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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한중일 세계사 12 - 임오군란과 통킹 위기 ㅣ 본격 한중일 세계사 12
굽시니스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12월
평점 :
다시 한 번, 이 책이 갖고 있는 의미를 더듬어 보련다. 그동안 '한국사'를 읊은 책들은 많지만 이 책만이 갖고 있는 매력이 다시금 엿보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국사를 '한반도 안'으로만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한국에서 벌어진 사건을 한반도 안에서만 '원인'을 찾고 섣불리 '결말'을 지으려고 했고, 그런 까닭에 '한국사연표'를 아무리 읽고 또 읽어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투성이였다. 특히, 근현대사는 고대사와는 달리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운 사건들이 전세계적으로 뻥뻥 터지던 시기였다. 그런 세계적인 사건들이 어느 특정한 지역에서만 '유효'한 사건이었을리 만무하며,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진 사건 때문에 커다란 영향을 받은 '한국사'가 한둘이 아니었건 것이다.
또한, 구한말이 되면 조선은 더 이상 '은자의 나라'가 아니었다. 상대적으로 청과 일본에 비해 서구열강의 침탈을 덜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강화도조약'을 맺은 이후에는 조선도 열강들과 조약을 맺고 '근대화'의 기지개를 펴는 등 발빠르게 변모하던 시기였던 것이다. 이런 '근현대 한국사'를 어찌 '한반도'만으로 축소해서 파악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당연히 '한국(조선)'을 중심에 두고 가까운 이웃나라의 움직임부터 면밀히 살펴보아야 하며, 멀지만 기세가 남달리 뿜뿜하던 서구 강대국들의 손발놀림 하나하나를 다 파악해야 '한국사'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이 책이 '본격적'으로 한줄일의 역사를 세계사적인 관점으로 다시금 살펴보고자 한 것도 바로 그런 의미에서였을 것이다.
암튼, 이번의 주제는 '임오군란'이다. 흔히 '임오군란'의 원인을 신식군대(별기군)와 구식군대의 차별에서 비롯되었으며, 결정적인 사건은 13개월이나 밀린 월급 가운데 '한달치 쌀'을 주었는데, 그 쌀에 절반 이상이나 겨와 모래가 섞여 있었으며 나머지 쌀조차 반쯤 썩어있었던 것이 빌미가 되어 폭동을 일으킨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임오군란'의 결과로 일본공사관을 불지르고 일본측 관원을 죽였으며 흥선대원군을 재집권하게 만들었다는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거의 대부분의 한국사책이 이런 식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교과서에서도 '임오군란의 원인과 결과'라는 단원에서 중요한 사건이니 달달 외우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말이다. 구식군대가 왜 하필이면 폭동을 일으켜 '일본공사관'을 다 때려부수고, 권력에서 밀려난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하는데 앞장 섰느냔 말이다. 신식군대가 '일본군 장교'에 의해 조련되고 있어서 '반일감정'이 컸다고는 해도 화풀이 대상을 삼으려면 '외교적 문제'가 커지는 '일본공사관'이 아니라 '신식군대(별기군)'에게 풀어야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겠느냔 말이다. 게다가 흥선대원군이 '구식군대(훈련도감)'의 사람들을 편들어 줄 수는 있을지언정, 자칫 외국과의 전쟁에 휩싸일 수 있는 '공사관 파괴'를 지시할 까닭은 없었을 것이며, 막상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흥선대원군은 쿠데타의 기치를 '위정척사'로 내세워 '옛날식으로 다시 되돌아가자'는 구호를 외쳤다. 이는 구식군대에게도 그닥 도움이 되는 방향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껏 군대를 강화하겠다며 고종과 민왕비가 애를 쓰고 있었는데, 이를 다시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옛것으로 되돌리겠다니 '군대강화'도 물 건너 가버리는 셈이 된다. 그러면 신식군대만 없애버리고 말겠는가? 구식군대도 대거 축출되고 임금 삭감도 피치 못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한데 말이다. 그러니 '한반도 안에서 벌어진 사건'만 파고 들어서는 '임오군란의 진면목'을 제대로 살펴볼 수 없게 되고 만다.
그래서 역사를 살펴볼 땐, '망원경'과 '현미경'을 함께 준비해야 한다고 한다. 속사정을 자세히 살펴보기도 해야 하지만, 멀리 내다보고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숲을 분석할 때에 '한 그루의 나무'만 보고서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것처럼 '숲, 전체'를 살피며 어떤 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어느 동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숲속에 감춰진 비밀은 무엇인지 면면히 살펴보아야 진정으로 '숲의 가치'를 이해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역사란 그런 것이다. 다시 '임오군란'을 보다 넓게 살펴보자.
고종은 '강화도조약'을 맺은 뒤에 벌어진 국내의 사태를 보면서 '청과 일본의 변화'에 주목하게 된다. 그리고 크게 두 가지를 고민하게 된다. 하나는 청과 일본이 호되게 당할 정도로 '서양의 힘'이 엄청나게 강하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서양에게 호되게 당한 뒤에 청과 일본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개화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개화를 반대하는 세력이 건재하면 이룰 수 없는 꿈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인 '대원군'에게서 권력을 되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래서 고종은 아버지와 척을 지면서까지 아내인 '민왕비'와 손을 잡고 개화를 서둘렀다.
