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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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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사>는 오에의 다른 소설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조코 코키토가 열 살 무렵에 겪은 아버지의 익사 사건을 소재로 한 이야기다. 조코 코키토는 오에 겐자부로의 분신과 같은 인물로, 어렸을 적 아버지가 갑자기 불어난 강에 배를 띄웠다가 익사한 일을 트라우마로 평생 간직해 왔다. 자신이 소설가가 된 것은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소설을 쓰기 위해서라고 여길 만큼 아버지의 죽음은 코키토의 평생을 잠식해 왔다. 코키토는 소설가로서의 마지막 작업을 '익사 소설'로 마무리 하고싶어 한다.

한편 극단 '혈거인'은 코키토의 필생의 작업인 '익사 소설'이 씌여지는 과정을 연극으로 만들고자 하는데 그 중심에는 여배우 우나이코가 있다. 우나이코는 열일곱살 때 큰아버지에게 강간당하고, 큰어머니에 의해 강제로 낙태 한 경험이 있다. 코키토와 우나이코는 각각 소설과 연극을 도구삼아 과거 아버지와 큰아버지로 표현되는 커다란 권위 즉 국가로 부터 비롯된 상처를 해소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소설을 써서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했던 코키토는 아버지의 죽음은 천황을 죽임으로써 새로운 인간신을 세우고자 했던 패망 당시 군 장교들의 농담에 휘둘린 일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좌절되고, 오히려 자신이 아버지라는 존재를 어느만큼이나 열망했는가를 깨닫게 된다. 코키토의 이런 열망은 장애를 갖고 태어난 큰아들 아카리에게 이어지고, 죽음을 앞둔 노년의 코키토는 역시 신체적 노화로 둔화되가는 아카리를 향한 책임에 고민한다. 아들로서의 마지막을 다하기해 '익사 소설'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아버지로서의 마지막은 장애를 갖은 아들 아카리의 죽음까지 책임질 수 있어야 했던 것이다. 나 자신의 죽음을 위한 첫번째 준비는 아카리를 산으로 올려보낼 준비라는 것이 어머니가 이 글에 담은 메시지죠.(36쪽)

친족으로 부터의 강간이라는 상처를 지니고 이십년을 살아온 우나이코는 자신이 당했던 일을 시대극에 비춰 무대에 올리고자 하지만,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를 비롯한 우파의 계략에 의해 ​그 역시 좌절된다. 그러나 좌절된 것처럼 보이는 우나이코의 시도는 오히려 세상에 알려짐으로써 우나이코의 상처를 치유한다. 우나이코의 상처를 보듬고, 장애와 노화로 일상 생활에 도움이 필요한 아카리를 돕는 것은 역시 권위로 뭉친 국가 이전의 공동체라는 것을 새삼 강조하는 결말이다.

한편 ​식민지를 만들고 더 넓은 영토 확장을 위해 전쟁을 일으켰던 과거 전범국으로서 일본의 그림자는 소설 속에서 과거에만 국한 되어 있지 않다. 전형적인 천황주의자 였던 코키토의 아버지 조코를 스승으로 여기는 다이오는 육십년의 세월을 넘어서도 조코의 정신을 계승하려 한다. 과거 무사계급인 사무라이들이 명예를 위해 택했다는 할복을 닮은 조코의 익사 장면조차도 다이오는 재현하려는 것이다.

꿈속의 기억을 뒷받침해주는 것은 두 개의 한자어다. 끊임없이 쏟아진 폭우는 엄청난 양의 물로 활엽수림을 채웠다. 그 물줄기는 ​숲을 울창하게森森 채우고 아득히淼淼 깊게 만들 터였다. 칠흑 같은 한밤중, 거친 바람에 미끄러져 쓰러진 자가 제 몸을 다시 일으킬 의지를 갖지 않는다면, 익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427쪽)

작가는 제 의지를 갖지 않은 자들이 전체주의라는 폭우에 휩쓸릴 때 ​또다른 조코와 다이오가 익사할 것이라고 말한다. 

