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7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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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만을 등지고 있는 조용한 도시 오랑에 페스트가 번진다. 그로 인해 오랑은 프랑스로부터 고립된다. 오랑에 있는 그 누구도 도시 밖으로 나갈 수 없고, 도시 밖에 있는 그 누구도 오랑으로 들어올 수 없다. 만일을 위해 편지조차 금지되며, 도시 밖과 안은 오로지 전보로만 송수신될 뿐이다.

 

취재를 위해 오랑에 잠시 머무르던 기자 랑베르는 사랑하는 애인이 있는 자신의 도시로 돌아가기 위해 오랑으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한다. 그러나 실패로 돌아간 두번의 탈출 시도 후, 마지막 순간에 랑베르는 스스로 탈출을 포기한다. 자신과 상관없는 것으로 여겼던 오랑의 페스트를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나는 늘 이 도시와는 남이고 여러분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해 왔어요. 그러나 이제 볼 대로 다 보고 나니, 내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나도 이곳 사람이라는 것을 알겠어요. 이 사건은 우리들 모두에게 관련된 것입니다. (273쪽)

 

반면 역시 타지역에서 온 것으로 추측되는 타루는 랑베르와 다르게 자신은 오랑과 관계없는 사람이라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현재의 위치에서 페스트에 맞설 궁리를 한다. 왜냐면 그에게 페스트는 한낱 유행병이 아닌 삶에서 만나는 온갖 부조리한 것의 대명사이기 때문이다. 삶의 부조리에 대해 반항하는 것은, 주어진 혹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거부하고 투쟁하는 것으로,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타루는 믿기 때문이다.

서술자이며, 주인공이기도 한 의사 리유 역시 랑베르와 함께 보건대를 조직해 페스트와 맞서 싸우며, 페스트 종식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리유는 타루와 같이 적극적으로 삶에 맞서는 부류의 사람으로, 그에게는 의사로서의 책임감 외에도 주어지는 삶에 순응하지 않겠다는 투지가 있었다.

체념하고서 페스트를 용인한다는 것은 미친 사람이나 눈먼 사람이나 비겁한 사람의 태도일 수밖에 없습니다.(169쪽)

 

한편 오랑의 종교지도자인 파늘루 신부는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유행병이 '신의 뜻' 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재앙 속에서 오히려 신이 바라는 인간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파늘루 신부는 페스트 때문에 생기는 상황을 논리적으로 납득하려 해서는 안되고, 거기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을 배우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291쪽)

 

그러나 파늘루는 페스트가 죄를 모르는 순진한 어린아이라고 해서 봐주는 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는 자신의 설교에 대해 주저하는 빛을 띤다. 어린아이의 죽음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페스트를 '그들의 일'이라고 여겼다면, 어린아이의 죽음으로 인해 비로소 페스트를 파늘루 자신의 일로 느끼게 된 것이다. 그후, 파늘루 신부 역시 목숨을 잃게 되지만 그의 병명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는다. 

카뮈는 파늘루 신부의 죽음이 정확히 신의 뜻이었다고는 그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반대였다는 확신도 주지 않는다. 궁금하다. 파늘루는 마음 속으로부터 자신이 그토록 믿어 의심치 않던 '신의 뜻'을 의심했던 것일까? 그래서 신은 그를 친 것일까? 까뮈가 의도했던 것은 그것이었을까?

 

파늘루의 죽음이 신의 뜻이건 아니건, 유행병이 신의 뜻이건 아니건, 그리하여 인간이 개종되길 신이 원했건 아니건, 까뮈가 <페스트>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내 의지로 정해진 것이 아닌 일에 대한 반항이 있었던 것 같다. 전쟁이나 유행병으로 인해  마치 감옥에 갇힌 것처럼 고립되거나, 혹은 재판정에서 결정되는 범죄자의 처우는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다. 카뮈는 <이방인>에서도 역시 이렇게 말한다. '이 재판은 나의 것입니다. 나는 피고인 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나를 빼고 모든 일이 진행되는 것입니까.'

페스트로 인한 강제적 고립이라는 부당한 현실을 들어 카뮈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반항이었다. 

 

결국 죽는 거면서, 남보다 고통을 더 많이 겪는 셈이지. (280쪽)

그러나 반항하건 아니건 간에 인간은 끝내 죽음으로 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사가 시작되고, 생과 사는 늘 언제나 한결같이 내 뜻이 아니다.  스스로의 바램으로 태어나지 않았듯, 죽음조차도 내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선택하는 죽음은 어떨까.

