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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일리아스 - 트로이의 노래 ㅣ 한빛비즈 교양툰 22
동사원형 지음 / 한빛비즈 / 2023년 2월
평점 :
서양문화의 원형이라 불리는 <일리아스>는 '고전 중 고전'이라 불려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왜냐면 '고전이란 제목은 알지만 읽지 않은 책'이라는 고전에 대한 정의가 딱 맞아 떨어지는 책이기 때문이다. 분량이 너무 많은 탓도 있지만 대부분 읽다가 지쳐버린 경우가 더 흔할 것이다. 솔직히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일리아스>보다 훨씬 더 많은 분량을 자랑하는 책들을 섭렵했던 분들마저 <일리아스>는 읽다가 도통 '무엇'에 관심을 쏟아야 완독할 수 있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고 하소연하곤 했다. 물론 나도 여기에 속한다. 그럼에도 책의 내용은 얼추 다 알고 있어서 '맥락'은 파악하고 있지만, <일리아스>를 관통하는 주제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더랬다.
그러다 이 책을 읽으니, 주제가 바로 '분노'란다.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분노'가 점층되었다가 한순간에 '해소'가 되면서 이야기를 끝맺는 '그리스식 연극'을 이해하면 <일리아스>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지 간파할 수 있다는 조언을 듣는 순간, 무릅을 탁 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읽기에 도통 무슨 이야기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까닭도 지은이 호메로스가 <일리아스>를 쓸 때, '그리스인들'을 대상으로 썼던 탓에 '그리스인이라면 다 알만한 상식'적인 내용은 행간에다 숨겨두고 맥락만 남겨놓아 '상식'이 부족한 독자들이 읽을 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설명에 고개를 절로 끄덕일 수 있었다. 결코 내가 멍청했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단지 '무식'했었을 뿐이었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시 한 번 <일리아스>에 도전할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일리아스>에는 왜 '분노'를 담았던 것일까? 어차피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쪽은 그리스쪽이었으니 '환희'를 담아도 좋았을텐데 말이다. 10년이나 질질 끈 전쟁이었고, 전반적으로 고전을 면치 못한 전쟁이었으나 '트로이 목마'를 심어두고 끝내는 승리를 거두었지 않느냔 말이다. 그토록 어려운 일을 해냈으니 초반의 고전과 역경을 지나 끝끝내 달콤한 승리를 거두었다는 '기쁨'을 노래하면 되었을 것을, 왜 하필 '분노'를 담았느냔 말이다.
어줍잖은 지식을 나름 풀어본다면, 내 생각엔 '그리스인들의 기질'이 달달한 해피엔딩보다는 카타르시스를 뿜뿜할 수 있는 비극을 좋아라하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여기저기 그리스의 저작들을 살펴보면, 유독 '비극적인 요소'만을 참으로 좋아한다는 걸 느낄 정도 거의 대부분이 '비극'이다. 그리고 그런 '비극'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론도 한결같이 '그리스인들의 삶'이 녹록치 않았던 탓에 그들의 현실보다 더 잔혹한 비극을 보면서, '아, 내 현실이 비참하다고 여겼는데, <비극>에 비하면 슬픔 축에도 끼지 못하겠구나. 그나마 '내 현실'은 아름다웠어'라고 새삼 깨닫는 효과를 낳는다고 말하곤 한다. 그런 탓에 대승리를 거둔 '트로이 전쟁'에서 기쁨과 환희를 쏙 빼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승리에서 기쁨과 환희를 빼면 '분노'만 남는 것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분노만 남았기에 쓴 것이 아니라 '분노'를 통해서 뭔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들의 분노는 왕왕 '인간에게 재앙을 내린다'로 귀결되곤 한다. <일리아스>에서 신들은 '그리스편'과 '트로이편'으로 나뉘어 다툰다. 하지만 신들끼리 '직접적'으로 싸우진 않는다. 어차피 '불멸의 존재'인 신들이 서로 싸운들 '불멸'로 남을 것이고, 그러면 싸움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싸움은 '한정적인 삶'을 사는 인간들의 몫이다. 이건 필시 '필멸자들의 싸움'이어야만 했다는 것이다. 사실 '분노'라는 감정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옅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신들에게 분노는 어울리지 않는다. 언젠간 '멈춰야' 하는데, 불멸의 존재가 분노를 거두어들이는 모양새가 어쩐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멸자들의 분노'는 좋은 이야기꺼리가 된다. 분노를 적절히 다스리지 못하고 지나치면 '죽음'이고, 반대로 분노할 상황에도 적절히 분노하지 못하면 '치욕'이니, 분노했다가 적당한 때에 사그라들게 할 수 있다면 '화해'와 '용서', 그리고 '관용'이라는 멋진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된다.
다시 <일리아스>로 돌아가서, 첫머리에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서막을 찢어버리고 나서 대단원에 아킬레우스가 헥토르의 시신을 그의 아버지 프리아모스에게 되돌려주는 것으로 끝맺음을 한다. 이로써 '그리스인'으로 분한 아킬레우스가 분노하면 얼마나 무서운 존재가 되는지 잘 보여주었다가 적당한 때에 분노를 거두어 정말 멋진 인간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전반적인 주제가 '그리스인들은 참 멋져'로 장식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닐지 조심스럽게 짐작해본다.
