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로 산다는 것 - 가문과 왕실의 권력 사이 정치적 갈등을 감당해야 했던 운명
신병주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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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비로 산다는 것

 : 신병주

 : 매일경제신문사

 : 2022/04/16 - 2022/04/25


조선의 왕비에 대한 내용인 줄은 알았는데 이렇게 조선왕조의 모든 왕비에 대해 서술이 될 줄은 몰랐다.

왕이 아니라 왕비의 삶을 여러 역사서를 통해서 알게 되니 신선했다. 

신분상승의 기회일 수도 있지만 실제 조선의 왕비들은 그리 평탄한 삶을 산 사람이 많지는 않아 보인다

세자빈으로 들어와 일찌 사망하는 경우도 있고, 쫓겨나는 경우, 대군의 부인이었는데 정변이 벌어져 왕비가 되기도 하고, 사약을 받은 사람도 있고, 심지어 죽은 이후 무덤이 수난을 겪기도 한다. 

남성 중심의 조선사회에서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하기 힘들었던 시대를 살아간 왕비들...

남들은 부러워했을 지 모르나 행복한 삶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아직도 극복하지 못한 성차별의 사회이긴 하지만 지금이 더 나아보인다.

책은 참 재미있게 읽었다. 좋은 책이다. 


2% 세조의 집권으로 단종이 왕위에서 물러나면서 폐비가 된 정순왕후는 현재의 창신동 인근에서 옷감에 물들이는 작업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폐위된 지 230여 년 만인 숙종 때에 복권되기는 했지만, 20대 이후의 전 생애를 폐비가 된 일반인으로 살아가야 했던 정순왕후의 삶은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이다

7% 정안왕후는 1373년경 19세의 나이로 2세 연하의 정종과 혼인하여 40년 가까이 해로했지만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했다. 정종이 9명의 후궁 사이에서 17남 8녀를 둔 상황을 고려할 때 왕비는 인고의 세월을 담담하게 지냈을 것으로 짐작된다

8% 원경왕후는 남편을 왕으로 만든 최고의 정치적 동지였으나 정작 남편이 왕이 된 후에는 자신은 물론이고 친정 가문까지 철저하게 탄압받는 운명에 놓인 것이다

13% 순빈은 이를 배운 지 며칠 만에 책을 뜰에 던져버렸고, 궁궐 안에서 술을 즐겨 마시며 자유분방하게 생활했다. “성품이 술을 즐겨 항상 방 속에 술을 준비해 두고는, 큰 그릇으로 연거푸 술을 마시어 몸시 취하기를 좋아하였다. 혹 어떤 대는 시중드는 여종으로 하여금 자신을 업고 뜰가운데로 다니게 하고, 혹 어떤 때는 술이 모자라면 사사로이 집에서 가져와서 마시기도 하였다”는 세종실록의 기록에서 술을 좋아하고 술주정이 매우 심했던 그녀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15% 현덕왕후는 세조와 큰 악연을 가져 사후에 무덤이 훼손되고 종묘에서 신주가 없어지는 등 큰 수난을 겪었다. 중종 시대에 종묘에 신주가 모셔지면서 무덤도 남편 곁으로 오게 되었다

16% 세조의 왕비에 대한 사후 보복도 이어졌다. 연려실기술에는 “하룻밤에 세조가 꿈을 꾸었는데 현덕왕후가 매우 분노하여, 네가 죄 없는 애 자식을 죽였으니 나도 네 자식을 죽이겠다. 너는 알아두어라 하였다. 세조가 놀라 일어나니, 갑자기 동궁(세조의 장자, 의경세자)이 죽었다는 기별이 들려왔다. 그 때문에 소릉을 파헤치는 변고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동안 왕비의 자리에서 폐위되었던 현덕왕후는 중종 시대에 들어와 마침내 왕비의 지위를 되찾게 된다

18% 정순왕후는 18세 때인 1457년 단종과 사별한 후 숱한 시련 속에서도 삶의 끈을 놓지 않고 64년을 더 살았다. 그리고 중종 때인 1521년 8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세종 때 출생한 그녀는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 등 무려 8명의 왕과 함께 한 세상을 보낸 셈이다. 그녀의 무덤은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 집안 중종의 산이 있는 현재의 남양주시 진건읍에 대군부인의 묘로 조성되었다.

22% 성종실록에는 공혜왕후가 후궁에 대한 투기 없이 그녀들에게 최대한 은혜를 베풀어준 정황이 이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공혜왕후 승하 후에 바로 성종의 계비가 된 폐비 윤씨가 후궁에 대한 투기가 대단했던 상황과 묘하게 대비되는 장면이다

25% 김시습의 초상화에서도 이러한 모습은 그대로 나타난다. 일반 유학자들은 흔히 쓰지 않는 모자하며, 목에 염주를 찬 모습은 단번에 그가 기인의 풍모를 지녔음을 보여준다

28%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문자를 잘 알고 있던 신여성 인수대비에게, 왕인 남편의 행동을 투기하고 손찌검까지 하는 며느리는 결코 용납될 수 없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극심한 갈등은 결국 조선 왕조 최초의 왕비의 폐출과 사사라는 선례를 남기게 되었다

30% 매양 왕이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음란, 방종함이 한없음을 볼 적마다 밤낮으로 근심하였으며 때론 울며 간하되 말뜻이 지극히 간곡하고 절실하였는데, 왕이 비록 들어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성내지는 않았다

