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 시즌1 : 1 (리커버 에디션) 미생 (리커버 에디션) 1
윤태호 글.그림 / 더오리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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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직장에 들어간 지도 벌써 1달이 지났다. 첫 월급도 받았는데 한 달을 다 채우지 못한 탓에 '최저시급'으로 계산을 해서 100만 원 조금 넘게 받았다. 턱 없이 모자란 금액이지만 부모님 용돈을 챙겨주고, 직장을 소개해준 여동생 내외에게도 감사인사를 챙겨주고 나니 남는 돈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이제 월급쟁이가 되었다는 안도감에 다음달을 기약할 수 있게 되었다.

 

  첫 출근을 하면서 다짐한 것은 '버티자'였다. 반백 살이 되어가는 나이에 '육체노동'이 전부인 일을 다시 하려니 몸이 말을 듣지 않을까 가장 걱정했는데, 막상 일을 시작하니 그 걱정보다 더 큰 걱정이 생겨버렸다. 바로 '방금 배운 것을 돌아서면 까먹는 것'이었다. 분명 들었는데도 해야 할 일을 까먹고 순서를 헷갈리고 바로바로 알아 듣지 못해 헤매기 일쑤였다. 젊은 시절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깜박깜박에 온몸에 땀을 뻘뻘 흘리며 실수연발을 거듭했다. 10살이나 어린 선임에게 지적질을 당하는 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런 상황이 2주 정도 진행이 되자, 드디어 한계가 찾아왔다. 어쩌란 말인가...자꾸 까먹는 걸 말이다. 자존심이 상하다 못해 마음속으로 '자를 테면 잘라라. 이젠 존심 상해서 더는 못 배우겠다. 나가라면 나갈란다'라는 말을 수도 없이 했다. 병원 일이라는 것이 '서비스'와 '봉사'이기도 하지만, 그런 사명감보다는 '환자의 안전과 생명을 다루는 일'이다보니 실수가 용납이 되지 않는 엄격한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메뉴얼'이 중요하고, '순서'가 중요한 우선순위가 된 것이다. 그런데도 나이가 드니 그 중요한 것들이 단박에 익혀지지 않아 고생길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도 어쩌란 말인가. 안 되는 것을 말이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을 고작 '한 번' 듣고 빠릿빠릿하게 일하는 것이 이렇게 힘들다는 것은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낯설음'이기도 했다. 그렇게 마음이 상하고 퉁퉁 부은 다리를 절뚝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면 씻고 늦은 저녁을 먹기 무섭게 이불 위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5시, 알람소리에 놀래서 깨곤 했다.

 

  하지만 사람의 몸이라는 것이 이토록 쉽게 '적응'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하루 8시간을 앉지도 못하고 꼬박 걷고 또 걷는 일과를 매일 겪다보니 이제는 제법 근육이 자리를 잡아간다는 느낌이 든다. 백과사전보다 두꺼웠던 뱃살도 얇아지고 냄비 손잡이처럼 그립감이 좋았던 옆구리살도 쏙 들어갔다. 2주 동안 밤마다 고통을 안겨 주었던 쥐가 나던 다리도 이제는 가벼운 스트레칭에 싹 가라앉고는 한다. 그리고 피곤해서 읽지도 못했던 책을 다시 읽게 되어서 너무 기뻤다. 그래서 다시 읽게 된 것이 바로 <미생>이었다.

 

  나는 <미생>을 원작인 웹툰보다 '드라마'로 먼저 보았고, 드라마를 다운로드한 뒤에 열 번도 넘게 '다시 보기'를 거듭했다. 그렇게 드라마에 푹 빠져든 뒤에야 '단행본'으로 출간한 만화책을 사서 읽게 되었다. 결국 웹툰을 가장 마지막에 본 것이다. 바둑도 두지 못하는 천박한 하수가 '바둑만화'를 구매해서 읽게 된 까닭은 <미생>이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사회초년생'을 위한 교과서와 같은 인생이야기 말이다. 그래서 난 <미생>을 다시 읽게 되었다. 월급쟁이에서 자영업자가 된 지 17년 만에 다시 월급쟁이로 되돌아왔기 때문에 말이다.

