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선 자본주의 - 미국식 자유자본주의, 중국식 국가자본주의 누가 승리할까
브랑코 밀라노비치 지음, 정승욱 옮김, 김기정 감수 / 세종(세종서적) / 2020년 9월
평점 :
절판


  미중 간의 갈등이 심화 될수록 중간에서 낀 우리 나라는 참 곤혹스럽기 짝이 없다. 지정학적으로는 중국의 영향권에 속하면서도 이념적으로는 미국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경제 또한 중국과 미국 두 나라 모두 포기할 수 없는 시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만 선택하라는 숙제가 주어진다면 결코 풀지 못할 것이 틀림없다. 더구나 경제력의 대부분을 수출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모쪼록 미중 갈등이 하루 빨리 진정세를 보여주었으면 하는 바람 뿐이다.

 

  허나 정치적인 관점에서 두 나라를 보면 '진상'도 이런 진상이 없다. 두 나라 모두 '패권국가'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쪽도 바람직한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그저 힘쎈 두 깡패국가가 서로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형국이고, 우리 나라는 그 두 깡패 사이에 낑겨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구나 '분단국가'인 우리는 정치든, 경제든, 그 어떤 관점으로 보아도 갈등의 양상을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세계 최고의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참 대견하다고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와중에 이 책은 '하나의 경제체제'로 자리잡은 자본주의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자본주의'와 중국으로 대표되는 '국가자본주의'로 분화하고 있는 현재를 맞이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럼 '공산주의'는? 물론 스스로의 모순으로 망했다. 아직까지 북한, 쿠바 등에서 공산주의를 실현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 나라들의 경제는 바닥을 면치 못하고 있다. 아니 경제라고 이름 붙이기도 민망할 정도로 엉망진창이 된 지 오래 되었다. 중국조차 '공산주의'에서 일찌감치 선회하여 자본주의에 안착한 마당에 나머지 공산국가들도 결국엔 자본주의화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자본주의에는 가장 큰 문제점이 있다. 바로 '부의 불평등'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일찍이 사회주의 사상과 공산주의 체제가 등장했지만 오늘날에는 이미 실패하고 말았다. 그나마 북유럽 국가들이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복지국가'로 거듭났지만, 이들 나라들도 부의 불평등으로 인한 고민이 점점 심해지고 있단다. 암튼 여기선 '미국식'과 '중국식'만 비교하고자 한다.

 

  허나 책의 내용이 너무 자세한 탓인지 번잡스런 내용이 많고 거추장한 주장들이 많이 자칫 산만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모두 '부의 불균형'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불균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대안을 내세워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었으나 좀 깔끔하지 못해서 설명은 생략하려 한다. 핵심적인 내용은 '미국식 자본주의'가 성공할 것인지, '중국식 자본주의'가 안착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다. 물론 이 책에서도 뚜렷한 결론은 없다. 심지어 두 방식의 '절충안'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이 또한 '부의 불균형'을 어떻게 극복해야만 하는지가 관건이었다.

 

  마키아벨리는 말했다. 부모를 죽인 원수는 잊어도 내 재산을 빼앗은 원수는 꼭 갚는다고 말이다. 부의 불균형을 해결하기 위해 꼭 말하는 것이 '세금 징수'인데, 특히 '고수익자'에 대한 세금에 대해 관심이 높을 수밖에 없다. 왜냐면 이들의 '납세 저항'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미국식'은 불리하고 '중국식'은 유리한 편이다. 사회적인 합의가 필요한 만큼 자율에 맡긴 합의보다 국가정부가 밀어붙이는 방안이 더 결정내리기 쉽기 때문이다. 물론 그에 대한 반발은 정반대로 거셀 테고 말이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세금은 많이, 그리고 확실하게 걷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그래야 나라 살림도 안정되고 복지정책과 같은 것도 효율적으로 빠르게 시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래 사회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부의 불평등'도 점점 다양한 원인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를 세금 확보로만 해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그 나라의 방식이 어떻게 '부를 형성해 가는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그 형성과정에 대한 기나긴 부연설명은 책을 참고하시길 바란다. 부의 불평등이 극대화되어 가는 원인도 파악할 수 있지만...너무도 뻔한 방법이기도 하고 말이다. 이를 테면, 부자들끼리만 결혼을 하는 방법과 같은 것 말이다. 과거에는 가난한 남자 또는 여자와 결혼을 하는 부자들도 있었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부자들이 쌓아놓은 부를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부의 불평등'이 심화될수록 확실히 그런 경향은 더욱 심화되었다.

