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60선 59 :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NEW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60선 59
손영운 글.기획, 이진영 그림 / 주니어김영사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는 3권에 해당하는 방대한 분량의 책이다. 이책을 우리 나라에서는 6권으로 나누어 출간하였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각권은 평균 700여 쪽에 달하는 '벽돌책'이다. 이렇게나 방대한 분량의 '역사책'인만큼 사료에 충실하였다는 것을 방증하기 때문에 브로델을 일컫어 '노벨 역사학상 수장자'라고 불릴 정도란다. 안타깝게도 노벨상에는 '역사학 분야'가 없으니 말이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이 아무리 청소년에게 유익한 필독서라고 하더라도 꼭 읽기히게는 무리한 일일 수밖에 없는 일이며, 방대한 원전에 일일이 '주석'을 달아놓은 <해설서>라도 읽힐라치면 더욱 골머리를 싸잡아쥐는 악순환이 반복될 뿐일 것이다. 앞서 <대승기신론>이란 석가모니의 말씀을 압축한 책에 '해석'이 분분하니 원효를 비롯해서 유명한 고승이 <대승기신론소>를 펼쳐내어 읽고 해석하기에 불편함이 없게 해주었으나, 그로 인해 <대승기신론>의 분량보다 10배가 더 많은 '주석'을 달아놓을 수밖에 없었음을 떠올린다면, 이 책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또한 그럴 폐해가 얼마든지 나올 법 하다. 그런 까닭에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시리즈'가 대단한 시도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쉽고 재미나게 읽으면서 '만화형식'으로 단번에 '원전의 이해'를 도모하기 때문이다. 물론 '전부'가 아니라 '맛보기'에 불가하다는 지적을 피할 순 없겠지만 '청소년 독자'들에겐 유용한 시도가 분명할 것이다. 반드시 '원전'에 도전하겠다는 다짐만 얻어낼 수 있어도 이 책이 지닌 '의도'는 십분 발휘한 셈일 것이니 말이다.

 

  암튼, 역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토스'와 '사마천'에 버금가는 영예를 누리어 마땅한 '페르낭 브르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살짝 이해해보도록 하자. 먼저,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기준의 중요성'을 강조한 브로델의 주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최초의 역사서라 불리는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기존의 왕조 중심(권력자)의 역사관이 아니라 방대한 사료를 바탕으로 이성에 의한 '합리적인 연구'를 통해 역사를 서술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평가받았다. 또한, 중국 전한시대의 역사가인 사마천은 <사기>를 집필하면서 역사를 '본기(제왕의 역사)', '열전(신하의 역사)', '지(법률, 경제, 사회의 역사)', '연표(역사적 흐름을 표로 정리)'로 정리하는 '기전체'라는 역사서술 방식을 확립하였다. 이후의 동양역사가들은 거의 대부분 사마천의 '기전체' 방식을 본따 역사를 서술하였다.

 

