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래의 신화
최인 지음 / 글여울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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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짤막한 이야기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는 것이 '단편소설'의 매력일 것이다. 등장인물도 많지 않고 플롯도 길지 않아서 이야기 전개가 빨라서 좋고 '메시지(주제) 전달'도 명확해서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어서 좋은 '단편소설'이 많기 때문이다. 여기에 작가 특유의 유머와 위트, 반전과 에로틱한 내용을 첨가한다면 더욱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짧은 서사'로 이 모든 것을 담다 보면 이도저도 아닌 '맹탕'이 되는 경우도 흔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짧은 만큼 '비유적인 표현'을 남발하다보면 웬만한 '문학전문가'가 아니고서는 그다지 흥미를 유발시키지 못하는 난해한 소설이 되고 마는 단점도 극복해야 좋은 소설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 이 책 <돌고래의 신화> 단편소설은 어느 축에 드는걸까? 책의 뒤표지에 적힌 누군가의 평가는 [충격과 반전의 묘미], [빠른 갈등 전개], [녹아 흐르고 있는 에로티시즘]이라고 적혀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최인의 단편소설은 곳곳에 자살과 살인을 암시하는 '죽음의 그림자'가 복선처럼 깔려 있고, 등장인물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군더더기 없는 빠른 전개를 펼쳐냈으며, 죽음을 예감이라도 하듯 마지막 몸부림을 치듯 관능적인 섹스를 나누는 장면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어 충분히 충격적인 에로티시즘을 보여주고 있다. 그 덕분에 책을 '읽는 맛'만큼은 높은 평점을 주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단편소설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인상적이고 강렬한 주제'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고 흐지부지 끝맺음을 하고 있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물론, 충격적인 결말, 예상 못한 반전 따위를 염두에 둔 결말이라 그런 것이라 짐작은 된다. 허나 중년의 죽음이든 청춘의 죽음이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납득할 만한 이유'가 명확해야 할텐데, 그닥 공감할 만한 내용이 없었다는 점에서 크게 아쉬웠기 때문이다.

 

  무슨무슨 '수상작'이라는 것은 일반독자에게 메리트가 크지 않다. 다시 말해, 심사위원이나 평론가들과는 달리 '일반독자'들은 이야기속에 흠뻑 젖어들게 만드는 '공감'되는 부분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즉, 등장인물과 독자의 고민이 '일치'해야 한다는 말이다. 등장인물의 삶이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고, '보여지는 삶'은 다를지라도 소설속에서 전개되는 '개인적 고민'과 '사회문제', 그리고 '인물들의 갈등'이 닮았다고 느끼는 순간, 일반독자들은 이야기속으로 풍덩 빠져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설속 등장인물이 겪는 고민과 문제에 '깊은 고뇌'가 보이지 않고, 그런 상황에서 펼쳐지는 '에로티시즘'은 그저 흔한 '포르노'를 보는 것처럼 눈을 현혹시킬 순 있지만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감동은 찾을 수 없기 마련이다.

 

  황순원의 <소나기>가 인상 깊은 것은 '소녀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결말과 함께 어린 소년소녀가 보여주는 풋풋한 사랑을 짧은 순간 쏟아붓고 끝나버리는 '소나기'에 비유하며, 아직 여물지 않은 소년소녀에게 찾아온 강렬한 첫사랑이란 감정을 잘 녹여냈기 때문이다. 비록 시골출신이 아닌 독자라도 '첫사랑의 설렘'은 누구에게나 서툴고 강렬하게 찾아오기에 공감하기가 쉽고, 소년소녀의 서툰 몸짓이지만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에로틱한 감정이 물씬 묻어나는 '둘이 함께 건너는 징검다리 씬'과 '쏟아지는 비를 피해 흠뻑 젖은 움막 씬'은 이 소설의 백미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첫사랑은 이룰 수 없다는 속설을 재확인하는 듯한 충격적인 결말, 또한 안타까움이 한껏 살아나는 죽음이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도 그런 설렘과 안타까움을 엿볼 수 있었을까? 아쉽게도 난 그렇지 못했다. 인생은 꼬이고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청춘과 중년의 등장인물들에게서 '희망'을 찾을 수 없었고, 아픔과 고통의 나날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저 허우적거리듯 섹스와 일탈을 일삼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진흙탕 같은 삶을 벗어날 유일한 출구는 '죽음'뿐이라는 듯 전개되는 이야기는...안타까울 뿐이었다. 좀더 희망적인 삶을 노래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

 

  솔직히 큰 기대는 하지 않았던 책이었다. 하지만 생각밖으로 이야기는 재미 있었다. 그렇지만 깊은 감동과 진한 여운은 없었다. 마치 80년대 '한국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 당시의 한국영화의 주된 소재가 바로 '방황하는 청춘'과 '위기의 중년'이었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전개와는 하등 상관이 없는 '배드신'과 '노출연기'만이 화제가 되었던...그런 느낌 말이다. 모쪼록 작가의 후속작들은 이보다 '공감력'을 갖추고 요즘 독자와 함께 호흡할 수 있길 바란다.

