차례가 돌아 온 아리스토파네스가 딸꾹질로 제 순번에 연설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파네스의 경박함에 대한 공격일 것이다. 건너뛰어 의사인 에릭시마코스가 연설하게 되는데, 에로스를 의술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에로스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속해있으며, 신체의 본성에 따라 에로스의 욕망하는 대상도 다르다고 시작한다.

 

즉 건강한 신체와 병든 신체가 다르듯 닮지 않은 것은 욕망하는 대상도 다르다는 것이다. 결국 의사란 신체에서 가장 적대적 요소들을 가져다가 그것들을 친하게 만들고 사랑하게 해야만 하는 것으로서 대립되는 것 사이에 에로스를 가져와 조화를 이루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 바로 의술의 신이라는 것이다. 대립되는 것들에 일치를 집어넣어주는 시가(詩歌)술처럼, 욕망을 정확하게 다루는 절제와 올바름의 특징을 지닌 그 힘이 바로 에로스라고 주장한다.

 

서로 다른 것들의 욕망을 연결해주는 절제와 올바름의 힘이 에로스라는 것이다. 세상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광대인 아리스토파네스는 에릭시마코스가 에로스의 힘을 잘 모르는 것 같다고 빈정대며 시작한다. 그는 인간의 본성은 자웅동성체까지 본디 세 개였으나 지금은 이 혼합형태가 사라지고 남녀의 두 성만 남게 되었다고, 신을 공격함으로써 분노한 신들에 의해 반으로 나뉜 존재만이 있는 것이라고 현재의 인간 존재를 설명한다. 때문에 나누어진 하나하나는 자기 자신이었던 반쪽을 갈망하고 하나가 되고 싶어 하는, 즉 서로 사랑하고자 하는 욕망의 근원인 에로스가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이 사랑하고자 하는 욕망이란 인간 본성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연인들의 크고 깊은 즐거움인 성적결합인 육체적 욕망만이 아니라 온전함, 완전해지려는 영혼의 욕망이라 설명한다. 이 두 욕망의 이상적 상태에 다가가는 최선(最善)이 바로 에로스라는 것이다. 이 뻔한 얘기가 아리스토파네스에 할당된 것 또한 플라톤의 경멸 아니었을까? 지극히 우화적이고 진부한 상상력이지만 인간 욕망이라는 원초적 본성을 말하기에 이 자보다 적절한 인물은 없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연설 이전의 참석자로서 마지막 연설자인 주연의 주인공인 아가톤은 그 교만함으로 소크라테스에게 연설 시작 전에 한 방 먹는다. 아가톤은 오만방자한 말로 시작하는데, 소수의 지적인 사람들이 다수의 무지한 사람들보다 훨씬 두렵다는 것을 알지 못할 정도로 제가 극()에 빠져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라며 자신을 마치 소수의 지적인 사람으로 간주하며 다수의 대중은 무지하여 경멸할 대상쯤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에대해 소크라테스는 자네가 현자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을 일반 사람들보다 더 존중하리란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우리가 그런 현자의 부류에 들지 못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무지의 앎, 지성의 겸허를 넌지시 건넨다.

 

아가톤은 파이드로스의 연설에 동의를 표하며 자신의 주장을 시작하는데, 사랑에서 나온 용기인지, 사실 무엇에 대한 동의인지 식별하기가 어렵다. 다만 앞선 연설자들이 신으로부터 받은 좋은 것만을 얘기할 뿐 정작 신 그 자체의 본성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었음을 지적하며 에로스의 본성을 밝히려 한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실재(實在) 그 자체라는 이데아에 가장 근접한 담론으로 여겨진다. 에로스는 신 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훌륭하다고 정의하며, 그 이유로 그야말로 쏜살같이 늙음을 피해 달아나본성상 늙음을 혐오하는 가장 젊은 신이라는 것이며, 에로스가 신들을 통제하기 시작한 후에야 신들 사이에 우정과 평화가 깃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에로스는 젊고 섬세하며 물같이 유연하고 우아한 존재라고 설명한다. 특히 에로스는 쾌락과 욕망을 지배하기에 당연 에로스는 절제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아가톤은 다시금 소크라테스의 비판에 직면하게 되는데, 에로스는 어떤 것의 에로스라고 할만한 그런 자인가?”라는 물음이다. 이 말은 에로스는 사랑하는 그 무엇을 욕망하는가?라는 질문이다. 다시 부연하면 에로스가 욕망하고 사랑할 때 에로스는 욕망하고 사랑하는 것을 소유하고 있는가? 아니면 소유하고 있지 않은가? 의 물음이다. 우리는 필요한 무언가를 욕망하고 필요하지 않은 것이면 욕망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는 이것은 우리 인간이 그럴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이라고 말한다. 결국 곁에 있지 않은 것과 준비되어 있지 않은 것을 욕망하는 것, 욕망과 사랑이란 그런 것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아름다움을 욕망하는 에로스는 아름다움이 결핍된 존재이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이 결여되고 전적으로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출현한다. 이제 소크라테스가 마무리할 시간이 왔다.

