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보는 일리아스 - 트로이의 노래 한빛비즈 교양툰 22
동사원형 지음 / 한빛비즈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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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문화의 원형이라 불리는 <일리아스>는 '고전 중 고전'이라 불려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왜냐면 '고전이란 제목은 알지만 읽지 않은 책'이라는 고전에 대한 정의가 딱 맞아 떨어지는 책이기 때문이다. 분량이 너무 많은 탓도 있지만 대부분 읽다가 지쳐버린 경우가 더 흔할 것이다. 솔직히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일리아스>보다 훨씬 더 많은 분량을 자랑하는 책들을 섭렵했던 분들마저 <일리아스>는 읽다가 도통 '무엇'에 관심을 쏟아야 완독할 수 있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고 하소연하곤 했다. 물론 나도 여기에 속한다. 그럼에도 책의 내용은 얼추 다 알고 있어서 '맥락'은 파악하고 있지만, <일리아스>를 관통하는 주제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더랬다.

 

  그러다 이 책을 읽으니, 주제가 바로 '분노'란다.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분노'가 점층되었다가 한순간에 '해소'가 되면서 이야기를 끝맺는 '그리스식 연극'을 이해하면 <일리아스>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지 간파할 수 있다는 조언을 듣는 순간, 무릅을 탁 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읽기에 도통 무슨 이야기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까닭도 지은이 호메로스가 <일리아스>를 쓸 때, '그리스인들'을 대상으로 썼던 탓에 '그리스인이라면 다 알만한 상식'적인 내용은 행간에다 숨겨두고 맥락만 남겨놓아 '상식'이 부족한 독자들이 읽을 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설명에 고개를 절로 끄덕일 수 있었다. 결코 내가 멍청했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단지 '무식'했었을 뿐이었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시 한 번 <일리아스>에 도전할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일리아스>에는 왜 '분노'를 담았던 것일까? 어차피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쪽은 그리스쪽이었으니 '환희'를 담아도 좋았을텐데 말이다. 10년이나 질질 끈 전쟁이었고, 전반적으로 고전을 면치 못한 전쟁이었으나 '트로이 목마'를 심어두고 끝내는 승리를 거두었지 않느냔 말이다. 그토록 어려운 일을 해냈으니 초반의 고전과 역경을 지나 끝끝내 달콤한 승리를 거두었다는 '기쁨'을 노래하면 되었을 것을, 왜 하필 '분노'를 담았느냔 말이다.

 

  어줍잖은 지식을 나름 풀어본다면, 내 생각엔 '그리스인들의 기질'이 달달한 해피엔딩보다는 카타르시스를 뿜뿜할 수 있는 비극을 좋아라하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여기저기 그리스의 저작들을 살펴보면, 유독 '비극적인 요소'만을 참으로 좋아한다는 걸 느낄 정도 거의 대부분이 '비극'이다. 그리고 그런 '비극'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론도 한결같이 '그리스인들의 삶'이 녹록치 않았던 탓에 그들의 현실보다 더 잔혹한 비극을 보면서, '아, 내 현실이 비참하다고 여겼는데, <비극>에 비하면 슬픔 축에도 끼지 못하겠구나. 그나마 '내 현실'은 아름다웠어'라고 새삼 깨닫는 효과를 낳는다고 말하곤 한다. 그런 탓에 대승리를 거둔 '트로이 전쟁'에서 기쁨과 환희를 쏙 빼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승리에서 기쁨과 환희를 빼면 '분노'만 남는 것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분노만 남았기에 쓴 것이 아니라 '분노'를 통해서 뭔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들의 분노는 왕왕 '인간에게 재앙을 내린다'로 귀결되곤 한다. <일리아스>에서 신들은 '그리스편'과 '트로이편'으로 나뉘어 다툰다. 하지만 신들끼리 '직접적'으로 싸우진 않는다. 어차피 '불멸의 존재'인 신들이 서로 싸운들 '불멸'로 남을 것이고, 그러면 싸움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싸움은 '한정적인 삶'을 사는 인간들의 몫이다. 이건 필시 '필멸자들의 싸움'이어야만 했다는 것이다. 사실 '분노'라는 감정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옅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신들에게 분노는 어울리지 않는다. 언젠간 '멈춰야' 하는데, 불멸의 존재가 분노를 거두어들이는 모양새가 어쩐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멸자들의 분노'는 좋은 이야기꺼리가 된다. 분노를 적절히 다스리지 못하고 지나치면 '죽음'이고, 반대로 분노할 상황에도 적절히 분노하지 못하면 '치욕'이니, 분노했다가 적당한 때에 사그라들게 할 수 있다면 '화해'와 '용서', 그리고 '관용'이라는 멋진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된다.

 

  다시 <일리아스>로 돌아가서, 첫머리에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서막을 찢어버리고 나서 대단원에 아킬레우스가 헥토르의 시신을 그의 아버지 프리아모스에게 되돌려주는 것으로 끝맺음을 한다. 이로써 '그리스인'으로 분한 아킬레우스가 분노하면 얼마나 무서운 존재가 되는지 잘 보여주었다가 적당한 때에 분노를 거두어 정말 멋진 인간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전반적인 주제가 '그리스인들은 참 멋져'로 장식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닐지 조심스럽게 짐작해본다.

