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사장의 지대넓얕 2 : 자본이라는 신 -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생각을 넓혀 주는 어린이 교양 도서
채사장.마케마케 지음, 정용환 그림 / 돌핀북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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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XIII / 돌핀북 2번째 리뷰] 1권에서는 '생산수단'의 관점으로 구석기부터 근대 이전까지 경제적인 역사를 살펴보았다. 이제 2권에서는 '자본주의시장'이란 주제로 근대 이후에 펼쳐진 경제상황을 살펴볼 것이다. 과연 '자본'이란 무엇이며, 그에 따른 '노동의 가치'를 살펴보자.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이 일어난 뒤의 경제모습은 많이 달라지게 되었다. 중세까지는 '농업'이 경제의 중심이었기에 수많은 노동력이 필요한 '농사꾼'이 더 많은 부를 쌓게 해주었다. 그래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일꾼을 '토지'에 얽매이게 만들었고, 이들을 '농노'라 불렀다. 그리고 이들을 지배하는 '영주'라고 불리는 지배계급이 '토지(생산수단)'를 소유하고 있어서 농노가 만들어낸 '생산물'을 독점하며, 부를 늘려갔다. 이를 '장원경제'라 부른다. 원시공산사회였던 '석시시대'에는 함께 노동하고 모두가 공평하게 나누어서 불만도 없고, 지배자도 없었지만, 경제생산력은 형편없이 낮았다. 그래서 조그마한 '(자연)환경변화'에도 인간들은 쉽게 굶주렸고 죽어나갔다. 이를 극복하고자 더 많은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도구'를 발달시켰고, 단순한 돌칼이었지만, 농사일을 더 쉽게 해주는 원리를 터득하고부터 인간은 '생산량 증대'를 위한 개발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청동기, 철기 시대를 거쳐 중세의 봉건제와 장원제도가 정착되면서 인간은 더이상 평등한 삶을 살 수 없게 되었다. 사실상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계급이 구분된 것이다. 그리고 생산수단을 독점한 지배자들은 피지배자들이 생산한 물질을 가로채면서(세금 따위) 일하지 않고도 부를 늘려가는 방법을 깨우치게 되었다. 그들은 '생산수단'인 토지를 독점하거나, '생산도구'인 철제농기구, 가축, 그리고 강력한 무기 등을 이용해서 피지배계층이 생산한 물질을 착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평등했던 인간이 불평등해진 까닭이다. 부의 불균형이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혁명 같은 일이 벌어지자 이러한 '구체제'는 빠르게 무너졌다. 부의 불균형으로 인한 피지배계층의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 왕이나 귀족, 성직자 같은 이들은 스스로 '신'을 자처하거나 '신에게 위임(왕권신수설)'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억압과 착취를 당연시 했으나, 르네상스 이후 '신중심의 사상'에서 '인간중심의 사상'으로 바뀌게 되자 더는 피지배계층이 자신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에 참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왕과 귀족, 성직자 들의 권력을 흔들어버리고 난 뒤에 '평등한 세상'이 찾아왔을까? 놀랍게도 그렇지 않았다. 겉으로는 왕과 귀족같은 '특권계층'이 사라진 듯 싶었지만, 그들을 대신할 '부르주아' 계층이 새롭게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선점한 '부'를 이용하여 빠르게 '자본화'하였고, 그 많은 자본을 바탕으로 빠르게 권력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렇게 자본을 이용한 부르주아들이 '지배계층'으로 자리매김하면서 피지배계층의 생산물을 또다시 착취하는 구조가 전개되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노동착취'다. 노동자가 당연히 일을 한만큼 정당하게 받아야 할 '임금'을 경쟁의 논리를 내세워서 '저임금'만 주고 하루 15시간 이상 부려먹는 구조를 만들어나간 것이다. 그렇게 몸을 혹사당한 노동자가 다치거나 병들어서 더는 일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 그냥 '해고'를 하면서 말이다. 왜냐면 아픈 노동자를 대신할 건강한 노동자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열악한 상황은 '산업혁명'이 일어나자 더욱 가속화되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이전에는 노동자보다 농민들이 훨씬 더 많았다.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기보다는 농장에서 먹거리를 생산해야 겨우 먹고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산업혁명이 일어나자 '공장'에서 만들어낸 생산품을 판매해서 얻은 이익으로 먹을거리를 사다먹는 것이 더 싸게 먹히는 일이었다. 국내에서 먹을거리가 부족해지면 외국에서 수입해오면 그뿐이었다. 이젠 '공장'을 얼마나 더 많이 돌리느냐가 '자본증식의 관건'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공장의 수를 늘려나가다보니 더는 '수익창출'을 하기 힘들어졌다. 왜냐면 '공급과잉'으로 인해서 더는 생산품을 판매할 곳(시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유럽국가는 '공급과잉'으로 인해 저생산저성장 경제구조로 경제난에 허덕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유럽국가들은 어떻게 해결했을까?

그건 바로 '시장개척'이었다. 공장에서 만든 생산품을 판매만 하면 돈을 벌 수 있는 '자본주의'는 더 많은 생산을 해내는 것이 관건이다. 많이 만들어서 많이 팔면 많은 돈을 벌 수 있으니, '기계'를 도입해서 더더더 많은 수익을 창출하면 그뿐이었다. 그런데 유럽국가들 안에서는 더는 '시장'이 확보가 안 되니 공장을 돌리면 돌릴수록 손해를 입게 되었다. 그렇다면 공장문을 닫고 기계를 멈추는 것이 '순리'겠지만, 자본주의는 또 다른 방법을 찾아냈다. 생산품을 판매할 수 있는 '시장'을 늘리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유럽의 각국은 시장개척을 위해서 '식민지쟁탈전'을 벌였다. 그로 인해서 인간(백인)이 인간(유색인)을 죽이고 땅을 빼앗고, 원재료를 헐값에 사들이고, 자신들이 만든 생산품을 고가에 강매하는 짓을 서슴치 않았다. 그런 만행을 저지르고도 자신들의 죄를 감추기 위해서 '미개한 사람들을 문명화시킨다'라는 제국주의를 퍼뜨려서 인간사회에 '약육강식의 이론'을 적용하는 무리수까지 저지르고 말았다. 그렇게해서 '자본주의'는 유럽인들을 배불리 먹여 살렸다.

