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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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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미군이 사이판에서 일본군과 대치하던 여름, 미국 본토에서는 유행병 '폴리오'가 번지고 있었다. 폴리오는 바이러스에 의한 전염성 질환으로, 감염되면 죽거나 치료되더라도 팔다리가 뒤틀려 마비 되는 심각한 후유증을 남기는 질병이다. 일명 소아마비 병인 폴리오는 아이들에게서 많이 발생하지만, 당시에는 전 연령층에서 발병하곤 했다.

필립 로스의 이전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네메시스>의 배경인 뉴어크에도 어느덧 폴리오가 무서운 속도로 번지고 있었고, 아이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죽거나 소아마비 증상을 보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폴리오에 대한 치료약이나 백신이 존재하지 않았고, 전염원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었다. 그렇기때문에 주민들 사이에서는 병에 대한 공포가 극심했고, 그런만큼 전염에 대한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사람들은 바깥활동을 자제하고, 이웃을 경계하며, 병을 옮겼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누군가를 몹시 증오하며 히스테리에 사로 잡히기도 했다.

 

체육 교사인 버키 캔터는 지역 놀이터의 감독관을 겸하고 있다. 그는 형편없는 시력 탓에 참전하지는 못했지만, 탄탄한 육체와 강인한 정신력 등 운동선수로서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는 스물 세살의 청년이다. 캔터는 자신을 낳다 죽은 엄마와 횡령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아버지 대신 외조부모에게서 성장했다. 그는 할아버지로 부터 무엇보다 '책임감'을 남자가 갖춰야할 제일 덕목으로 배웠고, 그를 굳게 믿었다. 그런 그에게 조국이 참전한 전쟁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것은 수치로 여겨졌다. 그렇기때문에 캔터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놀이터를 돌보는 일에 근육질의 몸과 운동선수의 용맹으로 전력투구하면서 그나마 남자다운 책임을 완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가르친 것을 가르치고 싶었다. 강인함과 결단력, 신체적으로 용감하고 신체적으로 건강해지는 것, 남들에게 휘둘리는 일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 것.(34쪽)

 

캔터는 놀이터 감독관과 체육교사의 역할을 충실히 해냄으로써 아이들과 부모들에게 어느덧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캔터의 놀이터에도 어김없이 폴리오는 찾아오고, 많은 아이들이 병에 스러진다. 캔터는 폴리오가 번지게 된 것에 대한 책임이 놀이터 감독이었던 자신에게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이 폴리오의 매개자가 되어 병을 퍼뜨린 것은 아닌지에 대한 책임을 자책한다. 또한 그는 유대인으로서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갖는데, 불운한 자신의 태생이나, 전쟁터인 유럽과 태평양에서의 죽음들, 그리고 폴리오로 스러지는 이들의 불행을 용인 또는 조장하는 신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여긴다.

왜 하느님이 앨런 마이클스 부모의 기도에는 응답하지 않았을까? 그분들도 틀림없이 기도를 했을 텐데. 허비 스타인마크의 부모도 틀림없이 기도를 했을 텐데. 그 사람들 다 좋은 사람들이야. 선량한 유대인들이야. 왜 하느님이 그분들을 위해서는 개입하지 않았을까? 왜 하느님이 그분들의 자식은 구하지 않았을까? (173쪽)

 

윌리엄 폴 영의 소설 <오두막>의 주인공 맥은 신실한 기독교 신자다. 그러나 딸이 유괴되고 살해되자 믿음을 상실하고 하느님을 거부한다. 거대한 슬픔에 휩싸여 살아가던 맥은 딸이 살해된 오두막에서 하느님을 비롯한 삼위일체를 만나고, '용서란 자신을 지배하는 것으로 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오두막>은 고통으로 가득찬 세상에 신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것을 묻는데, <네메시스>의 캔터 역시 같은 질문을 한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불합리한 일을 신은 어째서 모두 용인하는가.

