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레벨업 3
추공 지음, 이백 그림 / 파피루스(디앤씨미디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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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레벨업 3>  추공 / 파피루스(디앤씨미디어) (2019)

[My Review MMXVII / 파피루스(디앤씨미디어) 3번째 리뷰] 서서히 드러나는 '시스템의 실체'와 더불어서 국내를 넘어선 '국외의 위협'이 점차 조여오고 있다. 성진우가 '레벨'을 서둘러서 올려야 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성진우, 본인은 이런 실체를 완전히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당장은 더 강해지고 싶다는 원초적인 본능에 충실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그런 성진우의 본능적 욕구를 '시스템'이 이용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아직은 그 실체가 정확히 드러나지 않았기에 짐작만 할 뿐이지만, 성진우의 아버지, 성일환이 생환한 것에 대한 이유가 밝혀지면서 본격적으로 그 실체가 드러날 것이 틀림없다. 다만, 당장은 성진우의 레벨업이 시급하다.

그렇지만 성진우의 현재 레벨이 그렇게 낮은 것도 아니다. 지난 '악마성'에서 쌓은 경험치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아직 76층까지밖에 클리어하지 못한 수준이지만, 성진우는 이미 'S급 헌터'의 능력을 넘어선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백호 길드의 백윤호보다, 헌터스 길드의 최종인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나마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S급 헌터는 헌터스 부길드 마스터 차해인 정도일 것이다. 헌터 협회의 고건희 회장도 꼽을 수 있겠지만, 그는 이미 고령을 넘어섰기 때문에 지니고 있는 마력은 높더라도 그걸 제대로 활용할 체력이 못되는 안타까운 현실을 감안한다면, 명실공히 대한민국 최고의 헌터는 성진우일 것이다. 그런데도 성진우의 등급은 E급이다. 재심사가 절실하다.

등급 심사는 이미 경험해봤기에 절차상의 어려움은 없다. 다만, '각성 후 각성'을 하는 헌터가 매우 희귀하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그런데 성진우는 '끝없는 레벨업'이 가능한 헌터이기 때문에 더욱 특별한 케이스다. 이걸 세상 사람들에게 논란이 되지 않게 '등급 재조정'을 받는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 바로 이것이 큰 문제다. 아직까지 전세계에서도 '유일한 경우의 특수 각성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을 설명할 길이 없다. 특별한 능력을 가졌다는 것이 마냥 환영받을 만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끝없는 성장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대한민국의 자랑으로 인정받을 만한 일이지만, '절대 강자'가 되는 순간에 수많은 사람들의 '공동의 적'이 된다는 것도 진실이기 때문이다. 어디 국내 뿐일까. 전세계적으로도 작게는 견제의 대상이 될 것이고, 크게는 '적대적 감시의 대상'이 되어 크고 작은 위기의 순간이 매순간 끊이질 않게 될 것이다. 절대 강자, No.1이 된다는 것은 그래서 힘들고 피곤한 일이다. 절대 강자는 절대적으로 가만 냅두질 않기 때문이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성진우는 '등급 재심사'를 받아야만 한다. 가장 큰 이유는 '레벨업' 때문이지만, 반드시 올려야만 '악마성 공략'을 마칠 수 있고, '공략 보상'으로 받을 수 있는 '생명의 신수'가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생명의 신수'로는 모든 질병을 고칠 수 있기 때문에 '익면증'으로 잠들어 있는 어머니를 고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아이템이다. 성진우는 그걸 구해서 어머니의 병을 고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 마음이라서 '레벨업'은 꼭 해야만 할 일이다. 그래서 성진우는 자신의 능력치를 세상에 공개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여러 위험에 노출될 수 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성진우의 레벨업은 '다가올 위협'을 해결하기 위한 포석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바로 대한민국 최남단에 있는 가장 큰 섬, 제주도에서의 위협이 점점 커져만 갔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열렸던 'S급 게이트'를 클리어하지 못하는 바람에 '던전 브레이크'가 되어 버렸고, 그 던전에서 쏟아져 나온 '개미형 마수'에 의해 제주도가 초토화되고 대한민국 S급 헌터마저 희생을 당했고, 그 바람에 더는 제주도에서 주민들이 살 수 없는 마수들의 소굴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섬이라서 바다를 헤엄칠 수 없는 개미형 마수가 섬밖으로는 나올 수 없었으나, 최근에 진화에 성공한 개미형 마수들이 인근 섬에 출몰하며 마을에 상륙해서 주민들을 몰살시키는 일이 자주 벌어졌기 때문이다. 국내 뿐만 아니라 일본에 속한 섬마을까지 피해를 입게 되자, 일본에서도 '제주도 레이드'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이미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한국의 헌터들이 '제주도 공략'에 실패했던 3차례의 레이드를 그동안 면밀히 관찰하고 상세한 분석까지 마쳤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주 몹쓸 계략까지 세우고 있었다. 한국의 헌터들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을테니, 그걸 '미끼'로 삼아 일본의 헌터들에게 도움을 받게 만들고서, 그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려고 하는데, 그 요구라는 것이 한국으로서는 매우 치욕스런 일이 될 수도 있는 그런 몹쓸 계략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의 사건 경과는 다음 권에서 펼쳐지겠지만, 이제 성진우가 쌓아올린 레벨업의 성과가 본격적으로 활약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껏 감춰졌던 '시스템의 비밀'도 속속들이 밝혀지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성진우가 '악마성 클리어'를 하는 도중에 만나게 된 라디르 가문의 악마 소녀 에실에 의해서 그 비밀이 조금씩 밝혀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미 '아이스엘프, 바루카'나 '하이오크 마법사, 카르갈간'에게서도 조금 귀띔을 받긴 했다. 하지만 에실에게서 알게 된 '시스템의 비밀'은 이세계에서 온 존재들이 엄청난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성진우가 네크로멘서의 능력'을 얻어 끝없는 레벨업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과연 이것이 향후에 어떤 이야기로 전개될 것인가? 몹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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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네 시 블루 컬렉션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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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네 시>  아멜리 노통브 / 김남주 / 열린책들 (2017) [원제 : Les Catilinaire (1997년) ]

