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저녁 엠마뉘엘 베르네임 소설
엠마뉴엘 베른하임 지음, 이원희 옮김 / 작가정신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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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프랑수아는 없고, 마리의 저녁 초대는 취소되었다.

그녀를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49쪽)

 

로르는 독신으로서의 마지막 밤을 친구 마리와 보내기로 했지만, 지하철 파업으로 돌연히 약속이 취소된다. 로르와 새삶을 시작할 애인 프랑수아는 세미나에 참석 중이었고, 로르는 급작스러운 외로움을 느낀다. 자신을 온통 쏟아부을 일이 있고, 친구가 있고, 애인이 있지만 홀연히 버려진듯한 '혼자'라는 느낌은 못견딜 쓸쓸함으로 로르를 덮쳐온다. 무엇보다 금요일이었고, 밤이었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 출근과 퇴근의 시계추를 반복하는 현대인들은 주말을 앞둔 금요일 밤이면 많은 유혹을 느끼곤 한다. 정해진 일상으로 부터 조금쯤 벗어나는 자유를 상상하는 것이다. 때때로 유혹의 대상은 뚜렷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자신 스스로가 만들어낸 환상에 이끌린다. 그것은 한번쯤 괘도를 벗어나고픈 충동이기도 하고, 새로운 모험을 갈망하는 인류의 오랜 고질병이기도 할 것이다. 

<금요일 저녁>의 주인공 로르는 독신으로서 보내는 마지막 금요일 밤을 마음껏 누리고 싶은 충동으로 일탈을 감행한다. 마비된 도시에서 우연히 차에 태운 남자와 즉믈적인 사랑에 빠진 로르에게 이성은 없다. 단지 느낌과 감성, 그리고 동물적인 감각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일탈에는 반드시 제 궤도로 돌아오겠다는 다짐이 필요하다. 따라서 로르는 남자의 생각 따위를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저 짐작할 뿐이다. 그녀에게 그는 내일이면 연기처럼 사라질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빨간 스커트로 대변되는  일탈의 밤을 지내고 맞은 아침, 로르는 그녀의 애인 프랑수아에게 둘러댈 말을 생각하며 택시에 오른다. 사람들은 계속 걸어 다닐 것이고, 이제부터 로르도 그들처럼 걸어 다닐 것이다.(128쪽)  그것이 보통 사람의 일상이며, 삶이다.

 

프랑스 작가 베르네임은 이십 년 동안의 작가 생활 동안 소설 다섯 편을 발표했다. 그런데 그 다섯 소설은 각각 백 페이지 정도의 분량을 넘지 않는다. <금요일 저녁> 역시 간결하고 절제된 문체로 씌여졌다. 그 담백함 때문에 하룻밤으로 한정된 로르의 일탈이 더더욱 아슬아슬하다.

<잭나이프>, <커플>, <그의 여자> 등 베르네임의 다른 세 편의 소설에도 <금요일 저녁>과 같은 예기치 못한 상황이 이어지고 주인공은 일탈을 감행한다. 그러나 작가는 그들이 벌이는 탈선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단지 그녀들이 벌이는 충동과 욕망의 순간을 묵묵히 묘사할 뿐이다. 따라서 독자에게는 그에 대해 어떠한 도덕적 판단도 필요치 않다. 다만, 그녀들의 아슬아슬한 욕망의 줄타기가 나의 숨겨진 욕망, 혹은 풀어내지 못한 꿈들을 대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으로 가득해진다. 그러나 별은 제 궤도를 고수할 수 있을 때만이 일탈이 가능하다.

