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 읽어드립니다 읽어드립니다 시리즈
김경일.사피엔스 스튜디오 지음 / 한빛비즈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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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데믹 시대를 보내며 많은 분들이 심리적 불안을 호소하고 있단다. 불안, 짜증, 화남, 우울...2년째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오면서 많은 분들이 느꼈을 감정들이다. 비단 우리 나라만의 일은 아니다. 전세계적으로 비슷한 상황이며 전세계인이 비슷한 불안증세를 겪으며 지내고 있다. 그래도 아직은 버틸 만하다고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심리적 불안'과 함께 하며 살아가야할지 막막하기만 하기 때문에 좀처럼 불안심리는 가실 줄 모르고 있다.

 

  이렇게 '심리적 불안'이 장기화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그저 참고 견디기만 해야 할까? 아니면 쌓이고 쌓인 감정의 분출구를 찾아나서야 할까? 이도저도 아니라면 '심리'를 제대로 읽어보면 어떨까? 바로 그렇다. 이 책은 바로 당신이 겪고 있는 심리적 불안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분석해서 해결하기 위해서 펴낸 책이다. 왜냐면 '심리학'은 과학이기 때문이다.

 

  많은 분들이 아직도 '심리학'을 상대의 마음과 생각을 때려맞추는 독심술이나, 쪽집게 점쟁이처럼 속속들이 들여다보며 알아맞추는 학문으로 여기기 일쑤다. 하지만 심리학자는 여러분의 생각을 알아맞추거나 마음을 읽어내는 재주는 없다. 대신에 당신의 행동을 통해서 생각과 마음을 분석하거나, 심리적 불안의 원인을 이해하기 위해 가설을 세우고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해서 검증하여 불안을 해소하는 학문을 연구한다. 물론 과학적으로 말이다. 따라서 심리학자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판데믹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호소하는 불안증세들을 분석하고, 그에 맞는 대안을 제시함과 동시에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럼 판데믹 시대에 자주 호소하는 대표적인 '불안심리의 원인'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한 활동범위의 제한으로 인한 불만들일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모임도 취소하고 집으로 가고, 학교나 직장도 가지 않고 집에서 온라인으로 해결하고, 모처럼 주말인데도 여행이나 취미 따위도 즐기지 못하고 집콕하는 일상이 계속 이어지면서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불만이 쌓여가고 있다. 이런 일상에서 흔히 벌어지는 착각이 어른은 비교적 잘 견디지만 아이는 못 버틸 것이라는 편견이다.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인 경우가 다반사다. 어른들이 못 견디고 아이들은 비교적 잘 견디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마스크 착용도 어른들이 허술하게 지키는데 반해 아이들은 마스크를 잘 쓰며 오히려 어른들이 마스크를 벗고 있는 모습을 못마땅하게 쳐다보기 일쑤기 때문이다.

 

