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정통 만화 삼국지 4 - 관도전의 악몽
나관중 원작, 천웨이동.량샤오롱 글.그림 / WISDOM(위즈덤) / 201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CMXXVII / 위즈덤(Wisdom) 4번째 리뷰] 관우가 조조의 품을 떠났다. 애초에 관우가 조조의 신하가 된 것이 아니니 '품'이라기보다는 '그늘'이라 표현하는 것이 더 어울릴 것이다. 조조가 그렇게나 관우에게 후대를 했는데도 관우는 유비의 품으로 떠났다. 그런데 이게 참 미스테리하다. 유비가 뭐라고 관우가 이렇게나 애먼글먼 함께 있고 싶어 안달이란 말인가? 원소처럼 '사대삼공의 지위'를 대를 이어 받은 명문가도 아니고, 조조처럼 '구름같은 인재들'이 모여들어 천자를 품에 끼고 천하를 호령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또한 손견, 손책, 손권으로 이어지는 오나라처럼 일찌감치 '강동'이란 터를 굳건히 잡고서 세력을 넓혀가던 유력가도 아니고, 그저 한황실의 종친이라는 명함 하나 꼴랑 있는 '유비의 곁'에 관우를 비롯해 장비, 조운, 손건, 간옹, 미축 등등의 인물들은 송곳 하나 꽂을 땅뙤기 하나 없는 유비를 졸졸 따라 다닌다. 유비의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따르게 만들었단 말인가?

유비가 탁현에서 '황건적 토벌'이란 기치를 내걸고 전쟁에 나선 공이 있어 조그마한 현의 수령이 된 것을 제외하고, 제대로 된 관직조차 얻은 것이 없다. 그런데도 공손찬에게 빌붙고, 도겸에게 빌붙고, 여포에게 의지하다가, 조조에게 기대고, 원소에게 빌붙었다가 '삼형제'가 다시 모여 '여남(황건적 잔당 유벽과 공도의 도움으로)'에서 재기를 노렸으나, 조조에게 박살이 나면서 유표에게 빌붙으며 겨우 목숨만 건지는 신세가 된다. 그럴 때가 '신야'를 영지로 삼아 재재기(?)를 노렸다. 무려 7년이나 말이다. 그러나 '신야'는 너무 좁은 영지다. 힘을 기르기에 턱없이 '인재'와 '물자' 모두 빈약한 곳이었고, 형주자사 유표의 처남 '채모'에 의해 암살 위협까지 받고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런데도 명장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관우, 장비, 조운'은 유비와 함께 생의 끝까지 했으며, '손건, 간옹, 미축' 또한 훌륭한 책사라 할 수는 없으나 명재상의 반열에 올려도 무방할 정도로 뛰어난 문관이었는데도 유비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어디 이뿐인가? 유비는 가는 곳마다 '호의'를 받기 일쑤다. 가진 것 하나 없는 거렁뱅이 신세와 다를 바도 없는데 말이다. 가진 거라고는 '황실의 종친, 유황숙'이라 불리는 타이틀 뿐이지 않은가? 더구나 조조가 헌제를 볼모로 잡고 천하를 호령하는 것을 다 아는 처지에 각지의 제후들은 저마다 '한황실의 땅'을 저들의 것인냥 노나먹고 있을 지경인데, 그 누가 '한황실의 충신'을 자처하며 충성을 바치고 있느냔 말이다. 현실이 그러할진데, 이름 뿐인 '황제'도 아닌 '황실의 종친'이란 명함으로 어찌 그리 수많은 인재들의 호의를 받을 정도로 매력을 뿜어냈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현덕이 지닌 매력의 미스테리'다. 이러한 미스테리는 유비에게 없던 '책사들'이 찾아들면서 더욱더 그 신비감을 뿜어낸다. 바로 '서서'다.

하지만 서서는 유비의 품에 오래 있지 못했다. '정사'에서도 서서는 조조의 신하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유비와 함께 했을 때 아주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는 사실만은 확실한 모양이다. '연의'에서는 조조군을 섬멸하는 공을 세웠다고 하지만, 실은 유비의 계략이었다고 한다. '정사'에서는 서서와 제갈량이 책사의 능력을 화려하게 보여주면서 등장하지만, '정사'에서는 유비가 조조군을 대파하는 것으로 나오고, 유비가 활약을 할 시점에 '서서'는 이미 조조쪽으로 떠났고, '제갈량'은 아직 유비쪽으로 합류하기 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관중은 '연의'에서 유비에게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책사'라며 서서와 제갈량의 활약을 극대화시키며 소설의 재미를 더하는 요소로 삼았다. 암튼, 이런 소설의 재미를 더하는 부분이 바로 '유비의 매력'이란 말이다.

한편, 조조는 관우가 활약한 '백마전투' 이후에 '관도대전'이란 운명의 대결을 맞이했다. 상대는 어릴 적 친구였던 '원소'다. 원소군은 무려 70만, 조조군은 겨우 7만 명에 불과한 전투였다. 그런데도 조조군의 멋진 승리로 '화북 일대'를 모두 차지하는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원소 진영의 '내부결속'이 너무 엉망진창이었던 것이다. 흔히 원소가 리더였으므로, 원소의 '우유부단한 성격' 탓을 많이 하는데, 단순히 성격탓을 하기에는 원소의 가문이 너무 엄청났다. 무려 70만 대군을 이끄는 총대장이기도 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그의 '성격'탓을 하기보다는 원소의 휘하에 있던 책사들의 분란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애초에 전쟁에 반대한 책사들이 있었다. 바로 '전풍'과 '저수'다. 이들은 원소의 진영이 훨씬 유리한 싸움이니 '지구전'을 펼쳐 조조군의 병량이 다 떨어져 스스로 물러가게 만드는 것이 가장 상책이라고 전략을 내었다. 그러나 심배, 곽도, 봉기, 쉽게 말해 '간신배'들은 70만 대군을 보유하고서 '수비'만 할라치면 원소의 체면에 손상이 가니 '속전속결'로 대군을 움직여 조조군을 짓밟아버리라고 조언한다. 허나 이는 하책이다. 애초에 급히 전쟁을 시작한 조조의 입장에선 '여포'를 치고, '유비'를 친 뒤에 곧바로 '원소'까지 치는 강행군 일변도였다. 즉, '전쟁준비'를 만반에 하지 못했고, 완성의 '장수' 일당도 다 진압하지 못했고, 헌제의 밀서사건도 해결하지 못한 채, 서쪽의 마등, 남쪽의 유표, 동쪽의 손책이란 적들이 산적한 위급한 상황을 빠르게 해결하고자 '하북 일대'를 평정하겠다고 원소의 대군과 맞짱을 뜨러 오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원소가 조금이라도 '정세 파악'을 빠르게 했더라면, 속전속결이 아닌 지구전을 펼쳤을 것이다. 속전속결은 '조조'가 바라고 또 바라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원소는 전풍과 저수를 전쟁에 나서기도 전에 '불길한 소리'를 한다며 감옥에 가둬버리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만다.

