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주식투자가 처음인데요 : 기본편 - 2022년 개정판 처음인데요 시리즈 (경제)
강병욱 지음 / 한빛비즈 / 202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주식은 잘 모른다. 솔직히 말해, '경제'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단순히 돈을 벌어서 쓰고, 물건을 만들어 팔고, 세금을 걷어 나라살림에 쓴다는 것을 대충은 이해할 나이가 되었지만,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이 정상인지, 나빠진 경제상황을 어떻게 좋게 만드는 건지, 심지어 경제상황이 좋아지는 지표가 무엇인지도 정확히는 잘 모르겠다. 이 나이를 먹도록 그저 돈을 벌어서 저축하고 알뜰하게 쓰다 목돈이 필요할 때 쓰는 평범한 경제를 누려 왔을 뿐이다.

 

  그런데 요즘엔 누구나 '주식투자'를 하는 모양이다. 나름 지인의 권유(?)로 '변액연금'에 가입해서 '펀드형식의 간접투자'를 하고는 있지만, 크게 수익이 난다는 느낌도 없고 좀더 지켜보다 별볼일 없다는 결심이 들면 해약을 할 생각을 하고...는 있지만, 아직까진 난 직접적인 주식투자를 시작하지는 않고 있다. 그래도 다들 하고 있다는 생각에 '주식'에 관한 책을 몇 권 읽어보긴 했지만, 막연하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뿐..더 이상의 용기는 나질 않는다. 이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위험성이 높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탓이고, '매우 심한 안정성 추구 심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할 수 있겠다.

 

  맞다. 주식은 '투자'이고, 투자는 '원금손실'이라는 위험성을 저변에 깔고 있다. 그런데도 주식투자 전문가들은 말한다. "적금에 들 바에야 주식을 하라"고 말이다. 이유는 한결 같다. 유명한 '존 리'의 표현이 아니더라도 여러 전문가들이 [적금이자 10년 <<< 주식투자수익 10년]이 훨씬 더 큰 이익이라고 조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식투자에 뛰어든 사람들이 모두 돈을 버는 걸까? 아쉽지만 그런 건 아니란다. 기대 이상의 수익을 거둔 사람도 있지만 잘못된 투자로 인해 '가진 돈'을 몽땅 날리고도 모자라 '큰 빚'까지 짊어지게 된 이들도 부지기수라고 말한다. 특히, 개미라고 불리는 '개인투자자'의 피해는 생각보다 크다는 기사가 꾸준히 나오는 것을 보면 위험성에 대한 불안이 쉽사리 가시지 않는 것도 당연지사일 것이다.

 

  그런데도 왜 투자를 계속 권유하는 것일까? 경기가 호황일 때는 누구나 손쉽게 투자수익을 올리기 때문에 권유하는 것이 타당하다고도 보인다. 그러나 요즘 같이 경기 불황의 조짐을 보이며, 금리가 인상되어 시중 자금을 빨아들이는 상황에서 '주가'마저 하락세로 꺾였는데도 왜 투자를 자꾸 권유하는 것일까? 결론은 이 와중에도 투자수익을 쏠쏠히 챙기는 사람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경기가 호황일 때 수익을 내는 투자방식이 있고, 경기가 불황일 때도 수익을 낼 수 있는 투자방식이 분명히 있다는 말이다. 그런 까닭에 '올바르고 슬기로운 투자방식'을 배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는 것이다.

 

  이 책의 취지가 그렇다. 주식의 기본 중의 기본부터 차근차근 배워 '투자의 개념'부터 바로 세운 뒤에 '적절한 투자방법'을 착착 배워나가면 누구나 '주식투자'로 성공할 수 있고, 이 책은 바로 그 성공비법을 익힐 수 있는 <입문서>라고 자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읽어보면 정말 '친절한 기초 개념설명'을 해주고 있기에 '주식을 시작하는 이(주린이)'에게 권하고 싶은 책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난 아직도 망설여진다. 기초를 익혔으면, '실전'을 통해서 '투자경험'을 쌓으며 해나가면 될 텐데도 여전히 망설여진다. '투자위험성' 때문이기도 하고, '안정성추구' 덕분이기도 하지만, 주식투자에 과감히 던질 '밑천'이 없는 탓이 크다. 다시 말해, '여윳돈'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주위에선 이런 나를 보면서, '소액투자'를 권하기도 한다. 한 달에 10만 원 정도라도 해보라고 말이다. '그 정도'라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아주 적은 돈이 아니냐면서 말이다.