 

2. 디오티마가 소크라테스에게 질문하다!

 

2-1. 에로스의 존재론적 위치와 정체성에 대해서

 


소크라테스는 제우스에게 명예를 얻은 여인이란 뜻을 지닌 당대 최고의 지자(知者)임을 암시하는 허구적 인물이 소크라테스에게 가르친 지혜를 소크라테스가 전달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녀는 에로스가 훌륭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추하거나 나쁜 것도 아니라고 시작한다. 우리는 가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지만 옳은 의견을 표명하기도 한다. 그런데 디오티마는 이유를 갖지 않은 것은 앎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옳은 의견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유를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무지도 아니라고 말한다. 있는 것에 닿아있으니 무지도 아니니 옳은 의견은 사리분별과 무지 사이에 있는 것이 된다. 따라서 에로스는 훌륭함과 아름다움, 나쁜 것과 추함이라는 두 가지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자라 정리한다. 때문에 아름다움과 좋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에로스는 신이 아니라 신과 인간 사이를 메워주고 우주자체를 결속하게 해주는 정령이라 말한다. 에로스의 존재론적 위치가 정의된 것이다.

 

이어서 에로스는 바다거품 속에서 아프로디테가 태어난 날 신들의 잔치가 열린 날 메티스(수완의 신)의 아들 포로스(방법 또는 풍요의 신)가 넥타르에 취해 잠들자 궁핍에 시달리던 여인 페니아가 자신의 가난을 덜 계책으로 포로스와 동침함으로서 에로스가 출생하였다고 에로스의 정체성을 설명한다. 때문에 에로스는 어미를 닮아 충동적이고 열정적이며 결핍된 존재이자 죽었다 깨어나기를 반복하며 생명을 반복하는 아비의 신적 속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에로스는 아름답고 좋은 것을 얻기위해 계책을 꾸미고 앎을 갈망하여 얻는데 비상한 재주를 발휘한다. 즉 그는 지혜를 욕망하지 않기에 지혜를 사랑하지 않는 신도 아니요, 스스로 자기 앎에 만족하는 무지한 자의 지혜를 욕망하지 않는 사이의 중간자임이 증명된다.

 

지혜는 가장 아름다운 것 중의 하나이고 에로스는 아름다움을 사랑하기에 사랑하는 자로서 무지와 지혜의 중간에 있는 자이다. 여기서 다시금 물음이 발생한다.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자는 무엇을 사랑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이다. 좋은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것을 사랑하는 자는 무엇을 사랑하는 것이냐는 물음으로 되돌아간다. 사실 언어를 통한 사고란 것이 인과적 논리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인간 사고의 원칙을 맴도는 이러한 논리적 유추는 사실 거북하기 그지없다. 어쨌거나 플라톤은 좋은 것이 속하게 되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디오티마의 입을 통해 답변한다. 결국 행복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좋은 것을 소유하기 때문이고 이것이 에로스가 인간에게 쓸모있는 이유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자신에게 속한 것이라 해서 모두 애착을 갖는 것이 아니다. 팔다리가 손상되어 썩어들어 가면 자신의 것이지만 절단해서 폐기하기도 한다. 따라서 진정 사랑하는 것은 좋은 것 이외에는 없다는 말이다. 때문에 인간에게 사랑이란 좋은 것을 영원히 소유하려는 욕망이 된다.