그렇지만 두 책의 결론은 조금 다르다. <오두막>의 맥은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 믿음을 회복하면서 자신과 화해한다. 그러나 캔터는 불행과 고통을 두고만 보는 하느님을 원망하며, 사랑하는 여인과의 행복을 거부함으로써 자신을 불행 속에 가두고자 한다. 

남자다운 강인함과 책임이라는 율법으로 자신을 옭아매던 캔터에게 어머니를 죽임으로써 태어난 자신의 존재는 전쟁이나 폴리오 이전부터 이미 부정한 것이었다. 이러한 무의식은 과도한 책임감과 끝없는 죄책감으로 변질되어 캔터의 전생애를 지배했으며, 자신은 행복해서는 안되는 존재라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할아버지는 캔터에게 두려움을 이겨내라고 가르쳤지만, 정작 캔터를 지배했던 것은 죄책감이었던 것이다.  

 

캔터는 상처로 얼룩진 자신만의 오두막에서 죄책감과 원망으로 똘똘 뭉쳐 살아가는 것으로 자신을 만든 신에 대해 복수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복수의 대상은 자신이였다는 것을 캔터는 알지 못했다.

"나는 평생 이런 존재로 살 거다. 나는 다시는 기쁨을 알지 못할 거다.(267쪽)"

네메시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율법의 여신으로, 교만한 인간에 대한 신의 보복을 의미하는데, 네메시스가 보복의 여신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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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 2
장미셸 게나시아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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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사는데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 순응하거나, 반항거나.

그러나 세상을 사는 이 두가지 방법은 한사람의 일생동안 절대불변의 것은 아니며, 선택 당시 지나는 시기 혹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이상을 꿈꾸며 방항과 일탈을 일삼던 젊은이는 어느덧 흐르는 세월의 뒤안길에서 그저 살아있음에 감사할 뿐인 순응주의자로 탈바꿈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바로 그렇게 세상을 산 남자들의 이야기이며, 우리 모두의 삶에 관한 이야기다.

 

때는 양차 세계대전으로 무너져버린 세계에 대한 재건과 정비로 몸살을 앓던 시기를 거쳐 소련과 미국이 주도한 이념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소비지향적인 삶이 우위로 서기 시작한 1959년이다. 그 무렵 민주주의를 표방한 자본주의 세계의 청년들은 역사 속의 사건들과는 무관하게 현재에 집중할 수 있는 가벼운 향락을 쫓곤 했다. 그들의 관심은 이성이나, 축구, 광적인 록 음악에 있었으며, 정치에는 무관심했다. 반항이나 일탈은 단순히 머리 모양을 흐트러뜨리거나 거칠어보이는 장신구, 담배나 술을 비롯한 약물 따위로 표현되었을뿐 큰 그림에서는 체제, 관습, 문화, 사회적 신념 따위에 순응했다. 무엇보다 현실이 중요했으므로 과거는 무의미했고, 미래에 대해서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런가하면, 전쟁의 포화 속에 참전하거나 휩쓸렸던 기성세대들 역시 정치에 무관심하기를 내심 원했는데 그들은 무엇보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여기도록 세뇌했다. 그러한 시류에 동화되지 못한 사람들은 미쳐 돌아가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편 이 소설의 배경인 프랑스에서는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원하는 알제리와의 전쟁이 한창이었다. 전쟁은 불의를 징벌해야 한다는 신념에 빠진 많은 젊은이들을 또다시 전쟁터로 불러 모았고, 모든 전쟁이 그러하듯 무고한 이들의 목숨을 담보로 했으며, 그들의 죽음은 영웅적이지 않았다. 무엇으로 이름하듯 전쟁터에서의 죽음은 '개죽음'이라는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전쟁을 원하고 조장하는 이들은 정작 뒤로 물러나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도록 획책하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정말 쓸모 있는 일은 책을 읽는 것 밖에 없었다."(1권, 62쪽)