그런데 발빠르게 식민지점령에 뛰어든 선발주자들은 배불리 먹었지만, 독일이나 이탈리아 같은 후발주자들은 '식민지'로 삼을 만한 땅이 없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래서 벌어진 것이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다.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사건으로 촉발된 전쟁이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그 실상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자본주의의 탐욕'이 부른 당연한 귀결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엄청난 인명살상이 벌어진 전쟁의 참상을 직면하고서 탐욕을 조금이나마 줄이게 되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자본주의는 엄청난 인명살상과 파괴를 일삼고 온통 폐허가 된 자리에서 또다시 엄청난 수익창출을 해냈다. 각국이 참전한 전쟁에서 서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 '전쟁물자'를 더 많이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더 강한 무기를 만들려는 욕망 덕분에 '과학기술력'은 더욱더 발달하게 되었다. 자본주의는 이를 기반으로 엄청난 수익을 창출하게 된다. 이른바 '수요폭발'이다. 이렇게 되면 자본주의는 또다시 공장을 더 많이 만들고, 기계를 가동시켜서, '공급과잉' 상태를 지속하게 된다. 모든 것을 파괴하는 전쟁으로 말미암아 만드는 족족 '생산품'을 팔려나갈 테니까 말이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뒤에도 '전후 복구사업'으로 인해 경제호황은 계속 이어나간다. 사람들은 호황속에서 노동만으로 돈을 버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주식투자'라는 새로운 수익창출 방법을 익혀 나간다. 경제호황 상황에서 '투자'는 곧 '이익'이니까 말이다.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주가'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은 돈을 엄청 벌게 되고, 그 덕분에 돈을 펑펑 쓰기도 한다. 오늘이 지나고 내일이 되면 돈을 더 많이 벌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공급과잉' 상태가 지속되면 언젠가 '시장'은 포화상태가 된다. 세계대전이 끝났을 무렵에는 전세계에 더는 '식민지'를 확보할 수 있는 곳도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는 정말 '공급과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공장'문을 닫아야만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멈추는 순간 큰일이 난다. 그동안 받은 '투자금'이 얼마인데, 그 투자금에 이익까지 챙겨서 투자자에게 돌려주려면 결코 멈출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공급과잉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미 시장은 포화상태다. 물건을 만들어서 내놓아도 사줄 사람이 없다. 그렇다면 노동자의 임금을 줄여서라도 상품의 가격경쟁력을 올려야 한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경쟁사도 금방 따라한다. 경쟁사는 더 싸게 물건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럼 노동자를 해고해서라도 상품의 가격경쟁력을 올려야 한다. 그러나 이런 방법도 경쟁사가 금세 따라한다. 경쟁사는 더 싸게 물건을 판매하다가 그만 망해버렸다.

이제 시장에는 '값싼 물건들'이 넘쳐난다. 소비가 살아났을까? 소비를 해야할 주체가 바로 '노동자'였다. 그런데 그 노동자가 방금 '해고' 당해서 실업자가 되었다. 소득이 없어졌으니 생계가 막막하다. 그래서 소비를 더욱 줄인다. 그리고 맡겨놓은 예금과 내일을 위해 투자했던 원금을 찾기 위해 은행에 가지만, 이미 늦었다. 공장들이 줄줄이 파산을 하니, 그 공장에 대출을 해주었던 은행도 뒤를 따라서 도산을 해버렸다. 노동자들은 실직에, 예금에, 투자금까지 다 날려버려서 살길이 막막해진다. 바로 미국 월가의 '검은목요일'과 뒤이어 벌어진 '경제대공황'이다. 이때 노동자 4명 가운데 1명이 자살을 했다고 한다. 그만큼 큰 충격을 준 것이다. 미국을 강타한 경제대공황은 유럽을 거쳐 아시아까지 퍼져 나간다. 그나마 식민지를 거느린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국에 닥친 대공황의 여파를 '식민지'에 떠넘기면서 용케 해쳐나가지만, 아시아와 아프리카 식민지에서는 그야말로 산 사람 입에 거미줄을 칠 정도로 극심한 가난을 겪게 만들었다고 한다.

자, 이렇게 엉망진창이 된 경제상황을 만든 '자본주의'는 이후로 정신을 좀 차렸을까? 발빠르게 성장하고 호황을 누릴 수 있었던 원동력 '공급과잉'이 저지른 폐해를 목도하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면, 인간의 미래는 어둡기만 할 것이다. 2권의 내용은 여기까지고, 그 뒷이야기는 3권에서 펼쳐질 것이다. 여기까지의 이야기가 1930년대다. 지금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와 불과 100년의 차이만 있을 뿐인데, 자본주의는 참으로 많은 문제를 품고 있다. 그런데도 현재도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전세계적으로 유일한 경제체제로 작동하고 있다. 대안이 시급해 보이지 않은가? 그런데 정작 더 큰 문제는 '대안'이 보이질 않는다는 점이다. 과연 3권에서는 그 '대안'이 보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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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이라는 세계
리니 지음 / 더퀘스트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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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XII / 더퀘스트 2번째 리뷰] '필사'라는 것을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작년 연말에 어처구니 없는 '비상계엄'이 발표되자 '윤석열 씨'로 시작하는 필사도 겸하기 시작했으니까. 작년 11월 4일이 첫 시작이었다. 하지만 '다이어리'를 작성해본 경험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 2002년 월드컵 직후에 대한민국 축구가 월드컵 4강에 진출했는데, 나도 뭔가를 해봐야겠다면서 시작한 목표가 '1년에 책 100권 읽기'였고, 읽은책 목록을 다이어리에 '기록'하기 시작했으니까 말이다.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다. 아쉽게도 그 당시에 썼던 다이어리들은 보관상태가 엉망이어서 '다이어리 가죽자켓'에 곰팡이가 쓸기도 했고, 글씨도 삐뚤빼뚤이라서 한 10여 년 전에 버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도 '독서기록'은 쭉 써오긴 했는데, 2005년부터는 손글씨가 아닌 '온라인'에 리뷰형태로 남겨왔기 때문에 '종이'로 기록된 것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러다 작년 11월에 다시 시작한 것이 '필사'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쓰고 있으니 나름 세 달째 쓰고 있고, 거의 날마다 사진을 찍어 '블로그'나 '온라인서점', 그리고 '투비'와 '브런치'에 올리고 있다. 인기는 별로 없다. 그래도 '시작'을 했으니 꾸준히 할 생각이다.