하지만 그건 2000년도 훌쩍 지난 옛날에나 먹힐 수법이고, 오늘날에도 <일리아스>가 널리 읽혀야만 하는 까닭이라고는 보기 힘들 것이다. 그럼 오늘날에 독자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공감할 수 있는 주제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서양문화의 현재를 이해하는 '거울'로 삼기 위해서일 것이다. <일리아스>는 전쟁 서사시다. 죽고 죽이는 잔혹한 노래라는 얘기다. 그리고 죽을 것 뻔히 알면서도 '명예'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싸우다 끝내 죽는다. 그리고 죽어서 차갑게 식어버린 주검을 높은 단 위에 올려놓고 온갖 영예로운 행위를 짜아낸다. 명예로운 이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끔 말이다. 비장하고 거룩하기까지 이를 데가 없을 정도로 짜낸다.
그런데 그토록 수많은 영웅들이 '명예'롭게 죽어가는 이유가 고작 '그리스 최고 미녀, 헬레네' 때문이란다. 최고의 미녀를 납치 당했으니 모든 영웅들을 이끌고 되찾겠다고 나선다. 전쟁을 벌인 '그리스의 변명'치고는 너무 빈곤하지 않은가. 한편, 전쟁의 빌미를 내어준 트로이도 기왕 빼앗은 미녀를 되돌려주면서 전쟁을 멈추려는 지혜를 발휘하지 못한다. 처음엔 그럴 마음도 있었지만 '직접' 보니 '전쟁'이 날만도 하다는 듯 공감해버린다. 이러면서 '분노'를 노래한다. 화가 나니 풀어야겠다. 죽을 때까지 싸우다보면 화가 풀릴 듯 싶다는 '공격측'과 덤빌테면 덤벼봐라. 네놈들의 어처구니 없는 공격에 당하고보니 열받아서 네놈들을 씹어 먹어야 분이 좀 풀릴 것 같다는 '방어측', 둘 모두 '이성'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나서 양쪽 모두 웬만큼 죽고나서야 '이성의 끈'을 찾아 화해의 재스처를 내민다.
여기까지 <일리아스>는 대단원을 내렸지만, 실제 '역사'는 트로이의 몰락을 맺고 '오디세우스의 방황'과 '아이네이아스의 모험'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주인공인 아킬레우스는 어이없게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그렇게 트로이는 망하고 그리스는 흥했지만, 트로이의 후손인 아이네이아스는 로마의 뿌리가 되어 다시금 그리스가 몰락하게 되는 '흥망성쇠의 바퀴'를 돌릴 뿐이다. 그 거대한 바퀴 아래서 '분노'는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말이다. 마치 사마귀가 수레바퀴 앞에서 폼 잡고 서는 것 같지 않은가.
오늘날의 서양문화는 '패권국가'로 거듭나면서 제국주의와 식민지쟁탈, 그리고 세계대전이라는 끔찍한 비극 위에 군림하고 있다. 아직도 '힘의 균형'은 서양에 기울어 있지만, 인류의 평화와 공영을 위해서 바람직한 모양새는 아니다. 그들의 찬란한 기술문명은 대량살상무기를 손에 쥐어주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 손에 쥔 위험한 무기를 어쩔 셈인가? 아킬레우스 앞에 무릅을 꿇은 헥토르의 아버지처럼 용기를 내야만 한다. 분노에 사로잡혀 명예로운 이의 주검을 욕보이는 만행을 저지른 아킬레우스도 끝내 '인간다움'을 되찾고 용서를 베풀었다. 강자가 취할 수 있는 가장 멋진 행동일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일리아스>가 보여준 '분노'를 직관하면서 '분노'를 삭힐 줄 아는 인간다움을 깨달아야 한다. 인류는 어리석게도 '분노'를 해결의 실마리로 선택하곤 하지만 '분노'로 해결될 일은 아무 것도 없음을 잘 안다. 오히려 '분노'를 내려놓음으로써 일이 잘 해결되는 것을 우리는 경험상 익히 알고 있다. <일리아스>에선 신들이 정해놓은 운명에 따라 인간들이 어쩔 수 없이 '따르는 것'을 보여주었지만, '운명의 수레바퀴'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혹여 '운명'이 있다한들 오로지 인간들의 '선택'에 좌지우지될 뿐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미래는 우리에게 달렸다는 말이다.
고전의 위대함을 맹목적으로 암기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고전을 읽을 필요가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고전을 읽되,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하게끔' 되살려 읽어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만약, 오늘날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고전이라면 읽을 필요도 당연히 없다. 그런데 수많은 이들이 <고전>은 필독서라고 부른다. 왜일까? 오늘의 문제를 풀기 위해 어제의 참고서가 필요한 까닭이다. 내일 이루어질 '해결'을 미리 알 도리는 없기에 우리는 '과거'를 더듬어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고전>은 필독서라 불린다. 그리고 꼭 읽어보고, 읽기 힘들면 '해설서' 찾아보고, 선배들의 '조언'도 귀담아들어보고, 그런 뒤에 '나만의 생각'으로 <고전>을 해석하고 정리하길 바란다. 물론 정답은 없다. 오직 당신의 생각만이 옳을 뿐이다. 다른 이의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이면 '생각의 빛'이 더욱 찬란해질 것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