 

2-2. 사랑의 기능에 대해서

 

육체적 정신적 아름다움을 영원히 소유하려는 욕망이 에로스(사랑)의 기능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좋은 것과 함께 불멸성을 필연적으로 욕망하는 것으로서의 사랑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육체적으로 인간은 이를 생식과 출산이라는 행위를 통해 새로운 존재를 남김으로써 불사적 존재가 되려는 노력을 한다. 한편 영혼의 차원에서는 소위 영광스러운 평판이라는 불멸의 덕과 명예에 대한 사랑이 있다. 파트로클로스를 따라 죽음을 무릅쓴 아킬레우스의 죽음이 바로 이러한 명예라는 불멸의 것에 대한 사랑 때문인 것처럼 에로스는 가사(可死)적 존재인 인간의 불멸(不滅)에 대한 희구이기도 하다.

 

육체적 생식과 출산은 이러한 측면에서 분명 아름답지만 디오티마는 영혼 속에 이러한 아름다움이 훨씬 더 많다고 알려준다. 영혼이 잉태하고 출산하기에 적합한 것은 바로 사려깊음과 탁월함이란 것이다. 이는 바로 창조성을 낳으며, 이는 곧 생의 질서인 절제와 올바름이며, 아름다움의 추구이다. 즉 에로스(사랑)의 기능이란 불멸을 향한 인간 욕망의 실현이라는 말이다. 이제 의식의 목표인 최고의 비의(秘意)에 이른다. 어떤 사람의 육체의 아름다움이란 다른 사람의 육체의 아름다움과 자매이듯 단 하나의 육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열정을 덜어주는 본성상 아름다운 어떤 것에 대한 직관의 열림이다. 바로 아름다움 그 자체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그러한 인식에의 도달, 진정한 아름다움, 아름다움의 이데아를 인식하는 데 이른다. 일시적이지 않으며 그 무엇과도 섞이지 않은 영원히 순수한 아름다움 그 자체에 대한 인식으로.

 

진짜 세계는 형상(이데아)들의 세계라는 것이다. ~인 것처럼 보이거나 믿어지는 것이 마치 옳은 것, 아름다운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며, 감각적 경험에 기초한 상식의 세계란 그림자의 세계에 불과함을 역설하는 국가동굴의 우화에 대한 미학적 판본이랄 수 있다. 에를 들어 마네의 그림을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그 그림이 아름다운 성질을 지녀서가 아니라 아름다움 자체와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기에 아름다운 것이라는 말이다.

 

어떤 구체적 존재의 아름다움이란 그 존재가 아름다움이라는 이데아를 분유(分有)하기에 아름다운 것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구체적 개별적 아름다움이나 용기, 정의는 단지 상대적이고 가변적 관점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이와 별도로 아름다움 그 자체, 용기 그 자체인 아름다움과 용기의 궁극적 이데아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향연은 바로 이 아름다움 그 자체인 아름다움의 이데아를 중심 논의로 전개한 대화(철학적)이다. 결국 구체적 현실 세계에서 점차 형상의 세계로 나아가는 아름다움의 실재로 안내하는 사유이다. 아마도 감각적 경험의 세계를 형이상학적 실재의 세계와 일정한 상응관계를 맺게 한 플라톤 철학의 일면일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 인간의 이 본원적 매혹에 뒤얽혀 있는 근원에 대한 이들 사유를 읽다보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의 세계와 사람들에게 보다 열린 관용의 시선이 열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인간의 한계인 궁극적 필멸성에 대한 도전으로서 에로스는 불멸을 선사하는 정령이란 것을. 그 가련한 추구를 위해 몸부림치는 인간들에게 어찌 연민을 갖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에로스의 힘이 사라지고 있다. 그 육체적 정신적 결핍을 채워 줄 본질을 오늘 우리네 세계의 무지가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성하게 된다. 이제 영혼의 필멸성을 주장하는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날 대화인 파이돈으로 시선을 옮겨야겠다. 삶의 방식인 향연과 짝을 이루듯 죽음의 세계, 사자(死者)의 방식을 사유하는 또 다른 이데아의 판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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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커뮤니케이션 - 기술의 발전 예술의 몰락
기국간 지음 / 박영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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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수변 공원 조형설치물: 2023.09.20.촬영, 장소-선유교 하단

 


매일 걷는 산책로인 한강수변 공원에 20점 남짓한 새로운 미술 설치물을 발견하고 몇 점을 촬영했다. 아직 해당 설치물의 작가나 작품명, 간략한 설명문이 완성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설치 진행중인 것 같다. 아마 대중에 가까이 다가가고자하는 미술계와 지방정부 노력의 일환일 것이다. 이 예술작품을 보고 관람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좌측의 은빛 조형물은 인체의 형상 같기도 하고, 우측 돌과 기하학적 조형물이 어울린 작품은 일단 감각 자체가 주춤거린다. 어쨌든 현대미술, 특히 현재를 같이 호흡하는 동시대 미술 작품인 이들은 그 해석을 그리 호락호락 열어주지 않는다.