  허나 애나 어른이나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에너지 발산'을 할 수 없는 현실이다. 특히,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들은 집에만 있는 것이 너무너무 힘들다고 호소한다. 이런 점에서는 어른보다 아이들이 더 힘들어하기 마련이다. 아이들의 에너지는 어른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클 뿐만 아니라 재충전도 엄청 빠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에너지가 넘칠 때 적절하게 소모시켜줘야 하는데, '집콕생활'이 오래도록 이어지면서 힘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런 스트레스 때문에 '가족끼리' 불편해졌다고 호소하는 분들이 점점 많아졌다. 아닌 게 아니라 아침저녁에 잠깐 얼굴을 볼까말까 하던 가족끼리 하루종일 붙어있으니 없던 스트레스도 도질 판인게 사실이다. 거기다 가족끼리 허물없이 지내다보니 서로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폭발시키는 경우도 많아졌기 때문에 더 많이 상처받고 소원해졌다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이런 경우에 심리학자들은 가족끼리니까 더욱 '거리'를 두고, '격식'을 차리고, '선'을 지키라고 권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권한다면 '감정표현'을 솔직하고 더 자주하는 방법이 가족끼리 생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한다. 왜냐면 가족끼리 싸우는 가장 흔한 경우가 바로 너무 '친하기' 때문이다. 가족이니까 이 정도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줄 거라 믿었는데, 몰라도 너무 몰라준다며 서운해하고, 그런 서운한 감정이 쌓이고 쌓여서 '한 순간'에 폭발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친한 가족일수록 한 발짝 물러서서 '남들'에게 하는 것처럼 거리를 두고, 격식을 차리고, 일정한 선을 그어 놓고 가족끼리 서로 '배려'해주는 것이 가장 현명한 대처법이라고 말한다. 특히 '고맙다'는 표현이 가장 중요하단다. 남들에게는 사소한 친절만으로도 감사하다는 말을 남발하면서 가족끼리는 왜 그러지 않는 걸까. 그건 쑥쓰럽기 때문이란다. 가족끼리 '당연한 일'인데 뭘 사소한 것까지 고맙다고 표현하느냐고 말이다. 그러다 싸운다. 고맙다는 표현을 하지 않으면 애써 배려한 마음이 전달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에 서운함이 들고, 그렇게 서운함이 쌓이면 끝내 사소한 일에 발끈하게 되어 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판데믹 시대에 불안은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 그럴 땐 '불안하다'는 마음을 그대로 인정해야 한단다. 불안한데도 애써 참고 견디기만 하면 결국 더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불안과 같은 부정적인 마음은 바로 바로 해소해주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참고 견디고, 또 그걸 강요하다보면 끝내 폭발하여 더 큰 피해를 볼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화가 나면 화난 감정을 다스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화가 풀릴 때까지 누구든 붙잡고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 가장 좋다. 이렇게 '내가 화난 까닭'을 주절주절 이야기하다보면 화가 난 원인을 확인할 수 있고, 그 원인에 대해서 공감 받거나, 위로 받거나, 또는 신속하게 해결책을 제시해준다면 화라는 감정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심리학자들도 이런 것에 주목했다. 그래서 '내담자(마음이 아파서 심리학자에게 찾아와 속깊은 이야기를 하는 환자)'에게 무엇이라도 이야기를 꺼내도록 심리학자들은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며 환자의 마음상태를 살펴 적절한 대화요법을 시도하기 마련이다.

 

  이 책도 그런 내담자들의 하소연을 듣고 마음치유를 위해서 들려주는 처방전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그래서 마음이 아픈데도 원인을 몰라 헤매는 독자들이라면 이 책을 적극 권한다. 또는 판데믹 상황에 마음 한구석이 아플 것만 같아서 '예방적 차원'에서 심리치유가 필요한 독자들에게도 심하게 권한다. 또한, 아직도 '사람의 마음을 읽는 법'이 궁금해서 <심리학>을 접근하고 싶은 독자들에게도 적극 권한다. 심리학자들이 어떻게 마음을 읽어내는지, 그 '과학적 접근법'을 직접 확인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암튼, 대단히 유익한 심리학책이니 누구나 읽고 유용하게 써먹길 바란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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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키호테 푸른숲 징검다리 클래식 18
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김정우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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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론은 첫 번째 리뷰에 써놓았으니 각설하고, <돈 키호테>의 작가인 세르반테스의 생애부터 논해본다. 지난 번에 '효용론적 관점(독자관점)'에서 <돈 키호테>를 분석했으니, 이번엔 '표현론적 관점(작가관점)'에 대해서 논해보겠단 말이다. 간간히 '반영론적 관점(시대관점)'도 포함해서 말이다.

 

  세르반테스는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의사 아버지 밑에서 자랐지만 정규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할 지경이었단다. 오늘날이야 의사라는 직업이 사회적인 지위 뿐만 아니라 부유하게 살 수 있는 직업이었지만, 16세기만 해도 '외과의사=이발사'로 통용될 만큼 천한 직업이었으며, 치료를 해주고도 치료비를 제대로 받지 않는 등 인심 좋은 가장이었던 탓에 자식들은 배를 곯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런데도 독학으로 열심히 공부하여 귀족의 시종 노릇을 하며 이탈리아로 떠났다. 그뒤 군인이 되어 '레판토 해전'에 참전하게 된다. 당시에는 여행을 공짜로 하기 위해서 군대에 입대하는 이들이 많았다. 철학자 데카르트도 그중 하나였는데, 암튼 세르반테스도 좋은 경험(?)을 많이 하기 위해서, 또는 돈을 벌기 위해서 군인의 길을 갔던 것 같다.