[My Review MMXVI / 열린책들 22번째 리뷰] 노통브의 소설의 시작은 대동소이하다. 그 시작은 늘 '장광설'이기 때문이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말들의 나열', '대화의 연속'으로 독자들의 혼을 쏙 빼놓기 일쑤다. 그런데 그게 중반을 넘어가면 조금씩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아직은 '전체'를 알 수 없지만 '부분'을 드러내놓고서는 독자들을 향해 '전체'를 짐작해보라는 일종의 '암시' 내지 '복선'을 대놓고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게 노통브 소설의 매력이라면 매력이다. 그런데 이것도 '세기말'에나 통할 법한 방식이지 요즘 독자들에게는 도통 먹히질 않을 낡은 방식이라는 점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오죽하면 요즘 트랜드는 '결말'부터 다 보여주고서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설명하는 방식..이것도 조금은 철 지난 방식이라서, 쩝.. 암튼, 노통브의 소설이 예전 같지 않은 느낌을 받고 '있는중'이라는 점만 밝힌다.

<오후 네 시>는 노통브의 소설중에서도 초창기 소설이다. 내가 알고 있기로 '네 번째 소설'로 알고 있다. 그래서 아직은 '읽는맛'이 살아있는 소설들 중에 하나인데, 20여 년이 지나서 다시 읽으니, 조금은 식상한 패턴으로 전개되는 느낌만 받고 말았다. 처음 읽었을 땐, '공포소설'을 읽는 것 같은 서스펜스마저 생생하게 느꼈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지금 다시 읽을 땐 '소설의 후반부'가 전혀 기억나질 않아서 '처음 읽는 느낌'이 날 정도였다. 그만큼 그 당시에도 인상적인 소설은 아니었다는 것이 언뜻 기억났을 정도였다. 요컨대 '반전'이 좀 약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줄거리도 좀 밋밋하다.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초반부는 '자장가'를 낭독하는 것처럼 잔잔하다. 65세 동갑의 노부부가 바쁜 도시의 삶을 정리하고 남은 여생을 호젓한 시골에서 보내기로 한다. 그렇게 이사를 간 곳의 첫인상은 너무도 좋았으나, '매일 오후 네 시'가 되면 불쑥 찾아오는 이웃 때문에 점점 불쾌한 느낌을 받게 된다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노부부는 불쾌한 방문객을 피해서 일부러 '오후 네 시'에 집을 비우고 산책을 다녀오기도 하지만, 쌀쌀한 날씨에 무리하게 바깥 활동을 한 뒤에 아내가 감기에 걸리자 꼼짝하지 못하고 침실에 눕고, 남편은 간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어김없이 오후 네 시가 되자 문짝이 떨어져나갈 듯이 심하게 쾅쾅 두들기는 소리가 나자 어쩔 수 없이 불쾌한 이웃의 방문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남편은 꾀를 내었다. 차라리 불쾌한 방문을 받을 수밖에 없다면 차라리 '저녁 초대'를 하자고 말이다. 그래서 하루의 어정쩡한 시간인 '오후 4시~6시'가 아닌 '저녁 8시 이후'의 시간에 초대를 하고서 면박을 주면 '불쾌한 방문'이 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을 걸게 된다. 물론 저녁초대에 걸맞게 '부부동반'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비이성적인 남편'과는 달리 '이성적인 아내'의 판단으로 더는 이웃을 불쾌하게 만드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 수도 있을 거라는 예상과 함께 말이다. 노부부는 불쾌한 이웃을 위해 정성껏 저녁 준비를 한다. '최후의 만찬'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노부부의 희망은 보기 좋게 빗나간다. 불쾌한 방문을 일삼는 남자의 아내는 '혹'이라는 표현도 무색할 정도이고, '암덩어리'에 가까운 '낭종'같은 외모를 지녔기 때문이다. 겉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충격을 받은 노부부는 그럼에도 예의를 다해 저녁을 대접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초대해주셔서 고맙다'거나 '성찬을 준비해주셔서 감사하다'는 얘기가 아니라 "이렇게나 많이 쳐먹으면서도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는 당신 부부가 퍽이나 대단하구려"라는 빈정거리는 말들 뿐이었다. 더구나 네 사람 분의 식사를 준비했는데, 저들 부부가 거의 다 쳐먹으면서도 '사치스런 생활이 부끄럽지 않냐'는 둥의 무례한 말도 서슴지 않고 말이다. 그나마 초대받은 부인이 말 한마디 없이 얌전했는데, 그토록 얌전했던 까닭은 살이 너무 쪄서 얼굴에서 눈코입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고, 그나마 할 수 있는 말이 "쿠웨엑~" 정도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이제 노부부는 더는 참을 수 없게 된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아진 늙은 남편은 불면의 밤을 보내던 중, 어느 날 밤, 우연찮게 시끄럽고 불이 켜진 불쾌한 남자의 차고를 살펴보다가 매캐한 연기로 가득한데 그 남자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신고를 하고 구조를 하게 된다. 다행히 그 남자의 생명은 지장이 없다는 소식을 접하지만, 문뜩 그 소식이 '좋은 소식'인지 '나쁜 소식'인지 알 수 없게 된다. 더구나 남편의 보살핌이 없으면 '일상생활'조차 할 수 없을 것 같은 괴물(?) 같은 아내를 대신 돌봐야 하는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부터 노통브의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다시 말해, 노통브의 본색이 드러났다는 말이다.