32% 중종은 경복궁에서도 늘 옛 왕비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단경왕후는 중종이 알아볼 수 있도록 집 근처 인왕산 자락에 붉은 치마를 걸쳐놓았고, 이것이 지금까지 전해오는 인왕산 치마바위 이야기다. 그만큼 두 사람의 애정이 폐위 이후에도 계속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36% 문정왕후와 윤원형을 중심으로 하는 외척들은 자신의 세력을 견제하는 사림파에 대해 철저히 부정하였다. 그들은 1545년 명종의 즉위를 계기로 사림파를 대거 숙청시키는 을사사화를 일으킴으로써 4대 사화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게 된다

41% 16세기의 학자 조식은 당대에 이황과 더불어 영남학파의 양대산맥으로 지칭된 인물로서, 특히 성리학의 실천을 중시한 학자였다. 수양의 상징으로 항상 깨어 있다는 듯을 가진 성성자라는 방울을 옷에 달고 실천을 위한 행위로 자신의 사상을 글자로 새겨넣은 칼을 차고 다닌 것은 이러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51% 인조가 왕이 된 후에도 적극적인 내조를 하고, 광해군 세력에 대해서도 관용을 베푸는 등 궁궐 내 야당의 역할을 했던 인열왕후는 1635년 12월 9일 산실청으로 쓰이던 창경궁 여휘당에서 승하앴다

53% 경희궁 창건은 처음부터 관료들의 동의를 얻어 공역 계획 과정을 거치면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술사, 지관, 괴승 등의 도참적 요언을 빌려 광해군이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로 시도된 것이었다. 광해군 즉위 초부터 일방적으로 권력을 전횡하려는 신권에 대한 견제와 왕위의 정통성 확보의 일환으로 추진된 것으로서 정치적 계산이 다분히 깔려 있었다고 볼 수 있다

59% 왕비가 된 후에도 인선왕후는 처신에 신중을 기했다. 항상 “부인이 스스로 잘난 체하면 가정이나 나라에 해를 끼치지 않는 경우가 드물었으니 암탁히 새벽에 울어서는 아니된다는 경계를 신중히 지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고 할 정도로 조용한 내조를 실천했다

60% 세자빈으로 간택된 후, 남편이 왕이 되고 왕비가 되고, 아들이 왕이 되어 왕대비의 지위에 오른 왕비, 즉 조선에서 세자빈, 왕비, 대비의 세 과정을 모두 거친 경우는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놀랍게도 현종의 왕비 명성왕후 김씨 1명뿐이다. 이는 조선의 왕위 게승에 그만큼 변수가 많았다는 것을 방증한다

67% 서인 측의 핵심 인물이었던 김만중은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정권을 잡자 정계에서 물러나 유배생활을 하면서 이 소설을 썼다. 일부다처제의 사회에서 벌어지는 처첩간의 갈등을 그린 가정소설의 형식을 취했지만, 소설 속에는 서인과 남인의 권력 쟁탈이라는 정치적 변수가 숨겨져 있었다

72% 한중록에도 “원래 영조와 정성왕후 사이가 그리 좋지 못하여, 병환이 위중하신 후에야 오신것이라”고 하여 두 사람의 불편한 관계를 증언하고 있다. 정성왕후의 회갑에 신하들이 하례하려 하자, 이를 허락하지 않는 영조의 모습도 영조실록 1752년 11월 23일의 기록에 실려있다

73% 정순왕후의 친족들은 영조 시대의 노론 벽파의 핵심 인물로 활약하면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하는 시파와는 정치적으로 크게 대립했다. 이러한 정순왕후의 정치노선은 시파의 입장에 서 있었던 정조와는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요인이 되었다

81% 이상적은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마다 책을 좋아하는 스승을 위해 책을 보냈다. 이에 감동한 김정희는 의리를 지키는 제자를 위해 그림을 그려 화답했다. 이것이 불후의 명작 세한도로 1844년 김정희가 59세 때 그린 역작이다.

91% 명성황후가 장호원에 피난을 가 있던 힘든 시기에 그녀의 한양 입성을 거의 정확히 맞힌 무당 진령군은 이를 계기로 왕비의 최측근이 되었다. 진령군은 명성황후가 과도하게 굿에 의존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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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로소피 랩 - 내 삶을 바꾸는 오늘의 철학 연구소
조니 톰슨 지음, 최다인 옮김 / 윌북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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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로소피 랩

 : 조니 톰슨

 : 윌북

 : 2022/04/16 - 2022/04/23


철학의 주제별로 1-2페이지 정도 되는 내용이 요약집 모음본이라고나 할까.

요약 정리의 형식이라서 그런지 일본책을 읽는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요약정리 하면 일본책을 따라갈만한 책이 없으니까...

그러다보니 책을 읽었지만 머리에 뭐가 남는 느낌은 별로 없다.

책장에 두고 생각날때마다 항목을 찾아서 읽어보는 용도로 사용하면 좋을 것 같다.

내 취향은 아니다. 


