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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드 모파상 - 비곗덩어리 외 6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9
기 드 모파상 지음, 최정수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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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드 모파상의 장편소설 <벨아미>에서 아름다운 남자라는 의미의 벨아미라는 별명을 가진 주인공 뒤아르는 매력적인 외모를 이용해 사교계에서 여자들을 꼬여내고 버리기를 반복하며 돈과 출세를 쫓는다. 벨아미는 지적인 인간의 고결한 정신은 커녕, 출세 외의 다른 신념은 갖지 못한 남자로, 돈과 권력과 방탕을 쫓던 19세기 프랑스 상류사회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그런 인물인 벨아미가 온갖 부정에 대한 죄값을 치르지 않고 오히려 승승장구해 나가는 결말은 나를 당황스럽게 했다. 악인은 반드시 벌을 받고, 선한 사람이 결국에는 승리하거나 성공하리라는 톨스토이식의 교훈적인 내용을 나는 내심 기대했었던가 보다. 마치 현실에서 매번 그런 기대를 버리지 않듯이.
 
모파상은 <벨아미>에서 개인적 감상이나 선과 악에 따른 권선징악을 보여주려했던 것이 아니라, 19세기 당시 프랑스 상류계층의 추악한 모습과 권력 남용의 사회상을 그대로 표현하고자 했다라고 했다. 모파상의 그러한 생각은 현대문학에서 출판한 세계문학 단편선에 실린 63편의 단편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모파상의 소설은 답을 보여주기 위한 안데르센 동화식의 계몽문학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야기를 펼쳐 놓고, 그에 따르는 여러가지 것들에 대해 독자 스스로 생각해 볼 여지를 주는 사색문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모파상의 단편들 한편 한편이 모두 각각의 풍경화처럼 보여진다. 산과 들이 있고, 바다가 있고 하얀 구름이 떠있는, 그리고 간혹 그곳에 인간들의 모습이 있는 그런 풍경화가 떠오르는 것이다. 그 속에서 인간은 서로 기만하고 배신하며, 때로는 용기가 없어 놓쳐버린 기회에 대해 후회하고 체념한다. 또 때로는 외부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 정신적 작용으로 스스로 만들어내는 공포 따위에 질식해 가는 것이다. 모파상이 단편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바로 그런것이 아니였을지. 또한 그것이 삶을 살아가는데 지혜의 디딤돌이 되어주지 않을지.
 
인생이란 참 기묘하고 변화무쌍하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 사람을 파멸시키기도 하고 구원하기도 하니 말이다! -508쪽
'전원비화'라는 제목의 단편에는 시골 마을에 나란히 이웃한 두 집이 등장한다. 두 집에는 각각 아이가 넷씩 있고, 그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여덟아이를 키우기 위해 서로 열심히 도와 일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날 한쪽 집에 15개월 된 막내 아이를 입양하겠다는 부자가 나타난다. 부자는 아이를 입양하는 댓가로 매달 적지않은 생활비를 제공할 것이며, 입양된 아이는 자신들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는 제안을 하지만 가난한 부부는 아이를 팔지 않겠다고 단호히 거절한다.
거절당한 부자는 이웃한 다른집에 똑같은 제안을 하고, 두번째 부부는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함께 밭을 갈며 네집 내집 없이 함께 아이를 키우던 두 집은 그 일로 사이가 벌어지고, 아이의 입양을 거절했던 부부는 자신들은 돈에 아이를 팔지 않았다며 당당해하는만큼 아이를 입양시키고 대신 경제적 여유를 택한 이웃을 비난한다.
세월이 흘러 처음 입양을 제의받았던 막내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입양되었던 이웃집 아이가 훌륭하게 변한 모습으로 옛부모를 찾아오고, 이를 본 처음 입양을 거절했던 집의 아이는 제 부모를 원망한다. "이런 시골뜨기 노인네들!"
그후로 아이를 팔지않았던 그부모는 그 아이를 다시는 볼 수 없었다나.
 
가난을 이유로 아이를 부자집으로 입양보낸 부부는 생활은 넉넉해졌을 망정 양심의 가책으로 서로가 서로를 원망하는 불행한 가정이되고, 입양된 아이 역시 부자집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며 비뚤어지지만, 자신들의 아이와 신념을 지켰던 가난한 부부의 아이는 오히려 훌륭하게 성장해 부모에게 효도할 것이라는 뻔한 기대를 했던 나는 부자집으로 자기를 보내지 않았다고 부모를 원망하며 떠나가는 이야기의 결말을 보고는 머리를 한대 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인생은 얼마나 뻔하지 않은지. 매번 기대하는 선의 승리는 얼마나 뻔하게 뒤집어지는지. 또한 '선'이라고 생각한 일이 정말 '선한 것'이 맞는 것인지에까지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입양되지 못한 가난한 집의 아이가 나였더라도 아마 자신을 보내지 않은 부모에게 감사하기는 커녕 오히려 원망하기가 쉬웠을 것 같다. 그것이 비정한 인생의 진실이며, 이기적인 인간의 추악한 본성이 아닐까. 모파상은 그를 포장하지 않고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자, 이것이 바로 너야!'
 
모파상의 단편선을 읽으며 어떤 아포리즘과 같은 함축적인 지혜를, 혹은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당위의 교훈 같은 것을 기대했다면 이 단편선은 재미없다. 재미도 없을뿐더러 때때로 어이도 없다. 아마도 그러해야만 한다는 '당위'에 묶인 평상시의 사고방식때문에 그러할 것인데, 반대로 여러번 다르게 곱씹어 생각할 수 있는 여운을 남기는 이야기들을 음미한다면 이 이야기들은 정말로 흥미롭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 수 있는 깊이가 있는 것이다. 인생이란 얼마나 너그럽지 못한 것인지, 너그럽지 못한 인생과 맞서기 위해 인간은 또 얼마나 약삭빨라야 하는지 말이다.
인간 드라마에는 사실 권고되어 마땅한 결론은 없다. 그저 현상이 있고, 끝도없는 막연한 진행이있고, 그에 따른 각자들의 생각과 실행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인생은 언제나 ing..., 설령 내가 없더라도 말이다.
 