 

  결론만 말하자면, 내게 10만 원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아직까지도 1000원짜리 물건을 살 때조차 손이 벌벌 떨리기 때문이다. 적은 수입(월급)으로 알뜰살뜰하게 살던 버릇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그렇다. 매달 10만 원 적금을 부어 꼴랑 1만 5천 원 이자를 챙길지언정 '원금손실'이 없는 안정적인 적금에 만족하고 있는 형편이다. 하지만 조만간 이 책을 다시 곱씹으며 '주식투자'를 시작하리라 다짐한다. 글쓴이도 말한다. "주식을 잘 모르겠으면 적금을 드는 것이 훨씬 낫다"라고 말이다. 워렌 버핏도 "투자의 기본도 모르고서 투자에 뛰어드는 사람이 가장 멍청하다"라고 말했단다. 이래저래 '투자는 기본을 탄탄히 한 다음에 뛰어드는 것이 정석'인 모양이다. 다른 <주식입문서>는 무작정 시작부터 하라고 권하는데, 이 책은 무작정 뛰어들지 말고 '준비운동'을 철저히 한 뒤에 뛰어들어도 늦지 않다고 권하고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2 - 항우와 유방 - 제국의 붕괴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2
김태권 글.그림 / 비아북 / 201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진시황이 죽었지만, 아직 진나라는 망하지 않았다. 2세 황제 '호혜'가 건실하게 존재했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바로는 호혜는 무능한 임금에 불과했고, 간신배들에게 농간을 당하다 끝내 진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했다고 한다. 허나 이는 백제의 멸망을 의자왕 탓으로 돌리고, 고구려의 멸망을 연개소문의 아들들이 임금을 허수아비로 세우고 지들끼리 싸웠기 때문이라고 단정 짓는 것만큼이나 무책임한 결론이다. 원래 망국의 임금이나 지배층은 '결과론적으로' 무능하다고 평가받기 일쑤라는 점을 간과하고서 근본적인 원인을 분석하길 게을리한다면 '역사학의 발전'은 기대할 것인 못될 것이다. 스승의 성과를 답습하고, 그에 딴죽을 걸지 않고서 어찌 청출어람을 바랄 것이냔 말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도 김태권은 날카로운 관점을 뽐냈다. 진나라의 멸망은 '회음후'에서 비롯되었다고 말이다. '회음후'란 바로 '한신'을 일컫는다.

 

  여러 역사가들이 한신을 몰락한 귀족출신이라고 의심하지 않는다. 한신의 신분에 대한 고증은 빈틈이 많은데도 그가 '커다란 칼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는 문구를 곧이 곧대로 해석하여, 시정잡배의 가랑이를 기어가는 수모를 겪으면서도 '인내력'을 뿜뿜하였으니 귀한 집안의 자제로서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으며, 훗날 '한나라 대장군'을 역임하고, 당당히 제나라의 임금에 올라 천하삼분지계의 한 축을 맡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초한지>의 주인공인 항우와 유방, 그리고 한신이라는 '삼파전'을 흥미진진하게 서술해나가곤 한다.

 

  그런데 정말 한신이 '몰락귀족' 출신이었을까? 여러 사료를 둘러보면, 허리에 큰 칼을 차고 다닐 정도로 비범한 행색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진승오광의 농민전쟁'에 참가했을 때에도 변변한 직책을 받지 못했고, 농민군이 연이은 패배로 괴멸되자 초나라 장수인 '항량'의 패거리에 낑겨서 진나라 정규군에 저항할 때도 변변한 직책도 없이 '졸병'에 그쳤을 뿐이다. 훗날 항우와 함께 진나라 군사와 싸울 때도, 유방과 함께 파촉으로 내몰렸을 때까지도 한신은 그저 별볼일 없는 '병졸'에 불과했다. 그러다 유방의 엉뚱한 명령(?)으로 인해 죽음으로 내몰렸을 때, "어찌 인재를 몰라보고 나(한신)를 죽게 하시나이까?"라는 울분에 찬 외침소리를 낸 뒤에 기발한 계책으로 코너에 몰린 유방을 승승장구하게 만들면서 화려하게 부활하게 된다. 드디어 잠자던 용이 물을 만나 승천하는 기세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을 정도다.

 

  이렇게 한신은 '비루한 인생'에서 '대장군'을 거쳐 잠시나마 '한 나라의 임금'에까지 오르게 된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한신은 제갈량보다 훨씬 앞서서 '천하삼분지계'의 당당한 주인공이 될 수도 있었으나 자기 밥그릇을 제 발로 차버린 격으로 항우와 유방 사이에서 유방을 편드는 쪽을 선택해 결국 '유방의 승리'를 거들어주는 역할에 만족(?)해버리고 만다. 만약, 한신이 유방과 항우의 싸움을 적절히 대거리하다가 둘이 지쳐서 쓰려졌을 때 '어부지리'를 취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역사의 '만약에~'를 떠올리게 만드는 대목이기도 하다. 사마천의 <사기> '회음후열전'에 따르면, '한신의 선택'은 어려운 처지에 내몰렸을 때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써준 고마움을 차마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전하고 있는데, 권력을 차지하고 승패를 겨루는 싸움에서 '은혜'와 '의리'를 따지는 모양새가 영락없이 서민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를 유심히 째려보며 고찰해보면, 그의 출신이 '귀족'이 아님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여러 역사가들의 견해처럼 그가 '몰락귀족'이었고, '몰락한 가문'을 되살리려는 숙명을 지녔다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항우와 유방의 유명한 싸움은 '귀족 도련님 vs 시골 건달'의 대결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먼저 '역발산 기개세'라던 항우는 싸울 때마다 연전연승을 거두며 진나라를 멸망의 문턱까지 내몰아놓고서도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격'이었기 때문이다. 김태권도 이를 적절히 지적하면서 진나라의 수도 장안을 점령해놓고도 고향땅이 그리워 초나라로 되돌아간 정황을 '항우의 잘못된 선택'으로 꼽았다. 이해를 돕기 위해 우리식으로 표현한다면, 애써 힘들게 서울을 점령하고도 고향땅 전라도 광주로 군대를 되돌려 버린 셈이란 말이다. 이를 두고 항우는 "비단옷을 입고도 뽐낼 수 없다면 애써 고생한 보람이 없을 것이다. 고향땅(초나라)으로 되돌아가 당당히 뽐낼 것이다"라고 변명했는데, 여기서 나온 고사가 바로 '금의야행'이다. 비단옷을 입고 밤거리를 거닐다는 뜻인데, 항우는 산을 뒤집는 힘과 세상을 집어 삼킬 기세로 겨우 초나라 왕으로 만족하는 도련님이었던 것이다.