화자이며 주인공인 미셸은 중학생으로, 책읽기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한편, 어른들의 카페에서 즐기는 테이블 풋볼과 록 음악에 빠져있다. 그외의 학교 공부나 또래 친구 사귀기 따위는 미셸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이민자이며 프롤레탈리아 계급에 속하는 가문의 아들인 아버지와 부르주아의 딸인 엄마 사이에 만연한 부당함을 일찍부터 느껴왔던 미셸은 나이보다 조숙했던 만큼 시니컬한 어른의 세계를 벌써부터 흉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미셸이 자주 드나드는 카페 '발토'에서 출입이 금지된 문 넘어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데, 그곳이 바로 '구제불능 낙천주의자'라는 이름의 체스 클럽이다.

'낙관주의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농담 한마디로 자신이 속해있던 사회에서 축출된 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의 주인공 루드빅의 말에서 '구제불능 낙천주의자'라는 이름을 따왔다고 작가 게나시아는 한 인터뷰에서 밝혔다. 소설 <농담>은 사회주의 건설에 낙관적인 전망을 하고 있던 당시 체코 사회에 대한 농담 한마디로 인생이 온통 뒤틀려 버린 남자의 이야기다. 게나시아는 이념이나 신념 때문이 아닌 목숨을 구하기 위해 망명을 택한 이들의 삶을 설명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이름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리라.

 

나는 내 진영을 선택한 게 아니야. 그냥 내 진영 안에서 태어난 거지. (1권, 18쪽) 

클럽에 드나드는 남자들은 소련과 동구유럽, 그리스에서 망명온 이들로 본국에서는 의사, 외교관, 전쟁 영웅, 유명배우, 석유회사 간부를 비롯한 상류계급의 사람들이였다. 그러나 목숨을 건 망명 후에는 본국에서의 전적을 인정받지 못한 덕분으로 택시 기사, 야간 경비원 등의 일을 하며 밑바닥 삶을 꾸려가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무엇보다 가난했고, 자신의 목숨을 앗아가려 한 조국에 가족을 버리고 왔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클럽에는 이들 망명자들 외에도 사르트르와 커셀이 있었는데, 사르트르와 커셀은 정식 회원은 아니였지만, 가난한 망명자들의 경제적 후원자이며 든든한 구심점이 되었다.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이 태어날 곳을 미리 지정할 수는 없다. 그저 태어날 뿐이고, 태어난 그곳은 신념과 사상의 조국이 될 뿐이다. 그러나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의 그들은 주어진 진영을 버리고 '살기'를 택한 것이다. 그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며, '삶'이 곳 '승리'이기 때문이다.

 

망명자도 아니고 더구나 어리기까지한 미셸이 거친 인생을 살아온 망명자들의 클럽에 정식 회원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남자들의 과거와 미셸의 현재가 적절히 섞이는데, 정작 망명자이면서도 망명자 클럽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사샤의 비밀이 이 소설의 백미다. 오랜 세월에 걸쳐 조국의 충실한 일꾼이였으며, 그것의 올바름을 믿었던 사샤는 그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줄곧 자신을 죽이기로 한다. 아무도 자신이 태어날 진영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지만, 그곳으로부터의 탈주를 꿈꿀 수는 있다. 그것이 망명이든, 자살이든.

생산수단과 생산물을 공동으로 소유함으로써 평등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공산주의는 그 이념만으로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지만, 실현 가능성은 없는 것으로 역사 속에서 판명되었다.  소설은 공산주의를 지지했던 샤르트르의 장례식으로 시작해서, 공산주의의 실현 가능성을 의심하지 않았으나, 그것이 아름다운 이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을 망가뜨림으로써 속죄하며 죽어간 공산주의자이며 이상주의자이고, 망명자들의 세계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공산주의를 낙관했던 진정한 낙천주의자였으며, 운명에 대한 반항아였던 사샤의 장례식으로 끝난다.