까뮈는 리유와 타루를 통해 말한다. 부조리한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반항이 아니다. 진정한 반항은 현실에 무릎을 꿇고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페스트로 대변되는 삶의 부조리를 넘어서 이겨내는 것이다.

나는 이 도시와 전염병을 만나기 훨씬 전부터 페스트로 고생한 사람입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나도 이곳의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란 얘기죠. 그러나 세상에는 그런 것을 모르는 사람들도 있고, 그런 상태에서도 좋다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고, 또 그런 것을 알면서 거기서 어떻게든 빠져나가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도 있어요. 나는 항상 빠져나가려고 했어요.(319쪽)

 

끌려가지 않고 최선의 반항으로 끝까지 버티고자 했던 타루는 페스트가 물러가던 그 마지막 순간에 목숨을 잃고, 그를 보는 의사 리유는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실존주의자인 까뮈의 <페스트>를 읽은 나는 자못 허무주의자가 된다.

부당한 현실에 끝까지 이방인으로 남아 반항하고자 했던 까뮈도 47세의 젊은 나이에 느닺없는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자, 삶은 이처럼 부조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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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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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해인사 방장 스님으로 머물던 경허는 한 겨울에 길에 쓰러져있는 여인을 업어다가 기사회생 시킨 후 열흘 가량을 한 방에 머물렀다. 이를 본 경허의 제자 만공은 경허가 방에 여인을 숨겨두고 함께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 해인사 경내로 퍼져나갈까봐 전전긍긍하다가 여인을 그만 돌려보낼 것을 스승에게 종용한다. 이때 만공이 본 여인은 얼굴이 코와 눈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뭉개지고, 정신도 온전치 못한 한센병 환자였다. 작가 최인호는 경허 스님의 이야기로 첫장을 시작하며, '너는 그러할 수 있는가'라는 제목을 달았다.

 

온 몸에서 썩는 냄새를 풍기며, 정신마저도 온전치 못한 거렁뱅이 여인을 업어다가 체온으로 몸을 녹여주고,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빗질해주며 함께 밥을 나눠먹고, 고름이 흘러내리는 몸에 살을 맞대고 한 방에서 머물수 있겠는가. 너는 그러할 수 있겠는가.

이 첫 일화를 읽은 나는 좀 황당했다. 길에서 얼어 죽어가는 사람을 따뜻한 방으로 옮겨 살려준 것 까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정신과 몸이 모두 온전치 못한 여자와 굳이 열흘씩이나 한 방에서 머물 이유가 무엇인가. 더군다나 안팍으로 존경받는 큰 스님의 신분으로.

 

불교도도 아니고, 불교에 특별한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닌 내가 읽기에는 좀 당황스러운 이러한 일화는 경허뿐만 아니라 그의 수법제자라는 수월, 혜월, 만공 스님의 일화에서도 종종 소개된다.  기괴스럽게까지 여겨지는 스님들의 행적에 대해 왜 그래야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냥그냥 책을 읽어나가는 중에 문득 떠오르는 생각 하나는, 그 모든 것이 허울이라는 것이다.

 

겉모습에 혹은 겉으로 드러나보이는 현상에만 미혹된 나는 경허라는 중이 정신과 몸이 온전치 못한 여자와 열흘을 한 방에서 지냈다는 사실에 걸려 그 의미를 읽지 못한 것이다. 큰 스님이라는 사람이 술과 고기를 즐기다가 말년에는 승려로서의 직분마저 팽개쳐 버리고 저잣거리의 중생으로 죽음을 맞았다는 이야기에 취해 정작 경허가 그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은 무애인無碍人이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경허를 거치고 수월, 혜월을 지나 만공의 일화에 등장하는 화두 '고목선枯木禪'에 이르자, 경허가 품에 안았던 것은 문둥병에 걸린 미친여자가 아니라 불쌍한 영혼을 담고있는 한 중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고목선에 담긴 일화는 이러하다. 한 노파가 조그만 암자 토굴에 공부하는 스님을 모셨는데, 수행을 시작한지 20년이 지난 후 스님의 깨닫음의 정도를 가늠하고자 절세의 미인인 자신의 딸에게 스님을 유혹하게 한다. 그러나 스님은 대수롭지않게 여인을 거절하는데, 이를 들은 노파는 대노하여 스님을 쫓아내고 토굴에 불을 질렀다 한다. 이유인즉, 스님이 수행은 철저히 했으면서도 존엄한 인격체로서 사람을 대할 자비심은 익히지 못했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여인을 따뜻하게 대하는 것과 여인에게 빠지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노파는 20년 동안 자신이 부처가 되기를 소원한 선객이 비록 도는 이루었지만 그 도가 메마른 고목처럼 인정없고, 낱낱이 규율이나 따지고 율법이나 헤아리는 죽어 있는 도임을 깨닫고 암자를 태워버린 것이었다.(264쪽)' 