이렇게 '필사'를 시작하고 보니, '필사'에 관련된 책들이 이렇게나 많이 나와 있는 줄은 몰랐다. 해마다 연말연시가 되면 '문구점'에 각종 공책이나 다이어리 제품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길래 '누군가' 사서 쓰기는 하다보다 싶었는데, '필사'나 '기록' 관련 책이 이렇게나 넘쳐나고 있다는 사실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요즘 더욱더 부지런히 쓰고 있기는 하다. 배우고 싶은 선배(?)님들의 '필사기록'이 참 많아서 좋기도 하고 말이다. 왜냐면 '가이드라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은 무작정 '따라쓰기'를 하고 있다. 이렇게도 써보고, 저렇게도 써보면, 결국 '나만의 스타일'이 완성된다는 것을 지난 20년간 꾸준히 '리뷰'를 써오면서 잘 알기 때문이다. 다만 '온라인 타이핑'과 '오프라인 손글씨'의 차이점은 빠르고 느린 '속도의 차이'이기도 하지만, 손으로 쓰는 것은 '쓰면 쓸수록' 점점 손에 익어가는 느낌이 들고, 온라인과는 달리 '틀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과정이 녹아 있기에 더 소중하게 느껴져서 '애착'이 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애착이 가는 시점부터 고민과 불평이 늘기 시작하는 건 어쩔 수 없다. 두 가지 불만이 쌓이기 시작하는데, '전문적인 필사가들'만큼 자신이 직접 쓴 '글씨의 모양'이 마음대로 써지지 않기 때문이다. 글씨체도 맘에 안 들고, 글씨크기도 고민이고, 고수님들이 작성한 '기록'들은 한없이 예쁘기만 한데, 왜 내가 쓴 글씨는 삐뚤빼뚤이고, 컸다가 작아지고, 왼쪽의 글자배열은 어느 정도 줄을 맞출 수 있겠는데, 어찌해서 오른쪽의 글자배열은 들쑥날쑥인 건지...이런 불만이 점점 쌓이다보면 어느새 '필사'를 빼먹고, 나중에는 귀찮아서 쓰지 않고 마는 경험이 다들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전문가들의 다이어리'는 한권 한권이 '깔끔하게 정리되어서' 멋져 보이는데, 내가 직접 쓴 다이어리는 왜이리 허술하고 맹탕인 건지, 다 쓰고도 그냥 쓰레기통에 버리고 싶을 정도로 엉망이라 남 보여주기 부끄럽기만 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런 걱정은 하지 않는 게 좋다. '필사공책'이나 '다이어리'는 한 10년쯤은 '연습' 삼아 이렇게 저렇게 써보다가, 그 가운데 '어멋! 이건 딱 내 스타일이야!!'라는 것이 유레카! 처럼 발견이 될 때, 그걸 중심으로 삼아 차곡차곡 쌓아나가면 되기 때문이다. 나도 이런 깨달음을 온라인리뷰 20년을 써보고서야 겨우 깨닫게 되었다. 그러니 처음부터 완벽한 '완성형 필사기록'을 남겨야지..라는 욕심을 버리고, 1000원짜리 싸구려 공책을 사서, 모나미 검정 볼펜으로 쓱쓱싹싹 꾸준히 써나가는 연습부터 하다가, 그 공책이 10권쯤 쌓였을 때, 예쁜 다이어리와 잘 써지는 펜을 구입해서 '나만의 다이어리'를 작성해나가는 방법이 나와 같은 초심자에게는 딱 어울리는 방법일 것이다. 현재 필사 3달째인 나는 '집에 굴러다니는 아무 공책'에다가 '공짜 선물로 받은 펜'으로 매일매일 쓰는 연습부터 하고 있다. 리뷰쓰기는 '20년차'지만, 손글씨는 이제 '완전초보' 딱지를 떼기 전까진 이런 작업을 매일매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손글씨도 한글자 한글자 '예쁘게' 쓰는 것도 좋겠지만, '줄'을 맞춰서 쓰는 연습이나 '글씨크기'를 일정하게 쓰는 연습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다이어리 작성 고수들'은 글씨체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물론 '예쁜 글씨체'나 '유행하는 글씨체'가 따로 있기도 하고, '펜글씨 교본' 같은 것도 많이 있지만, 어떤 글씨체라도 웬만하면 '줄 맞추고', '크기만 일정'하면 나름대로 개성있는 '기록'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연습만 꾸준히 하게 되면, 굳이 '다이어리'에 옮겨 쓸 것도 없이, 책의 한귀퉁이에 써넣은 '메모'만으로도 꽤나 볼만한 기록을 남길 수 있고, 그렇게 '코멘트'나 '밑줄'을 남긴 책은 읽을 때마다 '추억'이 되살아나서 기쁘고 '예쁜 글씨'에 또 한 번 만족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록'을 잘 남기기 위해서는 '글씨 쓰는 연습'부터 하는 것이 첫 번째다. 개성 넘치는 글씨는 대환영이고, 중요한 것은 '줄'과 '크기'만 일정하게 쓸 수 있는 스킬을 갈고 닦아야 한다는 것! 잊지 마시길 바란다.

그 다음에서야 이 책 <기록이라는 세계>의 저자인 '리니'님들의 이야기가 귀에 쏙쏙 들어올 것이다. 리니님이 남긴 기록물을 참고 삼아 '자기만의 스타일'을 찾아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아직 '내 수준'은 초보임이 분명하기에 리니님처럼 '완성형 기록물'을 남기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따라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을 때 꼭 따라하고 싶은 방법이 있기는 하다. '인생의 오답노트'를 작성해보는 것이다. 오! 이 방법은 꼭 따라하고 싶어졌다. 사실 '오답노트 학습법'의 효용성을 진정으로 깨달은 것도 학창시절이 아니라 논술쌤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학습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이 '오답노트 작성'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난 뒤이고 보니, '인생의 오답노트'도 귀에 너무나도 솔깃했던 것이다. 50살이 넘도록 살아온 내 인생에 '오답'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사실 '정답'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아예 없는 셈이다. 그래서 써야할 '오답노트'가 쌓이고 쌓였음을 생각해볼 때, 이건 정말 '노다지'를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를 꼽는다면 '고전 리뷰'를 필사해보겠다는 것이다. 이건 지금도 하고 있고, 쭉 해오기도 한 것인데, '온라인 타이핑'으로 한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한 번 해보고 싶어졌다. 물론 '고전 리뷰'를 그동안 5000자 이상씩 써왔는데, 그걸 모두 '손글씨'로 쓰는 것은 무리일테고, 그렇게 쓴 리뷰를 거르고 걸러서 '딱 한 문장', 혹은 '딱 한 문단'으로 정리해서 기록으로 남기면 좋을 듯 싶다. 지금 당장은 아니고, 손글씨 연습부터 하고서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었을 때 시작하려고 한다. 꽤나 멋진 기록물이 될 것 같다는 생각만으로도 뿌듯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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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사장의 지대넓얕 1 : 권력의 탄생 -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생각을 넓혀 주는 어린이 교양 도서
채사장.마케마케 지음, 정용환 그림 / 돌핀북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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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XI / 돌핀북 1번째 리뷰] 지적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정말 축복이다. 보통은 '대학교육'을 이수한 학사 수준 이상의 지식인들이 나눌 수 있는 전문적인 의사소통을 일컫는 말이 '지적 대화'겠지만, 하나의 주제로 1시간 이상 웃고 떠들 수 있을 정도의 교양을 쌓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능한 대화인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 이런 '지적 대화'가 나눠지는 모습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전세계에서 가장 높은 '교육열'로 뜨겁고, 전세계에서 카페와 도서관이 가장 많아서 '담론'을 나눌 수 있는 장소가 널리고 널렸는데도 '지적 대화'를 나누는 사람을 찾아보기는 참 힘들다. 그냥 '수다'를 떠는 사람들은 많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지적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말'을 많이 해야 할까? 물론, 어느 정도 수준 높은 '주제'를 강의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 뛰어나야 '담론'을 나눌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말을 잘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경청'이다. 경청은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뜻도 있지만, '상대의 의견을 잘 듣고, 정리를 잘 해서, 완벽히 이해하는 것'을 내포하고 있기에 지적 대화를 나눌 때 절실하게 요구되는 능력이다. 다시 말해, 지적 대화는 '목소리가 큰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목소리만 크면 오히려 '상대의 의견'을 묵살하고, '자기 주장'만 옳다고 얘기할 공산이 크기 때문에 지양해야 할 자세다. 그리고 경청을 잘 하면 '동영상 강의' 내용을 들을 때도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고, 심지어 '책 읽기'를 할 때에도 핵심내용을 잘 파악하는 눈썰미도 더불어 챙길 수 있는 유용한 기술이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이렇게 '경청하는 자세'를 갖춘 사람이 별로 없다. 그래서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인 '수다'만 떨며 시간을 죽이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뭘 좀 알아야 '지적 대화'를 하든, '경청'을 하든 할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를 할 수도 있다. 그렇기 위해서 이런 책이 필요한 것이다. 이 책은 '채사장'이 쓴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란 책의 '어린이책' 버전이다. 이 책을 통해서 뭐라도 '지적 대화'가 흐르는 '담론의 장소'에서 '경청'할 수 있는 능력을 배우고 익힐 수 있다. 물론, 어린이라도 말이다. 사실 '지식'이라는 것이 별 것 아니다. 초중고 학창시절에 배운 모든 것이 다 '지식'이었다. 그런데 그 소중한 지식을 그저 시험성적을 위해서 벼락치기처럼 짧은 시간 안에 '외울 생각'만 했지, 그 지식을 통해서 뭘 해보려는 '큰 그림'을 세워 보질 않았던 탓에 '지적 대화'를 위해서 뭔가 대단한 교양을 새로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부담을 갖고 있기에 '지적 대화'를 나누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뭔가 '자랑질'을 하는 것 같은 쑥쓰러움 때문에, 많은 사람들 앞에선 '겸손한 척', 자신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지식을 꺼내질 않아서, 이런 수준 높은 대화가 원활히 통하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리고 행여나 자신의 입에서 나온 '지식'이 틀릴 수도 있다는 부담감에 더욱더 '지적 대화'를 즐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왜 벌어지는 것일까? 그건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지 않고, '옳은 것'은 나도 다 아는 평범한 지식일 뿐이고, 몇몇 '틀린 것'만 콕 짚어서 지적하려 드는 나쁜 버릇이 불쑥불쑥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대화법은 '지적 대화'는커녕 수준 떨어지는 수다, 다시 말해, 맞든 틀리든 아무 상관이 없는 덜 떨어진 대화만 즐기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말게 한다. 지적 대화를 나눌 때 '절대금물'이 바로 '지적질'이다. 차라리 "나와는 의견이 다르군요~"라면서, '내 의견'을 정확하게 전달하면, 지적 수준이 높은 상대방이라면 "내 의견보다 당신의 의견이 더 수긍이 가는군요"라면서, 양보하게 된다. 그래야 '다음 주제'에서도 서로 교양 넘치는 지적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될 것이다.