 

글여울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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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의 철학 - 2019 청소년 교양도서 선정
송수진 지음 / 한빛비즈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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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게 '도서관이 피난처였다'는 이야기에 깊이 공감했다. 나에게도 도서관은 '비슷한' 공간이었던 탓이다. 저자는 그곳에서 '철학'을 만났지만, 난 '직업'을 만났다. 맹목적으로 읽기 시작했던 '책'이 '밥벌이' 도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푸짐한 밥상을 차려주진 못했다. 그래도 난 주말마다 도서관을 찾았고, 평소엔 읽지 않았던 다양한 장르의 책들을 섭렵하며 점점 '논술쌤'으로서의 교양을 갖출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대한민국 최고의 논술쌤으로 자부하고 있고 말이다.

 

  암튼, 저자는 삶의 고민을 넘어 '벽'을 만난 것 같은 답답함을 뻥 뚫어준 철학이야기를 이 책에 담았다. 물론, '저자의 경험'이 밑반찬이다. 그리고 갑이 아닌 을로서 자신이 느낀 우리 사회의 아리아리한 막장을 철학으로 스리스리 넘겨내는 지혜를 풀어내었다. 그리고 삶은 편안해졌단다. 박수가 필요한 순간이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답답함'과 '억울함'을 맞이하는가. 그때마다 당신의 처세술은 무엇인가? 그저 참고 견디는 것뿐인가? 아니면 다 때려치고서 후회하는가? 그러고서는 '원래 삶이 그런거야'라면서 또다시 그 답답함과 억울함 속을 전전하고 있지는 않은가? 때로는 친구들과 술 한잔 나누면서 울적한 마음을 달래곤 한다. 다음날이면 취기와 숙취가 가시질 않아 불편해진 속을 달래려 '반복적인 해장'을 하기도 한다. 이 얼마나 다람쥐 챗바퀴 도는 듯한 인생이란 말인가.

 

  그럴 때 저자처럼 '철학'을 만나보길 권한다. 쫌 쎈 철학자를 만나길 권한다. '반사회적인 철학자'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속에서 괴로워하는 이들에겐 '마르크스'만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름하야 '반자본주의'다. 사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본주의의 폐해'를 지적하며 자본주의가 제대로 굴러가길 누구보다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다. 그래도 자본가들의 반성이 유의미하지 않으니 <공산당 선언> 같은 책을 쓴 것이다.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억압하고 굴종하게 만드는 비인간적인 행태를 일삼는 자본가들에게 경종을 울리고자 말이다.

 

  물론, 오늘날에는 '마르크스'가 무조건 옳지만은 않다. 그의 '실험'은 끝내 현실에서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공산주의 국가들이 망했고, 자본주의로 돌아섰으니 '마르크스 이론'은 틀렸다고 볼 수도 있다. 허나 자본주의도 삐걱거리긴 매한가지다. 그때마다 자본주의를 고치려고 들여다보는 메뉴얼이 있으니, 바로 <자본론>이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 이론'은 유의미하다는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 자체가 사라지거나 '대체'될 다른 경제시스템이 요원한 상황에서 '자본주의'는 건실하다. 허나 자본주의 속에서 신음하는 노동자가 여전히 많다는 점에서 '마르크스 이론'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자본론>은 필독서 가운데 하나다.

 

  이 책의 저자도 피난을 간 도서관에서 <자본론>을 읽으며 삶의 위안을 얻었다고 고백한다. 심지어 자신이 고민하고 아파하는 까닭이 <자본론>에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고 말할 정도다. 그래서 단숨에 읽어 내려갔단다. 책하고는 담장을 쌓은 이는 엄두를 내지 못할 독서력이긴 하지만, 지금도 자본주의 속에서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이들이 있다면 '마르크스'를 만나보길 권한다. 정말 속이 시원해질 것이 틀림없다. 왜냐면 마르크스도 철저한 '을'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이 제목이 <을의 철학>인 까닭은 무엇일까? 갑의 철학은 없기 때문일까? 학력으로 보나, 금전으로 보나, 갑들이 철학이 없을 까닭이 없다. 허나 그들의 철학은 '그들만의 잔치'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는 '그들만의 천국'을 만드는데 일조할 뿐이다. 허나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갑'보다 '을'이 많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나 많은 '을'들이 있는데, 딱 하난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철학'이다. 거창한 철학이 아니라도 좋은데, 소위 '개똥철학'이라고 부를 만한 것도 갖지 않은 '을'이 너무도 많기 때문에 안타까울 뿐이다. 그런 수많은 '을'들이 어제도 힘들고, 오늘도 지치고, 내일도 피곤할 거라는 것은 불을 보듯 분명하리라. 그러니 제발 '철학' 좀 하고 살길 바란다.