 

가톨릭 신자인 작가 최인호는 경허 스님을 통해 '내 안의 부처'를 강조하는 불교뿐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의 의미는 율법이 아닌 사랑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한편 경허는 조선 말기 국운이 스러져 갈 무렵의 선사로, 꺼져가는 불법의 불씨를 살려낸 우리나라 근대 불교의 선구자다. 그러나 그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율법과 타인의 시선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으로 부터도 자유로운 선각자였다.

 

스스로의 마음의 거름망만 걷어낼 수 있다면 수행의 반은 해낸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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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말하는 광대
베페 그릴로 지음, 임지영 옮김 / 호미하우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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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에서 싸웠다는 것은 꽤 멋진 경험이다. 지든 이기든 시도해보았다는 감각만큼은 시간이 지나도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곁을 스치는 쓰레기 같은 현실을 그냥 쳐다보기만 하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만큼 치욕스러운 삶은 없다. 그 자괴감은 우리 몸 안의 에너지와 영혼을 몽땅 빼앗아 간다. -작가 서문 중

 

지속되는 경기 침체와 불황, 부패한 고위관리와 무능한 정부, 정경유착, 상상을 초월하는 빈부의 격차, 그에 따른 서민들의 생활고, 청년 실업 문제,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 그리하여 이민을 꿈꾸는 사람들...등등. 

이것은 한국 사회의 이야기가 아니다. 밀라노, 로마, 베네치아를 비롯해 관광산업만으로도 전국민이 먹고 사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처럼 보이는 이탈리아의 이야기다. 아니, 아름다운 나라 이탈리아가 이렇게 살기 힘든 나라였어?

 

작가 베페 그릴로는 TV에서 총리를 조롱했다는 이유로 방송에서 퇴출당한 코미디언 이다. 이후는 그는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거리 공연과 강연을 통해 자국의 불합리한 정치상황과 사회, 경제적 문제에 대해 토로한다. 정의 실현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으며 늘 대중과 소통하고, 진실을 통해 변화를 꾀하는 그는 이탈리아에서는 대중으로부터 대통령보다도 더 떠받들어지는 존재라고.

 

여섯개의 장으로 쓰여진 이 에세이들은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것들에 대한 갈망을 주제로 쓰였다. 변화와 기적의 정치를 갈망하라/상식과 도덕을 지키는 기업을 갈망하라/진실을 말하는 언론을 갈망하라/아름다운 지구를 갈망하라/노동자가 당당해지는 현실을 갈망하라/함께 사는 사람다운 미래를 갈망하라

 

신들이 살 것만 같은, 누구나 한번쯤은 여행을 꿈꾸는 이탈리아의 현실은 한국 사회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은 각 장들에 실린 소제목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이탈리아가 우리나라와 별 다를 것 없는 나라였어! '라고 좋아해야 하는 걸까??

 

범죄자들의 천국, 끔찍한 정치사면

우파? 좌파? 모두가 같은 놈들

그들만의 리그, 정경유착의 은밀한 속삭임

유령 미디어, 국영방송사의 실체

현대의 노예들

노동자들의 죽음

가진 자들에 의해서만 움직여지는 현실

우리는 모두 장님이다

 

그런데, 그래서? 진실을 말한 들 무엇이 달라지는데? 진실을 말하고 정의를 원한 사람들이 얻게 된 것은 무엇인데? 도대체 무엇때문에 합리적이지 못한 행동을 해야는 건데? 나의 고민은 깊어만 간다. 과연 침묵과 방관을 통해 현재의 내 삶에만 만족하며 그나마의 것들에 감사해야 하느냐, 이따위것도 기득권이냐며 떨치고 일어나야 하느냐...