하지만 권력을 되찾는 것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왜냐면 당시 조선은 심각한 재정고갈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강화도조약으로 '일본과 무관세 협정'을 맺은 관계로 조선 경제의 주축인 쌀이 일본에 헐값에 팔려나갔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조선의 쌀값은 점점 더 오르고 전체 물가까지 덩달아 오르는 '인플레이션'을 겪으며 조선의 백성들은 심각한 굶주림을 겪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개혁, 개방'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왕실의 재정난은 관원들의 녹봉 지급에도 차질을 빗게 되었다. 이런 까닭으로 '구식군대'에 임금체불이 일어난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한편, 흥선대원군은 '권불십년'에 뒷방 늙은이로 밀려난 뒤에도 재집권을 위해 필사적이었다. 마침맞게 일어난 유생들의 '위정척사운동'은 대원군에게 뒤늦은 호재였다. 고종과 민왕비의 개화정책이 유생들의 입맛에 영 맞지 않아 벌어진 운동이 대원군에게 얼마나 반가웠겠냔 말이다. 하지만 유생은 유생일 뿐이었다. 정작 쿠데타에 필요한 '군대'가 준비되지 않았던 것이다. 붓으로 싸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그런 차에 '구식군대'들이 알아서 찾아오니 얼마나 반가운 일이겠는가. 하지만 대원군에겐 '재집권'만이 중요한 것이었고, '구식군대의 처우개선'은 나중 문제였다. 그래서 일단 '구식군대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 개혁정책을 추진하던 세력을 일순간에 몰아내고 경복궁에 다시 환궁하는데까지는 성공했다.
하지만 고종도 가만 있지는 않았다. 어떻게 찾은 '권력'인데, 아버지에게 순순히 내놓을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래서 청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청 조정에서도 이를 수락해 '청 군대'가 출병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보다 먼저 '일본군'이 찾아와 고종을 향해 사죄와 배상을 요구했다. 일본공사관이 불타고 공사관 직원이 죽는 등 일본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치욕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선에 '청과 일본의 군대'가 한꺼번에 들어오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렇게 함부로 들어온 외국군대가 쉽사리 돌아갈 리는 만무했다. 뭔가 얻는 것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청은 청대로, 일본은 일본대로 '조선'에 얻을 것을 톡톡히 얻어내고야 만다. 먼저 일본은 '일본공사관'에 일본군을 주둔시킬 빌미를 얻어냈다. 이는 훗날 조선 침략에 톡톡히 재미를 본 사안이었고, 더불어 '정한론'이 일본내에서 대세가 된 사건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일본국민들의 눈에도 '조선'따위가 감히 일본인을 죽인 것에 대한 응당한 보상으로 보였던 것이다. 청은 이 참에 아예 조선을 '속국'으로 삼으려 도장을 찍었다. 그동안엔 대외적으로 조선을 청의 속국이라 말은 했어도 '간섭'은 할 수 없었지만, 임오군란 이후에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라는 것을 새로 맺고 조선을 '청의 속국'으로 아예 못박아버린 것이다. 그리고 고종은 왕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 '위험요소(?)'였던 아버지를 청나라로 효도관광 시켜버린다. 이로써 조선은 다시금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비록 느리고 또 한참 늦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청과 일본은 조선에 군대까지 파병을 해놓고 확실한 '찜'을 찍지 않았던 것일까? 기왕 보낸 김에 '전쟁'까지 불사하고 결판을 냈을 법도 한데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훗날 '청일전쟁'을 조선을 무대로 삼아 벌이지 않았느냔 말이다. 그건 청도 일본도 아직은 전쟁을 벌일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일본대로 '국내사정(!)'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기에 신정부가 전쟁을 벌일 정도로 여유가 없었고, 청나라도 '임오군란' 즈음에 벌어진 '월남(베트남 통킹)사건'이 벌어져 프랑스와 전쟁이 벌어질 뻔 했으며, 이로 인해 나중에는 진짜로 '청불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또한, 임오군란 한참 전에는 러시아와 '신장지역'의 일리 땅을 두고 신경전을 벌이는 등 청나라의 내부사정도 바람 잘 날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또또한, 러시아도 '오스만투르크'와 오랜 힘겨루기 끝에 전쟁을 벌이르나 정신이 없어 청나라와 전면전은 피하는 등 세계사는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임오군란'은 단순히 구식군대의 불만이 팽배해져서 벌어진 헤프닝으로 손쉽게 정리해버리면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근현대사'의 변화를 따라잡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역사적 이해도 근시안적이게 되어 '엉뚱한 결론'을 내고 '잘못된 해석'을 내리는 등 제대로 된 역사공부를 할 수 없게 만든다. 그동안 우리는 역사교육을 너무 편협하게 해왔다. <한국사>와 <세계사>로 단순구분하고 그 범주를 '한반도 안과 밖'으로 나누어 해석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른 것이다.
역사는 '나누어' 생각할 수가 없다. 그 흐름이 '함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오늘날 저 먼곳에서 벌어지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 보기만 할 수 없는 까닭도 바로 그 때문이다. 러시아라는 강대국이 벌인 단순한 '영토확장의 야욕'이라고 결론 내릴 수 없고, 약소국인 우크라이나가 쉽사리 항복하지도 않는 상황이다. 그리고 전쟁의 양상은 점점 '자원전쟁'으로 번져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는 전세계 국가를 향해 러시아의 푸틴이 '천연가스 등 온갖 자원의 수출'을 전면 금지시키는 졸렬한 행동을 벌이고 있다. 대한민국이라고 아무런 영향이 없을까? 당장 원유가격 상승으로 인해 휘발유 등 '물가상승'을 부추기고 있으며, 그로 인해 정치경제 및 사회적 이슈가 연일 터지는 등 밀접한 영향을 받고 있다. 심지어 러시아가 대한민국을 향한 불만과 보복을 노골적으로 터뜨리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래도 '한국사'는 '한반도 안'에서만 벌어지는 일들로 해석하려 들 것인가. 우리의 역사를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다시 풀어보는 이 책에 더욱 관심이 가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