인간이 자랑하는 이성과 도덕은 모래성처럼 무너지기 쉽다. 또한 인간의 속물근성은 귀족이건 부르주아건 시골사람이건 다르지 않고, 때문에 인간은 마땅히 인간이기 위해 끝없이 노력해야만 한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며,  인생은 한낱 바람과 같은 것이라고 하지만 모파상의 단편들을 읽으며 인생이 짧지만은 않다는 것, 또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지 못하기에 인생을 지루해야 할 틈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며, 살아가면서 하는 어떤 다짐도 성급한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툭툭 끊어지는 단편의 특성상 한 편의 이야기가 끝나면 다음편의 이야기로 넘어가기까지 산만한 몰입이 필요했다. 때문에 이 단편집은 오래도록 읽어야 제맛을 느낄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한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생선초밥을 먹을때 다른 종류의 생선을 먹기 위해서는 입안에 남아있는 뒷맛을 정리할 필요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동안 여러번 읽었던 '비곗덩어리'와 '목걸이' 외에 이 많은 모파상의 단편을 한꺼번에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몹시 즐거웠으며, 이를 오래도록 소장하며 반복해 읽을 수 있다는 것이 더더욱 기쁘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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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역사상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린 작품이라는데, 나는 아직도 읽지 않은 책이다. 프랑스 혁명 당시 파리와 런던을 오가며 기록한 책이라니 조지 오웰의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이 생각난다. 오웰은 파리와 런던에서 식당 종업원 등을 비롯한 밑바닥 삶을 직접 경험하고 그 경험담을 적었드랬다. 오웰의 경험담이 개인적인 것이였다면, 디킨스가 그린 프랑스 혁명 당시의 파리와 런던은  시대적 배경도 배경이려니만큼 더 방대할 것으로 기대된다.(음 내가 지금 레미제라블과 헛갈리고 있나?)
디킨스는 <두 도시 이야기>를 통해 민중의 분노가 혁명으로 점점이 커져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는데, 세상이 발전할 수록 혁명은 그만큼 더 불가능해지지 않을까, 근거는 없지만 그런 생각을 해본다.

 

 

 

내가 이 책을 정말 읽고 싶은 것일까. 무의미한 에로틱함에 대하여.. 라니, 좀 흥미가 떨어지지만 어쨌든 밀란 쿤데라니까 챙겨보려는 욕심 외의 다른 호기심은 없다. 의미가 없기로는 '삶'만 할까. 무엇에선가 의미를 찾고자 하는 것은 사실 그 무엇에도 의미가 없음을 알고있기 때문이 아닌가.
음, 관념적이라는 평을 보고나니 더더욱 망설여진다. 그렇지만!!! 쿤데라니까.

 

 

 

 

 

 

제목도 표지도 다 맘에 안든다. 사실은 코엘료 작품이라는 것도 마음에 안들지만 바로 이 문장 때문에 이 책을 선택한다.
'나는 아무런 미래가 없는 성적 관계가 아닌, 진정한 사랑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이란 없다고 믿는 나는 오히려 아무런 미래가 없는 성적 관계에 대해 듣고 싶다. 의미가 없기로는 다 마찬가지니까.
권태를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는 소설이라는 출판사 소개다. 그건 좀 동감하는 편이네. 권태를 이겨내는 데는 역시 뭐니뭐니해도 새로운 사랑이 제일이지. 

 

 

일년의 반이 지나도록 불운했다. 불운했다, 그러니 이제부턴 좀 행운이 따라줬으면 하는 심정으로 지난 7개월을 잊고싶다.  지난 7개월을 통해 나는 인생이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삶에 어떤 의미를 둔다는 것은 참으로 피곤한 일이라는 것도 덩달아 알아버렸다.

세상 다 산 것처럼 시큰둥 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매일매일이 소풍인듯 그렇게 들떠있을 필요도 없다는 것을 새삼 안 꼴이라고 할까.

다행이라면 그래도 조금씩 옛 페이스를 되찾고 있다는 것... 알라딘 신간평가단이 있어 오늘도 조금은 힘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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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4-08-02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 두도시 이야기는 얘기가 많이 언급되기에 읽었는 데 반도 못 읽고 지쳐버렸어요 아 이 나약한 독서 실력 하하

도대체 지난 7개월 동안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는 모르지만 꽤나 인생에 괴로운 일이 있으셨나봐요 불운이라고 표현할 정도니 말이에요
비의 딸님 글처럼 좋은 일 생긴다고 그게 영원한 것은 아니니 너무 신나있을 필요도, 괴로운 일이 생긴다고 그것 역시 영원한 것이 아니니 그렇게 심히 괴로워 할 것도 아니라고 봐요
그렇다고 무색무취한 삶을 살 자는 게 아니라 석존이 말한 중도라고 할까요?
너무 즐거운 것에 너무 괴로운 것에 한 쪽에 치우치지 말고 균형감을 가지고 살자는 게 제 사상이에요 ^^
지난 시간을 보면 그렇게 기뻐할 것도 그렇게 슬퍼할 일도 없구나 그런 생각을 요즘 많이 하거든요
물론 괴로운 일이 생기면 그 순간에는 참 힘들어요 담배 한대 피고싶은 데 몇 백원이 모자르거나, 어머니 뭐 하나 맛난 거 사드리고 싶은 데 돈이 없거나...
그럴 때 만델라 선생님의 격언을 떠 올려요
희망만이 아무 것도 없을 때 내가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무기다
그렇다고 그냥 잘 되겠지라는 무책임의 낙관주의가 아닌 나를 그 방향 쪽으로 내가 꿈꾸는 저 방향으로 밀어 붙이겠다는 전투적 낙관주의라고 할까요 ㅎ
폭염에 뇌가 과부하가 걸린 듯 싶어요 ㅎㅎ
이렇게 진지 빠는 댓글을 달다니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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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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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한 남자의 일대기로,  김만수로 불리웠던 한 남자가 지나온 오십 몇년간의 삶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당연히 김만수일 것인데, 회고의 형식을 띠고있는 이 남자의 일대기에서 단 한번도 김만수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 다는 것이 몹시 흥미롭다.
김만수의 조부로 부터 시작되는 회고는 김만수의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형, 누나들, 동생들을 지나 같은 반 친구, 동창, 동기, 동료, 동네사람, 아내, 그리고 김만수의 수양아들인 조카에로까지 이어지만, 그중 단 한번도 김만수가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회고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김만수의 이야기이되, 주변사람들에게 보여지고 느껴진 김만수의 일대기가 되겠다.
 