 

백 페이지 남짓한 엠마뉘엘 베르네임의 책 네 권이 우리나라에서 한꺼번에 출간되었다. 도서정가제도 시행된 마당에 책 값이 좀더 저렴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넉넉한 레이아웃과 행간이 베르네임의 간결한 문체를 돋보이게 하는 건 사실이지만, 가난한 독자로서는 같은 값이라면 좀 더 많은 책이  아쉽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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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일기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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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품절


<겨울일기>는 64세의 폴 오스터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적은 기록이다. 그는 과거의 자신을 '당신'으로 지칭하며, 지나온 시간을 회상하는데 그 기록은 시간순이 아니다. 오히려 기억나는 순서라고 보는 것이 맞다. 하나의 줄기를 잡고 시간을 거슬러올라가며 기억나는 데로 적은 자유로운 형식의 글인 것이다. 때문에 이번에(미국에서는 2012년에, 우리나라에서는 2014년 1월) 출간된 책 제목이 '일기'인 것은 너무나도 온당하다.

 

하나의 줄기로 '흉터'라거나, 자신이 살던 '집', 혹은 '어머니' 등을 떠올리는 회상 속에서 오스터는 때로는 열살의 아이로 되돌아가 한여름의 마당에 서 있기도 하고, 어느 순간에는 육신의 쾌감에 몸을 맞기는 청년이 되는가 하면, 다음 장면에서는 개미둑에 쪼그리고 앉아 넋을 놓는 서너살의 꼬마이기도 하고, 바로 그 다음 순간에는 갑작스런 어머니의 죽음에 공황장애를 겪는 장년의 오스터가 되기도 한다.

 

언제 어느때의 장면이건 그 세밀한 기억력에 나는 몹시 놀랐는데, 작가는 꼼꼼한 관찰력뿐만 아니라 치밀한 기억력까지 갖춘 존재인가 보다 싶다. 64세에 열몇 살, 혹은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서너 살 시절의 장면까지를 기억하는 것이 무척 놀라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기억력은 오스터 특유의 세밀한 묘사력에 비한다면야 그다지 놀라운 것도 아니다. 언제 어느때, 어떤 일을 기억하건 꼼꼼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그건 기억이라기 보다는 작가다운 창작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나'를 담고 있는 그릇인 '몸'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라고 늙으며 종래에는 '죽음'에 이른다. 오스터는 이를 '당신에게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일' 이라고 칭하는데, 이때의 '당신'은 오스터 자신을 가르키기도 하지만 책을 읽는 '독자'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때문에 책을 읽으며 나는 자주 나의 어린 시절과 아직 오지 않은 노후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어느 모로 보더라도 인생의 종착역이라고 밖에는 여길 수 없는 회색빛의 겨울로 대변되는 노년의 시기는 대작가 오스터에게도 역시 낯선 일이다. 그 낯섦에 오스터는 다소 당황스러워 하고 있는데, 그 와중에 오스터는 순차적으로 노화하는 과정을 다 겪고 난 뒤 맞는 죽음은 얼마나 평화로운 일인가에 대해 얘기한다. 물론 인간은 언제 어느때고 얼마든지 죽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오늘은 '기적'일 수 밖에 없고, 지금 이순간  죽지 않고 살아있는 모든 인간들은 행운아들이다. 그러나 그런 행운아들에게도 죽음의 순간은 여지 없이 다가올 것이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자신의 삶에 대해 회고해야 한다. 아무것도 아닌 채로, 있었던 적도 없는 것처럼 사라지기 전에.

 

이제 너무 늦기 전에 말해 보라. 그러면 더 이상 할 말이 남지 앟을 때까지 계속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아니면 당신의 이야기는 잠시 밀어 두고 당신이 살아 있음을 기억할 수 있는 첫날부터 오늘까지 이 몸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기분이었는지 살펴보자. 감각적 자료들의 카탈로그랄까. '호흡의 현상학'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되겠다. (p.7)

살아오면서 무수하게 겪는 크고 작은 압박과, 고통과, 슬픔과, 기쁨, 환희, 놀라움, 혹은 무미건조함을 다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가 제아무리 뛰어난 작가일지라도 말이다. 그렇지만 제 몸에 새겨진 시간의 흔적과 제 정신에 쌓이는 감정의 순간들을 한시라도 소홀히 하지 않는 사람만이 진정 자신의 삶을 살았다고 말 할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다.