이 소설의 원제를 뒤치면 '카틸리나리우스 음모(기원전 63년 로마 집정관 카틸리나의 쿠데타)' 정도가 될 것이다. 이를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음모론' 정도로 뒤칠 수 있겠지만, 무턱대로 아무런 배경지식도 없는 음모론을 거론하는 것이 어색하기에 '오후 네 시'쯤으로 제목을 정했을 거라 짐작한다. 그래서 이 소설의 핵심인 '음모'에 대한 예상을 한국의 독자 대부분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나조차도 그랬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음모'에 관한 배경지식이 소설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늙은 남편'이 보이는 말과 행동의 유일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과연 늙은 남편이 아무도 모르게 감춰둔 음모란 무엇일까? 원제를 보고도 알 수 없는 독자들도 소설의 후반부에 접어들면 늙은 남편의 말과 행동이 점점 바뀌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노통브는 이를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에 비유하고 있는데, 이게 또 묘한 느낌을 준다.

그 까닭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처럼 노부부의 남편이 '이중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원인은 '불쾌한 이웃 남자' 때문이다. 그 남자의 존재만으로도 불쾌함을 넘어 '불면증'에 시달리고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이며, 점점 심해지는 신경쇠약 증세 때문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자신을 유일하게 존경하는 '여제자의 방문'조차 완벽하게 망쳐놓아 다시는 방문하지 않을 지경에 이르러서 좌절했기 때문이다. 만나는 것만으로도 반갑고 행복감을 느끼게 해주는 사랑스런 손녀딸처럼 예뻐했던 제자였는데 말이다. 그래서 노부부의 남편은 기꺼이 '하이드 씨'로 변신하길 원했다. 물론 '지킬 박사'로 되돌아오면 자책할 정도로 양심은 남아 있었지만, '하이드 씨'가 되어 저질러지는 일까지 막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다시 말해, 죄책감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죽이고도 쾌감에 전율하며 웃을 수 있는 하이드 씨가 되는 것을 살포시 방치했던 것이다. 물론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한다. 노부부의 아내에게는 물론, 그 불쾌한 이웃의 아내에게까지도 말이다. 다시 지킬 박사로 되돌아왔을 때 아무런 피해도 받지 않을 방법을 모색해야만 했다. 과연 그런 방법이 있기는 한걸까?

이 소설에서는 '피해자'가 '가해자'로 바뀌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 '가해자'가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 또한 여실히 나열하고 있다. 그러면서 독자들까지도 '공범'으로 만들고 만다. 소설속의 등장인물은 아무도 모르지만 '독자'인 당신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서 말이다. 뭐, 이를 두고 노통브를 '천재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고 입방아를 떨곤 하지만, 나는 그런 '공범' 따윈 되고 싶지 않다. 왜 독자를 애꿎게 범죄자를 옹호하고 범죄에 동조하게 만드냔 말이다. 참으로 발칙하기 짝이 없다. 그런 발칙한 작가를 '천재' 운운하는 것도 웃기다. 이런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도 있겠지만, 분명히 밝힌다. 난 아니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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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사장의 지대넓얕 6 : 성장 VS 분배 -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생각을 넓혀 주는 어린이 교양 도서
채사장.마케마케 지음, 정용환 그림 / 돌핀북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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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사장의 지대넓얕 6 : 성장 VS 분배>  채사장, 마케마케 / 돌핀북 (2023)

[My Review MMXV / 돌핀북 6번째 리뷰] 6권은 경제편 총정리다. 이 책에서는 '신자유주의의 특징'에 대해 설명하면서 비교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를 살펴보았다. 마르크스는 "경제가 바뀌면 모든 것이 바뀐다"고 말하면서, '상부구조'에 있는 역사, 정치, 사회, 문화, 의식 등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구조를 떠받치는 '하부구조'의 핵심이 바로 '경제'라고 말했다. 그렇기에 <채사장의 지대넓얕> 시리즈의 핵심주제가 바로 '경제'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경제'를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 것도 설명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고, 세계의 거의 모든 것은 '경제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경제편'을 총정리해보자.