 

  반면에 시골 건달 출신인 유계(유방이란 이름은 한나라 고조에 등극하고서 지은 이름이고, '막내'라는 뜻의 '계'가 원래 이름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유막둥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싸웠다하면 지는 운빨만 드럽게 좋은 '럭키보이'였다. 다시 말해, 유계는 배운 것이 없어 무능했으나 주위에 '장자방'이 있고, '한신' 등등 항우와 대신 싸워줄 인재가 넘쳐났다는 점에서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었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유계는 '매력덩어리'였을까? 수많은 역사가들은 그렇다고 말한다. 하지만 김태권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시골 건달에게 매력이 있어봐야 얼마나 있었겠느냔 말이다. 차라리 이렇게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첫째, 망해가는 진나라에 살기 힘들어진 백성들이 '초나라 편'을 들었다. 둘째, 초나라 편은 '진승과 오광', '항우', '유계(한신)' 등이 있었다. 셋째, 진승과 오광은 출신이 저열해서 무모한 작전을 펴다 괴멸 당했고, 항우는 힘은 셌으나 맞서 싸우도 죽이고, 항복해도 죽이고, 심지어 자기 편도 죽이는 깔끔떠는 도련님이라서 민심을 잃었기에, 다른 선택지를 선택할 겨를도 없이 '유계의 편'에 뛰어들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는 해석이다.

 

  그도 그럴 것이, 유계에게 '장자방'과 '한신'이 없었다면 그야말로 헛발질만 계속 해댔기 때문이다. 거기다 질투심은 얼마나 쎈지 통일대업을 이룬 뒤 장자방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 목숨을 살리려 도망가버리고, 싸움에서 지고 온 뒤에는 '연전연승'하던 한신의 군대를 뺐어서 자신의 군대로 삼아버리기 일쑤였으며, '한' 건국 이후에는 끝내 한신마저 '토사구팽' 해버리는 천하의 몹쓸 종자가 바로 '유방'이었기 때문이다. 매력덩어리라는 해석보다는 오갈 데 없으니 그나마 만만한 '유계의 편'을 들었다가 각자도생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근거로 보여지는 대목이다. 다음 편에선 '유방의 최후'가 펼쳐질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네버랜드 클래식 1
루이스 캐럴 지음, 존 테니엘 그림 / 시공주니어 / 201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책을 고를 때 고민스러울 때가 많다. 더구나 부모가 '자녀교육'이라는 관점을 고려하게 된다면 어쩔 수 없이 '교훈'이 담긴 이야기책을 고르려 하기 때문이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자녀가 독서도 즐기면서 '배울 점'도 있으면 참 좋을 것이라 막연하게 기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이들은 눈치가 빠르다. 재미난 이야기가 아니라면 '교훈'은 둘째치고 아에 읽으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래선 부모가 원하는 '자녀교육'과 '교훈'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치고 마는 셈이 되고 만다.

 