지적 대화에 목이 말라서 '서론'이 길어졌지만, 암튼 이 책 <채사장의 지대넓얕>은 앞서 소개한 '채사장'의 또 다른 책의 어린이책 버전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내용적인 면에서는 '똑같은 내용'이지만, 어린이도 한 눈에 이해하기 쉽게 '라이트노블' 형식으로 펴낸 책이라서 아주 유용한 책이다. 그 첫 번째 책으로 핵심 내용은 '권력의 탄생'을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이 누리는 권력은 사실 애초에는 없었다. 권력은 '물질'적인 것이 아닌 '비물질'적인 것이라서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먼 옛날 '구석기 시대'에도 족장은 있었고,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들이 '권력자'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무언가 '독점'할 수 있을 만한 물질적인 것들이 너무도 부족한 시절이었던만큼 조금이라도 '물질'을 얻게 되면 부족구성원의 모두가 똑같이 공평하게 나눠갖는 것이 부족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이를 '원시공산사회'라고 일컫는데 '생산수단'과 '생산물'로 나눌만한 '물질의 풍요로움'이 발생하기 전까지 인간들은 부족원 모두가 공평하게 누리는 무리사회를 이루고 살았다.

그러다 신석기 시대가 펼쳐지면서 '도구'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흔히 '신석기'라고 불리는 도구를 소유하게 되면서 사냥과 채집 따위를 넘어 '농업'을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농업을 하게 되면서 부족원들은 '정착생활'을 하게 되었고, '목축'도 할 수 있었다. 그럼 '농업'을 할 수 있게 된 신석기인들은 이제 무엇을 할 수 있게 되었을까? 바로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늘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신석기인들도 구석기인들과 마찬가지로 '평등사회'였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농업의 발달'로 인해 점점 '사유재산'이 늘어나게 되었고, 더 많이 생산물을 가진 '유산계급'과 유산계급에 기대어 빌어먹게 되는 '무산계급'으로 나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청동기 시대'로 접어들면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나뉘는 결정적인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바로 '생산수단'을 독점하는 권력자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름하여 '왕(군장 또는 군주)'이란 계급이 등장한 것이다. 이들은 '비옥한 토지'를 소유하고 거기서 나오는 '생산물'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아니, 평등했던 사람들끼리 무슨 수로 '생산수단'과 '생산물'을 독차지할 수 있게 되었을까? 이 방법의 비결은 바로 '신'이란 존재를 만드는 것이었다. 농업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연의 힘'을 얼마나 잘 다스리고(?), 잘 이용하느냐에 달렸기 때문에, 그런 자연의 힘을 좌지우지하는 '신'과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왕'이라 일컫는 사람이라고 주장할 수만 있다면, 단박에 '지배계급'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고, '피지배계급'은 왕에게 절대복종하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했던 것이다. 급기야 '왕' 스스로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이런 사회를 우리는 '제정일치사회'라고 학교에서 배웠다. 기억이 나실 것이다.

그렇게 청동기, 철기 시대를 거쳐 4세기 이후부터는 전세계적으로 '고등종교'가 정립되면서 왕이 신을 자처하지 않고, 신에게서 왕권을 위임받았다는 '왕권신수설'과 같은 것으로 '제정분리사회'가 이루어진다. 이는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불교 등등 어느 정도 '경전'을 갖춘 고등종교가 자리 잡은 지역에서 벌어진 공통적인 사건이다. 이때에도 '생산수단'은 여전히 토지였으며, 토지에서 만들어진 '생산물'은 모두 지배계급이 독차지하고서 실제로 '노동'을 한 사람들은 그 일부만 가질 수 있는 불공평한 일이 계속 이어졌다.

이러한 불공평한 일은 흔히 말하는 '중세시대'까지 계속 이어졌다. 특히 서양에서는 무려 1000년 동안(4세기~14세기)이나 지속되었는데, 이 시기를 '종교'이외의 다른 사상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사상의 암흑기'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다 15세기 이후 '르네상스'가 유럽 곳곳에 전파되면서 '신 중심사회'가 '인간 중심사회'로 점점 바뀌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를 흔히 '인본주의'라고 일컫는데, 다른 말로 '이성의 빛'이 밝게 빛나게 되었다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혁명'을 시작으로 '인본주의'는 신 중심의 사회, 다시 말해, 신이 부여한 신성한 왕권을 철저히 부수는 결과를 낳는다. 이때까지도 권력의 향방은 '생산수단'인 토지를 독점한 '국왕'에게 있었다. 그런데 새로운 '생산수단(상공업)'이 만들어지자 구시대의 생산수단(농업)은 점점 취약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생산수단을 '독점'한 새로운 세력집단, 다시 말해 '부르주아'가 등장하면서 생산물의 불공평한 분배에 성난 군중들이 혁명을 일으키자, 이들 혁명세력을 이끄는 지도자로 변신한 '부르주아'가 새로운 권력자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들이 바로 '초기 자본주의'를 이끌었던 주역들인 셈이다.