 

세상을 사는 방법엔 순응과 반항 두가지가 있고, 한 사람의 삶에서 이 방법은 줄곧 하나만 선택될 수도, 두가지 모두 선택될 수도 있다. 선택은 순차적이지 않으며, 선택자의 시기나 상황에 따라 순응에서 반항으로, 혹은 반항에서 순응으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변절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아무도, 그 누구도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전부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연은 없어. 오늘 우리가 만나는 것은 예정되어 있었어." (2권, 229쪽)

한 개인의 삶을 짜올리는데에 있어 그 사람의 의지와 자력은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될까. 길을 걸으면서도 책 읽기를 멈추지않는 미셸은 역시 길을 걸으면서 책을 읽는 여자와 부딪혀 사랑에 빠진다. 까미유는 별자리 운세를 믿었는데, 모든 것은 이미 별에 새겨진 채로 예정되어 있고, 인간은 그를 충실히 따르는 수 밖에 다른 방법은 없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인생에 있어 반항은 어떤식으로든 무의미하고, 인간은 그저 운명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라는 주장인데, 의외로 까미유가 잠자리에서 머리맡에 두는 책은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다. 망명자들의 클럽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망명자이고, 한편으로는 미셸의 정신적 지주이며 연애 상담자가 되어준 사샤는 이런 까미유의 이중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녀가 꿈꾸는 것은 시가 아니라 반항이고 탈주요. ... 나중에 가면 여자들이 변할 거요. 아이들과 남편을 원하고, 집을 원하고, 바다로 떠나는 바캉스와 가전제품을 원할 날이 온다는 말이오. 바로 그런 것이 그녀들 가슴속의 시와 반항을 죽이는 것이지." (2권, 283쪽)

 

이념이나 사상에 관계없이 모든 인간이 반항이나 탈주를 꾀한다면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 까미유의 말처럼 운명은 이미 별자리에 새겨있어 어떻게도 바꿀수 없다는 것을 아는 인간들의 유전자에 새겨진 기호 같은 것이  반항 아닐까.

 

장미셸 게나시아를 모르기에 별 기대 없이 읽은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은 참으로 매력적인 소설이다. 나 역시 제사에 사용된 무명씨의 글처럼 똑똑한 비관주의자이기보다는 실수 연발의 낙천주의자이고 싶다. 진보라는 측면에서는 반항과 함께 낙천주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이 소설을 통해 깨닫는다. 실현 불가능할 지라도 인간은 이상을 향해 나아가야 하며, 시대가 이상주의자들 혹은 낙관주의자들을 주저앉히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듯, 이에 대한 반항과 탈주 역시 계속되어야 한다. 비록 세월과 함께 순응주의자로 묻혀갈지라도 한때나마 방항하는 시절들이 모여 세상의 진보를 이뤄낸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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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친구들 1
줄리언 반스 지음, 한유주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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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목 <아서와 조지>를  <용감한 친구들>로 번역한 이 책은 내가 읽은 줄리언 반스의 첫 소설이다. 영국 최고의 문학상인 맨부커 상을 수상하고, 반즈의 작품 중 걸작이라 불리며  많은 매체의 서평에서 호평을 얻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이전부터 읽고 싶었지만 왠일인지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언젠가는 작정하고 읽어볼 요량으로 책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여타의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나로서는 몰입하기 쉽지않았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경우, 책의 크기나 두께가 한 손에 들고 읽기 힘든 것도 몰입을 방해하는 한 요인이었는데, 다행히 <용감한 친구들>은 두 권으로 나뉜 양장본이다.

어린 소년이었던 아서가 할머니의 시신을 발견하는 최초의 기억으로 부터 시작되는 <용감한 친구들>은 이래저래 처음부터 흥미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책은 어린 아서의 이야기에서 어린 조지의 이야기로, 사무변호사가 된 조지에서 홈즈로 성공한 추리 소설가 아서로 교차되는데, 시기와 상관없이 늘 현재진행형으로 묘사되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1권이 끝나갈 때쯤까지도 평행선을 달리기 때문에 의아했다. 도대체 아서와 조지는 언제쯤 만나게 되는거지..?