글쎄, 그렇다해도 달라지는 것이 많지 않다니까...라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너는 현대판 노예일뿐, 더도 덜도 아니게 된다. 외면하는 진실은 불공평한 세상으로 가는 지름길일 뿐이므로.

자꾸 말하고, 자주 분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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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5-08-26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엇보다도
스스로 삶을 새롭게 지으면서
기존 권력이나 사회 틀에 휘둘리지 않는
참으로 자유로운 숨결이 될 때에
무엇이든 다 바꿀 수 있으리라 느껴요.

이를테면, 노동자가 파업만 하지 말고,
도시를 모두 떠나서
한가위나 설날 명절처럼
연휴도 아닌 때에 100만 명쯤
서울을 떠나서 시골에서 일손도 거들고
품앗이도 하고 즐겁게 놀면서 어울려 지낸다면,
이렇게 한 달만 도시 노동자가 시골내기로
바꾼 삶을 보내려 한다면,
그야말로 정치도 사회도 경제도 바뀌겠지요...

비의딸 2015-08-27 10:48   좋아요 0 | URL
우와.. 쇼킹쇼킹..
100만 명쯤 서울을 떠나 시골에서 한달..
가슴이 벌떡벌떡 하네요..
 
안나 카레니나 세트 - 전3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연진희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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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는 1828, 톨스토이 백작 가문의 4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아홉 살 이전에 양친을 모두 여의고, 친척집을 전전하며 성장했다. 185224세의 나이에 <유년시절>로 데뷔한 톨스토이는 대학을 중퇴하고 크림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타고난 감각적인 기질로 인해 육체적 쾌락을 쫓으며 젊은 시절을 보내던 톨스토이는 186234세에, 18세의 소피야 안드레예브나 베르스와 결혼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불화는 톨스토이의 작품만큼이나 유명한데, 불화의 시작은 톨스토이가 방탕했던 시절의 일기를 아내에게 보여주면서 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톨스토이는 아내에게 자신의 치부까지 다 보여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가장 싫어한 것은 거짓과 기만이었으며, 말하지 않는 것이 바로 거짓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화는 <안나 카레니나>에서 레빈이 결혼을 앞두고 자신의 일기를 키티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재현되며, 수면 위로 드러내는 것만이 진실이며 정의라고 믿었던 톨스토이의 생각은 안나가 자신의 불륜을 감추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소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첫 구절 중 하나라고 알려진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는 이 이야기가 가정의 모습을 소재로 할 것임을 암시한다. 행복해 보이는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평정을 유지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평정을 유지하지 못한다 라는 것이다. 723장(3권)에서는 겉으로는 평정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가정에 대해서 말한다.

 

가정생활에서 무언가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부부간의 완벽한 불화나 애정 어린 화합이 필요하다. 그러나 부부 관계가 불명확하거나 이것도 저것도 아닐 경우에는, 아무것도 실행할 수 없게 된다. 많은 가정이 단지 완전한 불화도 화합도 없다는 이유로 부부 모두에게 지긋지긋한 그 묵은 자리에 수년 동안 머무르곤 한다.’(3, 396)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 가정을 생기 있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관심을 갖고 행동해야하며, 침묵과 방관으로 유지하며 평화 혹은 행복을 가장하는 것보다야 차라리 완벽하게 불화해 해체하는 것이 더 낫다. 바로 이 행동을 위해 안나는 모스크바를 방문하는데, 가정교사와의 불륜이 발각됨으로써 위기에 빠진 오빠의 가정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안나의 오빠인 스티바는 경박하고 즉각적인 만족과 쾌락에 집중하는 인물이다. 방탕하고 무책임하며 대책없는 낙관주의자이기도 한 그는 남자의 바람기는 건강의 증표라고 생각하는데, 가정교사와 바람을 피운 것이 아내에게 발각되자, 잘못을 뉘우치거나 죄책감을 갖기 보다는 들키지만 않으면 아무런 문제 될 것이 없다 라고 생각하며, 이후에도 아내를 속이고 기만하는 행동을 멈추지 않는다. 한편 장녀로 태어나 사려 깊은 진지한 태도가 몸에 밴 스티바의 아내 돌리는 남편의 바람기와 가정생활에 무책임한 태도에 대해 분노를 느낀다. 그러나 그녀는 다섯 아이들과 자립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남편과 아이들에게 헌신하며 결혼생활의 고통을 감내한다.