대략의 줄거리는 이와 같지만 글쓰기의 방식이 전혀 독자를 배려하지 않는 식이여서 무척 읽기 힘든 책이었다. ​소설인지 다큐인지 구분이 모호할 정도의 보고 형식으로 쓰였는데, 해설의 도움이 없었다면 작가가 말하고자 한 것을 이나마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 같다.

노벨상 수상작가이며, 솔제니친과 김지하의 석방 운동을 위해 단식을 했고, 일본의 평화헌법 9조를 수호하기 위한 '9조회'에 참여하는 등의 반전 반핵을 위해 행동하는 작가라는 점에서 오에 겐자부로의 작품에 대한 기대가 컷지만, 이전에 읽었던 <개인적인 체험>에 비해 <익사>는 공감하기 어려운 소설이다. 간결한 문체에도 불구하고, 책이 어수선하다고 느껴졌는데 일본적인 사고방식에 익숙하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전범국가로서 과거 일본을 수면에 끌어올리고자 한 작가의 의도가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사적인 문제 안에 응축된 소설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읽기 어려운 소설이 이해마저 불가한 것은 아니다. 오에가 이 소설을 통해 일본의 천황주의와 남성주의문화를 비판하고자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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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체험 을유세계문학전집 22
오에 겐자부로 지음, 서은혜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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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자유롭고 싶었다.

그래서 스무살이 넘어서는

발길 닿는 데까지 달아나 보았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시늉도 실컷 했다.

세상의 밑바닥이 궁금하다며, 궁금해야 한다며

멋 부리며 어설프게 굴러다니기도 해 봤지만...

 

돌이켜보니 소리를 지르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어도, 도무지 자유롭질 않아서

멈춰 서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자유. 본래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

더 간절한 법'인가 하다가,

가슴 아래에 '작지만 무거운'

돌멩이 같은 것 하나가 콕 박혀있어

내가 아무리 달리고, 날고, 굴러도

나를 가볍게 하지 않았구나 싶은 것이었다.

가족이 언제나 돌멩이처럼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자유롭고 싶다.

그래서 내 가슴 아래에서 신호를 보내면

가족을 돌아보기로 했다.

그러면 좀 더 자유로워지는 것 같았다.

-김수박의 민들레 중 '가족'(2015. 5. 6.일자 한겨레 신문에서)

 

 

짜르르한 아픔이 전해져 왔다. 큼지막한 시계를 차고 가슴에 얹은 그림 속 남자의 손 언저리에서.

남자의 가슴 속에 돌맹이 처럼 자리잡고 있을 가족이라는 이름의 아픔이 그대로 내게도 전해진 것이다. 더도 덜도 아닌 자유를 갈망하는 딱 그만큼의 아픔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내 아픔만이 아닌 내 남편의 아픔이기도 할 것이라는 짐작으로 더더욱 애잔한 마음이 되었다. 그도 나도 어쩌지 못하는 현실의 고통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앓고 있는 것이라고.

 

오에 겐자부로의 <개인적인 체험>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새를 닮은 외모 때문에 버드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주인공은 아프리카로 떠나고 싶은 꿈을 소년시절 부터 간직해왔다. 그렇지만 버드는 결혼을 하고 아내가 출산에 이르도록 아프리카를 향한 꿈을 유예시킨다. 그리고는 이윽고 장애를 갖은 아들이 태어나자 꿈을 이뤄야겠다는 욕구를 불현듯 폭발시킨다. 버드가 꾸었던 꿈은 결국 아프리카가 아닌 현실도피였던 것이 아닌가.

나도 그렇다. 버드와 다른 것이 있다면 특별히 내가 떠나가고 싶었던 곳은 없다는 것이다. 그저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라도 좋다는 심정으로 막연한 유랑을 그리워했다. 그건 젊은 시절 한 때의 일탈과 같은 방황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후로도 쭉 나는 어딘가를 그리워 한다.

본래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 더 간절한 법이니까.