이 책에선 경제체제를 크게 4가지로 구분했다. [초기자본주의], [후기자본주의], [신자유주의], [공산주의]로 말이다. 물론 더 세분화할 수 있지만 전문적인 내용을 추구하는 게 아니고 '넓고 얕은 교양'을 얻기 위해서 개념설명을 하기 위함이라고 밝혀놨다. 다시 돌아와서, 정부는 '세금'을 통해서 시장에 개입할 수 있다. 약하게 개입한다면 '시장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고, 강하게 개입한다면 '시장의 자유를 축소'하는 것이다. 그럼 어느 쪽이 좋은 것이냐? 그런 개념이 아니다. 각각 장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시장의 자유를 추구하면 정부는 개입을 최소화하게 된다. 이는 세금은 낮추고 복지도 낮춘다는 뜻이다. 그럼 기업(자본가)은 투자를 늘릴 것이다. 내야 할 세금이 줄어 부담이 덜어지니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럼 일자리가 늘어나니 '임금'을 받는 사람도 늘어나게 되고, 돈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소비활동'도 늘어나게 된다. 그렇게 경제가 호황을 누리게 되니 기업은 더 많은 이익을 챙길 수 있다. 거대기업일수록 말이다. 그러나 '저소득층 노동자'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소득이 많이 늘지 않아 여유자금도 별로 늘지 않는다. 그러다 덜컥 다치거나 병들어서 더 이상의 일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 '생산활동'에 참여할 수 없으니 더는 임금을 벌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정부의 개입이 줄어들어 세금이 덜 걷혔으니 복지로 쓸 비용도 덩달아 줄어버렸다. 그래서 저소득층은 복지혜택을 받기 힘들게 된다. 이렇게 부자들은 더 부자가 되고 빈자들은 더욱 빈자가 되는 사회구조가 되는 현상을 '부익부 빈익빈'이라고 한다. 시장의 자유를 추구하면 이런 장단점이 있다. 이게 바로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진면목'인 셈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시장의 자유를 축소하면 어떻게 될까? 정부의 개입이 강화될 것이다. 그럼 당연히 세금이 올라가고 복지도 더 많이 챙길 수 있게 된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누진세'다. 소득이 많은 사람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서 혜택이 필요한 '저소득층'에게 복지비용을 늘려서 사람다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정책이다. 이렇게 되면 사회가 안정화된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도 수그러들고 '소득격차'가 줄어들어서 사회 갈등도 덩달아 줄어들게 된다. 그러다 세금을 많이 부담해야 하는 상위 계층에서는 불만이 늘어나게 된다. 어차피 많이 벌어봐야 세금으로 대부분 내야하기 때문에 '의욕'을 상실하게 된다. 기업(자본가)도 투자를 줄이고 일자리도 덩달아 없어진다. 실업자가 늘어나니 사회복지를 위한 비용이 더 많이 필요해서 세금을 더 많이 걷어야만 된다. 그러나 세금을 걷을 대상이 없어졌다. 일할 의욕을 상실한 '고소득 계층'이 더 많이 벌 의지가 사라지니 성장발전 속도가 더디게 된다. 투자가 줄어드니 일자리도 사라져서 소비를 할 수 없게 점점 위축이 된다. 결국 모두가 공평하게 누릴 수는 있게 되지만, 진실은 '하향평준화'가 되고 만다. 경제는 점점 위축이 되어 파탄이 날 수도 있다. 시장의 자유를 축소하면 이런 장단점이 있다. 이게 '후기자본주의 경제체제'의 결말이었다.

초기 자본주의는 세금도 없고 복지도 없는 '완전경쟁체제'였다. 이때에는 자본가들이 맘껏 경제활동을 했고, 그로 인해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뤄냈다. 하지만 공정한 경쟁은 아니었다. 돈을 많이 가진 자가 모든 것을 독차지하는 '독점경쟁체제'로 굳혀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큰 위기가 찾아왔는데 바로 '경제대공황'이었다. 자본주의의 특징인 '공급과잉'으로 인해서 벌어진 문제였다. 그렇다고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공급'을 중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케인스는 '일자리'를 만들 목적으로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경제에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뉴딜정책'이 대표적인 예다. 정부가 일자리를 창출하니 소비여력이 생긴 노동자들이 소비를 늘려나갔다. 그렇게 '공급과잉'을 해소했던 것이다.

