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연 - 에로스의 모든 것에 대한 고찰 서해클래식 20
플라톤 지음, 김영범 옮김 / 서해문집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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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쾌락을 구속하거나 추방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절제하고 방종에 빠지지 않는

 기술을쾌락의 활용이라 한다면, 스스로 온전히 자신의 주인이 되어 자기를

 배려하는 삶의 방식을  사랑이라 한다.”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란 도덕적 윤리의 완고함 속에서 배타적 금욕과 육체의 향락 사이를 오가는 것이다. 이 두 영역의 적절한 조화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삶은 곧 균열이 가고 추락하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애초부터 육체 없는 사랑을 말하는 것은 공허요, 영혼없는 맹목이기 십상이다. 한편 신체를 멸시하고 영혼의 존귀함만을 내세우던 서구 중세의 암흑처럼 정신과 영혼의 사랑에 매몰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들은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다. 삶의 사랑이란 바로 신체와 영혼 이 둘의 적절한 균형과 조화이다.

 

인간 삶과 세계 모든 것을 면밀하게 뒤지며 철학체계를 정립하려한 플라톤의 철학이론인 대화편 중에서 이 책 향연(symposion)은 아름다움과 사랑의 본성을 사유하며 삶의 방식을 제시한다. 여러 대화중에서 이 철학담론을 함께 모여 먹고 마시다라는 뜻을 지닌 향연이라 명명한 까닭은 비극경연대회 우승을 차지한 아가톤을 축하하기 위한 주연(酒宴)의 성격 이외에는 논의의 주제와 직접적 연관성을 발견할 수 없다. 다만 참석자들이 돌아가며 연설하는 방식의 전경과 한 침상에 두 명씩 비스듬히 기대 누워 수다를 벌이는 당대 향연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느끼는데 조력하는 것 같다. 여기에다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능의 실체 반영이라는 수사는 가당치않은 미사여구로 여겨진다. 민주주의 발달의 문화적 토양이기는커녕 폐쇄적이며 특권적 공간에서 벌이는 귀족과 지배엘리트의 항구적 지배와 담론 결속의 장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심포지온(symposion)의 구성은 도입부주제 연설마무리의 형식으로, 주제를 설정하는 자의 발의와 참석자들의 동의가 있고, 이어 전원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며 연설을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소크라테스의 총합적인 결론이 이루어진다. 사실 이 마무리 이후에 만취한 알키비아데스가 뒤늦게 도착하여 자신의 사랑을 거절한 소크라테스에 대한 조롱 섞인 찬양의 수다가 있는데, 당시 정치귀족으로 권력의 중추인물(참조:펠레폰네소스 전쟁사)이었던 자였기에 끼워 넣은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하게 된다.



1. 에로스(eros)에 대해서

 

대화자는 총 일곱 명이다. 이 중 마무리 연설자인 소크라테스와 불청객인 알키비아데스를 제외하면 다섯 명의 참석자가 중심테마인 에로스에 대한 연설을 한다. 이들 연설의 주요내용을 포함하여 소크라테스는 디오티마의 가르침으로부터 아름다움의 이데아, 인간 삶의 불가피한 필연적 방식을 도출한다.

 

주제 제안을 하는 에릭시마코스의 발의에 소크라테스의 동의 수락의 변은 흥미롭다. 참석자에는 희극작가인 아리스토파네스도 있는데, 두 사람의 경멸과 적의가 번뜩인다. 온통 디오니소스나 아프로디테에게만 관심을 쏟는 아리스토파네스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며 그의 작품을 점잖게 조롱하는 소크라테스를 읽게 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를 소피스트들의 위험스런 입을 지녔다고 자신의 작품에서 폄하하고 적의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요즘 말로하자면 진보의 소크라테스와 수구의 아리스토파네스가 대결하는 양상이다.

 

첫 연설자는 파이드로스로 논지는 에로스는 가장 오래된 자로서 가장 좋은 것들의 근원이며, 아름답게 살려는 사람을 훌륭하게 이끄는 역할을 하는 존재이며, 사랑에서 나온 용기에 대한 특별한 존경과 함께 덕과 행복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가장 영향력 있는 신이라 주장한다. 에로스란 용기와 덕과 행복을 인간에게 견인해주는 신이라는 것이다. 사실 특별할 것 없는 발언이다. 두 번째 연설자는 파우사니아스인데, 에로스는 하나가 아니라며 천상의 에로스와 범속의 에로스로 구분하여 이를 영혼과 육신의 에로스에 단순 대입하여 육체를 사랑하는 범속의 에로스로, 육체적 갈망의 절제와 지성을 좋아하는 천상의 에로스가 공존하고 있음을 설명한다. 그리고는 비난받지 않을 단 하나인 훌륭함(arete; )’을 얻을 목적으로 하는 사랑만이 아름다운 것임을 역설한다. 덕을 얻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만족시켜주는 행위는 전적으로 아름답다는 것이다.