 

  저자는 철학을 알고 나니, '자기 자신을 좀더 사랑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어쩔 수 없이 직장을 다니는 고통에서 벗어나 백수가 될지언정 '자유로운 영혼'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되었기 때문이란다. 영업사원으로 취직해서 '재고물품을 대리점주에게 떠넘기라는 상사의 지시'와 '울며겨자 먹는 셈으로 재고물품을 떠맡은 대리점주의 자살 소식' 사이에서 고민에 빠졌을 때, 당신이라면 어땠을 것 같은가? '살아남기' 위해서 갑질 아닌 갑질을 하며 수많은 대리점주들을 울릴 참인가? 아니면 대리점주를 죽음으로 내모는 짓은 할 수 없다며 과감히 사표를 던질 것인가? 그도 아니면, 한낱 영업사원에게 '갑질'을 강요하는 '저질 대기업'을 쫄딱 망하게 만들 불매운동에 동참할 것인가?, 이도저도 아니면, 속세를 훌훌 털어버리고 저 세상으로 이항하거나 남은 생을 무한대로 인수분해하는 길로 들어설 것인가? 무엇은 '선택'하든, '을의 철학'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셈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다보면 '경쟁'에 길들여지기 마련이다. 이겨야 살아남는 무한경쟁을 거듭하며 살아남고, 또 살아남는 <오징어게임>에 결국 참여하게 된다. 돈이라는 욕망에 사로잡혀서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그 돈이 꼭 있어야 행복한 것인가? 물론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금전'은 벌어야 할 것이다. 경제적 자립은 '어른의 필수덕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금전은 그닥 필요하지 않다. 그런데도 목숨을 걸고 한 판 승부를 벌이듯 '무한경쟁'에 뛰어들어 자기 삶을 고갈시키곤 한다. 과연 누굴 위해서 말인가? 정말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일까? 원치도 않는 직장생활을 견디며,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서 남을 벼랑 끝으로 떠미는 일도 서슴지 않는 삶을 과연 '바람직한 경쟁'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는 '을'끼리 서로 싸우고 있다는 점이다. 절대 '갑'이 끼어들지 않는다. 갑은 그저 '판'을 만들어줄 뿐이다. 자신의 몫은 이미 떼어놓고서 '남은 몫'을 수많은 을들이 서로 더 많이 차지하려고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단 말이다. 이게 '자본주의'다. 왜 '을'끼리 싸워야만 하는 것인가? 왜 '갑'이 더 많이 가져가는 것에 분노하지 않는 '을'이 더 많은 것일까? 아이러니 할 뿐이다. 그렇다고 '갑'과 싸우라는 말은 아니다. 갑도 나름대로 '정당한 몫'을 가져갔다고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을'끼리 사이좋게 노나 먹으면 좋을 일을 굳이 왜 싸우냔 말이다. 만약, '을'이 사이좋게 노나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작게 남겨놓은 것이 문제라면, 그땐 '갑'과 한판 싸워야 마땅할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을'끼리 싸울 까닭이 없다는 점이다. 사이좋게 노나 먹다가 부족한 듯 싶으면 합심해서 '갑'에게 따지면 그뿐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을의 철학'이란 이런 것이다.

 

  물론, 우리의 삶이 이처럼 간단하지도 않고 호락호락하지도 않다. 허나 '철학'과 함께라면 어떤 문제도 슬기롭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최소한 '을'끼리 치고 받으며 싸우는 어리석은 짓부터 멈추는 '철학'이 절실하고 말이다. 다음으로는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철학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미 유치원 때 '착하게 사는 방법'을 모두 마스터 했다. 문제는 '실천'이다. 그런데 왜 착하게만 살 수는 없는 걸까? '철학'이 필요한 순간이다. 적어도 내 생각은 이렇다. 착하게 살면 '호구취급' 당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착각은 하지 말자. 착하게 산다고 순딩순딩하게 살라는 얘기가 아니다. '만렙'으로 살면서도 얼마든지 착하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고, 다른 사람들 위할 줄 알고, 약자를 배려하며, 불의를 보면 참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착하게 살 수 있으니 말이다.

