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커뮤니케이션 - 기술의 발전 예술의 몰락
기국간 지음 / 박영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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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수변 공원 조형설치물: 2023.09.20.촬영, 장소-선유교 하단

 


매일 걷는 산책로인 한강수변 공원에 20점 남짓한 새로운 미술 설치물을 발견하고 몇 점을 촬영했다. 아직 해당 설치물의 작가나 작품명, 간략한 설명문이 완성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설치 진행중인 것 같다. 아마 대중에 가까이 다가가고자하는 미술계와 지방정부 노력의 일환일 것이다. 이 예술작품을 보고 관람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좌측의 은빛 조형물은 인체의 형상 같기도 하고, 우측 돌과 기하학적 조형물이 어울린 작품은 일단 감각 자체가 주춤거린다. 어쨌든 현대미술, 특히 현재를 같이 호흡하는 동시대 미술 작품인 이들은 그 해석을 그리 호락호락 열어주지 않는다.

 

다시말해 대상이 뜻하고자하는 모종의 지식이나 정서에 대한 감응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다. 최근에는 서울 아트페어가 열려 대중이 동시대미술 작품들을 접하는 기회가 마련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여 현대미술을 감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정보는 온라인 커뮤니케이션 플랫폼들에 무수한 개인들에 의해 이미 영상과 함께 짧은 소감이나 견해들이 피력되고 있어 그 어느 시기보다 미술에 친화적이고 격의 없는 소통이 진행되는 듯 보인다.

 

그런데 이들 소통의 오피니언들은 전시된 작품들과 진정 감응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해당 작품의 의도와 의미를 교환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고작 작가의 명성이나 도록 등의 설명 내용이나 기타 온라인 검색 정보가 아닌가? 이를테면 자신의 독자적이고 창의적인 감상이 아니라 권위를 지녔다고 생각되는 누군가의 해석을 그저 수용하고 앵무새처럼 전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작품에 대한 자기 감상이 아니라 타인의 글을 읽은 것에 불과한 것 아닌가? 책은 이 지점에 대한 문제로부터 시작된 현대미술, 특히 동시대 미술에 대한 해석 불능 또는 이해의 포기라는 앎의 무능지대로 향한 오늘의 대중과 미술계를 반성적으로 비판하고 미술의 진정한 감상과 대중화를 모색하고 있다.

 

미술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미술은 잘 모릅니다.

미술은 잘 모릅니다. 그러나 미술을 사랑합니다.“

-무지를 부끄럽지 않게 고백할 수 있는 영역이 된 미술

 

요즈음 미디어 매체들에는 연일 그 어느 때보다 증가한 미술 관람자를 보도하며 동시대 미술이 부흥하고 있다며 자못 흥분된 기조의 말들을 뱉어내고 있다. 소위 MZ세대의 미술품에 대한 관심의 신장이 미술계에도 한류의 열풍을 불게하고 있다는 듯 말이다. 그렇다면 동시대 미술이 이들 대중에게 그 감상의 문이 열려 있어 누구나 감응하며 창의적 해독이 가능함을 시사한다는 말인가? 그 속사정은 전혀 그렇지않다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미술 전시관을 방문한 관람자들에게 전시 작품에 대해 묻거나 전시관 방문이유를 물으면 그네들에게서 돌아오는 답변은 거의 동일하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왠지 마음이 위로되고 평안한 기분이 된다는 것이며, 자신이 미술은 모르지만 정서적 위안을 느낀다고 말이다. 사실 난해하기 그지없는 동시대미술은 비지각적 의미로 대체되어 있는 까닭에 본다는 시각적 속성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왜 이러한 양상이 되었을까? 이는 기술의 발전과 함께 대두된 미술 이외의 미디어로 인한 전통적인 미술 방식, 즉 시각적 속성들로는 미술의 몰락을 막을 수 없었다는 데 있다고 지적한다. 사진술의 발전으로 인해 대상의 재현을 근간으로 하던 미술은 보는 것으로 생존할 수 없었기에 새로운 예술적 가치를 생산하는 방식으로, 즉 관념화된 비지각적 의미로 전환이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현대미술은 관념화라는 외피를 두르고 형이상학적 철학, 사회학적 사유를 기입하여 전문가의 해석과 비평이 아니고서는 해독이 불가능한 예술이 되었다는 것이다.