 

  하지만 해전에서 왼팔에 총상을 입고 평생 불구가 된 세르반테스는 5년의 군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도중에 해적에게 붙잡혀 또다시 5년간 포로생활을 하게 된다. 어찌어찌 고국인 에스파냐로 되돌아간 세르반테스는 생활고를 이겨내기 위해 투잡, 쓰리잡까지 했지만 곤궁한 삶을 벗어나진 못했다. 심지어 그 와중에 왕성한 집필 활동까지 했고, <돈 키호테>를 비롯한 여러 대본이 연극으로 상연되는 등 대히트를 쳤는데도 말이다. 그러다 1616년 4월 23일 셰익스피어와 '같은 날'에 숨을 거두었다. 각각 영국과 에스파냐를 대표하는 대문호가 한날에 생을 마감한 것이 참으로 묘하다.

 

  셰익스피어는 그렇다치고 세르반테스도 대문호인 것이 타당할까? 그렇다. <돈 키호테>가 그 증거다. 다름 아니라 <돈 키호테>가 '현대소설의 아버지'라고 불리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럴까? <돈 키호테>를 처음 읽을 때의 느낌은 그야말로 어리둥절할 따름인데도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줄거리라는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순탄하게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여러 모험을 짜깁기한 것마냥 어수선하기 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중간중간에 '작가의 넉두리'로 보이는 잡담까지 고스란히 담아 놓았는데, 주인공인 돈 키호테는 미치광이 짓을 거듭할 뿐이다. 이렇게나 난삽한 내용이 무려 300쪽~700쪽에 달하기 때문에 웬만한 독자들은 읽다가 덮어버리기 일쑤일 것이다. 그런데도 이 책을 '현대소설의 효시'로 삼는 까닭은 '르네상스 이전의 소설'들이 어땠는지 살펴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고전소설들의 등장인물이 대부분 '전형적인 인물'을 등장시켰던 것에 비춰볼 때 '돈 키호테'는 그야말로 혁명적인 인물이었던 셈이다. 정신이 오락가락할 뿐만 아니라 하는 짓도 착한지, 나쁜지,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미친 짓을 일삼는다. 그당시 독자들이 느꼈을 충격을 상상해보면 <돈 키호테>의 인기가 왜 높을 수밖에 없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돈 키호테>는 시대에 따라 천차만별로 읽히곤 했다. 17세기 근대가 시작하던 때에는 마냥 재밌는 책이었겠지만, 18세기 합리주의가 대륙의 사상을 지배할 때는 '이성상실'한 미치광이로 보았다. 그러다 19세기 낭만주의가 들어서자 돈 키호테는 그야말로 자유로운 영혼으로 해석되어 불의와 맞서는 고귀한 이상주의자가 되었다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사실주의에 입각해서는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뻥쟁이이고, 마르크스주의로 보면 몰락한 봉건적 가치에 집착하는 귀족집단을 대표하며, 실존주의로 투영하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초인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그러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만나면서 '돈 키호테'는 물을 만났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똑같은 사물을 바라보면서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고 보는 경향을 말한다. 한마디로 '불확실성'을 추구하는 사조라고 이해해도 좋다. 그래서 돈 키호테가 풍차를 거인으로, 주막을 성으로, 이웃집 못난이 처녀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둘시네아 공주로 보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해진다. 어디 그뿐인가. 독자들도 <돈 키호테>를 읽으며 '다양한 해석'을 내놓기 일쑤다. 평가도 다양하다. 좋았다는 독자들도 있는 반면, 형편없다고 혹평을 내놓는 독자도 부지기수다. 이렇게 오랜 세월동안 읽히면서 '다양한 해석과 평가'를 받는 작품이 또 있을까? 그래서 <돈 키호테>가 오늘날까지 주목을 받고 있으며, 수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에게 영감과 영혼을 불어넣어주는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한편, 메타버스가 가능해지는 미래에는 어떨까? 현실과는 다른 '가상세계'에 또 다른 나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세상이 펼쳐지면 돈 키호테 같은 인물은 더는 미치광이가 아니게 된다. 왜냐면 풍차를 거인으로도 보고 뛰어들면 '진짜 거인'이 풍차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가능해지는 세상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는 '게임속의 캐릭터'를 자신의 일부로 여기고 아낌없이 투자하여 키우고, 꾸미고, 능력치를 성장시켜서 수많은 유저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현실속의 자신'도 덩달아 대리만족을 느끼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단언컨대, 인공지능이 인간의 능력을 추월하는 '특이점'이 구현된다는 2040년을 기점으로 <돈 키호테>는 다시금 주목받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이성적인 사고방식'은 인공지능의 몫이 되고, 인간은 '돈 키호테의 사고방식'을 추구하며 살아야 인간다워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하면 '인공지능'과 다를 바가 없게 될 것이다. 인간은 남다르고 색다른 창의적인 생각을 샘물처럼 쏟아내야만 할 것이다.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미치광이가 주목받게 될 것이 틀림없다.

