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 신화에서 역사로
정재윤 지음 / 푸른역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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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령왕, 신화에서 역사로

 :정재윤

 : 푸른역사

 : 2022/08/02 - 2022/08/13


몇 번 빌렸으나 시간이 안맞아 읽지 못했던 책을 이번 여름에 읽었다.

역시 여름은 독서의 계절이다. 

백제역사는 밝혀지지 않은게 너무 많다. 우리나라 백제 문화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무령왕릉을 발굴했지만 정작 무령왕에 대해서 우리는 잘 모른다.

특히 개로왕 이후 무령왕때까지 백제는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를 거쳤다. 

무령왕은 전임 동성왕이 시해를 당한 상태에서 왕이 되었고, 혼란스러웠던 백제를 매우 잘 안정시켰다.

과연 영동대장군이라는 칭호를 받을만하다. 

이 책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무령왕의 출생부터 죽음까지를 역사서와 유물, 그리고 상상력을 동원하여 채워나간다. 

사마(무령왕)가 일본에서 건너와 왕이 됐다는 의미를 깊이 생각해보지는 못했었다. 

많은 백제인이 일본으로 건너가 무리를 이루고 있었고 왕족까지 가서 그들을 관리했다는 주장은 충분히 검토해보고 연구해볼만한 내용으로 보인다. 

아직은 유물이나 자료가 부족하지만 계속해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면 백제에 대해서 더 많은 걸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백제문화인데 정작 우리는 너무나 모르고 있다는게 부끄럽다.

우리 아이의 역사책에는 더 풍부한 백제사가 담기기를 소망해본다. 

재미있었다. 


p36 새 국립공주박물관은 걸어서 무령왕릉에 이를 수 있을 정도로 인접한 곳에 있어서 무령왕릉을 위한 전시관이자, 수장고로서의 역할을 하는 듯하다.

p57 묘지석을 통해 무령왕이 525년, 그 뒤를 이어 왕비가 529년에 왕릉에 안장되었음이 밝혀졌다. 즉 두 번에 걸쳐 유물이 부장된 것이다. 부장품의 절대 연대 확인은 유물 편년의 기준을 제시해주었다. 상대적인 편년차가 심한 고고학계에 기준점이 제시됨으로써 고고학 연구가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p74 백제 왕력 기사도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시기를 파악하는 기준점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시대가 불분명한 여러 기사를 기술하면서 백제 왕력을 중심으로 배치하였기 때문이다.

p88 백제인들이 집중적으로 정착한 곳은 규슈일대와 가와치 지역이었다. 규슈 일대는 무령왕이 탄생하고 성장한 곳이며, 가와치 지역은 동성왕의 탄생과 성장지였다.

p135 사마는 백제와의 해상 교류를 매개한 유력 세력가인 외가에서자란 것으로 보인다. 확언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사마는 규슈 일대에서 자랐고, 그가 백제계 도왜인들의 세력을 바탕으로 성장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p146 장수왕의 전술이 돋보인다. 기다렸다는 듯이 군사를 넷으로 나누어 협공하면서, 마침 불어온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질러 성안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이에 민심이 흉흉해지고, 탈출하려는 자도 속출하는 등 초반에 기선을 제압한 것이다.

p170 웅진 천도 직후 정국은 한성 시기처럼 해씨오 ㅏ진씨의 대결 양상으로 치닫고, 왕은 무력한 존재로 전락했다.

p197 실제 동성왕이 정치를 하면서 사람을 믿지 못하고, 중용된 인물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지방으로 내친 것이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동성왕이 무도하고 포악했다는 평도 그의 정치 운영 방식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다

p210 이처럼 동성왕 집권 후반기에 추진된, 사비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에 대해 한성에 기반을 가졌던 진씨와 해씨 등 남래귀족들은 반발했을 것이며, 또한 웅진 부근 지역에 세력 기반을 가진 백가 등도 불만을 가졌을 것이다.

p229 정변의 원인으로 백제신찬은 동성왕의 무도와 백성들에 대한 포학을 들고 있다. 이에 반해 삼국사기에서는 백가의 개인적인 불만으로 서술하고 있어 그 내용이 다르게 나타난다

p236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면, 백가는 정변에 참여했고 실질적으로 동성왕을 시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정변을 주도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오히려 정변 주도 세력에 의해 밀려났으며, 억울하게도 동성왕 시해의 주범으로 몰린 것이다.

p249 주서에 보이는 관리의 복색에 관한 규정이 고이왕 때 기사로 나오지만, 학계에서는 후대에 완비된 규정이 고이왕 때로 소급, 정리된 것으로 보고 있다.

p254 무령왕 대 22담로의 설치와 파견을 생각하면 번쩍 눈이 뜨일 것이다. 22담로에 자제와 종족을 파견한 것은 전국적인 지방 통치의 실현이며, 그 결과 토착 세력의 경제적 지배력이 약화하는 현상이 생겼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p291 양직공에 보이는 주변의 소국은 실제 상황이 아닌 백제가 양나라에 과시하기 위해 열거한 나라임을 알 수 있다

p293 양직공도에 보이는 방소국은 대국이 된 백제가 거느린 부용국으로 설명되었다. 한반도에서 고구려에 필적할 만한 대국이 되었으며,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달라는 백제의 요청에 양나라는 빠륵 화답했다. 양나라 황제가 동쪽을 편안하게 했다는 영동대장군이라는 작을 내려준 것이다.

p298 무령왕이 공들인 갱위강국 선언의 이면엔 주변 나라와의 관계가 뒤틀어진 양면성을 엿볼 수 있다. 이를 고뇌한 무령왕은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까지 한성으로 순무하여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고자 했다. 얼마나 무령왕이 노심초사하였는가를 보여주는 실례이다

p299 무령왕의 묘지석 첫 구절이 바로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는 점은 영동대장군이라는 작호에 대한 그의 애착을 보여주는 것이다

p305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는 말은 서로 대구가 된다. 검소를 강조하였으나 누추하지는 않아야 된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백제 문화가 소박함을 지향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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