 

미술의 감상과 대중적 몰이해의 문제는 이 지점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보인다. 한낱 미술의 역사를 외우고 타인의 해설을 읽어 예술을 알고 즐기는 것처럼 뻐기는 SNS활동이 되고만 오늘의 실상, 앎은 사라지고 미술에 대한 무지를 부끄럽지 않게 고백할 수 있는 영역이 된 현대 미술의 근저에 자리잡은 보이지 않는 힘을 규명해보는 것이다. 미술을 모르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고, 이 알지 못함이 부끄러움이 되지 않게 되었냐는 것이다. 책은 기술의 발전과 함께 문화가 산업화되면서 예술의 탈신비화가 가속화되었음에 비롯됨을 아도르노, 벤야민의 이론을 오가며 복제화를 통한 아우라의 상실로 인한 예술의 민주화(대중화)를 비롯하여, 조작된 표준화로 인한 기존 사회질서에 대한 순응의 인도, 이러한 수동성으로 인한 실존적 안정과 정체성으로 주입되고 주류의식에 지배된 개성 상실을 말하고 있다.

 


이처럼 소위 문화산업이란 것이 사유하는 주체를 배제하고 영원한 소비자를 만들어내어 개성이라는 가치를 물질적 가치로 전화하여 여기서 탄생한 사이비 개성으로 주체의 소멸을 초래하였다고 지적한다. 이로인해 탄생하는 것이 바로 허위의식이란 것이다. 문화산업은 중산층이나 부르주아지의 형태와 흡사하게 문화생활환경을 제시함으로써 대중을 마치 이상적 민주사회에 사는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고 계급의식을 잃어버리게 함으로써 상위층 문화를 자신도 소비한다는 허위욕구에 몰입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숱하게 대중을 현혹하는 선전과 광고를 생각해보면 문화산업이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지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세계 속에는 일률적인 삶의 모델과 패턴이 있다. 표준화된 세계관으로 대중을 유인하여 계급의식을 둔화시키고 비판적 판단을 마비시켜버리는 것이다. 사회 내재적 저항 요소를 사전에 제거하여 마찰없는 대중문화의 체제 도구적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오늘날 미술의 대중화라는 것도 이와 그리 다르지 않다.

 

마르셀 뒤샹의 자기(磁器)변기인 <(fountain)>이나 전시관에 바나나 한 송이를 붙여놓은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코미디언>이 예술이 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 흔해빠진 도기로 된 변기와 갈변하는 바나나 한 송이가 왜 미술 작품인가?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무엇을 판단할 수 있는가? 이것은 예술인가 비예술인가? 실로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해보지 않았나? 허접하고 조악하며 악의적 조롱같은 이것이 고가의 미술작품이 되는 현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이제 미술은 보이는 것은 아무런 말도, 의미도 없으며 실제로 전해지는 것도 없다. 이것이 미술이 되는 것은 어디에 그 물건이 놓여있는가와 누가 그것을 미술이라 주장하는 가에 따라 미술과 비미술이 된다. 판단할 수 없으니 전문 비평가와 미술관과 같은 권위에 의존해야만 하는 것이 된다. 실제 이것들에 대체 무슨 창의적 요소와 심미적 가치가 있다는 것인가? 결국 현대미술 나아가 동시대 미술이라는 것의 의미와 가치 생성은 오직 권위를 지닌 일군의 미술계 권력의 자의적 가치판단과 이에 편승한 자본의 결합이 부여하는 것이 되고 만다.

 

오늘 한국 사회에서 미술관은 막강한 권력이다. 미술관은 자신의 공간에 전시될 작품을 선택함으로써 작품이라 불리는 것에 예술의 딱지를 붙인다. 이때 미술관은 미술비평가와 함께 한 송이 바나나에 누구도 알 수 없는, 아니 알아낼 수 없는 절대적 희소성을 바탕으로 한 존재하지 않는 지식을 포장하여 대중의 무지를 견고히 한다. 이로서 앎을 추구할 수 도 없으며, 추구하지 못하는 절대적 수동적 무지로 대중을 이끌어댄다.

 