톨스토이가 말하듯 가정생활에서 무언가를 실행하기 위해서 부부간의 완벽한 불화나 애정 어린 화합이 필요하다면 이들 부부에게는 바로 그것, 완벽한 불화나 애정 어린 화합이 없었다. 그럼으로써 이들은 모두에게 지긋지긋한 그 묵은 자리에 수년 동안 머무르고 있다. 이것이 당시의 관습에 젖은 가장 일반적인 가정의 모습이었다.

 

어린 나이에 장래가 촉망되는 관리 카레닌과 결혼하고 결혼생활에 별다른 불만이 없는 안나는 오빠 스티바와 돌리의 중재를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가 브론스키를 만난다. 그러나 도덕관념이 확실했던 그녀는 자신을 유혹하는 브론스키를 피해 도망치듯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옴으로써 브론스키의 유혹을 물리쳤다고 믿지만, 역으로 마중 나온 남편 카레닌의 귀 모양이 해괴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는다. 그녀는 그때까지 자신을 만족시키던 세계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은 말하지. 그가 신앙심이 두텁고 도덕적이고 정직하고 총명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 사람들은 내가 본 것을 보지 못해. 그들은 그가 지난 8년 동안 내 삶을 얼마나 숨 막히게 했는지, 내 안에 살아 있던 모든 것을 얼마나 억압했는지 몰라. 그들은 몰라. 그가 단 한 번도 나를 사랑이 필요한 살아 있는 여자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걸. (2, 122)

 

이후 브론스키의 구애를 받아들인 안나는 상류사회에 만연한 비밀 연애를 거부하며 브론스키에게 자신의 삶 전체를 건다. 매순간의 삶에 충실한 그녀로서는 남편 외의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는 잘못보다 그를 숨기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더더욱 견딜 수 없었다.

 

실리적 성격의 카레닌은 정의로우나 감정이 부족하고, 경직되어 있다. 그는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한편으로 때때로 감정에 휘둘려 선행을 베풀기도 하는데, 이를테면 고위 관리인 자신을 찾아와 눈물 흘리는 청원자를 보면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곤 했다. 그랬음으로 브론스키의 아이를 낳다가 죽을 지경이 된 안나를 용서하려는 마음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안나가 살아나고 브론스키와 떠나고 나자 아내와의 이혼을 거부한다. 실리적인 카네닌이 볼 때 이혼은 자신에게 이로울 것이 전혀 없었다. 불륜을 저지른 아내가 죄인이지 자신 언제까지고 피해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난 결코 불행해질 수 없어. 하지만 그녀도, 그도 행복해져서는 안 돼.(2, 101)

톨스토이는 카레닌의 이런 태도를 기만적이고 위선적이며, 독재적으로 묘사하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아내에게 배신당한 카레닌의 고집불통인 태도가 나름 이해된다. 감정이 결여되어 있다고는 하나 카레닌 역시도 인간이며, 인간은 때때로 합리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기 때문이다.

브론스키라는 외부적인 요인이 없었다면 쭉 평정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을 카레닌의 가정 또한 기본적으로 부부간의 애정 어린 화합이 결여된 채 사회관습에 충실한 가정 있었다.

 

10개월에 걸쳐 끈질기게 안나를 유혹한 브론스키는 무책임하고 즉각적인 만족을 쫓는다는 점에서는 스티바와 같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술수조차도 마다않는 스티바와 다르게 장교인 브론스키는 언제나 자신의 태도에 대해 당당하며, 거리낌이 없는만큼 타협을 모른다. 안나를 얻기 위해 주변을 의식하지 않는 그는 때때로 안나의 남편 카레닌의 존재마저도 무시하기 일쑤다. 그런 브론스키는 안나가 자신의 딸을 낳고 사경을 헤맬 때, 카레닌이 안나와 자신을 용서하자 수치심으로 자살을 감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들과 남편을 떠난 안나가 자신과 결합하고, 그것으로 인해 그녀가 사교계에서 추방당한 이후, 브론스키는 자신만의 자유를 주장하며 다시 사교계를 들락거린다. 그는 그야말로 남의 아내를 꼬여낸 파렴치한 이였음에도 남자라는 이유로 사회 생할에서 별다른 제약을 받지 않았고, 그 스스로도 남자이기에 자신에게는 사회적 관계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또한 안나는 그모든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뭐든지 내어 줄 수 있지만 나의 남자로서의 독립만은 줄 수 없어. (3, 202)

 

사교계의 일반적인 관행이 그렇듯 불륜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게 요령껏 숨기는 대신 공공연하게 드러냄으로써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된 안나는, 아들인 세료자 마저 버리고 오로지 사랑만을 택했지만 브론스키의 마음을 영원히 붙잡아 둘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괴로워 한다.