 

첫번째 아내가 죽고난 후, 아픈 아내 모르게 다른 여자를 사랑했다는 죄책감과 늘 순종적이던 아내가 숨겨진 정부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리던 아서는 그에게 배송되는 수많은 우편물 사이에서 조지 에들지의 억울한 사정을 발견한다. 그후 조지와의 만남에서 첫 눈에 조지가 기소된 사건의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안' 아서는 그의 무죄를 밝히기 위해 전력투구하며 무기력으로 부터 벗어난다. "전 당신이 무죄라고 생각하거나 믿는게 아닙니다. 전 당신이 무죄라는 것을 압니다."(2권, 31쪽)

조지가 무죄라는 것을 확신하는 아서는 그 자신이 홈즈가 되어 조지의 결백을 증명하고, 숨겼던 여자와의 사랑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해 결혼하는 등 '조지 사건'을 통해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2권까지 다 읽고나서 드는 의문은 이 책의 제목을 <용감한 친구들>로 번역한 이유는 뭐지...? 설마 명예를 존중하면서도 자신의 직관만을 끔찍히도 믿는 아서의 권위적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태도를 '용감'이라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겠지.

 

셜록 홈즈의 작가 아서 코난 도일이 실제로 1907년 가축 도살혐의를 받고 복역한 조지 에들지의 무죄를 증명했던 일을 줄거리로 삼은 <용감한 친구들>은 아서와 조지의 어린시절로 부터 시작해 아서의 죽음으로 끝이 날 때까지 어떠한 반전이나 극적인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뿐만아니라 과학적 사실을 근거로 하는 의사이며 추리 소설의 대가가 심령학에 빠져드는 과정은 지루하기까지 하다. 본 것과 본 것들로 인해 축적된 '지', 그리고 그를 통해 구성하는 자기만의 인식의 틀을 동원한 초감각을 중요시하는 아서가 심령학에 빠져드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심령술을 과학적인 현상으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에 이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이러한 이유로 아서가 홈즈의 작가이며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해 반스의 상상력이 더해진 작품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 소설에서 나는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그나마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동요하지 않는 조용한 조지의 삶 때문이었다. 파르시 출신임에도 영국국교회 목사가 된 아버지를 둔 조지는 결과적으로 부침 많은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질적으로 조용한 조지는 신산한 삶의 역경에 동요하지 않는다.

반면 '보는'것 혹은 '보이는 것'에 중요성을 두는 아서가 명예를 위해 자신을 억누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해 보인다. 때문에 아서는 옳은 행동을 하기 위해 거짓말도 불사한다. 바르게 행동하기 위해 잘못된 행동을 하기도 한다는 것인데, 이를테면 병든 아내가 상처받지 않도록 하기위해 아내를 속이는 잘못된 행동을 저지르는 것이다. 아서의 이와같은 태도는 결과적으로 아내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자신의 명예에 흠집을 내고 싶지않은 이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타인의 시선이나 이에 따르는 명성보다도 자신의 흥미나 관심사, 하고싶은 일, 자신이 세워둔 삶의 기준 따위가 너무도 분명해 외부의 상황이나 그에 따르는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삶을 완성해 내는 조지에게 거짓말은 한낱 거짓말일 뿐이다. 그는 명성이나 명예에 압도되지 않는 사람이다. 이 책에서 누군가를 '용감했다'라고 표현한다면, 삶에서 만나는 각각의 장면을 대하는 조지의 확고한 태도에 대한 찬사이여야하지 않을까. 

