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은 노래한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7
도리스 레싱 지음, 이태동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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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주정뱅이인 아버지와 나약한 어머니 밑에서 자란 메리는 사랑이 무엇이지 모르고 자랐다. 가난했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메리의 어머니는 메리의 오빠와 언니가 이질로 죽고나자 오히려 입을 덜었다는 안도를 느낄 지경이었으니, 이 가정에 사랑이 있었을리가 만무했다. 그랬으므로 메리는 취직을 해 독립한 후, 부모나 형제를 그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독신 여성으로 부족함 없이 지내며 행복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런 자유도 잠시, 시간이 흐르면서 메리는 노처녀가 되고, 독신여성에 대해 부정적인 시절이였던 만큼 타인들의 시선에 떠밀려 사랑없는 결혼을 한다.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나도 없었기에, 남 얘기 하기 좋아하는 여자들이 그녀가 결혼을 해야만 된다고 말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마구 휘청거렸던 것이다.(73쪽)

 

결혼 후, 메리는 여러사람들의 곱지않은 시선으로부터 벗어났으니 이제야 말로 진정한 독립을 했고, 지금부터는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이라고 느낀다. 그러나 사랑없는 결혼생활이 행복할리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 아니던가.  갈수록 더 심해져만 가는 경제적 빈곤과 남편 리처드의 무신경으로 인해 불행한 결혼생활을 이어가던 메리는 정신분열 증세를 일으킨다. 그러던 중 그녀는 흑인 하인인 모세로 부터 죽음을 당한다. 책은 메리의 죽음으로 부터 시작되면서 과거를 거슬러 기억하며 그녀가 살해되기 까지의 과정을 그린다.

 

농장의 새로운 관리인으로 이제 막 부임한 토니의 시선으로 보는 메리의 죽음은 기이하기만 하다. 살인범은 애초부터 메리의 하인이였던 모세로 밝혀졌다. 그러나 모세는 살인 후, 달아날 시간이 충분했음에도 달아나지 않았을 뿐더러, 자신이 범인임을 스스로 자백한다. 그에게서는 마치 죽여할 사람을 죽였다는 듯한 자신감마저 느껴졌다. 또한 메리의 죽음을 처리하는 백인 경찰관과 이웃 찰리의 태도 역시 몹시 기묘했다. 그들 역시 죽어야 할 사람이 죽었다는 듯 메리의 시신을 보며 경멸의 표정을 감추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 평등에 대한 교육을 받고 자라난 토니로서는 모세와 백인경관, 그리고 찰리의 태도에 대해 몹시 의아했지만, 자신의 안위를 위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기로 한다. 토니는 은연중에 흑인에 대한 백인의 권위를 잃어버린 메리를 증오하는 동료 백인들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백인 문명. 특히 백인 여자가, 경우가 어찌 되었든 간에 흑인과 인간적인 관계를 맺는 걸 결단코 용납하지 않을 백인 문명은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일단 그러한 관계를 인정해 주면, 백인 문명은 붕괴되어 그 무엇으로도 구제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인 문명은 터너 부부의 경우와 같은 비참한 실패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41쪽)

 

백인이지만 가난한 농장주였던 리처드는 이웃과 어울리는 일에 소홀했다. 이웃들은 리처드와 메리가 거만하기 때문에 사교적이지 않다라고 여긴다. 또한 리처드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담배농사 대신 나무를 심는 등 땅에 대해 애착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 리처드에게 담배농사는 농사라기 보다는 담배를 생산해 내는 공장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리처드의 이웃 대농 찰리는 이런 리처드를 인간적으로 좋아했지만, 한편으로는 리처드가 망하기를 바라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리처드의 농장을 낚아챌 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날 불현듯 리처드의 집을 방문한 찰리는 리처드 부부가 흑인 하인 모세로 부터 주인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에 분개한다. 그는 리처드의 파산을 기다려 농장을 거저 먹는대신 리처드에게 정당한 값을 쳐주고 농장을 매매할 것을 제안한다. 리처드가 망하길 기다리던 것과는 사뭇 다른 찰리의 이런 행동은 어찌되었든 백인 동족이 흑인보다 못한 처지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리처드의 몰락은 백인들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여지가 되는 일이었으므로, 그런일은 일어나서는 안되었다. 찰리나 백인경관이 메리의 처참한 시신을 보고 경멸을 감추지 않았던 것은 그와같은 이유였다. 흑인 하인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백인이라니, 그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은 것이다. 차별은 인종간에만 있는 일이 아니었다. 같은 종이면서 뒤쳐지는 동료는 종 전체에 위해가 된다. 작가는 바로 이점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였을까 추측한다.

