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제1회 웹진문지문학상 수상작품집
이장욱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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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최상의 질문

   소설집은 대개 나로 하여금 다시 현실로 복귀하도록 하는 유용한 장치가 되어주었다. 특히 장편은 좀 더 비현실에 오래 머물게 하는 반면 단편은 분절음을 통해 약속된 시간을 상기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특히 한명의 작가가 아닌 여러 명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소설집은 더 그렇다. 도무지 앞선 작가에 대한 적응시간을 허락하지 않고서 다음 작가로 이어지는 무례함 속에서 너그러움, 유연함, 편안함을 유지시키긴 어려운 법이었다. 그 중에서도 문학상 수상집은 좀 더 피곤하고 그런 와중에 수상의 기준이 ‘젊음’이나 ‘가능성’일 경우엔 상당량의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어쩌면 (지금 내 나이에) 나이든 어르신보다 젊은이를 만나는 것이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인 것과 같은 이치다. 확실히 나보다 젊은 사람의 글은 힘들다.(그렇다고 나이 많은 사람이 더 쉽다는 뜻은 아니다) 어렵고 쉽고를 떠나 이것은 받아들임의 문제라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내가 두 달 전 읽은 소설집 <깊은 밤, 기린의 말>의 작가는 한명 빼고 모두 나와 같거나 나보다 한참 위였다. 그들의 소설은 살아온 시간만큼 무겁고 견뎌온 세월만큼 깊숙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글들이 자연스레 나를 위로하고 내가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한다는 것을 독서하면서도 실감한다.

   한 달 전 웹진문학상과 성격이 비슷한 <젊은 작가상 수상집>을 읽었을 땐 작년의 같은 소설집보다 힘들었다. 그들의 에너지가 내게로 전해와 내 몸으로 흡수되기엔 거리가 있어 보였고 문제는 (그들이 아닌)내가 움직여야 한다는 부담이 피부로 체감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작품성과 내가 받은 감동의 수준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이번 <웹진 문지 문학상 수상작품집>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소설집은 단편의 모음집이기 때문에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어떤 사람들의 작품을 어떤 순서로 엮었는지에 따라 개별하는 각 단편의 의미가 다르게 전달된다고 느껴왔다. 이번 수상집에 수록된 5월 선정작 최제훈의 <괴물을 위한 변명>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나는 이 작품을 각기 다른 소설집을 통해 세 번째 만나게 되었다. 작가와 작품이 똑같았지만 그때마다 느낌은 조금, 혹은 많이 달랐다. 결과적으로 매번 새로웠다. 단편들은 하나의 독립된 작품임이 분명하지만 소설집에선 유기적인 에너지를 생성할 수밖에 없으며 그들이 의도하지 않았어도 같이 엮어진 작가들과의 공동체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이 작가들이 ‘한국문학이 보여줄 수 있는 문학적 가능성의 최대치’를 발산하였다고 한다면 당연히 독서에너지가 많이 소모될 수 밖에 없고 그런 만큼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나는 문단에서 말하는 가능성의 최대치라는 기준이 일반 독자와의 공감대를 형성하기란 퍽이나 어려운 일이라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최대치는 곧 작가가 할 수 있는 최대, 최상의 질문을 상징한다고 여겨진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질문에 대한 축제의 장이 곧 이번 수상집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경험과 연륜이 많은 작가들이 주로 대답형, 깨달음의 단편을 송신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은데 젊은 작가는 아직 더 질문해야 하고 그것을 독자에게 부지런히 전달해야 한다고 믿는다. 가끔 휴대폰에 MMS수신이 완료되지 않았다는 메시지가 뜰 때 나는 송신자측의 에러라기 보다는 수신자측의 과부하가 원인이라 생각한다. 도저히 예상할 수 없는 질문이 힘든 것은 질문을 받는 자의 역량인 것이지 보내는 자의 결함이라고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들의 질문은 아마 스스로도 정답을 찾기 어려운 과제가 아닐까. 그것은 앞으로 자신과 독자들이 같이 찾기를 바란다는 부탁의 의미가 아닐까. 질문이 훌륭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답이 얼마나 적확하느냐와는 다르다. 좋은 질문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 궁극적인 문학의 역할이 아닐까. 또 문학에서 질문은 대답할 수 없어야, 아니 어쩌면 평생 그것에 답하기 위해 더 살아보아야 할지도 모를, 그러고도 답을 얻을 수 없을지도 모를, 그런 것이 질기도록 우리 생에 에너지를 제공하는 질문이 아닐까. 책을 덮고 결국 마음을 열게 된 것은 내가 쏟은 에너지가 살면서 다양한 질문의 무늬로 각인될 듯 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작품은 독특한 질문들의 전시장이었고 시너지는 다시 일상을 시작할, 그러면서 답을 발견하고자 두리번거릴 동력이 되는 관람이었다. 물론 질문이 다소 난해해 그 반발심리로 오용과 오독이 얼마간 두렵지 않은 운좋은 기회가 아닐까 싶지만.