 

반스는 조지가 정말 무죄인지에 대한 의혹을 완전히 거두지 않는 것으로 책을 마무리한다. 반전이라면 반전일 수 있겠는데, 아서의 첫번째 아내가 죽기 전 딸에게 한 말의 전부를 아서는 결코 알 수 없었듯이, 조지의 아버지가 딸에게 남긴 조지에 대한 의문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음으로써 독자에게 추측의 여지를 남긴다. 독자는 과연 무엇을 보는가? 무엇을 보았는가? 무엇을 볼 것인가?(2권, 301쪽) 진실이 무엇이건 인간은 결국 보고싶은 것 만을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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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장강명/ 민음사

 

출판사 소개글에 의하면 이렇다. 사회 비판적 문제에서 SF까지 아우르는 다양한 소재, 흡인력 있는 스토리 전개, 날렵하고 군더더기 없는 문장. 일본 대중 문학의 기수 오쿠다 히데오에 비견되며 한국 문학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 있는 작가 장강명의 소설 어쩌구 저쩌구 블라블라.. 다 필요없고!

헐... 내가 이 책을 읽고 싶은 이유는 단 하나다. 제목이... 제목이...

너무 맘에 든다는 거. ㅡ_ㅡ;

 

 

 

 

 

나오미와 가나코/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해용 옮김/ 예담

 

오랫만에 오쿠다 히데오. 쉽지만 가볍지만은 않은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들. <방해자>, <꿈의 도시>, <남쪽으로 튀어>는 정말 좋아하는 작품이지만, <최악>은 정말 최악이었다. 가장 최근에 읽은 <침묵의 거리에서>는  미야베 미유키의 <솔로몬의 위증>이 살짝 오버랩되면서 오쿠다 히데오 특유의 경쾌한 감각을 느낄 수 없었다.

남편을 살해하고 암매장하는 두 친구 이야기라는 이번 이야기는 어쩐지 기리노 나쓰오의 <아웃>이 떠오르기도 한다. 어쨌든 이런풍의 소설은 일찍 찾아온 무더위로 무기력해지는 요즈음 읽기에 딱 좋은 소설인 것만은 확실하다.

 

 

 

 

트렁크/ 김려령/ 창비

 

트렁크 라는 제목을 보고 대충 두 권의 소설이 떠올랐다. 오에 겐자부로의 <익사>와, 백가흠의 <조대리의 트렁크>. 오에의 소설 <익사>에 등장했던 붉은 트렁크는 아버지의 죽음을 타당화해줄 비밀 대신 텅 비어있었고, 백가흠의 트렁크에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감각의 고발이 불쑥 튀어나왔드랬다.

어떤 것이 들어있든 닫혀진, 그리고 이제 막 열리려는 트렁크 안은 궁금하다. <완득이>의 작가 김려령의 <트렁크>에 들어있는 그것은 무엇일까? 가방을 열자마자 튀어나올 그것은 고통일까? 뚜껑을 열고도 한참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무감각일까..?  

 

 

 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문학동네

 

"필립 로스의 마지막 선물"

마지막이라는 말은 얼마나 서글픈가. 마지막 기회, 마지막 인사, 깨어질 가능성이 거의 없는 마지막 약속... <네메시스>는 필립 로스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정말 깨어질 가능성 없는 마지막 약속이며 마지막 선물일까? 나이가 얼마이든, 건강상태가 어떻든 작가는 마지막으로 쓰러질 그때까지도 작품을 써야하는 건 아닐까..? 이런 약속은 좀 깨어지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필립 로스의 마지막 선물을 풀어보고 싶다.

음, 메르스로 한참 공포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이때에 뉴어크에도 유행병이 번지고 있다.

 

 

 

 

 

 

맘브루/R.H.모레노두란 지음/송병선옮김/문학동네

 

낯선 콜롬비아 소설. 그러나 낯설지 않은 이야기.

1950년 한국전쟁에 파병되었던 콜롬비아 군인인 아버지 비나스코의 죽음에 얽힌 사실을 밝혀내는 아들 비나스코.