그러니 매 순간의 '나'를 느끼는 '나'는 마땅히 행복하리라. 비록 내일 당장 죽게 된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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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11-20 0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 예순에도 나이 열에도 나이 서른에도
참말 언제나 오늘은 기적이지 싶어요

비의딸 2014-11-20 11:06   좋아요 0 | URL
참말.. 참말요!
 
목로주점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3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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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졸라가 <목로주점>의 초기 제목으로 염두해 두었다는 '제르베즈 마카르의 소박한 삶'에 걸맞게, 소설 <목로주점>은 세탁부 제르베즈가 꿈꾸었던 이상과, 삶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나 제르베즈가 그의 신산한 삶에서 실제로 이뤄낸 꿈은 아무것도 없었다. 소설의 말미에 제르베즈가 굶어죽었는지, 얼어죽었는지 조차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열여덟 살의 랑티에와 열 네살에 첫 아이를 낳은 제르베즈는 술주정뱅이 아버지로부터 도망을 쳐 파리에서 노동자로서 새 삶을 시작한다. 8년이 지난 후, 두 명의 아이를 둔 제르베즈는 랑티에게 버림을 받는다. 그러나 제르베즈는 절망하지 않고 두 아이를 둔 가장으로써 세탁부일을 열심히 하며 살아가던중, 함석공 쿠포의 끈질긴 구애 끝에 결혼에 이른다. 결혼 초기 그들은 열심히 일한 돈을 저축해 새로 세탁소를 열고 승승장구했으나, 제르베즈의 세탁사업은 오래가지 못했고, 제르베즈에게 기대어 나날이 술꾼이 되어가던 쿠포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고 정신병원에서 끔찍한 죽음을 맞는다. 한편 제르베즈 역시 점점 알코올 중독자의 길을 걷게 되는데...

 

참으로 이상했던 것은 별 탈 없이 일하면서 언제나 배불리 빵을 먹고, 지친 몸을 누일 깨끗한 방 한 칸을 지니고, 아이들을 잘 키우고, 남자한테 맞지않고 살면서 마지막에 자신의 침대에서 죽기를(1권, p.221) 소망했던 소박한 제르베즈가 잘못한 것이 도대체 무엇이었나 하는 것이였다.

제르베즈와 쿠포는 결혼 초기 열심히 일했다. 그들은 세탁부와 함석공으로 일하면서 모은 돈으로 결혼식 때 얻은 빚을 빠른 시간안에 청산했고, 적지않은 돈을 저축하기도 했다. 또 제르베즈 부부는 조용하고 화목하게 살아가는 성실한 부부로 알려지면서 동네사람들에게 칭송을 받기도 하면서, 마침내 제르베즈는 자신의 세탁소를 차리기에 이른다. 그러나 제르베즈는 결코 거만하거나 자만심에 가득찬 사람은 아니었다. 세탁소가 승승장구하며 잘 나갈 때도 그녀는 고객들의 세탁물에 성실히 임했으며, 지극히 다정하고 선한 마음으로 이웃을 생각했다. 가게를 차림으로써 이미 모든 꿈이 이루어졌다라고 생각한 제르베즈는 한마디로 매사에 좋은게 좋은거다라는 식으로 생각했다. 또 제르베즈는  돈벌이를 등한시하고 친구들과 술을 마시느라 술값을 탕진하는 남편 쿠포에게도 늘 너그러웠는데, 부부가 가정의 평화를 깨뜨리지 않고 살아가려면 남자의 숨통을 너무 조여서는 안 된다(1권, p.222)고 생각했다. 그녀에게는 무엇보다 평화와 안정이 중요했던 것이다. 그런 제르베즈에게 잘못이 있었다면 그녀는 이웃들에게 생색내기를 좋아했다. 실제로는 20수밖에 없으면서도 40수를 가진 척했다.(1권, 320쪽)