  이 책에 실린 열 한편의 작품은 웹진( http://webzine.moonji.com/ )이라는 인터넷 공간에서 독자와 소통의 기회를 가지면서 수상작으로 선정된 이력들을 가지고 있다. 우선 편집상의 재치를 언급하고 싶다.





 

 

 

 

 

 


<인터뷰 QR 코드를 스캔하면 작가와의 인터뷰 동영상을 확인가능>

   각 단편은 앞머리에 평론가와 인터뷰한 내용을 싣고 있는데 QR코드를 스캔하면 바로 해당글의 동영상을 확인할 수 있다. 똑같은 내용을 작가의 육성을 통해 전달 받는 것이 흥미로왔고 답으로 언급하는 내용들을 더 가깝게 확인할 수 있었다. (글로 보는 것과 전혀 달랐다) 종이매체를 통해서 다시 원래 순간이 재생되는 편집방식은 ‘<웹진문지문학상>이 한국문학사상 최초로 웹진이라는 인터넷 공간을 통해 1년 동안 심사의 과정이 중계되고 결과가 발표되는 문학상’이라는 취지와 특성에 잘 부합하는 전략이었다. 이른바 3D와 스마트폰 시대에 걸맞는 문학상의 재현이었다. 최종적으로 몰아서 이들 인터뷰를 들어보았고 글이 아닌 목소리를 통해 나는 그들이 질문하고자 하는 화두에 조금은 더 접근할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답하고 있었다. 무엇을 물어 본 것인지 자신들이 세상을 향해 던지는 질문의 핵심을 답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공교롭게도 살면서 우리가 묻어 온 것, 우연찮게 파묻혀 버린 진실, 혹은 기를 쓰고 진실의 부재를 메울 것들을 찾아 헤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그들이 물어 온 것은 지난 시절 우리가 우리도 모르게 묻어 온 것이 아니었나 싶도록. 그들이 묻고(問) 묻은(埋)것, 그것은 결코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구경만 하기엔 난감한 사안이었다. 서로가 얼굴만 맞대고 한참동안 말이 없을 확률이 많은 차원인 것이다. 그들은 왜. 우리는 왜. 나는 왜.



말할 수 없는 것을 ‘묻다’(問)

