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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의 잡설 - 박상륭 꼼꼼히 읽기
채기병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9월
평점 :
우리 독자들은 문학작품을 읽고 저마다 다양한 감상을 갖게 된다. 그것은 감동과 공감의 감응이기도 하고 이질성과 낯섦, 혹은 도덕적이거나 취향의 거부로 부정과 비판의 소회를 남기기도 한다. 그런데 순순히 읽히지 않거나 이해에 어려움을 주는 작품에는 더더욱 작품과는 다른 엉뚱한 찬양이나 비판이 가해지곤 한다. 대개는 당해 작품을 구성하는 언어, 문장, 사상 등에 대한 결여나 적대하는 무엇이 방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읽나? 무언가 낯선 세계를 그 책을 통해 알고 싶어서가 아닐까? 만일 뻔히 알고 있는 인간들과 세계만을 보려한다면 무엇하러 책을 읽겠는가. 결국 내 밖에 있는 것을 내 안에 수용하기 위한 포용의 일환이 책 읽기 아니겠는가? 작고(作故)한 소설가 박상륭은 항상 내 서가의 한 쪽에 자리잡고 거듭 읽힐 것을 준비하는 하나의 정신적 중추이다. 그럼에도 늘 흐릿한 아쉬움이 남아있는 글이었다. 엔간해서는 한 작가의 작품을 읽기위해 다른 이의 도움을 피하지만 박상륭의 작품을 모두 읽지 않은 내겐 그것은 항상 어슴푸레한 이미지들로만 맴돌았다. 해서 박상륭의 문학을 조명하는 밑그림을 그려주는 저자 채기병 선생의 노고에 도움을 받기로 했다. 변명이 길어졌다.
이 책은 저자(채기병)가 머리말에서 명시하듯 소설가 박상륭의 작품들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도록 그 윤곽에 접근 할 수 있도록 하려는 “연구보고서 혹은 독서 노트”라 할 수 있다. 특히 저자의 생각이나 다른 여느 평자의 글을 일체 반영하지 않고 오직 박상륭의 작픔 속 문장으로만 그 사유체계를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저자의 오랜 노고를 짐작할 수 있다. 나는 박상륭의 방언과 시적 문체, 그리고 선(禪) 수행 같은 일견 자폐적인 형이상학적 담론의 세계를 좋아한다. 그럼에도 박상륭이 발표한 열두 권(冊)의 ‘잡설(雜說;박상륭은 자신의 소설을 이렇게 부른다)’에 두루 편재하여 하나의 궁극을 말하려는 것을 손에 잡을 수 있을만큼 모두 읽지 못했다. 때문에 내가 눈치 채지 못하는 무엇에 대한 도움은 간절한 것이었고, 이 책은 이러한 흐릿함에 빛을 비추어주는 맞춤의 책이었다고 해야겠다.
박상륭의 소설은 실은 기성의 여타 소설들과 다르다. ‘소설과 경전의 사잇글’이라는 작가 자신의 정의처럼 신과 인간, 종교에 관한 고도의 형이상학적 담론을 펼친다. 즉 일종의 ‘법륜(法輪)굴리기’의 연속인 탓에 혹자의 비난처럼 ‘자신만의 꿀을 맛보려 토굴 속으로 들어간 자폐자의 웅얼거림’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런가하면 또 다른 평자들은 ‘인간에게 던져진 이 유일한 가능성에 대한 치열한 탐구’로서 ‘문장은 아름답고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는 신기한 기분이었음’을 토로하기도 한다. 이러한 양극단의 감상은 박상륭의 잡설 한 편 한편이 이르고자 하는 마음의 우주, 자아의 완전한 폐기인 위대한 자유의 성취인 해탈을 향한 편린들이기에 큰 그림을 그려낼 수 없는 까닭일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박상륭의 작품을 ‘지식 폭력의 한 전형’, ‘무의미하고 자폐적인 흉물’, ‘교감없이 자신 안에 매몰된 타자부재의 자기탐구 도구일 뿐’이라는 비난이 가능해지거나, 그의 ‘시적, 토속적 향취어린 문체의 아름다움과 몽롱한 형이상학의 세계에 매몰’되어 감상적 찬양만을 하게 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평가들의 면면은 분명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을 것이다. 이들이 지적하는 요소가 박상륭의 잡설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그러나 이는 그가 토해내는 글의 우주론(혹은 세계관)이나 상징과 비유들, 다분히 세심하고 정교하게 의도된 방언의 사용이나 ~입지, ~구나으?, ~다는다?, ~~라랐. ~입메? 와같은 사용치 않는 종결어미의 사용, 우리말 어법이 파괴된 복합문장, 새로운 합성문자 등의 낯섦이 주는 인식의 거북함과 몰이해 탓이지, 작품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나는 이 책을 읽음으로써 발견하지 못했던 문장들이 지닌 의미를 비로소 파악하게 되고, 또는 명확하게 와 닿지 않았던 달걀모양의 “양극을 갖는 타원형(『죽음의 한 연구』)”이라는 이미지화된 문장의 의미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으며, 작가가 지속적으로 표명하는 마음의 우주가 인신주의(人神主義)와 어떻게 연결되는 개념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고 작가의 우주론에 모두 공감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에는 무분별할 정도로 무수한 종교와 신들이 무차별적으로 하나의 궁극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하여 서로 조력한다. 이를 작가 스스로는 ‘통(通) 종교주의자’라 칭하며, “각 종교는 신에 대한 태도가 다를 뿐 지향점은 같기”에 종교는 많을수록 좋다는 종교개방주의를 주장하기도 했다. 사실 모든 종교에 개방되었다는 것은 종교가 더 이상 개별 종교의 고유 의미를 잃었다는 뜻이고, 결국은 종교란 없다는 의미와 그리 멀지 않다는 얘기이다. 다만 이들 종교를 통해 ‘神’이라는 것의 독자적 특성을 차용하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고 내겐 이해된다. 인간의 껍데기를 입어야만 했던 기독(基督)신조차 프라브리티의 차원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필요였음을.