뿐만 아니라 카레닌과 이혼하고 브론스키와 결혼한다고 해도 자신이 원하는 행복은 가능하지 않다는 자각에 이른다.

브론스키와 나 사이에 어떤 새로운 감정을 기대할 수 있을까? 행복은 고사하고 그저 괴롭지만 않으면 되는데, 그런 게 가능할까?

불가능해! 우리의 삶은 서로 어긋나게 돌아가고 있어.(3, 447)

 

브론스키의 사랑을 의심하게 된 안나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절망으로 혼란스러워하다 달려드는 열차에 충동적으로 몸을 던져 자살한다. 불륜을 세상으로부터 숨길 줄 몰랐던 그녀는 브론스키의 변심은 자신에 대한 기만이었다. 따라서 그녀는 자신의 죽음으로 브론스키가 고통받기를 바랐고, 한편으로는 남편과 자식, 그리고 사회적 규범을 배신한 자신이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불사를 듯 열정적으로 타올랐던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에는 애정 어린 화합 대신 자신을 채우기 위한 욕망만 그득했다. 그는 내게서 무엇을 찾았을까? 사랑이라기보다는 허영심의 충족이었어.(3, 444) 그리고 그 결말은 파괴적이다.

<안나 카레니나>라는 제목과 달리 소설은 처음부터 안나의 이야기와 상응해 또 다른 주인공 레빈의 이야기가 교차로 진행된다. 레빈은 도덕적인 이상과 절대적인 양심을 숭상하는 인물로 톨스토이의 분신과 같다. 농업과 노동의 신성함을 중요시하는 그는 브론스키가 안나를 만나기 전 추파를 던지던 키티와 결혼했다. 키티는 처음에는 브론스키에게 빠져 레빈의 구애를 물리치지만, 이후 열린 파티에서 브론스키의 마음이 안나에게로 향한 것을 눈치챈다. 이에 마음의 상처를 입고 모스크바를 떠나 요양하던 중 자신이 진정 사랑한 것은 레빈 이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레빈 역시 키티의 거절에 상처를 받고, 한때 죽음을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레빈이 처음부터 키티를 결혼 상대로 사랑했던 것은 아니며,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을 그려두고 거기에 맞는 여인을 찾았을 뿐이다. 그 첫 대상은 돌리였으나, 돌리는 이미 결혼한 여인이었으므로, 돌리의 동생인 키티에게로 관심이 옮겨간 것이다. 아무튼 레빈은 돌리의 중재로 실연한 키티를 다시 만나고, 둘의 사랑을 회복하고 결혼에 이른다.

특별한 개성이 드러나지 않는 키티는 사교계의 총아 브론스키의 사랑이 한순간에 변했음을 알고 병을 앓는다. 그러나 그녀는 브론스키를 사랑 했다기 보다는 어머니를 비롯한 사교계의 분위기에 이끌려 마땅히 브론스키와 결혼 할 것으로 기대했을 뿐이다. 이후 자신이 진실로 사랑하는 것은 레빈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브론스키와의 관계가 틀어지지 않았다면, 의심없이 그와 결혼했을 것이고, 보통의 상류사회의 부부들이 그렇듯 평정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가정을 유지했을 것이다.

키티는 상대에 따라 삶의 가치나 중요도가 달라지는 시대가 원하는 가장 일반적인 여인이었다(브론스키로부터 실연하고 외국의 온천에 요양중일 때 만난 바렌카를 닮고 싶어했던 그녀를 떠올려 보라). 거울처럼 상대를 비추며 순응할 수 있는 키티였기 때문에 정신적인 삶을 구현하며, 가정의 신성함과 자발적 자기 희생, 상호 존중의 의무를 중시하는 레빈과 애정어린 화합의 모습을 보여준다(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야는 남편의 정신적인 삶에 순응하지 않았다. 그녀는 악처로도 유명하지 않은가! 그러나 소피야는 정말 악처였을까?).