 

  살면서 우리는 수많은 일을 겪는다. 그때마다 '최소한의 원칙'을 지키며 살아간다면 당신은 '슈퍼 을'로 살아갈 준비가 되었다. 갑에게 호구가 되는 '을'이 아니라 갑 앞에서도 당당한 '슈퍼 을' 말이다. 필요한 것은 오직 '철학'뿐이다. 이럴 땐 이랬다가 저럴 땐 저랬다가 하는 '그때그때 다른 철학'이 아니라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한결같은 '철학' 말이다. 그러다가 목이 잘리면 어떻게 해요? 라고 고민하진 말자. 최강의 철학은 '모든 칼'을 다 막아내는 굳센 철학이 아니라 '애초'에 칼이 목으로 들어오지 않게 하는 '슬기로운 철학'이니 말이다. '을의 철학'도 마찬가지다. 내 삶은 무엇보다 소중하니 멋진 철학으로 우아하고 고상하게 한 번 살아보면 좋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철학도 소중하니까 응원할 겁니다. 세상 모든 을들이 철학쟁이가 되는 멋진 상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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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숙제 - 앞으로 나아갈 대한민국을 위한 경제학자의 제언
한지원 지음 / 한빛비즈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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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말해서 책내용은 그다지 호감이 가지 않았다. 왜냐면 대한민국의 가장 큰 문제는 '대통령제'가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걱정해야 할 문제의 근본은 '교양을 갖춘 시민이 대세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이 잘못 된 길로 빠져도 바라보고만 있고, 국회의원이 깽판을 쳐도 나몰라라 하고, 장관이 헛발질을 해대도 책임을 묻지 않고, 재벌과 엘리트 등이 망나니 같은 짓을 저지르며 사회에 물의를 일으켜도 '있는 놈들'은 스케일이 남다르다는 감탄만 내뱉고 있으니, 이 땅에 제대로 된 '교양시민'이 태부족하다는 명백한 증거다.

 

  한편, '경제학자'가 풀어낸 역사관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경제학자들은 묘한 공통점이 있는데, '도덕'과 '정의'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오직 '자유와 풍요'만을 기준치로 삼는 모양이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가 '친일적폐청산'을 내세운 것을 '반일 민족주의'로 매도하고 있으며, '부동산정책 실패'를 예로 들면서, 경제의 기본도 모르는 정권이 오로지 '포퓰리즘'만 앞세워서 막무가내로 밀어붙인 결과, 대한민국을 폭망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는 공감이 가지 않는 대목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 책의 결론도 그닥 공감 가지 않았다. 같은 저자가 쓴 <자본주의는 왜 멈추는가>는 재미나게 읽었다. 핵심은 많은 사람들은 '자유, 평등, 풍요'의 원칙만 지킬 수 있다면 어떤 경제시스템이라도 상관없이 받아들일 것이다. 21세기 자본주의가 살아남기 위해선 '기본'을 지켜야 한다는 메시지가 큰 울림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에선 뜬금없이 '제왕적 대통령제'를 청산하지 못했기에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은 불운했고, 대한민국은 신음할 수밖에 없었다고 진단하며, 궁극적으로 대한민국은 '제왕적 대통령제'를 마감하고, '의원내각제'로 전환해야 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내각을 책임질 수 있는 능력 있고 신뢰 넘치는 '국회'로 만드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단서를 달긴 했다. 허나 난 여기에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대한민국 국민'이 뽑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교양시민'의 양성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교양시민이란 단순히 돈 많고 사회적 지위가 높으며, 소위 '엘리트 집단'이라고 일컫는 부류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일상 생활에서 도덕을 실천하고 정의를 지키는데 앞장 서며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것이 '교양시민의 첫째 조건'이다. 그러니 '교양시민'은 누구라도 될 수 있다. 굳이 학력이 높을 필요도 없고, 사회적 지위가 드높을 필요도 없으며, 돈이 많아서 갑질하는 부류는 절대로 '교양시민'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교양시민의 둘째 조건'이 더 까다로울 수 있겠다. 한달 평균 10권 이상의 '독서력'을 갖춰야 하고, 가짜뉴스를 걸러낼 수 있는 '과학적/이성적/객관적 판단력'이 있어야 하며,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면서도 다른 이의 주장도 끝까지 들어주는 '겸허한 경청력'도 반드시 갖춰야만 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 이런 '교양시민'이 넘쳐날 때, 비로소 진정한 선진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이며, 전세계의 시기와 질투를 슬기롭게 넘겨내며 존경과 부러움을 한번에 받는 대한민국이 될 것이 틀림없으며, 수많은 나라들이 대한민국이 가는 길을 따라오려 너나들이 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무력이 아닌 국력으로 선진국이 될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동참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찬물을 끼얹는 이들이 있으니,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과 같은 강대국들 틈바구니에 낑긴 대한민국은 어쩔 수 없이 눈치를 봐야 한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대한민국의 '국력'이 아직 이들 강대국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니 객관적으로 주위를 살펴야 겨우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한편, 세계적인 골칫거리인 '북한'과 통일을 꿈꾸는 일을 그만 두라고 지적한다. 한마디로 떡 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김칫국 마시지 말라는 말이다. 북한은 애당초 대한민국과 통일할 생각이 없다고 지적한다. 그러니 제발 '햇볕정책' 같이 북한 퍼줄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말한다. 또한, 일본과 과거사논쟁을 벌이지 말라고 지적한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구축해야 대한민국 경제에 '청신호'가 켜진다고 말이다. 더구나 한미일 동맹을 굳건히 해야 북중러와의 대결에서 겨우 맞설 수 있는데, 허구헌날 '과거'에 발목이 붙잡혀서 일본과 거북한 관계를 만드니 대한민국의 미래가 불투명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그리고 제발 '전작권 환수' 같은 뻘짓은 그만두란다. 한미동맹은 대한민국의 목숨줄이라면서 '자주국방' 같은 소리는 하지도 말라고 한다. 대한민국의 경제력으로 '자주국방'은 어림도 없다면서 말이다.