1권의 내용은 여기까지다. 생산수단과 생산물의 향방을 이해하면 '권력'을 누가 소유하게 되는지 파악할 수 있고, 만약 '소유'할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것이 유리할까? '생산물'을 소유하는 것이 더 유리할까? 고민하지 않게 될 것이다. 정답은 바로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것이다. 왜냐면 '생산수단'이나 '생산물'이나 모두 물질적인 것이지만, 비물질적인 '권력'을 갖기 위해선 끊임없는 소비가 가능한 '생산수단'을 독점하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한정된 소비밖에 할 수 없는 '생산물'을 소유하는 것은 어리석은 선택인 셈이다. 이런 지식을 이해하고 있다면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금방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생산수단'이 무엇인지 알아내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부자가 되는 지름길이니 놓칠 수 없는 지식일 것이다. 정답은 한 가지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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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10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10
히로시마 레이코 지음, 미노루 그림, 김지영 옮김 / 넥서스Friends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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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X / 넥서스Friends 10번째 리뷰] 석가모니는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말을 남겼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고 말이다. 즉, 만남에는 헤어짐이 정해져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더 슬퍼했을 것이. 그러자 석가모니는 뒷말을 덧붙인다. '거자필반(去者必返)'. 다시 말해, 떠난 사람은 반드시 돌아온다고 말이다. 그러자 제자들은 비로소 스승을 떠나보낸다. 죽음 뒤를 기약하고 다시 돌아올 것을 믿는 '윤회사상'이란 불가의 가르침을 석가모니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명강의를 한 셈이다. 히로시마 레이코는 이런 불가의 '윤회사상'을 이 책에 담뿍 담고 싶었던 것일까?

자꾸만 옛 기억을 잃어가는 것 때문에 걱정이 많은 센야는 자신이 사랑으로 키운 야스케와의 추억만 콕 집어서 잊혀져가는 간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앞서 야스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얼음감옥에서 탈주한 고주'와 한 판 대결을 하기 위해 우부메에게 주었던 '바쿠란의 눈'을 되찾았는데, 그것 때문에 '가장 소중한 것'을 잃게 되는 저주에 걸리고 말았다. 왜냐면 요괴의 세계에서 '한 번 맹세한 것'을 어기게 되면 그 댓가를 혹독하게 치뤄야 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아무리 악랄한 요괴라하더라도 '자신이 한 약속'만큼은 반드시 지키는 것이 요괴세계의 규칙인 셈이다. 그런데 센야가 '그것'을 어기고 말았다. 물론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럼에도 규칙을 어긴 것은 마찬가지고, 그로 인한 저주는 물론,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모든 힘을 잃어버린 센야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다름 아닌 '인간 아이, 야스케'다. 그렇게 센야는 야스케와 함께 겪었던 기억들을 하나씩하나씩 잊어버리게 된다. 끝내 '야스케'라는 이름마저 말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가장 소중한 것'에 대한 기억을 깡그리 잊어버렸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다면 '잊어버렸다'는 기억조차 잊어버려야 하는데, '야스케에 관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서는 '무언가'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기억'만큼은 떠오른다는 것이다. 이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한 센야는 '영원한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우부메가 이야기했던 '무서운 저주'의 진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무서운 저주에 걸린 센야는 분명 후회할 것이라고도 경고했었다. 그런데도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의 힘을 되찾지 않으면 당장 '야스케의 목숨'을 구할 방법이 없었기에, 센야는 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센야는 야스케의 곁을 서둘러 떠난다. 왜냐면 '야스케'라는 이름마저 잊어버리게 되었을 때, 센야는 '요괴의 본능'만 남아서 자신도 모르는 새, 야스케를 공격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야스케를 모르는 요괴처럼 죽여버리고도 스스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아픔만 간직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센야를 더욱 공포로 몰아넣었다. 자신의 손으로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없애버리고도 '그 자체'를 잊어버리고, 평생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잊고 살아간다'라는 기억만 간직한 채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저주에 빠질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센야는 야스케를 떠나 아무도 찾지 못할 곳으로 떠나버린다.

하지만 센야는 안다. 자신이 가장 소망하는 것이 '야스케와 함께 사는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 분명한 사실이 센야를 더욱더 괴롭게 만든다. 그래서 스스로 감옥 같은 곳에 자신을 가두고 '야스케'를 헤치지 않게 만들고서는 오직 '유일한 한 사람'만이 그곳을 열 수 있게 만들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라면 너무도 잘 아는 바로 그 느낌이다. 사랑에 실패했음을 직감했을 때, 세상 누구도 알 수 없는 곳에 스스로를 '유폐'시켜놓고서, 유일한 탈출구이자 비상구인 '문'을 만들고서, 자기가 사랑했던 이가 다시 찾아와주길 바라는 그 심정 말이다. 센야는 바로 그런 '감옥'을 찾아냈고, 그 감옥에서 '야스케'를 기다렸다. 마치 죽음과도 같은 상태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야스케'는 그곳을 찾을 수 있었을까? 센야와 야스케는 다시 만날 수 있는 걸까?

'회자정리 거자필반'은 참으로 아름다운 인사말이다. 흔히 '종업식'이나 '졸업식' 때 자주 쓰이던 말이었는데, 시대가 변하니 이젠 잘 쓰이지 않는 말이 되었다. 왜 그럴까? 아마도 너무도 발달한 '통신기기' 덕분일 것이다. 옛날에는 '서신왕래'를 하면서 며칠이나 몇 달에 한 번씩 '서로의 소식'을 전할 수 있었던 탓에 편지 한 통 받고 나면 그렇게 반갑고 기뻤다. 그러다 전화기가 대중화 되자 더 빠르고 편하게 '연락'을 주고 받을 수 있었지만, 오히려 연락이 편해지면 편해질수록 더 '연락'을 뜸하게 할 뿐이었다. '삐삐'가 등장했을 땐, 반짝이나마 소통이 활발해졌다. 소식을 전하는 '메시지'가 한정되어 있었던 탓이다. 그때문에 '한정된 메시지'에 어떻게 더 기발한 아이디어를 발휘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더 자주 연락하게 되는 기현상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다 '핸드폰'이 등장하자 연락은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자주 연락하는 대상과는 더 자주, 뜸하게 연락하는 대상과는 더욱 뜸하게 연락을 취하는 기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이젠 SNS로 전세계 불특정다수와도 소통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자 '이별'을 슬퍼하지 않게 되었다. 어차피 만나고 싶은 사람이라면 '검색기능'으로 편리하게 찾을 수 있는 세상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자정리 거자필반'이라는 말이 무색해졌다. 헤어짐이 아쉽지 않은데, 굳이 다시 만난다는 것이 무에 기쁠쏜가?

이런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 탓일까? 10권의 '시즌1'을 마감하는 대목에서 야스케와 센야가 다시 '만남'을 갖는 것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옛날이었다면 '시즌1'의 결말은 '헤어지는 대목'에서 멈추고, 독자들의 애간장을 다 녹이고 난 뒤에야 느긋하게 '시즌2'의 서두를 '둘의 재회'로 거창하게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별이 아쉽지 않은 시절'이다보니, 급기야 '만남(재회)'으로 결말을 내려버렸다. 그리고 그 둘의 '새로운 이야기'로 시즌2를 장식할 것을 예고하며 막을 내렸다. 이걸 참신하다고 해야할까? 솔직히 맥이 쭉 빠지는 결말이었지만, 이야기는 재밌었으므로 '시즌2'에서 다시 리뷰를 이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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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세계사 6 - 조선을 둘러싼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 벌거벗은 세계사 6
최호정 그림, 이현희 글, 최태성.서민교 감수, tvN〈벌거벗은 세계사〉제작팀 기획 / 아울북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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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IX / 아울북 27번째 리뷰] 한국사에서 다루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의문투성이다. 왜냐면 다른 나라끼리 전쟁을 벌이는데 왜 하필 '우리 땅'에서 전쟁터를 제공했느냔 말이다. 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은 두 전쟁이 벌어진 뒤에 왜 우리 나라의 국권이 침탈되고 끝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는지, 그 진상을 파악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저 시험에 나오니 '사건의 흐름'만 파악하고, 임오군란-갑신정변-텐진조약-동학농민운동-청일전쟁-삼국간섭-을미사변-아관파천-대한제국선포-러일전쟁-포츠머스조약-한일의정서-을사늑약-헤이그특사-군대해산-국권강탈(한일병탄)이라는 '순서'만 달달 외울 뿐이다. 하지만 이래서는 역사의 진면목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다. 다시 말해, '한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계사의 흐름'과 같이 파악해야 한단 말이다. 왜냐면 역사는 '한 나라'에서만 벌어지는 특정하고 독립적인 사건은 거의 없다. 특히 '근대사 이후' 세계는 동시다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 그래서 그 중심에 '한국사'를 놓고 세계를 조망해야 역사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을 통해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진면목을 살펴보자.