 

  다음 <돈 키호테> 책에서도 '또 다른 이야기'를 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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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만화 동사의 맛 : 이야기그림으로 배우고 익히는 우리말 움직씨 - 이야기그림으로 배우고 익히는 우리말 움직씨
김영화 지음, 김정선 원작 / 유유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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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사의 순우리말은 '움직씨'다. 움직임을 나타내는 말의 씨앗이니 '동사'라고 이르는 것보다 쏙쏙 이해가 되는 말이다. 덧붙여서 형용사는 '모양씨', 명사는 '이름씨, 그리고 조사는 '도움씨'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순우리말'을 즐겨쓰는 것이 낫다. 물론 우리말로 나타낼 수 없거나 곤란한 것까지 순우리말로 고집하자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똑같이 바깥에서 들온말이지만 외래어가 외국어와 달리 우리말인 것처럼 우리말을 더욱 풍부하게 표현하기 위해 들여온 '한자어'와 '콩글리쉬'도 우리말이 되었고, 또 되어가는 중이다. 이는 세계화에 걸맞는 자연스런 현상이며 우리말이 더욱 풍요로워지는 좋은 현상이다. 하지만 무분별한 '외국어 쓰임'은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 우리말은 속된말로 낮잡아보고, 들온말은 품위와 교양 있는 말처럼 드높이는 효과 말이다. 이를 테면, 똥오줌보다는 대소변이라고 표현하고, 단칸방보다는 원룸으로 즐겨 표현한다. 심지어 옥상을 루프탑이라고 바꿔 표현하는 세태는 달갑지 않다. 지붕윗집, 하늘아랫집이라고 하면 더욱 맛깔난다고 느끼는 건 나뿐이련가.


  암튼, 우리말의 쓰임새를 잘 살려준 만화책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단숨에 읽어버린 책이다. 원작은 <동사의 맛>이라고 한다. 내용도 원작의 맛을 충분히 살렸다고 한다. 그래도 '만화'와 '소설'은 분명 다른 맛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원작에서는 글쓴이 김정선을 주인공으로 하여 '남자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써내려갔는데, 만화에서는 화자인 주인공이 '여자'로 바뀌었단다. 그래서 책의 전체적인 뉘앙스가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고 만화책의 저자와 소설책의 글쓴이가 똑같이 말한 대목도 눈길이 가는 대목이었다. 그래서 조만간 원작 소설도 읽어볼 참이다. 만화에는 미처 담지 못한 더 많은 줄거리와 '움직씨'가 담겨 있다고 하니 단단히 벼르고 있을 테다.


  만화의 줄거리는 화자인 여자와 이야기속 주인공인 남자가 등장하면서 시작한다. 두 사람은 우연히 도서관에서 만나 심상찮은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여자의 직업은 '교정'을 업으로 삼았기에 문장을 더욱 매끄럽게 다듬기 위해 도서관을 찾았지만,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는 <국어사전>을 뒤적이며 '동사(움직씨)'만 골라서 정리하고 있었다. 그렇게 둘은 우연히 만나 일상에서는 흔히 일어날 수 없는 '낱말 뜻풀이'를 하는 의기투합을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런 억지스러움(?)이 이 책의 백미다. 움직씨만 골라서 뜻풀이를 하는 '설정'이 자연스럽게 우리말 움직씨를 새삼스레 들여다볼 수 있는 특별한 '기획'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자는 자연스럽게 우리말의 뜻과 더불어 다양한 '활용법'을 익히며 우리말 표현에 더욱 능숙해지게 되는 효과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미난 만화를 읽으며 우리말 지식도 풍부하게 해주니 <교양만화>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외국어를 배울 때에도 '동사'와 '활용'만 집중적으로 익혀도 기본적인 대화뿐 아니라 일상 회화도 가능해지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영어사전>의 뒷편에 '규칙동사'와 '불규칙동사'의 기본형과 활용법이 나와 있는 걸 손쉽게 확인할 수 있다. 비단 영어뿐만 아니라 다른 외국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말이다. 하물며 우리말도 '움직씨'만 제대로 익혀도 누구나 시인이 되고 수려한 문장을 매끄럽게 구사하는 교양인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 틀림없다.