 

  암튼,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의 귀결'이다. 과연 수많은 문제점들을 자율적으로 극복하고 '미국식'으로 안착할 것인가? 아니면 엘리트적 관료주의 아래서 권력이 부를 만드는 '중국식'으로 결말을 낼 것인가? 아니면 '미국식'과 '중국식'의 장점만 따온 새로운 방식의 자본주의 체제가 형성될 것인가? 언뜻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이 책에 수록된 기나긴 부연설명을 읽고나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우리에겐 '미국식 자본주의'만 익숙해보이지만 우리도 알게 모르게 '권력중심적'인 '중국식 자본주의'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다. 우리 사회도 중국 못지 않게 권위적이며 관료중심적이기 때문이다. 허나 이런 방식에 크나큰 문제점이 '부패한 권력'이라는 점이다. 분명 중국은 거대한 자본주의 체제를 형성하며 매우 높은 성장률을 보여왔지만, '중국식 자본주의'에는 청렴결백함이란 전제조건이 절실한 셈이다. 그렇다고 '미국식 자본주의'가 좋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엄청난 문제점을 드러내며 2008년 이후 경제적으로 내리막길에 들어섰기 때문에 미국의 위상 또한 엄청나게 추락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귀결이 가장 좋을까? 이 책은 슬며시 두 체제의 '공진화'를 선보이고 있다. 두 가지 방식의 절묘한 조합과 장점만 따서 '또 다른 자본주의 체제'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뉘앙스를 마구 풍긴다. 딴에는 강아지조차 '순종'은 병약하고, '잡종'이 건강한 편이니 두 체제가 하나의 체제로 융합할 수만 있다면 더 나은 체제가 만들어질 거라는 점에는 수긍을 한다. 또, 과거 일본의 경제발전이 '시대적 상황에서 기인한 특수'였기에 거품이 빠지고 나서는 '잃어버린 20년'이란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자기 고집'만 부리다가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끝없는 추락만 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새로운 경제체제가 구축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에 다다르게 된다.

 

  이제 '자본주의'를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은 기대하기 힘들다. 과거에 '공산주의'가 대안으로 등장했다가 야멸치게 사라지고 말았다. 이젠 자본조의 스스로 변화를 맞이해야만 한다. 현재로서 가장 경제적으로 성장한 두 나라인 '미국'과 '중국'의 방식을 엿보며 새로운 모색을 해나가야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해 보인다. 분명한 것은 현재의 '미국식'과 '중국식'은 정답이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1 - 개정판
정은궐 지음 / 파란(파란미디어) / 200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낭만'은 고정된 형식을 벗어나서 자유를 만끽하며 즐기자는 생각에서 비롯된 풍조다. 그래서 '낭만'의 반대말이 '고전'이 되었다. 하지만 고전적인 아름다움도 우리는 함께 느끼곤 한다. 먼 옛날의 일상을 바로 눈앞에서 펼쳐보인 것 같은 생생함이 색다른 감흥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두 남녀간의 사랑이야기'를 담은 소설을 '로맨스 소설'이라고 부른다. 그 로맨스가 바로 '로망'이고, 로망을 일본식 한자음으로 '로망(浪漫)'으로 쓴 것을 우리식 한자발음으로 '낭만'이 된 것이다. 여기 정은궐의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이하 <성균관>)은 바로 그런 '낭만적인 이야기'를 우리의 '고전적인 역사'로 투영시켜서 세련될 필체로 우리에게 읽힌 책이다.

 

  가끔 '책읽기 슬럼프'에 빠졌을 때 <로맨스 소설>을 읽곤 하는데, 이번엔 대차게 빠졌기에 이 책을 꺼내 들었다. 벌써 네 번째 읽는 책인데도 여전히 질리지 않고 재미나게 읽는 낭만 소설이다. 정은궐의 매력이 물씬 나는 책이 이것뿐이 아닌데도 유독 이 작품만 줄창 읽어댔다. 왜 그랬을까?