이 두 전쟁의 공통점은 바로 '일본'이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두 전쟁 모두 '일본'이 일으킨 전쟁이며, 그 전쟁의 목적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차지하는데 있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성공한다. 우리에게는 실로 끔찍한 역사의 장면이지만,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이런 잘못된 역사를 우리는 또다시 반복할 것이기에 두 눈 부릅 뜨고 똑똑히 지켜봐야만 한다. 그리고 일본에게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뼈아픈 실책이었다. 비록 일본으로서는 '승리한 전쟁'이긴 하지만,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뜻밖의 승리'로 인해 21세기 일본에게 두고두고 화근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잘못'을 저지르고도 반성할 줄 모르는 이웃나라를 두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도 역사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만 한다.

먼저 '청일전쟁'이다. 이 전쟁이 일어나기까지 일본은 혹독한 근대화의 시련을 극복해내야 했다. 그런데 그런 극복을 한 뒤의 '일본의 행보'는 전혀 바람직하지 않았다. 서구열강에게 혹독한 '신고식(?)'을 당하고 아시아 최초로 근대화에 성공했으면, '동료의식(!)'을 발휘해서라도 다른 이웃나라, 같은 아시아국가가 서구열강에게 무방비로 침탈당하지 않도록 배려하고, 이끌어가는 아량을 베풀었다면 오늘날의 '실패국가'로 전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게도 일본은 서구열강에게 당한 그대로 '제국주의화'하여 서구열강과 어깨를 나란히고 아시아 각국을 '침략'하고 '식민지'로 삼는 대열에 낑기려 했다. 그 시작점이 바로 '청일전쟁'이었던 것이다.

그 시작은 '임오군란'이다. 고종이 친정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식군대(별기군)'와 '구식군대'의 차별로 인한 구식군대의 분노로 벌어진 우발적인 사건이 '일본공사관'을 불태워버리는 만행으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구식군대가 왜 일본공사관을 공격했냐면, 그 당시 '별기군'을 훈련하던 교관이 일본인이었기 때문이다. 고종과 민왕비는 '개화의 필요성'을 깨닫고 개화파의 의견을 받아들여 일본인 교관을 통해서 신식군대를 양성하며,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서 '일본의 협조'를 호의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허나 일본은 조선의 요청에 호의적으로 보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종과 민왕비의 '개화 의지'를 빌미로 조선을 일본의 속국으로 만들 계획을 착착 진행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임오군란이 벌어지자 일본군은 그냥 인천(제물포)을 통해서 내빼버리고 만다. 왜냐면 아직 준비가 덜 되었기 때문이다. 병력도 소수였고. 허나 '임오군란'으로 인해 되려 반갑지 않은 '손님'이 조선에 들어오게 된다. 바로 '청나라의 군대'다. 바로 청의 개입으로 '임오군란'이 진압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으로서는 전혀 반갑지 않은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멈추지 않는다. 이번엔 조선의 개화파를 이용해서 조선에 '급변사태'를 일으키고, 이를 계기로 삼아 일본이 조선을 집어 삼키는 작전이었으나, 이 또한 불발로 끝난다. 때마침 일어난 김옥균의 '갑신정변'이 일어나서 일본의 군대와 자금을 받아 조선을 개혁시키겠다는 야심찬 의지는 일본의 비협조로 인해 '삼일천하'로 끝맺게 되고, 고종의 발빠른 청 원병 요청과 청군의 신속한 개입으로 인해 조선의 개혁세력은 깔끔하게 정리가 되고 말았다. 일본은 아직 '조선'에 개입을 할 정도로 완벽히 준비가 되지 않았던 탓이 크다. 일본이 국내문제를 해결하는데 급급해 '갑신정변'을 나몰라라 하는 사이에 고종은 '청나라의 개입'을 공고히 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일본이 '갑신정변'을 통해서 얻은 것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곧이어 맺어진 '텐진조약'으로 양국의 군대를 '동시철병'하는 이득을 얻었기 때문이다. 또한 양국의 군대가 조선에 출병할 때는 서로 통보를 하기로 약조하고, 일본도 조선에 군대를 보낼 수 있는 권리(?)를 따냈기 때문이다.

이제 '동학농민운동'으로 일본은 본색을 드러낸다. 조병갑의 전횡에 분노한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군'은 전라도 전역을 차지하고 관군을 밀어붙이는 저력을 보여준다. 이에 고종은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는데, 제 나라 백성을 진압하는데 '외국군대(청군)'를 요청해 버린 것이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절대 반대를 외쳤는데도 '발등에 떨어진 불을 꺼야 한다'면서 청나라 군대를 요청해버린 것이다. 임오군란, 갑신정변 정도의 효과를 기대했던 고종의 판단은 '일본군의 출병'으로 깜짝 놀라지만,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한다. 오히려 '동학군'이 외국군대를 물리라면서 자진해산을 해버리는 똑똑한 행보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청군은 자신들이 할 일이 없다며 '철군'을 결정했고, 일본군에게도 똑같이 '철군요청'을 전달했지만, 그 사이에 이미 일본군은 '경복궁 점령'을 시도했고, 고종을 사로잡아 버리고 만다. 그리고 경복궁으로 통하는 '전신선'을 다 끊어버리고, 고종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사이에 일본군은 고종을 협박해서 '청군의 철병'을 요구하고, 일본군의 주둔을 고종의 요청이었다는 사실을 공식화해버린다. 그리고 일본군은 아산 앞바다에서 '풍도해전'을 개시한다. 청에 선전포고도 없이 선제공격을 해버린 것이다.

