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 퇴장 주커먼 시리즈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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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목가>와 <휴먼 스테인>,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에 등장했던 은둔 작가 '네이선 주커먼'이 또다시 등장한다. 출판사는 <유령 퇴장>을 주커먼 시리즈의 완결판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작가가 이 작품을 쓴 것은 2007년으로, 그때 나이 75세였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출판사의 이런 소개는 그다지 틀린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어쨌든 2007년 이후로 주커먼 시리즈가 나온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일테니. 또한 작가는 책의 제목을 <유령 퇴장>이라고 정함으로써 네이선의 퇴장을 암시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넌지시 생각해 본다.

앞의 세 작품에서 네이선은 화자의 역할로, 등장인물들의 과거와 현재를 증언하고 추리했다면, <유령 퇴장>에서는 그 자신이 육체적, 정신적 노화를 되돌리고자 하면서 곤경에 빠지는 주인공 노작가로 등장한다.

 

유명 작가인 네이선 주커먼은 전립선 암 진단을 받으면서 도시를 떠나 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한다. 그는 비포장의 시골 오두막에 거주하면서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않고, 문명이나 문화로부터도 거리를 두며, 완벽하게 자신에게 집중하고 글을 쓰는 일 외에는 하지 않는다.

그러던 중 망가진 전립선을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줄 의술에 기대를 걸고 십일 년만에 뉴욕을 방문한다. 뉴욕은 주커먼에게 육체적 건강과 정신적 긴장감을 되돌려 줄 마법으로 기대되지만, 주커먼은 뉴욕에서 일주일 남짓의 시간을 보내며,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은 무언가를 탐하거나 누군가가 되려고 노력하는 세속적인 욕망의 실현이 아니라,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서의 안정을 취하고, 평화로운 상태에서 글쓰기를 지속하는 것이라는 것을 자각한다. 그러니까 그 일주일 남짓의 시간을 겪으며, 그 자신이 세속으로 대표되는 뉴욕으로부터 완전히 퇴장할 것을 결심하는 것이 이 책의 주요 내용인 것인데, 그것은 작가가 죽음을 기대하고 세상으로 부터도 소멸될 것을 준비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주커먼 시리즈의 네 작품이 아니더라도 필립 로스는 작품에서 미국에 거주하는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에 관한 고뇌와 함께 '성'으로 상징되는 젊음에 관해 다루기를 즐긴다(적어도 지금껏 내가 읽은 필립 로스의 작품들은 그랬다). 일흔이 넘은 남자 주인공이 자신의 나이에 절반밖에 되지 않는 여인과의 일탈을 벌이거나 혹은 상상하는 식인데, 여자인 나로서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남자 주인공의 감정상태에 이입하기 보다는 상대 여자의 입장이 무척 궁금하다.

<휴먼 스테인>의 주인공 콜먼 실크의 나이에 절반밖에 되지 않는 애인이였던 포니아 팔리아는 일흔 한 살의 콜먼 실크에게 주체할 수 없는 성적매력을 느낀다. 그러나 나는 일흔 한 살의 사람을 남자로 여길 수 있을지 그것이 도대체 상상이 되질 않는다. 역시 <유령 퇴장>에서 노작가 네이선은 마흔살이나 어린 제이미에게 매혹되지만, 제이미가 네이선에게 느낀 것은 매혹과는 관계없는 대작가에 대한 경외심 뿐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역시 여기서도 제목 <유령 퇴장>에 대한 의미를 읽을 수 있었는데, 네이선은 자신에 대한 제이미의 감정에서 '매혹'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스스로 제이미에게로 부터 '퇴장'을 결심하는 것이다. 그편이 대작가로서의 명성에 흠집을 남기지 않을 수 있는 현명함이었다고 나는 감히 상상한다.

어쨌든 필립 로스가 이처럼 나이든 남자와 젊은 여자의 사랑에 집중하는 것은 그 자신의 노화에 대한 저항이 아니었을지, 생각해보게 된다.