  물론, 배운다고 모두 써먹을 수는 없는 법이다. 읽고 들을 때 머릿속으로는 이해를 해도 막상 말로 써먹고 글로 써내려가려고 해도 잘 되지 않기 일쑤기 때문이다. 이를 언어학자들은 '이해어휘'와 '사용어휘'라고 표현하며, "100개의 어휘 가운데 80개를 이해했어도 실제로 즐겨 쓰는 어휘는 고작해야 10~20개 남짓이다"라고 말한다. 그만큼 배우고 익힌 다음에 실제로 써보는 걸 즐겨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셈이다. 나도 논술을 가르치면서 말로, 글로 다양한 어휘를 자주 쓴다고 자부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새롭게 뜻을 알게된 움직씨가 2~30%는 되었다. 그래서 소설을 꼭 읽어보고 싶은 것이다. 만화에 담지 못한 움직씨가 소설에는 더 있을 테니 말이다.


  이제 한국어는 세계인들이 배우고 싶어하는 말글이 되었다. 드라마나 음악에 관심을 보이는 것을 넘어 '대한민국의 멋'에 흠뻑 빠져서 제대로 '한류의 맛'을 즐기고 싶어하는 이들이 세계적으로 점점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우리말의 멋과 맛을 동시에 배울 수 있는 '우리말책'이 나와서 반갑기 그지 없다. 더불어서 독자인 나도 우리말을 새롭게 배울 수 있어서 좋았고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책은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하는 외국인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기도 하다. 우리말의 뜻풀이뿐 아니라 다채로운 쓰임새까지 함께 익힐 수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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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미실
김별아 지음 / 해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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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불호가 갈리는 소설이다. 아무리 예술과 외설이 한 겹 차이라고 해도 <화랑세기 필사본>에 등장하는 미실에 등장에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색공지신'이라는 것도 생소하기 이를 데가 없다. 왕이나 왕족의 계승을 위해 색(色)으로 섬기던 신하라니...조선시대 왕실의 '후궁'이나 사가의 '처첩제'와도 사뭇 다르다. 일단 족보로 헤아릴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단 미실이 직접 모신 왕만 법흥, 진흥, 진지, 진평으로 4명이나 되고, 왕족까지 세면 부지기수이고, 신분의 고하를 따지지 않고 '신국(新國: 신라)의 도'를 행하였으니 미실의 치맛폭이 스치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인 탓이다.

 

  그렇다고 신라를 '색의 나라'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미실의 경우가 특별한 경우이지 대다수는 남녀 모두 정절을 '사랑의 으뜸'으로 여기며 도덕적 규범(유교사상)이 널리 행해지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다만, 인도의 <카마수트라>, 중국의 <소녀경>처럼 색으로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해주는 비법'이 있듯 왕실의 평안과 번영을 위해 '색공지신(혹은 왕비)'을 업으로 삼은 '대원신통'의 독보적인 비결을 온몸으로 타고난 미실이 등장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여겨진다. 다만, 후대로 넘어오면서 대대로 왕비를 배출한 '진골정통'의 계보는 뚜렷이 전해지는데 반해서, '대원신통'의 계보는 명맥부터 흐지부지한 것으로 보아, '색공지신'의 활약이 가히 넘사벽이었던 것으로 쉬이 짐작할 수 있다. 그런 탓에 <화랑세기 필사본>의 등장은 학계의 논란을 넘어서 일반독자들에게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보여질 정도라고 평가하면 좋을 듯 싶다.