 

  한편으론 맞는 말이다. 이 책에서도 바로 '이런 논리'를 앞세우며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 참아달라고 권유하고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미국의 노예'로 살 것이며, 언제까지 '중국의 종속국'으로 남을 것이며, 언제까지 '일본의 식민지'로 만족할 것이냔 말이다. 경제적인 논리로만 보아도 이미 '일본의 경제력'보다 앞섰고, '미국과는 대등한 경제 파트너'가 되었고, 중국경제는 이미 '한국 베끼기'를 하지 않으면 팔 것이 없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주변국 눈치만 보면서 쭈뼛거릴 거냔 말이다. 이젠 대한민국이 당당해질 때가 되었다. 그래야 통일도 한낱 꿈이 아닌 '현실'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도발에 '발끈'할 것이 아니라 '쯔쯧'할 수 있어야 한다. 북한은 이미 '경제적'으로 대한민국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무엇이 꿀려서 발끈하고 질질 끌려다닐 것이냔 말이다.

 

  이 책이 보다 더 가치 있으려면 '경제학자'가 아닌 '교양시민'으로써 썼어야 한다. 그러나 도덕과 정의에 둔감한 '경제학자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또한 '지적질'보다는 '대안제시'에 중점을 두었더라면 더욱 멋진 책이 되었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은 것은 두고두고 칭찬할 내용이지만, '지적질'로 그친 탓에 윤석열 정부가 배워서 고칠 점이 눈에 띄지 않아서 더욱 아쉬웠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타락한 민주주의'에 절대 빠져들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촛불을 들고 나타날 '교양시민'들이 이 땅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은 서로의 밥그릇 싸움에 여념이 없어서 '패거리 정치'를 일삼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지만, 반드시 '교양시민'으로 거듭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지적질'은 멈추고, 눈부신 미래비젼을 보여줄 때다. 까짓, 대통령 잘못 뽑았어도 '교양시민'을 차고 넘치게 만들 수만 있다면 아무 문제 없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뭣이든 '교양시민'이 가꾸어 나아갈 것들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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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적으로 상식을 배우는 법 - 당당한 교양인으로 살기 위한
제바스티안 클루스만 지음, 이지윤 옮김 / 한빛비즈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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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는 독일 '퀴즈대회'에서 여러 차례 우승 경험을 갖고 있는 경력자다. 퀴즈대회의 성격상 굉장히 많은 배경지식이 필요로 하는 까닭에 글쓴이는 '모르는 것'을 빼고 '모든 것'을 다 아는 절대적인 상식의 소유자라고 착각하기 쉽다. 글쓴이도 고백하건데, 자신은 결코 '엄청난 상식의 소유자'가 아니라 그저 단순히 열심히 지식을 배우고 익히는 '노력가'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무엇'을 물어보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고 아주 상식적인 선에서 대답하곤 한단다. 그만큼 상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방대한 지식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상식이라고 하면 '누구나 알만한 지식'을 일컫는 것이지만, 뜻밖에도 우리는 '상식'이라 부를 만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가늠하기 어렵다. '나'의 상식이 '모두'의 상식이 되어야 '우리 모두'의 상식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우리 모두의 상식이라고 할만한 것을 추려보면 그다지 많지 않다는 사실을 맞닥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왜냐면 '상식'이라는 범주도 '세대차이'가 존재하며 '교양'이라는 딱지(프리미엄)를 하나 더 얹으면 '수준차이'까지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남녀차이', '인종차이', '민족차이' 등등 세부적인 수준까지 파고들면, 과연 우리 모두가 알만한 '상식'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의심케 만들 지경에 이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일반적으로 모두가 알만한 지식'을 상식이라 일컫는다. 그리고 우리는 '상식'을 쌓으려 대단히 오랫동안 배우고 또 익히며 살아간다.