한국이든, 베트남이든, 이라크든 모든 전쟁에는 참전 용사가 있고, 참전에 따른 국가적 이익은 반드시 개인의 불행을 기반으로 한다. 아버지 비나스코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 파병된 한국전쟁에서 장렬히 전사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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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2015 제39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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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 같았고 가장 깊은 암부에는  소실점이 있을 것만 같았다. 사라지는 지점이라니, 지금의 자신이 가장 원하는 자리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미온은 구멍에 손을 넣었다. 아무런 느낌이 없다. 진실의 입 같은 것이 손을 덥석 무는 정도의 스릴을 기대했으나 구멍 너머는 그저 캔버스 너머의 거리와 동일한 공간일 뿐이다. (94쪽, 관통)

 

생후 9개월 때 15층 엘리베이터에서 추락사한 엄마를 둔 하이는 건물 45층짜리 아파트의 외벽을 기어오르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7쪽, 여기 말고 저기, 그래 어쩌면 거기), 돈이 없어 낙태수술 대신 결혼을 택하고, 이유식비가 없어 꾸준히 모유만 먹이는 아기 엄마 미온 역시  길거리 전시회 중이던 그래피티 안으로  사라진다(75쪽, 관통). 그런가 하면 사람들은 어느 순간 느닺없이 덩굴식물로 변하는데(211쪽, 덩굴손증후군의 내력), 그 역시 실제의 삶이 온통 전쟁터같았던 사람이 가장 마지막에 택하는 사라짐과 같은 것이었다. 소설집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의 주인공들은 사라지기거나, 모습이 변하기 전 끊임없이 물었을 것이다. '어디까지 가야할 까요? 제가 어디까지 가면 될까요.'(270쪽, 어디까지를 묻다) 라고. 그리고 그들은 어느새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어느 곳이라도 좋다! 어느 곳이라도! 그것이 이 세상 밖이기만 하다면! -보들레르'(74쪽, 관통의 서문).

 

어쩌면 인간은 누구나 '그것이 나만은 아니길' 바란다. 주변에서 흔히 당하는 불행한 사건, 이를테면 일자리를 잃고 농성 천막에 나앉게 되는 일이 나만은 피해가길 바라거나, 온몸이 삭아버리는 비(145쪽, 식우蝕雨)가 나와 내 가족만을 피해가기를 바라거나, 아이를 때리는 몰상식한 부모이지 않을 것을 바라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그런가 하면 이기와 욕망으로 덧칠되어 밑바닥까지 내려간 인간, 그러니까 농성 천막장을 피해 줄곧 땅만 보고 걷는다거나, 차창 밖으로 쏟아지는 '식우蝕雨'를 맞고있는 친구를 못본척 하기위해 안고있는 애견을 괜히 한번 쓰다듬어 본다거나하는 그런 무심한 인간으로 보여지기 또한 원하지 않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그런 바램조차도 이기나 욕심 이상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았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본인의 불편과 무고와 고통을 기꺼이 감당하며 그래도 아직은 살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남일에 발벗고 나서는 오지라퍼(103쪽, 이창裏窓)라도 되어야 하는 것일까?

 

8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는 구병모의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에는 섬뜩한 오컬트적인 이야기들이다. 도무지 현실에서 일어날 법 하지 않지만, 사실은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란 구병모가 그린 그로테스크한 세계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팔뚝엔 오소소한 소름이 돋는다. 나만은 그런 세상에서도 그다지 불행하지 않거나, 혹은 그만큼 불온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어디로 가야할 지를 끝없이 물으며 돌고 돌 뿐인 주인공들과 다르지 않다. 누구나 다른 사람들보다 나아보이는 삶을 꿈꾸지만 도토리 키재기, 거기서 거기일 뿐이다.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의 단편들이 공포스러운 것은 바로 그래서이다. 누구나 그것이 나만은 아니길 바라지만, 그것은 누구나의 삶이다. 또한 그래서 구병모의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이 매력적이기도 하다.

 

루초 폰타나의 작품을 보며 오지라퍼보다는 사라짐을 꿈꾼다. 어쩐지 커팅 자국 넘어서는 '관통'의 주인공 미온이 본 다른 세상이 있을 것도 같다. 그러나 사라짐을 꿈꾸는 자 또한 나만은 아닐것이니...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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