  그럴 땐, '교훈' 따위는 잠시 내려 놓길 바란다. 순수하고 온전하게 '재미'만을 추구한 이야기로 먼저 독서습관을 잡아놓은 뒤에 '교훈'을 슬그머니 챙겨도 결코 늦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뜻에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100%의 재미만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후회없는 선택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대로 아이들에게 이 책을 권해주고 나면 기대했던 것만큼 '성과'가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이 무려 150년 전에 인기를 끌었던 책이고, 디즈니 만화영화조차 70년 전인 1950년대에 선을 보여 흥행을 이끌었던 것을 간과한 결과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요즘 아이들에게는 흥미로울 것도 없는 고리타분한 내용의 책이란 말이다. 요즘 아이들에게 생생한 '이상한 나라'는 책속이 아니라 '너튜브(동영상) 세상'속에서 더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읽을만한 가치도 없는 낡은 옛책에 불과할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요즘 아이들에게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상력'을 키워줄 수 있는 훌륭한 고전이라는 점을 모르고서 하는 말이다. 또한 이 책의 알짜배기는 바로 '언어유희(말장난)'에 있다. 더구나 토끼가 옷을 쫙 빼입고서 고급스런 회중시계를 들여다보면서 "늦었다, 늦었어"라고 말하는 '판타지적 요소'가 교과서적으로다가 때려박혀 있는 '명품고전판타지'라는 배경지식을 언급해주지도 않고서 아이들에게 권해주는 것은 어리석은 부모들이나 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미권'에서는 아직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로 '언어유희'를 배우고, 풍자와 해학을 즐기며, 판타지의 세계관을 익히는 고전중의 고전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나라 어린이들이 그런 유익한 재미와 즐거움을 맛보지 못하는 까닭은 '뒤침(번역)'이라고 하는 1차적인 문제점에 봉착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발음(동음이의어)으로 엉뚱한 대화를 지껄이고, 원래의 내용과는 아주 다른 시와 노래를 읊고, 심지어 시시때때로 변해버리는 자신으로 '본래의 나'가 누구인지 헷갈려서 '본질'이라고 하는 철학적 고뇌에 빠져버리는 엉뚱한 소녀 앨리스를 보면서 웃음보를 터뜨리지 않을 수 없게 하는데도, 이를 우리말로 옮겨버리고 나면 그런 '원초적 재미'를 전혀 느껴볼 새도 없이 아주 요상한 이야기만 되풀이되고 말기 때문에 '배경지식'이 풍부하지 못한 어린이들이 이 책을 읽으면 그저 그런 이야기책으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그럴 땐, 어른들이 부연설명을 해주며 아이와 함께 읽어도 좋을 것이다. "앨리스가 크로켓을 할 차례가 되었네. 그런데 앨리스는 칠 수가 없었어. 크로켓 공을 쳐야 하는 막대기가 살아있는 홍학이었거든. 앨리스가 여왕처럼 멋진 스윙을 하려고 힘껏 휘두르면 홍학이 얼굴을 들어올리고 앨리스에게 '안녕~'이라고 인사를 하지 뭐니. 앨리스는 그런 홍학을 달래서 공을 잘 칠 수 있게 다시 한 번 스윙을 휘둘렀지만 또 칠 수가 없었어. 왜냐면 홍학이 또 얼굴을 들고서 앨리스에게 사정을 했거든. '정말 날 휘두를거야? 나 무척 아플텐데, 흑흑' 왜 그랬을까? 사실은 크로켓 공도 살아있었기 때문이야. 바로 고슴도치였거든. 고슴도치는 홍학이 자신을 치려고 하자 따꼼한 가시를 바짝 세우고서 벌벌 떨고 있었기 때문이지. 하지만 결국 앨리스는 크로켓 경기에서 질 수밖에 없었단다. 어찌어찌 고슴도치를 쳐봤자 공은 제멋대로 달아나기 일쑤였고, 골대도 여왕의 명령에만 따르는 카드병정이었거든. 깔깔깔" 이렇게 이야기를 들려준 다음에 책을 읽으면 '상상력'은 더욱 배가 되어서 글자가 살아 숨쉬는 효과를 발휘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어디 그뿐인가. 비싸디 비싼 '후추'를 온 집안에 날릴 정도로 뿌려대는 흥청망청 욕쟁이 귀족에게는 날카로운 풍자를 엿볼 수 있고, 앨리스가 어려운 일에 쳐할 때마다 도와주는 체셔고양이와 애벌레는 또 어떻고, 제멋대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바람에 앨리스를 도와주는 건지 골탕먹이는 건지 알 수가 없잖아. 거기다 제법 어른스런 충고를 해주는 존재가 고작 애벌레였다는 사실도 놀라운데, 그런 애벌레가 담배를 꼬나물고서 뻐끔거리는 장면에서는 '반어법의 정수'를 느낄 수 있지, 그리고 모자장수와 3월 토끼, 겨울잠쥐가 벌이는 엉뚱발랄한 티파티는 익살과 해학이 무엇인지 제대로 맛볼 수 있단다. 이런 재미난 이야기를 '영어식 언어유희'를 통해 펼쳐지고 있는데, '뒤침(번역)의 한계'에 부딪혀서 제대로 느낄 수 없다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이쯤되면, 우리 나라 아동서적 1위 출판사인 [시공주니어]에서 '네버랜드 클래식' 제1권으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꼽은 까닭도 절로 이해가 될 법하다.

 

