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받을 용기 (반양장) -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 미움받을 용기 1
기시미 이치로 외 지음, 전경아 옮김, 김정운 감수 / 인플루엔셜(주)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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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단순하며 인간은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라고 주장하는 철학자가 있다. 세계가 혼돈과 모순으로 가득한 이유는 세계가 복잡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세계를 복잡하게 보고 있기 때문이라는 그는, '남의 이목에 신경 쓰느라 자신만의 진정한 행복을 놓치지 말라'고 말한다. 어느날 한 청년이 이 철학자를 찾아온다. 가정환경이나, 외모, 학력에 대한 열등감으로 다른 사람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경향이 있는 청년은 생각하기에 따라 삶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철학자의 주장에 대해 따져 묻기 시작한다. 성취지향적인 현대사회에서 열등감에 사로잡혀있는 이 청년이 볼 때 철학자의 주장은 낙천적인 괴짜의 궤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남의 행복을 진심으로 축복하지 못해 늘 자기혐오에 빠지는 청년에게 철학자는 인간의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타인의 존재를 전제로 존재하기 때문에 열등감을 비롯한 고민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모든 불행한 고민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열등감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자기만의 주관적 해석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타인을 경쟁상대로 생각하지 않아야 하며,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인정욕구를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언제나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하는 그런 태도는 삶을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는데 방해가 되고, 지금 이 순간 행복한 삶을 살기위해 필요한 것은 타인의 인정에 대한 갈망이 아니라, 오히려 '미움 받을 용기'라는 것이다.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는 삶이 아니라 주관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며,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에 집중해야 한다. 또 지금 현재를 충실하고 진지하게 살기 위해서는 과거의 트라우마가 아닌 현재의 내 선택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며, 과거의 불운했던 기억에 대한 보복을 위한 행동이 아닌 행복하기를 선택하라고 말한다. 철학자는 이러한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은둔형 외톨이를 예로 들며, 그가 방에서 나오지않는 것은 학대받은 어린시절에 대한 결과로 외톨이가 된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학대한 부모를 상대로 보복하기 위한 목적으로 방에서 나오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다 라고 주장한다.

 

철학자 이러한 주장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의 개인 심리학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프로이트, 융과 함께 심리학의 3대 거장으로 꼽히는 아들러는 빈 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뒤늦게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 입문했다. 그런 그가 열등감에 집중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선택이다. 그후 아들러는 프로이트 학파로부터 따로 떨어져 나와 개인 심리학을 제창했다. 과거의 트라우마에 주목한 프로이트와 달리 아들러는 인간은 과거의 원인에 영향을 받아 결과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정한 목적을 향해 움직인다는 목적론을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는 프로이트를 비롯한 기존의 심리사회적 이론을 전면 부정하는 것으로, 과거는 현재의 나를 불행하게 할 만한 힘이 없다는 희망적인 메시지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문제라는 아들러의 개인 심리학은 그러나 한 개인의 불행을 전적으로 그만의 탓으로 책임지우는 면이 있다. 아들러의 이론으로는 차마 설명되지 않는 현실적인 문제들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청년의 말처럼 자동차에 기름을 넣듯 용기를 넣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선택에 대해 타인의 평가에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다는 철학자의 설득은 꽤 매력적이다.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남의 이목에 신경을 쓰며, 상대적 박탈감과 열등감을 겪는 현대인에게 <미움받을 용기>는 제목부터 대단히 설득력이 있게 들린다. 유난히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비교하며 성취지향적 사회인 일본에서 50만 부 이상이 팔리고, 한국사회에서 연속 9주간 베스트셀러 1위로 기록되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하다.

 

일찍이 아들러는 심리학은 타인을 조종하기 위한 기술이 아닌 나를 움직이기 위한 학문이라고 했다. 자유로워질 용기, 평범해질 용기, 행복해질 용기, 그리고 그 이전에 선행되어야 할 미움받을 용기를 주장하는 이 책은 생각을 바꾸는 것으로 삶을 바꾸자는 자기계발서다. 지은이가 말하는 미움받을 용기는 미움을 받으면서 계속 살라는 인간에 대한 냉소가 아니라, 미움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격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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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드디어, 가즈오 이시구로!