7% 철학은 공감이 가야 하고, 실용적이어야 하고, 읽기 쉽고 다가가기 쉬워야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재미있어야 하죠

9% 기게스의 반지는 권력이란 반드시 타락한다는 점이 아니라 권력이 인간의 진정한 본질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17% 공진화는 생태계가 서로 발맞춰 진화한다는 이론입니다

19% 사르트르는 자신의 제자들, 그리고 모든 실존주의자에게 자신의 선택이 지닌 힘을 인식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21% 필멸저인 인간의 마음은 불멸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결국 찾아올 자신의 고독한 죽음에 눈을 질끈 감고(이 고독이 진심으로 두려우니까요) 영원히 살 것처럼 구는 것은 진정한 존재를 부정하는 태도입니다

23% 실제로 영원회귀라는 니체의 사고 실험을 보면 그는 인생을 긍정하는 사람이자 실존주의의 기둥이며 심지어 매우 현대적인 심리치료사로 보이기도 합니다

26% 시몬 드 보부아르가 1949년에 내놓은 대표작 제2의성은 실존주의와 현대 페미니즘의 선구적 역할을 한 저서입니다. 이 책에서 보부아르는 인간이 미리 정해진 틀(또는 본질)에 맞춰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했지요. 우리가 자기 정체성(자신이 보는 나)과 사회적 정체성(남들에게 보이고 싶은 나) 양쪽을 창조한다는 말입니다.

28% 탄력을 받은 칸트는 무리수를 두기 시작해서 자기 이론을 성별(여자는 아름답고 납자는 숭고하다고 했죠)과 국가에까지 확장했고, 그 과정에서 심각한 인종차별을 저지릅니다

31% 융은 어느 사회 집단에나 구성원의 행동을 좌우하는 보편적 구조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가 말하는 원형이죠. 간단히 말해 원형이란 공동체가 구성원에게 활용해도 좋다고 인정한 일련의 행동방식을 가리킵니다

32% 고대 그리스 철학과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니체는 모든 문화와 예술을 두 가지 유형, 즉 아폴론형과 디오니소스형으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33% 아도르노는 여기에 저항하려면 일종의 문화전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상업적 수단으로 전락한 문화를 되찾아야 한다는 말이죠. 예술은 사람을 바보로 만들고, 마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도전하고 저항하도록 힘을 실어주어야 합니다. 예술은 우리를 분노하게 해야 합니다. 세상에는 분노할 일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죠

33% 이 문제는 기본적으로 트롤리 문제의 재탕입니다. 1960년대에 필리파 풋이 처음 제시한 이 딜레마는 폭주하는 열창의 방향을 직접 바꿔 한 사람을 치어 죽일지, 그대로 두어 다섯 명이 치어 죽게 할지 택하는 문제입니다

38% 흑인은 자기 고향에서도 이방인이며, 자기 나라에서도 소외됩니다. 다수를 차지하는 백인에게 정의되고 비판받는 존재죠. 그 결과 [니그로는] 항상 타인의 눈을 통해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43% 버크는 예의야말로 정부보다 위에 있는 가치와 규범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의는 정치권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죠

43% 아렌트가 보기에 전체주의는 사람들이 행위에 접근하는 것을 막아 삶의 의미를 모두 빼앗는 체제입니다. 사람들은 그 이상이 있다는 것조차 모른채 노동과 작업 사이를 단조롭게 오가는 일벌로 격하되고 말지요

48% 포이어바흐는 그렇기에 인간이 신이라는 틀에 인간성을 투사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먼 옛날 인류는 전쟁의 신, 지혜의 신 등등을 만들었죠. 이는 모두 투사, 즉 인간의 종의식을 의인화한 형태였습니다. 우리 종의 훌륭함을 외면화한 것이죠. 그리하여 인간 형상의 신이 태어났습니다

55% 여기서 등장하는 개념인 이중사고는 “두 가지 모순된 신념을 동시에 마음에 품게 함으로써 객관적 현실의 존재를 부정하는 동시에 자신이 부정하는 현실에 대한 설명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이중사고는 사실이나 현실을 조작된 현실로 대체하고, 다시 하루아침에 다른 것으로 대체함으로써 생겨납니다

66% 어떤 이론이 논리적으로 반증될 수 없다면, 즉 그것이 틀렸음을 증명할 증거가 존재할 수 없다면 포퍼는 그 이론이 허튼소리거나 협작이라고 단언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헤겔주의 마르크스주의, 프로이트주의를 공격적으로 비판했고, 뒤의 두 가지를 열린 사회의 적이라고 불렀습니다.

69% 현대 심리학에서는 프로이트 이론의 과학적 신빙성을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지만(그의 개념을 뒷받침할, 실험을 통한 실제 증거가 거의 없으니까요) 그의 패러다임 자체는 자기반성, 심리치료, 토론에 활용하기 좋은 도구입니다

72% 보부아르는 모성본능은 신화다라고 썼습니다. 여성은 어머니가 되기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73% 루소의 주장에서 가장 중요한 점을 꼽자면 아이들은 그 나름의 방식과 속도에 맞춰 성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놀이는 그 자체로 어엿한 결과로 인정받아야 합니다.