 

  첫째, 소재가 재미났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조선은 '유교 국가'였다. 그 때문에 '반상의 법도'뿐만 아니라 '남녀의 분별'도 대단히 엄격했다. 다시 말해, 남자가 할 일과 여자가 할 일이 따로따로 있다는 굳은 신념으로 가득했던 시대란 뜻이다. 그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아무리 재주가 많은 여인이라도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무대가 전혀 없었다. 여자는 '칠거지악', '삼종지도', '남녀유별' 등등 온갖 족쇄를 달아놓고 집밖으로 함부로 나다닐 수조차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던 것은 두 말하면 입 아플 지경이었다. 근데 <성균관>에서는 '남장여자'를 등장시켜 그 여인의 재주를 마음껏 뽐내고 있다. 이 어찌 신 나고 재미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둘째, 금녀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야릇한 상상이 결코 선을 넘지 않는다. 여타의 '낭만 소설'이 남녀간의 사랑이야기를 다루다보니 입맞춤 정도는 시시하고, 키스와 스킨십, 애무와 섹스를 넘나드는..일명 '선을 넘는 묘사'가 차고 넘치는데 반해서, <성균관>에는 그런 묘사를 최대한 절제하고 있다는 점이 독자를 더욱 감질나게 만든다. 물론 두 남녀 주인공에 한해서만이다. 대물과 가랑 사이에서만 절제될 뿐이고, 걸오에게선 검약, 여림에게선 넘쳐나다 못해 주체하지 못할 정도 과낭비하는 묘사를 해서 더욱 묘한 대비를 이룬다. 거기다 천하일색 기생인 초선과 규중가인 부용화까지 등장하며 여섯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나름대로 보여주고 있어서 읽는 맛을 더욱 살려준다.

 

  그리고 마지막은 역사적 고증이 매우 뛰어나다는 점이다. 이는 '사극'을 다루는 소설에서 '선택' 사안이 아니라 '필수'가 되고 말았다. 아무리 소설이 '허구의 세계'를 다룬다고 하여도 '역사적 사실'을 배격하거나 없는 사실을 억지로 껴맞춘다면 그 어색함이 단박에 눈에 띄어서 독자들의 외면을 받기 십상이다. 그런 까닭에 요즘에는 '사극 소설'이나 '사극 드라마/영화'를 통해 역사공부를 한다고 할 정도로 철저한 고증을 요구하는 독자가 더 많아졌다. 여기에 딱 맞는 작가가 바로 정은궐일 것이다.

 

  <성균관>은 조선 정조시대를 배경으로 펼쳐낸 소설이다. 그리고 공간적 배경으로 '성균관'을 선보였다. 오늘날로 치면 '서울 국립대학' 격이지만 서울 명지동에 '성균관대학'이 버젓이 존재하고 있으므로 소설을 재미나게 읽은 독자라면 실제로 방문하여 '잘금 4인방'이 공부하던 곳을 직접 견학하는 것도 좋은 경험일 것이다. 물론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드라마가 나오기 훨씬 전에 성균관대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외부인도 쉽게 들락날락할 수 있었다. 90년대면 너무 옛날인가...

 

  이 책의 색다른 묘미는 '사색당파 싸움'이 주인공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이다. 조정관료들의 당색이 그 자식들에게까지 영향을 주어서 대를 이어 대립과 갈등을 조장하고 있었으니, 참으로 답답할 노릇이라는게 겉에서 본 '당파 싸움의 전부'이지만, 당파 싸움의 원인인 '해석의 차이'를 들여다보면 당시 조정관료들의 고심을 들여다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노론, 소론, 남인으로 갈라져 허구헌날 싸우기만 했지만, 각자 나름의 이유와 고집은 있었던 셈이다. 허나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한낱 '명분'에 사로잡혀 세상 돌아가는 형세를 파악하지 못하고 조선을 우물 안의 개구리로 만들어버린 안타까움이 더할 뿐이다. 영국의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발명할 때, 조선에서는 장희빈이 사약을 한샷으로 먹네, 투샷으로 먹네하며 구중궁궐 다툼이 한창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어디까지나 '낭만 소설'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금녀의 공간인 '성균관'에 여인의 몸으로 상유가 되어 조선 당대의 수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점에 충실하면 이야기는 더할나위 없이 재미지게 읽혀진다. 한마디로 '역사적 고증'까지 완벽하지만, 그딴 거 몰라도 이야기가 재밌게 흘러간다는 사실에 주목해야만 한다.