<나를 보내지마>, <창백한 언덕 풍경>, <남아있는 나날>, 그리고 소설집 <녹턴>까지, 이시구로의 작품은 무엇하나 빼놓을 수 없게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다. 때문에 나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다음 작품이 출판되기를 몹시 기다렸다.

주인공의 고백투로 이어지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기법은 <우리가 고아였을 때>에서도 다르지 않지만, 막바지의 반전은 가히 충격적이라고..

몹시 기대된다.

 

 

 

 

 

꽤 로맹 가리의 작품을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별을 먹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로맹 가리의 장편은 처음 본다. 독재와 저항, 종교와 위선, 제국주의와 공산주의로 혼란한 제3국을 들여다보는 이방인 목사라니, 어른들 세계의 위선과 기만을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자기 앞의 생>의 모모가 생각난다. 에밀 아자르란 필명으로 인간은 사랑없이 살 수 없다고 얘기한 로맹 가리.

<별을 먹는 사람들>에 등장 인물 중 소외 계층을 연민하느라 스스로를 돌보지 못하는 독재자 알마요의 여자친구는 자신의 두번째 아내인 배우 진 세버그를 모델로 했다고.

로맹 가리는 1979년 진 세버그가 의문사한 이듬해에 권총 자살했다.

 

 

 

 

 

 

 

 

주인공 조코 코기토가 그의 유년 시절에 강에서 아버지가 탄 배가 뒤집히는 것을 보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기억을 더듬은 소설.

오에 겐자브로의 작품을 읽은 적은 없지만, 언젠가는 꼭 읽고 싶었다. 그 시작을 <익사>로 하려 한다.

 

 

 

 

 

 

3월에는 제법 신간 소설이 풍성하다. 그만큼 읽고 싶은 책도 많지만, 언제나 그렇듯 시간이 없다. 엄살이 아니고 정말로... 그렇더라도 이 세권은 꼭 읽고 넘기고 싶은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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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류은희.조현천 옮김 / 현암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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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근원을 경멸하고 증오한 나머지 뿌리로부터 거세당하고자 하는 욕구로 그 모든 것을 소멸 시키려는 자가 있다. 그는 이제 막 부모님과 형의 죽음을 알리는 전보를 받았는데, 그에 대해 냉담하다. 과연 그가 그토록 가족을 경멸하는 이유가 무엇이며, 얼마만큼 증오가 깊으면 그 죽음에서조차도 초연할 수 있는 걸까. 소설은 바로 그렇게 시작된다.

'부모님과 요하네스 사고사-세실리아, 아말리아로 부터' 전보를 손에 쥐고 침착하게 맑은 정신으로 서재의 창가로 가서 텅 빈 미네르바 광장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11쪽)

 