73% 시험은 앞의 두 가지를 교묘하게 결합한 방식이며 푸코가 권력/지식이라고 부르는 개념의 좋은 예입니다. 시험을 권력의 과시(”이 적성검사는 필수입니다”)이자 진실의 확립(”안타깝지만 정답 처리되는 것은 이 답안뿐입니다”)입니다. 시험은 평가받는 이들이 공부를 통해 자신을 바꾸려고 의식적인 노력을 하도록 강제할 뿐 아니라 권력을 쥦 자가 진실이라고 여기는, 이미 정해진 정답을 다시 강화합니다. 권력에 복종하면 대가로 빛나는 합격증을 받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커다랗게 쓰인 빨간 낙제 표시를 받게 되죠

74% 자기 생각에 숨이 막히거나 갇힌 기분이 든다면 위에서 내려다보는 스토아식 관점, 또는 영원의 관점을 시도해 보세요. 아마도 당신의 고민은 생각보다 하찮게 느껴질테고, 그러다 보면 초연함을 손에 넣어 삶을 대하는 방식을 뜻대로 조절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76% 쾌락주의자들은 신과 죽음이 두려움과 절망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큰 원인이라고 여겼기에 내세를 믿지 않았죠. 그래서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없었다. 나는 있었다. 이제 나는 없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 말은 종종 비종교적 장례식에서 기도 대신 쓰이기도 합니다

77% 빅터 프랭클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더는 상황을 바꿀 수 없을 때 우리는 자신을 바꿀 수 밖에 없다” 여러면에서 스토아 철학은 실존주의뿐 아니라 불교의 핵심 교리와 그 서양 버전인 쇼펜하우어의 사상과도 겹치는 부분이 많습니다

79% 빠를 때는 바람과 같이, 느릴 때는 숲처럼 고요하게, 쳐들어갈 때는 불처럼 기세 좋게, 움직이지 않을 때는 산처럼 진중하게 하라

83% 이러한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피론은 아무것도 확신하지 마라라는 명쾌한 메시지를 제시합니다.명백하거나 증명된 진실이 없다면 우리는 언제나 판단을 보류해야 마땅합니다.

91%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외교관이었던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짧은 책 군주론에 따르면 효율적이고 성공적인 통치자(좋은 통치자는 아닙니다)란 자신의 지위(마키아벨리는 남자만이 군주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죠)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는 사람입니다.

94% 정치가나 친구가 빠르고 간단하고 급진적인 해결책을 제안하거든 시간을 들여 심사숙고하세요. 과격하고 반사적인 반응이 현명한 경우는 매우 드물고, 우리 선조의 지혜를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위대할 수 있다는 버크의 말을 기억하세요

95% 스미스는 종종 어떤 규제도 없는 자유 시장의 옹호자 취급을 받지만, 그건 불공평한 평가입니다. 스미스는 국방이나 재판, 또는 교육이나 교량같은 공공사업처럼 시장의 힘에 맡기면 안 되는 중요한 것들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런 것은 개인의 투자 대상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오늘날에는 여기 속하는 항목 일부도 사적 시장에 공개되어 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97% 간디는 비폭력은 결코 겁장이의 방패로 쓰여서는 안된다고 말했으며, 도망치거나 숨는 것은 비폭력이 아님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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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불태우다 - 고대 알렉산드리아부터 디지털 아카이브까지, 지식 보존과 파괴의 역사
리처드 오벤든 지음, 이재황 옮김 / 책과함께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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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을 불태우다

 : 리처드 오벤든

 : 책과함께

 : 2022/04/12 - 2022/04/21


제목을 보면 바로 머리에 떠오르는 건 진시황의 분서갱유다.

실제로는 많은 책을 불지르지 않았다고 하지만 독재자의 이미지가 강해서인지 진시황의 분서갱유는 대표적인 억압정책으로 남아있다.

이 책에서는 고대시대부터 나타나는 책에 대한 탄압이 나온다.

생각보다 많은 탄압이 있었다.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종교개혁가들이 책들을 많이 없애버렸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또한 나찌의 금서 및 분서는 엄청났었다. 

순수성을 강조하는 집단이 얼마나 배타적일 수 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조심해야할 일이다. 


p5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들은 그 과거를 반복하게 마련이다. - 조지 산티아나

p12 이것은 정보의 보존이 개방 사회를 지키는 데 여전히 핵심적인 도구임을 적시에 일깨워 준 일이었다. ‘또 하나의 사실’의 대두에 맞서 진실을 지키는 것은 그러한 진실들과 그 진실들을 부정하는 진술들을 포착하는 것을 의미한다.

p18 선택, 취득, 목록화 과정과 처분, 보유 과정은 결코 중립적인 행위가 아니다. 그것들은 인간이 하는 일이다. 그들의 사회적, 시간적 맥락 속에서 하는 것이다.

p32 앗슈르바니팔의 거대한 도서관이 발견되고 이 제국(그리고 그 조상들 및 이웃들)의 온전한 역사가 드러나기까지는 다시 2200년이 지나야 했다. 이후 발굴되는 여러 앗시리아 유적지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와 특히 그런 발굴들에서 나온 기록들을 통해서 말이다.

p40 도서관은 미래를 위해 필요했다. 그들이 과거로부터 수집한 지식을 의사결정자의 손에 쥐어주는 것이기 때문이었고, 니네베에서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자는 앗슈르바니팔 자신이었다.

p62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야만적 무지가 문명화한 진실에 승리했다는 파멸적인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지식을 보존하고 공유하는 기관을 금전적으로 지원하지 않고 후순위로 돌리며 전반적으로 경시하는 데 따른 점진적인 몰락의 위험성에 관한 교훈적인 이야기다.

p90 글래스턴베리 도서관에 있던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은 60권 정도가 전 세계의 30개 현대 도서관에 보존돼 있는데, 더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많은 필사본들이 중세에 어떤 도서관 소장품이라고 특정할 수 있는 표지가 없기 때문이다.