또 하나는 '상벌의 명확성과 신속성'이 승패를 가르게 만들었다. 조조는 상을 줄 때는 확실히, 벌을 줄 때는 신속하게 했다. 그래서 조조의 휘하 장수와 책사, 신하들 모두는 '조조의 상'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의견을 제안하기에 망설이지 않는다. 어차피 '난세'에는 '출세'가 목적인 사람들이 구름같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빠른 출세를 원한 인재들은 '황제'인 헌제에게 충성을 다하기보다는 유력한 제후들에게 '눈도장'을 받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 마련이다. 그 가운데 조조는 가장 화끈한 군주였다. 상과 벌이 명료했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 '자신의 의견'이 조조에게 채택되길 바라며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그로 인해 벌을 받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상을 받을 생각으로 말이다. 이것이 바로 '조조'가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원인이다. 반면에 원소쪽 진영은 상벌이 분명하지 않고 '제멋대로'였다. 한마디로 '원소의 기분에 따라' 달라졌던 것이다. 전풍과 저수가 딱 그렇다. 두 사람의 '지구전' 전략은 아주 유효했다. 명확한 전략가라면 누구도 '전풍과 저수의 지구전'을 반대한 명분조차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가장 효율적인 전략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을 상책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원소가 차지한 '기주 땅'은 곡창지대다. 가만히 지키고만 있어도 저절로 부를 쌓을 수 있는 땅에서 왜 전쟁을 벌이겠느냔 말이다. 그러니 전풍과 저수는 원소에게 '승리'만 안겨주는 것이 아니라 훗날 원소가 천하를 호령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는 책략을 가르쳐주었으니 '상'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원소의 심기'를 거스르고 말았다.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정사'에 나오지는 않으나, '연의'에서는 원소와 조조의 어릴 시절을 주목시키며 원소에게 '자격지심'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 엿보인다. 한마디로 조조가 뭐가 그리 잘나서 감히 자신에게 대들고 있는 것이냐, 저 따위 조조놈을 단 한 방에 혼꾸녕을 내줄 수 있는 방법이 궁금하던 차에 시간만 질질 끄는 '지구전'을 하라는둥, '수비'에 치중하라는둥 소극적인 전략을 내세웠으니 싫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를 간파한 '간신배들'은 원소의 가려운 부분을 박박 긁어주며 대군을 이끌고 내려가 한껏 위엄을 보이고 '속전속결'로 때려부수라고 부추기고 만다. 심배, 곽도, 그리고 봉기의 주장이다. 원소는 이들에게 상을 주고, 전풍과 저수에게는 벌을 주며 모든 신하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말았다. 그 뒤에는 말할 것도 없다. 그저 '원소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말만 주워 섬길 뿐이니 전쟁에서 이길 턱이 없다.

이렇게 '관도대전'에서 승리를 거둔 조조는 일거에 엄청난 하북지역을 평정하여 '천하통일'의 기틀을 닦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서량의 마등, 형주의 유표, 신야의 유비, 그리고 강동의 손책이다. 조조의 다음 목표는 과연 누구일까?

한편, 강동의 손책은 젊은 나이에 강동땅을 접수하며 오나라의 기틀을 다잡는다. 그렇게 안으로 원로대신 '장소'를, 밖으로는 의형제 '주유'를 기반으로 삼아 '형주공략'에 나서게 되는데, 어이 없게도 26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첩자를 잡아 죽이는 사소한 사건이었으나 이것으로 원한을 품은 자들이 급습을 모의했는데 손책이 이를 철저히 대비하지 않고 사냥에 나갔다가 '중상'을 입게 된 것이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으나 부상이 심해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의원의 권고에도 쉽게 흥분하고 화를 내며 참지 못해 끝내 숨을 거두고 만다. 마지막 결정타는 그 유명한 '우길'을 참수한 사건 때문이었다. 손책의 아비 손견도 쉽게 흥분을 참지 못해 요절했는데, 그 아비에 그 자식인 셈이다. 그렇다면 또 다른 자식인 '손권'은 어떠했을까? 의외로 신중한 성격이었던 모양이다. 믿고 의지하던 아버지와 형이 비명횡사했는데도, 그들의 성격을 본받지 않고 신중에 또 신중을 기하며 번듯하게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강동땅은 손권 대에 이르러 크게 부흥하게 된다. 그의 부흥은 잠시 뒤에 살펴 보도록 하겠다.

