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소설 읽는 노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23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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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림을 개척하려는 이주민들과 황금을 찾는 노다지꾼들, 열대동물을 포획하려는 사냥꾼들로 어수선한 마을 엘 이딜리오는 아마존 밀림 지역이다. 어느날 엘 이딜리오에 아마존 원주민 수아르 족이 백인의 시신을 가져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새 삶의 터전을 찾아 떠나온 이주민 중 한 명인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는 오랜 세월 수아르 족과 함께 아마존의 이곳저곳에서 생활하면서 밀림에서 생존해 나가는 법을 배운 지혜로운 노인이다. 반 수아르족과 같은 그는 새로운 이주민들과 노다지꾼들, 사냥꾼들이 들끓으면서 나날이 황폐해지는 아마존을 가슴아프게 바라본다. 그러던 중 자신이 글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깨닫고, 책을 읽는 즐거움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노인이 즐겨읽는 책은 역사책도 환경에 관한 책도 인문서도 아닌 사랑 이야기 였으니, 다소 희극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딱딱하고 형식적인 내용인데다 자신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세상의 이야기들은 어떤 호기심이나 상상을 불러일으킬 만한 자극제가 되지 못한다(72쪽)고 말하는 노인은 연애 소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건 사랑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입은 사람들의 이야기 일세.'(134쪽) 인간의 이기심을 앞세운 개발과 포획으로 황폐해지는 아마존에서 사랑 이야기에 빠진 노인이 온몸으로 말 하는 것은 인간은 무엇보다 사랑을 갈구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연애 소설 읽는 노인>에는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등장한다. 양키로 대변되는 무지막지한 사냥꾼의 공격을 받고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상처를 입은 숫컷 살쾡이의 목숨을 끊어줄 것을 바라는 암살쾡이는 노인을 숫컷이 은신하고 있는 곳으로 이끌고 간다. 암살쾡이는 무엇보다 고통 속에 죽어가는 숫컷의 목숨을 단번에 끊어주기를 원한 것이다. 노인이 숫컷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고 자리를 떠나자 암살쾡이는 숫컷에게로 다가간다. 노인이 읽었을 무수한 사랑 이야기와 살쾡이의 사랑 이야기가 겹쳐지는 순간이다. 사랑은 인간만이 할 수 있다는 오만은 모든 것이 인간을 위해 설계되고 창조되었다고 믿는 인간의 어리석음의 한 가지다.

 

작가는 이 책을 자본에 의해 살해된 환경 운동가 치코 멘데스에게 바친다고 밝히면서 이 책이 무엇보다 환경에 관한 책이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 이 책은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사랑만이 인간의 독선으로부터 지구를, 세상을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을 구할 수 있다는 작가의 메시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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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4-12-27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년 전에 이 소설을 읽고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가 생각나기도 했고, 결말이 찡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비의딸 2014-12-28 14:04   좋아요 0 | URL
이 책을 읽은 많은 분들이 <노인과 바다>를 떠오른다 하시고, 옮긴이의 해설도 그랬죠. 그런데 전 엉뚱하게 `사랑`에 촛점이 맞더라구요.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1
치누아 아체베 지음, 조규형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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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영국의 침략으로 서서히 무너져가는 나이지리아의 작은 마을 우무오피아를 배경으로 하는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는 남자로서의 '명예'를 가장 중요시 하는 주인공 오콩고가 부족의 전통과 함께 무너져가는 과정을 그렸다.

 

오콩고의 아버지는 음악과 시를 사랑하고 전쟁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가족을 부양하고, 부를 쌓고, 전통을 고수하기 위한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남자다움으로 치부되던 이보족에게 오콩고의 아버지는 유약하고 게으른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를 보고 자란 오콩고는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인 것을 부끄러워했고, 무엇보다 그는 아버지와 다른 사람이 되고자 했다. 이로인해 의식적으로 공격적이고, 권위적인 사람이 된 오콩고는 청년시절에는 마을에서 가장 강한 씨름선수로 이름을 날렸고, 악착같은 노력으로 점차 부를 늘려갔으며, 전쟁시에는 앞장을 서는 등의 노력을 통해 진정한 남자에게만 하사되는 칭호를 받은 명예로운 사람이 되었다. 이처럼 남자다운 명예를 삶의 기준으로 삼은 오콩고는 자신이 나약하다고 여겨질 것을 두려워해 친아들 처럼 소중히 여겼던 소년 이케메푸나를 죽인다. 그러나 이케메푸나의 죽음은 후에 오콩고의 친아들 은워예가 오콩고와 마을의 전통을 떠나는 계기가 된다.