 

부활에 대한 천박하고 어리석은 환상에서 벗어나 코앞에 있는 차고에서 내 차를 꺼내 북쪽으로, 감상적인 꿈 따위는 절대 허락하지 않는 소설의 변신 요구 속에서 내 생각을 순식간에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는 집으로 죽어라 달리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다. 내가 갖지 못한 것, 내 삶에 없었던 것, 이제 일흔 한 살이고, 그거면 끝난 이야기 아닌가. 허영심으로 주제넘게 나서던 시절은 끝났다. 뭔가 달리 생각해보려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짓이다. -61쪽

어쩌면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니라, 늙음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는 자각, 더 이상 건강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죽음이라는 그림자 뒤에 숨은 진실이 아닐까.

젊음은 두려움을 모른다. 젊은 그에게 나이듬은 현실이 아니고, 죽음 또한 자신의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젊어서의 무모한 순간은 거의 본능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젊다고 할 수 없는데도 무모한 짓을 서슴지 않는 경우라면, 그것은 더 이상 젊지 않기 때문에 벌일수 있는 일종의 모험으로 '아직은... ' 이라는 몸부림인 것이다. 네이선은 안정과 평화로움 속에서 일종의 모험을 기획해 보지만, 결국 평안을 선택하기로 한다. 나이를 자각하는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을 바에야 아무일이라도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직은 크다. 지금의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나길 기대하는 젊은 나이라기보다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내 스스로를 위안하는 방어기제 같은 것을 품을 줄 아는 영악한 즈음인 것이다. 어찌되었든 어떤 일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그 일로 인해 내가 느끼게 될 마음의 긴장과 재미, 그리고 그 일을 통해 배우게 될 것들에 집중하려고 애쓰는 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직 젊고 전투적이다. 그러나 이런 나도 네이선처럼 나이듬을 스스로 인정하는 날이 오겠지. 그 날의 나자신을 애써서 외면하지는 않겠다고 다짐해 본다. 나는 자연스럽게 늙을 것이고, 그 자연스러움을 부끄러워하지는 않겠다.

 

스물 몇 살에 이 책을 읽었다면 좀 지루했을 것 같다. 노작가 네이선의 읊조림이 불필요하게 여겨진 나머지 책 전체가 피곤했을 것만 같다. 인생의 절반을 넘어섰다고 여겨지는 지금도 이 책을 읽기에는 너무 빠르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인생에 대한 넉넉한 관조가 필요한 책이다. 그렇지만 그 어느때보다 '기저귀를 찬 남자'인 네이선이 좋아진다. 그를 남자로서가 아니라 늙어가는 인간으로서, 언젠가는 져버릴 목숨을 가진 생명체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집중하길 멈추지 않는 지적인 존재로서 무한 애정을 품는다.

 

그리고 마음에 든 구절,

 

만약 내게 스탈린의 권력 같은 게 있다면, 나는 그 권력을 창의적인 작가들을 침묵시키는 데 낭비하지 않을 겁니다. 창의적인 작가들에 대해 기사를 써대는 자들을 침묵시키는 데 사용할 겁니다. 신문이나 잡지, 학술지 등에서 이뤄지는 문학에 대한 모든 공개적 논의를 금지할 겁니다. 전국의 모든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전문대학, 종합대학에서 문학을 교육하는 걸 금지할 겁니다. 독서모임과 인터넷 독서토론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서점에서 판매원이 손님에게 책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도 금지하고, 손님끼리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단속할 겁니다. 나는 독자들이 홀로 책들 사이에 남아 자기 힘으로 책에 담긴 의미를 찾아내게 할 겁니다. -243쪽