 

부부간의 애정 어린 화합도 완벽한 불화도 없이 사회적 관습대로 유지되는 스티바와 돌리, 카레닌과 안나의 가정은 누가 보더라도 행복한 가정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열정과 욕망으로 가득한 브론스키와 안나가 꾸민 가정이 진정한 사랑으로 가득한 모습도 아니다. 육체적 욕망이 우선하는 사랑은 유효기간은 그다지 길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톨스토이가 정답으로 제시한 관심과 사랑과 배려가 가득한 레빈과 키티의 가정은 이상적이고, 완벽해 보이지만 그것 역시 유일한 답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제도만으로는 묶어둘 수는 없는 욕망하는 감정적 동물이기도 하니까.

쉽게 톨스토이의 분신은 레빈으로 이해되지만, 정신적인 레빈과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안나는 둘 다 톨스토이의 현현이다. 두사람 모두 거짓과 기만을 싫어한 같은 부류로 톨스토이는 안나를 통해 욕망을 고백하고, 동물적인 본성과 절대 타협하지 않는 레빈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길을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톨스토이가 바란 구원은 내세가 아니라, 사는 동안 이룰 수 있는선'에 있었다.

한편, 아내와의 불화에도 불구하고 톨스토이는 결혼 후 방탕한 생활을 벗어나 안정을 찾음으로써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의 대작을 쓰게 되었고, 이때 아내 소피야는 톨스토이가 휘갈겨 써놓은 <전쟁과 평화>를 여러번 정서했다. 그러나 그들의 불화는 톨스토이의 말년까지도 계속되었고, 1910년 여든이 넘은 나이에 가출 한 그는 어느 작은 기차역에서 객사했다. 톨스토이 역시 가정에서 별다른 행복을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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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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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금융회사의 신용카드 승인실에서 근무하는 계나는 톱니바퀴의 일부로 자신이 하는 일에서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전쟁과 같은 출퇴근을 반복하다 어느날 회사를 그만두고, 호주 이민길에 오른다. 계나는 태어난 나라를 버리고 이민길에 오른 이유를 '한국이 싫어서' 라거나,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 라고 요약한다. 한국사회에서 자신은 경쟁력이 없는 인간이며, 또한 남들이 가는대로 따라가기 보다는 자꾸만 무리를 이탈하는 가젤과 같은 인간형이기 때문이라고.

 

물론 계나가 부모로 부터 물려받을 만한 재산이 있거나, 명문대를 나왔다거나, 빼어난 미모를 갖춘 것은 아니지만, 한국 사회의 일반적인기준으로 볼 때 여기서 살지못할 만큼 뒤떨어지거나 부적응형의 인간은 아니다. 대기업에 다 떨어지고 아무 데나 넣어 된 회사라고는 하지만 대학 졸업 후 곧바로 취직이 된 운 좋은 케이스이고, 자신을 끔찍히도 좋아해주는 집안 빵빵한 기자 지망생 남자친구도 있었으니 가족이나 친구들이 볼 때, 그녀의 이민은 그저 '외국병'에 지나지 않았을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계나 정도의 여건만 되어도 소원이 없겠다 할 또래는 이미 한국사회에 차고 넘치게 많지 않은가 말이다.

   

계나는 한국 사회에서 불만족스러웠던 자신의 회사생활에 대해 자신이 무슨 일을 왜 하는지도 모르겠고 이 회사는 뭐 하는 회사인지 모르겠고, 온통 혼란스러웠다(19쪽) 라고 회고 한다. 계나가 일했던 신용카드 승인실은 고객의 거래를 승인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곳으로, 종사자들이 일을 통해 개인적 성취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직업인은 꼭 카드 승인실이 아니더라도 일찍이 찰리 채플린이 영화 <모던 타임즈>에서 연기해 보였듯,  거의 대부분이 거대한 톱니 바퀴의 부속품으로 존재한다.

더많은 생산, 더 더 많은 소비, 그리하여 끝없는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직업인이 톱니바퀴의 한부분으로 이 톱니바퀴가 어디에 끼어있고 이 원이 어떻게 굴러가고 이 큰 수레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그런 걸(19쪽) 알면서 성취감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그리고 그것은 호주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그건 결국 국가가 문제가 아닌 그 국가가 표방하는 경제체계의 문제란 이야기다. 다만, 전국민이 경제, 즉 '돈'에만 목표를 두고 고속으로 발전해 온 탓에 한국 사회에서는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한의 여유마저도 없다는 것이 계나가 한국을 떠난 이유라면 이유일까.