 

  1권에서는 아픈 동생을 대신해서 과거를 본 윤희가 덜컥 생원과 진사에 합격해 성균관에 '거간수학(임금의 명령으로 성균관에 기숙하며 공부함)'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여인의 몸으로 남정네들이 득실거리는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이 걱정이 되면서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정도의 미남자인 가랑 이선준과 '한 공간'에서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들뜨게 된 대물 김윤희는 또 다른 미남자인 걸오와 여림을 만나면서 여성독자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게 된다. 하지만 윤희는 생각 밖으로 '남자 행세'를 잘하게 된다. 천하일패 기생 초선의 도움으로 여인이라는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별호 '대물'도 받게 되고, 미남자들과 어울리다보니 웬만한 남정네들이 훌러덩훌떡 벗어젖힌 맨몸을 보는 것도 '면역'이 빠르게 생겨버렸다. 그렇게 '성균관 생활'에 잘 적응하나 싶더니만 '남장행세'를 하였는데도 어쩔 수 없이 '여인의 마음'으로 질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펼쳐진다. 바로 가랑 이선준에게 '부용화'라는 미인 처자가 들러붙은 것이다. 선준은 성균관 신방례 때 신세를 진 부용화의 부탁을 아니 들어줄 수가 없었는데, 윤희는 그것조차 마음이 아파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런가? 대물 김윤희와 가랑 이선준의 사랑 이야기는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 여기에 여림은 대물이 여자임을 확인하는 마지막 함정을 파놓는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꼬불꼬불나라의 문명이야기 에듀텔링 9
서해경 지음, 김용길 그림 / 풀빛미디어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공학도였던 나로서는 '사회영역'이 생소한 편이다. 고교시절에 '사회', '정치', '경제', '윤리', '국사', '지리' 등등을 배웠지만, 교과서의 내용이 다 거기서 거기였던 관계로 '명확한 구분'을 잘 못하는 편이다. 그래서 지금도 '인문학 분야'의 책을 섭렵하고 있지만, 딱히 장르를 구분해가며 읽는 편이 아니다. 그래서 좀 답답한 면이 없잖아 있는데, 요즘 <초중등 사회교과서>는 더욱더 방대한 내용을 총망라한 듯하다. '7차 개정'이후에 가장 많은 변천을 겪은 과목 가운데 '사회'와 '역사'를 빼놓을 수 없다. 학년을 오르락내리락하며 가장 큰 혼란을 겪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였을까? 나도 어느 순간부터 '학교진도'와는 상관없이 아이들에게 모든 단원을 순서에 상관없이 가르치기 시작했다. 어차피 다 배울 내용이니 미리 배우면 '예습' 삼았고, 이미 배운 내용이면 '복습' 삼아 가르치곤 했다. 딱히 아이들도 큰 불만 없어서 그대로 밀어붙이고 있다. 대신에 '사회교과'를 통으로 꿰뚫는 안목을 기르는데 큰 중점을 두며 수업하고 있다. 그래서 이것도 사회, 저것도 사회, 그것도 사회..여러 분야의 내용을 '사회교과에서 다루는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말이다. 말은 이렇게 해도 수업의 차이는 그닥 없다. 깊이 파고들어봤자 '초딩용'이 아니겠는가ㅎㅎ

 

  암튼, '기후이야기'를 하려고 전세계를 떠돌던 수염왕이 이번에는 시대를 거슬러올라 '고대문명들'을 만나고 돌아온다. '기후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맥락은 없다. 암기 위주의 단원인 관계로 무작정 '새로운 어휘'를 익히고, '개념'을 머릿속에 정리한 다음에, '시대별/사건별'로 개요을 짜서 학습의 흐름을 잡는 요령을 한껏 부려야할 뿐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어려워하는 단원이기도 하다. 특히, '지리'와 '역사'가 말이다.

 

  어쨌든, '역사(세계사)책'을 펼치면 꼭 나오는 내용이 '인류의 변천사'다. 최초의 인류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부터 호모 하빌리스, 호모 에렉투스, 호모 사피엔스는 꼭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 여기에 네안데르탈인까지 곁들여서 정리한다면 매우 훌륭하다. 이 파트를 공부할 땐 반드시 원숭이 흉내와 사람 흉내를 내면서 수업을 해야만 한다. 안 그러면 길디 긴 '이름'만 외우다 그냥 잠들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곧선 사람(호모 에렉투스)'이 얼마나 세련된 직립보행을 했는지 시뮬레이션을 보여주면서 수업을 해야 잠이 깬다.

 

  그 다음엔 '고대 4대문명'의 이름을 나열하게 된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 문명, 인더스 문명, 황허 문명, 그리고 각각 '큰 강 유역'에서 문명이 발달했다며 강 이름도 나열해줘야 한다.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나일강, 인더스강, 황허강, 그 다음엔 찬란한 문명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문자 이름도 나열해주어야 한다. 각각 설형문자, 상형문자, 인장/도장, 갑골문자..이 정도만 나열하는 것으로 1시간은 족히 걸린다. 그러니 얼마나 졸리겠는가. 각각의 문명마다 재미난 에피소드를 설명해주면서 인상깊은 율동까지 보여주며 지구라트(신전)와 피라미드, 모헨조다로, 그리고 은허에서 거북이등껍질 굽는 흉내까지 내줘야 한다.