p102 16세기 유럽 종교개혁은 여러모로 지식의 역사에서 최악의 시기 가운데 하나였다. 수십만 권의 책이 훼손됐고, 어떤 책들은 보관돼있던 도서관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p115 종교개혁은 유럽의 여러 도서관, 그리고 특히 브리튼제도의 도서관들을 초토화했다. 그 손실은 정확한 수치로 계량할 수 없지만,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증거 조각들을 모아보면 종교개혁 이전에 브리튼제도의 도서관들에 있던 소장물들의 70-80퍼센트가 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유럽의 수도원 도서관 서가에 있던 책들 가운데는 그보다 약간 적은 비율이 사라졌다

p142 제퍼슨과 타결하고 워싱턴에서 통과된 이 거래는 6487권의 책을 총액 2만 3950달러에 굽매하는 것이었다. 미국 의회도서관은 단숨에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크고 가장 수준 높은 장서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p156 바이런은 1824년 사랑하는 그리스로 옮겨갔다. 그는 그해 거기서 열병으로 죽었다. 바이런은 매우 창조적이고 생산적이었지만 물의를 야기하는 삶을 살아 전 세계에서 매우 유명해졌다.

p161 알베말가 50번지의 벽난로에서 바이러 ㄴ회고록 원본이 소각된 후 어떤 사본도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이는 친구들로서는 미래에 대한 우려가 컸고 역사를 통제할 필요학 있었음을 말해 준다

p168 그것은 지금 대체로 세 군데에 나뉘어 보관돼 있다. 가장 많은 부분은 옥스포드대학 보들리 도서관에 있고, 다른 것 중 상당수는 독일 마르바흐의 독일문학기록관에 있으며, 나머지는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국가도서관에 있다. 세 기관 모두 협력하며 카프카의 엄청난 문학 유산을 보존하고 공유하는 데 헌신하고 있다.

p177 한밤 무렵에 독일군이 대학도서관에 난입해 석유를 붓고 불을 질렀다. 건물 전체와 그 장서 거의 대부분이 잿더미가 됐다. 중요한 필사본과 희귀본 모음에 더해 현대 인쇄본과 잡지들이었다.

p193 불탄 책 가운데 하나의 저자인 H.G. 웰스는 1933년 9월 “사상에 대한, 분별력에 대한, 책에 대한 망나니들의 혁명”에 반대의 뜻을 천명하며 “그것이 독일을 어디로 끌고 갈지” 의문을 표했다.

p194 뉴욕의 브루클린 유대인센터는 1934년 12월 미국 나치스금서도서관을 설립했다. 그 자문단에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업튼 싱클레어 같은 유명 지식인들이 이름을 올렸다.

p217 리투아니아 국가도서관과 YIVO의 협력의 상징으로 문서 열 건이 뉴욕의 공개 전시에 출품됐다. 거기에는 아브라함 수츠케베르가 빌나 게토에서 쓴 시 묶음도 들어 있었다. 이 부서지기 쉬운 묶음이 여러 번의 파괴 시도를 견디고 남아 있다는 것은 동유럽 유대 공동체의 지식을 보존하려는 많은 개인들의 놀라운 헌신을 입증하는 것이다.

p247 그것은 이슬람교도 주민들에 대한 군사적 지배를 넘어서 그들의 절멸을 노린 세르비아 군대가 의도적으로 목표로 삼은 것이었다. 주변의 어느 건물도 포격을 당하지 않았다. 도서관이 유일한 표적이었다.

p253 이슬람교도들의 소유 재산에 대한 기록이 파괴되고 심지어 묘비까지 불도저로 밀어버렸다. 이슬람교도들이 보스니아 땅에 묻혔다는 흔적까지 말살하려는 것이었다.

p280 기록물을 물속에 가라앉힐 수 없음이 분명해지자 그는 거기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다. 아마도 이 파일들은 그런 식으로 처리되지 못한 듯하다. 양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알제리 독립주의자들의 손에 들어갈 경우 매우 논란이 있고 프랑스의 명예에 위험한 문서들이었음에 틀림없다.

p304 문서를 빼낸 것은 불법이었을까? 그것을 공개하는 것이 책임 있는 행동이었을까? 특히 살아 있는 개인들이 문서에 언급돼 있어 그들의 생명이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있는데 말이다 .

p342 미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도서관에 대한 자금 지원을 줄였다. 그들은 흔히 온라인 정보가 있으니 도서관은 쓸모가 없어졌다고 생각한다. 현실은 정반대다. 미국에서 도서관은 이용량이 크게 늘어 도서관을 당혹스럽게 했다.

p345 지식을 보존하는 일은 비용을 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금 조달은 지속적이고 성공적인 도서관 운영의 핵심에 있다.

p348 지식을 평가하고 정리하고 보존하고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보다 파괴하는 것이 더 값싸고 더 편리하고 더 쉽고 더 빠르겠지만, 단기적인 편의 때문에 지식을 버리는 것은 사회의 진실 파악 능력을 약화시키는 확실한 길이다.

p352 이 기관들에 대한 자금 지원의 현실은 매우 도전적이다. 영국에서는 2017-2018년에 공공도서관에 대한 자금 지원이 3천만 파운드 줄었다. 130여 개의 도서관이 문을 닫았고, 닫지 않은 500개 도서관은 전문적인 사서가 아니라 자원봉사자들이 운영하고 있다.

p360 기반이 되는 데이터에 대중의 접근이 가능해 과학자가 주장한 것을 다른 과학자가 입증할 수 있는가? 이 과정은 데이터가 독립적으로 보관돼 공개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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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바다 - 그 바다는 무엇을 삼켰나
황현필 지음 / 역바연 / 2021년 12월
평점 :
품절


 : 이순신의 바다

 : 황현필

 : 역바연

 : 2022/04/05 - 2022/04/08


역사강사로 유명하신 분이 이순신 일대기를 썼다.