'나는...' 으로 시작되는 매번의 회고마다, 이번에는 '김만수인가..?' 하고 궁금했던 나는 이 책에서는 결코 김만수가 그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보여지는 김만수가 아닌, 존재 자체로서의 김만수, 즉 김만수라고 불리웠던 사내가 아닌 김만수도 뭣도 아닌 그저 한 사람, 한 영혼 그 자체로서의 생각과 고백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에 약간의 실망감이 들었다.  보여지는 것이 전부는 아니며, 보여지는 나와 실제의 나 사이의 괴리는 참으로 크더라는 것이 내 경험이니까.
어쨌든 주변사람들의 회고에서 보여지는 김만수는 절대 투명인간일 수 없다는 결론이다. 왜냐하면 그는 언제나 항상 주변사람들을 돌보았고, 언제나 항상 자기를 희생했으며, 주변사람을 돌보기 위한 자기희생에 최선까지 다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불평하지 않았고, 마치 그것이 자신이 이 땅에 온 사명인냥 행동하는 김만수라니, 나로서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이다. 아마도 그는 자기희생을 위해 창조된 인물인듯 보여졌다. 이렇듯 완벽한 이타주의자라니, 그런사람은 절대 투명인간일 수 없지않나? 모두가 필요로하는 모두에게 필요한 사람인데 어떻게 없는 사람으로 치부될 수 있을까.
 
성석제의 이번 이야기는 '소외'에 관한 것이라는 출판사의 소개글을 봤을 때, 나름 추측하기로 소설 <투명인간>은 있거나 없거나 매한가지로 존재감이 없는 사람의 이야기거나, 물질만능주의 시대인 오늘날 오히려 물질로부터 소외된 현대인에 관한 이야기 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김만수의 삶은 좀 달랐다. 그는 무엇을 하던 표가 나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매사에 성실하며, 최선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는 부류였기 때문에 어디서나 빼어났고 인정받는 이시대가 원하는, 혹은 모든 사람이 원하는,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주변사람'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절대 투명인간처럼 존재감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열심히 살았지만 남는게 없는 사람이었을 뿐이고, 최선을 다했지만 승자는 되지 못했을 뿐이며, 자기희생을 기꺼워했지만 결국 이용만 당했을 뿐이다. 이건 내가 생각한 투명인간의 정의가 아니다. 내가 생각한 것은 착하지만 능력없고, 인간답지만 인간대접을 받지 못하는 물질만능주의 사회에서의 비물질적인 혹은 빈(貧)물질적인 인간상이었는데, 김만수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노력했고, 때로는 노력만큼 물질적 보상을 받기도 했지만, 그것들을 자신을 위해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소외당했다고 해야 할까. 김만수라는 이름 속에 묶인 소외된 한 영혼의 이야기라고 해야할까. 나로서는 이렇게 이해하는 편이 더 쉬웠다.
 
김만수의 일생은 대한민국 근현대사라고 보아도 무방하리만큼 격동의 시간이였다. 덕분에 오십년 남짓한 시간동안의 대한민국 변천사를 속성으로 살펴볼 수도 있었는데, 그 오십년이  참 길기도 하다. 물론 요즘의 속도라면 50년이면 강산이 대여섯번은 족히 바뀌고도 남을 만큼의 시간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찬라와 같은 것이 인생이라지만, 우여곡절의 생을 살아온 부모님 세대의 어른들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쓰자면 소설도 그냥 소설이 아닌 대하소설감이라며 한많은 생을 한탄하기도 하지만, 김만수의 생이야 말로 정말 그렇다(그렇지만 보여지는 김만수는 한탄도 하지않는 인물이다). 또한 언제나 변한 것은 주변이었을뿐, 김만수는 늘 한결같았다. 한결같이 충실한 자기희생이라니. 
나는 사실 김만수의 삶이 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을 택하기 보다 언제나 주변을 위한 자기희생의 패를 택하는 김만수의 한결같은 뚝심이 이해도 공감도 되지 않았을뿐더러 차라리 한심하기까지 했다.
 
인생은 선택이다. 점심으로 천원짜리 국수를 먹을까 삼천원짜리 국밥을 먹을까 하는 몹시 사사로운 선택부터 연탄가스에 중독된 두 누나 중 산소탱크에 먼저 넣을 누나를 고민해야 하는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혹은 평생이 한방에 결정되는 중차대한 선택까지.
김만수가 가족을 위한 자기 희생보다 자신의 안위를 택했더라면, 태석이 한맺힌 죽음보다는 자기 자신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과의 화해를 택했더라면.
무엇보다 애처로운 것은 태석의 죽음이었다. 한때는 소름끼치도록 영악하게만 보였던 어린 태석이 죽음으로 자신의 짧은 생에 대한 외로움과 고통을 항변한 것 같아 그를 미워한 독자로서 죄책감 마저 들었다. 태석이 자신을 키워준 여자를 엄마라고 부르던 장면에서는 가슴이 찡하다 못해 코 끝까지 달아오르고, 마치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해져와 결국에는 책을 덮고 숨을 골라야 했다.
 