 

  보통은 여기까지 내용을 정리하며 '문명이야기'를 마무리하곤 하는데, 이 책은 '아테네 문명'과 '마야 문명'까지 덧붙여 보여주었다. 신선한 접근법이지만 어차피 '사회교과서'에 다 나오는 내용이니 앞에서 한 것과 같이 올림피아 제전을 몸으로 시연하고, 태양신에게 인신공양을 하며 펄떡펄떡 뛰는 심장을 꺼내는 장면을 연출하며 마무리하면 된다. 그리고서 수염왕도 현재로 되돌아 오면서 책의 내용도 일단락되었다.

 

  이처럼 근래의 사회교과서는 선생님도 춤추게 만든다. 지루한 내용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선생님의 노력여하에 따라서 생동감이 넘치는 교과로 탈바꿈할 수 있는 것이다. 단점이라면 '교과내용'은 기억에 남지 않고 선생님의 몹쓸 율동만 기억한다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본의 꿈 기계의 꿈 북클럽 자본 시리즈 8
고병권 지음 / 천년의상상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본론>이 어렵다는 이유는 직접 읽어보니 정말 잘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참 재밌는 책이라는 사실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어려운 책을 섭렵해나가다 보면 종종 느끼는 일이긴 하지만, <자본론>만큼 안목을 확 넓혀주는 책은 이제껏 읽지 못했다. '경제'란 학문에 아둔했던 내가 경제뉴스와 경제이슈에 관심으리 쏟고 어줍잖게나마 이해하며 보고 들을 수 있게 된 것도 바로 <자본론>을 사알짝 들여다본 덕분이었다. 아무튼 '고병권의 <자본론>'을 다 읽고 난 뒤에도 여타의 마르크스 관련 책들을 섭렵해나갈 것을 다짐한다. 마르크스만큼 오해와 편견을 갖고 있는 이들이 참 많다는 것도 새삼 느꼈다. 이곳 예스에서는 아무런 댓글도 달리지 않지만 '페이스북'에서는 꽤나 다양한 반응들이 나와서 참 즐겁다.

 

  어쨌든 벌써 8권이다. 12권이 전부라고 저자가 밝혔고, 현재 10권까지 출간이 되었으니 완독도 멀지 않았다. 이번 8권에서는 '기계제 생산'이 자본가에게 얼마만큼의 이윤을 남겨 주었는가? 하는 질문으로부터 기계에게 내몰려 거리로 떠밀린 노동자의 설움까지 살펴 볼 수 있었다. 익히 알고 있는 '러다이트(기계파괴) 운동'도 바로 이 시점에서 일어난 사건이라 읽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고민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이 바로 '인공지능'에 의한 노동자들의 대량실직을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산업혁명 초기에 '대량실직'된 노동자들이 새로운 직종에서 더 많은 구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4차 산업혁명도 초기에는 큰 혼란을 겪게 되겠지만 더 다양한 직종이 생겨서 훨씬 더 많은 구직을 할 수 있게 될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2차 산업혁명'에서 기계가 대거 도입되면서 '제조업 분야'에서 벌어진 노동자의 대량실직 사태가 수습되고 새로운 직종인 '서비스업'으로 대체되기까지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그동안에 수많은 노동자들이 새로운 직종이 나오기도 전에 굶어죽었다는 사실 말이다. 한편, 제조업 분야를 '기계'가 차지하니 '사람'은 서비스업 분야에 종사하게 된 것과 현재의 서비스업을 '인공지능'이 차지하고 나면 '사람'은 어느 분야에서 '노동'을 하고 돈을 벌 수 있겠느냔 말이다. 4차 산업혁명의 가장 큰 특징이 '노동의 종말'인데, 노동을 할 수 없는 노동자의 소득은 누가 보장할 것이며,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상품'을 소비할 사람이 없어진 마당에 자본주의가 유지될 수 있을 것이냔 말이다.