  명작고전은 '베스트셀러'가 아닌 '스테디셀러'다. 단순히 '많이 팔린 책'이 아니라 '오래도록 사랑받고 널리 읽힌 책'이라는 부연설명이 적절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감히, 명작고전으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손꼽고 싶다. 다만, 이 책의 장점인 '언어유희'와 '상상의 나래'를 제대로 느낄 수 있기 위해선 꼬꼬마 어린이보다는 초등학생 중학년 이상에게 권한다. 혼자서 읽으며 순수한 재미를 즐기기 위해선 중학생 이상의 청소년에게 권하고 말이다. 영어실력이 받쳐준다면 '원작'도 함께 즐겨보길 권한다. 영미권에서 왜 아직도 사랑받는 고전인지 그 이유를 잘 느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책은 '상상력'이라고 하는 훌륭한 교훈이 담겨 있다는 점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책의 시작과 끝부분에 등장하는 '앨리스의 언니'와 사뭇 대조되는 것을 통해서 '앨리스의 엉뚱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상상력=비상식'이라면서 비판의 대상이었고, 앨리스의 언니를 모범생으로 추켜세우고, 앨리스는 말썽이나 일으키는 엉뚱한 문제아로 비춰졌을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어떤가? 모범생이 환영받고 있는가?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세상의 틀'에 잘 적응하는 것만이 유일한 생존법(?)이었던가? 21세기에는 '기존의 뻔한 틀'을 과감히 깨트리는 '파격적인 인재'가 환영받는 시대다. '틀에 짜여진 상상'은 이미 상상이 아니고 상상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자녀가 이 책을 읽고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만 있다면...애초에 '교훈'을 찾아 헤메던 부모들의 걱정거리도 줄어들지 않을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1 - 진시황과 이사 - 고독한 권력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1
김태권 글.그림 / 비아북 / 201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국시대의 혼란을 종결하고 진나라로 통일한 첫 번째 황제 '진시황'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이룬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오랜 전쟁으로 지친 백성들의 안위와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 불철주야 열과 성을 다한 뛰어난 군주로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데 반해서, 사마광의 <자치통감>에서는 군력욕에 눈이 멀어 탐욕스럽고 전쟁에서는 악랄하며 걸핏하면 폭력을 일삼는 폭군에 지나지 않다면서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기 때문이다. 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경향은 얼마든지 볼 수 있지만 '진시황'처럼 극단적인 평가를 받는 이도 드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전국을 통일할 정도로 강력한 진나라가 진시황과 그의 아들 호혜를 끝으로 꼴랑 2대 만에 멸망하고 말았기 때문에 미스테리한 점이 한둘이 아닌 것도 그런 평가를 부르는데 한 몫 단단히 할 것이다.

 

  고대사 미스테리 가운데 하나인 '진나라의 멸망'에 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줄 고마운 책이 바로 <김태권의 한나라이야기 1권>이다. 특히, 진시황과 이사에 대한 통찰은 이 책의 백미로 꼽을 수 있다. 참고로 이 책은 사마천의 <진시황본기>와 <이사열전>을 주요사료로 들어서 풀어내고 있다. 간간히 <자치통감>과 그밖의 '해설서'를 참고 삼아 풀어냈지만 사마천의 <사기>의 관점을 골자로 삼았음을 밝힌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김태권만의 날카로운 관점'일 것이다. 사실, '역사책'을 다루다보면 역사적인 관점에 꽂힐 수밖에 없다. 역사적인 사실들의 나열만 담긴 역사책만큼 지루한 책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관점'이 소설책만큼이나 중요하고, 이 관점을 얼마나 통렬하게 째려볼 수 있느냐가 역사책을 읽는 재미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태권이 풀어내는 진시황과 이사에 관련된 에피소드에 주목하면 원작인 사마천의 <사기>도 달리 보이게 될 것이다.

 

  암튼, 이 책에서 주목해볼 만한 점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째는 '진시황이 권력을 집중해서 통치하는 스타일인 '군현제'를 실시하게 된 까닭'을 밝혀낸 부분이다. 초기 중국역사에서 중요한 통치방식은 무엇보다 '봉건제'다. 쌍무적인 계약관계를 중요시한 서양의 중세 봉건제와는 달리 중국의 봉건제는 '가족중심', 또는 '혈연중심'이라는 점이다. 통신과 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먼 옛날에는 넓은 지역을 통치하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 그 때문에 중심이 아닌 먼 지방은 '믿을만한 인물'을 대신 보내서 통치하도록 했는데, 이게 바로 '봉건제'다. 하지만 진시황은 모든 것을 중앙에서 컨트롤하는 '군현제'를 실시했는데, 이는 진시황이 가족을 믿을 수 없는 아픔을 간직했기 때문이다. 바로 아버지처럼 섬겼던 '여불위' 때문이다.

 

  소문에 의하면 '여불위'는 진시황의 친아비로 알려져 있다. 왜냐면 진시황의 어머니가 바로 여불위 집안의 무희로 지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비극은 진시황의 어머니와 노애 사이의 불륜이 들통난 것이고, 이로 인해 '노애의 반란'이 일어나자 진나라는 혼란에 빠졌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여불위'도 노애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밝혀져 진시황은 노애를 죽이고, 어머니를 유배 보내고, 여불위를 자살하게 만드는 등 '가족'과 관련된 콤플렉스를 갖게 되었다는 썰을 풀어내고 있다. 이것이 '군현제(중앙집권제)'를 실시하게 된 첫 번째 까닭이라고 밝히고 있다. 논란 검증은 둘째치고 말이다. 역사적인 호기심을 한껏 불러 일으키는 재미난 에피소드 아닌가?