끝으로 나는 내 신장, 나의 몸 전체를 나를 키워준 여자한테 돌려준다.-346쪽
운명이 있고, 인연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겠지 싶다. 사랑의 작대기를 긋듯 인연은 미리미리 짝지워져 있고, 살아가면서 미리 짝지워진 인연들이 씨실 날실처럼 엮이고 엮여서 만들어내는 것이 운명 아니겠는가. 이런 장면들 때문에 성석제는 우리시대 최고의 이야기꾼이라는 평을 듣는 것이겠지.
그러나 김만수가 거쳐온 유년기에 대한 공통의 기억도 없고, 자기희생을 통한 가족사랑, 분에 넘치는 주변 사랑에도 공감하기 힘들고 이래저래 나로서는 감동이 쉽지않은 소설이었지만 꼭꼭 되씹고 싶은 한 문장은 김만수의 조부가 한많은 생을 떠나가면서 남긴 말로, 
자, 그럼, 사소하고 지루하게 길었던 나의 삶이여, 이만 안녕.
내 묘비명에 적고 싶도록 마음에 드는 문장이다. 
 
자살공화국. 세계사에 유래가 없을 정도로 빠른 시간안에 고도 성장을 이룩한 대한민국이 그 반동으로 얻은 자살공화국이라는 불명예는 개발중심과 물질만능의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의 최후의 아우성이며, 몸부림의 결과이다. 죽기보다는 사는 것이 쉽다는데 차라리 죽음이라니. 
그 속에서 자꾸만 사람들은 투명인간이 되어가고,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지 않기 위해 내가 나라는 것을 드러낼 수 있는 온갖것들로 나를 치장해야 만 하는 것이다(책의 시작과 마지막에 등장하는 라이더처럼. 그는 아마도 오래전 사라진 만수의 동생 석수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데올로기나 투쟁, 쟁취 따위가 한 인간이 자신의 삶을 완성하는데 무슨 소용일까. 밥벌이에 쫓기고 가족과 부대끼며 하루하루 삶을 엮어가는데 그것들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한 개인의 이야기는 한 사회의 모습이기도 하고, 한 세대의 역사이기도 하다. 즉 이 이야기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되, 한 가족의 이야기이며, 한 사회에 관한 이야기이고, 이것이 바로 역사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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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ndevous 2014-08-17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꼼한 리뷰 잘 읽었습니다 ^^ 자,그럼, 사소하고 지루하게길었던 나의 삶이여, 이만 안녕. 이 리뷰가 아니었다면 지나쳤을 지도 모를 귀중한 문장을 덕분에 챙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가지 실례 무릅쓰고 다른 목소리를 내보면 우리가 '이데올로기-투쟁-쟁취' 운운하는 우리네 80년대 풍경, 서양의 러시아혁명 1919년부터 길다면 길고 짧으면 짧은 역사를 볼 때 결과적으로 실패했고(소련이 망했고),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인해 부조리하게 수많은 사람의 생명이 희생됐으며, 이데올로기나 투쟁의 담론/언어가 인간의 삶을 도구화시키고, 삶의 의미를 완성하는 데 도움은 주지 못할망정 마이너스로 작용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것이 처음 한 사상가와 그 사상이 실현된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에겐 많이 다른 모습이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미 혁명이 다 끝난 사회에서 살면서 교육받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의 부정적 측면만 보게 되는데 누군가에게 이데올로기, 투쟁, 쟁취가 새로운 삶의 의미를 완성하기 위한 중요한 도구였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댓글 남겨보았습니다. 만수나 투명인간에 나온 인물들의 경우에도 그런 이데올로기 등에 의해 희생되었기 때문에 글에서 취하신 입장에 고개 끄덕이면서도 이런저런 생각 나눠보고자 적어봤습니다 ㅎㅎ

비의딸 2014-08-19 17:07   좋아요 0 | URL
필립 로스의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를 읽었어요. 여기에는 새로운 세상을 위한 이데올로기에 심취하고 자기의 온 생을 다 받친 남자의 이야기가 나와요. 모든 걸 다 걸고, 모든걸 다 받쳤지만 한편으로 그는 다정한 애인, 따뜻한 가정을 그리죠. 투사에게는 그 모든 것이 걸림돌일 수 있었거든요. 그리고 그는 최후에는 이쪽 저쪽 모두에서 버림받고 짓밟히죠. 그야말로 새로운 삶의 의미를 완성하기 위한 중요한 도구로 이데올로기를 택했는데, 소련이 망했듯 이데올로기로 인해 그의 인생이 망해버린 것이죠.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이들이 있기때문에 세상은 그나마 이정도 진보했다고 보는 것이 맞겠지만, 한번뿐인 개인의 삶에 집중할 때, 희생이 과연 옳은 것인지, 작은 나로서는 의미를 찾지 못하겠어요.. 왜냐면 나는 이기적인 혹은 이기적이고픈 사람이니까요.. ^^