 

  하지만 미실을 보는 관점을 넓혀보면, '진정한 양성평등시대의 표본'으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그녀의 치마폭을 거치지 않고서는 왕은 왕답지 않았고, 왕족은 왕족답지 않았으며, 화랑도 진정한 화랑이 아니었고, 남자는 남자가 될 수 없을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누구 하나 '미실의 행실'을 부도덕하다 탓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가 있었기에 신라가 '존재'할 수 있었다고 할 정도로 '여자는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은 시절'이었음에도 미실은 모든 것을 해냈다. 심지어 너무 잘 했다. 왕가에서 일상으로 벌어지는 '왕위쟁탈전'도 미실의 치맛폭 아래서 잠잠해졌으며, 삼국통일의 원동력이었던 '화랑제도'도 그녀의 탁월한 안목과 드넓은 애욕으로 인재를 발탁하고 화랑들을 통솔하였다. 화랑의 존재만 놓고 보면 혈기왕성한 젊은이들로 이루어진 집단 아니던가. 이런 젊은이를 통솔할 '풍월주' 가운데 미실의 사랑을 받은 이들이 적잖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한 여자, 아니 엄청난 위인으로 보아도 손색이 없을 테니 말이다.

 

  만약 미실이 존재하지 않았던들 삼국통일의 기틀이었던 화랑들은 전국산천을 누비며 낭도(화랑을 따르던 젊은남자)와 유화(화랑을 쫓던 젊은여자) 풍류나 즐기던 유약한 집단이나, 혈기왕성한 치기로 말썽, 난리, 소란이나 피우고 돌아다니는 패거리로 전락해버렸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화랑이 있기 전에 '원화'가 있어 두 패거리로 나뉘어 서로 시샘하고 질투하는 것으로 모자라 서로 죽이는 사건까지 벌어져 유명무실해졌던 선례를 보아도 그렇다. 그 '원화제'를 해체하고 '화랑도'로 새롭게 거듭나게 하는데 미실의 역할이 컸으며, 화랑도가 분열의 조짐을 보이자 미실, 스스로 원화가 되어 화랑의 분열을 막고 화랑의 명맥을 잇는 것으로 모자라 더욱 활약을 펼칠 수 있도록 안배한 것도 모두 미실의 공으로 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 모든 업적이 그녀의 원래 직업(?)인 '색공지신'으로 이뤄낸 업적이며, 때로는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색으로써 '신국의 도'를 완성하고 신라의 평안과 안녕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참 낯선 인물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왕조 500년'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유교적 전통이 우리 본연의 정신이라고 철떡같이 믿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신념까지는 아닐지라도 남자나 여자나 색을 드러내는 일은 삼가야 할 교양으로 알고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실의 존재는 21세기인 지금에도 여전히 논란거리다.

 

  그렇다면 작가 김별아가 그려놓은 '미실'은 어떨까? 역사속의 사실을 그대로 그려냈을까? 개인적으로는 '반반'이라고 본다. 김별아의 다른 소설인 <채홍>과 <어우동>에서처럼 '사랑'을 전반적으로 깔아놓으며 '문제적 여성'을 다루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차이점은 있다. <채홍>에선 문종의 둘째 부인 순빈 봉씨의 동성애를, <어우동>에서는 사대부의 부인의 자유로운 사랑을 다루면서 '억압된 조선사회'에 일침을 놓는 면이 있다면, <미실>에서는 그야말로 자유로운 영혼으로 가없는 사랑과 애욕을 불태우는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공통점이라면 작가의 '에로틱한 필력'일 것이다. 그래서 실제 역사속 미실과 소설속 미실의 간극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작가의 필력으로 잊혀진 인물이 다시 주목 받게 된 것으로도 이 소설의 가치는 높아질 수밖에 없고 말이다. 그건 그렇고 김별아의 필력은 어디까지 보여줄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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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2 - 1916-1920 3·1혁명과 대한민국임시정부 (박시백의 일제강점기 역사만화) 35년 시리즈 2
박시백 글.그림 / 비아북 / 201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35년>의 취지는 무엇일까? 일제강점기에 벌어진 '사실(史實)'을 열거하는 것뿐일까? 그래서 친일의 행적을 낱낱이 밝히고 독립운동의 의의를 되새기기는 기회로 삼는 것일까?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건국 102년을 맞이한 지금, '사실'을 밝히는 것에 만족한다면 너무 밋밋한 책읽기가 되고 말 것이다. 그보다는 좀더 깊은 울림으로 책을 읽어나가야 한다.