다시, 신야에 있는 유비다. 유비는 관우, 장비, 조운이란 든든한 무장이 있고, 손건, 간옹, 미축이란 튼실한 문관도 갖춘 훌륭한 진영을 갖추었다. 이런 유비에게 부족한 것이 바로 유비의 실력에 걸맞고 적당히 크기의 '다스릴 수 있는 땅'이 없는 것이고, 이런 훌륭한 진영을 잘 다뤄줄 '뛰어난 책사'가 없다는 점이다. 이를 테면, 조조에겐 '곽가'가, 손권에겐 '주유'가 있었는데, 유비에겐 그에 걸맞는 책사가 있었다가 없게 되었다. 바로 '서서'를 말한다. 유비에게 서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 들게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인물이 '효도'를 다하기 위해 자기 곁을 떠난다고 한다. 군주의 처지에서 어찌 슬프지 않겠느냔 말이다. 그런데 그런 '서서'가 떠나면서 추천한 인물이 있다. 바로 '복룡과 봉추'다. 우리가 흔히 표현하기로는 '와룡'이라고 하는데, '중국판'에서는 '복룡'이라 표현하는 모양이다. 어차피 뜻은 같다. '엎드린 용'이나 '누운 용'이나 승천하지 못한 용은 조화를 부리는 능력이 있어도 쓰지 못한다는 뜻이니 말이다. 다시 말해, '제갈량과 방통'이다. 일찍이 양양땅의 은자, 수경선생 사마휘도 두 사람 가운데 한 명만 얻어도 천하를 얻을 것이라 조언했던 인물이다. 과연 유비는 '복룡과 봉추' 가운데 누굴 얻게 될 것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더 나은 어휘를 쓰고 싶은 당신을 위한 필사책
이주윤 지음 / 빅피시 / 202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CMXXVI / 빅피시 2번째 리뷰] 느닷없이 시작한 '필사'에 이책 저책을 넘보기 시작했다. 이제 막 시작한 '필사 초보'가 꾸준히 할 수 있는 책을 말이다. 첫 번째 책은 <철학의 쓸모>였다. 나름 철학을 좋아하기도 했고 '좋은 글귀'가 참 많을 것 같아서 시작한 책이었다. 그렇게 한 달 간 알차게 써나갔다. 그런데 '한 권의 책'을 필사를 지속적으로 하다보니 아쉬운 점이 많았다. 한 달 내내 '비슷한 내용'만 필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학이 다 거기서 거기일리는 없지만, 어줍잖은 실력으로 너무 어려운 분야를 선정했더니, 비슷비슷한 글귀만 골라서 쓰고 있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번째 책은 좀 더 다채로운 책을 선정하고 싶었다. 그래서 고른 책이 바로 이 책 <더 나은 어휘를 쓰고 싶은 당신을 위한 필사책>이었다. 이주윤 작가의 2번째 필사책이기도 하다.

이 책을 선택한 까닭은 첫째, '필사 공책'을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었다. 책 자체가 '필사 공책'을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이질감도 좋았고, '접착제로 발라놓은' 떡제본이 아니라 '실로 꿰맨 제본' 형식이라서 180도로 쫙 펴졌기 때문에 필기감이 너무 좋았다. 둘째는 100개의 필사를 하기 위해서 100권의 책에서 100개의 글귀를 작가가 미리 골라놓았다는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100일 간은 책을 따로 고르는 수고를 덜 수 있어서 참 좋았다. 나중에 필사를 다 하고 나서는 이 책에서 소개한 100권의 책 가운데 땡기는 책을 골라잡아서 필사를 이어나갈 계획이다.

물론, 나쁜 점도 있었다. 필사를 시작할 때 골라둔 '만년필'이 있어, 그 만년필로 첫 번째 필사책을 무사히 마쳤는데, 아쉽게도 이 책에서는 쓸 수가 없었다. 만년필의 잉크가 번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이 번지지는 않았지만 의도한 것보다는 두껍게 써지는 통에 어쩔 수 없이 펜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금은 '볼펜(모나미)'과 '젤리펜'을 병행해서 쓰고 있다. 젤리펜도 살짝 번지긴 했지만 워낙 가느다란 '세필'이었기에 보기에 나쁘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 책으로 필사를 하시는 분들에겐 '볼펜'을 권장하고 싶다. 이게 딱 적당했다. 너무 미끄럽지도 않고 적당히 마찰감이 느껴졌기 때문에 오히려 '볼펜 필기감'에 제격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필사를 시작한 지 '석 달'째인 초보지만, 그래도 나름 필사의 경력을 쌓아가니 좋은 점이 참 많았다. 먼저 '좋은 글귀'를 날마다 음미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하루에 한 편의 리뷰를 쓰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책도 '1일 1독'을 하는 편이다. 그런데 하루에 책 한 권을 읽어도 '날마다 좋은 글귀'를 만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사책'을 따로 읽고 쓰는 습관을 들이니, 이게 가능해졌다. 또, 내가 읽은 책도 있고, 아직 읽지 못한 책도 있어서, 읽은 책은 글귀의 내용이 추억처럼 떠올라 좋았고, 아직 읽지 못한 책은 그 책에 이렇게 좋은 글귀가 있었구나 하면서 새삼 감탄도 할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생각'할 거리가 많아져서 '필사'에 내 나름의 '생각'을 덧붙여 쓰는 [나만의 필사법]을 적용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또 하나는 '생각'이 잘 떠오른다는 것이다. 책 한 권을 완독할 때는 전체의 줄거리를 음미하며 등장인물 간의 갈등구조와 대사가 주는 감동을 떠올려야해서 굉장히 '긴 호흡'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렇게 '긴 호흡'을 하다보면 생각보다는 느껴야만 할 때가 많다. 때로는 이생각 저생각이 마구 뒤죽박죽이 되어 '잡생각'으로 종합될 때도 있는데, 앞뒤 다 짤라먹고 '좋은 글귀', '명문장'만 딱 골라서 읽으니, 그 글귀, 자체에서 뿜어져나오는 아우라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생각도 '한 가지'로 바로 꽂혀버리는 경험을 하면서 생각을 글로 옮겨 적는 일도 수월해졌다.

물론, 이 방법도 아주 좋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두 달 전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어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리는 '내란증후군'에 시달릴 때는 아무리 좋은 글귀를 읽어도 머릿속에는 온통 '탄핵' 생각만 떠오르고 '내란범'들에 대한 단죄를 어떻게 내릴까 하는 고심만 떠올라서, 한껏 뽑아놓은 좋은 글귀에 '화만 잔뜩 치솟은 생각'을 옮겨 적는 날들도 참 많았기 때문이다. 절제를 해야지 하면서도, 그게 잘 안 됐다.