 

이 즈음에서 다시한번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를 대신하여 아리스토파네스를 유머러스하게 저속화시키고 있는데, 연설 차례가 돌아 온 아리스토파네스가 딸꾹질로 제 순번에 연설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파네스의 경박함에 대한 공격일 것이다. 건너뛰어 의사인 에릭시마코스가 연설하게 되는데, 에로스를 의술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에로스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속해있으며, 신체의 본성에 따라 에로스의 욕망하는 대상도 다르다고 시작한다.

 

즉 건강한 신체와 병든 신체가 다르듯 닮지 않은 것은 욕망하는 대상도 다르다는 것이다. 결국 의사란 신체에서 가장 적대적 요소들을 가져다가 그것들을 친하게 만들고 사랑하게 해야만 하는 것으로서 대립되는 것 사이에 에로스를 가져와 조화를 이루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 바로 의술의 신이라는 것이다. 대립되는 것들에 일치를 집어넣어주는 시가(詩歌)술처럼, 욕망을 정확하게 다루는 절제와 올바름의 특징을 지닌 그 힘이 바로 에로스라고 주장한다.

 

서로 다른 것들의 욕망을 연결해주는 절제와 올바름의 힘이 에로스라는 것이다. 세상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광대인 아리스토파네스는 에릭시마코스가 에로스의 힘을 잘 모르는 것 같다고 빈정대며 시작한다. 그는 인간의 본성은 자웅동성체까지 본디 세 개였으나 지금은 이 혼합형태가 사라지고 남녀의 두 성만 남게 되었다고, 신을 공격함으로써 분노한 신들에 의해 반으로 나뉜 존재만이 있는 것이라고 현재의 인간 존재를 설명한다. 때문에 나누어진 하나하나는 자기 자신이었던 반쪽을 갈망하고 하나가 되고 싶어 하는, 즉 서로 사랑하고자 하는 욕망의 근원인 에로스가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이 사랑하고자 하는 욕망이란 인간 본성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연인들의 크고 깊은 즐거움인 성적결합인 육체적 욕망만이 아니라 온전함, 완전해지려는 영혼의 욕망이라 설명한다. 이 두 욕망의 이상적 상태에 다가가는 최선(最善)이 바로 에로스라는 것이다. 이 뻔한 얘기가 아리스토파네스에 할당된 것 또한 플라톤의 경멸 아니었을까? 지극히 우화적이고 진부한 상상력이지만 인간 욕망이라는 원초적 본성을 말하기에 이 자보다 적절한 인물은 없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연설 이전의 참석자로서 마지막 연설자인 주연의 주인공인 아가톤은 그 교만함으로 소크라테스에게 연설 시작 전에 한 방 먹는다. 아가톤은 오만방자한 말로 시작하는데, 소수의 지적인 사람들이 다수의 무지한 사람들보다 훨씬 두렵다는 것을 알지 못할 정도로 제가 극()에 빠져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라며 자신을 마치 소수의 지적인 사람으로 간주하며 다수의 대중은 무지하여 경멸할 대상쯤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에대해 소크라테스는 자네가 현자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을 일반 사람들보다 더 존중하리란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우리가 그런 현자의 부류에 들지 못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무지의 앎, 지성의 겸허를 넌지시 건넨다.