 

너희는 동료 백인이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도록 내버려 두면 안 된다. 만일 그렇게 되면 깜둥이들이 자신이나 너희가 별 차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306쪽)

 

그러나 책의 말미로 갈수록 모세가 메리를 죽인 이유가 모호했다. 모세는 복수라고 했지만, 자신들의 땅을 침략하고 자신들을 하인으로 삼은 백인 전체에 대한 흑인으로서의 복수인지, 메리라는 까탈스러운 주인에 대한 하인의 울분인지, 그도 아니라면 백인 여자 메리를 여자로 여겼던 건장한 흑인 남자가 새로운 젊은 백인인 토니의 출현으로 순간적인 분노를 표출한 것인지 분명히 알아채기가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메리의 육체적인 죽음은 흑인 하인으로부터 비롯되었으나, 그녀의 파멸은 그녀가 자라난 환경과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생활방식, 가치관 등, 예를들자면 타인의 시선에 밀린 원치않는 결혼 따위로 인해 이미 그 이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도리스 레싱의 출세작이다. 남아프리카에서 자란 레싱의  이 소설은 '사랑과 증오에 대한 비극인 동시에 결코 이어질 수 없는 인종 간의 갈등에 대한 연구' 라는 평을 받았다. 그렇지만 나는 이 책을 인종간의 갈등보다는 백인들의 오만함에 방점을 두고 읽었다. 조상대대로 살아오던 사람들이 있는 남의 땅에 들어가 땅을 차지하고, 오히려 땅 주인들을 하인으로 삼으며 끝임없이 자신들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타인을 희생하는 그 노력이 어이없다는 말 말고 다른 어떤말로 표현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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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 천연균과 마르크스에서 찾은 진정한 삶의 가치와 노동의 의미
와타나베 이타루 지음, 정문주 옮김 / 더숲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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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이윤을 내지 않겠다는 주인장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이윤을 내지 않고도 수지타산을 맞출 수 있다는 얘길까? 이윤이 없는데 어떻게 먹고 살 작정인 걸까? 이윤 때문이 아니라면 도대체 가게를 운영하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의 말은 인상적이었던 만큼 이상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남좋은 일하러 장사를 하는 사람도 다 있는가 싶었던 것이다.

 

 

이윤을 내지 않고도 수지타산을 맞출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서 먼저 '이윤'에 대한 오해를 풀 필요가 있다. '이윤'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장사 따위를 하여 남은 돈.'

그렇다. 이윤은 매입과 매출 후에 '남은 돈'이다. 그러니 이윤 없이도 수지타산을 맞출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은 처음부터 말이 되지 않는다. 수입과 지출을 맞추고도 남는 돈은 불필요한 돈으로 '다루마리' 빵집의 주인장 말을 빌리자면 '부패하지 않는 돈'이다. 이 부패하지 않는 돈은 인간과 인간 사이를 오가며 시기와 반목과 불행을 낳는다. 이 부패하지 않는 돈을 위해 인간은 속이고, 착취하고, 경쟁한다. 