하지만 소련은 달랐다. '공산주의'로 경제체제를 바꾼 것이다. 정부가 경제를 완전히 통제하고 모든 생산수단을 '국영화'시켜버려서 국고수익으로 100%를 달성시킨 것이다. 그리고 복지도 100% 실현시켰다. 자본가들이 소유했던 생산수단(공장)을 정부가 뺐어서 노동자들에게 돌려주는 '공산혁명'을 성공시켰던 것이다. 그렇게 '경제대공황'을 극복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냉전이후 공산주의 국가들은 경제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위에서 언급한 '후기 자본주의'의 단점이 극명하게 나타났던 것이다. 열심히 일해봐야 '세금'으로 다 뺐어가는데 열심히 일할 의욕이 없게 된 셈이다. 물론 정부가 먹고 살 걱정은 하지 않게 '배급(복지)'은 해준다. 단지 넉넉하지 않을 뿐이고, 제때에 주지도 않을 뿐이다. 그러나 국가경제가 '성장동력'을 잃어버린 셈이기에 공산주의는 폭망하고 말았다. 결국 1990년대에 이르러 대부분의 공산국가들은 '자본주의 체제'로 돌아서고 말았다.

한편, 독일과 일본은 또 달랐다. 이들은 자본주의를 버리지는 않았지만, 경제대공황을 이겨낼 정도의 건강한 경제상황도 아니었다. 결국 독일과 일본도 '시장확보'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게 '공급과잉'을 해소할 수 있는 안정적인 시장(식민지)을 빼앗기 위해서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그렇게 군국주의(나치즘)로 '군사화'에 성공한 이들은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주변국들을 차례차례 점령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경제대공황을 극복해내는 것 같았으나, 얼마 가지 않아 패색이 짙어지면서 끝내 '패전국'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역사의 아이러니로 독일과 일본은 다시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거듭나서 빠르게 경제대국 대열에 접어들게 된다.

이렇게 '경제대공황'의 원인인 '공급과잉'을 해소하기 위한 나름의 방식을 거쳐 '냉전시대'에 접어들자 후기 자본주의는 활력을 잃기 시작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신자유주의(다시 초기자본주의로 되돌아가자!)'를 받아들여 빠르게 경제회복세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전세계는 고심을 하게 되었다. '후기자본주의(케인스)' VS '신자유주의(하이에크)' 중에 어느 쪽이 각 나라에 경제상황에 적합한 경제체제인지 판단을 내려야 했기 때문이다. 이는 '성장(신자유주의) VS 분배(후기자본주의)'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어느 쪽을 먼저 시행해야 하냐는 것이다. 성장이 우선이냐? 분배가 우선이냐? 를 놓고 첨예한 대립을 할 수밖에 없다.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로 논쟁을 벌이듯 심각하게 대립해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들이 '성장(신자유주의)'을 우선적으로 택했다. 어쩌면 단연한 선택이었는데, 경제성장도 하지 않고 나눠 먹을 게 없었기 때문이다. 파이를 키워야 노나 먹는 맛도 나는 법이라면서, 일단 '파이'를 키우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경제성장 과정에 수많은 이들의 희생이 뒤따랐다. 앞서 신자유주의의 단점에 '빈부격차 심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 하다보니 저소득층을 구제하고 싶어도 '세금'이 태부족했던 것이다. 반대로 베트남 같은 공산권 국가들은 '분배'를 우선시 했다. 그래서 오래도록 가난한 국가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했었다. 그렇다면 일단 '성장'이 우선인 것은 어느 정도 옳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IMF 외환위기 극복 이후 빠르게 경제성장을 이뤄 '세계 경제 10위권'에 들어선 대한민국은 더욱 커진 '파이'를 국민 모두에게 골고루 노나 주었나? 다시 말해, 성장에 따른 '분배 정책'이 제대로 먹혀 들어갔느냔 말이다.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분명 경제성장은 이뤘는데 국민 대다수의 '행복지수'는 여전히 하위권을 면치 못하고 있다. 청년실업은 만성화 되었고, 경제는 활력을 잃어가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트럼프발 관세위기'까지 몰려오고 있다.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과 분배'에 대한 논의는 언제쯤 결론을 지을 수 있고, 그 성과는 언제쯤 누릴 수 있는 것일까? 제대로 된 정책이 필요할 것이다. 다음 책은 '정치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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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빌 백작의 범죄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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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빌 백작의 범죄>  아멜리 노통브 / 이상해 / 열린책들 (2017) [원작 :  Le crime du comte Neville ]