 

  그 때문에 '기본 소득'을 지급하는 것과 같은 대안이 이야기되고 있지만, 이조차 어느 한 나라가 시행을 한다고 해서 잘 될 턱이 없고, 초기에 도입한 나라일수록 경제에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전세계가 동시다발적으로 시행해야만 서로간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방안인 까닭에 혀내 여러 나라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관망하고 있는 시점이다. 허나 절대 오해해선 안 될 것이 '기본 소득 지급'과 같은 일이 과거 '공산주의 국가체제'로 회귀하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늘날 공산주의가 망한 가장 큰 이유는 '독재'가 성행하고, '감시'가 횡행하는 등 정치적인 실패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물론 공산주의 경제이론도 무능하긴 마찬가지였다. 계획적으로 통제되어 '개인의 의욕'을 말살해버린 경제체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되자 그대로 주저 앉았으며, 냉전시대의 폐쇄성이 공산주의의 파멸을 더욱 앞당겼기 때문이다. 그러한 공산주의의 망령을 우리가 다실 불러올 까닭은 절대로 없다. 그 때문에 '기본 소득 지급'은 근로의욕을 떨어뜨리고 모든 이들의 경제적 평등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전체 소득의 일부'를 보충해주어 '소비'를 촉진시키는 정책이라는 점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그 때문에 전세계적으로도 기본소득의 금액은 20~30만 원에서 많게는 100만 원으로 논의되고 있는 것이다. 전국민이 그 정도 금액을 일률적으로 꾸준히 소비해준다면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도움이 될 거라는 계산을 하고 있는 셈이다.

 

  마르크스와 <자본론>에 대한 오해는 다음에도 이야기할 기회가 많은테니, 이쯤에서 끝내고, 이 책의 내용을 이야기하련다. 마르크스는 자본가의 '기계 도입'에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자본론>에서도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기계제 생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리고 '기계제 생산'속에서 노동자들의 희망도 엿보았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기계는 등장과 함께 노동자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말았다. 물론 '기계'가 노동자를 죽인 것은 아니다. 한낱 도구(수단)에 불과한 기계가 노동자를 학살한다는 상상은 쉽게 할 수 없다. 하지만 그 '기계'속에 자본가의 속성이 담기게 되자 '자본가로 변신한 기계'는 노동자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고 말았다. 그 '자본가의 속성'이란 다름 아닌 '이윤 추구'다.

 

  마르크스는 일찍이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으로 자본을 구분하며, 막대한 이윤은 '불변자본(도구)'가 아닌 '가변자본(노동자)'에서 얻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엄청난 생산량을 뿜어내는 기계가 등장하자 '불변자본'인 기계에 막대한 투자를 하는 것이 더 많은 이윤을 얻을 수 있는 비결이라는 점을 자본가들이 알아챈 것이 '원인'이었다. 물론 자본가도 '초기 비용'이 엄청나게 드는 기계를 함부로 들여오기 힘든 점이 없지 않았다. 그래서 초기에는 '기계'를 도입하기보다는 노동자의 수를 늘리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기계'는 느리지만 아주 확실하게 '노동자의 몫'을 대신하며 노동자를 공장에서 쫓아내기 시작했다. 더 정확하게는 '숙련공'들이 설자리를 빼앗아버린 셈이다.

 

  스미스의 '분업'은 대량생산의 길을 열었다. 비록 '노동의 가치'를 하락시키기는 했지만, 노동의 속도는 엄청나게 빨라졌고, 늘어난 생산량만큼 숙달된 '반복작업'으로 노동의 가치가 변신을 하면서 수많은 '숙련공'들이 배출된 것이다. 하나의 상품이 완성되기까지 노동자의 영혼이라도 담을 것 같았던 '수공업'에서 영혼을 빼앗겨버리고 단순반복 작업만 남아 '노동의 가치'를 찾아볼 수 없게 만든 기괴한 괴물 노동자(외형이 변해버린, 이를 테면 '망치질'만 전문적으로 하다보면 '망치질의 달인'이 되는 것처럼 특정 공정에만 특화된 노동자)를 만들어버렸지만, 우리는 그들을 '숙련공'이라고 부르며 대단한 능력자로 대접해주었다. 허나 '기계'의 등장으로 숙련공은 설자리가 없어지게 되었다. 복잡하고 어렵고 힘든 작업은 모두 '기계의 몫'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남은 일자리는 그런 기계를 조작할 여성이나 아동 노동자 한 명이면 족했기 때문이다. 그도 아니면 더욱더 단순한 반복작업만 수행하는 노동자만 필요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들을 '미숙련공'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숙련공이 미숙련공보다 못한 대접을 받게 되자 '러다이트 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다가 대유행이 되고 말았다. 허나 부서진 기계를 대신해서 숙련공들이 공장으로 되돌아간 것이 아니라 더욱 강화된 '최신 기계'가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며 망가진 기계를 대신하곤 하였다. 이렇게 일자리를 일어버린 노동자들은 더욱더 비참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허나 자본가는 더욱더 많은 '이윤'을 챙길 뿐이었다. 이미 밝혔지만 자본가들은 결코 '자선사업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노동자들의 복지와 같은 일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마치 '양계장 주인'이 암탉들의 건강을 위해서 달걀생산량을 줄여주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더 많은 달걀을 얻기 위해 밤에도 LED 조명을 비추며 암탉들에게 달걀을 생산하라고 독려하게 될 것이 뻔하다. 그렇게 혹사를 당하다 '평균수명'도 채우지 못한 암탉이 죽으면 '배터리(구멍이 숭숭 뚫린 3층짜리 양계 닭장)' 문을 열고 죽은 암탉을 대신할 새 암탉을 넣어주는 것이 전부다. 평생 달걀만 생산하다 숨을 거둔 영웅적인 암탉의 희생에 대한 묵념 따윈 기대도 하지 말아야 한다. 오직 '이윤 추구'만 가득한 현장이다. 기계제 생산을 고집하는 자본가들의 속성이 이렇다.