이렇게 '청일전쟁'은 시작한다. 뒤이어 벌어진 '성환전투'와 '평양성전투'에서 모두 이긴 일본은 내친 김에 청나라의 요동반도를 집중 공격하고, 압록강을 넘어 '뤼순'을 점령한 뒤, 해전에서도 청나라의 북양함대를 박살내고 완벽히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쟁취한다. 이는 서구열강을 깜짝 놀라게 만든다. 어느 누구도 '일본의 승리'를 점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군사적인 면에서 청나라는 일본을 압도했고, 청나라의 승리를 기정사실로 여겼기 때문이다. 내친김에 일본은 청나라의 북경까지 함락시켜 완전한 승리로 청나라 전부를 집어 삼키려 들었다. 하지만 이때부터 서구열강은 일본을 견제하기 시작한다. 왜냐면 당시 서구열강은 '청나라의 이권'을 서로 사이좋게(?) 노나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이 청나라의 수도 북경을 함락한다면, 자신들의 이권을 빼앗길 것 같자 일본에게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에 일본은 청나라가 아니라 서구열강들이 무서워서 군대를 돌려 버린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서면 일본의 체면이 서지 않으니, 북경이 아닌 '대만'을 이때 함락해버린다. 이렇게 완전한 승리를 거둔 일본은 요동반도와 대만까지 점령하고, 조선에서도 '청의 간섭'을 물리치고 완벽하게 장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니 애초에 전쟁에 반대했던 일본국민들도 '개선'을 한 일본군대에 환호하며 스스로 '대일본제국 국민'으로 자랑스러워하기 시작했다. 뜻밖의 대승리로 인해 온나라가 '국뽕'을 맞아버린 셈이 되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시모노세기 조약'으로 조선은 (청의 속국이 아니라) 자주 독립국이며, 요동반도·대만 할양하고, 전쟁배상금으로 2억냥을 받아내는데 성공하였지만, 너무 많은 이득을 보았다고 생각한 서구열강은 발빠르게 움직이며 일본의 승리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가장 발빠르게 움직인 나라는 '러시아'다. 왜냐면 당시 러시아는 '부동항(얼지 않는 항구)'을 얻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이었다. 그래서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인 '여순(뤼순)항'과 그곳으로 진입할 수 있는 '요동(랴오허)땅'을 차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와 짜고서 '삼국간섭'을 벌인다. 그 결과, 일본은 '요동땅'을 포기해야만 했다. 왜냐면 아직은 서구열강과 맞짱을 뜰 정도의 실력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허나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 국내에서도 '러시아'에 본때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는 러시아의 황태자 '니꼴라이2세'가 일본에 방문했을 때, 상해를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것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이 벌어지자 일본은 온 나라가 '러시아 황태자'를 향해 사죄를 하며 싹싹 빌고 용서를 구하는 '저자세 외교'를 벌인다. 몇몇 사람들은 미안하다며 '할복자살'까지 시도했다. 하지만 니꼴라이2세는 정신병자의 소행으로 보고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는 않는다. 그만큼 일본으로서는 러시아가 강국이라는 것을 익히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삼국간섭'을 지켜본 이는 또 있었다. 바로 고종과 민왕비였다. 청일전쟁 이후 조선이 일본의 손아귀에 놓이는 상황이 벌어지자 고종은 일본을 견제할 세력으로 '러시아'를 주목했던 것이다. 러시아의 힘을 빌릴 수만 있다면 일본이 '경복궁'을 침입해서 자신을 볼모로 삼는 수모를 다시 겪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허나 이는 또다시 '외세의 힘'에 기대어 어찌 해보겠다는 어리석은 판단이었고, '언 발에 오줌누기'라는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조선에 불어닥친 한파에 마땅한 대안도 없이 '언 발에 오줌을 누어' 당장의 급한 불을 꺼보려해봤자 러시아라는 또 다른 탐욕자를 불러들이는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허나 고종으로서는 달리 도리가 없다. 동학군이라는 자국의 백성조차 다스릴 능력이 없어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한 무능한 임금인데,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을 상대로 무슨 대책이 있었겠느냔 말이다. 그나마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일본 세력을 견제하려는 시도는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허나 일본은 이런 고종의 행보를 좌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을미사변(민왕비 살해사건)'을 일으키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일본은 스스로 '문명국'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혹독한 신고식을 치르고 '근대화'에 성공한 것에 이어 '청일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직후라 더욱 그랬다. 그런데 '문명국'답지 못한 만행을 연이어 저지르고 있으니 스스로 이를 감추려고 얼마나 애를 쓰는지 안쓰러울 정도였다. 앞서 청일전쟁 당시 '여순'을 함락한 뒤에 저지른 '여순대학살'이 대표적이다. 당시 일본군은 청나라사람이라면 닥치는대로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고, 이로 인해 20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이 참혹하게 무참하게 살상당했다고 전한다. 서구열강은 일본군이 이런 만행을 저지르고 다니는 것에 '야만스럽다'며 비난을 했는데, 일본정부는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서구언론의 비판만을 두려워하며 '진실 왜곡, 혹은 부정'을 일삼으며 연일 언론플레이를 했더랬다. 이런 일본이 '을미사변'을 저지른 것은 야만국이 저지르는 당연한 일이었으나, 오직 두려워하는 것은 서구의 비난뿐이었다. 이 사건도 어찌어찌 서구열강의 비난을 받자 민왕비를 살해하고 욕보이고 시신을 불태워버린 범죄자를 일본으로 송황해서 재판을 받게 하였으나, 모두 '무죄'로 풀어줘버린다. 오히려 '정부의 요직'에 앉혀 출세의 길을 열어줘버린다. 이래 놓고도 '문명국'인냥 행세하는 것이 우습기만 하다.

한편, 자신의 거처인 '경복궁'에서 자신의 아내가 무참히 살해되는 일이 벌어지자 고종은 '아관파천'을 단행한다. 일본군의 감시속에서 언제 자신의 목숨도 잃게 될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몰래 '궁녀의 가마'를 타고서 '아라사(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을 하는데, 무려 1년간 외국 공사관에 머물려 목숨을 부지하는데 급급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아관파천으로 인해 고종의 목숨은 건졌지만 수많은 이권을 '러시아'에 내주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특히 '압록강, 두만강, 울릉도 벌목 사업'을 모조리 러시아에게 몰아주는데, 이를 통해서 러시아는 '만주'를 차지하고 '부동항'을 차지하려는 속셈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더구나 '울릉도'에서도 이권을 챙기면서, 동시에 '일본'을 바다에서 견제하고 감시할 수 있었기에 여러 모로 톡톡히 이득을 챙긴다.