책을 읽고, 리뷰쓰기를 즐기는 나로서는 독서 토론이나 감상 말하기를 금지해야 한다는 이런 극단적인 주장에 찬동할 이유가 없지만, 나는 마음으로 이 말을 깊이 느낀다. 그러므로 그 모든 해설, 그 모든 감상은 허구다. 책은 오로지 작가와 나만이 주고받는 은밀한 소통이며, 공감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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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 김영하의 인사이트 아웃사이트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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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마라의 죽음을 표지그림으로 한 1996년 판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나에게 첫사랑과 같은 책이다. 1996년 부터 지금까지 나는 이 책을 다섯 번 이상 읽었다. 처음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할 당시 나는 김영하라는 작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지만, 정해진 규율이 습관처럼 몸에 배어있던 나였기에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제목에 순식간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매번 읽을때마다 새로운 구절, 새로운 감동으로 밀려왔으며, 지금까지도 나에게 첫사랑의 기억과 같은 책으로 남아있다. 그랬기에 그후 김영하의 신간이 나오면 매번 놓치지 않고 찾아 읽게 되었다. <호출>이 그랬고,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오빠가 돌아왔다>, <랄랄라 하우스>, 그리고 결정적으로 김영하의 책에서 아무런 재미도 느끼지 못하게 된 <퀴즈쇼>까지.
그후로 나는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만큼의 감동을  김영하의 다른 책에서는 느끼지지 못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김영하의 새로운 작품을 기다리기를 멈추지는 않는다. 단지 그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의 작가이기 때문에.
 
오랫만에 출간하는 김영하의 산문집 <보다>를 발견하는 순간 다시 가슴이 뛰었다. 인터넷 서점에서 예약 구매를 하고 기다린지 일주일만에 친필 사인본을 받았다. 직접 사인했을 것이 분명한 친필 사인본임에도 나는 받아들자마자 바로 실망하고 만 <보다>.
일단 책이 너무 가벼웠다. 책이라는 물체로서의 무게도 가벼웠지만, 그냥 휘리릭 넘겨본 책에 대한 첫느낌이 그랬다. 책에 영혼이 없는 것 같은 느낌.
선물꾸러미와 함께 돌아온 김영하의 산문집은 그렇게 가볍게 휘리릭 넘기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은 아니, 오히려 휘리릭 넘겨읽어야만 하는 그런 정도의 책이다.
 
작가의 말에서 김영하는 소설가는 국경 밖에서 가끔 전파를 송출해 메세지를 전하면 그뿐인 것인 줄 알았다라고 적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변했고, 제대로 된 메세지를 송출하기 위해 이제라도 자신이 속한 사회에 탐침을 깊숙히 찔러 넣으려 한다는 다짐 아닌 다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보다>에서 그의 그런 다짐을 전혀 발견할 수 없어 나는 실망했다. 그는 여전히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쓸 무렵의 불손한 아웃사이더로 남아있는 것 같다. 그때는 그의 그런 파괴적인 본능이 나에게 썩 매력적이였지만, 그래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지금도 여전히 첫사랑과 같은 책으로 남겨두고있지만, 그러나 지금의 그는 그때의 그가 아니다.
그의 말대로 작가는 국경 밖에서 가끔 전파나 송출하는 방관자 아니라, 오히려 테두리 안에서 일어나는 광경에 대한 목격자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러나 김영하는 전혀 우리 사회 깊숙히 발을 담그고 있지 않다. 그 스스로 그 자신은 무엇에도 크게 분노하지 않는 유순한 인간이 되었다라고 고백하고 있는데, 바로 그런점에서 언제라도 그가 담근 발을 쑥 뽑아 버릴 것만 같은 불안정을 나는 <보다>를 통해 느낀다. 또한 그것이 김영하라는 작가에게 내가 더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이유다.
이십대에 만났던 관상쟁이가 그에게 말과 글로 먹고 살 대운이라고 했다는데, 좀 솔직해보자. 먹고살 문제를 고민하기에 그는 이미 너무 유명해져버렸지 않은가. 그것이 바로 그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시절의 김영하를 넘어서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지 않은가. 좀더 심하게는, 먹고살 걱정이 없는데 이렇게 피상적인  글로 김영하 라는 이름을 팔아먹다니! 라고 비약하고 싶어진다.
 