 

영화 <매드맥스:분노의 도로>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핵 전쟁으로 황폐화 된 곳에서 물과 기름을 소유하고 인간들을 조종하는 독재자 임모탄 조로 부터 달아나 녹색의 땅을 찾아나선 퓨리오사는 녹색의 땅 마저 이미 황폐했음을 알고, 소금사막을 건너 또다른 낙원을 찾고자 한다. 퓨리오사는 맥스에게 함께 소금사막을 건너가자고 제안하지만 맥스는 이렇게 말한다. 차라리 처음 시작점으로 돌아가자고. 소금사막을 건너봤자 거긴 또 어차피 소금사막일테고, 그러느니 차라리 물이 있고 식물이 자라는 처음 시작점으로 돌아가서 임모탄 조를 몰아내고 다시 시작하자고.

영화는 맥스와 퓨리오사 등이 힘을 합해 임모탄 조를 몰아내고 물과 기름을 차지하고 인민을 해방할 것을 예고하며 막을 내리지만, 글쎄? 실제로 그들이 그곳에 낙원을 만들었을지는 보장을 못하겠다. 새로 시작된 세상에도 어떤이는 분명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더 높이, 더 멀리를 주장할 것이고, 그러다보면 새로운 세상은 또다시 개혁해야 할 만한 세상이 되고 말터이니 말이다.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워서 이기는 게 멋있다는 건 나도 아는데... 그래서, 뭐 어떻게 해? 다른 동료 톰슨가젤들이랑 연대해서 사자랑 맞짱이라도 떠?

 

국경을 넘어,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조금 더 자유스러운 곳, 자기 일만 열심히 하면 그만한 댓가를 받는 것처럼 보이는 곳, 그러니까 말하자면 소유하느냐로 부터 그나마라도 자유가 보장되는 곳으로 넘어간들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곳 또한 이미 서로가 서로를 치는 경쟁사회이고 보면 말이다. 그 속의 정당한 대가라는 것 역시도 또다른 경쟁이며 전쟁일터이니, 그보다는 절을 아예 중들의 입맛에 맞게 고치는 것이 맞는 생각이겠지만, 계나처럼 나도 어쩐지 그쪽으로는 자꾸만 비관적인 생각이 든다. 소금 사막을 건너면 또 소금 사막이 나오고, 또 소금 사막이 나오더라도 차라리 도망치는 편이 덜 절망적이지 않겠느냐 하는 매우 절망적인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니 달아나고 또 달아나되, 더이상 달아날 수 없다면 영화 <성실한 앨리스>의 '수남'이라도 되어  하는 것이 아닐까.

 

무턱대고 욕하진 말아 줘. 내가 태어난 나라라도 싫어할 수는 있는 거잖아. 그게 뭐 그렇게 잘못됐어? ....미국이 싫다는 미국 사람이나 일본이 부끄럽다는 일본 사람한테는 '개념 있다'며 고개 끄덕일 사람 꽤 되지 않나?(11쪽)

 

한편 자본주의니, 경쟁사회니, 그에 따른 인간성 회복이니... 이런 거창한 이유말고 계나의 이민이 여타의 다른 이유없는 그저 단순히 외국병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나는 어쩐지 계나의 탈출(?)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이 다른 자본주의 국가보다 유달리 경쟁이 심한 사회라거나, 유난히 다른 사람의 시선에 신경을 쓰는 문화라는 것은 제쳐두고, 태어난 나라라도 별다른 이유없이 싫을 수 있다는 아주 단순한 이유에서 말이다. 태어남으로써 자연 취득된 국적에 대해 요즘처럼 맹목적으로 애국심만 강조하는 이 때에 자신이 살 나라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매력적이냐 이 말이다. 물론, 그에 따르는 책임도 분명히 자신의 것이다. 가령, 계나가 호주 시민이 되기 위해 한 노력이나, 생래적으로 주어진 시민권이 아닌만큼 본토인들로부터의 차별을 감수해야 한다거나 하는.

어찌되었든 계나의 이민이 '탈출'이 아닌, '선택'이 였더라면 그나마라도 희망이 있는 세상이었겠지 않겠나 생각하는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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