 

  하지만 그건 2000년도 훌쩍 지난 옛날에나 먹힐 수법이고, 오늘날에도 <일리아스>가 널리 읽혀야만 하는 까닭이라고는 보기 힘들 것이다. 그럼 오늘날에 독자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공감할 수 있는 주제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서양문화의 현재를 이해하는 '거울'로 삼기 위해서일 것이다. <일리아스>는 전쟁 서사시다. 죽고 죽이는 잔혹한 노래라는 얘기다. 그리고 죽을 것 뻔히 알면서도 '명예'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싸우다 끝내 죽는다. 그리고 죽어서 차갑게 식어버린 주검을 높은 단 위에 올려놓고 온갖 영예로운 행위를 짜아낸다. 명예로운 이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끔 말이다. 비장하고 거룩하기까지 이를 데가 없을 정도로 짜낸다.

 

  그런데 그토록 수많은 영웅들이 '명예'롭게 죽어가는 이유가 고작 '그리스 최고 미녀, 헬레네' 때문이란다. 최고의 미녀를 납치 당했으니 모든 영웅들을 이끌고 되찾겠다고 나선다. 전쟁을 벌인 '그리스의 변명'치고는 너무 빈곤하지 않은가. 한편, 전쟁의 빌미를 내어준 트로이도 기왕 빼앗은 미녀를 되돌려주면서 전쟁을 멈추려는 지혜를 발휘하지 못한다. 처음엔 그럴 마음도 있었지만 '직접' 보니 '전쟁'이 날만도 하다는 듯 공감해버린다. 이러면서 '분노'를 노래한다. 화가 나니 풀어야겠다. 죽을 때까지 싸우다보면 화가 풀릴 듯 싶다는 '공격측'과 덤빌테면 덤벼봐라. 네놈들의 어처구니 없는 공격에 당하고보니 열받아서 네놈들을 씹어 먹어야 분이 좀 풀릴 것 같다는 '방어측', 둘 모두 '이성'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나서 양쪽 모두 웬만큼 죽고나서야 '이성의 끈'을 찾아 화해의 재스처를 내민다.

 

  여기까지 <일리아스>는 대단원을 내렸지만, 실제 '역사'는 트로이의 몰락을 맺고 '오디세우스의 방황'과 '아이네이아스의 모험'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주인공인 아킬레우스는 어이없게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그렇게 트로이는 망하고 그리스는 흥했지만, 트로이의 후손인 아이네이아스는 로마의 뿌리가 되어 다시금 그리스가 몰락하게 되는 '흥망성쇠의 바퀴'를 돌릴 뿐이다. 그 거대한 바퀴 아래서 '분노'는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말이다. 마치 사마귀가 수레바퀴 앞에서 폼 잡고 서는 것 같지 않은가.

 

  오늘날의 서양문화는 '패권국가'로 거듭나면서 제국주의와 식민지쟁탈, 그리고 세계대전이라는 끔찍한 비극 위에 군림하고 있다. 아직도 '힘의 균형'은 서양에 기울어 있지만, 인류의 평화와 공영을 위해서 바람직한 모양새는 아니다. 그들의 찬란한 기술문명은 대량살상무기를 손에 쥐어주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 손에 쥔 위험한 무기를 어쩔 셈인가? 아킬레우스 앞에 무릅을 꿇은 헥토르의 아버지처럼 용기를 내야만 한다. 분노에 사로잡혀 명예로운 이의 주검을 욕보이는 만행을 저지른 아킬레우스도 끝내 '인간다움'을 되찾고 용서를 베풀었다. 강자가 취할 수 있는 가장 멋진 행동일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일리아스>가 보여준 '분노'를 직관하면서 '분노'를 삭힐 줄 아는 인간다움을 깨달아야 한다. 인류는 어리석게도 '분노'를 해결의 실마리로 선택하곤 하지만 '분노'로 해결될 일은 아무 것도 없음을 잘 안다. 오히려 '분노'를 내려놓음으로써 일이 잘 해결되는 것을 우리는 경험상 익히 알고 있다. <일리아스>에선 신들이 정해놓은 운명에 따라 인간들이 어쩔 수 없이 '따르는 것'을 보여주었지만, '운명의 수레바퀴'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혹여 '운명'이 있다한들 오로지 인간들의 '선택'에 좌지우지될 뿐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미래는 우리에게 달렸다는 말이다.