   열 한 편 중 대상으로 선정된 이장욱의 <곡란>은 이들 질문 중 가장 정곡을 찌르는 한 가운데 있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가장 어렵고도 가장 듣고 싶은 그래서 누구나 하고 싶지만 선뜻 주저하는 질문일 터이다. 이 작품은 소설가의 문 두드리는 노크소리와 문 닫고 나가는 발걸음 소리가 가장 크다고 느껴진다. 물론 대상의 아우라, 이장욱 소설의 노련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소재와 주제가 죽음을 말하는 소설가, 즉 작가로서 자신의 고뇌를 고통스럽게 전시하였기 때문이다. 이장욱은 진실과 허위가 교차하는 찰나의 순간을 최대한 길게 포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독자에게 은밀한 힌트와 함정을 동시에 제시하면서 진실찾기 게임을 진행하는 유머와 재치는 이장욱 소설의 결말이 누구보다 궁금하도록 만드는 보기드문 특장이다. 그런데 이번 작품은 그가 <고백의 제왕, 2009>, <변희봉, 2010>, <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 2011>등에서 보여준 진실과 거짓, 현실과 환상이라는 대립장치가 작가가 조성한 어느 깊은 골짜기에서 결국 타협하는 인상을 받았다. 인터뷰에서도 밝혔듯이 죽음을 이해하는 것이 오만스러운 것이라는 생각, 소설가가 죽음을 선택한 주인공을 구원할 수는 없다는 패배감, 섣부른 희망 같은 것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죽음자체의 풍경을 진짜 죽음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퇴락한 지방 소도시에 사는 여관주인 김상태는 ‘귀신잡는 해병대 출신’이다. 동네가 목란동이라 그곳은 ‘목란장’이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김상태는 이 소설의 마지막에서 귀신을 잡지는 못하는, 살다 별 꼴을 다보는 변변치 못한 중년남자로 등장한다. 목란장 202호에 자살의 모임을 제안한 소설가 고희성과 닉네임이 스몰, 코끼리인 그들이 모여든다. 이 작품에서 목란장은 전구하나가 나가는 바람에 곡란장이 되는데 곡란의 ‘곡’을 죽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골짜기(곡,谷)로 볼 것인지 죽음에서 삶으로 돌아 나오는 만곡(곡, 曲)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모여든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곡, 曲)로 들을 것인지는 사람마다 틀릴 듯하다. 그 어떤 의미의 곡이 되든 그것은 인생 최대의 환란(난, 亂)의 시간이 되는 것에 공감의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가장 의미심장했던 대목은 그러한 곡란의 현실에서 소설가로서 고희성이 평소 ‘죽음을 대면하지 않고는 사람에 대해 한마디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부분이다.

   
 
죽음은 삶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는 건 아닐까. 죽음은 죽음자체를 밀고 나가는 힘으로만 충만한 것은 아닐까. 이상하게도 이 의문은 고희성의 머리에 접착제처럼 달라붙어 떠나지 않았다.   -29P

나는 소설을 씁니다. 소설을. 죽음을 대면하는 소설을 씁니다.  -45P
 
   


   자연, 문장에서 고희성을 이장욱으로 읽게 된다. 이들을 마치 연극무대 대하듯 몰래 지켜보는 김상태는 삶과 죽음에 초연했다기 보다 그것들을 무시하면서 일상을 버티는데 익숙한 오늘을 사는 대다수 소시민의 표상으로 느껴졌다. 아무리 왕년에 귀신을 잡는 해병대 출신이었더라도 막상 자기 생에 들이닥친 죽음의 현장에선 의미없는 과거인 것이다. 죽음은 그것이 처해지는 입장과 그것을 바라보는 시점이 중요한 사안이 아닐까. 이 소설에서 김상태의 시선으로 전달되는 죽음의 풍경은 다소 우습고 지루하고 어이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소설가 고희성의 시선으로 관통되는 죽음의 풍경은 이해하기 힘든 모습이다. (자살로서)누구나 자신이 죽어야 할 이유는 타당하지만 타자가 선택하는 것엔 상대만큼 공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소설가가 보기에 그들이 죽어야 할 이유는 곧 살아야 할 이유와 동일했다.

   나는 평소 자살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누구보다 잘 살고 싶었기 때문이라 여겨왔다. 잘 살아보고 싶은 욕망이 강할수록 좌절의 아픔이 클 것이고 그것을 해결해야한다는 의지또한 강한 것이 아닐까 하는. 소설이 웃기면서 슬펐던 건 바로 죽고 싶은 욕망 끝에 그동안 버티고 있던 살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림에 있었다. 그들이 연출하는 죽음의 풍경은 살고자 하는 몸부림에 다름없었다. 작가는 누가 죽거나 사는 것으로 마무리 하지 않고 그동안 죽는 것으로 삶을 택했던 사람들을 한자리에 등장시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일상을 지속하는 여관주인 김상태의 일상을 제시한다. 이들이 경험한 건 죽음의 허상일까, 삶의 실상일까. 각자가 견뎌내야 하는 고유한 자기 죽음의 무게, 낯선 자기 죽음의 풍경들만 남겨지고 우리는 무력감에 도취되어 죽음의 감각을 상실한다.