 

아가톤은 파이드로스의 연설에 동의를 표하며 자신의 주장을 시작하는데, 사랑에서 나온 용기인지, 사실 무엇에 대한 동의인지 식별하기가 어렵다. 다만 앞선 연설자들이 신으로부터 받은 좋은 것만을 얘기할 뿐 정작 신 그 자체의 본성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었음을 지적하며 에로스의 본성을 밝히려 한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실재(實在) 그 자체라는 이데아에 가장 근접한 담론으로 여겨진다. 에로스는 신 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훌륭하다고 정의하며, 그 이유로 그야말로 쏜살같이 늙음을 피해 달아나본성상 늙음을 혐오하는 가장 젊은 신이라는 것이며, 에로스가 신들을 통제하기 시작한 후에야 신들 사이에 우정과 평화가 깃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에로스는 젊고 섬세하며 물같이 유연하고 우아한 존재라고 설명한다. 특히 에로스는 쾌락과 욕망을 지배하기에 당연 에로스는 절제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아가톤은 다시금 소크라테스의 비판에 직면하게 되는데, 에로스는 어떤 것의 에로스라고 할만한 그런 자인가?”라는 물음이다. 이 말은 에로스는 사랑하는 그 무엇을 욕망하는가?라는 질문이다. 다시 부연하면 에로스가 욕망하고 사랑할 때 에로스는 욕망하고 사랑하는 것을 소유하고 있는가? 아니면 소유하고 있지 않은가? 의 물음이다. 우리는 필요한 무언가를 욕망하고 필요하지 않은 것이면 욕망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는 이것은 우리 인간이 그럴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이라고 말한다. 결국 곁에 있지 않은 것과 준비되어 있지 않은 것을 욕망하는 것, 욕망과 사랑이란 그런 것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아름다움을 욕망하는 에로스는 아름다움이 결핍된 존재이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이 결여되고 전적으로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출현한다. 이제 소크라테스가 마무리할 시간이 왔다.

 

2. 디오티마가 소크라테스에게 질문하다!

 

2-1. 에로스의 존재론적 위치와 정체성에 대해서

 


소크라테스는 제우스에게 명예를 얻은 여인이란 뜻을 지닌 당대 최고의 지자(知者)임을 암시하는 허구적 인물이 소크라테스에게 가르친 지혜를 소크라테스가 전달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녀는 에로스가 훌륭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추하거나 나쁜 것도 아니라고 시작한다. 우리는 가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지만 옳은 의견을 표명하기도 한다. 그런데 디오티마는 이유를 갖지 않은 것은 앎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옳은 의견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유를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무지도 아니라고 말한다. 있는 것에 닿아있으니 무지도 아니니 옳은 의견은 사리분별과 무지 사이에 있는 것이 된다. 따라서 에로스는 훌륭함과 아름다움, 나쁜 것과 추함이라는 두 가지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자라 정리한다. 때문에 아름다움과 좋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에로스는 신이 아니라 신과 인간 사이를 메워주고 우주자체를 결속하게 해주는 정령이라 말한다. 에로스의 존재론적 위치가 정의된 것이다.

 

이어서 에로스는 바다거품 속에서 아프로디테가 태어난 날 신들의 잔치가 열린 날 메티스(수완의 신)의 아들 포로스(방법 또는 풍요의 신)가 넥타르에 취해 잠들자 궁핍에 시달리던 여인 페니아가 자신의 가난을 덜 계책으로 포로스와 동침함으로서 에로스가 출생하였다고 에로스의 정체성을 설명한다. 때문에 에로스는 어미를 닮아 충동적이고 열정적이며 결핍된 존재이자 죽었다 깨어나기를 반복하며 생명을 반복하는 아비의 신적 속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에로스는 아름답고 좋은 것을 얻기위해 계책을 꾸미고 앎을 갈망하여 얻는데 비상한 재주를 발휘한다. 즉 그는 지혜를 욕망하지 않기에 지혜를 사랑하지 않는 신도 아니요, 스스로 자기 앎에 만족하는 무지한 자의 지혜를 욕망하지 않는 사이의 중간자임이 증명된다.

 

지혜는 가장 아름다운 것 중의 하나이고 에로스는 아름다움을 사랑하기에 사랑하는 자로서 무지와 지혜의 중간에 있는 자이다. 여기서 다시금 물음이 발생한다.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자는 무엇을 사랑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이다. 좋은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것을 사랑하는 자는 무엇을 사랑하는 것이냐는 물음으로 되돌아간다. 사실 언어를 통한 사고란 것이 인과적 논리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인간 사고의 원칙을 맴도는 이러한 논리적 유추는 사실 거북하기 그지없다. 어쨌거나 플라톤은 좋은 것이 속하게 되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디오티마의 입을 통해 답변한다. 결국 행복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좋은 것을 소유하기 때문이고 이것이 에로스가 인간에게 쓸모있는 이유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자신에게 속한 것이라 해서 모두 애착을 갖는 것이 아니다. 팔다리가 손상되어 썩어들어 가면 자신의 것이지만 절단해서 폐기하기도 한다. 따라서 진정 사랑하는 것은 좋은 것 이외에는 없다는 말이다. 때문에 인간에게 사랑이란 좋은 것을 영원히 소유하려는 욕망이 된다.