이때, 세계적인 정세는 '그레이트 게임'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이 게임의 핵심포인트는 '러시아의 팽창'을 막는 것이었다. 지금도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다. 이를 막기 위해서 '대영제국'은 러시아가 '부동항'을 갖지 못하도록 총력을 기울였다. 당시에 강국이라면 바다를 지배하는 것이고, 바다를 지배하기 위해선 '강력한 해군'을 양성하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러시아도 '발트함대'라는 막강한 해군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부동항'을 갖고 있지 못해서 이 최강의 함대를 제대로 운영할 수 없었던 것이다. 러시아가 바다로 나올 만한 지점을 '영국과 미국, 그리고 영연방에 속하는 나라들'이 모조리 막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러시아가 '청나라의 여순항'과 '조선반도의 항구'를 얻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게 '아관파천'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영국은 부랴부랴 일본을 향해 '러브콜'을 보냈다. 아직 일본 혼자서는 러시아를 상대할 여력이 없을 테니, '영일동맹'을 맺어 영국과 미국, 그리고 영연방이 러시아와 한판 붙으려는 '일본'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일본은 그 손을 덥석 잡는다. 그리고 막대한 차관을 빌려서 '대국 러시아'와 한판 승부를 보려 한다. 이게 바로 '러일전쟁'이 벌어지기 직전의 상황이다. 한편, 조선은 '대한제국 선포'를 단행하고, 러일전쟁의 조짐을 간파하자, '중립선언'을 하지만, 이미 약소국으로 전락한 처지의 조선이 '아무런 힘'도 없는 나약한 중립을 들어줄 일본과 러시아가 아니다. 오히려 '러일전쟁'의 전초전이 조선땅에서 벌어진다. 일본군은 '여순항'에 머물고 있던 러시아군을 공격한 다음날, 인천(제물포)에 정박하고 있던 러시아 함대를 침몰시키고, 경복궁을 점령해버린 뒤에 '러시아공사관'을 철수시킨다.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필요한 전쟁자원을 한반도에서 충당하며 본격적인 '러일전쟁'에 대비하고 있었다. 또다시 강대국들의 전쟁에 힘없는 우리 백성만 피해를 보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암튼, 일본군은 발빠르게 러시아군을 몰아붙였고, '여순'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공방전이 벌어졌다. 초반의 기습으로 승전보를 울려 기세좋게 밀어붙였지만, 러시아도 만만치 않았다. 일본군의 총공격에 러시아는 여순에서 방어에 성공하며 일본군은 엄청난 희생을 치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본은 '무모한 전투'를 지시하며 30만 명이 넘는 일본군이 이곳에서 전사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이러한 대승에도 '보급로'가 막히며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시베리아 철도'가 완공되지 않아서 전쟁물자가 제때에 보급되지 못했고, 바이칼 호수의 얼음 위에서 '보급기차'를 말이 끌어서 전달하는 처절한 전쟁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1년이나 버텼지만, 러시아는 일본과의 '육지전'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허나 러시아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막강한 해군력 '발트함대'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발트함대가 일본군이 머물고 있는 태평양 서쪽 연안까지, 다시 말해, 조선의 근해까지 오기에는 너무도 멀고 험난한 길이 남았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해군은 '유럽의 북해'에 있었다. 이곳에 있는 해군이 '동해'까지 가장 빠르게 오려면 일단 '대서양 연안'으로 나간 뒤에 '지중해'를 거쳐 '홍해'와 '인도양'을 지나 '말레이해협'을 지나 '동중국해'를 거쳐 '대한해협'으로 곧장 오면 된다. 그런데 러시아 함대는 이 '최단루트'를 갈 수가 없다. 앞서 언급한 '그레이트 게임' 때문이다. 당시에는 '수에즈 운하'를 장악하고 있던 나라는 영국이었기 때문에, 러시아 발트함대는 지중해를 지나는 길이 아닌 '아프리카 대륙'을 빙빙 돌아서 '인도양'조차 단숨에 가로질러야 했다. 왜냐면 인도도 '영국령'이었기 때문에 러시아 함대가 기항을 해서 연료와 식량, 식수를 공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가는 길도 험난한데, 당시 '영국령'인 국가를 피해서 가야만 했기 때문에 먼길을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발트함대가 동해바다에 도착하기까지 무려 1년이란 시간이 소요되었던 것이다. 그 사이 일본은 '대한해협'의 길목을 막고, '대마도'에서 일본 함대를 감춰두고, 기진맥진 겨우 도착한 발트함대를 손쉽게 박살을 내버린다. 그렇게 러시아가 자랑하는 발트함대는 제 실력을 보여주지도 못하고 '수적으로도 열세인 일본 함대'에 좌초되고 만다. 허나 러시아가 '영국령'에 기항하지 않고도 먼 바다를 돌고 돌아 '동해바다'까지 도착한 것만으로도 거의 기적에 가까운 실력을 보여준 셈이다. 더구나 1년의 항해 동안, 제대로 된 보급도 없이, 단 한 대의 손실도 없이 도착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저력을 보여준 셈이라, 오히려 일본이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러시아는 발트함대를 잃고도 전혀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버티기에 들어갔다. '시베리아 철도'만 완공되고 나면 일본과의 전쟁은 2년이고, 3년이고 계속 치룰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일본은 '영일동맹'으로 받은 차관이 2년이 지난 시점에 똑 떨어져버리고 더는 전쟁을 벌일 여력이 남지 않았다. 그만큼 일본은 '총력전'을 벌였고, 러시아는 일부만 손실을 본 상황이었던 것이다. 전쟁이 길어지면 당연히 러시아의 승리가 점쳐졌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피의 일요일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오랜 전쟁에다 기근이 덮치자 러시아 군중들은 '아버지' 같은 니꼴라이2세 차르(황제)에게 빵을 달라고 시위를 한 것이다. 동방정교회의 주교가 십자가를 들고, 수많은 농민과 노동자로 구성된 군중들은 '차르의 초상화'를 들고서 행진을 했고, 차르가 머물고 있는 성 앞에 모여 목소리를 높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모인 굶주린 군중을 향해 병사들은 발포를 명령했고, 수많은 사상자가 하얀 눈밭을 시뻘겋게 물들이자 성난 군중들은 차르를 향해 분노를 표출했던 것이다. 연일 이러지는 시위에 결국 차르도 두손을 들었고, 러시아도 더는 전쟁을 치를 수 없는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때 미국이 '자국의 위상'을 높이고자 러일 전쟁의 중재자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으니, 두 나라는 서로의 사정에 의해 미국의 중재안을 받아들였고, 결국 '일본은 명분(승전)'을 '러시아는 실리(배상금 없는 종전)'를 챙겼다. 청일전쟁과 같은 막대한 배상금을 얻을 것으로 기대했던 일본은 아쉽지만 '배상금' 대신 '조선의 이권'을 독차지할 수 있게 되었고, 사할린 섬을 러시아로부터 할양 받는 것으로 만족했다. 반면에 러시아는 국내에서 진행되는 급한 불 때문에 '조선'에서 영향력을 더는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고, 얻고 싶었던 '부동항'도 끝내 얻지 못하고 만다. 이렇게 '러일전쟁'도 종식이 되었고, 그 결과 '대한제국'은 명실공히 일본의 손아귀에 놓이게 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에 고종은 '헤이그 특사'를 보내 일본의 침탈이 부당하다는 것을 만국에 알리려 했으나, 이미 서구열강은 국제사회에 '일본'을 열강으로 받아들인 뒤였기에 '고종의 외침'은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었다.


이처럼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한반도에서만 벌어진 사건으로 축소해서는 결과, 그 진면목을 알 수가 없다. 마땅히 '세계사의 관점'으로 넓게 보아야만 제대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비단 '근대사 이후의 역사'만 세계사적인 관점으로 볼 일이 아니다. 우리가 스스로 '반만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자긍심을 뽐내기 위해선 마땅히 '고대 4대 문명'에 고조선의 역사를 당당히 밝혀야 한다. 현재까지는 '중국(황하)문명'으로 퉁치고 있는 것이 사실은 '상(은)나라 갑골문자'의 기록에 근거하고 있으니, '상나라'가 한족의 나라가 아니라 동이족의 나라였다는 진실을 밝히고, '갑골문자(한자)'가 한족의 문자가 아니라 동이족의 문자였다는 진실, 또한 낱낱히 밝혀져야 마땅할 것이다. 우리가 역사의 진실을 '한국사'라는 좁은 시선으로만 관찰하게 되면, 이러한 진실 또한 그냥 묻혀야만 한다. 그리고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역사왜곡'의 탓이라고만 푸념을 늘어놓을 텐가? 우리 스스로 우리 역사를 '세계사의 반열'로 올려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역사의 혜안을 가져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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