 

이윤을 내지 않겠다는 것은 그 누구도 착취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우리는 종업원, 생산자, 자연, 소비자 그 누구도 착취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돈을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 올바르게 쓰고, 상품을 정당하게 '비싼' 가격에 팔 것이다. 착취 없는 경영이야말로 돈이 새끼를 치지 않는 부패하는 경제를 만들 수 있다. (196쪽)

 

이윤없이 수지타산을 맞출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풀리고 나니, 어떻게 먹고 살 작정인지, 가게를 운영하는 목적은 무엇인지 하는 의문은 저절로 해결이 되었다. 그는 돈을 쌓기 위해 '장사'를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으로 온전히 사는 것을 위해 빵을 굽는 일을하며, 일 한 만큼 벌고, 번 만큼 쓴다.

빵을 굽는 것은 그에게 온전히 사는 일이 바탕이다. 그러므로 애초부터 비료나 화학 첨가물을 사용하지 않고 키운 재료를 이용해  생명을 살리는 작업, 즉 천연발효 과정을 거쳐 정성껏 빵을 굽고, 빵을 굽는 과정에 쏟은 노동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고 지불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윤이 남지는 않지만 가게를 동일한 규모로 운영할 정도의 자금은 항상 융통이 되므로 날마다 빵을 구울 수 있는 것이라고 '다루마리'의 주인장은 설명한다.

 

물론 주인장의 착취하지 않겠다는 생각에는 깊은 갈채를 보내며,  존경의 마음을 감출 수 없지만 이윤을 남기지 않는다면 도대체 가게를 운영하는 목적이 무엇이냐는 애초의 질문이 완벽하게 해소된 것은 아니다. 이윤이 없다면 도대체 둘이나 되는 아이들은 어떻게 키울 것이며, 노후 대비는 어떻게 할 것인지, 만약 부부 중에 누구 하나 크게 아프기라도 하면 그 비용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에 대한 불안감을 감출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나의 의문에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뒤집어야지.'

 

이윤을 남기지 않는 구조에 대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불안을 감추지 못하는 나를 위해서인지 지은이는 책을 시작하며, 마르크스 사상을 현실에서 실현하려 한 레닌의 말을 인용했다. '혁명은 변두리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그 혁명은 하루아침에 밑바닥부터 거꾸로 뒤집는 혁명이 아니라, 밑바닥에서 부터 시작되는 은근한 혁명, 눈에 보이지 않는 '균'들이 열심히 일한 덕에 '발효'라는 과정이 일어나 몸에 좋은 빵으로 재탄생 되는 그런 혁명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 과정에서 때로는 부패하기도 하고 섞기도 하는  그런 순환과정이 살아있는 경제를 지은이는 꿈꾸는 것이다.

높은 생산성과 이윤 극대화라는 자본주의의 단맛에 이미 깊숙히 녹아들어 이윤을 남기지 않는 장사에 대해 단박에 이해하진 못했지만 진정으로 인간을 위하고, 삶을 살리는 경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된 책이다. 

 

썩고 부패하는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빵집 '다루마리'는 5년차 라고 했다. 지금으로 부터 다시 5년을 지내고난 후, 10년차 다루마리 주인장의 이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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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 박범신 장편소설
박범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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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희생은 많이 화자되지만 아버지의 희생에 대해 말하는 것은 좀 촌티가 나는걸로 여기는 사람도 많잖아. 알코올중독 아버지, 폭력주의 아버지, 권력 지향 부정부패 아버지. 아버지 이미지는 이런 식이야. 아버지들이 만든 안락에 기대 살면서도 그래. (207쪽)

 

업튼 싱클레어의 소설 <정글>의 주인공 유르기스는 아내의 죽음에 이어 하나뿐인 피붙이 아들조차 진흙탕에 빠져 죽고나자 그때까지 삶의 터전으로부터 도망친다. 그에게는 부양해야 할 또다른 가족(아내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가족이 아니었고, 따라서 유르기스에게 강제된 책임은 없었다. 가축수용장의 비참한 노동환경을 견디며 짐승같이 '돈'만을 벌어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집과 공장을 떠난 유르기스는 아무것에도 구속되지 않고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며 '자유'를 느낀다. 아내와 아이는 처참한 현실을 견디고 열심히 일하며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 할 이유였지만, 그들이 사라지고 나자 돈벌이를 위해 자신을 죽여야 할 이유조차 함께 사라진 것이다.