 

머리에 혹을 달고 태어난 아기를 죽도록 방치하고 아프리카로 떠날 계획을 세우던 버드는 자신을 덮쳐오는 불행과 정면으로 맞서는 선택을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 현실의 삶을 살아 낸다고 하는 것은 결국 정통적으로 살도록 강요당하는 것인 모양이네요. 기만의 올무에 걸려 버릴 작정을 하고 있는데도 어느 샌가 그것을 거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그런 식으로요."(274쪽)

 

뇌가 두개골 밖으로 비어져 나온 뇌 헤르니아라는 끔찍한 장애가 아니라 단순한 혹을 달고 태어났을 뿐으로 수술후 어느정도 정상아의 모습을 찾은 버드의 아이와 현실도피를 실현하지 않은 버드의 용기를 칭찬하는 가족들의 마지막 장면은 좀 실망스럽다. 차라리 아이를 죽이고 자유를 택했다거나, 또는 아기를 거부하고 싶은 인간에게 손을 빌려 주는 의사(234 쪽)로 부터 아이를 되찾고자 달려가는 버드가 사고사 했더라면 하는 사악한 결말을 생각해 본다. 사회적 지탄을 받아 마땅한 지독한 에고이겠지만 문학은 실제로는 다다를 수 없는 상상의 표현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실제로 장애아를 둔 오에로서는 희망적인 결말을 말 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오에는 지적장애아인 큰아들과 공존함으로써 핵 개발과 사용에 반대하고 평화를 희구하며 전쟁을 영구히 포기하며, 어떤 무력도 지니거나 행사하지 않겠다는 일본의 현행 헌법 9조 2항(289 쪽)을 수호하는 등의 평화적 노력에 더 깊이 관여하게 된다.

 

한편 버드와 함께 아프리카로 떠날 꿈을 꾸던 여자친구 히미코는 다원적 세계에 대해 말하는데, 다원적 세계란 이를테면 현실의 버드가 장애를 가진 아들을 받아들이고 그와 함께 공존하는 쪽을 선택한다면, 또다른 세계의 버드는 아들을 죽이고 아프리카로 자유를 찾아 떠난다는 것이다. 다만 현실의 버드는 이쪽이든 저쪽이든 선택할 뿐이다. 히미코의 이러한 상상은 현실의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또다른 세계의 나는 내가 선택하지 못한 다른 경우를 경험할 것이라는 독특한 세계관이다. 지금의 나는 일상이라는 현실을 떠나지 못하지만 또다른 세계의 나는 어떠한 당위도 없이 자유롭게 지내고 있는 것이다. 상상일 뿐이지만, 어쩐지 자유롭다. 자신을 기만하지 않는 쪽을 택한 버드나 소중함을 택한 만화가 김수박이 말하는 자유와는 조금 다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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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를 읽고 세살배기 외아들과 터키여행을 떠난 그녀의 용기를 부러워만 하다가, 그해 여름 JB와 동갑내기인 아들과 지리산 여행을 감행했다. 겨우 지리산이었을 뿐인데도 그후로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경험이 되었다.

여행작가로서 오소희라면 그 내공이 만만찮지만, 소설가로서의 오소희라..? 에세이스트로 출발해 소설가로 성공한 케이스가 쉽게 떠오르지 않기도 하거니와 더불어 어쨌든 낯설다. 그래도 궁금하다. 그녀의 첫 소설이. 가장 소중한 아들을 잃고 홀로 헤매이는 엄마라니.

 

 

 

 

 

 

<양철북>의 작가 권터 그라스. 얼마전 영면함으로써 그의 책들이 우리나라 출판계에서 새삼 주목받고 있는 듯. 역시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작가는 죽어서 작품을 남기는 법. 무릇 영생하고 싶다면 불로초를 찾아 헤맬 것이 아니라 후세에 영원히 기억될 작가가 될지어다.

 

성공한 유명 사진가 마리가 그의 여덟 아이들의 어린시절과 함께 자신의 유년시절 추억한다는 설정. 마리는 권터 그라스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인물이라고. '암실'이 가르키는 것은 아마도 '무의식의 저편'쯤이지 않을까. 추측을...