 

한편 오콩고는 여신의 뜻을 거슬러 마을에서 유기한 추방을 당한다. 오콩고가 마을을 떠난동안 우무오피아에는 교회가 세워지고, 영국정부가 들어서서 마을의 기초와 전통을 흔든다. 교회는 없는 사람으로 치부되던 부랑자를 비롯하여 부족에게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풀고, 그들을 개종시키면서 세를 확장했다.  또한 영국여왕을 앞세운 정부는 새로운 법을 만들고 토착민들에게 그를 지킬 것을 강요한다.

7년후 우무오피아로 돌아온 오콩고는 마을사람들이 기독교로 무장한 영국의 침략을 묵인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힘과 권위, 남자다운 명예를 소중히 하는 오콩고에게 그것은 부족이 나약해졌다는 증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개인일뿐인 오콩고가 바꿀 수 있는 것은 그 자신의 운명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섭게 들이치는 새로운 시류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강한 남자 오콩고는 부족의 운명과 함께 산산이 부서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 아체베는 묻고있다. 정말 그 외의 다른 방법은 없었던 것이냐고. 우무오피아 마을에 온 초기의 선교사 브라운 씨 처럼 자신들과 다른 아프리카를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더 나은 방법은 정말 없었던 것이냐고.

 

아체베는 이 소설을 통해 유럽인의 쪽으로도 아프리카인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공정한 시각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는 영국이 침략하기 전의 아프리카가 지상 낙원 이었다라거나, 아프리카 전통의 몰락이 영국 탓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무오피아를 비롯한 나이지리아의 여러 부족이 몰락하게 된 것은 새로운 힘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협력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오콩고나 오비에리카의 입을 통해 여러번 밝히고 있다. 그러나 여러 작은신들의 분노를 피하기 위한 야만적이고 잔혹한 아프리카의 주술적 행위가 문명인이라고 자처하는 백인들이 자신들의 신을 따르지 않으면 지옥불이 기다리고 있다 라고 협박하는 행위와 다른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 물음은 유럽의 문화건 아프리카의 문화건 서로 다른만큼 각각 존중받아야 마땅하지만, 그렇지 못했던 역사적 사건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파이 이야기>를 쓴 캐나다 작가 얀 마텔은 <각하 문학을 읽으십시오>에서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에 대해 '아프리카인과 유럽인의 만남이 불행한 방향으로 흘러간 이유는 어느 한쪽이 열등했기 때문이 아니라 둘 모두가 상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라고 했다. 서양에서 보는 아프리카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그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아체베의 다른 책 <신의 화살>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역시 결혼식이나 장례식, 축제 등의 아프리가 전통문화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허식이나 주술행위가 많다라고 여겨지지만, 이방인의 눈에 보이는 우리의 전통문화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포용하며 존중하는 것, 이것이 세계문학을 읽어야만 하는 근거이며, 아체베의 소설이 널리 읽혀져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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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화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6
치누아 아체베 지음, 이소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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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현대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치누아 아체베의 <신의 화살>은 <모든 것은 산산이 부서지다>와 <더 이상 평안은 없다>에 이은 '아체베의 아프리카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이다.

<신의 화살>은 1920년대 영국의 식민지였던 나이지리아의 작은 마을 우무아로를 무대로 한다. 부족의 정신적 지도자인 우무아로의 대제사장 에제울루는 영국과 기독교라는 새로운 시류 속에 부족과 화합하지 못하고 반목과 분쟁을 거듭하다 결국 파국을 맞는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아체베는 우무아로를 무너뜨린 힘은 신문물과 기독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무아로 내부의 분열이라고 에제울루의 입을 통해 지적한다.

우리는 우리 것도 아닌 땅덩이를 놓고 피를 나눈 우리의 형제 옥페리를 상대로 싸움을 일으켰네. 그런데 자네는 그 문제에 개입했다고 백인을 비난하는군. 두 형제가 싸우면 이방인이 수확을 거두어들인다는 말도 들어보지 못했나?(233쪽)

 