어릴 때 이순신 위인전을 읽었었는데 위인전을 다시 읽으니 옛날 생각이 난다.

무과 시험을 보다가 말에서 떨어졌다는 이야기는 꾸민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실제였구나.

하늘이 조선을 버리지 않아 이순신이라는 영웅을 보낸게 사실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적재적소에 필요한 일을 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에 비해 원균은 어찌 그렇게 무능한지...

능력은 없는데 욕심만 많은 경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는지 원균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면 역사는 항상 되풀이되는데, 지금 우리나라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하다. 

임진왜란의 전장터를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어 이해도 쉽고 내용도 참 읽기 쉽게 잘 썼다.

좋은 책이다. 


p22 조선의 무과 합격자들은 말을 타고 칼을 쓰고 활을 다루는 등 제대로 된 정규 무인 코스를 수년간 밟은 프로급 무사들이었다. 그리고 엄청난 경쟁률을 뚫어낸 무인들이었다.

p79 긴장된 상황에서 이순신은 전 수군을 엄중히 타일렀다. “망령되이 움직이지 말고 산같이 정중하라”

p104 당시 직책만 전라좌수영의 조방장일 뿐 실제 이순신의 고문 역할을 해 주고 있는 셈이었다. 이 거물급 고참을 진중에 모셔놓고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으니, 정걸을 부른 이순신도 대단하거니와 도와 달라는 새까만 후배의 요청을 받아들인 정걸 역시 대단한 인물이었다

p145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의 상황까지 계산해 한 명의 적이라도 더 죽이고, 또 적군 패잔병에 의한 우리 백성의 피해를 줄이고자 하는 이순신의 애민의 마음을 원균은 헤아릴 수 없었다

p153 한산도 대첩 이후에도 와키자카는 여러 차례 이순신과 대결하였지만 용인전투에서처럼 용감한 모습은 더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에 어떤 전투를 앞두건 늘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자세로 바뀌었다. 와키자카는 이순신에게 패배의 쓴맛을 톡톡히 보았고 이순신에게 겸손을 배웠다

p185 부산포해전 한달 후인 1592년 10월, 일본군은 호남으로 넘어갈 수 있는 관문이었던 진주성을 공격했으나, 성주 김시민과 진주성 주민들의 끈질긴 저항으로 진주성은 지켜졌고 일본군은 육지로의 호남 진출을 다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김시민은 전사하였지만 그의 위명은 일본에까지 남아 모쿠소라는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p204 나라로부터 별로 받은 것도 없으면서 나라가 위기에 빠지면 떨쳐 일어나는 이상한 DNA를 가진 민족성을 일본군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p235 사상 최초의 수륙합동작전에서 최고 지휘관인 윤두수와 권율은 전장 근처에 오지도 않았다. 이들은 이순신에게만 무리한 공격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조선 수군은 장문포해전에서 단 한 명의 사망자도 내지 않은 채 2척의 일본 함선을 격침시켰다.

p236 이원익은 이순신을 이렇게 평가했다. “이순신은 침착하고, 남에 대한 말을 하지 않으며, 오로지 나라 걱정이 가득했다. 항상 계획적이었고 꼼꼼한 사령관이다”. 사람 보는 눈이 밝은 이원익은 원균 또한 직접 만나보고는 이렇게 평가했다. “원균은 결단코 기용해서는 안 되는 인물이다”

p244 순왜자는 조선인으로서 왜에 항복하고 왜군 편을 들었던 이들을 말한다. 반면 항왜자는 일본군임에도 조선에 항복한 후 조선 편을 들면서 일본에 저항하는 이들을 가리켰다

p263 1595년 한산도를 찾아와 잔치를 베풀며 수군을 위로해주었고, 이순신이 옥에 갇혔을 때 구제하기 위해 노력했던 이원익은, 직접 구례까지 백의종군 중의던 이순신을 찾아와준 것이다. 이원익은 이순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음을 알고 소복을 입고 이순신을 문상했고,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p287 칠천량해전은 육지의 용인전투와 더불어 임진왜란의 최대 패전이었다. 134척의 판옥선 중 122척이 불탔거나 침몰하였다는 기록이 일본의 정한위략에 남아 있다. 배설의 판옥선 12척이 살아서 이순신에게 돌아가게 되니 교차 검증이 된 셈이다

p298 실제로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직을 다시 임명받은 후 정유재란이 전개되는 동안 임금 선조를 향한 망궐례를 올리지 않았다. 지방관이라면 당연히 보여야 할 충성의 의무를 이순신은 행하지 않았다.