아무튼 이 책을 통해 나는 박상륭의 작품 속에 투영되고 있는 오두일체(五頭一體)를 이루는 독특한 시간관, ‘몸-말-마음(이를 박상륭은 ’뫎‘이라 한다)’을 토대로 하는 그의 인간 진화론적 틀의 규명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잠과 꿈, 해골과 신발 등의 상징어가 지닌 의미를 그의 작품 속 지나쳤던 문장이 설명하고 있었음을 깨우쳤다. 무엇보다 그의 소설집인 『평심(平心)』의 각 단편마다 등장하여 『죽음의 한 연구』 『칠조 어론』 등 두루 편재하는 프라브리티(pravritti, 色界)와 니브리티(nivritti, 空界)의 잡히지 않았던 관념들을 제법 명쾌하게 이해하게 된 것은 한 정직한 지식인의 지극히 성실한 노력이 만들어 낸 이 책의 덕분이다.
프라브리티의 우주를 지속시키는 ‘살욕(殺慾,파괴)과 생식욕(生殖慾,창조)의 이 상극(相剋)적 질서 체계’가 바로 종교적 고행임을, “집 이뤄, 애써 살기의 도(道)를 닦기엔 열심인, 그것이야말로 참종교 아니었겠는가?”(『평심』, 「두 집 사이-제일의 늙은 아해 얘기」)라는 문장처럼, 이 현실의 몸을 지니고 의식을 표현하는 말을 하며 사는 현세적 존재의 비극이자 은총임을 그토록 증명하고 확인하고 싶어 했던 작가의 세계에 어렴풋 다가가게 된다. 사실 일생을 이 하나의 궁극을 위한 잡설 쓰기에 몰두했던 한 인간에게 안타까운 연민을 느끼게 된다. 이 연민이란 어쩌면 그보다는 나를 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프라브리티의 순환 세계를 벗어나기 위한 한 유정(有情)의 지난한 언어의 세계를 본다.
상극적 질서가 자연의 도(道)라면 도는 결코 인(仁)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현세인 이승의 질서가 이런 것이라면 그의 잡설인 『칠조 어론(七祖語論 3)』의 문장처럼 “다만 지나가야 되는 곳이지 머무는 곳이 아니다”라는 말에 꾸벅일 도리밖에. 결국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은 고해를 헤쳐 나가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는가? 해서 박상륭의 잡설은 “이 저주의 장소를 어떻게 극복하고 은총의 장소로 바꿀 것인가”를 탐색하는 과정일 것이라 이해하게 된다.
박상륭이 그의 작품 속에서 초지일관 지속했던 삶과 죽음의 문제, 그리고 구원의 문제임을 궁구(窮究)하는, 그의 작품 세계를 보다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도록 하는 성실하고, 정직하며 친절한 저술이다. 박상륭의 작품 앞에서 멈칫거리거나 읽기에 좌절했거나, 혹은 비난의 오독 속에 침잠해 있던 모든 독자들에게 이 텍스트의 활용을 추천한다. 아마 박상륭의 잡설이 하나의 위대한 소설문학 작품으로 다가 올 것임을 확신한다.
참혹한 상극의 세계가 노골적으로 펼쳐지는 작금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그 혐오스러움이 애꿎은 내 육신의 살아감을 분노하게 한다. 박상륭이 현실세계의 문제를 외면했다고 하는 지적들은 절반만 옳은 얘기 일 것이다. 물론 그는 이 프라브리티의 세계를 벗어날 궁리만 했으니 그 경계 내에서만 그러했다는 말이다. 때문에 그의 현실 진단은 자기중심적 독해에 머물기도 했다.
일례로 “세납자들이 세금을 바쳐, 저들의 배를 채워주려면, 얼마나 뼈 빠지게 일을 했어야 했겠는가(『평심』, 「로이가 산 한 삶」)”라며 복지사회를 맹렬히 비난하기도 한다. 이는 바로 상극의 질서가, 즉 끝없는 투쟁이 있는 현세가 곧 종교적 고해라는 믿음을 지닌 그였기에 자아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이라는 그의 진화론적 틀에서 그러한 것이지, 배곯으면 배고픔을 느끼는 실재하는 고통을 외면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단편 작품들은 이러한 시선에 대한 응답이기도 할 것이다. 다채로운 고통에 직면한 인간들에 연민과 애틋함, 아픔을 자기의 것처럼 나눈다. 그러나 거기까지.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이것은 그의 글쓰기가 현실인식 능력을 상실한, 자폐적 공간에 함몰된 우아한 판타지에 불과하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한다. 이처럼 문학예술에 대한 세간의 이해는 첨예하게 반목한다. 현실 인식을 투영하지 못하는 것은 문학이 아니라는 비평과 예술은 현실에 없는 것을 상상해 내는 것이라야 한다는 예술 그 자체의 지향성에 대한 옹호가 있다. 박상륭을 읽을지 말지는 그야말로 취향의 문제일 것이다. 읽거나 말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