 

  또, 진나라가 강력한 통일국가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법가'에서 찾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 볼만 하다. 물론, 통일 전부터 진나라는 '상앙'에 의해 법가 스타일로 강력한 힘을 발휘했었다. 하지만 통일 이후에는 '이사'의 법가 스타일로 탄탄대로를 이어 나갔는데, 이 책에서는 '유가(유교)'를 신봉하는 구시대적인 신하들과의 논리정연한 담판이 압권이었다. 통일 직전에 진시황은 이사와 동문수학한 '한비(한비자)'를 국정파트너로 삼고 싶다며 한나라를 공격하기에 앞서 '한비와의 만남'을 원했는데, 막상 만남을 가지고 난 뒤에는 '기대이하'였다면서 한비를 되돌려 보내려 했다. 그러자 이사가 말한다. "당장 쓰지 않으려거든 지금 죽여야 한다"고 말이다. 까닭인 즉슨, 한비처럼 뛰어난 인재를 바로 쓰지 않고 나중에 쓰려 한다면 이득은 전혀 없으면서 훗날 적국(한나라)의 인재로 쓰여서 통일의 대업을 망칠 수도 있으니 당장 죽이는 것만큼 이로운 일이 없다고 조언한 것이다. 또한, 진시황이 국산품(진나라의 인재)보다 수입품(외국에서 들여온 인재)을 더 선호하니 진나라에 이로울 것이 없다고 울부짓는 신하들 때문에 곤혹스러워 할 때, 이사는 자신 또한 '수입품(외국인재)'에 불과한데도 이처럼 통일을 이룰 정도의 업적을 남겼는데, 자칭 '국산품'이라는 작자들이 한 일이 무엇이냐면서 호통치는 대목도 짜릿한 전율이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이처럼 '법가 스타일'은 시원시원스러운 맛이 일품이다.

 

  그러나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는 법, 법가 스타일로 탄탄대로를 질주하던 진나라도 '분서갱유'를 만나면서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옛 것을 연구하던 신하들이 진시황에게 왕왕 간언한 내용 가운데 "요순시대처럼 태평성대를 이루어야 진나라도 영원할 것이다"라는 내용 때문이었다. 그래서 진시황이 일처리를 하면서 여러 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을 때마다 '유가 스타일'의 신하들이 '요순시대'와 '봉건제'를 언급하면서 진시황의 '법가 정책스타일'과 '군현제'에 흠집을 내면서 딴죽을 걸곤 하던 것이 끝내 사단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이야기 전개는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분서갱유'는 진시황의 실책 가운데 빠지지 않고 등장해 질책을 받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물론 질책하는 대상들이 '유가(공맹사상)의 후손'이라는 것은 뻔한 짐작이고 말이다. 암튼, 그로 인해 진시황과 이사는 '실용서적'을 제외한 모든 옛날 책(법가 이외의 사상)을 불태우라 지시하는데, 이것이 바로 '분서'다.

 

  그런데 '갱유'에 대해서는 익히 알려진 '유학자들을 산 채로 매장해 죽였다'는 내용과는 사뭇 다른 이견을 실었다. 유학자들만 골라서 생매장했다는 '갱유'가 아니라 여러 사상가들이 진시황을 진노케 했으니 대대적인 숙청을 했다는 '갱제생(제생은 뭇선비를 뭉뚱그려 일컫는 말)'의 잘못이라고 말이다. 물론 '갱제생'에는 유생들도 포함되어 있을테니 '갱유'라는 말로 한편으론 틀린 말은 아니겠으나 <자치통감>을 쓴 사마광이 유학자의 관점에서 콕 집어서 '갱유'라고 표현한 것은 다른 사상가들은 알 바가 아니지만 유학을 공부한 유생들이 화를 입은 것은 참을 수 없다는 '선택적 분노'가 담긴 표현이라고 지적한 셈이다.

 

  그렇다면 진시황은 왜 '갱제생'을 실행했던 것일까? 그건 바로 '방중술'과 관련이 깊다. 진시황이 불로장생을 꿈꿨다는 사실은 널리 알져진 사실이다. 늙지 않고 죽지도 않는 신비로운 영약을 찾겠다며 삼천 동자와 소녀를 데리고 동쪽으로 사기치고 도망간 사건은 진시황이 속아넘어간 사기 가운데 '새발의 피'에 해당하는 것이었단다. 이렇게 아무런 성과를 얻어내지 못하고 진시황을 속이기에 여념이 없던 '방술사'들이 더는 꾀(?)를 낼 수 없게 되자 도리어 "황제는 요순과 같이 어질지도 못하면서 똑똑한 척은 다한다", "모든 일을 자기 혼자 처리할 정도로 권력욕이 너무 많기에 신선이 될 수 없다"는 등 입에 담지 못할 비방을 지껄이고서는 유유히 도망을 쳐버린 것이다. 이에 극대노한 진시황은 '지식인'이랍시고 허튼소리를 지껄이는 놈들을 몽땅 잡아들여 숙청을 해버리니..정작 화풀이 할 대상을 엉뚱하게 삼아서 사단을 일으켜 버리고 말았다. 이를 보다 참지 못해 입바른 소리를 한 맏아들 부소에게 먼 변경이나 지키라면서 내쫓아버리고 나중에는 환관 조고와 이사의 꾐에 빠져 '첫째 황자(부소)'가 죽음에 이르게 되니 진나라의 멸망을 앞당긴 초석이 되어 버리고 만다.