암튼, 필사는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좋은 습관'인듯 싶다. 필사하기 전에는 그저 '내 잘난 기억력'에만 의존했더랬는데, 이제 '필사'를 통해서 점점 잊혀져 가는 기억이 늘어나는 것을 방지하고 '기록'으로 오래오래 두고두고 꺼내 읽을 수가 있게 되었으니 참 좋았다. 필사 공책이 늘어나면 깔끔하게 정리해서 '또 다른 기록'으로 남겨도 좋을 듯 싶다. 이 책처럼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 개정판
조세희 지음 / 이성과힘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CMXXV / 이성과힘 1번째 리뷰] 1970년대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그려낸 조세희 소설가의 단편모음집이다. 무려 50년 전의 소설이 지금도 주목받고 있는 까닭은 그 시절의 아픔을 겪게 만든 '구조적인 문제'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의 '가난한 이들의 삶'을 고스란히 관통하기 때문이다. 전혀 위화감도 없이 말이다. 이는 그 시절의 가난의 원인과 지금의 가난의 원인에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 공통점이란 극심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다. 또 하나는 '부자들의 인색함'이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속에서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돈이 돈을 벌어오는 구조에서 '더 많은 이익'을 내는 것은 돈을 많이 가진 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자는 더 부자가 되는 것이고, 빈자는 더 빈자가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것은 '난장이네 가족'도 인정하는 바다. 경기가 좋으면 좋을수록 부자들은 더 많은 돈을 벌어가니 진짜로 부러운 일이다. 그런데 그렇게나 부를 쌓았으면서 왜 가난한 사람들의 몫까지 탐을 내느냔 말이다. 서울시 낙원구 행복동에 살고 있는 '난장이네'는 조상 때부터 그곳에서 터를 잡고 살았다. 난장이의 조상은 '노비 출신'으로 인심 좋은 양반이 죽으면서 떼어준 땅에서 터전을 마련하고 살아왔는데, 난장이의 대에 와서는 이를 '무허가 건물'이라고 하면서 난장이 손으로 직접 헐지 않으면 '철거비용'까지 물어주어야 한다는 통지서를 받고 말았다. 이렇게나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국가조차 '난장이의 편'을 들지 않고, 부자들에게 더 많은 이익을 주는 '재개발사업'을 벌이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원래 살던 지역주민들을 '불법체류자'로 엮어서 살던 곳에서 무일푼으로 떠나라고 종용하다니 말이다. 그나마 '난장이네'는 입찰딱지라도 받아서 푼돈이나마 '이사비용'을 받아서 떠날 수 있었지만, 난장이의 이웃들은 그 딱지조차 받지 못해 용역깡패들에게 두들겨 맞고 반병신이 되어서 집도 없이 쫓겨날 판이다. 도대체 이 나라에 '정의구현'은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한편, 부자들도 할 말은 있다. 자신들이 쌓은 부는 거저 얻은 것이 아니라 '정당하고 합법적인 노력'에 대한 합당한 대가였을 뿐, 부자들이 탐욕스럽기 때문에 '불법'을 자행하면서 빈자들의 재산을 빼앗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서 자신들은 부를 늘려나갔고, 그로 인해서 '가난한 사람들'이 피해를 보지 않았으면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자신이 돈을 벌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까지 막아서는 것은 엄연한 '불법'이며, 그에 따른 법적 조치를 망설일 까닭은 전혀 없다는 것을 밝힐 뿐이다. 그렇게 부자들은 '난장이네의 입주권'인 딱지를 난장이네가 원하는 가격에서 깎지 않고 사들였다. 난장이네 이웃들의 딱지까지 몽땅 말이다. 그렇게 난장이는 정들었던 집이 허물어지는데도 '마지막 식사'를 오순도순 나눠먹고 철거반이 허물어버린 담벼락으로 빠져나와 집을 비워주었다. 갈 곳도 딱히 마땅히 없으면서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입주권'을 사들인 부자가 그곳에 세워질 아파트에서 살기 위해서 구매한 것은 아니었다. 그럴 거면 애초에 그렇게나 많이 사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부자는 그렇게 사모은 딱지에 2~3배의 이윤을 붙여 다른 부자에게 되팔아버리는 방법으로 돈을 긁어모았다. 난장이네에게 25만원을 주고 산 딱지를 다른 입주자에게 45만~70만원 선에서 팔아버린 것이다. 부자는 그렇게 해서 돈을 더 많이 모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애초에 '직거래'를 해서 난장이네에게 50만원을 주고 사갔다면, 난장이네도 '이사비용'과 더불어 '전세자금'이라도 마련해서 다른 곳에 새롭게 정착할 수 있는 자본을 챙길 수 있지 않았겠느냔 말이다. 이를 국가가 나서서 조금만 관리했더라면 가난한 이들이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는 일도 발생하지 않았을 텐데, 왜 이런 '감시'를 철저히 하지 않았느냔 말이다. 가난한 사람이 이런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헐값'에 집을 넘겨버리는 일도 미연에 방지하면서 말이다. 왜 국가가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서려 하지 않았느냔 말이다.

이런 일은 또 벌어진다. '난장이의 큰 아들, 영수'는 노동조합을 이끌어가는 주동자로 몰려서 '사측'과 협상테이블에 앉아서 협의를 이어나가는데 '불법파업'을 조장했다면서 노조측이 강성하게 대응하도록 선동했다며 사측으로부터 고발을 당하는 처지에 내몰렸다. 다시 말해, 선량한 노동자들은 성실하게 일을 하고 현재의 '임금'을 받는 것으로도 만족을 하고 있는데, 난장이의 큰 아들이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어서 고의적으로 파업을 조장하고 선량한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무리한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등 불법적인 일을 자행했다는 내용의 고발이었다. 이에 난장이의 큰 아들은 '사측의 주장'은 궤변이라고 대응한다. 회사가 엄청난 이익을 봤는데도 노동자의 임금을 고의로 '동결'하고, 근로기준법에도 저촉되는 추가업무를 강요했으며, 규정된 근무시간을 초과했는데도 '추가수당'을 제대로 쳐주지 않아, 회사가 노동자의 정당한 몫을 가로챈 정황이 드러났는데도, 이를 발뺌으로 일관하고, 노조간부를 비롯해서 노조원들을 '불법파업'이라 협박을 하며 정당한 '노동쟁의'와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부당한 조치로 일관하고 있음을 낱낱이 밝혔다. 이에 따라 회사의 이미지가 나빠질 것을 우려해서 회사 이름으로 20억원을 '사회에 헌납한다'는 미명으로 기부를 하며 호의적인 여론을 만들려고 했는데, 그 기부금 20억원은 '회삿돈'이 아니라 '노동자의 몫'이 분명하며, 기부를 하더라도 '노동자의 이름'으로 기부를 했어야 맞다고 시시비비를 가렸다.

