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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책 ㅣ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4
카를로스 마리아 도밍게스 지음, 조원규 옮김 / 들녘 / 2006년 2월
평점 :
품절
책 한 권에 숨어있던 애서가의 기묘한 삶, 위험한 책
책을 통해 또 다른 책을 찾아 읽었을 때, 그 책이 만족스럽다면 참 기분이 좋아진다.
<위험한 책>은 얼마전 읽은 <페이퍼 엘레지>라는 책에서 접하고 궁금했던 책이었다.
처음에는 몰입하기 힘들었지만, 읽어갈수록 점차 흡입력이 느껴지는 책이었다.
책은 어떤 죽음에서부터 시작한다.
1998년 봄, 블루마 레논은 소호의 어느 책방에서 에밀리 디킨슨의 구판본 시집을 사서, 첫 번째 교차로에 이르러 막 두 번째 시를 읽으려는 순간 자동차에 치이고 말았다. (p.5)
화자의 동료이자 교수였던 블루마 레논의 죽음. 블루마의 장례식에서 대학의 로버트 로렐 강사는 "블루마는 문학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그녀의 생을 문학에 바쳤습니다."라는 구절이 포함된 영결사를 낭독했고, 이것으로 인한 논란이 있었다.
한편 그녀와 가까운 사이였던 화자는 그녀 후임이 되고, 얼마 지나지않아 블루마 앞으로 전달된 우루과이 우표가 붙어 있는 소포 한 꾸러미를 받게 된다. 그 안에는 책의 앞표지와 뒤표지에 지저분한 시멘트 부스러기가 묻어 있는 한 권의 책이었다.
화자는 블루마에게 온 책을 통해 그녀와 책에 얽힌 이야기를 상상하고, 나아가 책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하게된다.
그 생각들은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다 공감할 만한 이야기들이었다.
껄끄럽지만 책을 버리지 않고 계속 가지고 있는 이유에 대해, 화자는 이렇게 언급한다.
책 한 권을 버리기가 얻기보다 훨씬 힘겨울 때가 많다. 우리는 궁핍과 망각 때문에 책들과 계약을 맺고, 그것들은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을 지난 삶에 대한 증인처럼 우리와 결속되어 있다. 책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동안 우리는 축적의 환상을 가질 수 있다. (중략) 책을 잃어버리는 걸 달가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차라리 반지나 시계, 우산 따위를 잃는 편이, 다시는 잃지 않더라도 낯익은 제목만으로도 우리가 과거에 누렸던 감정을 일깨워주는 책 한 권을 잃는 것보다 훨씬 낫다. (p.17)
이 즈음부터 책에 빠져들기 시작했던 것 같다. 책 전반에 등장하는 서가에 대한 이야기들, 또 책에 대한 애정들이 흥미로웠다. 특이한 관점의 내용들이 많았지만, 그런 새로운 관점들에 공감되는 부분이 꽤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나 자신도 책을 사랑하는 독자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물론 책 속에 등장하는 애서가들 각각의 생각들에 모두 공감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화자는 결국 죽은 이에게 온 책을 직접 돌려주기 위해 휴가를 이용해 책을 보내온 곳으로 떠나가게 된다.
여기서부터 뭔가 미스터리한 분위기가 점차 느껴지기 시작한다.
화자는 책을 보낸 남자, 카를로스 브라우어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브라우어 씨와 블루마가 참여했던 회합과 관련된 인물로 대형서점을 운영하는 디날리 씨를 찾아간다. 그 앞에서 책을 꺼내놓자 노려보고 경계한다. 그리고 그는 브라우어 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인물로 델가도 씨를 화자에게 소개한다.
델가도 씨와의 이야기를 통해, 화자는 카를로스 브라우어가 책을 너무나 사랑한 사람이었고 점차 기묘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가 언급하는 카를로스 브라우어의 모습들은 굉장히 기행적인 면들이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애서가로써의 델가도 씨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특히 이 부분에서 섬칫했던 것은, 블루마 씨의 죽음에 대해 언급했을 때 델가도 씨가 들려준 내용이었다. 화자처럼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어느정도까지 책을 아끼고 사랑하게 되면 그렇게 예상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될까? 아직은 상상조차 못할 일이다.
그가 한 이야기 중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책을 읽을 때 그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통로'에 관한 내용이다.
그는 내게 내게 아무 페이지나 펼쳐 각 단어들의 간격으로 생겨난 수평이나 수직 방향의 길들을 쫓아가 보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과연 내 눈앞에 행과 행들이 만들어내는 긴 통로들이 나타났다. 단락들을 횡단하거나 때로는 끊어지다가, 끊어지면 대각선 방향으로 진로를 터서 종횡으로 또는 자유롭게 낙하하듯이.
"언어의 리듬을 구사하지 못하는 작가는 이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작가는 한 문장 안에 네 철자 이상의 단어를 수없이 사용해 언어를 파괴하고, 텍스트의 리듬과 통로를 망쳐버립니다. 그런 책에서 통로를 찾는 일은 쓸데없는 짓이지요. 글자들의 간격이 너무 좁거나 넓게 편집된 조악한 책은 문자들이 은밀하게 이루어내는 형상을 찾으려 하는 독자들의 눈에 폭력을 가하는 셈입니다." (p.62~64)
이런 관점은 처음 접해서 더 흥미로웠고, 다음부터 한국 소설을 읽을 때 이런 부분도 고려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아무래도 원서를 읽지 않는 이상 외국 소설과 번역된 소설의 '통로'는 서로 다를테니까.
글자가 가득한 책을 마치 이미지처럼 읽어가는 듯한 방법인 것 같다고 느꼈다.
한편 화자의 브라우어 씨에 대한 추적은 계속된다. 책을 통해 집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토대로 그는 브라우어 씨가 만든 집이 있다는 곳까지 찾아간다. 그러나 그곳에는 폐허가 된 집터만 남아 있었다. 그 곳 근처에 있던 어부들에게서 그 집에서 살던 브라우어 씨의 최후의 모습을 듣게 된 화자는, 결국 이 모든 이야기를 듣게 했던 그 책을 원래 주인 블루마의 무덤 곁에 가져다 두게 된다.
이 책은 위에서 이미 이야기했듯이 한 애서가의 삶을 찾아가는 구성으로 되어 있는데, 그리로 이끄는 책에 대한 인물들의 반응에서 뭔가 미스터리한 분위기가 풍겨서 더욱 이야기에 몰입해 읽어가게 된다. 그 애서가가 책을 다루는 방식이 점차 변화하는 것도 기묘하고 흥미롭게 소개되고 있다.
다른 책을 통해 알게 되어 궁금했던 책이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읽었는데, 의외로 소득이 많았다고 생각되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