[My Review MMXIV / 열린책들 21번째 리뷰] 역시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은 '변태적인 기질'이 다분해야 그나마 읽을 맛이 난다. 그럼에도 세기말에 몰아쳤던 그녀만의 '변태가학적인 기풍'은 새천년을 맞아 비에 흠뻑 젖은 아기고양이마냥 풀이 죽어버린 듯 싶다. 그나마 예쁜 작가가 '변태적'으로 썼다는 것, 하나만이 그녀의 책들에 남은 유일한 관심을 끌 수 있는 이유일 게다. 그런 이유로 그녀의 책들이 앞으로도 읽힐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베르나르와 함께 아멜리의 소설도 점점 시들해져 가서 아쉽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설의 줄거리를 살펴보면, 비극으로 시작해서 희극으로 마무리를 짓고 있어 '희비극'으로 분류되는 소설이다. 근데 나는 이런 사실을 모르고서 읽었기에 감히 말하지만, '내 취향'은 아니다. 희극이면 희극으로, 비극이면 비극으로 시작과 끝을 맺는 '순수한 작품'을 선호하지, 이랬다가 저랬다가 왔다갔다 하는 것은 '개그 콩트'로 족하기 때문이다. 하긴 이 소설의 분량이 딱 '콩트(단편소설)'에 어울릴 만큼 짧긴 하다. 그럼에도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에서 기대할 법한 그런 결말은 아니었다는 점에서도 좀 의외인 소설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결말이 궁금한 독자분들을 위해서 '결말'은 까발리지 않으련다. 최대한 내 리뷰를 읽고 나서도 결말은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장담한다.

배경은 현대 느빌 백작가문의 성(城)이다. 아주 정직한(?) 귀족이었던 탓에 재정적 파탄을 맞아 가문대대로 물려받은 성을 팔아넘겨야 할 처지가 되고 만 '몰락 귀족'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 사정을 가진 느빌 백작의 셋째딸이 한밤중에 성밖의 숲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마침맞게 지나가던 점쟁이에게 들키는(?) 바람에 무사히 성으로 귀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점쟁이가 셋째딸만 넘겨준 것이 아니라 '예언'까지 남겨 두었는데, "파티에서 당신은 초대 손님 중 한 명을 살해하게 될 겁니다"라는 예언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느빌 백작은 매년 자신의 성에서 파티를 열었고, 이번에도 '팔게 된 그 성'에서 마지막으로 파티를 열 작정이었다. 그런데 점쟁이가 그 파티에서 느빌 백작, 자신이 초대 손님을 살해할 거라는 예언을 들었으니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그는 말도 안 된다며 점쟁이의 예언을 일축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꼭 죽이고 싶은 사람'이 아주 없지는 않다는 생각에 미치자, 느빌 백작은 파티 초대 손님 목록을 다시금 찬찬히 들여다보게 된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묻기 시작한다. 귀족가문의 사람이 자신이 개최한 파티에서 초대한 손님을 살해한 '케이스'가 있는지 말이다. 기록에 따르면 아주 없지도 않다고 한다. 오히려 너무 자주 있어서 탈일 정도로 말이다. 그런 사실을 간파하자 느빌 백작은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과연 그렇군. 죽어 마땅한 사람이 있는지 찾아봐야 겠군'..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러다 깜짝 놀랄 일이 벌어진다. 셋째 딸이 아버지의 그런 생각을 눈치 채고서 '살해한 사람'으로 자신을 지목해달라고 조르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이 심한 정신병에 들렸으며, 모든 감각을 잃어버린 지도 오래 되어 '살 의욕'이 없다면서 말이다. 그렇게 시작한 아버지와 딸 간의 옥신각신이 이 소설의 전부다.

분명 '기발한 발상'이긴 한데, 아멜리가 이런 유의 소설을 그동안 얼마나 우려먹었는지를 감안한다면 그다지 새롭지 않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늘 같은 패턴이지 않은가. 등장인물 두 명이 등장해서 서로 길고 긴 '말싸움(논쟁)'을 벌이는 장면은 '노통브의 클리세'로 인식될 만큼 너무 많았다. 더구나 이번 말싸움은 '윤리 vs 비윤리'의 논쟁이었다. 어찌 아비의 손으로 직접 딸 자식을 총으로 쏴서 죽이는 일이 '정당화' 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아무리 '사고사'로 우연을 가장한다고 한들 그것을 '필연적인 당위성'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일이겠는가? 그래서 이 책은 굉장히 '부도덕한 소재'다.

그런데 이런 부도덕한 소재를 '그리스의 고전소설'에서 따왔다고 한다. 바로 <아가멤논>에서 말이다. 아가멤논이 트로이 전쟁을 시작하기 위해서 배를 출정하려고 하는데 거센 풍랑이 그칠 줄 모르자 점술가에게 신탁을 받아오라 했더니, '친딸을 제물로 바쳐야 출정할 수 있다'는 말을 전해 받았다. 이에 아가멤논은 셋째 딸인 '이피제니'를 산 채로 죽여서 제사를 지냈더니 풍랑이 멈췄고 예정대로 출정을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따왔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친족 살해'는 오랜 옛날부터 아주 흔한 일이었다. 그래서 '대의'를 위해서 '소의'를 기꺼이 희생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은 전설이 얼마 전까지도 아주 훌륭한 일이라고 칭송받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동양에서도 부모님이 '고깃국'이 먹고 싶다고 하자 '자신의 아내(혹은 자식)'을 죽여서 받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종교적으로는 더 심각하다. '신이 그것을 원한다'는 말 한마디로 아브라함은 어렵사리 얻은 자식 '이삭'을 신에게 기꺼이 받치려 했다. 이런 이야기를 <성경>에서 인용하며 열변을 토하는 목사님들을 심심찮게 봤다.