   이 작품을 읽고 나는 2010 이상 문학상 대상 수상작 박민규의 <아침의 문>을 떠올렸다. 물론 여관방에 같이 투숙했다가 다음 날 아침 유서를 남기고 함께 투숙한 사람이 죽어버린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이라는 작품도 중첩되었다. <아침의 문>에선 인터넷 동반자살이라는 소재와 죽음을 택한 자의 시선, 죽음으로 달려가는 과정상의 불가항력적 에너지, 추상을 구체화한 스타일적 유머들이 언뜻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박민규 작가는 죽음의 끄트머리에 또 따른 생명의 탄생을 기묘하게 중첩시켰고 이장욱 작가는 그들의 선택에 어떤 조치도 하지 않았다. 일말의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불친절한 결말이었다. 그는 왜 그 누구에게도 손길을 내밀지 않은 것일까.

  그러나, 죽음이 두렵다고 느껴질 때 내가 외우는 문장이 있다.

   
 
가장 두려운 악인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 죽음이 오면 이미 우리는 존재하기 않기 때문이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에피쿠로스
 
   


   이미 2천 년 전에 죽음에 대한 공포를 정면에서 극복하려 했던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말한다. 그렇다면 ‘죽음은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 모두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왜냐하면 ‘산 사람에게 아직 죽음이 오지 않았고, 죽음 사람은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죽음은 죽음과 동시에 어떤 고통도 제공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음을 피하든 죽음을 바라던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이다.

   이 철학자의 가르침대로라면 어떤 소설가도 죽음을 대면한 다음 죽음이나 삶을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장욱은 그렇기 때문에 말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 고희성은 여전히 묻는다. 그렇다면 자신은 소설가로서 죽음을 말할 수 없는 것이냐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의미없는 일이냐고. 독자인 우리는 태연스럽게 대답할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 말하기 어려운 것을 말하려고 소설가가 되는 것 아닌가, 말이다. 세상에 말할 수 있는 것들만 있었다면 아마 작가는 존재치 않았을 것 같다고. 우리끼리 말하고 나면 그만일거라고. 죽음 역시 말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산 사람이 아닐 것이며 살아있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말할수 없다는 말 밖에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하기 힘든 것을 ‘묻다’(埋)


1. 매몰埋沒의 현장

   아마도 묻히는 쪽이 피해자가 된다면 그건 매몰당하는 일일 터이다. 한국 현대사에 매몰의 현장으로 선명하게 각인된 장소는 아마도 삼풍백화점일 것이다. 거리감은 있지만 칠레의 광부도 비슷한 느낌이다. 이 책에서 생이 매몰된 장소는 이국 만리 바닷가에서부터 시장터 붕괴되는 주택, 잠실 메인스타디움, 엄마의 자궁등 예상할 수 없는 뜻밖의 실체적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보다 심층적인 주인공의 내면으로 들어가 보면 매몰된 사람모두 각자 생을 부여잡았던 신념들이 누구보다 오롯했음을 알 수 있다. 어부의 노동자는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가, 사이비 신교도는 교주가 죽어도 믿음을 버리지 않겠다는 고집이, 학교 대표로 뽑힌 꼬마는 자기가 아는 모두에게 내 모습을 자랑하겠다는 포부가, 뱃속에서 살아남은 쌍둥이 소녀는 소중한 생명으로 존중받고 싶다는 본능이 강렬했다. 이들 모두는 누구보다 강했던 자신의 신념이 서서히 매몰되면서 육체적, 심리적 죽음을 맞이한다. 대개 동료 혹은 경쟁자의 매몰되는 순간을 자기 눈으로 확인하거나 심지어는 자신이 매몰되는 순간마저 스스로 확인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정용준의 <가나>는 이미 익사하여 죽은 자가 자신의 죽음 직전의 시간을 복원해 내는 아련한 문체를 통해 생의 슬픔을 심연의 바닷속으로 침몰시킨다. 익명의 익사자가 숨지면서 죽음으로 가져가는 이별의 고통은 그대로 우리가 익사자를 관망하는 죄책감으로 이어지며 바닷바람을 동반한 서러움을 남김없이 주입한다. 바람과 함께 죽어가는 순간을 중계하듯 아름답게 그려내는 장면 구성이 인상깊었다. 정용준은 <떠떠떠, 떠>를 통해 익숙한 서사를 극적으로 몰아부치는 추진력을 확인한 바 있다.