그럼에도 사측은 노조간부를 일괄적으로 고소했으며 특히 '난장이의 큰 아들'은 부당한 해고를 통지하며, 노조까지 해산시켜버리는 '악덕사장의 행위'를 보여주었다. 이에 참지 못한 난장이의 큰 아들, 영수는 회사의 사장을 '살해'할 목적으로 찔렀는데, 알고 보니, 그 사장이 아니라 사장과 꼭 닮은 '동생'을 찔러 사망에 이르게 만들고 말았다. 난장이의 큰 아들은 졸지에 '살인자'가 된 것이다. 앞서 난장이는 철거반에게 온가족이 쫓겨나가게 만들었다는 죄책감과 막내딸이 '행방불명'이 된 사실에 비관해서 '공장 굴뚝'에서 추락해 자살을 했으니, 난장이네 가족의 비극은 대를 이어 일어나게 된 셈이다. 이런 비극이 어디 그뿐이겠는가? 행방불명이 되었던 막내딸은 사실 '자기네 집'을 되찾기 위해서 처녀의 몸으로 부자에게 성욕구를 처리해주는 역할을 자처하며 부자네 집에 잠입했다가, 부자가 잠든 틈을 타서 '자기네 집 입찰권(딱지)'과 돈을 훔쳐서 달아났다. 그리고 아버지의 명의로 새 아파트 입주권을 되찾는데 성공하지만, 정작 입주해야할 아버지가 자살을 해버렸기 때문에 '아버지의 이름'으로 올린 입주권이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아버지가 좋아하던 그 집을 되찾아주기 위해 막내딸은 '자신의 몸'을 담보 삼아 저당잡혔다가 '자기 몫'을 단단히 챙겨서 달아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사이에 그런 비극이 벌어졌던 것이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 책이 한때는 '금서목록'에도 올랐다고 한다. 부자들에게 '살인'까지 저지르는 빈자들의 행동강령(?)을 부추기는 불온한 내용이 담겼다는 게, 그 이유라던데...글쎄, 이 책을 제대로 읽었다면 차마 그런 얘기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대충 읽으면 '살인자'가 등장하는 소설이니 불건전한 내용으로 볼 수도 있다. 허나 외국의 소설은 이보다 더한 '살인범'이 등장해도 명작소설이라며 극찬을 하지 않던가. 이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 건, 이 땅의 부자들이 빈자들을 두려워할 만한 '쫄리는 일'을 해왔다는 것을 반증하는 사례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뭔가 켕기는 것이 있으니 부자를 살해하는 장면을 보고 뜨끔하지 않았겠느냔 말이다. 그들이 '합법'을 목놓아 부르짓지만 결코 '합법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무엇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금서목록'에 올릴 까닭이 없다. 오히려 정정당당한 부자들이라면 '자신'은 절대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더구나 이 책에선 '재벌의 아들'이 사회주의 사상에 입각해서 '빈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주는 역할로 나오기도 한다. 아쉽게도 자신의 친족이 변을 당하자 '살인자에게 관용은 없다'는 취지의 발언으로 돌아서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기본적으로 부자들도 '선량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도 부자들은 자신들에게 놓인 환경 때문에 '끝까지 선량할 수는 없'었다. 왜냐면 자신이 가진 부를 '물려주기' 위해선 빈자들의 몫을 빼돌려 '자신의 몫'으로 착복하는 일을 하지 않고선 부자의 자리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부자로 살다보면 '빈자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아넣는 일'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는 냉혈한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부자가 빈자들을 궁휼히 여기면 '부를 세습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악착같이 착취하고 '합법'을 가장한 '불법'을 자행해야 겨우 '부자의 자격'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대한민국 부자들만 이런 것일까? 아니면 세상의 모든 부자들이 다 이런 축인가? 정녕 부자가 되는 방법이 이런 것이라면 난 부자가 되고 싶지 않다. 정말 나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난 어릴적부터 왜 '존경받는 부자'가 없는 것인지 몹시 궁금했더랬다. 최부자의 예도 있지 않던가? 굶주리는 사람이 없게 하고, 곳간을 채우려 들지 말고, 관직을 탐하지 말라는 원칙으로 '부자의 의무'까지 제시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지금도 이런 재벌이 있다면 온 국민들이 '돈쭐'을 내주려 벼를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대한민국 안팎으로 이런 재벌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정녕 부자들은 다 '착취'를 일삼는 나쁜 사람들이란 말인가. 굉장히 서글픈 일이다.