 

  고전의 위대함을 맹목적으로 암기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고전을 읽을 필요가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고전을 읽되,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하게끔' 되살려 읽어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만약, 오늘날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고전이라면 읽을 필요도 당연히 없다. 그런데 수많은 이들이 <고전>은 필독서라고 부른다. 왜일까? 오늘의 문제를 풀기 위해 어제의 참고서가 필요한 까닭이다. 내일 이루어질 '해결'을 미리 알 도리는 없기에 우리는 '과거'를 더듬어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고전>은 필독서라 불린다. 그리고 꼭 읽어보고, 읽기 힘들면 '해설서' 찾아보고, 선배들의 '조언'도 귀담아들어보고, 그런 뒤에 '나만의 생각'으로 <고전>을 해석하고 정리하길 바란다. 물론 정답은 없다. 오직 당신의 생각만이 옳을 뿐이다. 다른 이의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이면 '생각의 빛'이 더욱 찬란해질 것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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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 그들은 왜 칼 대신 책을 들었나 서가명강 시리즈 14
박훈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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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가명강' 시리즈를 구매한 지도 꽤나 오래전에 지났고, 책꽂이에서도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장식해두었건만, 좀처럼 읽지 못하고 있다. 날마다 출근길에 '책등'을 바라보며 읽기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을 상기시키곤 하지만, 늘 다른 책에 밀려 읽지 못하고 있다. 쟁여두고 읽지 않은 책이 어찌 이 책뿐일까. 허나 요즘 오래 묵힌 책장을 하나하나 꺼내면서 책정리를 하고 있으니 조만간 가뿐해진 마음으로 휘릭 읽어보겠다고 '또 한 번' 다짐해본다.

 

  저자 박훈은 '일본사'에 대해서 꼭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불편한 이웃이라하더라도 '알아야' 대비할 수 있으며, '알아야' 유리하게 써먹을 수 있기 때문이란다. 분명 맞는 말이지만, 고작 '일본따위'에게서 배울 것이 있겠느냐는 생각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생각에도 일침을 놓는다. "어느 나라 역사이건 간에 배울 것이 없는 역사는 없다"고 말이다. 그리고 기왕 배울 요량이면 '철저히' 배우려는 자세가 아주 중요하다고 다시 강조한다. 여기까지 듣고 보니 더없이 옳은 말이라서 다시금 '일본사'에 대한 호기심을 발동시켜 보기로 했다.

 

  허나 '일본사'가 좀 껄끄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2천 년이 넘도록 우리나라 옆에서 알짱거리며 기회를 엿보다가 허를 찌르며 알멩이만 날름 빼가며 '받은 것 없이 주기만' 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얻는 것 없이 빼앗기기만' 한 것도 같아 기분이 상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조선시대 이전까지는 우리보다 열악하다 못해 조악할 지경이라 솔직히 배울 것도 없고, 이후로는 배은망덕하게도 우리나라를 침략해서 치욕스런 수모를 겪게 만들었기에 '일본사'는 배우다가 열폭하기 일쑤다. 그런데도 '일본사'를 꼭 배워야 한다면, 저자는 '명치유신(메이지유신)'부터 공부하라고 귀띔해주었다. 확실히 일본이 급속도로 '변화'를 보이며, 빠르게 '발전'을 하고 있어 배울 맛이 나는 지점이기도 하고, 오늘날의 일본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가장 중요한 시발점이기 때문이란다. 역시나 이 말에도 수긍해버렸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말하는 '명치유신의 핵심'은 무엇인가. 임진왜란 이후 대략 360년간 실제적인 권력을 갖고 있던 '에도 막부(도쿠가와 막부)'가 일본의 왕(천황, 이하 '일왕')에게 실질적인 권력을 이양(대정봉환)하면서 '근대 일본'으로 변환됨과 동시에 점점 조여오는 '서양의 침탈'과 극심한 '내부의 혼란'을 대외 팽창으로 극복해보려는 의욕과 야심이 복합적으로 표출된 일대 개혁으로 볼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이 책에서는 '명치유신'을 4인방을 중심으로 해부하고자 했다. 바로 '요시다 쇼인'과 '사카모토 료마',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다.

 

  요시다 쇼인은 근대일본의 상징 같은 존재다. 일본의 '명치유신'을 이끌었던 인물들이 거의 '쇼인의 제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스승이라는 작자가 가르친 덕목 가운데 하나가 '침략'이었으니, 근대 일본이 제국주의에 물들어 '이웃나라'를 침공한 원흉이 바로 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좋은 것을 가르쳐도 부족할 판에 제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해도 괜찮다는 식으로 가르쳤으니 통탄할 노릇이다. 그런 까닭에 요즘에도 일본의 극우파들은 '쇼인의 사상'을 내세우며 일본의 단결을 주장하고 이익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까워하지 말고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망언을 일삼곤 한다. 우리가 일본의 침략본성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이 사람'을 철저히 분석해야 할 것이다.