소설의 제목인 '신의 화살'이 뜻하는 것은 우무아로를 비롯한 주변 여섯 마을의 신인 '울루'의 사제 에제울루를 상징한다. 에제울루는 자신을 울루 신의 화살에 걸린 화살로 비유하며,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이 바로 울루 신의 뜻이라고 주장한다. 신이 자신을 선택했다는 권위의식은 사제로 지내는 세월 동안 신의 대리인이 아닌 한 인간의 아집으로 이어진 것이다. 자신이 백인의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쌓은 분노를 부족민들을 향해 터뜨린 것인데, 당장 굶주림 앞에 서게된 부족민들은 에제울루의 사제적 능력을 의심한다. 이처럼 대제사장으로서 에제울루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순간 기독교는 우무아로를 비롯한 이보 부족들에게 자신들을 구원할 새로운 종교로 떠오른다. 에제울루는 동족간의 분열이 침략을 노리는 영국에게 빌미가 된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제사장으로서 부리는 만용이 새로운 종교가 그들의 땅에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될 것은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어쨌든 에제울루가 신의 활대에 걸린 화살이라면 대제사장 에제울루의 몰락 역시 신이 계획한 일인 것이다. 어쩌면 아체베는 뭍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신의 대리인 조차도 사실은 한 사람에 불과하며, 사제가 신을 대신을 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라는 것을 에제울루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것은 아닐까. 에제울루의 몰락이 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오늘날의 일부 종교지도자들의 모습과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오만 역시도 신의 주도하에 이뤄지는 일이라면, 신은 인간에게 겸손을 가르치기 위해 그의 화살을 파멸을 향해 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랬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들의 신은 고집스럽고 야망에 찬 사제에 대항하는 부족민들과 한편이 되었다. 그러니까 개인은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부족민들보다 훌륭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부족민의 의견에 반하는 결정을 절대로 얻어 낼 수 없다는 조상들의 지혜를 확인시켜 주었다.(399쪽)

 

'식민지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인 태도로 아프리카 전통 사회가 서구문화에 동화되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내는 작가로 갈채를 받는 아체베의 <신의 화살>은 아프리카의 낯선 문화와 전통을 다루고 있음에도 읽기에 어렵지 않다. 뿐만아니라 이름 조차도 낯선 이보 부족의 결혼, 농사, 상거래, 구전되어 전해 내려오는 속담이나 아프리카 전통 가요 등의 세시풍속 외에도 집에 찾아온 손님을 접대하는 방법, 부족민들의 회합시에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자세, 마을을 찾아온 낯선이를 대하는 태도 등을 통해 겸손하고 지혜로운 아프리카의 전통을 이해 할 수 있었다. 잘 알지 못하는 아프리카에 대한 거리감 때문에 반갑지 않은 소설이었지만, 다 읽고난 후에는 오히려 낯선 것을 이해했다는 생각으로 충만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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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일기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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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의 작가로서의 회고록이라는 내용면으로도, 겨울에 읽기에도 너무 훌륭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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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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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리엇과 데이비드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정상적이라고 보여지는 기준에 부합하는 젊은이들이다. 그들에게는 꼭 같은 꿈이 있었는데, 아주 넓은 집에서 많은 아이들을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미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헤리엇과 데이비드는 결혼을 했고, 런던 근교에 빅토리아 양식의 거대한 주택을 마련한다. 그리고 그 저택에서 첫째, 둘째, 셋째, 넷째 아이를 낳는다. 잦은 임신과 출산으로 지친 헤리엇의 건강 상태는 열외로 친다면,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그들의 소망은 거의 이루어 진 듯했다. 그러나 문제의 다섯째 아이가 잉태되고, 소설은 그렇게 무르익는다. 정상과 비정상, 문제 없음과 문제 있음으로 양분되면서.

 

다섯번째 아이인 '벤'은 임신기간 동안에도 먼저 태어난 형제들과는 사뭇 다른 아이였다. 벤을 뱃속에 담고 있는 동안 헤리엇은 지나치게 활동적인 태아로 인한 물리적인 고통외에도, 이전 네번의 임신 때는 느끼지 못했던 이물감 때문에 힘들어 한다. 벤은 태아였을 적부터 어머니를 거부했고, 하룻빨리 어둡고 답답한 자궁 속을 벗어나고 싶어하는 듯 했다. 헤리엇 역시 자신의 뱃 속 아이가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정상이 아니라고, 어느 순간에는 '원수'라고 까지 생각했다. 벤은 태생부터 축복받지 못했다.