 

  그럼에도 마르크스는 '기계'가 노동자들의 고된 노동을 해방시켜줄 혁명이 될 거라고 기대했다. 밤낮없이 노동에 시달리던 노동자를 대신해서 일을 해줄 기계가 '노동 해방'의 희망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렇게 노동에서 해방된 노동자들은 안락한 삶을 살며 얻게 된 '여유'로 수준 높은 삶을 위해 교육도 받고 즐거운 삶을 위해 여가생활도 즐기며 온가족이 오붓한 시간을 가지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기계'의 잘못일까? 아니다. 아무런 의식도 없는 '기계'가 무슨 잘못이란 말이냐. 기계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자본가'들이 못된 탓이다. 이들의 '이윤 추구' 욕구가 기계에 투영되는 순간 기계는 노동자를 학살시키듯 대량해고와 척박한 노동환경을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행동'으로 무엇을 해야만 할까? 결국 마르크스는 "모든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는 <공산주의 선언>을 하고 말았지만, 글쎄..그보다는 더 효과적인 방법도 있었겠지만,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가재는 게편'인 정책담당자들의 자본가 편들기가 극에 달하면서 다른 방도를 모색하지 못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심지어 정치경제학자라는 사람들도 허무맹랑한 주장을 반복하면서 노동자가 설자리를 마련해주지 못했으니...딴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을 듯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리스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생각의 탄생
최화선 지음, 박태성 그림, 문성원.이용재 감수 / 푸른나무 / 2010년 12월
평점 :
품절


  인문학적 교양을 쌓기 위해서는 한두 권의 책을 읽는 것으로 턱없이 부족하다. 물론 시간도 오래 걸린다. 오래도록 꾸준히 '독서의 두께'를 쌓아올린 뒤에야 겨우 교양이 쌓이는 법이니 결코 쉬운 일도 아니다. 하지만 교양이 넓고 깊게 쌓이며 '세상을 보는 눈'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정말 아름답다. 비록 날카로운 비판으로 가득할지라도 '비판'을 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질 수 있음에 정말 고마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게 바로 교양이다.

 