<보다>는 <읽다>와 <말하다>로 곧 이어질 예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읽다>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쓴 작가가 읽은 독서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약간 끌린다는 것 외에, 이어질 두권에 대해 별다른 기대는 없다. <보다>의 다른편일 뿐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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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한 사람
이승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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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한 자는 저지르거나 부수거나 걷어차지 못한다. 신중한 자는 보수주의자여서가 아니라 신중하기 때문에 현상을 유지하며 산다. 현상이 유지할 만한 가치가 있기 대문이 아니라 현상을 유지하지 않으려 할 때 생길 수 있는 시끄러움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현상을 받아들이고, 그 때문에 때때로 비겁해진다. -47쪽
신중하지만 치밀하지는 못한 편이라는 평을 아내로 부터 듣는 Y는 자신을 드러내보이지 않는 사람이다. 그가 자신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신중한 사람이기 때문인데, 그가 신중한 이유는 주위사람들과의 불편한 관계를 참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작가의 주장이다. 그러니까 작가가 말하는 신중하다는 의미는 자신이 선택한 것, 또는 자신이 주장한 것의 결과로 야기될 주변과의 불편함을 참아내지 못한다는 뜻이다.
 
Y 는 오랜 꿈인 전원주택을 경기도 양평에 지어두고도 아내와 딸의 반대로 전원주택에 들어가지 못한다. 대신 그는 원하지 않는 해외파견 근무를 아내와 딸의 요청으로 받아들이고, 전원주택은 이웃남자에게 관리를 부탁하고 매달 얼마간의 관리비를 송금하기로 한다. 3년후,  Y는 기러기 아빠가 되어 혼자 귀국하는데, 이번에도 역시 아내와 딸이  Y가 나이지리아에 근무하는 대가로 머물렀던 영국에 잔류할 것을 강력히 원했기 때문이었다. 이 과정에서도  Y는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지 않음으로써 아내와 딸과의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는 것으로 그 자신의 신중함을 드러낸다. 여기까지는  Y의 신중함이 남편이나 아버지로써 마땅히 가족을 생각해 보일 수 있는 신중함, 혹은 양보로 이해되었으나,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혼자 돌아온 Y는 이번에는 걸릴 것 없이 양평으로 향하지만, Y가 짓고 가꾸고 다듬었던  꿈의 전원주택은 재투성이 시골농가로 변해있었고, 설상가상으로 그곳에는 낯선 부부가 둥지를 틀고 그곳은 자기들이 사들인 자신들의 집이라는 주장을 펴기에 이른다.

한때는 이웃이었던 관리인으로부터 사기를 당한 것이 명백한 상황에서  Y가 보인 신중함은 가히 혀를 내두를 만한 것이었는데,  그는 자신이 선택한 일에 대한 결과로 더해질 낯선 사람과의 불편함을 미리 예견하고, 그를 피하기 위한 신중함을 여기서도 다시한번 펼치게 되는 것이다.
 
 
그는 늘 억지와 불합리와 막무가내를 거북해했다. 억지와 불합리와 막무가내를 겪지 않고 산 것은 아니지만, 겪을 때만다 거북하고 못 견뎌 했다. 못 견뎌 하면서도 견뎌낸 것은 견뎌내지 않을 때 닥쳐올 또 다른, 어쩌면 더 클 수도 있는 억지와 불합리와 막무가내에 대한 예감 때문이었다. 부자연스러운 것을 꺼리는 사람이, 꺼리면서도 부자연스러운 것을 내치지 못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공식이 이래서 성립한다. 부자연스러운 것을 꺼리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부자연스러운 상황을 더 잘 받아들이는데, 그것은 부자연스러운 상황을 거부하는 자신의 태도가 혹시 만들어낼지도 모르는 더 부자연스러운 상황을 끔찍해하기 때문이다. 만들어진 부자연스러움보다 자기가 만들지도 모르는 부자연스러움을 한층 더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57쪽
신중한 Y는 자신의 삶을 점령한 먼지투성이고, 안하문인이며, 철면피한 타액과도 같은 타인을 견뎌내는 것으로 갈피를 정하고, 그대신 자신의 몸을 괴롭히기로 작정한 것이다. 자신을 괴롭히는 것은 적어도 다른 사람과의 불편한 관계를 야기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Y가 택한 신중한 결정은 바로 '적응'이었는데,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한 투쟁이나 싸움보다는 그 자신을 상황에 적응시키는 것으로 문제를 덮어두고자 한 것이다.
의사소통의 실패로 인한 주변과의 걸끄러운 상황을 못견디는 나 역시 신중한 사람이라고 판단되지만, 그러나 Y의 행동은 황당하고 이해하기 어려웠다. Y의 소심증은 이미 신중함을 넘어선 '병적인 나약함' 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승우 소설집 <신중한 사람>에는 여덟편의 이야기가 실려있고, 두번째 이야기인 '신중한 사람'과 같은 신중한 이들이 각각의 단편의 주인공이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신중함을 펼치며 인생을 재지만, 그들이 펼친 신중함은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찌르는 비수가 된다. 
외향적인 사람이 이러저러한 불만을 밖으로만 혹은 타인의 탓으로만 표출하는 것처럼, 내향적인 신중한 이들은 자기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야기되는 타인과의 불편한 관계를 참아내는 대신, 자신과는 결코 화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참아내는 자기 자신을 괴롭히고 못마땅해 한다.
 