 

벤은 예쁜 아기가 아니었다. 그의 외모는 거의 유인원에 가까웠으며, 갓 태어난 아이의 눈은 분노와 증오로 빛나는 것 같았다. 데이비드와 헤리엇을 비롯한 네명의 아이들과 그들의 일가 친척들은 벤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소리내서 말하는 일은 서로가 서로에게 삼가했다. 벤의 출생과 성장을 주욱 지켜본 담당의사 역시 벤의 비정상성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다만 조금 다를 뿐이고, 다르다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며, 다름은 존중되어져야 마땅한 것이지 배척되어서는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벤의 '다름'은  기타의 모든 가족들을 힘들게 했고, 헤리엇과 데이비드의 소망인 행복한 가정을 파괴했다. 해마다 헤리엇의 집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와 부활절 파티에 참석하던 일가친척들은 점차로 파티에 참석하길 거부했다. 헤리엇의 세 자녀는 집을 떠나가길 원했고, 벤을 임신한 엄마가 적절히 돌봐주지 못한 넷째 아이 폴은 다루기 힘든 아이가 되어갔다. 이 모든일의 근원에는 정상적이지 못한  '벤'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의 선택이 아닌 태생적 비정상성으로 인해 부모와 가족으로 부터까지 환영받지 못하는 '벤'에 대해 독자로서 동정하고 가족들의 처사에 대해 분노를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작가 레싱은 '벤'에 대한 연민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의 처지를 가엾게 여기기엔 벤의 모습이나 행동은 공포스러울 만큼 기괴하다. 벤이 어느 순간 가족 중 누군가를 헤치지 지는 않을까 초조할 정도다. 이쯤되면 벤은 가족을 떠나는 것이 마땅하다. 가족의 평화를 위해.  벤이 우리하고 아주 달랐기 때문에 데려간거야. (104쪽)

 

이윽고 벤은 요양원으로 보내지고, 가족들은 마치 해방을 맞은 듯 활기를 되찾는다. 그러나 헤리엇은 자신이 낳은 아이를 버렸다는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뿐만 아니라 비정상적인 아이를 낳았다는 자격지심으로 자신이 가족들로 부터 비난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눈에 띄게 안정되어가는 가족들의 평화는 죄책감과 공포로 언제 폭발할 지 모르는 헤리엇으로 인해 보이지 않는 곳에 시한폭탄을 감춘 것처럼 위태롭다. 헤리엇이 벤을 되찾는 대신 가족들의 안정을 꾀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은 너무 쉽다. 정상성이 양육의 기준이 될 수 없고, 다름을 존중하는 사회가 신봉하고 지지하는 가치관으로 판단해 볼 때 헤리엇은 벤을 되돌려야 했다. 그리고 가족들은 흩어진다.

가족들이 뿔뿔히 흩어지는 대신 벤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공존하는 방향을 모색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은 정해진 답이다. 그러나 흩어진 가족도 각자의 삶을 위한 답일 수 있다. 어차피 삶은 각개전투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평범하고 건강한 두 젊은이가 행복한 가정생활을 꿈꾸는 것은 이 소설의 배경인 1960년대나, 21세기인 현재나 마땅히 장려되어야 할 일로 여겨진다. 그러나 1919년 생인 작가 도리스 레싱은 사람들은 가족 생활이 최고라고 세뇌를 당하는 거야. 하지만 그건 과거의 일이지. (39쪽) 라고 말한다. 도대체 그녀는 어떤 가족적 배경을 가졌기에 그토록 '가족'에 대해 냉소적일 수 있었던 것일까.

1차 세계대전 상이용사였던 도리스 레싱의 아버지는 영국을 떠나 아프리카 초원인 짐바브웨에 정착한다. 어린 레싱은 일반적으로 추종되는 주류의 생활을 벗어나 독립적인 자유 속에서 자랐다. 그러한 그녀의 성장배경은 레싱이 평생 어떤 집단에 동조하기를 거부하는 작가로 서게 했다. <다섯째 아이> 역시 이러한 독립적인 사상속에서 탄생된 작품이다. 레싱이 그리고자 했던 것은 기형아를 낳은 부모들의 선택에 대한 도덕적 판단이나 단죄가 아니다. 그녀는 가족에 대한 전통적 가치관에 대해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가족은 정말 사랑인가. 인류 최대의 미덕은 정말 가족애인가.

 

그들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길들여지고 가정적이며 야생과 자유로부터 멀어진 불쌍하기조차 한 모습으로 거기 앉아 있는 두 어른인 자신들을. (103쪽)

 

이 이야기를 통해 레싱은 희생뿐인 모성애라든지, 부모로서의 의무, 가족애 따위가 현대사회에는 적합지 않은 허상이라는 것을 보이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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