그렇다면 국가가 나서면 어떨까? 한 나라에 빈자가 많아지면 정치, 경제, 사회가 제대로일 리 없으니 말이다. 가난을 완전히 뿌리 뽑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가난'이 부끄럽지 않도록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국가가 배려 가득한 복지정책을 촘촘히 만들어두면 어떻겠느냔 말이다. 그러라고 국민들이 '세금'을 내는 것 아니겠는가. 오히려 이런 좋은 일에 세금을 투명하게 쓰인다고 국가가 앞장을 서면 국민들도 더 적극적으로 '세금'을 내려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부자들이 따로 기부금을 내지 않아도 '세금탈루' 할 생각말고 따박따박 내야할 세금 다 내는 것으로 빈자들의 의욕과 삶의 질을 높이는데 일조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겠느냔 말이다. 매번 '선심성 정책'이라면서 발목만 붙잡지 말고 '효과적인 복지정책'을 지속적으로 운영하는 것만으로도 대한민국이 얼마나 살기 좋은 나라가 되겠느냔 말이다. 도대체 얼마나 꿍쳐 먹기에 해마다 '예산부족'으로 추경하는 것도 모자르다고 하면서, 정치인들 월급만 따박따박 올려 받아 처먹냔 말이다. 해야 할 일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말은 번지르르하게 '무노동 무임금 원칙'이 무너지면 안 된다, '공산주의가 젤 싫어요'라고 하면서, 나라 경제가 휘청이게 만드는 '빈자들 양성 프로젝트'는 왜 매번 빠뜨리지 않고 시행하는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과학, 그게 최선입니까? - 윤리가 과학에게 묻는 질문들, 2022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이음스코프
강호정 지음 / 이음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CMXXIV / 이음 2번째 리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과학'이 주는 편리함은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다. 그래서 우리는 '과학만능주의'에 기대어서 우리가 마주한 모든 문제를 '과학'이 해결해줄 것이라 믿을 정도로, 어쩌면 그 '믿음'이라는 것을 넘어 '종교적 맹신'이나 '광신도'처럼 굴면서, 과학에 기대어 산다. 그렇다보니 때로는 '과학'이 가져온 새로운 문제마저도 '과학'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보통은 문제점이 발견된 '주체'에 대한 믿음을 져버리고 새로운 '대안'을 내세워 문제를 해결하려 들기 마련이데, 현대의 과학을 대체할 새로운 것이 마땅하지 않기에 문제를 발생시킨 과학을 '비과학'으로 내몰고, 대안으로 내세우고 문제점을 해결한 과학을 진정한 '과학'으로 새롭게 세우는 일이 당연시 된다. 그만큼 오늘날의 우리는 과학에 대한 믿음(?)이 견고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과학'의 위치는 견고하다고 놓고, '과학자'의 위치도 견고한지 되물어보자. 우리는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신뢰를 보인다. 물론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해서 '기존의 과학'이 허물어지고 '새로운 과학'으로 대체되는 과정은 차치하고서 말이다. 그렇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이는 '과학'과는 달리 '과학자'들에게 보내는 신뢰도는 완벽한 신뢰와는 사뭇 다르다. 왜냐면 '과학자'들은 과학을 행하는 사람이기에 꽤나 신뢰도가 높은 편이긴 하지만, 그들 자체가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종종 '미친 과학자'를 공상과학소설 속에 등장시켜 지구멸망, 인류멸종을 부추기는 '지구정복'이란 허황된 꿈을 꾸는 과학자를 등장시키기도 한다. 때론 인간이 아닌 '과학의 결실'로 만든 '인공지능 로봇'이 사람을 대신해서 허황된 꿈, 아니 로봇에게 어울리는 '엉뚱한 알고리즘의 결과'로 지구환경을 깨끗하게 되돌리기 위해서나, 하나 뿐인 지구를 멸망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서 인류멸종 프로그램을 시작하는 '미친 로봇'이 등장을 예고하기도 한다. 이때에도 우리는 '과학'을 맹신한다고 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과학이 완전무결하게 인간에게 이롭다고만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 과학은 과연 '윤리적'으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느냐고 말이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과학에게 '최선입니까?'라고 되묻고 있다.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과학자의 판단'이 항상 옳다고 믿지 않는다. 또 '과학적 수행'이라면 무조건 옳은 절차이기에 묻지도 따지지도 말아야 한다고 믿지도 않는다. 이렇게 과학적 판단과 수행의 결과물이 늘 '윤리적 문제'를 아무런 문제도 없이 통과하지 않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일본의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논란이 있었을 때에도 일본정부는 '과학적 검증'을 강조하며 완벽하게 걸러진 방사능 오염수는 깨끗하기 때문에 방류해도 안전하다고 발표를 했다. 하지만 우리 정부를 비롯해서 수많은 나라에서 '의문'을 내비췄고, '우려'를 표명했다. 왜냐면 현재의 '과학기술'로 아무리 완벽하게 '방사능 오염수'를 걸렸다고 하더라도 방사성원소인 '삼중수소'는 거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정부도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그런데도 자신들이 방류하는 오염수는 안전하다면서, 이는 '과학적 검증'을 거쳤기에 오염수가 아니라 '처리수'라고 표현해야 맞다면서 끝끝내 방류를 해버렸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방류를 할 계획인가? 일본정부의 발표대로라면 2035년까지란다. 그때에는 '삼중수소'마저 완벽하게 걸러낼 수 있는 '과학적 기술'이 개발될 것이기 때문에, 지금도 안전하지만 그때에는 더 안전할 것이며, 더 나아가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핵연료봉을 해체할 수 있는 과학기술도 개발완료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현재의 문제점을 완전하게 해소할 것으로 기대한단다.

이런 일본정부의 발표에 당신은 얼마나 신뢰를 보내는가? 과연 '방사능 오염수'는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고 마실 수도 있을 정도로 안전하다는 생각이 드시는가? 또한 이미 '과학적 검증'이 되었다는 일본정부의 발표도 신뢰가 가느냔 말이다. 이처럼 우리는 '과학'을 윤리적 잣대로 판단을 할 때 '무한신뢰'를 보낼 수 없게 되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이 책 <과학, 그게 최선입니까?>에는 이런 불편한 진실을 더 많이 마주할 수 있다.

책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는 '과학자들이 항상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과학이 우리는 늘 행복하게 만들지 않는다', 마지막은 '과학이 우리에게 늘 밝은 미래만 가져다 주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각각의 물음에 '상세한 예시'를 보여줌으로써 과학, 또는 과학자에게 '윤리적 물음'에 대한 불편한 답을 조목조목 설명하였다. 그렇다면 이 책은 '과학'을 불신하자는 말을 건내고 있단 말인가? 그건 아니다. 다만, 과학을 맹신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위험요소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알맞은 대비가 필요하다는 것에 역점을 두었다. 그렇기에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지만, 결코 불쾌하지는 않다. 어차피 '과학'도 완벽할 수는 없다. 왜냐면 '과학연구'를 하는 주체가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 과학일지라도 시간이 지나고나면 '틀린 과학'일 수도 있다. 마치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이 옳다고 믿었다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나오자 '틀린 과학'으로 증명된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아무리 믿어 의심치 않을 것 같은 '과학적 진실'이라도 틀릴 수도 있다는 겸손한 자세를 갖춰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으로 증명된 것'을 모두 부정하자는 말이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과학적 증명을 부정하기 위해서 '또 다른 잣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더 정확한 '과학적 검증'을 시도해서 두번, 세번 안전한지, 확실한지 살펴보는 꼼꼼함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물론, 꼼꼼함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많다. 이를 테면, '기후변화' 같은 문제는 아직도 첨예한 대립을 보이고 있다. 한쪽에선 '기후변화'는 축복일 뿐이며 따뜻해진 지구는 더 많은 생명체가 번성하는 시대를 맞이할 것이기에 걱정할 것이 전혀 없는 '자연스런 변화'일뿐이라고 일축하는 반면, 다른 한쪽에선 '기후위기'로 지칭하며 엄청난 자연재앙으로 인해 인류문명은 파괴될 것이고, 생태계는 망가지고, 지구환경은 펄펄 끓거나 빙하기를 맞아 '여섯 번째 대멸종'의 결과를 초래할 뿐이라고 절망적인 전망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최악의 경우를 맞이했을 때를 대비한 '대안'을 마련되어 있는가? 그 또한 '없다'고 한다. 왜냐면 이미 늦었기 때문이란다.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한 '온실가스배출'을 지금 당장 막는다고 해도 지구의 기온이 더 오를 수밖에 없고, 설령 그게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천문학적인 비용'이 발생할 것이기 때문에 현재의 인류는 멸종에 이르기까지 시간을 늦추는 정도밖에, 그래봐야 2040년까지라는 절망적인 전망만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온실가스 감축'을 하지 않으면, 그 앞당겨질 수도 있다는 암울한 전망만 내놓고 있다.