 

  사카모토 료마는 그렇게 유명인사는 아니었으나 일본의 국민작가로 알려진 시바 료타로가 쓴 <료마가 간다>가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오늘날까지도 일본인들의 마음속에 새겨진 개혁인물이다. 료마는 근대일본의 핵심인물을 많이 배출한 조슈번과 사쓰마번 출신이 아니라, 도사번 출신이다. 하지만 료마는 일찌감치 '번 탈주'를 시도해 '낭인' 신분으로 명치유신의 한복판에서 대활약을 했으니 '아싸'와 '인싸'를 오가는 대활극을 보여준 유명인이다. 하지만 쇼인과는 다르게 '대외무역'을 주장하면서도 '침략'에는 동조하지 않은 인물이라 우리로서도 호의적인 인물로 봐도 무방하단다. 소프트뱅크의 손정의도 일찍이 '료마'를 존경한다고 표방했고, 료마가 말했다는 "이 세상에 태어났다면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다"라는 말을 꼭 집어 예를 들었다고 한다. 만약 근대일본이 료마의 사상으로 나아갔다면 '동양의 평화'를 이루는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했을지도 모르겠다. 암튼, 우리가 주목하기에 바람직한 인물이라고 보면 좋겠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라스트 사무라이'로 곧잘 표현한다. 그는 서양의 문물을 접하고서 열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행보를 보이면서도, 정작 '일본의 전통'을 지키는 쪽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는 상반된 활약을 보여주어 혼란스럽기 그지 없다. 어찌 보면 '극단적인 인물'로 중간이 없는 사람의 대명사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테지만, '명치유신'의 주역으로 개혁 드라이브를 거침없이 시도했으면서도 끝내는 '사무라이'로 남아 죽음을 자초한 인물이다. 우리가 일본을 바라보면서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우호적인 듯 싶다가도 품속에서 칼을 꺼내들고, 속내를 알 수 없어 바짝 긴장하고 있다가도 난데없는 헛발질로 사람을 놀래키는 것이 '일본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진의를 파악하기 힘들고 당췌 이해할 수도 없는 일본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서 꼭 연구해야 할 인물임에 틀림없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근대일본'에 마침표를 찍은 인물이다. 도중에 암살을 당하긴 하지만, 일본은 끝내 도시미치의 구상대로 '진격'을 한다. 그래서 친구였던 다카모리를 죽음으로 내몰고, 개혁 드라이브에 박차를 가해 완성을 시켜나갔다. 그의 모토는 '서양을 배워 강한 일본을 만들자'였고, 명치유신 이후 일본은 도시미치의 계획대로 착착 진행된다. 우리가 보기에 그가 '정한론'에 반대한 점을 들어 보기에 좋은 느낌도 들지만, 그가 반대한 까닭은 어디까지나 '아직 준비부족'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막부의 잔당들이 일으킨 '사무라이 봉기'에 싹쓸이 작전을 펼치는 잔혹함 면을 확연히 드러냈지만, 이후 '대만 문제'에서처럼 신중한 모양새를 띤다. 허나 준비를 마치자 '청일전쟁'부터 1945년 패망 때까지 줄기차게 전쟁을 일삼는데, 이게 '도시미치의 계획'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책의 내용은 여기까지다. 근대일본의 방향키를 알 수 있는 '명치 유신지사들과 일왕의 속셈', 더 나아가 '일본국민들의 속마음'까지 엿볼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 가운데 유명한 '4인방'을 중심으로 분석을 해나갔지만, 일본국민들이 유독 '4인방'에 주목하는 까닭을 짐작해보면 얼추 비슷한 맥락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이런 이웃을 두고 있는 대한민국은 어찌해야 할까? 무엇보다 '평화적인 해법'으로 마련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당장 분이 풀리고 일이 손쉽게 해결할 것처럼 보이는 '전쟁'과 '팽창'은 근대일본의 패망에서 보여지듯 망조만 가득한 해법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어디까지나 대한민국은 인류의 공영과 평화의 선두주자다. 전세계가 대한민국의 발전에 주목하는 까닭도 바로 이 점이다. 과연 대한민국은 전쟁과 침략의 역사를 쓰지 않고도 선진국의 대열에 올랐으니, 인류의 공영과 평화도 '그런 방식'으로 해법을 제시하고 실현시킬 것인지 말이다. 그 어려운 일을 또 해내는 대한민국을 떠올리며 '일본사'를 낱낱이 파헤쳐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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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다리 아저씨 2 (반양장) - 그 후 이야기 더클래식 세계문학 컬렉션 (한글판) 90
진 웹스터 지음, 서현정 옮김 / 더클래식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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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다리 아저씨>의 감동이 컸던 탓에 '그후 이야기'라는 부제를 보고 망설임없이 구매하고 말았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주디와 저비스의 사랑이야기가 아닌 주디의 단짝 친구였던 '샐리 맥브라이드의 사랑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샐리가 쓴 편지들' 속에서 주디의 이야기를 얼마나 애타게 찾았었는지 말로 다 하지 못한다. 허나 끝내 '주디가 쓴 편지'는 찾을 수 없었다. 온통 샐리의 편지들뿐이었고, 그나마 주디에게 쓴 편지조차 얼마 되지 않았다. 그렇게 큰 실망을 하면서 읽어나가는 도중에 '새로운 사랑이야기'를 발견하면서 빠르게 몰입해나갈 수 있었다. 바로 '샐리 맥브라이드'가 새로운 사랑에 빠져드는 과정이 '자신이 직접 쓴 편지'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샐리가 사랑하는 남자는 누구였을까? 그 이야기는 잠시 나중으로 미루고...