rendevous 2014-08-20 21:24   좋아요 0 | URL
저도 개인의 입장에서만 보면 이데올로기가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이문재 시인의 근작 '지금 여기가 맨앞'에서 어떤 구절을 보니 이런 말이 나오더라고요. '지식인이란 인류를 사랑하느라 한 사람을 사랑하지 못 하는 사람이다.' 이데올로기의 그늘은 개인의 실존적 선택에 의해 이데올로기에 투신하는 게 아니라(이렇다 하더라도 주변 사람에겐 큰 상처/폭력이 되겠지만) '대의'라는 이름으로 희생하게끔 떠미는 데 있다고 생각해요. 희생의 주체로 호명한 사람들은 희생을 선택할 수도 없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특히 정신분석학의 관점으로 보면..). 그래서 좋은 문학작품들이 이데올로기의 폭력성과 '역사의 수레바퀴'에 짓이겨져 사라져간 개인의 사소한 일상의 숨결과 꿈(다정한 애인, 따듯한 가정) 같은 것을 오롯이 불러내 우리에게 보여주는데 ... 저도 이런 모습에 익숙해지다 보니 복잡한 현상을 조금 단면적으로 본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댓글은 이데올로기를 옹호하려는 게 아니라 이데올로기란 도구를 통해 세상을 바꿔보려 한 그 마음을 옹호, 아니 그 이전에 '호명'해보고 싶어서 썼습니다. 이데올로기의 비인간성/폭력성에 가려져 우리가 보지 못한 그 이면의 인간성/사랑에 대해 얘기해보고 싶었습니다.

비의딸 2014-08-21 14:50   좋아요 0 | URL
윤스리님께서 말씀하시는 그것, 이데올로기를 도구로 세상을 바꿔보려한 그 마음에 대한 옹호와 그것에 가려진 개인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문학이겠지요. 그렇기에 그것은 선동이 아닌 예술이어야 할테고요. 윤스리님 덕분에 문학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됩니다. ^^

rendevous 2014-08-21 18:26   좋아요 0 | URL
제가 좀 투박하게 약간은 논쟁적 대화를 시도했는데 이렇게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남은 기간 동안 잘 부탁드려요 ^^
 
외로운 남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7
외젠 이오네스코 지음, 이재룡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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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행운일까? 서른다섯의 평범한 한 남자가 먼 친척으로 부터 예기치 못한 유산을 물려 받는다. 직장일과 평범한 일상에 신물이 날 대로 난 그는 당당하게 직장을 그만두고, 오랫동안 지내온 더러운 호텔을 떠나 새로운 아파트를 얻고 그야말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이 일은 정말 행운인걸까?
 
이제 밥벌이는 끝났다. -34쪽
개인적으로 내 생각을 말하자면 이 일은 행운 맞다. 직장 혹은 일을 듣기 좋은 말로 자기실현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사실상 일을 하는 이유는 밥벌이를 위해서가 아니던가. 그런데 밥벌이를 위해 더이상 시간을 버리지 않아도 되는 삶, 삶을 지속하기 위해 더이상 나를 죽이지 않아도 되는 뜻하지않은 유산상속이라니. 이런 일이 나에게 벌어진다면 그것은 마치 로또 복권에 당첨된 것과 같은 행운일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에게도 그일은 행운이었을까. 결론적으로 보자면 주인공에게도 역시 예기치못한 유산상속은 행운이었다. 그러나 그는 행운을 거머쥐고 새로운 출발을 하는 대신, 그 행운으로 인해 더더욱 무기력해지고 나태해졌다. 이렇게 본다면 이것은 주인공에게 전혀 행운이 아닌듯도 하다.
 
그러나 주인공은 유산이 아니었더라도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처럼 삶에 목적도 꿈도 없이 이미 충분히 권태로웠지만, 유산을 받음으로써 더 더욱 방황하게 된다. 아니, 방황이라는 말은 사치스럽다. 차라리 방황했더라면 삶이 그토록 권태롭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주인공은 매일매일이 일요일인듯한 여유를 찾아 관찰자의 시선에서 주변의 모든 것을 본다. 그러나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삶은 무력하다. 나는 행동하지 않고, 상자 안의 피조물들을 들여다 보는 것 같은 그의 삶은 세상 모든일에 스스로 무력하기를 택한다.
주인공은 여행을 떠나볼 생각을 하지만 그것은 나중일이다. 주인공은 우선 안정을 취하고 싶다. 옛 직장 동료를 찾아가볼까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것도 귀찮다. 주인공은 누구와도 무엇과도 관련없이 그렇게 무심하게 삶을 관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의아스러운 것이 세상일에 무심하고, 권태로운 주인공이 죽음만은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이토록 우울하고 무력한 상태라면 차라리 죽음을 불사하는 것이 말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일을 하지 않으면 무력해지고, 지레 늙는다더니 정말 그럴까? 지금 내생각으로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부럽기만 하다. 마음껏 잘 수 있고, 마음껏 책 볼 수 있고,  마음껏 여행 할 수도 있고, 마음껏 멍 할 수도 있고, 마음껏 무력 할 수도 있고, 그 모든것을 마음 내키는대로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는데 오히려 무력해지다니, 지금의 나로서는 이해가 되질 않는다.
주인공과 같은 행운이 나에게 벌어진다면,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내 삶터를 떠날 준비가 되어있다. 그 런데 지금 당장 내가 하고 싶은일은 멍청하게 있는 것이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않고 멍청하게, 되는대로 시간을 보내면서... 어쩌면 나도 주인공과 다르지 않겠구나, 이제야 생각하게 된다.
 
이오네스코의 <외로운 사람>은 권태에 관한 소설이다. 회한과 권태로 무력해지는 주인공을 보면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라고도 말 할 수 있는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가 떠올랐다. 허먼 멜빌은 <필경사 바틀비>를 통해 권태보다는 권위와 관습, 규범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믿어의심치 않는다. 또  곤차로프의 <오블로모프>도 떠올랐는데, 오블로모프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울 '권태로운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들 삶이 권태롭지 않을까. 여유가 있다고 해서 삶이 권태로워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가 평이한 반복을 좋아하지 않는 생물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권태롭기 때문에 맛있는 음식을 탐닉하고, 권태롭기 때문에 여행을 한다. 권태롭기 때문에 사랑을 하고, 또한 권태롭기 때문에 이별을 한다. 뿐만 아니라 권태롭기 때문에 싸움을 하고, 권태롭기 때문에 때로는 노력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나의 생각은 절반만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왜냐하면 <외로운 남자>나 <오블로모프>는 권태롭기 때문에 무력했고, 무력했기 때문에 여행도 사랑도 싸움도 노력도 모두 포기한 채로 스스로를 외로움의 감옥에 가두워 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독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외로웠다. 외로움을 박차려는 의지조차도 무력한 채로.
 