 

다시말해 대상이 뜻하고자하는 모종의 지식이나 정서에 대한 감응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다. 최근에는 서울 아트페어가 열려 대중이 동시대미술 작품들을 접하는 기회가 마련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여 현대미술을 감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정보는 온라인 커뮤니케이션 플랫폼들에 무수한 개인들에 의해 이미 영상과 함께 짧은 소감이나 견해들이 피력되고 있어 그 어느 시기보다 미술에 친화적이고 격의 없는 소통이 진행되는 듯 보인다.

 

그런데 이들 소통의 오피니언들은 전시된 작품들과 진정 감응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해당 작품의 의도와 의미를 교환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고작 작가의 명성이나 도록 등의 설명 내용이나 기타 온라인 검색 정보가 아닌가? 이를테면 자신의 독자적이고 창의적인 감상이 아니라 권위를 지녔다고 생각되는 누군가의 해석을 그저 수용하고 앵무새처럼 전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작품에 대한 자기 감상이 아니라 타인의 글을 읽은 것에 불과한 것 아닌가? 책은 이 지점에 대한 문제로부터 시작된 현대미술, 특히 동시대 미술에 대한 해석 불능 또는 이해의 포기라는 앎의 무능지대로 향한 오늘의 대중과 미술계를 반성적으로 비판하고 미술의 진정한 감상과 대중화를 모색하고 있다.

 

미술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미술은 잘 모릅니다.

미술은 잘 모릅니다. 그러나 미술을 사랑합니다.“

-무지를 부끄럽지 않게 고백할 수 있는 영역이 된 미술

 

요즈음 미디어 매체들에는 연일 그 어느 때보다 증가한 미술 관람자를 보도하며 동시대 미술이 부흥하고 있다며 자못 흥분된 기조의 말들을 뱉어내고 있다. 소위 MZ세대의 미술품에 대한 관심의 신장이 미술계에도 한류의 열풍을 불게하고 있다는 듯 말이다. 그렇다면 동시대 미술이 이들 대중에게 그 감상의 문이 열려 있어 누구나 감응하며 창의적 해독이 가능함을 시사한다는 말인가? 그 속사정은 전혀 그렇지않다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미술 전시관을 방문한 관람자들에게 전시 작품에 대해 묻거나 전시관 방문이유를 물으면 그네들에게서 돌아오는 답변은 거의 동일하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왠지 마음이 위로되고 평안한 기분이 된다는 것이며, 자신이 미술은 모르지만 정서적 위안을 느낀다고 말이다. 사실 난해하기 그지없는 동시대미술은 비지각적 의미로 대체되어 있는 까닭에 본다는 시각적 속성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왜 이러한 양상이 되었을까? 이는 기술의 발전과 함께 대두된 미술 이외의 미디어로 인한 전통적인 미술 방식, 즉 시각적 속성들로는 미술의 몰락을 막을 수 없었다는 데 있다고 지적한다. 사진술의 발전으로 인해 대상의 재현을 근간으로 하던 미술은 보는 것으로 생존할 수 없었기에 새로운 예술적 가치를 생산하는 방식으로, 즉 관념화된 비지각적 의미로 전환이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현대미술은 관념화라는 외피를 두르고 형이상학적 철학, 사회학적 사유를 기입하여 전문가의 해석과 비평이 아니고서는 해독이 불가능한 예술이 되었다는 것이다.

 

미술의 감상과 대중적 몰이해의 문제는 이 지점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보인다. 한낱 미술의 역사를 외우고 타인의 해설을 읽어 예술을 알고 즐기는 것처럼 뻐기는 SNS활동이 되고만 오늘의 실상, 앎은 사라지고 미술에 대한 무지를 부끄럽지 않게 고백할 수 있는 영역이 된 현대 미술의 근저에 자리잡은 보이지 않는 힘을 규명해보는 것이다. 미술을 모르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고, 이 알지 못함이 부끄러움이 되지 않게 되었냐는 것이다. 책은 기술의 발전과 함께 문화가 산업화되면서 예술의 탈신비화가 가속화되었음에 비롯됨을 아도르노, 벤야민의 이론을 오가며 복제화를 통한 아우라의 상실로 인한 예술의 민주화(대중화)를 비롯하여, 조작된 표준화로 인한 기존 사회질서에 대한 순응의 인도, 이러한 수동성으로 인한 실존적 안정과 정체성으로 주입되고 주류의식에 지배된 개성 상실을 말하고 있다.