주인공 무라우는 로마에 살고 있는 오스트리아 지주 가문 출신의 지성인이다. 가문의 영지인 볼프스엑에 살고있는 그의 아버지와 형은 상속받은 많은 유산을 지키는 것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고 있으며, 어머니는 물질과 비정신의 화신으로 가문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고, 여동생들은 가문에 기생하는 것으로 삶을 소비하고 있다. 무라우가 보기에 그들은 스스로를 개선하려는 필요를 느끼지 못한채 과거에 머물러 있으며, 육체적이고, 물질적이며, 비정신적인 것에 비중을 두며 살고 있다. 정신적인 것과 지성에 삶의 의미를 두는 무라우는 이들의 반지성을 혐오하며  떠나온지 20여 년이 지난 어느날 부모와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그 자신이 떠나온 볼프스엑의 유일한 상속자가 된다. 장례식에 참석한 무라우는 가문의 수장으로서, 한때 카톨릭과 나치즘으로 점철되었던 과거의 볼프스엑을 개선하려는 의지를 갖지만, 근본적으로 볼프스엑을 정신적인 시대로 복원한다는 것이 불가하다는 것을 깨닫고 차라리 이를 소멸시키려 한다.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1931년에 태어난 오스트리아 작가로, 그 무렵의 작가들이 그렇듯 베른하르트 역시 두 차례 일어난 세계대전의 그늘 아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여타의 작가들과 다르게 나치의 침략과 보수적인 분위기로 들끓는 조국 오스트리아를 등지고 관조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대신, 그 안에서 기득권층과 끊임없는 갈등을 야기하는 작품 활동을 했다. 보수 세력으로 대표되는 카톨릭과 나치즘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조국 오스트리아에 대한 증오가 얼마만큼 깊었으면, 베른하르트는 사후 저작권법의 유효기간 동안 자신의 작품을 오스트리아에서 출판하거나 공연하지 못하도록 유언을 남겼을까. 베른하르트의 마지막 소설로 알려진 <소멸>은 그러한 노력의 결정판으로, 주인공 무라우는 그 자신을 포함한 볼프스엑과 함께 조국 오스트리아의 치욕스러운 역사적 사실을 '소멸'하고 싶었던 작가 베른하르트의 '소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베른하르트는 소멸에 대한 자신의 소망을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기법으로 기술했는데, 쉽게 읽히는 스토리 중심의 사건의 흐름을 따르는 표현 방식은 아니다. 그러나 반 자서전 형식을 취하고 있는 무라우의 보고서는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일 뿐이고, 따라서 그 기술 방식 역시 매주 주관적인 표현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사람들은 각각 자신의 느낌을 통하여 본 대로 사고를 보고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나 동일한 한 사건이지만 언제나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다.(316쪽)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중심이 되어 사건을 보고, 판단하며, 해석한다. 이것이 변하지 않는 진리라면 주인공 무라우의 증언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일 수 밖에 없고, 그렇다면 그것은 사건 중심으로 재현될 성질의 것이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베른하르트는 <소멸>을 자기 중심적인 의식의 흐름을 따르는 기법으로 표현하고자 했을 것이다.  전지적 시점으로 쓰여진 사건 중심의 전개 방식은 독자로 하여금 사건을 사실로 믿게할 전지적인 힘이 있지만, 기술자의 의식의 흐름을 쫒는 방식은 그의 증언을 사실로 믿게 하기 보다는 그의 관점에서 보여진 결과물이라는 것을 인식할 여지를 남기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라우의 증언을 허위나 과장의 표현이라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무라우가 누워서 침뱉기와도 같은 근원에 대한 고백을 경멸과 증오로 덧칠할 어떠한 이유도 없으며, 허위나 과장 속에도 일말의 진실은 있기 마련이다. 또한 증언자가 자신의 기억에 대한 보고를 진실로 믿고있다는 그 사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라우의 기억이라 해도 좋고, 자격지심, 혹은 트라우마는 글쓰기를 통한 배설과 추한 기억의 집합소인 볼프스엑을 처분함으로써 소멸되며, 끝내는 무라우의 죽음을 통해 완성된다.

세계가 다시 정상이 되려면 우선 세계를 완전히 파괴해야 한다는 것이다. 완전히 파괴하지 않고서는 새로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159쪽)

 

그러나 자칫 무라우의 가족에 대한 고발은 유독 그 자신은 아니라는 발뺌처럼 보일 소지가 있어 거북스러운 면이 없지 않지만, 근원에 대한 경멸은 자신의 태생에 대한 증오이고, 뿌리로 부터 자신을 거세하는 일은 죽음을 가르키는 것이며, 소멸은 그 자신이 죽음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라우의 고발은 가족이나 가문에 대한 변절이 아닌 역사적인 죄상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고백인 것이다. 베른하르트는 소설을 시작하는 제사로 이를 암시한다. 나는 죽음이 언제나 내 목을 조르는 것을 느낀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든 죽음은 나를 따라다닌다. -몽테뉴

무라우는 자신과 가족, 가문의 끝을 두려워하지 않고 스스로 소멸을 선택함으로써 새로운 오스트리아의 탄생을 꿈꾸었다. 세상은 죽음을 끝이라 이름 하지만, 무라우가 바라본 끝은 새로운 시작임을 믿었다. 인류는 온갖 아름다움과 가능성을 지닌 무한한 것이지, 멍청한 인간들만 자기가 끝나면 세상도 끝난다 생각하고 있단다.(29쪽)