 

  <미생>의 1권은 주인공인 장그래가 바둑연구생에서 무역상사 인턴으로 입사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어찌 보면 '사회초년생'인 나이에 '인생의 패배를 맛 본, 패잔병'이 삶의 길(활로)을 찾기 위해 '회사의 말단'으로 입사해서 생고생을 하는 이야기로 보여진다. 마치 지금의 나처럼 말이다. 비록 '코로나'라는 전세계적인 위기로 인해 나 혼자만의 실패는 아닐지 몰라도..어쨌든 '지금의 내 모습'은 자영업의 세계에서 패배한 실업자와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살아가기 위해 새 직장으로 몸을 옮긴 상황이 '장그래'와 몹시 닮기도 했다. 만화 속의 장그래는 '실패자'라는 딱지를 떼고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상황이지만, 나는 첫 발이 아니라 '인생 3막'이라는 것이 다를 뿐, 장그래와 마찬가지인 셈이다. 장그래처럼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고 일을 배워본 적도 없기에 실수투성이 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냉혹한 사회생활에서 주변의 도움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어디든 '초보자'보다는 '경험자'를 대우해주기 마련인 탓이다. 아무리 빠릿하게 일을 잘 배우는 능력자와 같은 신입이라고 해도 '가르쳐서 써먹기'보다는 '스스로 알아서 제 몫을 톡톡히 해내는' 능력자를 대접해주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회초년생'에게는 넘사벽일 따름이다. 학교에서도 가르쳐주지 않은 것을 어떻게 '알아서' 척척 해낸단 말인가. 불가능할 따름이다.

 

  그래서 신입들은 나름의 방법으로 선임들의 마음에 쏙 들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하기 마련이다. 장그래는 '쌔빠진 노력'으로, 안영이는 '통찰력을 갖춘 노련함'으로, 장백기는 '절대로 손해보지 않는 약삭빠름'으로, 한석율은 '능구렁이 같은 열혈능숙함'으로 인턴사원에서 정식사원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한다. 물론 정식사원이 된 뒤에도 '살아남기'는 계속 될 것이다.

 

  이 책의 매력은 '사회초년생'에게 인생을 가르치면서 '바둑'이라는 또 하나의 예술을 인생으로 풀어냈다는 점이다. '제1회 응씨배 바둑대회'에서 조훈현 9단이 녜웨이핑 9단에게 '역전승'을 거둔 역사적인 대국을 통해서 말이다. 바둑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두고두고 회자가 되는 일이기도 하지만, 바둑을 몰라도 '해설'만 읽어도 사활을 건 일생일대의 한 판 승부를 '인생이야기'로 녹아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이 책의 매력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바둑용어'를 일상생활에서 쓰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미생' 또한 '완생(바둑에서 두 집 이상을 내어서 완전히 삶)'이 되지 못한 바둑판 위의 돌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회초년생'은 물론 아직 이렇다 할 성공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많은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고작 '두 집'만 내면 살아남기는 하지만 겨우 그것만으로 '승리'를 거두기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반 집 차이' 승부에서는 상대보다 '완생'을 하나 더 해내는 것이 승부를 결정짓는 일이기에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싸움이 벌어지게 된다. 우리네 인생도 그러하지 않느냔 말이다. 방 두 칸짜리 집 한 채를 얻기 위해 월세, 전세를 거쳐서 '자기 집'을 갖는 것이 소박한 꿈(?)인 인생이 얼마나 많느냔 말이다.

 

  물론 나 역시 여전히 '미생'인 삶을 살고 있다. 보란 듯한 성공을 바라지는 않지만 먹고 사는 걱정을 하지 않을 정도의 직장을 얻어 안정된 삶을 유지하는 것이 '나만의 성공'이었는데, 그마저도 아직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더구나 '교육'을 마치며 선임이 나에게 한 첫 말이 바로 "초심을 잃지 마라"였다. 보란 듯이 성공한 삶은 아니지만 저보다 10살이나 많은 '인생선배'에게 초심을 잃지 말라고 충고를 하다니...사회에 첫 발을 내딘 지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초심'을 생각해야 할 나이였던가...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퇴근길에 다시금 곱씹은 말이였다. 과연 나는 '초심'으로 새 직장에서 잘 버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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