 

  1권에서 주디는 고아원에서 자란 소녀로 등장했고, 뜻밖의 후원자가 보내준 든든한 후원에 힘입어 반듯한 숙녀로 성장해서 사랑에 성공하는 결말을 보여주었다. 전세계 수많은 소녀들이 동경하는 멋진 남자와의 결혼에 성공하는 '현대판 신데렐라'가 <키다리 아저씨>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2권인 이 책도 '현대판 신데렐라'의 내용을 고스란히 담았을까? 그건 아니다. 2권의 주인공인 샐리 맥브라이드는 20세기 초반의 여성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여성도 남자 못지 않게 '사회적 역할'에 충실할 수 있고, 고등교육을 받고서도 좋은 혼처를 잡아 결혼하고 '한 남성의 아내' 역할로 만족을 해버리는 당시의 여성관을 싹 뜯어 고치는 내용으로 이 책을 장식했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일'에 만족하는 당찬 여성이 자신의 꿈을 꺾지 않은 채 '사랑'에도 성공하는 내용을 담아서 재미와 감동을 놓치지도 않았다.

 

  줄거리를 살짝 보자면, 주디는 어릴 적 자랐던 고아원의 새원장으로 샐리 맥브라이드를 점찍었다. 물론 '샐리의 동의'가 필요한 조치였으나, 주디는 샐리가 '고아들의 원장'으로 제격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샐리도 당시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좋은 남자'를 만나 성대한 결혼식을 치르는 것을 바라고 있었다. 이미 결혼 상대로 '고든'을 선택해놓은 상태고 말이다. 나중의 일이지만 둘 사이는 결혼을 약속하며 약혼을 하기도 했다. 뉘앙스에서 이미 눈치챘겠지만 둘 사이는 '약혼까지'만이었다. 그런데도 샐리는 '환상의 짝꿍'을 찾는데 성공했고, '자신의 일'까지 놓치지 않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데 성공한다. '팬들턴 부부(주디와 저비스)'에 이어 두 번째로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완성되는 결말인 것이다.

 

  이렇게 일과 사랑을 모두 잡은 '커리어우먼'의 이야기가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실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동화'같은 이야기라서 그런 걸까? 실제로 현실판 '맞벌이 부부'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어가기보다 '처절한 부부싸움'이 날마다 일어나는 끔찍함만 떠오르곤 한다. 자아실현에 성공한 커리어우먼들은 행복한 결혼을 꿈꾸며 '사랑스런 남자'와 달콤한 연애에 빠지지만, 결혼과 동시에 모든 '환상'은 다 깨져버리고 '자신의 일'까지가 사랑해줄 것만 같았던 남편은 온데간데 없고 '시월드'의 등쌀에 기도 제대로 펴지 못하고 눈치만 보는 며느리가 되어 버리고,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가 주는 '3중 스트레스'는 여성의 건강과 젊음, 그리고 '삶, 그 잡채'를 몽땅 말아먹는 '괴물'처럼 느껴지곤 한다. 물론 이렇게 끔찍한 현실만 있지는 않다. 부부사이에 알콩달콩 깨가 쏟아지기도 하며, 자식들이 건내주는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성에게 연애와 결혼, 그리고 임신, 출산, 육아, 이 모든 것이 아름다울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물론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고 '일'도 포기하지 않는 조건을 충족하면서 말이다. 결국엔 '풍족한 돈'인 걸까? 풍족한 돈을 한방에 해결하기 위해 '돈 많은 남자'를 꼬셔야 하는 것이고 말이다. 그래서 결국엔 '돈 많은 남자'를 꼬시기 위해 아름다워져야 하고 화장하고 치장하고 다이어트에, 성형까지 해야하는 '현대판 신데렐라'가 되어 차가운 유리구두에 구겨넣어야 하고, '현대판 백설공주'가 되어 쓰디쓴 독사과까지 씹어 삼켜야하는 것이 '현대여성의 굴레'란 말인가?

 

  현대여성이 일과 사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어렵지 않게 잡기 위해서는 '여성의 몸'을 뜯어고치거나 무조건적인 '여성의 희생'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남성의 의식구조'를 바꾸고 '사회구조'를 바꾸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어차피 인류의 멸종을 막기 위해서라도 '여성의 출산'은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런데 현대여성이 '출산기피 현상'을 보이는 까닭은 앞서 열거한 끔찍한 현실 때문이다. 거기에 '경력단절'이라는 복병까지 여성을 옭아매고 있는 현실이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여성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사회적 인식'이 개선되어야만 한다. 누구보다 '남성'에게 말이다.