역시 <외로운 남자>는 <구토>와 <오블로모프>의 영향을 받은 소설이라는 역자의 해설이다. 아직 읽지 않은 사르트르의 <구토>를 읽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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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4-07-29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로운 남자는 저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주네요. 공부에 지치거나 잠시 방심을 하면 외로운 남자의 주인공처럼 삶을 관조하거나 멍 때릴 때가 많아요. 권태로워 진다고 할까요? 그리고 취직을 하고 싶어도 취직이 안 되어서 1년 동안 어쩔 수 없이 쉰 적이 있었어요. 쉰다는 게 절대 좋지가 않았어요. 매일 매일 똑같은 일상에 잠도 늘고 이거 왜 살고 있나 하는 생각도 많이 들더군요.

권태롭게 되다 보면 무력해 지는 건 순식간이었어요. 언젠가 봤는 글에 '육체적 죽음보다 정신적 죽음이 더 무섭다'고 쓴 걸 봤는 데, 현대인들은 정신적인 죽음이 더 크다고 했었어요. 그 말을 읽으며 실감을 했죠.

쉬는 건 딱 하루가 좋을 수도 있어요. 한 이틀 삼일 지나가면 권태로움이 온 몸을 잡아 먹어요. 게다가 인생의 목적이 없는 삶은 갈 곳 모르는 배처럼 인생의 바다에서 정처 없이 떠 다니게 되는 것 같아요.

저도 <필경사 바틀비>를 참 좋아해요. 그는 무력하다고 볼 수는 없고, 뭐랄까 루쉰 선생의 말처럼 저항 정신이 투철하다고 할까요? 본인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계속 그 자리에서 자신의 일을 지속하려고 하는 의지. 옆에 사람들이 봤을 때는 정신병자와 비슷할 정도의 강박관념과 같은 자리에 대한 집착이지만 바틀비의 내면에 있는 그런 집념과 같은 모습을 저는 참 좋아해요. 짠 하기도 하고요.

저는 비의 딸님이 서재에 글 올리시는 데 댓글 없으시면 권태로울까봐 ㅋㅋㅋ 이렇게 글도 남기고 ㅋㅋㅋ

전 목적이 있는 삶이 좋아요. 행여 목적이 없을 순 있어도 자신의 죽음에 대한 극복, 그리고 뭔가 어제 보다 나아질려고 하는 자신에 대한 투쟁(제대로 된 적이 한 번도 없지만;;;) 그런 것들에 대해 항상 갈구해요.

나름 살아오며 시간들을 돌이켜 보면 권태로울 때 처럼 불행한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그나저나 비의 딸님의 서평이 올라오면 올 수록 매끈해지고 아주 물 흐르듯이 문장들이 이어지네요. 역시나 많이 써야 되는 것 같아요. ㅎ

공부를 하느라 책을 못 읽고 있지만 비의 딸님의 서평을 읽으며 대리만족을 하고 있습니다. ㅎ 다음 책도 기대할께요 ㅎ

비의딸 2014-07-29 17:40   좋아요 0 | URL
힉... 서재에 댓글이 없던 것은 늘 있는 일인걸요, 없던 댓글이 길게길게 달리니까 새롭고 긴장이 되긴 하죠. 그렇지만 없더라도 권태롭거나 하진 않을 거예요. 아마도 ^^^

음, 전 늘 가끔 자주 권태로운 것 같아요. 현재에 별로 만족을 못하는 것 같기도 하고, 생각해보면 그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마 이런 감정은 권태라기 보다는 지루한 것이라고 표현해야 하는 걸까. 어떻든 저한테는 변화가 좀 필요한 것 같아요. 예를들면 짧게라도 여행을 간다든지 하는.

개인적으로 저는 책을 안 읽는 건 괜찮아도 못 읽는 건 좀 견디기 힘들 것 같네요. 그래도 힘내세요!
 
휴먼 스테인 2 (반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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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자이며 이야기를 끌어가는 화자인 작가 네이선 주커먼은 예순다섯 살의 작가로, <미국의 목가>에도 등장했던 인물이다. <미국의 목가>에서도 역시 주커먼은 작가이며, 작품의 화자였는데 이는 또다른 책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이 세권은 일종의 삼부작으로 여겨진다고.
<미국의 목가>는 이미 읽었지만,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는 앞으로 읽어볼 참이다.
 
아테나 대학의 교수인 콜먼 실크는 개강하고 한번도 수업에 참석하지 않는 두 학생을 '유령들'이라는 의미의 spooks로 지칭했다. 그러나 spooks라는 단어에는 '검둥이들'이라는 또다른 의미가 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수업시간에 한번도 등장하지 않은 이 두 학생이 흑인으로 밝혀져 콜먼 실크는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지탄을 받게 되고, 그 일로 결국 대학을 떠나게 된다. 콜먼이 인종차별주의자로 매도당하고 자신 역시 공산주의자로 몰리게 된 충격으로 아내 아이리스가 갑자기 죽자, 이에 분개한 콜먼 실크는 그 지방에 은둔해 글을 쓰고 있는 작가 네이선 주커먼을 찾아와 자신의 이야기를 써달라고 요청하게 된다. <미국의 목가>에서도 삶에서 많은 축복을 받은 것처럼 여겨지는 스위드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닥친 느닺없는 일로 불행했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써달라고 네이선 주커먼을 찾아오고, 네이선 주커먼은 콜먼과 스위드의 고백과 주변사람들의 증언, 상황의 추리 등을 통해 콜먼과 스위드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끌어간다. 
 