신중한 것과 치밀한 것은 다르고, 대부분의 신중함은 다가올 미래에 자신이 선택한 것의 결과로 야기될 불편함을 예견하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것이며, 만일 미처 예기치 못한 불편함이 야기되었을 경우라도 신중한 사람은 그것에 그만 적응해 버린다는 것이 소설집 <신중한 사람>의 결론이다. 그러므로 신중한 사람은 어찌보면 낙관주의자 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신중한 사람들의 강령은 이런 것이다. 되도록 주변과의 말썽을 피할 것! 나를 주장하는 대신 주변에 적응해 버릴 것!
하, 이보다 더 낙관적인 사람이 또 있을까.
 
그러나 작가가 사용한 '신중함'은 낙관과는 거리가 먼 다소 부정적인 의미의 신중함이 되겠는데, 사실 일상 속에서 예견되는 불편함을 덮어두기 위해 부당함을 견뎌내고, 적응해버리는 신중한 사람들은 우리 대다수의 소시민을 가르키는 것일 수 있겠다. 그러나 부정적이고 어쩌면 다소 병적으로까지 여겨지는 것이  '신중하다'는 것 일지라도 인류는 대부분 신중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고 보아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만 신중한 사람들만 있었다면 인류는 진보하지 못한채로 유인원과 같은 존재로 남았을 수도 있겠다는 상상도 하게된다. 그러니, 자신의 행동으로 예견될 온갖 불편함을 감수하고, 부당한 현실에 용감하게 맞선 것으로 보이는 배우 김부선에게 '나대지말라'는 말 따위는 함부로 날리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다. 아니, '나대지말라'는 말 따위를 함부로 날릴 수 있는 것도 '신중함'과는 거리가 멀기는 하다. 그로인해 야기될 비아냥이나 비난들을 예견하지 못했다면, 그는 그저 멍청한 것일뿐 아니겠는가.
따라서 신중한 사람은 멍청한 것과도 거리가 멀다. 어쩌면 결과를 예측하는 영특함과, 어차피 인간은 자기가 듣고 싶은 말을, 듣고싶은대로만 듣는 존재라는 것을 파악한 명민함을 갖춘 존재가 바로 신중한 사람 아니겠는가. 그러니 신중한 사람들이여 위축되지 말지어다. 그대들의 신중함은 때로 민망하고 한심스럽지만, 제 한 몸 보신하는데 이보다 더 쉬운 방법은 없을터이니.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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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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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은 하찮은 농담 한마디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뀐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쿤데라는 <농담>에서 어떤 행위도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라 그 행위가 어떤 질서 속에 놓여 있느냐 하는 것만이 그 행위를 좋게도 나쁘게도 만든다고 말한다.
<무의미의 축제>에 등장인물인 다르델로는 자신이 암에 걸리지 않은 것을 확인한 후, 처음으로 마주친 옛동료에게 자신이 암에 걸렸고, 곧 죽을 운명이라고 가볍게 이야기 한다. 그것을 자신이 중병에 걸리지 않은 것을 확인함으로써, 마치 새생명을 얻은듯한 남자의 농담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런 다르델로의 농담을 과연 타인을 속일 목적으로 행한 나쁜 의도로 봐야할까.
중요한 것은 좋고 나쁨이 아니라, 그 행위로 야기된 결과일 것이다. 다르델로의 농담은 라몽으로 하여금 죽음을 앞둔 다르델로의 차분함에 경외감을 느끼게 했고, 그것은 새 삶을 얻음으로써 죽음과는 다소간 멀어졌다고 믿는 다르델로의 기쁨을 배가 되게 했다.
 