하지만 난 싫다. 타인을 제물로 받치는 것도 끔찍한 일인데, 친족을 제물로 받치는 행위가 어떻게 해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일이냔 말이다. 그걸 귀족적인 '전통'이나 종교적인 '숙명'으로 추켜세우는 일 따위는 정말이지 역겹다. 그야말로 '악당'이나 할 법한 궤변인 셈이다. 그런데 그런 악당의 발언 같은 일을 그토록 예쁜 작가가 썼다니 정말이지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이가 들어가니 '그로테스크(기괴한) 소설'은 정말 싫어진다. 말만 그럴 듯하게 해대는 '소피스트(궤변론자)'들도 정말 싫고 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열심히 일하겠다는 소신을 말하는 것을 볼작시면 주둥이를 쌔려주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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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두근거리는 중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예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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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MXIII / 예담 5번째 리뷰]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소감이지만, 마스다 미리의 '만화'보다는 '(만화 형식을 가미한) 에세이'가 더 맘에 든다. 그냥 만화만 읽었을 때에는 '이해'하지 못할 에피소드도 많았다. 여자들만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이라든지, 일본인만 이해할 수 있는 유머라든지, 뭐 그런 것들을 얼마 되지 않은 '만화 컷'으로만 읽었을 때에는 공감할 수 없었는데, '에세이 형식'으로 작가가 그렇게 표현한 까닭을 구구절절 설명해주니 조금쯤 더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그제서야 '아하~ 그런 뜻으로 한 말(또는 행동)이었어'라며 무릎을 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마스다 작가의 표현이 '딱 좋다'는 느낌은 아니다. 왜냐면 뭔가 이상하리만치 '이기적인 심보'에서 비롯된 일화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뭐, 한두 번 정도라면, '사람인데, 그럴 수 있지'하며 넘어가겠지만, 이건 뭐...시종일관 처음부터 끝까지 주야장천 '그러고' 있다는 것이 믿기 힘들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이 책이 '(수 년에 걸쳐) 연재된 내용'을 짜깁기해서 '단행본'으로 출간했다는 대목을 접하고서야 어느 정도 수긍이 가긴 했지만, 그럼에도 너무 많았다. 과연 무엇이 많았다는 것일까?

이 책의 원제는 [청춘, 때늦음]이란다. 이것을 뒤침책(번역본)에서는 <여전히 두근거리는 중>으로 뒤쳐냈다. 그리고 책의 내용은 작가 본인인 '마스다 미리'의 청춘시절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으며, 그 일화들은 한결같이 '그때 해보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나열을 했다. 그리고 대부분 '연애의 부재'로 인한 못해본 것들에 대한 애도를 표하는 것인지, 남들은 대수롭지 않게 하는 것들인데 자신은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서러움인지, 아니면 10대, 20대, 30대 초반에는 못했지만 '30대 후반'내지 '40대'에 진입한 지금은 꼭 해보고 싶다는 간절함인지, 그도 아니면 그저 부러움으로 인한 '이불킥'을 하고픔인지 도통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일관적이지 않은 흔들림이 가득한 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목이 '청춘(이니 어울릴 법한 일들을 해보지 못한 억울하고 울적한 마음에 이제라도 해보고 싶지만 나이값 못한다는 소리나 들을 것이 뻔하니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한 번만이라도 해보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때늦음'이라고 지은 것 같다. 그 덕분에 뒤친책의 제목도 <(다 늙었지만 그 시절만 떠올리면) 여전히 두근거리 중>이라고 깔끔하게 뒤쳐놓았다.