p369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에는 평일에도 사람이 북적거린다. 그러나 현충사는 한적함이 좋다. 그게 서글프다

p385 이순신은 나라를 잃고 이민족에게 지배당할 뻔한 역사적 수치스러움을 개인의 능력과 헌신으로 막아내었다. 이순신은 분명 조선을 살린 것이 맞다. 그렇지만 이순신은 조선의 미래까지 바꾸지는 못하였다.

p387 훗날 시마즈 가문의 사쓰마번이 조슈번과 연계하여 에도 막부를 타도하면서 메이지 유신을 이끌어내었고, 그들이 정한론의 선두주자가 되어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며 조선을 도다시 침략했던 중심세력이 되었으니, 역사가 참 아이러니하다고 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도 이들은 일본 내 가장 극우적 성향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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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 2022-04-17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s://cafe.naver.com/booheong/214016 오류가 많은 책입니다ㅠ
 
빵으로 읽는 세계사 - 10가지 빵 속에 담긴 인류 역사 이야기
이영숙 지음 / 스몰빅인사이트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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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빵으로 읽는 세계사

 : 이영숙

 : 스몰빅 인사이트

 : 2022/03/26 - 2022/03/31


요즘 이런 책이 유행인가?

비슷한 류의 책들이 많이 나왔다. 단순한 세계사가 아니라 질병, 빵 등 매개체를 통해 세계사를 풀어나가는 책.

나도 음악으로 읽어보는 세계사 이런책을 한번 내보고 싶었는데 출판사에서도 이런 류의 책들이 요즘 트렌드에 잘 맞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빵으로 읽다보니 결국 유럽사가 되어 버렸다.

빵의 이름을 알려주고 그 빵을 어떻게 만드는지 설명이 붙고, 그 빵을 주식으로 하는 지역의 역사가 이어진다.

루이 14세가 후추와 소금을 좋아해서 그것만 넣어서 음식을 먹어서 유럽의 음식문화에서 후추와 소금이 중요해졌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었던 것 같은데 이 책에는 그런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대신 프랑스의 음식문화가 메디치가문의 딸들이 시집오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알려준다.

프랑스가 외부의 음식문화를 잘 버무려 자신들만의 문화로 잘 수용해낸 것 같다.

새로운 시각으로 역사책을 읽으니 새롭게 알게 된다.

좋다.


9% 빵은 역사가 길다. 세계 최초의 도시로 꼽히는 우르에도 기록이 남아있으니 말이다. 기존에는 빵이 고대 바빌로니아 왕국에서 시작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하지만 더 이전에 빵을 먹은 흔적이 속속 발견되면서 언제부터 인간이 빵을 먹었는지는 미궁에 빠져있다

13% 플랫브레드 중 가장 대표적인 라바시는 땅에 묻어놓은 타니르라고 부르는 화덕 벽에 얇게 민 밀가루 반죽을 붙여 구워낸다

13% 너는 왜 빈둥거리고 있느냐? 학교에 가고 숙제를 외워라. 네가 (공부를) 마쳤으면 내게로 오너라. 길거리를 떠돌아다니지 말아라. 내가 지금 하는 말을 알아듣겠느냐? 거의 4,000년 전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당부하고 다그치는 말이다.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촌음을 아껴 공부에 매진하라는 충고다. 오늘날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하는 잔소리와 꽤 닮았다

21% 이집트인들은 이 나일강의 범람 주기와 시기, 그 치수 기술을 위해서 달력과 천문학과 수학이 필요했고, 범람 후 원래의 농지를 구획 짓기 위해 기하학이 필요했다. 나일강이 이집트 문명의 알파요 오메가였던 셈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티그리스와 유프라데스강이 중요했던 것처럼 말이다

23% 토리노 파피루스 문서가 발견된 이후, 람세스 3세가 재위한 지 27년째 되던 해(기원전 1152년)에 급료인 빵을 제때 받지 못한 100여 명의 노동자가 모여 파업했다는 기록을 발견하게 된다. 이후 기존의 역사는 수정되었다. 급료를 받고 일하는 지위라면 노예가 아니라 노동자가 되니 말이다

25% 넷플릭스의 문화 다큐멘터리 COOKED의 3부를 보면 빵과 관련된 영상이 나온다. 모로코의 한 마을에서는 수확한 밀을 가루로 빻을 때 빻은 곡물가루의 10퍼센트를 제분 삯으로 떼어주는 방식으로 마을의 제분소를 이용한다

26% 천연발효종을 이용한 샤워도우 빵은 소화도 쉽고 맛있기 때문이다. 요즈음엔 건강, 웰빙, 소확행 등과 같은 트렌드에 맞추어 제과 제빵소에서도 직접 연구하고 만든 샤워도우를 파는 빵집들도 있다

33% 식문화만 보더라도 유명한 셰프들이 공식 대화를 할 땐 프랑스어로 된 요리용어를 쓸 정도였다. 옛날,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가 이탈리아를 동경하여 이탈리아 메디치가의 딸이었던 카트린을 며느리로 맞았고 그 결과 이탈리아 식문화가 프랑스의 식탁을 업그레이드시켰던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들 정도다

39% 클레멘스 7세의 실정으로 로마는 1527년 에스파냐 황제 카를 5세에게 점령된다. 세계사에서 흔히 로마 약탈로 언급되는 사건이다. 그 후 피렌체에서는 폭동이 일어나고 클레멘스 7세 교황에 대한 여론은 최악으로 치닫는다

40% 카트린은 이름뿐 왕비로 소외당하고 디안이 왕의 총애를 받으며 왕실을 흔드는 상황은 앙리 2세가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카트린은 온갖 꼴을 다 보고 겪으면서도 26년간이나 남편과 디안 뒤에서 묵묵히 참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과 그의 정부에게 맞서거나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남편의 관심을 끌고자 노력을 기울였다. 남편 사후에 카트린은 디안에게서 쉬농소 성을 빼앗고 왕으로부터 받은 보석들도 압수한 채 궁 밖으로 내쫓았다

44% 이탈리아만 프랑스에 영향을 준 것은 아니다. 스페인의 식문화 또한 프랑스에 깃들어 있다. 이 역시 스페인의 두 왕녀가 프랑스로 시집가면서 영향을 끼친 것이다.