그가 의아했던 것은 그 거짓말을 왜 했는지 자기 자신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거짓말을 한다는 건 보통 누구를 속이거나 어떤 이득을 얻기 위해서다. 그런데 생기지도 않은 암을 꾸며 내서 대체 무엇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자기 거짓말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 이상하게도 그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19쪽
그런가 하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스탈린의 스물네 마리 자고새 이야기는 어느 누가 들어도 농담에 지나지 않는 수준이지만, 스탈린이라는 독재자를 둔 주변의 협력자들에게 그것은 농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들은 독재자 앞에서 스탈린의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여 웃지 않았을 뿐더러,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비난도 하지 않는다. 독재자의 시대는 농담이 진실 또는 거짓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다. 쿤데라 식으로 말하자면, 어떤 농담도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라, 그 농담이 어떤 질서 속에 놓여 있느냐 하는 것만이 진실이며 거짓인 것이다. 그것은 농담이 농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에 대한 독재자를 빚댄 쿤데라의 농담인 것이다.
 
'욕실에서 손을 씻으면서 우리는 입에 거품을 물고 욕을 해 댔다. 그의 말은 거짓이었다. 거짓말!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31쪽
<농담>은 쿤데라의 첫번째 소설이고, 현재 나이 85세인 그를 생각해 볼 때, <무의미의 축제>는 어쩌면 쿤데라의 마지막 소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고국 체코를 떠나 프랑스에 정착한 쿤데라는 명작가로써 여러 작품을 써왔는데, 그의 작품의 줄기를 ''농담'이 농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시대에 관한 것'으로 봐도 좋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희안하게도 쿤데라의 소설에서 시간은 평행선이다. <농담>이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도 시간의 순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여겨졌는데, 이번 작품은 더더욱 그러해 마치 앞뒤 맥락없는 단막극이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무언극을 본 것만 같다. 그러나 이토록 대사가 많은 무언극이라니. '그가 배꼽의 신비에 처음 사로잡힌 것은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이다'와 같은 긴 제목을 달고 있는 각각의 단락들을 순서에 상관없이 뒤섞어도 소설 전체를 이해하는데 전혀 무리가 없을 것만 같다.
<무의미의 축제>에서 시간은 그만큼이나 소용이 없는 것인데,  불쑥 끼어든 과거의 사건은(한여자의 살해 장면 같은) 그것이 과거에 벌어진 일이라거나, 혹은 상상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걸 한참 뒤에 알게되어도 소설 전체를 이해하는 데 전혀 어색하지 않다. 
때문에 받아들이기에 따라서는 <무의미의 축제>가 대가의 말장난이거나 다소 성의없는 무의미한 글쓰기로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무의미의 축제>의 각 단락들은 뜬금없고, 그 결말은 더더욱 황당하다. 나 역시 소설을 덮으며 '이건 뭐지..'라는 생각을 했는데, 문득 떠오르는 것은 이 소설의 제목이 '무의미의 축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쿤데라가 말하는 '의미없음'은 무엇에 관한 것일까.
 
일을 하고, 성공을 위해 노력하고, 쟁취하고, 파티를 열고,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고, 누군가에게 이해받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 에로틱함에 취하고, 성에 집착하고...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결국 죽음에 다가서기까지 시간을 보내기 위한 행위일 뿐 결국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럼으로 삶에서 의미를 두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그런 아포리즘이 아닌가 나름 짐작해 본다. 그러니까 죽음을 앞둔 삶은 축제이다.  반드시 죽음을 전제로 해야만 삶이 즐거움이며 기쁨일 수 있는 것이다.
 