이런데도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할까?'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그렇다'다. 우리 인간은 '하나 뿐인 지구'를 망치는데 주범이고, 확신범이자, 현행범이긴 하지만, 하나 뿐인 지구를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되살릴 수 있는 방법 또한, 역설적이지만 '과학'뿐이다. 물론 이 책에서도 인간의 이러한 '오만'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긴 하다. 과학으로 망친 것을 과학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지구환경에 최악이었고, 인류에게 끼친 해악이 차고도 넘친다고 말이다. 그런데도 어쩌랴? 인류에게 남은 방법이 '과학'뿐이지 않느냔 말이다. 그럼에도 '과학'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거라는 맹신만큼은 결코 가져선 안 된다는 지적에 겸허히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과학에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도 아무런 문제도 없고, 의심할 바도 없을 정도로 청렴결백(?)한 과학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라는 당부를 덧붙이고 싶다. 적어도 이 책에서 묻는 '윤리적 질문'에 과학은 명쾌하게 답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당당해져야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채사장의 지대넓얕 2 : 자본이라는 신 -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생각을 넓혀 주는 어린이 교양 도서
채사장.마케마케 지음, 정용환 그림 / 돌핀북 / 202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CMXXIII / 돌핀북 2번째 리뷰] 1권에서는 '생산수단'의 관점으로 구석기부터 근대 이전까지 경제적인 역사를 살펴보았다. 이제 2권에서는 '자본주의시장'이란 주제로 근대 이후에 펼쳐진 경제상황을 살펴볼 것이다. 과연 '자본'이란 무엇이며, 그에 따른 '노동의 가치'를 살펴보자.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이 일어난 뒤의 경제모습은 많이 달라지게 되었다. 중세까지는 '농업'이 경제의 중심이었기에 수많은 노동력이 필요한 '농사꾼'이 더 많은 부를 쌓게 해주었다. 그래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일꾼을 '토지'에 얽매이게 만들었고, 이들을 '농노'라 불렀다. 그리고 이들을 지배하는 '영주'라고 불리는 지배계급이 '토지(생산수단)'를 소유하고 있어서 농노가 만들어낸 '생산물'을 독점하며, 부를 늘려갔다. 이를 '장원경제'라 부른다. 원시공산사회였던 '석시시대'에는 함께 노동하고 모두가 공평하게 나누어서 불만도 없고, 지배자도 없었지만, 경제생산력은 형편없이 낮았다. 그래서 조그마한 '(자연)환경변화'에도 인간들은 쉽게 굶주렸고 죽어나갔다. 이를 극복하고자 더 많은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도구'를 발달시켰고, 단순한 돌칼이었지만, 농사일을 더 쉽게 해주는 원리를 터득하고부터 인간은 '생산량 증대'를 위한 개발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청동기, 철기 시대를 거쳐 중세의 봉건제와 장원제도가 정착되면서 인간은 더이상 평등한 삶을 살 수 없게 되었다. 사실상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계급이 구분된 것이다. 그리고 생산수단을 독점한 지배자들은 피지배자들이 생산한 물질을 가로채면서(세금 따위) 일하지 않고도 부를 늘려가는 방법을 깨우치게 되었다. 그들은 '생산수단'인 토지를 독점하거나, '생산도구'인 철제농기구, 가축, 그리고 강력한 무기 등을 이용해서 피지배계층이 생산한 물질을 착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평등했던 인간이 불평등해진 까닭이다. 부의 불균형이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혁명 같은 일이 벌어지자 이러한 '구체제'는 빠르게 무너졌다. 부의 불균형으로 인한 피지배계층의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 왕이나 귀족, 성직자 같은 이들은 스스로 '신'을 자처하거나 '신에게 위임(왕권신수설)'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억압과 착취를 당연시 했으나, 르네상스 이후 '신중심의 사상'에서 '인간중심의 사상'으로 바뀌게 되자 더는 피지배계층이 자신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에 참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왕과 귀족, 성직자 들의 권력을 흔들어버리고 난 뒤에 '평등한 세상'이 찾아왔을까? 놀랍게도 그렇지 않았다. 겉으로는 왕과 귀족같은 '특권계층'이 사라진 듯 싶었지만, 그들을 대신할 '부르주아' 계층이 새롭게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선점한 '부'를 이용하여 빠르게 '자본화'하였고, 그 많은 자본을 바탕으로 빠르게 권력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렇게 자본을 이용한 부르주아들이 '지배계층'으로 자리매김하면서 피지배계층의 생산물을 또다시 착취하는 구조가 전개되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노동착취'다. 노동자가 당연히 일을 한만큼 정당하게 받아야 할 '임금'을 경쟁의 논리를 내세워서 '저임금'만 주고 하루 15시간 이상 부려먹는 구조를 만들어나간 것이다. 그렇게 몸을 혹사당한 노동자가 다치거나 병들어서 더는 일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 그냥 '해고'를 하면서 말이다. 왜냐면 아픈 노동자를 대신할 건강한 노동자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열악한 상황은 '산업혁명'이 일어나자 더욱 가속화되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이전에는 노동자보다 농민들이 훨씬 더 많았다.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기보다는 농장에서 먹거리를 생산해야 겨우 먹고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산업혁명이 일어나자 '공장'에서 만들어낸 생산품을 판매해서 얻은 이익으로 먹을거리를 사다먹는 것이 더 싸게 먹히는 일이었다. 국내에서 먹을거리가 부족해지면 외국에서 수입해오면 그뿐이었다. 이젠 '공장'을 얼마나 더 많이 돌리느냐가 '자본증식의 관건'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공장의 수를 늘려나가다보니 더는 '수익창출'을 하기 힘들어졌다. 왜냐면 '공급과잉'으로 인해서 더는 생산품을 판매할 곳(시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유럽국가는 '공급과잉'으로 인해 저생산저성장 경제구조로 경제난에 허덕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유럽국가들은 어떻게 해결했을까?