 

  그런데 21세기에도 '상식'이 필요한 걸까? 지금은 '검색능력'이 상식을 대체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이른바 '인공지능의 시대'를 맞은 지금의 세대에겐 지식을 외우는 능력보다는 '검색'을 통해서 적절한 지식을 빠르게 찾아내는 능력이 더 필요한 시대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인공지능'과 직접 대화를 통해서 필요한 지식을 쉽고 빠르게 얻어낼 수 있는 시대에 '상식' 따위를 익히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시간낭비로 보이기까지 하니 말이다. 마치 주산, 암산이 대유행하던 시대를 지나 전자계산기와 컴퓨터가 보편화된 시대에 와서까지 열심히 주판알을 튕기고 있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허나 글쓴이는 단언한다. 인공지능 나부랭이가 판을 치는 시대라할지라도 '상식'을 공부하는 것이 반드시 도움이 되고 꼭 필요한 공부가 될 것이라고 말이다. 이유를 들어보면 수긍이 될 것이다. 구글검색을 통해서 얻어낸 쉽고 빠른 '정보'들은 한쪽으로 쏠린 '편향된 정보'일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검색을 거듭할수록 '편협한 정보'만을 한정해서 보게 되기 때문에 폭넓은 사고를 기를 수 없고, '내 입맛'에만 딱 맞는 정보를 골라서 보여주는 것에 길들여지면 '다른 생각'을 원천 차단 당하는 까닭에 '원하는 정보'는 얻을지언정 '그밖의 정보'와는 담을 쌓게 되는 우물의 안의 개구리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말이다.

 

  이 책의 내용은 퀴즈대회의 우승자답게 엄청난 양의 지식을 쉽고 재밌게 얻을 수 있는 방법들을 소개하고 있다. 개중에는 이미 알고 있고 이미 익히고 있는 방법도 있었지만, 새롭게 알게 된 유용한 방법도 소개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 눈을 사로잡은 내용은 따로 있다. 바로 상식이 '교양'으로 승화되는 순간이었다. 이를 테면, 전세계의 '수도이름'을 외우는 것은 상식의 범주이지만, 우연히 만난 외국인 친구의 '수도'를 아는 채하며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드러내어 상대방의 '호감'을 끌어냄과 동시에 '절친'으로 발전하는 것은 교양의 수준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세계 '프로축구선수'를 달달 외우고 관련된 '축구정보'를 척척 읊어대는 것이 축구팬으로서의 상식이라면, 각구단의 사정에 빠삭하고 올해 시즌의 성적을 예상하며 팀과 선수들의 기량을 비교하며 전문해설가 못지 않은 해설을 풀어낸다면 '교양인'으로 거듭나게 된다는 말이다.

 

  이처럼 상식은 교양인의 필수가 되기 때문에 반드시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뜻깊게 읽을 수 있어서 매우 유익한 책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 주변에는 '상식밖의 말과 행동'을 일삼으며 페해를 일으키는 분들이 너무나도 많다. 이분들에게 '상식'이 없어서 그런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분들 나름대로는 꽤나 많은 상식을 쌓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허나 단언컨대, 이분들은 '교양이 없다'고 말할 수는 있다. 사람으로써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는 고사하고 '자기가 보고 싶고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맹목적이고 맹신적인 행동을 일삼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시대의 교양은 절박한 시점에 다달았기 때문에 '상식'은 더욱더 절실할 수밖에 없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첨예한 대립'을 넘어서 '치열한 갈등 양상'을 벌어지고 있다. 예를 들면 끝도 없다. '페미문제'에서 비롯된 '남녀갈등'은 해결점을 찾지 못했고, '소녀상'과 '위안부'를 둘러싼 해묵은 진실공방은 참과 거짓을 구분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으며,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건설적인 토론을 기대할 수 없는 맹목적인 비난과 상대를 향한 비방은 끝내 서로를 청산하지 못해서 안달이 나버린 우스운 꼴로 전개되어 버린 탓이다. 어느 곳에서도 '교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버렸다. 과연 무엇 때문일까? 조심스럽게 진단을 내려본다면, 바로 '상식'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탓이라고 본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화합할 수 있는 '모두가 알만한 상식'이 사라져버린 탓에 벌어진 다툼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비상식'이 '비정상'으로 귀결되고 있다고 말이다.