다시말해 가치판단의 기준이 부재하여 비판이 불가능한 소수만이 독점하는 고급문화를 탄생시키는 것이다. 알 수 없고 모르니 신비한 고급 예술이 되는 것이다. 미술 세계를 지배하는 권력화 된 미술계는 매체를 이용하여 대중화를 유도하여 친근한 문화상품의 이미지로 다가서지만 결코 자신들의 비밀에 접근하는 것은 불허한다. 결코 대중이 이 비밀, 이 신비에 접근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판단과 가치와 가격의 설정을 독점하기 위해 이같은 관념적이고 주관적인 밀실 심판을 통해 대중의 무지는 절대 필요인 것이다. 대중은 고작 이들이 짜깁기하여 만들어 낸 정보와 지식의 테두리 속에서 제한된 앎의 기회를 받으며 허위의식을 충족시킨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이렇게 권력화되고 수동적 무지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이들의 지배적 의도가 아무런 저항도 없이 대중에 대한 지배적 힘을 보이지 않게 행사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중의 비판이 불허되는 오늘의 미술은 오직 예술을 선택하고 가치를 결정하는 미술계 권력의 선택만이 작동함으로써 고도로 세련된 이들의 지배 메커니즘에 굴종하게 된다. 결국 이들은 피지배 계급들에게 지적, 도덕적 지도력을 자의적으로 행사함으로써 지배를 견고하게 확립한다. 대중이 망각하고 있는 것은 다른 해석과 비판을 용납하지 않는 동시대미술이란 것이 관람자 자신과 작가의 세계를 이어주고 이해하는 창의에서 시작되어야 함에 대한 자각이다. 유럽의 미학의 역사를 여기저기 주워모아 짜깁기된 미학지식을 그럴듯하게 포장한 설명이 아니라 작가와 작품에 대한 직접의 소통에 다가가려는 창의적 사유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예술은 남이 발견한 것이거나 이미 해결된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이 아니다. 그렇다면 예술이 왜 필요하겠는가? 이러한 과거지향적, 종속적, 피지배적 지식을 앎이라고 치부하며 수동적 무지를 자랑하기 시작하면 이 세계는 그야말로 더러운 권력의 세계가 되고 말 것이다. 무차별적으로 미술계가 설정한 독법에 휘말려 그들이 일방적으로 만들어낸 예술의 가치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상황은 되돌아보는 것이 이성적 판단이 되지 않겠는가? 새로운 지적 도전에 나서야 하며, 또한 새로운 언어의 필요를 위해 모두 숙고해야 할 시점이다. 더 이상 요구된 수동적 무지를 계속 고집스레 주장하는 것은 대중이나 권력화된 미술계에도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미술계가 이렇게 폐쇄되고 집단화, 조직화되면 필히 썩은 내 풍기며 그 악취를 은페하기 위해 더욱 권력화되고 폭력화 될 것 이다.

 

깜깜한 무지 속에서 최소한 예술을 즐기는 허위의식, 사이비 개성에 도취되어 교양인으로 포장하는 미술커뮤니케이션의 성장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미술계를 위해서? 대중 자신들을 위해서? 무지를 뽐내는 것은 자랑이 아니라 수치이다. 수치를 당연시하면 굴종의 세계가 펼쳐진다. 저자의 지적처럼 자기 무지의 발견은 불안할 것이다. 불안함을 이겨내는 힘을 갖추기 위한 용기가 필요할 터, 바로 이 용기와 모험이 곧 창의적 예술 활동의 시작임을 새겨야 할 것 같다. 다음의 구절로 소회를 맺는다. 예술은 도전이다. 아니 모든 지적 활동은 도전이다.”

한국 동시대 미술에 응결된 문제점과 대중화 마케팅과 관련한 미술 커뮤니케이션에 내재된 문제 규명과 창의적 미래를 위한 모색의 시의적 평설이다. 명료한 언어를 통해 신랄한 비평을 가하는 탁견(卓見)의 저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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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글 상단의 조형물 사진 설명

-이 설명 글은 수변공원 설치물 옆에 놓인 설명글을 간략하게 옮겨 적은 것이다. 자신의 해석 혹은 비평과 견주어 보는 것도 창의적 감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좌측 은빛 조형물: 'The secret of Existence(존재의 비밀)'이란 제목으로 스테인레스스틸 재료로 2021년 제작, 작가 이윤복 - 망치질, 용접, 그리도 또 망치질과 숱한 사포질을 통해 이음새 없는 매끈한 유기적 덩어리인 작품으로 탄생한다. 수많은 노동시간을 견뎌온 몸과 영혼을 치유의 강에서 씻겨온 모습을 상징한다고 한다.

2)우측 조형물: ‘보이지 않는 것들이란 제목의 박지선 작가의 작품, 2021, 스테인레스 스틸, 자연석 제작 -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적층되고 구르고 굴러 단단해지는 자연석의 형성과정을 통해 개인에서부터 가족, 사회 등 다양한 층위 안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가치와의 유사를 은유함, 네모 유닛은 가족이나 공동체가 머무는 장소를 단순화시킨 것으로 개인, 가정, 집단을 상징하며, 장소들에 의해 지탱된 자연석의 모습을 통해 사회가 만들어 온 보이지 않는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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