 

반면, 쿠포의 작은누나와 매형인 로리외 부부는 젊었을 때 현명하게 살지 않으면 노년에는 굶어 죽기 딱 알맞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자는 척 창문을 담요로 막아 빛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해두고, 서둘러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곤 했다.(1권, 320쪽) 그들은 어떻게든 가난하게 보이려했고, 이웃에게 온정을 베푸는 일 따위는 상상도 하지 않았으며, 늘 관대한 제르베즈를 험담했다.

이 세상에 알려진 공식대로라면 성실하면서도 이웃에게 후했던 제르베즈에게 영광이 돌아가야 했을테지만, 냉혹한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거절을 할 줄 모르는 제르베즈에게 들러붙어 그녀의 등골을 빨아들이는 전남편 랑티에와 쿠포에 의해 제르베즈의 세탁소는 점점 내리막길을 걷게 되고, 제르베즈는 공동아파트의 계단 뒷골방에서 처절한 죽음을 맞게 된다.

 

에밀졸라는 1876년 <목로주점> 출판 당시, 삶의 기쁨에 취하기보다 술에 취해 돈과 인생을 낭비하는 노동자들의 실태를 보여주며, 그들이 얼마나 경멸스럽고 사회에 위험 존재인지를 새삼 확인(2권, 옮긴이 해설 중)하게 해 노동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치부를 들여다보는 고통을, 부르주아들에게는 삶을 낭비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경멸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루공 마카르 총서의 일곱번째 작품인 <목로주점>을 통해, 알코올이 마카르 가의 유전적 계통과 환경적 요인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알코올중독자인 아버지 마카르의 유전자를 받고 태어난 제르베즈는 결코 알코올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쿠포의 아버지 역시 술에 취해 지붕에서 떨어져 죽었다)

대를 이은 알코올 문제는 유전적인 결함이라기 보다는 환경적인 요인에서 비롯되는 문제로 생각된다. 술에 자주 취하는 부모를 보고자란 아이는 술에 쉽게 노출될 것이고, 알코올에 더 취약할 것이기 때문이다. 제르베즈의 둘째 아들인 '에티엔'은 <제르미날>에서 술에 취하지 않기 위해 극도의 노력을 하지 않았던가. 

 

한편, 2권에서는 쿠포와 제르베즈의 유일한 혈육인 '나나'의 성장배경이 몹시 흥미롭게 다뤄지고 있는데, 이는 루공 마카르 총서의 아홉번 째 작품 <나나>로 이어진다. <제르미날>의 주인공이었던 에티엔 랑티에나, 총서의 열네번 째 이야기인 <작품>의 주인공 클로드 랑티에에 관한 이야기가 거의 없었던 데에 비해(그나마 클로드는 1권에서 그림 수집가인 노신사에 의해 플라상 중학교로 가게 되면서 <목로주점>에서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어린 '나나'의 이야기가 충실하게 전달되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나나>를 기대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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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천명관 지음 / 창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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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관의 이야기는 재밌다. 모처럼의 휴일에 배를 깔고 엎드려 보는 코미디처럼,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어이없는 몸짓과 말들은 정말 재밌다. <나의 삼촌 브루스 리>가 그랬고, <고령화 가족>이 그랬듯이 단편집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역시도 입가에 웃음이 떠날 새가 없을만큼 웃기다. 그리고 결정적인 한 방. 이 씨발 것들아, 제발 아가리 닥치고 내 말 좀 들어봐!(120쪽)

아무도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때문에 고래고래 악을 써야만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우스꽝스럽지만 웃음으로만 마무리 지을 수 없는 블랙코미디가 소설집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다.