 

  이처럼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을 흥미로운 관점으로 다시 읽을 수 있는 볼거리를 제공해주는 역사만화다. 다음 책은 '항우와 유방'의 한판 대결이 펼쳐질 예정이다. 조만간 리뷰로 선보여 드릴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씨남정기 : 여자의 적은 여자인가? 물음표로 따라가는 인문고전 19
강영준 지음, 박미화 그림 / 아르볼 / 202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포의 <구운몽>은 즐겨 읽었지만, <사씨남정기>는 이번에 처음 접했다. 비교적 어릴 적에 접했던 <구운몽>이 그닥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만중의 정치적 성향이 '서인'이었던 탓도 컸다. 굳이 페미니즘 관점이 아니더라도 '일부일처제'의 조선시대에 팔선녀와 인연을 맺고 인생의 희노애락이 그저 일장춘몽에 그치지 않다는 내용이 상당히 모순적이라고 여겼기 때문이고, 정치적으로 봤을 땐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의 당파가 훗날 노론으로 이어지고 끝내 조선을 망국으로 이끌었다는 괴씸죄를 김만중에게도 은근히 따져 물었던 탓이 컸기 때문이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이미지)이 안 좋아 읽지 않았던 것이다. 암튼 뒤늦게 접한 이유는 여기까지다.

 

  하지만 <서포만필>에서 밝혔듯이 김만중은 '우리말글의 소중함'을 일찌감치 깨닫고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한글소설'로 창작했더랬다. 안타깝게도 <사씨남정기: 한글본>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한문본'만 남은 탓에 원작이 없는 상황이지만, 수많은 '이본'에서나마 '한글본'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그의 선각적인 업적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당시 양반사회에서 천하게 취급받던 '한글'의 처지로 보았을 때, 양반가문의 사람이 '우리것'에 대한 소중함을 잊지 않고 손수 '소설'로 적어 남긴 것은 칭송 받아 마땅할 것이다.

 

  중략하고, 이 책은 두 가지 관점으로 해석이 가능하다는데서 흥미로움을 느낄 수 있다. 하나는 소설의 내용이 당시 '환국정치'를 일삼고 자신을 유배 보낸 숙종의 정치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으며, 다른 하나는 홀로 자식을 기르며 모진 고생을 한 어머니 곁을 지키지 못하고 발길도 닿기 힘든 머나먼 섬으로 유배를 감으로써 효도를 다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성리학적 관점이 담겨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관점으로 봤을 때, 남성 위주의 '가부장제 사회'에 대한 비판은커녕 순응하며 살면서 여성들끼리 싸우며 문제를 해결하려는 잘못된 인식을 지적할 수도 있다.

 

  첫째, 숙종의 환국정치를 살펴보자. 숙종은 신하들이 파벌을 지어 '예송논쟁'을 벌여 왕권을 우습게 아는 것에 환멸을 보였다. 그래서 1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등극했음에도 우암 송시열에게 사약을 내리는 등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는 임금으로 실력행사를 하였다. 그리고 그 실력행사의 정점이 바로 '환국정치'였던 것이다. 그런데 마침 숙종의 아내들이 정치적 상황과 교묘히 맞아 떨어진다. 둘째 부인이었던 '인현왕후(서인)'와 후궁이었던 '장희빈(남인)'이 그렇다. 소설에서는 남편인 유씨의 처 '사씨'와 첩인 '교씨'가 각각 인현왕후와 장희빈으로 등장하는 것처럼 딱 들어맞는다. 과연 김만중은 소설을 통해서 '환국정치'를 에둘러 비판하여 했던 것일까? 하지만 증거는 없다. 정황이 예언처럼 맞아 떨어진 것은 우연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김만중은 유배간 지 2년 만에 병이 들어 죽었다. 정치적 비판이 의도된 것이었다면 '서인쪽'에서 <사씨남정기>로 여론몰이를 하며 정국을 유리하게 이끌었어야 하는데, 그런 동향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성리학적 유교사상에서 양반이 솔선수범해야 했던 덕목이 바로 '예'다. 그중에서도 '효'는 최고의 가치였으며, '불효'를 하면 신분고하를 불문하고 사형에 처할 정도로 엄격했던 조선이다. 특히, 조선 중기를 넘어서면서 조선은 '예법'은 더욱 강조되었다. 자신들의 무능을 '철저히 예법을 지키는 것'으로 덮으려 시도했기 때문이다. '예송논쟁'이 첨예한 대립을 벌일 정도로 심각하게 다룬 까닭도 바로 이런 까닭 때문이다. 그래서 김만중이 홀로 계신 어머니에게 못다한 효를 실천하기 위해 어머님이 좋아하실 만한 내용의 '소설'을 직접 지은 것은 효의 관점에서 유심히 볼 대목이다.

 

  그런 까닭에 <구운몽>이나 <사씨남정기> 모두 여성이 주인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소설의 여성들은 조선의 여성이 반드시 지켜야할 '예법'을 성실히 지키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할 바다. 열녀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여성들의 삶'이 끝내 복을 받고, 그렇지 못한 여성은 벌을 받는..지극히 당연한 내용으로 적혀 있다.