47% 마카오는 중국의 식자재로 광둥요리와 포르투갈요리를 퓨전한 매케니즈 음식으로도 유명하다

50% 사그레스 성에는 항해에 필요한 정보와 지리 관련 지식이 각종 지도와 항해 관련 서적, 기행문 등과 함께 수집되었다. 자료가 축적되어가자 이 자료를 보기 위해 세계 도처의 전문가들이 모여들었고, 이들이 나눈 대화와 연구가 다시 기록으로 남아 사그레스 섬에 보관되었다. 이러한 선순환으로 사그레스 성은 거대한 학교요 도서관이자 천문대로 항해를 준비하는 두뇌 역할을 하게 되었다.

52% 그는 평생 권력 욕심 없이 결혼도 하지 않은 채 그저 탐함과 교육 사업에 헌신했다. 엔리케가 실지로 직접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간 일은 없었지만 해양 탐험에 쏟은 공적들로 인해 그에겐 항해 왕자라는 별명이 붙게 된 것이다. 그의 리더쉽과 용기, 도전은 오늘날에도 자주 언급되곤 한다

63% 일암 이기지가 북경을 방문하고 일암연기는 60년 뒤 연암이 쓴 열하일기의 본이 되었다. 이기지는 박지원, 홍대용, 등 북학파, 실학파들의 롤모델이었을 정도로 후대 북학파 지식인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67% 마젤란의 최후는 끔찍했다. 최정예 병사 60명을 이끌고 포함외교가 무엇인지 보여 주려 했지만, 라푸라푸와 전투를 벌이던 중에 그는 필리핀 부족 병사들에게 머리엔 창, 다리에는 독화살이 박히는 등 심각한 상처를 입는다. 이에 마젤란은 급히 배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결국 라푸라푸 병사들에게 끔찍하게 살육을 당했고,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74% 토르티야에 음식을 완전히 쌌는지, 반으로 접기만 했는지, 돌돌 말았는지, 아니면 부재료 없이 토르티야를 튀겼는지에 따라 케사디야, 타코, 부리또, 나초 등의 음식이 되니, 기승전 토르티야다

76% 콜럼버스와 코르테스, 피사로를 움직이게 한 원동력은 겉으로는 십자가와 탐험 정신이었지만, 속으로는 향신료와 황금으로 대변되는 물욕이었다. 황금을 향한 욕심은 커다란 동기가 되어 침략과 약탈을 추진하게 했다

78% 말린체에게는 정복자를 위해 부역한 배신자라는 차가운 시선 한편으로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운명에 순응했던 여인이란 동정적인 시선도 있다. 식민지 문화의 특성으로 꼽히는 숙명주의를 일컫는 스페인어 말리치스모라는 말도 그녀의 이름에 유래되었다

84% 이슬람법상 무슬림이 먹을 수 있게 허용된 음식인 할랄 식품이 있는 것처럼 유대인들에게도 율법에서 허용된 식품이 있는데, 그것이 코셔다. 유대인들은 유대교 율법에 따라 돼지고기나 조개류 등을 제한하는 코셔 식품을 꽤 까다롭게 지키다 보니 그것이 빵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86% 로스차일드 가문의 유대인 금융인 야콥시프는 러일전쟁 대 일본 국채의 절반을 사서 일본의 전쟁자금을 도왔다. 일본이 좋아서라기보다는 러시아가 미워서였다. 그랬으니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의 패배는 러시아가 포그룸으로 유대인을 박해했던 것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결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91% 러시아는 지정학적으로 위도가 높아서 추운 날씨가 오래 계속되다 보니 난로와 그 위에 뭉근히 끓이는 수프가 일상이다. 추운 날 뜨거운 수프에 흑빵을 부수어 넣어 먹으면 속이 확 풀리는 든든한 한 끼가 된다

95% 명칭에서도 느껴지듯이 이 도시는 제정 러시아 때인 1703년 표트르 대제에 의해 만들어진 이래 200년간 로마노프 왕종의 수도가 되면서, 정치, 경제, 문화, 예술의 중심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서구식 발전 모델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표트르 대제 덕에 시인 푸쉬킨은 이곳을 유럽으로 열린 창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을 만큼 유럽의 건축 양식이나 문화와 사상을 받아들인 도시다

95%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는 당시 레닌그라드라는 작품을 작곡했는데, 우울하거나 비탄에 잠긴 선율이 아니다. 의외로 광기인지 결기인지 베짱인지 모를 힘이 느껴지는 곡이다.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이 느낀 전쟁의 느낌을 그대로 선율로 옮겼다는 말과 함께, 레닌그라드인들을 기억해달라는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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