  이에 반해 브로델은 역사를 '누구의 입장에서 기록할 것'인지 따져 물었단다. 역사에 기록될 만한 '사건'이 발생하였더라도 '보는 관점'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른 방식의 서술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80세를 맞이하여 축하할 만한 사건이 발생했더라도 '왕과 귀족'이 맞이한 80세 잔치와 일반 '평민과 천민'이 맞이한 80세 잔치는 극명한 차이를 보일 것이다. 또는 '교통사고'가 났더라도 고급차와 중고차라는 '대상'에 따라 '보는 관점'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고, 이는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관점이 더해지면 더욱더 다양한 역사로 기록될 가능성이 농후해질 수밖에 없다. 브로델은 바로 이런 점을 중요시 여겼던 것이다. '역사기록'도 마찬가지다. 기존의 역사학자가 역사를 기록한다면 분명 전문성이 높은 '정치/사회사 역사기록'이 서술되겠지만, 경제사학자가 똑같은 역사를 기록하게 된다면 '경제사 역사기록'으로 서술되면서 '역사관점'이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과학사학자나 미술사학자가 마찬가지로 기록한 '역사책들'은 기존의 역사책과 사뭇 다른 '역사관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세계사' 단위로 역사를 기록할 것인가? '국가' 단위로, 또는 '100년' 단위, '1000년' 단위 등등으로 여러 단위로 역사를 쓰게 되는 것에 따라 서로 다른 '역사학파'가 결정지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브로델은 인류 전체를 바라보는 '유연한 자세'를 강조하며 기존의 역사학자들이 지나치게 '정치적 사건'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것에 반대하였고, 이러한 역사학파를 '아날 학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는 1929년에 <경제사회사 연보(아날)>창간된 잡지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는데, 이 잡지의 이름은 각각 46년에 <아날, 경제, 사회, 문명>으로, 94년에 <아날, 역사와 사회과학>으로 바뀌었다. 아날 학파는 이러한 경향을 주도한 학자에 따라 3개의 세대로 나누는데 '페르낭 브로델'은 제2세대에 속하며 시기적으로 1945~1968년에 주름잡았다. 브로델이 '68혁명' 이듬해에 아날학파 편집위원직을 넘겨주었는데, 프랑스대혁명에 버금가는 '68혁명'의 주역들이 바로 브로델의 역사학을 맥락으로 잡아 기존의 기득권자들에게 반기를 든 대학생과 지식인이 연대를 하였으니, 유심히 지켜볼 시점임에 분명하다. 어찌보면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란 저서는 아싸(아웃사이더)들의 개론서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 어디를 찾아봐도 '혁명의 지침서'가 될 만한 내용은 찾을 수 없다. 이 책은 '역사를 총체적으로 조망한다'는 생각을 정확히 구현해낸 책이지만, 조금 달리 해석하면 '유럽은 어찌해서 성공가도를 달렸고 중국을 비롯한 동양은 어찌하며 쇠망하게 되었나'라는 자화자찬, 아전인수 격의 책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에, 인류의 역사를 '짧은 시간'이 아니라 '긴 시간'을 통해 지난한 과정과 여러 관점을 살펴보야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논조로 일관하였을 뿐이다. 따라서 짧은 시간 안에 극심한 변화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혁명의 논의'는 거대한 역사적 흐름으로 봤을 땐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이야기하였기 때문이다. 허나 거대한 역사적 흐름속에서도 '프랑스대혁명' 같은 '혁명의 필연'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부인하지도 않았기에 이 책을 읽고 공감한 '68 혁명가들'도 꽤나 많았을 것이다. 이는 브로델의 삶속에서도 짐작할 수 있는데, 그는 보수권력자나 기득권층에게 유리한 역사를 쓰지 않는 일관적인 논조를 유지하며, 어쩌면 세상사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처럼, 오직 '학자의 길'만을 걷고자 했을 뿐이다. 그 때문에 진보적인 논객들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는데, 그때에도 마찬가지로 '거리'를 유지하는 소신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브로델은 오직 '학자'로서 책임과 본분을 다할 뿐, 변화하는 세상사에 일일이 관여하는 모습을 보여주진 않았다. 하지만 그는 '행동하는 실천적 지성인'이었던 샤르트르에 대해서 칭찬과 비판을 계속하면서 '학자로서 중도의 길'을 지킬 뿐이었다. 그 때문이었는지 그의 '물질문명'를 논할 때의 관점은 꽤나 '제국주의자들의 논조'와 유사한 점을 찾아볼 수 있다. 이른바 '서양의 성공과 동양의 실패'는 서양일변도의 제국주의의 성패와도 유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식민지에서의 생활을 겪어보았던터라 '식민지생활의 참담함'도 날카롭게 비판하며 마냥 제국주의를 옹호하지만은 않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부자들에겐 천국을, 빈자들에겐 고통을 선사한다'는 논조로 비판하며 자본주의를 만병통치약처럼 신봉하는 부류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던지기도 했다. 허나 정작 이 책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라는 책에는 그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가 없어서 모호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사료'를 중시하는 '랑케의 사관'과 '해석'을 중시하는 '카의 사관'의 중간적인 시기에 '방대한 사료'를 바탕으로 '다양한 해석'을 통해 역사관을 사유해야 한다는 '총체적 역사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역사적 관점의 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이러한 '총체적 역사관'이 꼭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에게 '랑케의 사관(실증사학)'은 식민사관이란 병폐를 낳았으며, '카의 사관'은 '친일적폐사관 vs 종북좌파사관'이라는 극심한 대립만 끝없이 되풀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오직 역사만을 위한, 역사적 해석이 필요한진데, 단순히 '정치사학'을 넘어서 '친일편향적인 경제사학' 또한 능가해버리고 '민족자존의 긍지'도 살리면서도 누가 보더라도 '공정하고 합당한 역사서' 편찬을 위해 노력해줄 이가 필요한 때이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정치성 편향'이란 잣대를 들이대는 반푼이들은 없길 바란다. 이런 반푼이들의 어줍잖은 공격을 가뿐히 넘어설 이 시대의 양심적 시민들이 넘쳐야할 까닭이기도 하고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