그건 바로 '시장개척'이었다. 공장에서 만든 생산품을 판매만 하면 돈을 벌 수 있는 '자본주의'는 더 많은 생산을 해내는 것이 관건이다. 많이 만들어서 많이 팔면 많은 돈을 벌 수 있으니, '기계'를 도입해서 더더더 많은 수익을 창출하면 그뿐이었다. 그런데 유럽국가들 안에서는 더는 '시장'이 확보가 안 되니 공장을 돌리면 돌릴수록 손해를 입게 되었다. 그렇다면 공장문을 닫고 기계를 멈추는 것이 '순리'겠지만, 자본주의는 또 다른 방법을 찾아냈다. 생산품을 판매할 수 있는 '시장'을 늘리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유럽의 각국은 시장개척을 위해서 '식민지쟁탈전'을 벌였다. 그로 인해서 인간(백인)이 인간(유색인)을 죽이고 땅을 빼앗고, 원재료를 헐값에 사들이고, 자신들이 만든 생산품을 고가에 강매하는 짓을 서슴치 않았다. 그런 만행을 저지르고도 자신들의 죄를 감추기 위해서 '미개한 사람들을 문명화시킨다'라는 제국주의를 퍼뜨려서 인간사회에 '약육강식의 이론'을 적용하는 무리수까지 저지르고 말았다. 그렇게해서 '자본주의'는 유럽인들을 배불리 먹여 살렸다.

그런데 발빠르게 식민지점령에 뛰어든 선발주자들은 배불리 먹었지만, 독일이나 이탈리아 같은 후발주자들은 '식민지'로 삼을 만한 땅이 없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래서 벌어진 것이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다.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사건으로 촉발된 전쟁이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그 실상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자본주의의 탐욕'이 부른 당연한 귀결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엄청난 인명살상이 벌어진 전쟁의 참상을 직면하고서 탐욕을 조금이나마 줄이게 되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자본주의는 엄청난 인명살상과 파괴를 일삼고 온통 폐허가 된 자리에서 또다시 엄청난 수익창출을 해냈다. 각국이 참전한 전쟁에서 서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 '전쟁물자'를 더 많이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더 강한 무기를 만들려는 욕망 덕분에 '과학기술력'은 더욱더 발달하게 되었다. 자본주의는 이를 기반으로 엄청난 수익을 창출하게 된다. 이른바 '수요폭발'이다. 이렇게 되면 자본주의는 또다시 공장을 더 많이 만들고, 기계를 가동시켜서, '공급과잉' 상태를 지속하게 된다. 모든 것을 파괴하는 전쟁으로 말미암아 만드는 족족 '생산품'을 팔려나갈 테니까 말이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뒤에도 '전후 복구사업'으로 인해 경제호황은 계속 이어나간다. 사람들은 호황속에서 노동만으로 돈을 버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주식투자'라는 새로운 수익창출 방법을 익혀 나간다. 경제호황 상황에서 '투자'는 곧 '이익'이니까 말이다.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주가'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은 돈을 엄청 벌게 되고, 그 덕분에 돈을 펑펑 쓰기도 한다. 오늘이 지나고 내일이 되면 돈을 더 많이 벌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공급과잉' 상태가 지속되면 언젠가 '시장'은 포화상태가 된다. 세계대전이 끝났을 무렵에는 전세계에 더는 '식민지'를 확보할 수 있는 곳도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는 정말 '공급과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공장'문을 닫아야만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멈추는 순간 큰일이 난다. 그동안 받은 '투자금'이 얼마인데, 그 투자금에 이익까지 챙겨서 투자자에게 돌려주려면 결코 멈출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공급과잉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미 시장은 포화상태다. 물건을 만들어서 내놓아도 사줄 사람이 없다. 그렇다면 노동자의 임금을 줄여서라도 상품의 가격경쟁력을 올려야 한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경쟁사도 금방 따라한다. 경쟁사는 더 싸게 물건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럼 노동자를 해고해서라도 상품의 가격경쟁력을 올려야 한다. 그러나 이런 방법도 경쟁사가 금세 따라한다. 경쟁사는 더 싸게 물건을 판매하다가 그만 망해버렸다.

이제 시장에는 '값싼 물건들'이 넘쳐난다. 소비가 살아났을까? 소비를 해야할 주체가 바로 '노동자'였다. 그런데 그 노동자가 방금 '해고' 당해서 실업자가 되었다. 소득이 없어졌으니 생계가 막막하다. 그래서 소비를 더욱 줄인다. 그리고 맡겨놓은 예금과 내일을 위해 투자했던 원금을 찾기 위해 은행에 가지만, 이미 늦었다. 공장들이 줄줄이 파산을 하니, 그 공장에 대출을 해주었던 은행도 뒤를 따라서 도산을 해버렸다. 노동자들은 실직에, 예금에, 투자금까지 다 날려버려서 살길이 막막해진다. 바로 미국 월가의 '검은목요일'과 뒤이어 벌어진 '경제대공황'이다. 이때 노동자 4명 가운데 1명이 자살을 했다고 한다. 그만큼 큰 충격을 준 것이다. 미국을 강타한 경제대공황은 유럽을 거쳐 아시아까지 퍼져 나간다. 그나마 식민지를 거느린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국에 닥친 대공황의 여파를 '식민지'에 떠넘기면서 용케 해쳐나가지만, 아시아와 아프리카 식민지에서는 그야말로 산 사람 입에 거미줄을 칠 정도로 극심한 가난을 겪게 만들었다고 한다.

자, 이렇게 엉망진창이 된 경제상황을 만든 '자본주의'는 이후로 정신을 좀 차렸을까? 발빠르게 성장하고 호황을 누릴 수 있었던 원동력 '공급과잉'이 저지른 폐해를 목도하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면, 인간의 미래는 어둡기만 할 것이다. 2권의 내용은 여기까지고, 그 뒷이야기는 3권에서 펼쳐질 것이다. 여기까지의 이야기가 1930년대다. 지금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와 불과 100년의 차이만 있을 뿐인데, 자본주의는 참으로 많은 문제를 품고 있다. 그런데도 현재도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전세계적으로 유일한 경제체제로 작동하고 있다. 대안이 시급해 보이지 않은가? 그런데 정작 더 큰 문제는 '대안'이 보이질 않는다는 점이다. 과연 3권에서는 그 '대안'이 보일 것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