 

  대한민국은 역사상 유래가 없는 나라를 만들고 있다. 세계 열강의 식민지였던 나라가 35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독립을 쟁취한 역사가 없으며, 불과 100년 만에 선진국을 넘어 선도국이 된 사상 최초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경제적 발전은 눈부신 정도이고, 민주주의는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시민의식이 고취되어 있다. 물론 빠른 성장과 변화가 마냥 좋은 결과만 낳은 것은 아니지만 그 어떤 선진국과 비교해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가 아니라 더 나은 결과만 보여주고 있으니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자긍심을 가져도 부끄러울 것이 하나 없다고 해도 넘치는 찬사가 아닐 테니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을 들여다보면, 우리의 독립이 우리 스스로의 힘을 바탕으로 이루어낸 것이라는 점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어떤 이는 말한다. "우리 나라는 자력으로 독립을 이루지 못한 탓에 미국과 소련(러시아), 중국, 심지어 일본의 눈치만 볼 뿐, 아무 것도 독자적으로 해낼 수 없는 약소국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마냥 틀린 말도 아니다. 30년 전만 해도 쉬이 반박할 수 없는 '팩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30년만에 우리는 '불가능한 일'을 해내고 말았다. 숱한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경제적인 안정을 이루어냈으며, 민주화운동의 결실을 맺은 '촛불혁명'을 두 눈으로 확인했고, 전세계에 한류열풍을 불러 일으키며 각 분야에서 당당한 대한민국의 역량을 눈부시게 펼쳐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나라가 불과 100년 전에는 나라를 잃어버리는 '망국의 역사'를 간직했다고 믿겠느냔 말이다. 한편, 그러한 '아픔'을 알고나면 이 나라가 더욱 위대해져 보일 수밖에 없을 지경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 책을 들여다보면,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사가 더욱 값지게 보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친일의 길'을 걸은 이들을 발본색원, 일벌백계해야 겠다는 다짐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35년>의 두 번째 책은 1916년부터 1920년 사이에 벌어진 '사실'을 밝혀내었다. 크게 보아 '3·1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 사건을 펼쳐보였고, 폭발적인 3·1혁명의 결과인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과정을 낱낱이 밝혀냈다. 그리고 독립운동사 가운데 '사회/공산주의 진영의 독립활동'도 비교적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교과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립운동의 발자취가 담겨 있다. 그저 몇몇 '낱말'만 익숙할 뿐, 지난한 과정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진한 감동과 역동적인 모습을 교과서에서는 전혀 읽어낼 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 값진 책읽기가 될 것이다.

 

  먼저, '3·1혁명'에 대해 알아보자. 우선 그냥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절대 아니다. 독립운동가들의 치열하고 치밀한 '계획'하에 일어난 필연적인 혁명이었기 때문이다. 필연적이라고 표현한 까닭은 일제치하의 한민족들이 '한마음 한뜻'이었다는 것을 서로 확인할 수 있었던 덕분이었다. 따라서 '3·1혁명 이후의 독립운동'은 우리 민족의 참뜻이요, 참된 실천일 수밖에 없었다. 만약에 '3·1혁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더라면 우리는 끝내 독립을 일궈내지도 못했을 것이고, 독립을 했더라도 '다른 나라 덕분에' 이뤄낸 독립이라 지금의 멋진 대한민국은 꿈조차 꿀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정은 어땠나. 1차 세계대전이 종반으로 다다르면서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승전국은 패전국들의 전후처리를 결정하기 위해 '파리강화회의'를 개최했다. 여기서 그 유명한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된다. 민족자결주의란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 스스로 결정한다'라는 내용을 간단히 표현한 말인데, 그 당시 식민치하의 민족들에게는 '하나의 민족은 마땅히 독립국의 지위를 가진다'는 말로 들렸던 것이다. 허나 승전을 쟁취한 국가들에 속한 식민지에는 '해당사항'이 없다는 윌슨의 발뺌으로 그 취지가 퇴색하고 말았다. 허나 나라 잃은 설움에 독립의 의지를 활활 태우던 '우리 독립운동가들'에게는 바람 앞의 촛불일망정 불꽃을 살리기 위해 앞장 섰다.

 

  허나 위험천만한 행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도 '승전국의 지위'를 갖췄기 때문이다. 당시 세계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일본의 위상'은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견고한 것이었고, 승전국들의 이기적이고 뻔뻔한 행보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치졸한 것이었다. 얼마나 치졸한 결과물을 내놓았으면 20년만에 '또 다시 세계대전'이 벌어졌느냔 말이다. 그런 놈들끼리의 결말이 예상되는 와중에 '대한민국의 대표'가 파리강화회의에 도착했다.