 

외롭고, 아프고, 쓸쓸하고, 거기에 불안하기 까지한 실패투성이 단편집의 주인공들을 보며, 혹여라도 그 속에서 내 모습을 보게 될까봐 조마조마하기도 하다. 그러나 결국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려니 여기며, 그냥 웃고만다. 그렇지만 나는 잘 알고있다. 코미디는 나와는 관계없는 일로 여기고 싶은 일이 사실은 나와 깊숙한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고있기에 우습다는 것을. 마찬가지로 소설 속의 실패한 주인공들의 어처구니 없는 모습이 사실은 현실의 내 삶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있기 때문에 우스운 것이며, 웃고난 후엔 그 진한 애잔함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그러면 또 어떤가, 삶이란 어차피 그런 것을. 천명관은 이렇게 위로한다.

얘야, 잊지마라. 사는 건 누구나 다 매한가지란다. 그러니 딱히 억울해할 일도 없고, 유난떨 일도 없단다(183쪽).

 

그러나 나는 좀 억울하다. 인생이 정말 백반 좀 먹고 빠구리 좀 치다 가면 그뿐인 것(110쪽) 이란 것이 좀 억울하다. 더 잘 살기 위한 몸부림들이, 더 높이 날고싶어하는 그 날개짓들이 다 소용없는 우스운 짓거리일 뿐인거라면 우리는 왜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려야 할까. 뒤도 돌아보고, 옆도 좀 보고, 때때로 주저앉아 풀도 뜯고 했다면 좀 덜 억울할텐데.

 

소설집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엔 소위 '잘나가는 사람'이 없다. 그들은 모두 실패했거나, 실패할 것이 자명해 보이는 인물들이다. 실패 외에 달리 다른 길은 없는, 그야말로 막다른 길에 다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러나 천명관은 이들을 심판하지 않는다. 사업에 실패했건, 남의 남자를 꿰찼건, 하나뿐인 아이가 자살하고 싶을만큼 방치했건, 또는 살인을 저지른 사람일지라도 그를 심판하거나 단두대에 올리는 대신 그가 사람을 죽이게 된 그간이 사연을 상상하게 한다. 어째서, 왜, 그들은 그토록 불안한 삶을 살아야 할까?

 

나는 누군가를 죽여본 적도, 어딘가에 불을 내 본 적도, 또는 남의 차를 타고 도망을 쳐 본적도, 끝없는 불면에 시달리거나 정신과 약에 의지해 삶을 지탱해 본 적도 없지만, 더이상 아무데도 갈 데가 없는 그들이 꼭 '나'인것만 같아서 웃음 끝에 쓸쓸함을 지울 수 없다. 왜냐하면 나 또한 그들처럼 인생의 아마추어이니까.

그녀는 아마도 언제나 속으로 울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울고 싶어도 차마 울 수 없는 인생의 아마추어들이 또 얼마나 많을까?(152쪽)

 

역시 천명관, 하고 하나마나한 감상을 남기게 되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그에게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일어난 것처럼 지어내는 재주가 있고, 나에게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마치 경험한 것처럼 느끼는 재주가 있으니.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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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미날 1 (반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1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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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배경은 바야흐로 1866년 무렵으로, 경제불황이 극심한 시기다. 기계공이었던 에티엔은 술주정으로 인한 가벼운 폭력으로 철도회사에서 쫓겨난 뒤, 일을 찾아 '돈으로 이루어진 산'이라는 의미의 '몽수' 탄광지대로 들어선다. 에티엔은 라 보뢰 탄광에서 탄차운반부로 일하게 되고, 600미터 땅 아래에서 탄광노동자로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탄광은 몹시 열악한 환경으로, 두더지 굴과 같은 막장에서는 몸을 바로 펼수도,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실 수도 없다. 또한 제대로 된 보호시설도 장비도 없이 석탄을 캐고, 운반하는 광부들은 힘겨운 일에 대한 정당한 보수를 받지못해 늘 굶주림에 허덕이며 한세기 전 부터 대대로 바위를 뚫어왔다.