과연 무엇이 그토록 해보고 싶었던 것일까? 그 가운데에 나도 해보고 싶은 것은 놀이공원 대관람차 안에서 하는 둘 만의 키스다. 작가는 10대에는 연애경험이 전무하단다. 20대가 남친이 생겼지만 '대관람차'를 타본 적은 없었고, 그렇게 30대에 접어들었지만, 이제와서 남친이 생기는 것도 우습고, 생긴다한들 30대에 놀이공원에 들어가서 논다는 것 자체가 어색할 것 같단다. 그런 까닭에 '대관람차 키스' 같은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되어서 아숩다는...뭐, 그런 에피소드다. 나도 해본 적이 없다. 뭐, 연애 경험이 태부족하기도 하지만, 함께 '놀이공원'에 갈 정도로 진척된 적이 없는 것이 핵심이었다. 기회가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글쎄...번번히 다음 기회에, 라고 미루다가 어느새 옆구리가 허전해졌다. 그러다 30대 이후로는 거의 연애를 해본 적이 없으니 '대관람차'는커녕 놀이공원도 별로 가본 적이 없다. 그런 까닭에 난 '롯데월드'와 '자연농원(현 에버랜드)'을 구경해본 적이 없다. 애인이 생기면 꼭 가야지 했는데, 그럴 애인이 없었던 탓이다. 가난한 연인이던 젊은 시절에는 '돈'이 없어서 제대로 데이트를 못했다면, 돈 좀 만지는 지금은 '애인'이 없어서 데이트를 못 한다. 마스다 미리는 '연애감각'이 없어서 예나 지금이나 남들처럼 찐한 연애를 못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뭐, 이런 식이다. 학창시절 '가사실습 시간'에 만든 사과구이를 포장했다가 남친에게 건내주는 에피소드도 있었고, 졸업시즌 때 좋아하는 선배에게 '두 번째 교복단추'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는 에피소드도 종종 나온다. 일본에서는 '남자교복의 두 번째 단추'를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선물하는 전통(?)이 있단다. 마스다 미리는 자신의 작품들에 이런 에피소드를 참 많이 소개하고 있는데, 정작 작가 본인은 '그 단추'를 받아본 적이 없어서 속상하고 서러운 마음도 있지만, 그런 '선물'을 많이 받았다고 자랑하는 '능력녀'를 만날 때면 부러움도 느끼지만 잘난 척 하는 것 같아서 지청구를 해주고 싶다는, 뭐 그런 이야기를 종종 하고 있다. 또 학창시절의 단골 메뉴인 '발렌타인데이 초콜릿'도 실려 있는데, 역시나 마스다 미리는 줘 본 적이 없던 모양이다. 그래서 살짝 빈정거리는 투로 "어차피 '수제초콜릿'이란 게 시중에 파는 초코릿을 녹였다가 틀에 넣어 굳힌 것에 불과하다"는 문구를 넣은 것을 읽을 때, 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내 경우에는 '그 흔한 초콜릿도 못 받아봤다'는 쪽이지만 말이다. 왜냐고? 초콜릿을 못 받을 정도로 못 생기고 인기가 없었던 거야? 라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난 '남중', '남고', '공대', '군대'를 나와 취직을 하니, 부서에 여직원이 꼴랑 한 명(경리, 40대 노처녀)이라 아예 줄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이렇게 열악한 주변 환경 덕분에 발렌타인 초콜릿은 받을래야 받을 수 없었다. 그나마 초등시절이 유일한 기회였는데, 그 시절엔 이상하리만치 선생님들이 '발렌타인데이 초콜릿 선물'은 근본도 없는 일본 백화점 상술에 불과하니,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맙시다'라는 캠페인이 벌어지는 바람에 2월에 초콜릿을 구경하기 힘들었다. 더구나 여자아이들도 3월이 되면 응당 받아야 할 '화이트데이'때가 되면 학년이 올라가고 반이 갈라져서 '받을 수 없겠다'는 계산이 서자, 초콜릿 선물은 정말 '인기남' 몇 명에게만 몰래 주는 비밀스런 일이 되고 말았다. 한 반에 6~70명이었고, 보통 남학생 34명, 여학생 32명으로 짜여져 있었는데, 그 가운데 나는 단 한 번도 초콜릿을 받지 못했었다. 그러다 남중에 올라가니 '여학생 동창'은 씨가 말랐고, 남고에 오르니 여학생은 등굣길 버스안에서만 볼 수 있었다. 그나마 대학에 오르니 함께 캠퍼스를 오가며 만나는 폭은 넓혔지만, 정작 '강의실'에 들어서면 또다시 '남탕'에 들어간 듯 했으니, 내 인생에 여자는 씨가 마른 것 같았다.

그런 탓에 난 어릴 적부터 '순정만화'나 '로맨스소설', '로코드라마', '로맨틱영화' 따위를 정말 좋아했다. 물론 지금도 좋아한다. MBC 드라마 <질투>를 시작으로 달달한 러브라인이 주된 줄거리를 가진 드라마/영화는 거의 섭렵하다시피 했다. 정말 녹화까지 떠놓고 '보고 또 보는' 연애박사였다. 그렇게 난 '이론'에 빠삭하고 '실전'에는 약한 청춘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납득(!)'이 가지 않지만 말이다. 참고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사랑의 블랙홀>이다. 참사랑에 눈을 뜰 때까지 계속 되풀이 되는 '시간의 굴레'속에 빠져서 정말이지 제대로 된 '나'를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영화속에선 '여자의 마음까지 사로잡는 진정한 사랑'에 눈을 뜬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뤘지만, 나는 그 반대가 되고 싶었다. 내 사랑의 깊이를 온전히 느낄 수 있을 때까지 '무한 타임슬립'에 빠진 여자가 주인공이 되는...그런 연출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참나..내 사랑은 너무 하이레벨인가? 아님 최종보스인가? 나를 '클리어'하는 여자 플레이어가 당췌 없어서 탈이다. 알고보면 참 쉬운 남자인데 말이다. 인썰트 코인~(feat. 비트 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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