 

  이제 우리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대한민국이 왜 서로 갈라져서 싸워야만 하는가. 아니, 의견이 서로 다르고 갈라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런데 왜 조금만 '양보'하고 '한발' 물러서서 '상대의 의견'에 귀 기울이고 이해하려 노력하는 '경청'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까하고 '상식'적인 생각을 해보잔 말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경청'을 멈출 수는 없는 법이다. 경청을 하다보면 말이 통하지 않을 수도 없다. 내 생각을 상대에게 '주입'하려 드는 것은 '상식'이 아니라 '꼬장'이다. 내 주장을 상대에게 '설득'하려 백 번 양보하는 것이 '상식'이자 '교양인의 자세'다. 그리고 교양인이 되기 위해선 풍부한 배경지식을 쌓아야 한다. 그래야 내 주장을 논리정연하게 전개시킬 수 있고, 상대의 주장도 십 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상식을 쌓아야 할 이유를 이해했다면, 상식을 쌓을 방법만 익히면 된다. 그 방법은 말 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방법'이 아니라 '실천'이란 것도 잊지 마시길.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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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글쓰기 수업 - 서술형·논술형 시험에 강한 아이로 키우는
김윤정 지음 / 믹스커피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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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역시 논술쌤이기에 아이들에게 '글쓰기의 중요성'을 곧잘 강조하곤 한다. 하지만 정작 아이들은 흘려듣기 일쑤다. 왜냐면 주위를 둘러보면 '글쓰기'를 잘하는 어른은 그닥 많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글쓰기'를 일상에서 즐겨 쓰는 어른이 도통 보이질 않는데도 학생이니까 '글쓰기(논술)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강요한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독서논술은 '학교시험'에서나 쓸모가 있는 공부라고 생각하고 만다.

 

  허나 학교시험이라고 마냥 '글쓰기'를 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서술형 논술형 답안을 중요하게 여기고 많이 요구한다고 해도 여전히 '객관식 문제', '단답형 서술 문제'가 출제되고 있기 때문에, 아이들은 논술서술은 과감히 포기하고 '객관식'만 만점을 노리는 공부를 하기 일쑤다. 비단 학생만의 문제는 아니다. 현장교육의 책임자인 선생님들조차 '학업성과가 낮은 학생들'을 위해 궁여지책으로 객관식 평가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교육이 나은 '선택'일까? 학업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만을 위해 과감히 '100% 서술형 평가'만을 고집해야 할까? 아니면 학업 성적이 뒤쳐진 학생들도 고려해서 '서술형 평가 출제 경향을 50% 이하'로 유지해야 할까? 어려운 선택이다. 마치 공리주의에 입각해서 '정의로운 행동'을 고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이를 테면, 침몰하는 배에서 소수의 희생자를 선택하면 배 안에 남은 사람은 안전하다면, 누구를 '희생자'로 선택할 것인가..처럼 말이다. 소수의 엘리트를 키우는 교육시스템이 좋은 것일까? 학생들의 행복을 우선하는 교육시스템이 좋은 것일까? 물론, 정답은 '둘 다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고민을 하면서 모든 학생들이 '좀 더 쉬운 글쓰기 공부'를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두 말 할 것도 없이 바로 도입해야 마땅할 것이다. 글쓰기 공부의 첫째는 '독서 습관'이고, 그 다음은 바로 '문해력 훈련'이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가 '글쓰기의 일상화'다. 글을 쓰려면 먼저 읽어야 한다. 그리고 이해하고 생각한 뒤에, 그 '생각'을 정리해서 한 편의 글로 정리하는 것이 순서인 셈이다. 물론 다른 방법도 있다. '독서습관' 단계에 '토의토론'을 넣는 것이다. 그렇게 '토의토론' - '듣고 이해하기' - '내 주장과 상대의 주장 정리하기' - '한 편의 글'로 내용정리하기...이렇게 하면 '글쓰기 훈련'은 완성이 된다. 허나 '토의토론'을 하기 위해선 '배경지식'도 많아야 하고 '자료조사'도 충실히 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독서'가 선행되야 하는 건 마찬가지다.