에티엔 역시 고된노동으로 인해 기계와 같이 변해가며 석탄을 캐는 일상의 중압감에 짓눌리지만, 문득 그러한 노동자의 부당한 삶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된다. 그는 무지했지만 글을 읽고 쓸 줄 알았으므로 공평하지 못한 삶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해 책을 읽고 생각하면서 지적으로 깨어난다. 뿐만아니라 그는 자신이 알게된 것을 노동자들에게 교육하기에 이른다.

 

주어진 운명에 순종하며 '삶이란 그런 것'이라는 체념을 해왔던 탄광노동자들은 에티엔을 통해 부르주아들의 착취를 깨닫고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댓가를 주장하며 반항과 투쟁을 배워나가는데, 이는 주변 탄광까지 모두가 궐기하는 탄광노동자 전면파업으로 확대된다.

두달간 이어진 파업으로 인해 노동자들은 극심한 굶주림으로 아사 직전에까지 이르렀음에도 사람답게 살 권리를 포기하지 않고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할 것을 다짐하지만, 동원된 군인들의 발포로 결국 파업을 풀고,  다시 탄광으로 내려간다. 두달 간의 파업으로 굶어 죽었거나, 총에 맞아 죽은 이들은 죽었기에 땅 아래에 묻혔고, 산 자들은 살기 위해 다시 땅 아래로 내려가게 된 것이다. 언뜻 이런 상황은 이들의 파업이 실패로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파업은 탄광노동자들의 존재와 실상을 세상에 알렸고, 노동에 합당한 몫을 주장하는 노동자들은 언제고 부르주아들의 안락한 삶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경각심을 일깨웠다는 의미에서 두달은 무의미하지 않은 것이다. '파종의 달, 싹트는 달'이라는 의미의 '제르미날'은, 어둡고 음습한 땅 속으로 되돌아갔지만, 그 속에서 새로운 기운을 싹틔우는 노동자들의 미래를 암시하는 것이다.

 

반면 한 세기 전부터 운좋게 채굴권을 쥐면서 탄광의 주주로서 대대로 부르주아가 된 이들은 생존을 위해 투쟁해 본 일이 없기때문에 어떤면에서는 살기위해 아귀같이 덤벼드는 노동자들에 비해 더 순진무구한 모습이다. 바로 그레구아르 일가 같은 경우겠는데, 그들은 늦둥이 외동딸을 위해 쓰는 돈 외에는 사치나 향락을 즐길 줄 몰랐고, 자신들은 그저 조용하고 정직하게 자신들의 삶을 살아갈 뿐이며, 가난한 이들을 위한 적선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으로 자신들이 쥔 '부'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것을 다 갖은 이가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미미한 아량에 불과할 뿐, 자신들이 누리는 안락함이나 경제적 '부'에 관해서는 일말의 의문도 품지 않는다. 아무런 노력없이 자신들이 대대로 물려받은 부가 그들에게는 너무도 정당한 권리였고, 부의 분배를 원하는 자들은 그들에게 강도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순종과 체념만이 자신들의 운명이라고 믿었던 노동자들이나 대대로 물려받는 '부'가 정당한 자신들의 것이라고 믿는 부르주아들이나 결국에는 교육이 부족했던 것이 아닐까. 교양과 세련된 매너를 몸에 익힌 부르주아들이지만, 정작 인간으로서 품어야 할 의문이나, 그에 대한 해답에는 무지한 것이다. 아니, 거머쥔 '부'를 놓지않으려고 일부러 무지했던 것일 수도 있겠다.

