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꿈 기계의 꿈 북클럽 자본 시리즈 8
고병권 지음 / 천년의상상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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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론>이 어렵다는 이유는 직접 읽어보니 정말 잘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참 재밌는 책이라는 사실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어려운 책을 섭렵해나가다 보면 종종 느끼는 일이긴 하지만, <자본론>만큼 안목을 확 넓혀주는 책은 이제껏 읽지 못했다. '경제'란 학문에 아둔했던 내가 경제뉴스와 경제이슈에 관심으리 쏟고 어줍잖게나마 이해하며 보고 들을 수 있게 된 것도 바로 <자본론>을 사알짝 들여다본 덕분이었다. 아무튼 '고병권의 <자본론>'을 다 읽고 난 뒤에도 여타의 마르크스 관련 책들을 섭렵해나갈 것을 다짐한다. 마르크스만큼 오해와 편견을 갖고 있는 이들이 참 많다는 것도 새삼 느꼈다. 이곳 예스에서는 아무런 댓글도 달리지 않지만 '페이스북'에서는 꽤나 다양한 반응들이 나와서 참 즐겁다.

 

  어쨌든 벌써 8권이다. 12권이 전부라고 저자가 밝혔고, 현재 10권까지 출간이 되었으니 완독도 멀지 않았다. 이번 8권에서는 '기계제 생산'이 자본가에게 얼마만큼의 이윤을 남겨 주었는가? 하는 질문으로부터 기계에게 내몰려 거리로 떠밀린 노동자의 설움까지 살펴 볼 수 있었다. 익히 알고 있는 '러다이트(기계파괴) 운동'도 바로 이 시점에서 일어난 사건이라 읽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고민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이 바로 '인공지능'에 의한 노동자들의 대량실직을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산업혁명 초기에 '대량실직'된 노동자들이 새로운 직종에서 더 많은 구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4차 산업혁명도 초기에는 큰 혼란을 겪게 되겠지만 더 다양한 직종이 생겨서 훨씬 더 많은 구직을 할 수 있게 될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2차 산업혁명'에서 기계가 대거 도입되면서 '제조업 분야'에서 벌어진 노동자의 대량실직 사태가 수습되고 새로운 직종인 '서비스업'으로 대체되기까지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그동안에 수많은 노동자들이 새로운 직종이 나오기도 전에 굶어죽었다는 사실 말이다. 한편, 제조업 분야를 '기계'가 차지하니 '사람'은 서비스업 분야에 종사하게 된 것과 현재의 서비스업을 '인공지능'이 차지하고 나면 '사람'은 어느 분야에서 '노동'을 하고 돈을 벌 수 있겠느냔 말이다. 4차 산업혁명의 가장 큰 특징이 '노동의 종말'인데, 노동을 할 수 없는 노동자의 소득은 누가 보장할 것이며,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상품'을 소비할 사람이 없어진 마당에 자본주의가 유지될 수 있을 것이냔 말이다.

 

  그 때문에 '기본 소득'을 지급하는 것과 같은 대안이 이야기되고 있지만, 이조차 어느 한 나라가 시행을 한다고 해서 잘 될 턱이 없고, 초기에 도입한 나라일수록 경제에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전세계가 동시다발적으로 시행해야만 서로간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방안인 까닭에 혀내 여러 나라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관망하고 있는 시점이다. 허나 절대 오해해선 안 될 것이 '기본 소득 지급'과 같은 일이 과거 '공산주의 국가체제'로 회귀하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늘날 공산주의가 망한 가장 큰 이유는 '독재'가 성행하고, '감시'가 횡행하는 등 정치적인 실패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물론 공산주의 경제이론도 무능하긴 마찬가지였다. 계획적으로 통제되어 '개인의 의욕'을 말살해버린 경제체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되자 그대로 주저 앉았으며, 냉전시대의 폐쇄성이 공산주의의 파멸을 더욱 앞당겼기 때문이다. 그러한 공산주의의 망령을 우리가 다실 불러올 까닭은 절대로 없다. 그 때문에 '기본 소득 지급'은 근로의욕을 떨어뜨리고 모든 이들의 경제적 평등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전체 소득의 일부'를 보충해주어 '소비'를 촉진시키는 정책이라는 점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그 때문에 전세계적으로도 기본소득의 금액은 20~30만 원에서 많게는 100만 원으로 논의되고 있는 것이다. 전국민이 그 정도 금액을 일률적으로 꾸준히 소비해준다면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도움이 될 거라는 계산을 하고 있는 셈이다.

 

  마르크스와 <자본론>에 대한 오해는 다음에도 이야기할 기회가 많은테니, 이쯤에서 끝내고, 이 책의 내용을 이야기하련다. 마르크스는 자본가의 '기계 도입'에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자본론>에서도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기계제 생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리고 '기계제 생산'속에서 노동자들의 희망도 엿보았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기계는 등장과 함께 노동자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말았다. 물론 '기계'가 노동자를 죽인 것은 아니다. 한낱 도구(수단)에 불과한 기계가 노동자를 학살한다는 상상은 쉽게 할 수 없다. 하지만 그 '기계'속에 자본가의 속성이 담기게 되자 '자본가로 변신한 기계'는 노동자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고 말았다. 그 '자본가의 속성'이란 다름 아닌 '이윤 추구'다.