 

 

 

 

 

 

원작 보다 좋은 영화를 본 기억이 없다.

물론 <스틸 앨리스>는 영화도 아직 보지 못했지만.

어쨌든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는 심리학 교수 앨리스 하울랜드 역을 맡은 배우  줄리안 무어는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을 받았다.

그러나 영화와 관계없이 이 책을 읽고 싶은 이유는 자타공인의 지성인인 앨리스가 정신이 흐려지다 종래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마저 잊어가는 처참한 이야기에 나를 대입해 보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잊지 않고 죽어갈 수 있을까.

 

 

지금은 봄 입니까? 아니, 여름 입니까? 아직은 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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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05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두 권은 5월에 출간된 책들인걸요!

비의딸 2015-05-07 16:41   좋아요 0 | URL
윽.. 그러네요. 그래도 그냥 버티는 걸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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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세부터 헬로라이프 스토리콜렉터 29
무라카미 류 지음, 윤성원 옮김 / 북로드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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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20대에 막 들어선 그때,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를 읽었다. 단지 제목이 너무 좋아 고른 책이였는데, 그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기지촌이며, 마약 중독, 혼음파티와 폭력, 그리고 상상하기 힘든 변태적 성관계까지. 그 모든 것들을 이해하기에 나는 너무 어렸고, 그저 일본이란 나라가 그런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그저 변태적인 19금 소설이라고 덮고 말기에는 아까운 무엇이 있었다는 것을 어렸던 날에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금기에 대해 끝없이 갈망하는 두려움없는 청춘이랄까 뭐 그런것을.

그후로 무라카미 류의 소설을 제법 찾아 읽었다. 단순히 호기심에서도 그랬지만, 안되는 것이 없다는 자유로운 생각에도 불구하고 정말 되는 것은 너무도 없다라는 답답함에서 였다. 현실에서 성취하지 못한 것들을 무라카미 류의 소설을 읽으며 소소하게 혹은 침침하게 터뜨리고 싶었던 것은 아니였나 생각된다. <고흐가 왜 귀를 잘랐나>, <오디션>, <그래, 연애가 마지막 희망이다>, <sixty nine>, <너를 비틀어 나를 채운다>, <자살보다 SEX>로 이어진 무라카미 류에 대한 호기심은 딱 거기까지. 더는 그를 이해할 수 없다고, 궤도이탈을 꿈꾸는 나에게 무라카미 류가 주는 위안은 변태적인 호기심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이십년이 훌쩍 지난 지금 다시 만난 무라카미 류. 그도 나이를 먹은 것인지, 예전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위태위태하던 그의 이야기가 평이해졌다고 할까, 이제야말로 땅 위에 발을 딛고 쓴 소설같다고 할까, 제목이 이미 모든 걸 말하고 있지만 그의 이번 소설에서는 불가능을 꿈꾸는 다른 종류의 젊음 같은 것은 더이상 없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쳐, 그 모든 것을 경험하고 난 후에 찾아든 노년과 같은 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나카고메 시즈코는 쉰네 살에 이혼했다. 그후 그녀는 백화점이나 마트에서 판매 직원으로 일하며 결혼상담소를 전전한다. 인도 시게오도 역시 쉰네 살에 오랫동안 근무해오던 작은 출판사에서 정리해고를 당하고, 일용직 노동자를 전전하며 노숙자가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토미히로 타로는 중견 가구 업체에서 조기 퇴직했다. 그는 조기퇴직우대제도에 따른 특별가산금으로 캠핑카를 마련해 아내와 일본 전역을 여행다닐 계획을 세우지만, 자기만의 시간을 주장하는 아내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자 크게 당황한다. 다카마키 요시코의 남편은 38년동안 일한 중견 광고 대리점에서 정년퇴직하고 블로그 등으로 소일하며 거의 집안에서 지내지만, 어쩌다 방문하는 이웃에서는 평소의 그와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여 다카마키 요시코를 불쾌하게 한다. 그러한 이유로 그녀는 남편과 말 한마디 하려하질 않고, 애견 보브에게만 사랑을 쏟는다.