 


이처럼 소위 문화산업이란 것이 사유하는 주체를 배제하고 영원한 소비자를 만들어내어 개성이라는 가치를 물질적 가치로 전화하여 여기서 탄생한 사이비 개성으로 주체의 소멸을 초래하였다고 지적한다. 이로인해 탄생하는 것이 바로 허위의식이란 것이다. 문화산업은 중산층이나 부르주아지의 형태와 흡사하게 문화생활환경을 제시함으로써 대중을 마치 이상적 민주사회에 사는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고 계급의식을 잃어버리게 함으로써 상위층 문화를 자신도 소비한다는 허위욕구에 몰입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숱하게 대중을 현혹하는 선전과 광고를 생각해보면 문화산업이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지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세계 속에는 일률적인 삶의 모델과 패턴이 있다. 표준화된 세계관으로 대중을 유인하여 계급의식을 둔화시키고 비판적 판단을 마비시켜버리는 것이다. 사회 내재적 저항 요소를 사전에 제거하여 마찰없는 대중문화의 체제 도구적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오늘날 미술의 대중화라는 것도 이와 그리 다르지 않다.

 

마르셀 뒤샹의 자기(磁器)변기인 <(fountain)>이나 전시관에 바나나 한 송이를 붙여놓은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코미디언>이 예술이 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 흔해빠진 도기로 된 변기와 갈변하는 바나나 한 송이가 왜 미술 작품인가?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무엇을 판단할 수 있는가? 이것은 예술인가 비예술인가? 실로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해보지 않았나? 허접하고 조악하며 악의적 조롱같은 이것이 고가의 미술작품이 되는 현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이제 미술은 보이는 것은 아무런 말도, 의미도 없으며 실제로 전해지는 것도 없다. 이것이 미술이 되는 것은 어디에 그 물건이 놓여있는가와 누가 그것을 미술이라 주장하는 가에 따라 미술과 비미술이 된다. 판단할 수 없으니 전문 비평가와 미술관과 같은 권위에 의존해야만 하는 것이 된다. 실제 이것들에 대체 무슨 창의적 요소와 심미적 가치가 있다는 것인가? 결국 현대미술 나아가 동시대 미술이라는 것의 의미와 가치 생성은 오직 권위를 지닌 일군의 미술계 권력의 자의적 가치판단과 이에 편승한 자본의 결합이 부여하는 것이 되고 만다.

 

오늘 한국 사회에서 미술관은 막강한 권력이다. 미술관은 자신의 공간에 전시될 작품을 선택함으로써 작품이라 불리는 것에 예술의 딱지를 붙인다. 이때 미술관은 미술비평가와 함께 한 송이 바나나에 누구도 알 수 없는, 아니 알아낼 수 없는 절대적 희소성을 바탕으로 한 존재하지 않는 지식을 포장하여 대중의 무지를 견고히 한다. 이로서 앎을 추구할 수 도 없으며, 추구하지 못하는 절대적 수동적 무지로 대중을 이끌어댄다.

 