계획한 것은 아니였지만 공교롭게도 <휴먼 스테인>1권을 읽고, <미국의 목가>를 읽고 난 후에 다시 <휴먼 스테인>2권을 읽은 나는, 두 이야기의 진행이 많이 비슷한 것에 다소 당황했고, 두 이야기를 섞어 이해하기도 했는데 그렇더라도 전혀 무리가 없을만큼 두 이야기는 전혀 다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한 맥락의 이야기였다.
그뿐아니라 <휴먼 스테인>까지 읽고 나서야 오히려 <미국의 목가>를 이해하게 된 것 같기도 하다. 미국으로 이주한 유태계 이민 2세대인 필립 로스는 유태인들의 선민의식, 폐쇄성, 편협한 종교관  따위와 미국 중류 사회의 고질적인 개인주의와 자기만 옳다는 편협성과 아집을 <미국의 목가>와 <휴먼 스테인>을 통해 고발하고 있는데, 유대인이든 미국인든 흑인이든 그 모든 것은 결국 인간이라는 하나의 종으로 귀결되며, 본시 인간은 알 수 없는 것, 알지 못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으며 선명하게 구분되지 않는 것까지도 억지로 분류하기를 좋아하고, 그 분류 또한 그 자체에 의한 고유의 것이 아닌 보는 사람 자기 자신에 맞춘 것으로 오해로 시작해 오해로 끝나기 쉬운 것이 인간의 시선이며 삶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다는 것은 사람들을 오해하는 것이고, 오해하고 오해하고 또 오해하다가, 신중하게 다시 생각해본 뒤에 또 오해하는 것이다. -<미국의 목가> 1권, 62쪽
인종차별주의자로 몰려 대학교수를 그만두고, 아내까지 잃은 콜먼은 아이러니하게도 흑인이다. 피부가 하얀 흑인이라니 동양인인 나로서는 좀 의아스럽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백인과 다르지 않은 흑인도 있을 수가 있는가 보았다. 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제임스 웰든 존슨의 <한때 흑인이었던 남자의 자서전>이라는 책도 있으니 말이다.
어쨌든 콜먼은 흑인이지만 인종세탁을 했다고 해야 하나 백인으로 군대에 다녀오고, 그 이후로도 자신이 흑인이라는 것에 대해 구지 말하지 않고, 가족과의 인연을 끊음으로써 자신이 흑인이라는 것을 거부하고, 아이들이 태어날 때마다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흑인으로서의 유전적 성향에 가슴 졸이면서 그의 형 월터의 말처럼 백인보다도 더 백인처럼 지내오다가 단 한번의 실수 아닌 실수, 오해 아닌 오해로 반평생을 지나온 삶의 터에서 추방되고, 갑작스럽고도 수치스러운 죽음을 맞게 된다. 죽기전 일흔 한 살의 콜먼에게는 그의 나이에 딱 반밖에 되지 않는 문맹의 애인 포니아 팔리가 있었다. 
더더욱 재미있는 것은 콜먼의 죽음의 장면에까지도 오해에 오해가 더해지고, 각색에 각색이 더해져 더더욱 추잡한 추문으로 퍼져나간다는 것이다. 한 사람을 오해하고 매도하는 데는 충분한 근거도 어떤 동기도, 논리도, 이론도 필요하지 않다. 그저 꼬리표 하나면 족한 것이다.  그렇다면 콜먼은 그런 인간의 속성으로 부터 자유로웠을까? 네이선 주커먼은 또 어떨까? 그렇다면 나는?
그러고도 경건한 척, 고인을 조문하는 척, 유족을 위로하는 척하는 장례식 모인 사람들이라니. 
 
일단 소문이 퍼지면 그게 사실로 굳어져버리기 마련이다.-2권, 169쪽
필립 로스는 굉장히 할 말이 많은 작가인 것 같다. <미국의 목가>에서도 그랬지만 <휴먼 스테인> 역시 주인공의 삶의 괘적뿐 아니라 주변인물들의 과거와 현재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는데 그것 역시 주인공의 이야기만큼이나 몹시 디테일하고 흥미롭하다. 누구든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고 지나온 삶의 괘적은 지금의 행동을 하는데 전혀 무의미 하지 않은 것이다. 
 
마지막 장에서 포니아 팔리의 전 남편이었던 래스터 팔리가 하얀 눈이 덮인 아르카디아 산정 호수에 여나무개의 얼음구멍을 뚫고 앉아 낚시대를 드리우고 무심한듯 공포스럽게 던지는 질문처럼 너의 삶에는 어떤 흠이, 어떤 얼룩이, 어떤 오점이 있느냐고 묻는 로스의 질문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다음 번 읽을 로스의 책으로는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가 좋을까 <에브리맨>이 좋을까, 조금 고민된다. 두 권 다 먼저 읽고싶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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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4-07-23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작가가 참 읽고 싶었는 데 그러지를 못 했어요. 말콤 x 라든가 리처드 라이트 등 흑인 작가나 그들의 삶에 관심이 많아서 뭐랄까 동질감 느낀다고 할까요? ㅎ 그런 류의 책을 참 즐겨 읽거든요. '보이지 않는 인간'이란 책도 읽었던 기억이 나요.

루쉰 선생이 평범한 민중들에게는 그 어떤 무기도 없지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하나의 단칼의 무기가 있다고 하는 데 그게 '소문'이라고 하셨거든요. 전 예전에 기독교 대학을 다녔거든요. 거기서 다닐 때 불교 서적을 들고 다니며 봤는 데 조계종 큰 스님 아들이라는 소문이 퍼진 적 있어요. 그래서 목사님이 저를 참 싫어 하셨어요. 제가 별 다른 액션을 취한 것도 아니고 채플 때도 기독교에 대해 정확히 알고 싶어서 맨 앞자리에서 열심히 듣고 했거든요.