 

  이런 얘기를 꺼내면 남성들은 볼멘소리를 한다. '역차별'까지는 아니더라도 직장내에서 '선의의 경쟁(?)'를 무너뜨리면서 '여성의 이익'을 챙겨주는 불공정한 처사라면서 말이다. 이를 테면, '임신, 출산, 육아 휴직'으로 1년~2년 동안 '휴직'을 하고서도 아무런 불이익도 없이 '복귀'할 수 있다면, 여성들은 첫째, 둘째, 셋째를 연이어 낳으면서 10년간 경력단절 상태에서도 당당히(?) 복직을 해서 그동안 남자직원들이 쌓아놓은(?) 달콤한 이익만 챙겨가게 되니 불공정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여성이 결혼과 임신, 출산, 육아 뿐만 아니라 '집안일'까지 도맡아하면서 아내와 엄마 역할까지 해내면서 낮에는 '직장일', 저녁엔 '집안일', 밤에는 '마담일(직장스트레스로 고단한 남성의 술접대)'까지 몽땅 해내는 완벽한 여성과의 결혼을 꿈꾸는 못난이들의 망상엔 한없이 관대해져버리는 찌질한 남성들이라니...

 

  "입장 바꿔 생각해봐"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결국엔 '남성들의 의식구조 개선'이 절실하다. 남자가 임신과 출산을 할 수는 없을테니, 결혼을 한다면 '집안일'과 '육아' 정도는 전담하는 것도 바람직할 것이다. 직장 스트레스는 더는 남성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젠 '맞벌이'가 기본 옵션이니 여성들도 직장 스트레스가 장난 아닌 셈이다. 그러니 스트레스도 부부가 '함께' 풀 수 있는 아이디어를 짜내야 한다. '주5일제'가 아닌 '주4일제'도 좋은 방법이다. 우리의 윤똘께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토욜과 일욜'만 쉬는 것이 아니라 '수욜'도 휴식을 할 수 있게 지정해버리는 것이다. 저출산 문제를 들먹이며 '여성의 희생'만 요구할 것이 아니라 '연인과 가족이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을 늘려서 다른 대안을 내놓을 수 있는 희망적인 정책을 구상해야 할 것이다. 동화같은 사랑이야기에 뭔 정책연구 같은 소리나 늘어놓았지만, 아이들과 토론수업을 진행하면서 이야기한 내용의 일부를 옮겨 적어보았다.

 

  다시 말하지만, <키다리아저씨 2>는 사랑이야기책이다. 그냥 아름답기만 한 이야기가 아니라 '일과 사랑'을 모두 놓칠 수 없었던 진취적이고 멋진 현대여성이 펼쳐낸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다. 거기에 113명의 아이들과 함께 하는 행복한 나날이 펼쳐지는 가슴 따뜻한 이야기도 놓쳐선 안 될 것이다.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아가씨'가 고아원 원장으로 부임하면서 펼쳐지는 사건과 사고는 덤이다. 그리고 멋진 어른이라면 '자기 앞에 놓인 힘겨움'을 외면하지 않고 당당히 돌파하듯 해결해내야 하고 말이다. 물론 어린 주디처럼 샐리에게도 팬들턴 부부라는 '든든한 후원자'가 있다. 전편의 '키다리아저씨'를 연상케 하는 조력자도 있고 말이다. 샐리는 바로 그 '조력자'와 끝내 아름다운 사랑을 맺고 만다. 처음엔 무뚝뚝하고 불친절하며 샐리가 하는 일마다 방해하는 나쁜 사람이었지만 말이다.

 

  전반적으로 좋은 내용의 훌륭한 책이었다. 고아원을 운영하는 이들이 '우생학'과 같은 사이비과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장면이 조금 끔찍하긴 했지만, 이 소설이 쓰여졌던 20세기 초반에는 '우생학'도 최신 과학의 범주에 속했으니 그리 탓할 것은 못 된다. 이 책이 쓰인 지 얼마 되지 않아, 히틀러의 나치와 일제의 군국주의가 '우생학'을 빌미로 끔찍한 대학살을 자행한 것을 지은이는 몰랐을테니 말이다. 아이들과 함께 읽을 땐, 살짝 '독서지도'가 필요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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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램덩크 신장재편판 3 - 첫 시합 능남전 1
이노우에 타케히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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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시합이다. 상대는 '능남고'로 일본고교전국대회 진출을 위해 현내 4강 전적을 가진 막강한 팀이다. 그 주역이 바로 슈퍼스타 '윤대협'으로 채치수 원맨팀인 북산을 상대로 홀로 47점을 넣고 쓰라린 패배를 안겨준 능남고이기도 하다. 그런 라이벌전 성격을 갖고 있는 팀과 연습시합을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북산고는 달라졌다. 채치수 원맨팀이라 불렸던 작년과 달리 슈퍼루키 서태웅과 자칭천재 강백호가 1학년생으로 합류했기 때문이다. 이제 북산은 채치수와 서태웅, 그리고 강백호를 주축으로 완전히 새로운 팀이 되었다.