시모후사 겐이치가 대형 트럭 운전사로 잘나가던 때는 연봉이 5백만 엔을 넘었지만, 예순살이 되자 회사에서 해고됐다. 젊은 시절 이혼하고 버는 돈은 족족 유흥에 썼던 탓에 예순이 넘은 그에게 남은 것은 작은 아파트와 나날이 줄어가는 통장과 끝없이 부푸는 고독감이다.

 

일본의 경제적 호황기에 젊음을 받쳐 공헌한 그들은 일찍이 유례가 없는 장기침체로 인해 조기퇴직을 하거나 현역에서 물러났다. 체력적으로도 그렇지만, 정신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불가능에 자신을 내던질 수 있는 그런 나이가 아닌 것이다. 더군다나 때는 바야흐로 선례가 없는 경제적 불황기. 모두가 가난하고 돈이나 물건이 귀하던 시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다 맞은 뜻하지 않은 무기력한 시절인 것이다. 문제는 말이야 선례가 없다는거야.(179쪽)

까닥 잘못 발을 내딛는 순간 끝을 모를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는 때에 필요한 것은 현실 감각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당장의 먹을것 만을 생각하며 살아가기에는 너무 낭만적인 존재인가 보다. 나카고메 시즈코는 결혼상담소의 만남 주선에 빨간 속옷을 꺼내입고, 인도 시게오는 발등에 떨어진 불에도 불구하고 친구를 돕기 위해  그에게는 생명수와 같은 물을 양보하며, 시모후사 겐이치는 꽃뱀일지 모르는 여자에게 돈을 건네려 한다. 문제는 생활비보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이 고독감이다. 따스함 같은 게 그립다.(314쪽)

 

더이상 어리지 않고, 그렇다고 다 자란 것도 아닌 그 시절,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사나워지는 시기인 사춘기를 질풍노도의 시기라 명명한다. 그렇다면 더 이상 젊지도 않고, 그렇다고 늙었다고 볼 수도 없는 이들의 시간은 무어라 불러야 할까. 해 질 녘 모든 사물이 붉게 물들어 언덕 너머로 보이는 실루엣이 개인지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시간이라는 낮도 밤도 아닌 시간,  '개늑시'가 바로 이때 아닐까. 젊지 않으니 더이상 불분명한 모험에 자신을 걸지 않지만, 딱히 늙은 것도 아니니 안주할 수도 없는 시간, 개도 늑대도 아닌 그러므로 아직은 긴장감을 늦출 때가 아니라고 무라카미 류는 말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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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아이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우리 동네 아이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9
나지브 마흐푸즈 지음, 배혜경 옮김 / 민음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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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아이들은 알레고리 소설이다. 작품해설에는 이 소설이 성서뿐만 아니라 코란에서도 이야기를 차용하고 있다라고 밝힌다. 코란까지는 모르겠지만, 1권의 아드함과 자발, 리파아의 이야기가 하느님과 아담, 에덴동산, 카인과 아벨, 모세, 그리고 예수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음이 너무도 분명하게 눈에 보인다. 그렇다면 나지브 마흐푸즈는 소설과 성서, 그리고 코란을 잇는 이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사막 한 복판에 아름다운 정원이 딸린 대저택을 소유한 자발라위에게는 네 아들이 있다. 그중 흑인 노예에게서 얻은 막내 아들 아드함에게 자발라위가 재산관리를 맡기면서 대저택의 불화가 시작된다. 맏아들인 이드리스는 자신을 젖혀놓고 막내아들에게 재산 관리를 위임한 아버지 자발라위의 처사에 반항하다가 대저택에서 쫓겨난다. 그후 아드함을 꼬여 자발라위를 배신하게 하는 이드리스는 명백히 아담을 꼬여낸 사탄을 상징한다.