다시말해 가치판단의 기준이 부재하여 비판이 불가능한 소수만이 독점하는 고급문화를 탄생시키는 것이다. 알 수 없고 모르니 신비한 고급 예술이 되는 것이다. 미술 세계를 지배하는 권력화 된 미술계는 매체를 이용하여 대중화를 유도하여 친근한 문화상품의 이미지로 다가서지만 결코 자신들의 비밀에 접근하는 것은 불허한다. 결코 대중이 이 비밀, 이 신비에 접근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판단과 가치와 가격의 설정을 독점하기 위해 이같은 관념적이고 주관적인 밀실 심판을 통해 대중의 무지는 절대 필요인 것이다. 대중은 고작 이들이 짜깁기하여 만들어 낸 정보와 지식의 테두리 속에서 제한된 앎의 기회를 받으며 허위의식을 충족시킨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이렇게 권력화되고 수동적 무지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이들의 지배적 의도가 아무런 저항도 없이 대중에 대한 지배적 힘을 보이지 않게 행사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중의 비판이 불허되는 오늘의 미술은 오직 예술을 선택하고 가치를 결정하는 미술계 권력의 선택만이 작동함으로써 고도로 세련된 이들의 지배 메커니즘에 굴종하게 된다. 결국 이들은 피지배 계급들에게 지적, 도덕적 지도력을 자의적으로 행사함으로써 지배를 견고하게 확립한다. 대중이 망각하고 있는 것은 다른 해석과 비판을 용납하지 않는 동시대미술이란 것이 관람자 자신과 작가의 세계를 이어주고 이해하는 창의에서 시작되어야 함에 대한 자각이다. 유럽의 미학의 역사를 여기저기 주워모아 짜깁기된 미학지식을 그럴듯하게 포장한 설명이 아니라 작가와 작품에 대한 직접의 소통에 다가가려는 창의적 사유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예술은 남이 발견한 것이거나 이미 해결된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이 아니다. 그렇다면 예술이 왜 필요하겠는가? 이러한 과거지향적, 종속적, 피지배적 지식을 앎이라고 치부하며 수동적 무지를 자랑하기 시작하면 이 세계는 그야말로 더러운 권력의 세계가 되고 말 것이다. 무차별적으로 미술계가 설정한 독법에 휘말려 그들이 일방적으로 만들어낸 예술의 가치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상황은 되돌아보는 것이 이성적 판단이 되지 않겠는가? 새로운 지적 도전에 나서야 하며, 또한 새로운 언어의 필요를 위해 모두 숙고해야 할 시점이다. 더 이상 요구된 수동적 무지를 계속 고집스레 주장하는 것은 대중이나 권력화된 미술계에도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미술계가 이렇게 폐쇄되고 집단화, 조직화되면 필히 썩은 내 풍기며 그 악취를 은페하기 위해 더욱 권력화되고 폭력화 될 것 이다.

 

깜깜한 무지 속에서 최소한 예술을 즐기는 허위의식, 사이비 개성에 도취되어 교양인으로 포장하는 미술커뮤니케이션의 성장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미술계를 위해서? 대중 자신들을 위해서? 무지를 뽐내는 것은 자랑이 아니라 수치이다. 수치를 당연시하면 굴종의 세계가 펼쳐진다. 저자의 지적처럼 자기 무지의 발견은 불안할 것이다. 불안함을 이겨내는 힘을 갖추기 위한 용기가 필요할 터, 바로 이 용기와 모험이 곧 창의적 예술 활동의 시작임을 새겨야 할 것 같다. 다음의 구절로 소회를 맺는다. 예술은 도전이다. 아니 모든 지적 활동은 도전이다.”

한국 동시대 미술에 응결된 문제점과 대중화 마케팅과 관련한 미술 커뮤니케이션에 내재된 문제 규명과 창의적 미래를 위한 모색의 시의적 평설이다. 명료한 언어를 통해 신랄한 비평을 가하는 탁견(卓見)의 저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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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글 상단의 조형물 사진 설명

-이 설명 글은 수변공원 설치물 옆에 놓인 설명글을 간략하게 옮겨 적은 것이다. 자신의 해석 혹은 비평과 견주어 보는 것도 창의적 감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좌측 은빛 조형물: 'The secret of Existence(존재의 비밀)'이란 제목으로 스테인레스스틸 재료로 2021년 제작, 작가 이윤복 - 망치질, 용접, 그리도 또 망치질과 숱한 사포질을 통해 이음새 없는 매끈한 유기적 덩어리인 작품으로 탄생한다. 수많은 노동시간을 견뎌온 몸과 영혼을 치유의 강에서 씻겨온 모습을 상징한다고 한다.

2)우측 조형물: ‘보이지 않는 것들이란 제목의 박지선 작가의 작품, 2021, 스테인레스 스틸, 자연석 제작 -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적층되고 구르고 굴러 단단해지는 자연석의 형성과정을 통해 개인에서부터 가족, 사회 등 다양한 층위 안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가치와의 유사를 은유함, 네모 유닛은 가족이나 공동체가 머무는 장소를 단순화시킨 것으로 개인, 가정, 집단을 상징하며, 장소들에 의해 지탱된 자연석의 모습을 통해 사회가 만들어 온 보이지 않는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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