 

  마르크스는 일찍이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으로 자본을 구분하며, 막대한 이윤은 '불변자본(도구)'가 아닌 '가변자본(노동자)'에서 얻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엄청난 생산량을 뿜어내는 기계가 등장하자 '불변자본'인 기계에 막대한 투자를 하는 것이 더 많은 이윤을 얻을 수 있는 비결이라는 점을 자본가들이 알아챈 것이 '원인'이었다. 물론 자본가도 '초기 비용'이 엄청나게 드는 기계를 함부로 들여오기 힘든 점이 없지 않았다. 그래서 초기에는 '기계'를 도입하기보다는 노동자의 수를 늘리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기계'는 느리지만 아주 확실하게 '노동자의 몫'을 대신하며 노동자를 공장에서 쫓아내기 시작했다. 더 정확하게는 '숙련공'들이 설자리를 빼앗아버린 셈이다.

 

  스미스의 '분업'은 대량생산의 길을 열었다. 비록 '노동의 가치'를 하락시키기는 했지만, 노동의 속도는 엄청나게 빨라졌고, 늘어난 생산량만큼 숙달된 '반복작업'으로 노동의 가치가 변신을 하면서 수많은 '숙련공'들이 배출된 것이다. 하나의 상품이 완성되기까지 노동자의 영혼이라도 담을 것 같았던 '수공업'에서 영혼을 빼앗겨버리고 단순반복 작업만 남아 '노동의 가치'를 찾아볼 수 없게 만든 기괴한 괴물 노동자(외형이 변해버린, 이를 테면 '망치질'만 전문적으로 하다보면 '망치질의 달인'이 되는 것처럼 특정 공정에만 특화된 노동자)를 만들어버렸지만, 우리는 그들을 '숙련공'이라고 부르며 대단한 능력자로 대접해주었다. 허나 '기계'의 등장으로 숙련공은 설자리가 없어지게 되었다. 복잡하고 어렵고 힘든 작업은 모두 '기계의 몫'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남은 일자리는 그런 기계를 조작할 여성이나 아동 노동자 한 명이면 족했기 때문이다. 그도 아니면 더욱더 단순한 반복작업만 수행하는 노동자만 필요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들을 '미숙련공'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숙련공이 미숙련공보다 못한 대접을 받게 되자 '러다이트 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다가 대유행이 되고 말았다. 허나 부서진 기계를 대신해서 숙련공들이 공장으로 되돌아간 것이 아니라 더욱 강화된 '최신 기계'가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며 망가진 기계를 대신하곤 하였다. 이렇게 일자리를 일어버린 노동자들은 더욱더 비참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허나 자본가는 더욱더 많은 '이윤'을 챙길 뿐이었다. 이미 밝혔지만 자본가들은 결코 '자선사업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노동자들의 복지와 같은 일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마치 '양계장 주인'이 암탉들의 건강을 위해서 달걀생산량을 줄여주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더 많은 달걀을 얻기 위해 밤에도 LED 조명을 비추며 암탉들에게 달걀을 생산하라고 독려하게 될 것이 뻔하다. 그렇게 혹사를 당하다 '평균수명'도 채우지 못한 암탉이 죽으면 '배터리(구멍이 숭숭 뚫린 3층짜리 양계 닭장)' 문을 열고 죽은 암탉을 대신할 새 암탉을 넣어주는 것이 전부다. 평생 달걀만 생산하다 숨을 거둔 영웅적인 암탉의 희생에 대한 묵념 따윈 기대도 하지 말아야 한다. 오직 '이윤 추구'만 가득한 현장이다. 기계제 생산을 고집하는 자본가들의 속성이 이렇다.

 

  그럼에도 마르크스는 '기계'가 노동자들의 고된 노동을 해방시켜줄 혁명이 될 거라고 기대했다. 밤낮없이 노동에 시달리던 노동자를 대신해서 일을 해줄 기계가 '노동 해방'의 희망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렇게 노동에서 해방된 노동자들은 안락한 삶을 살며 얻게 된 '여유'로 수준 높은 삶을 위해 교육도 받고 즐거운 삶을 위해 여가생활도 즐기며 온가족이 오붓한 시간을 가지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기계'의 잘못일까? 아니다. 아무런 의식도 없는 '기계'가 무슨 잘못이란 말이냐. 기계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자본가'들이 못된 탓이다. 이들의 '이윤 추구' 욕구가 기계에 투영되는 순간 기계는 노동자를 학살시키듯 대량해고와 척박한 노동환경을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행동'으로 무엇을 해야만 할까? 결국 마르크스는 "모든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는 <공산주의 선언>을 하고 말았지만, 글쎄..그보다는 더 효과적인 방법도 있었겠지만,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가재는 게편'인 정책담당자들의 자본가 편들기가 극에 달하면서 다른 방도를 모색하지 못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심지어 정치경제학자라는 사람들도 허무맹랑한 주장을 반복하면서 노동자가 설자리를 마련해주지 못했으니...딴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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