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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너리 오코너 - 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 외 30편 ㅣ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2
플래너리 오코너 지음, 고정아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12월
평점 :
'완벽한 것은 없다는'는 말을 좋아하는 호프웰 부인은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으며, 많은 류의 사람들이 각기 다양한 방법으로 밥 벌이를 하며 살고 있으니만큼 그 무엇도 당연한 것은 없다라고 여긴다. 또한 그녀는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방식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된다라고 믿는 낙관적인 사람이다. 그녀는 오래전 남편과 이혼하고 홀로 농장을 경영하며, 열 살에 총기 사고로 한 쪽 다리를 잃은 서른 두살의 딸과 함께 살고 있다.
철학 박사를 비롯한 기타의 여러 학위를 가진 딸은 시골 농장의 어머니나 주변인물들의 안일한 모습을 보며 삶은 기본적으로 허무하고 무의미하지만 고등교육을 받은 자신만큼은 무의미한 일상이나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현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호프웰 부인이 한쪽 다리를 잃은 자신을 언제까지나 어린아이로 대하며 보호하려는 것에 불만을 품는다. 그녀는 부모가 지어준 이름인 '조이'를 버리고, '헐가'라는 흉칙한 이름으로 개명하는 등의 소극적인 반항을 한다. 조이는 많이 배웠지만 거친 세상을 경험하지 못했고, 어머니를 떠나 자신만의 삶을 살 용기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과 여타의 사람들을 대하는 어머니의 감상적인 태도가 못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와 같이 지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농장에 성경을 팔겠다는 열아홉 살의 청년이 찾아오고, 타인에 대한 친절을 미덕으로 삼는 호프웰 부인은 청년을 거절하지 못하고 점심식사를 대접한다. 호프웰 부인은 그 청년을 순진하고 진실한 좋은 시골 사람으로 여겼다. 타인에 대해 그런식의 감상적인 태도를 보이는 어머니를 경멸하는 조이는, 능청맞게 식사를 하고 앉은 청년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지만, 바로 그날 어머니 몰래 청년과 만날 약속을 한다.
다음날 청년을 다시 만난 조이는 투정하듯 아무런 조건 없는 사랑을 말하는 청년에게서 '진정한 순수함'을 본다. 그녀는 세상과 사람들에 대해 닫았던 마음을 열고, 비틀어진 내면의 근원인 의족을 내보인다. 바로 그 다음 순간, 순수함의 탈을 벗어던진 청년은 조이를 모욕하며 의족을 들고 달아난다.
황급히 달아나는 청년을 멀리서 바라 본 호프웰 부인은 청년이 성경을 팔러 다른 마을로 가고 있다 라고 여기며 이렇게 말한다. '저쪽에 사는 깜둥이들한테 성경을 팔러 갔던 모양이야. 순진하기도 하지. 그래도 우리 모두가 저렇게 순진하다면 세상이 훨씬 좋아질 거야.'(394쪽)
이 책에 실린 플래너리 오코너의 31편의 단편 중 하나인 「좋은 시골 사람들」을 읽고, 한동안 머리가 멍했다. 호프웰 부인이, 딸 조이가 겪은 일을 알고 난 후에도 세상에는 여러종류의 사람이 있으며, 그렇기때문에 그 무엇도 당연한 것은 없고, 그것이 바로 인생이다 라는 말로 청년의 악행을 이해하게 될지 궁금하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실제 상황을 맞딱드리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 만큼이나 다르지 않은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코너의 작품을 읽고나면 등골이 서늘해진다. 불행을 직접 겪지 않는다면 사람은 누구나 얼마든지 너그러울 수 있다. 그러나 오코너는 너그러움이나 낙관적인 태도 역시 이기적인 마음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일깨운다.
「좋은 시골 사람들」처럼 오코너의 단편들은 대체로 비극으로 끝을 맺는데, 이러한 결말은 느닷없고 당혹스러우며, 자못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그 무엇도 당연한 것은 없다는 호프웰 부인의 지론은 자기만족에 빠져 일상을 사는 사람들의 뒤통수를 친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반드시 그럴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추측은 언제고 빗나갈 수 있는 것이다. 「숲의 전망」에 등장하는 자만심 가득한 노인은 자신을 꼭 닮은 아홉살 손녀에게 말한다. '주의하지 않으면 네가 무얼 잃어버릴지 늘 유념하렴.'(456쪽) 자신이 무엇을 잃게될지에 대해 늘 주의를 기울였던 노인은 한순간의 판단 착오로 손녀를 비롯한 모든 것을 잃게 된다.「절름발이가 먼저 올 것이다」에서는 불행한 가족사로 인해 불량소년이 된 소년을 구원하고 싶어하는 이기적인 이타주의자 셰퍼드가 등장한다. 자신을 믿지않으며 도움을 거부하는 소년을 향해 셰퍼드는 '선의는 이기는 법이야.' 라고 하자, 소년은 '틀렸어요. 그런 일은 없어요.'(638쪽) 라고 대답한다. 셰퍼드는 자신을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여겼지만, 정작 그는 자신의 아이를 방치해 죽음에 이르게 한다. 오만한 의지나 이기적인 믿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세상이며, 삶이라는 것이 오코너가 이 단편소설집을 통해 주는 메시지인 것이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플래너리 오코너는 25세에 루푸스 병의 발병으로 고향인 미국 남부지역에서 어머니와 함께 농장에서 지내며 글을 썼다. 교육받은 병약한 젊은이가 농장을 경영하는 어머니에게 반항하는 모습은 어쩌면 오코너 자신의 모습이다. '저는 상상력이 없어요. 재능이 없어요. 저는 창조할 수 없어요. 저한테 있는 건 그런 것들에 대한 열망뿐이에요. 왜 그것도 죽이지 않으셨나요? 어머니, 왜 내 날개를 꺾었나요?'(488쪽, 깊은 오한) 그러나 오코너의 이런 외침은 어머니에 대한 어떤 원망보다는 투병에 따른 심리적 불안이나 건강하지 못한 삶에 대한 불만을 어머니 라는 대상을 두고 쏟아 내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녀가 벗어나고 싶었던 것은 농장이나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를 죽게하고 그녀의 생명 또한 앗아갈 '병'이 아니었을까.
오코너의 인생과 작품을 이해하는 키워드로 그녀가 태어난 미국 남부와 가톨릭, 루프스 병이 꼽히지만, 내가 이해한 그녀는 그 모두것을 떠나 '어머니로 대변되는 죽음의 권위로 부터 해방되고 싶어하는 병약한 오코너 ' 이다. 모두가 그렇듯 그녀 역시 죽고싶지 않았던 것이라고, 그럼에도 죽음 앞에 무릎 꿇을 수 밖에 없는 운명에 대해 순순히 무너지지는 않겠다는 그녀만의 반항이 바로 이 단편들이었다 라고 이해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