 

<소금>의 주인공 선명우는 푸지게 눈이 쏟아지던 막내딸의 생일에 집을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후에 밝혀진 가출 당시의 상황은 자못 작위적이지만, 그의 가출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는데, 생물학적으로 결코 아버지가 될 수 없는 나도 그 이유에 자못 고개가 끄덕여진다. 어쨌든 그는 가족을 버린 것이 아니냐는 원망섞인 지탄 대신 충분히 그럴만 했다라고 수긍하는 것이다. 그는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에서 평생 빨대와 깔대기 노릇을 하며 아내와 딸들을 위해 시종이 되어 그림자처럼 살았다. 한때 그에게도 꿈과 사랑이 있었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보다 먼저 가족으로서의 책임과 의무가 우선되었다. 선명우의 아버지는 그에게 아들로서의 책임으로 그를 옭아매었고, 그의 아내는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의 운명을 강요했다. 선명우는 바로 그것, 가족의 이름으로 져야하는 책임과 의무를 버리기로 한 것이다.

 

가출한 후 선명우는 떠돌이가 되었다. 주로 자동차에서 자고 자동차에서 먹었다. 네개의 바퀴는 어디든 그를 데려다 주었다. (223쪽)

 

가출한 후 선명우는 자유를 느낀다. 가족을 두고, 자식들을 두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질책이 당연한 상황임에도 나는 가출한 후 떠돌이가 되었다는 이 한 문장에 가슴 속이 탁 트이는 것 같은 해방감을 느낀다. 자신의 삶에서 한 번도 주체적이지 못했다는 회한을 뇌까리는 선명우의 일생일대의 결단이 반가웠던 것이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보면 아버지의 울타리에서 부족함 없이 살던 그들의 가족이 '자립'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니, 그건 그의 말대로 결과적으로 보면 나로 인해 그 애들도 인생의 새로운 찬스를 맞은 거(338쪽)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책임과 의무를 벗어던진 선명우가 또다른 가족을 만든 것에서는 의문이 든다. 생물학적으로, 즉 핏줄로 이어진 가족이 아니기 때문에 강제되는 책임과 의무가 없다거나 또는 가볍다고 여긴 것일까. 책임과 의무가 없는 가족을 과연 가족이라 봐도 좋은 것일까. 그건 그냥 작은 생활 공동체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언제 깨뜨려도 양심의 가책도 없고, 법적인 책임도 없는 흐지부지한 그런 관계. 자유는 있지만 결속력은 약한, 그래서 언제 깨질지 몰라 전전긍긍해야 하는. (선명우의 아내 역할을 하는 함열댁은 선명우가 자신들을 박차고 떠나갈까봐 불안한 모습이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피는 물보다 진하다',' 핏줄은 당기는 법'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가족은 각 개인에게 희생을 강요한다. 부모이기 때문에 자식이기 때문에 강제되는 의무가 사랑의 탈을 쓴 희생으로 둔갑하는 것이다. 작가는 바로 이것에 대해 '아버지'를 통해 묻는다. 혹시 '가족애'는 체제가 굳건히 유지되기 위해 전파하는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닌가? 

때문에 선명우는 가족에게로 돌아가지 않는다. 가족을 위해 '빨대'노릇을 하며 '지겨워'를 연발하던 아버지의 자리 대신 한 사람의 인간 '선명우'로서 남은 삶을 살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체제의 세뇌로 부터 벗어나 주체적인 한 인간이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가출을 '책임에 대한 회피'라기 보다는 '용기'라고 추켜세우고 싶다. 그러나 선명우가 내 아버지, 내 남편이라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책을 읽으며 가진 최대의 의문이다.