 
죄책감을 느끼느냐 안 느끼느냐. 모든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 같아. 삶이란 만인에 대한 민인의 투쟁이지. 다들 알아. 하지만 어느 정도 문명화된 사회에서 그 투쟁은 어떻게 펼쳐지지? 보자마자 사람들이 서로 달려들 수는 없잖아. 그 대신 다른 사람한테 잘못을 뒤집어씌우는거야. 다른 이를 죄인으로 만드는 자는 승리하리라. 자기 잘못이라 고백하는 자는 패하리라.
사과로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57쪽
<무의미의 축제>를 소개한 글에는 무의미한 에로틱함으로 배꼽에 대한 의미가 많이 해석되어있지만 사실 나에게는 배꼽의 의미보다는 죄책감에 대한 알랭의 견해가 인상적이다.
나역시 알랭과 마찬가지로 틈만 나는 죄책감을 느끼는 '사과쟁이'이기 때문에 알랭에게 몹시 공감했는데, 고작 다른 사람의 환심이나 사자고 매사에 죄인인 양 행동하는 것이라는 샤를의 견해가 다소 당황스러웠다. 아니 그보다는 태어나면서부터 환영받지 못한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해 이해받고 싶은 무의식의 발로가 '사과쟁이'로 표현되는 것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인데, '태생이 잘못이지만, 그러나 나는 존재하고 있다'는 슬픈 고백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무의미의 축제>를 읽기전 책 제목을 보고, 의미가 없기로는 '삶'만 한 것이 없다라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이 과연 들어맞았다는 것에 어느 정도 나도 삶에 도통한 나이가 되어가는 것 아닐까 싶다. 의미를 찾고자 하는 마음은 이미 의미가 없다라는 것을 관조하고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앞서 <무의미의 축제>는 쿤데라의 첫소설<농담>과 한 줄기라고 했지만, '삶의 무의미'에 관해서라면 쿤데라를 더더욱 유명하게 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도 맥을 같이 한다.
모든 삶은 죽음을 전제로 하고, 죽음을 바라보는 혹은 기다리고 기대하는 모든 삶은 결국 축제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삶의 의미를 논하기 전에 오늘을 느껴라. 유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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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전집 6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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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무거운 것일까, 가벼운 것일까? 만일 삶에 무게가 있다면 무게있는 삶이 좋은 것일까, 가벼운 삶이 좋은 삶일까?

기원전 6세기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는 가벼운 것은 긍적적이고, 무거운 것은 부정적이라고 했으며, 파르메니데스와 달리 고전주의 작곡가 베토벤은 무거움을 긍정적인 것으로 간주했다라고, 이 소설은 시작된다.

체코의 프라하에 러시아가 침공하기 전까지 토마시는 의사였다. 그는 세상의 관점에서는 잘나가는 바람둥이 외과 의사였고, 토마시의 표현대로라면 여자를 통해 인간이라는 공통의 의미 속에서 100만분의 1의 상이점을 찾는 과정을 즐기는 사람이였다. 그런 그에게 한 시골 여자가 찾아왔다. 그녀는 테레자로, 시골에서 웨이트레스로 일하면서 책을 통해 다른 세상을 꿈꾸었다. 토마시는 그녀를 여섯번의 우연을 거쳐 자신에게로 떠내려온 바구니 속의 아기로 여겼다. 테레자가 토마시에게 닿기까지의 과정은 우연이였지만, 우연은 곧 필연이 되고, '그래야만 한다'는 당위의 의미로 토마시에게 새겨지며, 테레자에게 의미를 두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의미를 둔다는 것은 무게를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이며, 무게를 느끼기 시작하자 테레자는 토마시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의 더더욱 큰 의미가 되었다.