 

  허나 대표가 도착했다고 달라질 상황은 아니었다. 그 당시 '한국'은 어디까지나 '일본제국'에 속해 있던 식민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대표자격부터 박탈 당했고 발언은 묵살 당하기 일쑤였다. 이런 처참한 상황에 반전을 준 '일대사건'이 바로 '3·1혁명'이다. 2000만 동포 가운데 절반이 혁명에 참여했으며, 국내 뿐만 아니라 국외에서까지 시위가 이어져 연일 전세계 신문지상에 '대서특필'로 장식되었으며 일제치하의 참상이 여실히 드러나며 일본의 식민통치가 전세계의 지탄을 받게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더욱 값진 것은 우리 민족 스스로 '독립의 의지'를 확인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동안 숨죽여 지냈지만 서로의 속마음은 '독립'이라는 두 글자를 품고 있었음을 백일하에 드러낸 셈이다.

 

  이런 혁명의 결과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중요한 것은 '대한제국'으로 멸망을 하였는데, 왕조가 아닌 '민국'으로 거듭난 형태로 '정부 수립'을 해냈다는 사실이다. 이는 우리 민족 스스로 '민주주의 정신'을 꽃 피울 수 있다는 저력을 확인하는 대사건이다. 이런 전차로 '3·1운동'은 운동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당당히 '3·1혁명'으로 완성이 되었다. 우리 민족의 저력을 만천하에 보여주고서 당당히 '독립국'임을 선언했으며, 그 결과로 '임시정부'를 내세움으로써 전세계에 '독립국'으로 당당히 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위대한 혁명을 부정하고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세력은 '친일적폐'임을 스스로 밝히는 셈이 된다. 우리의 역사는 반만년의 유구함을 간직하였고, 현재의 '대한민국'은 우리 민족 스스로 독립의 의지를 천명하며 건국을 했음을 '3·1혁명'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 증명한 셈이다. 그런 까닭에 2021년인 올해는 '대한민국 건국 102년'으로 셈해야 마땅하다. 이는 대한민국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는 명백한 사실이며, 우리의 거룩한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부정하고서 '지금, 대한민국의 영광'을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의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사회주의/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이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마르크스의 이론을 바탕으로 '소비에트 공산혁명'도 착착 진행중에 있었다. 마르크스의 이론은 그당시 식민치하에 놓인 혁명가(독립운동가)들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그당시 세계열강의 제국주의가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펼쳐졌기 때문이다. 이에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낱낱이 밝혀내며 '공산혁명'을 주장했는데, 제국주의(자본주의)에 치를 떨던 전세계인들에게 '마르크스 이론'은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 독립운동가들도 상당수는 '사회주의 계열'이었고, '공산주의 계열'이었다. 이들이 꿈꾸던 독립국은 모두가 평등하고, 모두가 행복한 나라였지, '지금의 북한'과는 사뭇 다른 나라였음이 분명하고, 그렇게 짐작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이들이 '해방이후 월북과정'에서 대다수가 김일성에 의해 숙청된 것만 보아도 그렇다. 그런데도 해방직후 남한에서는 이들에 대해 눈 감아 버렸고, 상당기간 동안 눈 가린 채하고 있었던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남북의 '이념적 갈등' 때문에 벌어진 안타까운 일이라고 치부한다면, '이념적 갈등'을 넘어선 지금에라도 당당히 밝혀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꿈꾸던 멋진 독립국이 '지금, 대한민국'에서 실현되고 있다는 것도 알려줘야 할 것이다. 낡은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었지만 '지금'은 훌훌 털어버리고 세계속에 당당하고 멋진 대한민국으로 거듭나고 있다고 말이다.

 

  지금, 대한민국이 멋진 나라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우리 민족 스스로 보여준 역량 덕분이다. 늘 세계 최고는 아니지만 위기에 닥칠수록 빛나는 업적을 보여주며 어느 나라도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나라임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국민들이 만든 나라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태극기를 든 손은 자랑스러워야만 한다. 총칼로 위협해도 물러서지 않고, 하나뿐인 목숨을 잃는 위기속에서도 당당히 펼쳐보였던 태극기이기 때문이다. 우리 손으로 이뤄낸 나라를 사랑한다면, 진정 사랑한다면 '3·1혁명'때처럼 태극기를 펼쳐라. 그 손으로 만든 나라이고, 그 손으로 만들 대한민국이기 때문이다. 바로 당신이 그 손의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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