맏형 이드리스의 꼬임과 아내 우마이마의 부추김으로 아버지 자발라위를 배신하고 낙원으로 상징되는 대저택에서 역시 쫓겨난 아담인 아드함은 생계를 위한 노동을 하며, 평생 아름다운 정원에서의 생활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아드함은 생전에 낙원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 아드함의 아들 까드리와 후맘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동생 아벨을 시기해 살해한 형 카인의 이야기다.

 

이후 아드함과 이드리스의 자손들은 번성해 자발라위의 동네를 이루고, 동네를 지배하는 권력자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자발라위의 재산을 관리하는 관재인과 관재인을 도와 폭력을 행사하며 주민들을 착취하는 수장들이 바로 그들이다. 아드함의 이야기 후에 이어지는 자발 편과 리파아 편, 까심, 아라파 편은 관재인과 수장들에게 픽밥당하는 이들 속에서 나타나는 선지자들의 이야기이다. 선지자들은 핍박받는 대중들을 일깨우고, 힘을 모아 관재인과 수장들을 물리치고 새로운 세상을 열지만 그들의 시도는 매번 당대를 넘기지 못한다.

사람들은 안락한 생활을 더없이 기뻐하며 즐거운 삶을 누렸다. 그들은 자신감에 차 확실하게 '오늘이 어제보다 낫고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왜 망각은 전염병처럼 우리 동네를 휩쓸고 지나가는 걸까?(1권, 440쪽)

 

<우리동네 아이들>의 동네 사람들은 언제나 권력자들로부터 착취당하고, 그러면서도 그에 대해 정당한 책임을 묻지 못한다. 전통 혹은 관습처럼 내려오는 불공평한 대우에 대해 따져 묻는 일없이 오히려 권력자들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힘을 숭배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 속에서도 선지자들은 태어나고, 선지자들은 묻는다. '우리 동네 사람들 모두가 시조 자발라위의 재산에서 나오는 수익을 가져갈 권리가 있는데, 왜 모두들 힘에 굴복하기만 하는가'고. 이러한 물음은 선지자들을 혁명가로 둔갑시키고, 동네 사람들을 무장 시켰다.  그리고 그들의 물음은 새로운 세상의 단초가 되지만 시간이 지나면 권력은 부패하고, 대중은 부패한 권력에 굴복하고 힘을 숭배하기를 되풀이 한다.

 

나지브 마흐푸즈가 이 알레고리 소설을 통해 묻고자한 선지자들의 물음은 <우리 동네 아이들>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작가가 이 소설을 쓴 것은 1952년 이집트의 나세르 혁명 이후라고 했다. 그는 혁명의 와중에 만연한 탄압과 고문, 투옥의 역사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고 한 일간지의 인터뷰를 통해 밝혔다.

<우리동네 아이들>은 힘에 굴복하는 대중은 사막 한가운데 만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옛날 이야기 속에서만 등장하는 것만이 아니다. 소수의 지배층에 의한 착취가 어째서 지금도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는지에 대한 작가의 물음 인 것이다. '왜 우리 동네 사람들은 자신의 권위를 스스로 세우고자 하지 않지?'

 

이상한 것은 선지자들에게 나타나 동네 사람들의 권위를 찾으라고 종용하며, 자신은 그들의 편이라고 말하는 자발라위는 절대 스스로를 사람들 앞에 나타내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대중을 착취하는 지배층에게도 그 모습을 드러내거나 그들의 죄악을 벌하지 않는데, 현실에서도 역시 신은 권능자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2015년 1월 필리핀을 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12살 소녀는 물었다. "많은 어린이들이 마약과 매춘에 내몰리고 있어요. 신은 왜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내버려두는 거죠?

신은 역시 우리 일은 우리 스스로 해결하기를 원하시는 걸까? 그의 피조물인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사후가 아니라면 인간을 심판하고 싶지 않으신 걸까?

나지브 마흐푸즈는 이 소설을 통해 세상의 변화를 가져올 희망의 끈을 이야기 했지만, 신의 권능에 대한 의심스런 눈길은 가리지 못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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