 

우리 모두는 사랑이란 뭔가 가벼운 것, 전혀 무게가 나가지 않는 무엇이라고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믿는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반드시 이런 것이어야만 한다고 상상한다. 또한 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삶도 더 이상 삶이 아닐 거라고 믿는다.(64쪽)

 

사랑의 역사는 '꼭 그래야만 했다'이라기 보다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었는데'에 근거한다. 때문에 모든 필연은 사랑에 혹은 자신의 운명에 경도된 이들의 의미두기의 과장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필연이거나 우연이거나 하는 것은 과도한 의미두기의 하나일 뿐이며, 단지 우리에게는 순차적인 순간, 즉 평행상의 사간차만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순간의 시간차 속에서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기도, 스쳐가기도, 혹은 사랑이라는 의미를 새기기도 하는 것이 아닐까.  토마시가 테레자가 일하는 레스토랑으로 들어서던 순간, 베토벤의 음악이 흘러나왔다고 해서 테레자가 그를 필연으로 마음에 새길 필요까지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만남에 보다 많은 순간이 얽혀있다면, 어쩌면 그것을 '운명'이라고 이름지워도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토마시가 테레자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해서, 그가 여자들에게서 100만분의 1의 상이점을 찾는 작업을 멈춘 것은 아니였다. 토마시에게 사랑과 섹스는 전혀 다른 것이니까.

물론 사랑과 섹스는 같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섹스를 하려면 최소한 상대를 경멸하지는 않아야 하며,지독한 친밀감도 쾌락이 '주'가 되는 섹스에는 좋지 않다. 토마시는 경멸과 지나친 친밀을 배제한 채로 얼마든지 많은 여자들과 섹스할 수 있었다. 토마시의 그녀들 중, 화가 사비나가 있다. 그녀는 육체를 통해 자기를 보려고 노력했으며, 전체 속에서 얼마든지 자신을 구분해 낼 줄 아는 사람이였다. 때문에 토마시와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삶에 무게에 짓눌리지 않는 사람이였다. 토마시나 사비나가 질러대는 광란의 쾌락을 나로서는 절대 이해 못하지만, 그러나 그들이 그토록 쾌락을 쫓는 이유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존재 자체에 대한 이해였다고.

 

시간 순으로 진행되지 않는 소설은, 시간의 뒤섞임 속에서 네 명의 주인공인 토마시와 테레자, 사비나와 프란츠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뒤죽박죽 진행된다. 그러나 이러한 진행은 이야기의 인과관계를 살피는데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다만 사비나와 프란츠의 길고 지루한 외도 끝에 느닺없이 날아든 토마시와 테레자의 죽음은 다소 많이 당황스러웠다. 그들이 죽을 당시 토마시는 그 자신의 삶에 의미라고 습관적으로 생각했던 학자이자 의사인 직업을 버리고 트럭 운전사가 되어있었다. 그만큼 그들의 죽음도 다소 희극적이였다. 나는 그들의 죽음뒤에 모종의 음모가 있으리라고 예감했지만, 밀란 쿤데라는 나의 기대를 보기좋게 무너뜨렸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애견 카레닌의 죽음을 거쳐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흔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사랑 이야기로 표현되지만, 나에게 이것은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배신에 관한 이야기, '꼭 그래야만 한다'는 당위로 부터 명예로운 탈출에 관한 이야기다. 사비나는 아버지와 아버지로 표현되는 조국을 배신하고, 프란츠는 삶의 연속과 스스로의 도덕관을 배신한다. 테레자는 자신의 근본인 어머니를 배신하고, 자신의 육체를 배신한다. 토마스는 '그래야만 한다'는 내면의 명령, 자신의 소명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을 배신한다. 그들 모두가 배신을 통해 찾고자 한 것은 자아 였다. 자신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것, 그러므로 삶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변화무쌍한 유기물인 것이다.

또한 모든 우연은 모든 필연을 배신한다. 왜냐하면 어떠한 한 사건이 우연이였는지, 혹은 필연이였는지를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고, 다만 주장일 뿐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 소설은 인간이 원하는 것을 원하는만큼 아름다게 보여주며, 속내에는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인 죽음을 가리는 '키치'에 관한 이야기이며, 실제와는 전혀 다른, 보여지기 위한 해석의 '앙가주망'에 관한 이야기다.

밀란 쿤데라는 배신과, 키치, 앙가주망으로 체코라는 공산 사회와 개인의 삶, 그리고 철학을 잘도 버무려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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