 

나는 주인공 무라우의 과대망상적 자립, 혹은 방약무인의 자유(14쪽)가 부럽다. 어떤 이유에서든 자신의 뿌리를 증오하고, 그를 거부할 수 있는 것은 용기로 여기지기 때문이다. 어느 누군들 가족이나 조국을 선택할 수 있었겠는가. 이곳에 있기를 스스로 선택한 적이 없었음에도, 여기 있고 여기 있을 수 밖에 없음을 저주 하지 않았던 일이 단 한번도 없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이가 있을까. 무라우의 자립, 자유가 과대망적이고 방약무인한 것일지라도 소멸조차도 자신의 선택임을 믿었던 무라우의 정신적 삶을 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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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셋 리미티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선셋 리미티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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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 중에는 유독 죽음의 방법으로 자살을 택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나 생각한다. 스테판 츠바이크, 로맹 가리, 프레모 레비, 다자이 오사무, 버지니아 울프, 미시마 유키오, 헤밍웨이 등 이름을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다른 직업군에 비해 그 수가 더 많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들이 작가이기 때문에 자살했다기 보다는 작가는 어두운 세상에서 방황하는 미약한 인간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많은 만큼,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낙관보다는 절망적인 순간들을 마주할 때가 더 많을 것이며, 절망은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책을 읽다보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자살 뿐이라는 생각을 가끔, 아주 가끔, 정말 가끔 하는 때가 있다.

 

백인이며, 직업이 교수라고 알려진 한 남자가 시속 120킬로미터로 달리는 기차인 '선셋 리미티드'에 뛰어 든다. 그가 생각할 때 유혈과 탐욕과 어리석음이 난무하는 세상은 기본적으로 강제노동수용소이고, 이 수용소의 노동자들, 순진해빠진 노동자들은 제비뽑기로 매일 몇 명씩 끌려가 처형을 당한다(118 쪽) 이처럼 교수가 바라보는 세상은 이런저런 좋은 가치들이 사라진 불합리하고, 앞으로 더 나아질 전망조차도 없는 황량한 곳이다. 그러므로 지식인인 그로서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수 밖에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여긴다.

 

흑인이며, 직업은 목회자로 보이는 또 한 남자가 있다. 그는 한 때 감옥에서 자신을 공격한 상대방을 살인할 뻔한 전력이 있으며, 그 후로 예수의 목소리를 듣고, 어리석음에 몸부림치는 인간을 신앙만이 구원할 수 있다 라고 회심했다. 그가 생각하는 세상은 각자의 자신들이 생각하는 만큼 나아질 수 있으며, 낙관적인 믿음, 혹은 행복한 미래를 위해 인간에게는 절대자인 신이 필요하다 라고 생각한다. 그는 선셋 리미티드로 뛰어드는 남자를 구했고, 자살하려는 남자의 마음이 타락했음을 증명해 보임으로써 죽음으로 대변되는 어둠으로 부터 그를 구하려고 한다.

 

나는 어둠을 갈망합니다. 죽음을 달라고 기도해요. 진짜 죽음을. 죽은 다음에 내가 살아서 알았던 사람들을 또 만나야 하는 거라면 도무지 어째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그건 최악의 공포가 되겠지요. 최악의 절망이. 만일 내가 어머니를 다시 만나 그 모든 걸 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 게다가 이번에는 고대해 마지않는 죽음이라는 전망도 없는 상태라면? 자, 그건 최악의 악몽이 될 겁니다.(131 쪽)

 

스스로 죽기를 택하는 사람들이 말을 남기고 죽든 그렇지 않고 영원히 침묵하든, 그 모든 죽음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자살하는 자의 수 만큼 다양할 것이나, 그 중 공통점 하나라면 죽음 다음의 세상을 꿈꾸지 않는다는 것이 아닐까. 영원한 어둠이 아니라면 죽음이 간절할 이유가 없을터. 모든 것을 내려놓는 심정으로 자살을 택하는 사람에게 후세는 요원할 것이다.