 

  하지만 어릴 적의 난, 과연 이런 내용이 어머님에게 즐거움과 흡족함을 줬을지 의문이었다. 남성 위주의 꽉 막힌 사회속에서 남편도 없이 두 아들을 급제시킬 정도로 살림을 꾸려나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인데, 소설속에서까지 '그런 꽉 막힌 여성의 삶'을 강요하는 내용으로 그려내는 아들이 원망스럽지는 않았을지...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김만중의 어머님은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욕했을 거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여성의 삶을 여성 스스로 '기록'을 남기지 않았으니 알 수 없는 영역이기도 하다.

 

  이렇게 김만중의 작품을 분석해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사씨남정기>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제목만 보면 '사씨가 남쪽으로 간 까닭'이라는 부제가 달릴 법도 하다. 교통 등 여러 사정으로 여행이 쉽지 않던 시대였고, 더구나 '여성'이 먼 곳으로 정처 없이 떠돈다는 일은 굉장히 이례적인 까닭에 당대에는 제목만 보고도 엄청난 이슈를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까닭이 있길래 여인의 몸으로 머나먼 곳을 떠돌게 되었단 말인가?' 하고 말이다.

 

  그리고 책을 펼쳐보면, 한 남자를 두고서 두 여인이 갈등을 벌이는 장면이 압권이다. 더구나 정숙하고 선량한 처와 교활한 첩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은 '권선징악'이란 교훈을 끌어내는 전형적인 구성이라 '전기수(책을 읽어주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서는 듣는 이로 하여금 심금을 울리다 못해 '악역'에 대해 분노를 탱천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허나 여기까지다. 분명 '처첩제'에 대한 비판적인 성격이 담겨 있는 내용인데, 결말에선 '또 다른 첩(임씨)' 등장하며, 선량하고 순종적인 첩을 들이면 집안에 평화가 찾아온다는 뻔한 결말로 이야기를 끝맺기 때문이다. 더구나 첩을 들이는 주체가 남자가 아닌 여성(사씨)이기 때문에 더욱 전형적인 소설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보면 <사씨남정기>는 오늘날 '독자의 관점'에서 그닥 추천할 만한 '고전소설'이 아님을 넘어 '부적격'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어느 부모가 자신의 딸에게 모진 고난이 찾아오더라도 남편에게 순종적이며, 대를 잇기 위해 아들을 꼭 나아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엔 '첩'을 들여서라도 숙제를 해결해야 하며, 그로 인해 남편과 첩에게 질투를 보여서도 안 된다...고 교훈을 가르칠 것이냔 말이다. 그렇다고 아들에게 권장할 책도 아니다.

 

  그러니 <사씨남정기>를 그렇게 읽으면 안 된다. '시대의 비극'은 극복하기 위해 통찰해야 하고, '모순된 시대'는 해결하게 위해 자세히 들여다봐야 한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순종적인 여인상 만이 옳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면, 성평등시대를 맞아 양성평등의 가치에 입각해서 아직까지도 남성위주의 모순된 사회속에서 '여성의 가치'를 밝히고, 불평등한 사회속에서 '여성이 해야만 할 일'에 대해 생각해볼 꺼리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이 책에서는 '마냥 순종적인 사씨의 문제점'을 밝히고, '가부장적인 사회인데도 무능하기만 한 유씨'에 대한 비판하며 읽어야 한다. '사악한 교씨와 그 일당들'은 여성이라서 더 나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나쁜 것이고, 어떤 벌을 받아야 마땅한지 논의하는 것으로 족할 뿐이다.

 

  결코 해서는 안 되는 것은 바로 [여자의 적은 여자다]라는 잘못된 인식을 무비판적으로 논의하는 것이다. 이런 주제는 토론주제로도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대체 잘못된 가치관으로 무슨 논의를 한단 말인가? 자칫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섣부른 선입견만 심어줄 뿐이다. 다시 말해, 여성끼리의 갈등을 조장하는 것은 여자에게 득이 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책을 읽으며 '편견'을 조장할 필요가 전혀 없다. 차라리 교활하고 사악한 꾀에 홀랑 속아넘어가서 집안을 풍비박산 내버린 무능한 남편 유씨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변호할 줄도 모르고 마냥 순종적인 모습으로 일관한 본처 사씨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더 현명한 독자의 자세다.

 

  한편, 교활한 교씨를 장옥정과 교묘히 오버랩 시켜서 '작품해설'하는 것도 식상하니 적당히 했으면 좋겠다. 실상 남성중심사회였던 조선시대에 '인현왕후'와 '장희빈'이 직접 나서서 정치일선을 지휘한 것도 아닐 텐데...또한, 강력하다 못해 카리스마 철철 넘치는 숙종이 '여인네의 치마폭'에 휘둘려 환국정치를 펼쳤다는 내용은 '드라마틱'한 즐거움(!)은 줄지언정 실상과는 사뭇 다를 테니 말이다. 설령 아주 관련이 없다손치더라도 '장희빈의 가문'이 남인들을 대표하지 못하였기에 가능성이 희박한 스토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숙종에게 '장희빈', 그리고 '최숙빈'은 정치색이 희박한 '러브스토리'에 가깝다는 점에서 해석하면 좋을 듯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