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원복 교수의 세계사 산책
이원복 글.그림, 그림떼 그림 진행 / 김영사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산책. 이 책의 머릿글에도 풀이했듯이 '뚜렷한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발 닿는 대로 마음이 끌리는 대로 여기저기 한가롭게 걷는 발걸음'이다. 그래서 주저없이 이 책을 선택했고 가벼운 마음으로 읽으려 하였다. <세계사>란 다소 무거운 주제인데도.
그러나 이런 기대는 서문에서부터 여지없이 깨지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매우 불쾌했다. 이 책의 서문에는 이런 말이 적혀있다.
(각설) 이 책의 의도는 이러한(이념적 시각이 너무 달라 양보의 미덕을 발휘할 수 없는 한반도의 특수상황이기에 비수를 품고 살기마저 풍기는 지독한 싸움을 한다고 본다) 우리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반추해보자는 것이다. (책머리에)
지극히 옳은 말이다. 작금의 우리 현실은 이념과 성향, 파벌로 인한 <다툼의 장>만이 펼쳐졌을 뿐, 서로를 이해하고 상생을 넘어 화합의 길을 모색해야하는 데도 그렇지 못해 답답한 시기이니 참으로 적절한 지적이다. 그러나 그 뒤에 이은 저자의 말은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입이 백 개라도 국민을 굶기는 정권은 바른 정권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그런 정권은 옹호하면서 반세기 만에 세계사에서 유례를 볼 수 없는 경제 기적과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룩한 대한민국을 정의가 패배한 나라로 폄훼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러한 안목은 이념적 성향이 아닌 그릇되고 비뚤어진 역사관이다. 이 책은 이러한 사시적(斜視的) 역사관에 대한 항변이기도 하다. (책머리에)
객관적으로 본다고 하고서는 지극히 이념적인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국민을 굶기는 정권은 북한을 지칭하는 듯한데, 그럼 우리 국민들은 굶지 않고 있는가? 용산참사나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현실은 어떤가 말이다. 이들은 국민이 아닌가? 아니면 <국민>이라 지칭함은 <부자>들만을 지칭하는 말이라도 되었다는 말인가?
물론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뒤흔들거나 부정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 역사의 그늘까지 왜곡하고 덮어서 <대한민국사>를 드높여야 한단 말인가? 역사의 부끄러운 부분은 부끄러운대로 우리의 역사요, 자랑스러운 부분은 자랑스러운대로 우리의 정체성이다. 곧 부끄러운 역사를 바로 보아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것이고, 자랑스러운 역사를 길이 남겨 후세에게 본을 삼도록 하는 것이 역사를 가르치는 본질이란 말이다.
그런 객관적인 역사관을 가진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부끄러운 부분을 강조한다는 둥, 대만민국 정체성을 위협할 정도의 <자학사관>이라는 둥 대한민국 역사를 진짜로 훼손하고 폄훼하는 분들은 바로 [이원복], 저자와 같은 분들에게 드려야 할 말일 것이다.
이원복. 한국 만화계의 지성이며, 학습만화의 새 장을 연 동시에 만화에 대한 위상을 드높인 분임에 틀림없다. 어릴 적부터 이런 분의 책을 읽었고, 어른이 되어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면서 이 분이 저술한 책을 수없이 인용한 사람으로서 이 책이 주는 배신감에 어찌할 바를 모를 따름이다.
만화 장르가 어른과 아이를 가르지 않고 고르게 영향을 주며, 손쉽게 읽을 수 있다는 등 장점이 정말 많다. 그런데도 이렇게 편향적이고 오독할 우려가 큰 책을, 특히 가치관이 형성되는 시기의 어린 학생들에게 읽힐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만큼 이 책은 [객관적이지 않은 책]이다.
기분 좋은 산책길에 불쾌한 광고판이나 경관을 해치는 몰지각한 건축물을 본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