그러나 지식인으로 대변되는 교수의 주장처럼 문명이 더 진화되어 가고, 사람들이 더 교육받을 수록 자살 밖에는 선택지가 없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답은 오래된 미래, 즉 과거로 부터 얻을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공동체'이다. 갈수록 더 심각하게 개인의 파편화를 요구하는 현대 사회에 맞설 수 있는 힘은 '유대하는 각 개인'에서 나온다.

 

극형식을 띤 이 소설은 소설이되, 앞 뒤의 그 모든 이야기는 두 남자의 대화만으로 설명되며, 그 나머지 여백에 대한 상상은 오로지 독자의 몫이다. 그렇지만 두 사람이 탁구공처럼 주고 받는 대화 속에서 죽으려는 이유와 살리려는 이유를 상상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결말 역시도 그러한데, 살아야 하는 이유를 뚜렷하게 제시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여지나, 그러나 소설 속에 승자는 없다. 죽으려는 자도, 살리려는 자도 영원히 평행선을 달릴 뿐이다. 그러나 작가가 말하려는 것은 분명하다. 절망하지 말고, 유대하라.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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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모노프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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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소설이다. 프랑스 작가 엠마뉘엘 카레르가 러시아 정치인이자 작가인 실존 인물, 에두아르드 리모노프의 인생을 추적한 소설이다. 그러나 카레르가 리모노프를 실제로 인터뷰한 것은 두번뿐이고, 대부분의 내용은 리모노프가 쓴 자전적 소설을 바탕으로 씌여진 것이다. 어쨌든 소설 속의 장면들은 실제로 벌어졌던 일이라는 것이다.

 

1943년 우크라이나의 하급 장교인 아버지와 전업주부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외아들 에두아르드는 어린시절부터 자유롭고 위험한 삶을 동경했다. 폐쇄적이고 허무주의적이지만 요령만 잘 파악한다면 편안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구 소련 사회에서 리모노프의 아버지는 평범하고 또 그만큼 어리석은 하급관리였다. 그러나 리모노프는 아버지와 같은 일상적이며 무난한 삶은 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범죄세계에서라도 이왕이면 황제 자리에 등극하고 싶어하는 야심만만한 아이였다.

조폭세계를 동경하는 등의 삐딱한 청소년 시절을 거친 리모노프는 모스크바에서 언더그라운드 시인으로 데뷔한다. 이어 1974년 미국 이민길에 올라 떠돌던 중 여자친구 덕에 억만장자의 집사 노릇을하고, 자신의 인생 역경을 기록해 작가로 데뷔 한다. 그러던 리모노프는 어느날엔가는 느닷없이 사라예보 인종 청소의 주범인 라도반 카라지치와 함께 사라예보의 전장에 등장하기도 한다. 이후 러시아로 영구 귀국한 리모노프는 민족볼셰비키당이라는 극우 민족주의 정당을 창당해 활동하다 쿠데타 기도 혐의로 체포돼 러시아 감옥에서 2년간 복역하고, 현재는 모스크바의 작은 아파트에서 잡지에 글을 기고해 받는 원고료로 근근하게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이 책의 작가 엠마뉘엘 카레르가 리모노프의 일대기를 출판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리모노프는 굳이 자신에 대해 책을 쓰고 싶은 이유를 물었다. 카레르는 리모노프의 인생이 흥미진진하며, 아슬아슬하고, 역사 속으로 몸을 던지는 위험한 선택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하자 리모노프는 이렇게 대답한다. 개떡 같은 인생이지, 한마디로.(515쪽)

 