 

  하지만 능남고도 만만찮다. 작년에 북산고를 상대로 승리를 했지만 '센터'끼리의 대결에서는 북산에게 처절한 패배를 당한 주장이자 센터인 능남의 변덕규가 복수전을 다짐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작년에 1학년이던 슈퍼스타 윤대협이 2학년으로 여전히 건재하다. 아니 1년 사이에 무서울 정도로 더욱 강해졌다. 복수를 다짐하며 절치부심한 변덕규와 더욱더 강력해진 윤대협을 상대로 북산은 얼마나 선전할 수 있을 것인가? 상대전적만 보아서는 예선탈락한 북산의 절대적 열세지만, 신입부원의 합류로 북산은 완전히 달라졌다. 특히 주장 채치수와 '리바운드 훈련'을 따끈따끈하게 한 강백호는 정녕 어느 정도의 성과를 보여줄 수 있을까?

 

  이렇게 능남고와의 첫 연습시합은 뜨겁게 불타오른다. 그런데 농구라는 경기가 선수 몇 명으로 완전히 다른 팀으로 변신하는 것이 가능한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가능하다. 왜냐면 농구경기는 5명이 하기 때문에 애초부터 '소수정예'로 운영되는 탓이다. 심지어 단 한 명의 특출한 선수가 코트를 지배해버리는 경기도 수두룩하다. 이처럼 농구경기는 5명의 선수를 어떻게 운영하느냐에 따라서 변화무쌍하고 다이내믹한 경기를 보여줄 수 있기에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래서 농구에 관한 '상식'을 조금만 알아도 농구경기를 더욱 즐겁게 관람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농구선수의 포지션에 대해서 조금 알아보고 넘어가자.

 

  먼저 1번은 '포인트 가드'다. 경기를 조율하고 전술을 지시하는 '코트 위의 감독'으로 불리며 주로 볼을 배급하는 역할을 맡기 때문에 '스피드'와 '농구센스'가 매우 중요한 포지션이다. 북산에서는 '송태섭'이 맡고 있으며, 키가 작아도 가능한 포지션이기 때문에 "농구는 신장이 아닌 심장으로 한다"는 말을 증명하는 유일한 포지션이다. 2번은 '슈팅 가드'다. 정확한 슈팅 능력으로 팀의 주득점을 담당하는 포지션이다. 북산에서는 '정대만'과 '박준호(안경선배)'가 맡고 있다. 특히, 3점슛을 연속해서 넣으며 역전의 발판이 되거나 승부의 쐐기를 박는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에 '믿을맨'이라 불리기도 한다. 3번은 '스몰 포워드'다. 외곽 슛과 속공을 주무기로 코트의 안팎을 주름잡는 포지션으로 북산에선 '서태웅'이 맡고 있다. 왠지 모르겠지만 잘생긴 선수들이 많이 맡고 있어 '소녀팬'들을 몰고 다니는...쿨럭쿨럭

 

  4번은 '파워 포워드'다. 골대와 페인트 존에서 치열한 몸싸움을 벌이는 포지션으로 덩치와 스피드를 겸비한 선수가 도맡는 포지션이다. 북산에선 '강백호'가 맡는(?) 포지션이다. 5번은 센터다. 골대밑을 장악해 리바운드를 선점하고, 상대의 슈팅을 블록하는 포지션이다. 북산에선 단연 '채치수'다. 팀내에서 4번과 5번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코트를 스피디하게 뛰어다니는 경우도 있는 반면, 확연히 구분이 될 정도로 뚜렷하게 구분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만큼 '골밑'과 '페인트 존'에서의 몸싸움과 공다툼은 피와 땀이 튀길 정도로 치열하다.

 

  그렇다면 한 팀에서는 5개의 포지션이 딱 정해야 경기를 할 수 있을까? 그건 아니다. 센터만 5명을 이루어서 경기를 할 수도 있고, 포인트 가드 5명으로 이루어진 팀이 존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송태섭 5명이 뛰거나 채치수 5명이 뛰는 팀이 잘 운영될 리 없기 때문에 '선수교체'를 적절히 하면서 상대팀의 전술에 맞춰 적절히 선수를 교대로 뛰게 하다보니 5개의 포지션이 골고루 균형을 이루면서 경기가 진행되기 마련이다. 때로는 '정해진 포지션'이 아닌 스위치를 하면서 상대를 기만하는 플레이도 하니 빠른 공수전환을 할 때를 놓쳐선 안 된다. 이를 테면, 포인트 가드가 골밑으로 파고 들어 센터들의 틈바구니에서 리바운드를 따낸 뒤 속공을 펼쳐 덩크슛을 내리꽂는 장면이 NBA에서는 곧잘 나오기도 한다. 송태섭이 덩크를? 이러면서 상상불가가 될 수 있지만, 실제 경기에선 키가 큰 편인 포인트 가드도 얼마든지 있다. 암튼,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니 더욱 멋진 경기를 관람하고 싶다면 '농구상식' 정도는 알아두면 좋을 것이다. 다음 편에서 '능남과의 승부'가 결정되니 기대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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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램덩크 신장재편판 2 - 풋내기 슛
이노우에 타케히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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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스포츠는 재능보다 '노력'을 중요시하지만, 안타깝게도 노력보다 '재능'이 우위를 선점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감독은 '재능'을 타고난 선수를 탐내고, 그런 타고난 선수를 '발굴'하려 애쓴다. '노력'이야 모든 선수가 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농구에서는 '재능'보다 더 탐내는 것이 있다. 바로 '신장'이다. 키가 크면 무조건이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선수라고 하더라도 '성장기'에 키가 크지 못하면 농구선수로 큰 활약을 보여주기 힘들다. 반면에 '재능'이 뒷바쳐주지 않더라도 키만 멀대 같이 크다면 어느 정도 활약을 보여줄 수 있는 스포츠가 바로 '농구'다. 그래서 우리의 주인공 '강백호'가 풋내기 주제에 대활약을 보여줄 수 있는 셈이다.