  그런데 그런 교양을 쌓기 위해 처음에는 무엇을 읽어야 할지, 어떻게 쌓아나가야 할지 막막할 따름이다. 교양을 쌓기로 결심한 순간, 거금 100만 원을 들고 서점에 가서 교양 가득한 책을 사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해서 '좋은 책'이 손에 딱딱 잡히지도 않는다. 그런 막연함에 발길을 돌려 책을 많이 읽었다는 분들의 조언을 들으며 "좋은 책 좀 추천해주세요"라고 말하면 각양각색의 책목록이 만들어지지만 정작 '나의 마음'에 쏙 드는 책이 별로 없다는 사실만 깨닫게 된다. 허나 결코 헛된 돈낭비, 시간낭비는 아닐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 누구나 '처음'에는 그런 실수를 하며 교양을 쌓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교양을 쌓으려고 마음 먹게 되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서양 인문학'의 첫걸음이 되는 <그리스 문화>에 대한 관심이다. 철학과 역사, 신화, 예술, 문학, 과학 등등 거의 모든 것의 시초라고 일컫는 <그리스 신화>와 <그리스 철학>은 정말 '되돌이표'를 무한으로 반복할 정도로 접하게 될 것이다. 이를 테면, 철학을 공부할 때에도 소크라테스부터 시작하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순서로 접하게 되고, 역사를 공부할 때에도 고대문명 다음은 '그리스', 헬레니즘, 로마...라는 순서로 읽게 된다. 더구나 '민주정치'의 시작이라고 예를 들면서 그리스 아테네의 민주정치를 접한다. 신화는 어떤가? <그리스로마 신화>를 읽지 않은 어린이가 없을 정도다. 그렇게 어려운 신화책을 어린 나이에 접하게 되는 까닭도 '서양문화를 익히기 위해선 그리스신화부터 알아야 한다'는 선입견이 생겼을 정도다. 예술에서도 '이집트 양식'을 배운 다음에는 어김없이 '그리스 양식'을 배운다. 더구나 '황금비율'은 아름다움의 대명사라고 할 정도로 지겹게 듣게 될 것이다. 이렇듯 '서양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총망라한 방대한 내용을 '그리스 문화'를 통해서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살짝 비꼬는 투로 반박을 하자면, 오늘날 '서구 우월주의'의 원류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셈이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유럽'은 17세기 이전까지는 가장 못사는 나라들이 고만고만하게 모여 있는 대륙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이슬람 문명권'에서 유럽을 고립시키 위해 '인도로 가는 길(육로)'을 봉쇄하면서부터 유럽의 팽창이 시작된 셈이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듯이 새로운 바닷길을 열면서 '대항해시대'를 열어 버린 셈이다. 그렇게 유럽인들의 관점에서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의 발견이 시발점이 되어 '식민지 쟁탈전'이 벌어지는 제국주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와 때를 맞춰서 발전하게 된 새로운 학문인 '역사학'이 대두되면서 서구인들의 심금을 울린 '백인은 우월하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고, 그래서 과거에 잃어버렸던 자신들의 문화와 역사였던 '그리스 문화'를 아랍권에서 되찾아오며 지금에 이르게 된 셈이다. 물론 이 책에 나온 내용은 아니다. 그러니 심심풀이로 읽어주시길 바란다.

 

  암튼, 이 책의 내용은 이토록 방대한 '그리스 문화'에 대한 여러 가지 지식들을 한 권으로 모아 놓았다. 그래서 이 책은 여러 권을 읽어야만 할 수고를 덜 수 있다는 장점이 녹아 있다. 그런 까닭에 '초급용'이라고 보아도 무방하지만, 중급 이상의 실력을 갖춘 분들도 자신의 교양을 다시 정리하면서 읽을 수 있을 만큼 제대로 정리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리스 신화'와 '그리스 철학'을 두 개의 기둥으로 삼고, '그리스의 정치', '그리스의 예술', '그리스의 문학', '그리스의 사상' 등등 다양한 카테고리를 하나의 폴더에 착착 정리해놓은 듯 일목요연하다는 점이 최대 장점이다.

 

  참고로 이 책은 <생각의 탄생>이란 시리즈로 '그리스편' 외에도 '중세', '르네상스', '낭만주의', '사실주의'를 카테고리로 엮어냈기 때문에 서양의 사상을 한 눈에 읽어보기에 딱 좋은 시리즈다. 책의 수준은 이원복 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를 막힘없이 읽을 수 있는 수준이면 얼마든지 즐길 수 있을 정도의 난이도를 갖고 있다. 굳이 '만화책'에 비유한 까닭은 '사진 자료'가 매우 풍부한 책이기 때문이다. 모든 페이지에 '사진'과 '삽화'가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정말 술술 읽힌다는 점도 이 책만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장점을 또 꼽으라면, '그리스 신화'에서 '그리스 문학'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한 눈에 볼 수 있다는 점이고, 그 뒤에 자연스럽게 '그리스 자연철학'으로 이어지는 서술이 참 일품이다. 간단한 예로 설명하자면, 헤브라이즘의 '유일신 종교'와는 달리 헬레니즘의 '다신교'는 신조차 인간을 닮은 '인격신'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온다는 설명 뒤에 '만물은 물로 이루어져 있다'는 탈레스로 인해 '자연철학'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었다. 이는 '만물의 이치'를 신에게서 찾던 사람들이 인간의 생각(철학)으로 이해하려 했다는 것을 더할나위 없이 자연스럽게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낱낱의 지식들을 한 코에 꿰는 순간의 짜릿함은 정말 느껴보지 못한 이들에겐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이 책은 바로 이런 쾌감을 절로 느끼게 해주기 때문에 좋은 책이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이제 막 교양에 관심이 생긴 분들에게 권하고 싶다. 나도 언젠가 이 정도 실력으로 방대한 지식을 써내려갈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가볍게 읽으며 교양도 쌓을 수 있는 책이라고 소개하며 다음을 기약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