맞다. 카레르가 묘사한 책 속의 리모노프는 그 자신의 말처럼 때때로 개망나니로 여겨질 만큼 충격적이고 도전적이며, 파격적인 삶을 살았다. 접이식 칼을 늘 호주머니에 꽂고 다니며 폭력배들과 어울리고, 자살을 시도하고, 정신병원에 갇히고, 예술가 집단에 섞이고, 흑인남자들과 상대하고, 뉴욕에서 최고급 파티에 참석하고, A등급의 여자들과 어울리고, 그러면서도 그 모든 것들이 금지되던 과거의 소련 시절을 그리워하는 리모노프. 특히 당황스러웠던 것은 사라예보의 언덕에서 포위상태의 도시를 향해 탄창을 비우는 리모노프를 볼 때 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리모노프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끝까지 의리를 지키는 사람이며, 사람을 버리지 않는 사람, 상대가 아프거나 힘들면 옆에서 챙겨 주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이야기인즉슨, 입으로는 선의와 연민을 부르짖으면서 실제로는 그와는 정반대의 행동을 하는 악인들에 비해 리모노프는 덜 이기적이고  덜 무심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리모노프에게서 작가가 말하는 특별난 인간미를 느끼지는 못하겠다. 아마도 스티븐 갤러웨이의 <사라예보의 첼리스트>를 읽고,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가 유고슬라비아로 부터 분리 독립할 당시 무고한 시민들에게 쏟아진 세르비아계 민병대들의 무차별 총격에 대해 받은 충격 때문이겠지만, 그토록 무심하게 총을 쏘아댈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가슴 속에 인간을 향한 '연민'은 없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한 개인이 어떤 삶을 살던 그건 그 자신의 선택이지만, 적어도 많은 사람들에게 읽힐만 한 삶이라면, 이념이나 가치관, 국가관, 세계관을 떠나 무엇보다 인간을 연민하는 마음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리모노프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연민은 차고 넘쳤다. 도덕군자나 성인이 아닌만큼 인간 전반에 대한 연민이 필요한 이유를 대라고 하면 논리가 빈약하지만, 그러나 리모노프가 사라예보로 달려가 총을 쏴야 할 만한 이유 또한 이 책에서 발견해 내지 못했다.

내 주변 사람이 소중한 만큼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도 모두 존중되어야 한다라고 믿는 나는 리모노프가 경멸해 마지않는 인간박애주의자인지도 모르겠다. 또한 나는 작가 카레르의 말처럼 입으로는 선의와 연민을 부르짖으면서 행동은 그렇지 못한 악인 조차도 되지 못하는 평범하고 작은 이기주의자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르겠고.

그에 비한다면 리모노프는 체제와 기존의 관습, 혹은 모든 좋은 것에 반항하며 자기 나름의 독특한 인생관을 설계하고 지켜온 풍운인 것 만은 확실하다.

 

어쨌든 그래서 '뭐?'하는 생각이 든다. 리모노프의 삶이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흥미진진하긴 하지만 이름도 생소한 리모노프라는 한 사람의 인생일 뿐이고, 특별히 그가 존경받을 만한 삶을 산것도 아닌데우리가 리모노프의 삶에 대해 알아야 하는지 좀 의아스럽다. 도대체 작가가 리모노프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도 말이다. 저명한 러시아계 사학자인 어머니와 나치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한 외할아버지를 둔 작가 엠마뉘엘 카레르로서야 자신의 뿌리에 대한 이해를 위해 러시아의 상황을 개괄하는 리모노프의 삶이 의의 있었겠지만 말이다. 그의 파란만장하고 위험천만한 인생이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모노프, 그 자신과 러시아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우리 모두의 역사에 대해서 말이다(523쪽) 라고 작가 카레르는 말한다.

 

리모노프의 굴곡진 삶이나 리모노프를 영웅시하는 작가 카레르나 도통 이해하지 못했지만, 러시아의 정치 상황에 대해서라면 이전보다는 조금 더 알게되었다. 러시아에선 반체제 인사들과 정적에 대한 암살의 역사가 뿌리 깊다는 것과, 2000년 푸틴 집권 후에도 그 상황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불과 얼마 전인 2월 27일에는 푸틴의 정적인 넴초프가 모스크바 시내 한복판에서 암살 되었다. 지난 8일 넴초프의 암살 혐의자들로 러시아 당국이 발표한 이들은 모두 체첸공화국 출신이며, 이는 이전 암살 사건들에서 처럼 러시아 당국이 체첸계 이슬람주의에 덤터기를 씌우고 있다는 러시아 야권과 서방의 의혹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련의 의혹들은 지금까지 배후가 드러난 적은 한번도 없다고. 이런 사실들에 대해 소설<리모노프>는 르포로 봐도 좋을만큼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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