 

  2권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내용은 '유도 사나이 vs 바스켓 맨'과 '풋내기 슛을 성공하라', 그리고 '리바운드를 잡는 자가 경기를 지배한다', 이렇게 세 가지다. 먼저 '유도 사나이'의 등장으로 강백호는 시험에 들게 된다. 타고난 체력과 뛰어난 운동신경으로 슬램덩크를 작렬한 강백호를 탐내는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주장 채치수의 초등학교 동창 유창수다. 유창수는 북산고의 유도부 주장으로 중학시절부터 싸움으로 정평이 난 강백호를 인재로 눈독을 들이고 채치수에게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승부를 하자고 청한다. 다름 아니라 '강백호, 유도부로 스카웃'이다.

 

  하지만 정정당당한 승부를 한다던 유창수는 '채소연의 어릴 적 사진'으로 꼬시기에 급급했고, 단순무식한 강백호는 소연이의 귀여운 모습이 담긴 사진에 맹목적으로 달려들기 바쁘다. 이에 농구부 부주장 준호(안경선배)는 창수의 비열한 술수에 백호를 잃어버릴 것을 우려해 비정상적인 대결에 뛰어들어 백호를 구해내려(?) 하지만, 웬일인지 채치수는 지켜보고만 있는다. 그때 백호는 유도부 주장의 권유를 뿌리치며 "싫어요"라고 입부를 거절한다. 그러면서 "왜냐하면 난 '바스켓 맨'이니까요"라는 멋진 대사를 던진다.

 

  이에 흡족한 채치수는 강백호에게 드리블과 패스 등 기초훈련만 시키는 것에서 한 발 나아가 '슛 연습'을 시킨다. 다름 아닌 '레이업슛(런닝슛)'이다. 농구에서 가장 기초적인 슛이건만 '슬램덩크'밖에 모르는 강백호는 초보적인 슛을 비아냥거리면서 '풋내기슛'이라고 부르며 거부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치수는 서태웅에게 시범까지 보여주면서 가르쳤지만 어찌된 일인지 백호는 번번히 실패하며 망신만 당하게 된다. 급기야 계속된 실패로 열받은 백호는 서태웅과 시비가 붙어 다투면서 연습을 쫑치고 만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공터에선 백호의 '풋내기슛' 연습이 한창이다. 전날 "천재 강백호가 풋내기슛도 성공하지 못하다니 한심하다"는 핀잔을 주장에게 듣고서 남몰래 홀로 연습중이었던 것이다. 때마침 소연이가 나타났고 백호에게 조언을 해주는데 '공을 놓고 온다는 느낌'으로 슛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백호의 점프력은 덩크를 꽂을 정도니 림에 손이 닿고도 남을 정도다. 그러니까 높이 점프한 다음에 공을 림 근처에서 사알짝 놓고 온다는 느낌으로 슛을 하면 '레이업'은 완성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풋내기슛'을 완성한 강백호는 농구천재로 한발짝 나아가게 된다.

 

  그렇게 연습은 한창이고 '능남'과의 시합을 하루 앞둔 날에 채치수는 강백호에게 '리바운드' 훈련을 시킨다. 역시나 농구천재는 림을 맞고 튕겨나오는 '실패한 공' 따위에는 관심없다며 시큰둥해하자 치수는 지긋이 말한다. "리바운드를 잡는 자가 경기를 지배한다"고 말이다. 이미 농구팬이거나 <극장판 슬램덩크>를 본 관객이라면 이 얘기가 무슨 뜻인지 잘 알 것이다. 산왕전에서 강백호가 대역전극을 펼치게 된 근원이 바로 '리바운드'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가슴 뛰는 짜릿함의 시작이 바로 '북산 vs 능남'의 연습시합에서 이미 펼쳐졌던 것이다.

 

  과연 '능남전'에서 북산은 승리할 수 있을까? 농구초짜 강백호는 '능남전'에 뛸 수 있을까?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슬램덩크'와 '풋내기슛'이 전부인데 말이다. 그리고 하루 전에 배운 '리바운드' 실력은 얼마큼 선보일 수 있을까? 더욱더 흥미진진해지며 '진짜 농구의 매력'을 선사할 3권을 기대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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