여러 질문들을 드리곤 했었는 데, 목사님 입장에서는 제가 착실한 불교 신자로서 신을 모독하는 질문을 하신다고 오해 하셨나봐요. ㅎ 암튼 소문은 꽤 무서워요. 그게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만드니 말이죠.

로스의 책 읽으시고 또 올려주셔요. 공부하느라 독서를 많이 못하는 데 비의 딸님의 일목요연하고 핵심을 적어내는 서평을 읽으며 대리 만족을 하고 있으니 말여요. 제가 참 부러워하는 글쓰기여요. 저도 이렇게 정확하게 짚어내고 간결한 스타일리스트 적인 글을 쓰고 싶어요. 주저리 주저리 한 없이 늘어지는 글 쓰는 게 습관이 되어버려 간결하고 임팩트 있는 글이 잘 되지가 않아요. ㅎㅎㅎㅎ

비의 딸님 장마 입니다. ^^ 아무리 비의 딸이라고 하셔도 비 조심하셔야 해요. ㅎ

비의딸 2014-07-23 17:55   좋아요 0 | URL
ㅎㅎㅎ 비가 오니 오셨군요! 엊그제 밤엔 천둥과 번개가 제법 요란하더라구요, 저는 그렇게 오는 비 참 좋거든요.. 비로 고생한 기억이 없어 그런가봐요, 그렇지만 만일 비로 인해 위험이 닥친다면 아마 제일 먼저 도망가겠죠. 그런거 많이 느껴요 요즘에.
책상물림이라고 하잖아요. 경험없이 책으로만 본 것, 들은 것 그래서 겁없이 막 덤벼들지만 막상 큰일이다 싶으면 무서워하고, 그런 내 모습에 절망하고, 그래도 결국 도망치고....

내가 느낀걸 더 많이 쓰고싶은데 생각한 걸 그대로 옮기는 것이 힘들어요. 그래서 매번 글이 또각또각 끊어진 느낌이죠. 전 그게 너무 싫은데, 루쉰님은 그걸 간결하다라고 표현해 주시네요. 저는 오히려 루쉰님처럼 꼼꼼하게 적는 글을 배우고 싶어요. 글을 잘 쓰는 첫번째가 본 것, 느낀것을 그대로 옮기는 것 아니겠어요..
음, 누구 보라고 적기보다는 내가 읽고 생각한 걸 정리하는 데 더 많이 비중을 두겠다하면서 위로하죠.

전 참 소통이 힘든 사람인 것 같아요. 비를 대할 때처럼 사람도 쉽게 대하지만, 절대 마음은 안열거든요. 사람처럼 무서운 게 없고, 사람처럼 슬픈게 없고...

장마답게 씩씩하게 비가 왔으면 좋겠어요. 찔끔거리면서 끈끈하거 매우 안좋거든요. 공부 즐겁게 하시고요, 루쉰님도 비 조심... 그리고 개 조심..? ㅎㅎㅎ

루쉰P 2014-07-28 09:04   좋아요 0 | URL
비가 오지 않아도 옵니다. ㅋ

저도 비의 딸님과 비슷한데요 뭐. 무서워하고 절망하고 도망치고 이런 거요. 누구나 다 똑같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 너무 자기에 대해 실망하지 마세요.

전 꼼꼼한 게 아니라 정말 너저분 하게 길게 쓰는 것 뿐이에요. 아주 읽는 사람 곤란하게 만드는 글쓰기죠. ㅋ 사람의 모습이 다르듯이 각기 글 스타일이 다른 건 좋은 것 같아요. 다 저와 같이 글을 쓴다면 읽기 힘들 것 같아요. ㅎ

ㅋㅋㅋㅋ 저도 35년 평생 사람들과 소통에 담을 쌓고 살아온 사람이에요. 마음을 안 여는 게 나쁜 건 아니에요. 마음을 열 만한 사람이 생기면 그 때 여셔도 될 것 같아요. 무리해서 억지로 열어야 할 필요는 없잖아요. 얼마나 세상에 그냥 겉으로만 만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사람들과 관계를 가지는 사람이 많아요. 전 그런 만남이라고 한다면 마음 안 열고 사는 게 편하다고 봐요.

대신 사람을 무서워하시면 안 되요. ㅎ 나쓰메 소세키였는 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풀잎'이라는 소설에서 사람들과 같이 있는 것이 힘들다고 아무리 해도 사람이 없는 곳은 무인도 밖에 없고, 그런 곳에서 살 수도 없다. 우리는 싫던 좋던 인간들과 떨어질 수는 없다고 쓴 걸 본 기억이 나요.

비의 딸님이 겁 없이 막 덤벼든다고 하셨잖아요. 사람은 겁없이 그냥 덤벼들어 이쪽에서 무서워하는 티를 내면 안 되요. ㅎ 어차피 혼자 살 수는 없는 사회이니 저도 되도록이면 사람들을 무서워하지 않고 그들이 저를 무섭게(?) 하고 있어요. 흠...별로 좋은 건 아닌 듯...

사람과의 관계처럼 복잡하고 어렵고 머리 아픈 것 없다고 생각을 해요. 그리고 사람들에게 인정 받으려고 공부를 하고 그러는 것이진 않나 하는 생각도 들곤 해요.

젼 복잡할 땐 저만 생각하고 저만 봐요. 내가 좀 더 깊이 있게 파 내려 가는 것, 내가 맡은 거에 있어서 더 철저하게 하는 거 등등, 사람과 복잡할 때 저를 파내려 가요. 물론 뭐 오타쿠나 그런 건 아니구요. ㅎ

저를 탐구하고 연구하는 거 그런 거에 재미를 느끼고 그래요. 좀 변태 같나요? ^^;;ㅎ

비의딸 2014-07-29 17:41   좋아요 0 | URL
제 스타일로 짧게 답해서, 변태 안 같아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