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역사의 명장면을 담다
배한철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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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보, 역사의 명장면을 담다

 : 배한철

 : 매일 경제 신문사

 : 2021/06/07 - 2021/06/19


직업이 기자라는데 이정도로 조예가 깊고 다양한 국보이야기를 쓸 수 있다는 데 놀랐다.

부럽다. 

우리나라 수많은 유물중에서 나름 최고의 작품이라 할 수 있는 국보...

국보를 통해 역사를 바라본다니, 나름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경주의 황남대총에서 나온 금관을 통해 황남대총의 주인공을 유추하는 방법을 보니 유물과 역사가 어떻게 대화하는 지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인 연구가들에 의해 제멋대로 파헤쳐지고 왜곡되어온 우리 역사와 유물들.. 아직 제자리를 찾기엔 멀었지만 훌륭한 연구가들이 계속 나오고 있으니 올바르게 유물과 역사가 해석되기를 기대해본다. 

누군가는 우리나라 전 국토가 순례할만한 유적지라고 하고, 어떤이는 국보를 찾아 순례하는데, 난 이나이 먹도록 아직도 초보수준이니... 

나도 좀 열심히 살자.. 올해의 책 후보다. 



2% 필자에게 문화재를 찾아가 관람하는 것은 일종의 문화적 행위이다

5% 여러 달이 걸려야 하는 세심한 작업을 10시간여 만에 후딱 해치우고 말았던 것이다

5%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108종 3,000여 점에 달한다. 이 중 가장 중요한 유물은 왕과 왕비 신분을 알려주는 지석 두 점이다

9% 이후 1,3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1993년 12월, 부여시 능산리 고분군에서 주차장을 건설하던 중 놀라운 유물이 우연히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바로 대한민국 최고의 걸작 국보 중 하나인 백제 금동대향로다

14% 신라가 나뭇가지와 사슴뿔 형상으로 금관을 장식했다면, 가야에서는 풀잎이나 꽃잎 모양으로 금관을 꾸몄다

18% 고려는 한국사의 황금기이자 문화의 절정기였다. 삼국시대 불교가 탑과 불상 등 건출, 조형물 중심으로 발전했다면 고려의 불교는 참선과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선종의 유행으로 회화가 발달했다

21% 고려청자 특유의 비색은 11세기를 거쳐 12세기 전반에 정점을 맞는다. 광택이 매우 우아하며 가마에서 구을 때 생기는 자기 표면의 미세 균열도 거의 없는 고품질 순청자가 쏟아졌다

31% 인쇄물이 아닌 목판이 온전한 채로 남은 것은 전 세계적으로 해인사 대장경판이 유일하다. 1251년(고려 고종 380 완성된 이후 800년이라는 오랜 세월 속에서도 손상 없이 보존된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38% 국보 제24호 경주 석굴암 석굴은 우리 문화사에서 독보적 금자탑인 동시에 동양 전체의 건축, 조각 예술을 대표하는 불멸의 업적으로 아낌없는 찬사를 받고 있다

43% 알타이, 시베리아 등에서 나무와 사슴은 성스러운 상징이다. 나무는 하늘로 통하는 길이며 사슴은 하늘로 인도하는 전령사였다

43% 왕은 금관을 부장하는 전통이 채 자리 잡기 전에 사망해 무덤에 금동관을 묻었지만, 왕이 세상을 뜬 뒤 본격적인 금관의 시대가 열리면서 그의 왕비는 금관을 가질 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황남대총 남분에 묻힌 왕은 바로 첫 번째 마립간, 즉 내물왕이 되는 셈이다

44% 통일신라는 한발 더 나아가 국토 중앙의 수도라는 뜻의 중원경으로 그 명칭을 바꾼다

47% 첨성대 위에 정자 등의 건물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문헌은 설씨 세헌편 외에도 다수 발견된다

48% 한 번도 발굴 조사된 바 없는 첨성대 지하와 그 주변을 파보면 첨성대를 둘러싼 수많은 의문점도 풀릴까

49% 봉영기는 가람을 세운 사람이 다름 아닌 사택왕후이고 그 해가 639년(무왕 40)이라고 전한다. 639년은 무왕 사망 2년 전이다. 사택씨는 성왕의 사비(부여) 천도를 도운 백제 말기 최고 귀족 가문이다

51% 일제강점기에 수리하면서 타설한 185톤의 시멘트를 제거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탑은 이제 안전해졌겠지만 탑이 갖고 있던 고색의 정취가 사라져 버린 것은 아쉽다

52% 고유섭은 석탑과 불교 조각 등 불교 미술을 연구해 시대별 양식의 변화와 특징을 처음으로 정리했다. 한국 회화사를 학술적으로 집대성했으며, 고려청자를 중심으로 한 도자기 이론도 체계화했다

54% 형상과 층수를 두고 여전히 논란이 분분한 경주 불국사 다보탑과 경주 정혜사지 13층 석탑(국보 제 40호), 화엄사 4사자 3층 석탑 등이 여기에 속한다

56% 의상의 사당인 조사당은 1377년 재건됐고,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는 무량수전의 해체수리 공사가 진행됐다. 따라서 현재 무량수전은 고려 말 우왕 때의 건물이다

58% 불국사는 전 국민의 수학여행지이자, 경주를 넘어 우리나라 제일의 명소이다. 토함산 서쪽 기슭에 위치한 불국사는 "불국정토를 속세에 건설하겠다"는 통일신라인들의 야심찬 꿈이 드러난 절이다. 국내 사찰 중 치밀한 구성과 미적 완성도가 가장 뛰어난 절이기도 하다

60% 83호는 남산 어귀의 사찰 또는 무덤에서 수습한 것이 확실해 보인다

72% 종합적으로 현재 정족산본 1,181책(완질본), 태백산본 848책, 오대산본 74책, 기타 산엽본(흩어져 있는 것을 묶은 것) 21책 등 총 2,124책이 남아있다

82% 그는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한 것이니, 어찌 늙은 할멈이 규방에서 나와 국가의 정사를 처리할 수 있겠는가. 신라는 여인을 세워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진실로 어지러운 세상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고 논평했다

83% 돌 다루는 기술이 앞섰던 백제는 전탑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목탑에서 바로 석탑으로 옮겨갔다. 목탑 형식으로 쌓은 돌탑인 익사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 11호)이 그 증거로 언급된다

91% 풍속도 화첩은 단오풍정, 월하정인, 주유청강, 청금상련, 상춘야홍 등 신윤복의 명작이 총집결된 화첩이다

93% 안견이 북종화(기술적 연습과 수련을 중시)를 수용해 높은 경지의 이상적 산수화를 구현했다면, 정선은 남종화(작가의 교양과 정신을 강조)를 받아들여 독보적인 진경산수화를 창조했다

95% 정선은 18세기 후반 이후에 행세하는 거의 모든 집안에서 그의 그림을 소장할 만큼 화가로서 위상이 높아졌다. 그의 그림은 한양의 좋은 집 한 채 값이었다고 한다. 조선 화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성공한 화가였던 것이다

96% 에밀레종 전설은 근대 이후 서양 선교사들의 기록에서야 등장하며 일제강점기 자료에서 본격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한다. 조선 후기 유림의 세력이 강했던 경주에서 불교를 폄훼하고자 의도적으로 가공됐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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