 

2-2. 사랑의 기능에 대해서

 

육체적 정신적 아름다움을 영원히 소유하려는 욕망이 에로스(사랑)의 기능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좋은 것과 함께 불멸성을 필연적으로 욕망하는 것으로서의 사랑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육체적으로 인간은 이를 생식과 출산이라는 행위를 통해 새로운 존재를 남김으로써 불사적 존재가 되려는 노력을 한다. 한편 영혼의 차원에서는 소위 영광스러운 평판이라는 불멸의 덕과 명예에 대한 사랑이 있다. 파트로클로스를 따라 죽음을 무릅쓴 아킬레우스의 죽음이 바로 이러한 명예라는 불멸의 것에 대한 사랑 때문인 것처럼 에로스는 가사(可死)적 존재인 인간의 불멸(不滅)에 대한 희구이기도 하다.

 

육체적 생식과 출산은 이러한 측면에서 분명 아름답지만 디오티마는 영혼 속에 이러한 아름다움이 훨씬 더 많다고 알려준다. 영혼이 잉태하고 출산하기에 적합한 것은 바로 사려깊음과 탁월함이란 것이다. 이는 바로 창조성을 낳으며, 이는 곧 생의 질서인 절제와 올바름이며, 아름다움의 추구이다. 즉 에로스(사랑)의 기능이란 불멸을 향한 인간 욕망의 실현이라는 말이다. 이제 의식의 목표인 최고의 비의(秘意)에 이른다. 어떤 사람의 육체의 아름다움이란 다른 사람의 육체의 아름다움과 자매이듯 단 하나의 육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열정을 덜어주는 본성상 아름다운 어떤 것에 대한 직관의 열림이다. 바로 아름다움 그 자체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그러한 인식에의 도달, 진정한 아름다움, 아름다움의 이데아를 인식하는 데 이른다. 일시적이지 않으며 그 무엇과도 섞이지 않은 영원히 순수한 아름다움 그 자체에 대한 인식으로.

 

진짜 세계는 형상(이데아)들의 세계라는 것이다. ~인 것처럼 보이거나 믿어지는 것이 마치 옳은 것, 아름다운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며, 감각적 경험에 기초한 상식의 세계란 그림자의 세계에 불과함을 역설하는 국가동굴의 우화에 대한 미학적 판본이랄 수 있다. 에를 들어 마네의 그림을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그 그림이 아름다운 성질을 지녀서가 아니라 아름다움 자체와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기에 아름다운 것이라는 말이다.

 

어떤 구체적 존재의 아름다움이란 그 존재가 아름다움이라는 이데아를 분유(分有)하기에 아름다운 것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구체적 개별적 아름다움이나 용기, 정의는 단지 상대적이고 가변적 관점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이와 별도로 아름다움 그 자체, 용기 그 자체인 아름다움과 용기의 궁극적 이데아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향연은 바로 이 아름다움 그 자체인 아름다움의 이데아를 중심 논의로 전개한 대화(철학적)이다. 결국 구체적 현실 세계에서 점차 형상의 세계로 나아가는 아름다움의 실재로 안내하는 사유이다. 아마도 감각적 경험의 세계를 형이상학적 실재의 세계와 일정한 상응관계를 맺게 한 플라톤 철학의 일면일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 인간의 이 본원적 매혹에 뒤얽혀 있는 근원에 대한 이들 사유를 읽다보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의 세계와 사람들에게 보다 열린 관용의 시선이 열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인간의 한계인 궁극적 필멸성에 대한 도전으로서 에로스는 불멸을 선사하는 정령이란 것을. 그 가련한 추구를 위해 몸부림치는 인간들에게 어찌 연민을 갖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에로스의 힘이 사라지고 있다. 그 육체적 정신적 결핍을 채워 줄 본질을 오늘 우리네 세계의 무지가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성하게 된다. 이제 영혼의 필멸성을 주장하는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날 대화인 파이돈으로 시선을 옮겨야겠다. 삶의 방식인 향연과 짝을 이루듯 죽음의 세계, 사자(死者)의 방식을 사유하는 또 다른 이데아의 판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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