 

  자, 그렇다면 '글쓰기 공부'는 언제부터 시작해야 할까? 두 말 할 것도 없이 '초등학교'부터다. 가장 적기는 '초등3학년' 때부터이고, 독서수준이 뛰어난 아이의 경우에는 '초등1학년'부터 시작해도 무방하다. 허나 미취학아동은 '글쓰기'를 시키면 절대 안 된다. 도리어 역효과가 나는 경우가 태반인 탓이다. 아직 손가락 근육도 야물지 않은 상태(소근육 미발달)에서 글씨쓰기를 강요하면 나이가 들어서도 제대로 된 글씨를 못 쓰는 경우가 발생하고, 아직 덜 발달된 근육을 강제로 쓰게 하면 '피로감'부터 배우게 되어서 '글쓰기' 자체를 싫어하게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직 '생각훈련'도 하기에 이른 나이에 '뭘 쓰라'고 강요하는 것 자체가 상당한 스트레스로 작용할 뿐이다. 이런 현상은 '초등 1,2학년'에게서도 자주 발견되는 문제점이기 때문에 성장발달이 늦은 아이일수록 '글쓰기 교육'은 절대 서두르면 안 된다.

 

  하지만 어릴수록 '창의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독서수업을 진행하면서 '질문하기'를 통해서 아이의 생각을 '표현'하도록 유도하는 건 좋다. 이 시기의 표현법은 '그림그리기', '만들기', '노래부르기', '율동하기', '다양한 감정으로 표현하기' 등으로 쉽고 재미나게 하면 된다. 이런 능력은 초등 3학년까지 최고조에 달하기 때문에 '초등 3학년'에 글쓰기 수업을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창의력을 살리면서 독서습관과 글쓰기 습관을 동시에 다잡을 수 있는 최적의 시기인 셈이다.  허나, 이 시기를 놓쳤다고 불안해할 것은 전혀 없다. 본격적인 '글쓰기 공부'는 중등 이후부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초등시절에는 '독서습관'을 탄탄히 다잡는 것이 매우 바람직하다.

 

  그러나 막상 글을 쓰려고 하면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겠고, 책을 읽으려 하면 '어떤' 책을 먼저 읽어야 할지 고민이라는 분들이 정말 많다. 이럴 때 '유용한 팁'이 있으면 참 좋을 것이다. 이 책에는 바로 그런 '유용한 글쓰기 팁'과 '좋은 책'을 선별해서 수록해 놓았기 때문에 참고가 될만 할 것이다. 더구나 '창작동화', '위인전', '과학책', '철학책' 등 다양한 도서를 샘플로 삼아서 '글쓰기 팁'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에 기대에 부흥할 책이다.

 

  중요한 건 '글쓰기에 정답은 없다'는 것이다. 형식도 내용도 자유롭게 창의적으로 쓰면 그뿐이다. 다만, '잘 쓴 글'은 누가 읽어도 잘 썼다고 느끼기 마련이라는 점이다. 잘 쓴 글의 공통점은 '내용이해'가 한 눈에 될 정도로 쉽게 쓰고 간결하다는 점이다. 또한, 잘 쓴 글은 '거꾸로' 읽어도 내용을 이해하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는 점이다. 이는 '하나의 문단에 하나의 주제를 담는다'는 글쓰기의 기본을 잘 지켰다는 것이고, 문단과 문단사이에 내용의 '일관성', '통일성'이 잘 지켜졌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나의 주제에서 벗어나지 말고 적절한 근거를 들어서 주제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도로 쓰는 훈련을 하는 것이 전부라는 말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형식'을 강조하면서 서론-본론-결론 같은 걸 지키라고 따분하게 가르치지 말며, '분량'을 지키라면서 처음부터 무리하게 강요를 하면 글쓰기의 참맛은 더욱더 배우기 힘들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훌륭한 독후감 한 편을 선보이며 마무리하련다. <짜장 짬뽕 탕수육(재미마주, 1999)>이란 재미난 창작동화가 있다. 책내용은 전학을 간 아이가 새친구를 사귀기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마침맞게 '왕따문제'가 학교에서 유행을 하던 시기였던 터라 힘쎄고 짖굳은 아이들 때문에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문제와 맞닥들이면서 벌어지는 사건이 핵심 포인트다. 하지만 주인공은 그런 어려움을 유쾌하고 재치넘치는 '한 방'으로 위기를 넘기면서 책내용은 마무리 된다. 이것을 읽고 난 다음에 쓴 어린이의 독후감이다. [난, 짬뽕]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세 글자'였다. 물론 독후감을 발표하고 나서는 더욱 세심한 '부연설명'을 하였다. 그 결과, [난, 짬뽕]이란 독후감을 쓴 것이었다. 책 한 권의 내용과 책을 읽은 아이의 생각이 '세 글자'로 함축되는 순간이었다. 글쓰기 공부는 결코 어렵지 않다. 즐기면 된다.

 

책드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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