 

소설 속에서 작가로 등장하는 화자 역시 원치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아버지가 될 위기에 처하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 된다. 자식을 위해 그가 치사함을 견뎌내야 하는 것은 차치하고서, 어쨌거나 그는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세상엔 두가지의 인간이 존재한다. 자식이거나, 혹은 부모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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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
업튼 싱클레어 지음, 채광석 옮김 / 페이퍼로드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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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육식의 폐해를 다룬 <육식의 종말> 정도의 책이라고 생각했다. 육식이 인간에게 미치는 악영향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도축과 가공 단계에서의 비위생적인 환경을 다룬 소설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정글>을 읽음으로써 육식에 대한 과도한 식탐을 끊는 기회로 삼고자 시뻘건 표지의 책을 골라 들었던 나는 조금 당황했다. 업튼 싱클레어는 <정글>로 육식의 해악이나 육가공식품의 비위생성을 고발하고자 한 것이라기보다 비인간적인 조건에서 일하는 임금노동자의 비극과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본의 권력으로 부터 벗어나야 한다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온 식구들이 집을 마련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던가. 살아가는 동안 그들은 오직 '유예'라는 희망만을 품고 살며, 모든 돈을 거기에 쏟아 넣었다. 그들은 힘이며, 실체이며, 영혼이며, 육체인 돈에 의해 살고, 돈이 없어 죽는 가난한 노동자였다.(251쪽)

 

리투아니아 이주 노동자 유르기스는 사랑하는 오나와의 행복한 결혼을 꿈꾸며 고향을 떠나, 시카고의 가축수용장에 취업한다. 열심히 일하고, 성실하게 살면 꽤 많은 돈을 벌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부자나 거지가 모두 똑같이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곳이 바로 미국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더 많은 이윤을 향한 자본주의의 현실은 유르기스의 상상과는 달랐고, 가축수용장의 노동환경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나 비인간적이고 비위생적인 노동환경임에도 일하고자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면서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댓가조차 받을 수 없었다.

뿐만아니라 건설업자는 가난한 이주민들이 집 대금을 내지 못하리라는 예상 속에 장기대출로 집을 사게게 하고, 대출금을 제때에 지불하지 못하는 이들에게서 다시 집을 빼앗는 수법으로 유르기스를 비롯한 보통사람들의 삶을 짓밟는다. 이처럼 부패와 타락이 만연한 비참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유르기스는 매번 튼튼한 몸으로 더 열심히 일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그의 꿈은 자본의 노예가 된 사람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서로의 피를 빨아들이는 현실 속에 무너져 가고, 희망을 안고 유르기스와 함께 시카고로 왔던 오나와 리투아니아 가족들은 추위와 고통 속에 내던져져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거나 가장 밑바닥의 삶으로 추락한다. 유르기스가 밟았던 희망의 땅은 다름아닌 '정글'이었던 것이다.

 

그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을만큼 멍한 상태였지만, 그의 영혼 속에서 거대한 격정이 일어났다는 것을, 그리고 새로운 인간이 태어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파멸의 구렁텅이를 뚫고 나왔다. 그는 절망의 굴레를 벗어 던졌다. 세계 전체가 변했다. 그는 자유로웠다. 비록 전과 마찬가지로 고통을 받을지 모르고 구걸하다가 굶어 죽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제 그에게는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그는 의지와 목적을 가진 인간이 된 것이다. 더 이상 현실의 노리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무언가를 위해 싸울 것이며, 필요하다면 그것을 위해 죽을 수 있을 것이다! (507쪽)

 

산업현장에서 거대한 톱니바퀴의 한 부분이 되었다는 것을 축복으로 여기며 뿌듯하게 여겼던 유르기스는 이주 노동자 생활 4년만에 자본이 주인인 세상은 잡아먹고 잡아 먹히는 만인의 전쟁터임을 알았다.  처음 가축수용장에 왔을 때 돼지들의 잔인한 도축 장면을 보면서 자신이 돼지가 아닌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 역시 돼지 이상의 처지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고용주들에게 노동자는 노동하는 돼지에 불과했다.