 

한편 에티엔은 지적으로 성숙해질 수록 무지하고 어수룩하며 천박한 노동자들과 자신을 구별하고 싶어했다. 그는 노동자들에게 연민의 마음을 갖고, 그들의 처지를 바꾸기 위해 노력할 수록 자신이 노동자들의 우두머리이며, 세상의 중심이라는 자만심 역시 커져 갔다. 그런만큼 노동자들의 무지가 더 천박하게 여겨졌고, 그들이 깨어나기에는 너무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에 절망하며, 자신은 그들과 다르다고 생각한 것이다. 에티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르주아의 근성을 닮아가고 있었던 것인데, 나는 에티엔을 보면서 타고난 노동자도 타고난 부르주아도 있을 수 없으며, 어쩌면 인간들은 모두 '자신만'은 부르주아가 되고싶어하는 이기적인 동물이 아닌가 싶다.

노동자 입장에서는 부르주아들의 행태가 부당하고 정의롭지 못한 일로 여기는 것이 당연하지만, 될 수만 있다면 누구나 부르주아가 되어 아무런 노력없이 물려받은 부를 정당한 자기 몫이라고 주장하기 쉬운 종자가 바로 인간이 아닌가 하는 비참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여기 프랑스 노동자들은 보물을 캐내서는 이기주의와 나태함 속에 틀어박힌 채 혼자서만 잘먹고 잘살려 하고 있어. 평소에는 부자들에게 반기를 들고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것 같아도, 막상 자신에게 뜻하지 않은 재물이 생기면 그걸 가난한 이들과 나눌 수 있는 용기가 없다는 말이지. 당신네들이 자기만의 재물을 소유하거나, 부르주아를 향한 반감이 단지 그들 대신 부르주아가 되려는 욕심에서 비롯된 거라면, 당신들은 절대 행복해질 자격이 없는 거야. -2권, 177쪽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노동자들의 가난을 끊고 공평한 분배가 이루어지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인물로 에티엔 외에도 라스뇌르와 수바린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변혁을 이루기위한 방법에서는 서로 차이가 있었는데,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바쿠닌을 신봉하며 새로운 세상을 위해서는 먼저 모든 걸 부숴야 한다고 생각하는 수바린은 국가나 정부, 사유재산, 종교 따위들이 존재하지 않을때,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고 말한다.

에티엔은 자본가와 부르주아의 횡포를 무너뜨리고 노동자들이 주인이 되며, 계급이 사라지고 민중이 국가를 장악했을 때에야 비로소 새로운 세상을 약속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온건한 라스뇌르는 혁명과 같은 과격한 방식보다는 기회가 생길때마다 회사가 해 줄 수있는 개선을 요구하면서 점차로 세상을 바꾸어나가는 인내가 필요하다라고 주장한다. 폭력을 동반한 혁명보다는 은근하면서도 끈기있는 변혁을 꿈꾼다는 점에서 나는 라스뇌르의 주장에 공감했지만, 피를 뿌린 혁명이 없었다면 세상은 절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큰틀에서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을 뿐더러, 평등과 박애를 실천하면서 모두가 행복해지는 세상은 인간이 이루어내기에는 도통 부자연스러운 그런 세상이라는 믿음은 더 팽배해졌다. 끊임없는 진보를 통해 무지와 상스러움으로부터는 이만큼 벗어났지만, 거대자본에 잠식되어 돈을 쫒는 천박함에 대해서라면 오히려 모두가 한통속이 되어 돌아가는 것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아닌가.

 

에밀 졸라가 총 20권의 루공과 마카르 가문의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한 루공마카르 총서를 썼다는 것 역시 처음 알았다. 에밀 졸라는 루공마카르 총서를 통해 유전적인 면과 사회학적인 면이 한 가문에 어떻게 이어지며, 개인에게는 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제르미날>은 루공마카르 총서의 열세번째 작품이다.

루공마카르 총서를 모두 읽어보고 싶은 욕심은 크지만 번역되어 있는 책이 그다지 많지는 않다. 그렇지만 이미 잘 아려져 있는 <목로주점>이나 <나나>, <여인들의 행복백화점>역시 이 총서의 일부분이라는 것이 무척 반갑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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