노동자, 범죄자, 방랑자, 노숙자가 되어 시카고 주변을 떠돌던 유르기스는 어느날 추위때문에 우연히 찾아든 강당에서 단결함으로써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주장하는 사회주의자의 연설을 듣는다. 이후 유르기스는 사회주의자들의 회합에 참여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자신과 가족들을 덮친 불행은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기 때문이 아닌, 사회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야기는 유르기스가 사회주의자로서  인간다운 취급을 받는 세상을 건설하겠다는  희망을 품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그 답이 되지 못했다는 것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재의 우리들은 이미 알고 있다.

 

<정글>은 1906년 출판 직후, 미국의 도축장과 육가공 공장의 위생 상태에 대한 비난 여론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식품위생법'과 '육류검역법 제정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비인간적인 노동환경과 정당한 댓가를 받지 못한 1900년대 초엽 미국 노동자들의 실상이나 자본에 의한 인간성 상실에 무게를 두기보다는 육류가 식탁에 오르기까지의 위생상태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있다. <정글>의 모습이 과거 미국에만 국한된 일이었거나, 세월이 흐른만큼 노동환경이나 자본에 의한 인간성 말살의 분위기가 나아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리얼리즘에 기반을 두고 묘사된 <정글>의 육가공식품 공장의 위생상태가 끔찍하리만큼 혐오스럽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의 심장을 겨냥했는데 어쩌다보니 위에 명중하고 말았다' 라는 소회를 남긴 작가 업튼 싱클레어는 <정글>이 일으킨 '식품 위생에 관한' 사회적 반향에 만족했을까, 당황했을까. 어느쪽이였든 싱클레어는 안전한 먹거리는 '식품위생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으로부터의 진정한 해방에 있다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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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고 나면 처음의 그 잔인했던 할머니나 이중적인 신부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이 책을 읽은 독자의 리뷰에 적혔더란 이 한 문장만으로도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을 읽을 충분한 이유가 된다. '슬라예보 지젝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이라는 거창한 미사여구가 없더라도 말이다. 책을 읽는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타인에 대한 이해가 먼저니까 말이다. 그래야만 타인을 이해하고 난 후라야만 나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복자들>을 통해 말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부조리할지라도 인생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었다고.

그러나 어쨌든 그는 프랑스인인데 중국 혁명 당시 광둥 정부를 주요 무대로 소설을 썼다하니, 좀 의아하다.  더구나 외국인으로서 중국을 보는 여행자 시각에서 씌여진 소설이 아니라하니 더더욱.

 

 

 

 

 

 

 

 

 

 

 

파트릭 모디아노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힘입어 <지평>, <청춘시절>,<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등이 우리나라에서 잇달아 출간되었다. 그 중에서 고른 책은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

1960년대 파리를 배경으로 '진정한 삶'을 찾아 나선 한 여인의 흩어진 생의 흔적을 쫓는다는 책소개에 이어 열어본 책의 첫 페이지에 등장한 주인공은 늘 드나드는 카페의 같은 테이블에 앉고, 그리고 그녀는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았다라고 소개된다. 궁금하다. 그녀가 누구인지.

 

 

 

 

 

헌 해의 마지막과 새 해의 시작을 여행으로 잇는 바람에 읽고싶은 신간 목록 작성을 못할까봐 조금 마음 졸였네요. 얼렁뚱땅 이렇게라도 작성하고 나니, 밀린 숙제를 끝낸 기분입니다.

새해의 첫 시작이 남들보다 좀 늦은 탓에 정신이 '두 배'로 없네요.

바쁘지만 기쁘게, 즐겁게 읽고, 읽은 것에 대해 많이 기억하고 싶어요. 그것이 15기 신간평가단을 시작하는 제 다짐입니다.

일단 정신부터 차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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