   김성중의 <게발선인장>은 사이비 종교를 삶의 유일한 끈으로 여겨온 어느 할머니의 생의 애착을 그렸다. 외현으로 드러난 것은 할머니를 주인으로 둔 세입자 대학생과 할머니가 받들어 모시는 교주 노인을 통해 인간이 보여주는 맹목성의 긍정과 부정을 질문하는 형식이다. 할머니는 노인과 이웃의 배신, 재개발 시행으로 삶의 터전을 잃는 처연한 매몰자의 운명이 된다. 살면서 할머니가 잘못한 것은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것 밖에 없었다. 할머니에게 매몰이 색다른 구원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홍의 <나의 메인스타디움>은 80년대 대규모 국가적 축제에 동원된 어린 소녀의 심리변화를 통해 아무리 발버둥쳐도 손해를 입지 않고선 거대 메트로폴리스를 탈출할 수 없는 현대인의 서글픈 자화성을 반추하고 있다. 외국인을 향한 가식적인 친절, 눈에 보이는 성과, 남들에게 부러움을 사는 조건들을 추억으로 매몰당하며 빠르게 지나쳐온 오늘에 당신과 내가 마주한다는 이야기는 올림픽 정신을 강요받고 자란 내 세대에게 익숙한 서사였다. 그렇게 보자면 내 세대는 단 한번도 교육현장에서 육체적, 심리적 매몰을 경험하지 않는 순간이 없었다. 그런가 하면 사람이 엄마의 뱃속에서의 최초 모태 기억을 극복하지 못하고 트라우마 속에서 고통스런 현실을 반복한다는 최은미의 <눈을 감고 기다리렴>은 흡사 성장소설의 언어를 한껏 과시하는 듯했다. 뱃속에서 쌍둥이로 태어난 나머지 소녀는 사람들이 형제의 피와 살을 통해 살아난 독한 가해자로 인식하지만 정작 생존한 당사자는 엄마의 자궁속에서 매몰된 것은 자신이 누려야 했을 당연한 생의 안온, 그 보금자리로서의 요람이었다 말한다. 이홍의 <나의 메인스타디움>과 최은미의 <눈을 감고 기다리렴>의 경우 주인공은 죽지 않고 계속 매몰의 기억을 지우지 못한 채 앞날을 살아갈 것을 예고하고 있다. 한번 사정없이 매몰되었다고 기억이 지워지거나 긍정으로 전환하지는 않는다는 것. 사람에게 매몰의 추억은 곧 성장의 기억은 아닐까.

   이런 작품들을 보면서 내가 새삼스레 환기하는 것은 생의 어느 시기에 예고없이 닥쳐오는 실체로서의 고립감이다. 사람이 어딘가 무엇으로부터 파묻힌다는 것은 필히 타의적인 외로움을 동반한다. 이것은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우리가 눈감는 날까지 누구에게나 동일한 생체반응이 아닐까 싶어서다. 결국 살아간다는 것은 이렇듯 수많은 매몰된 현장을 털고 일어서 살아남은 자들의 증언인 것이다. 그렇게 다시는 매몰되지 않기 위해 또 다른 생의 끈을 찾아 헤매는 것이 남은 생을 보장하는 일인 것이다.


2. 매장埋葬하는 사람들

   누군가에 의해 파묻히지 않고 직접 매몰의 주체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것이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한 채로 묻거나 혹은 우연에 의해, 때론 실수로 인해 그들은 시간을, 공간을, 사람을, 기억을 매장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이유의 <커트>는 '가위'가 제공하는 폭력의 기억에 천착한다. 이 작품에서 ‘가위’는 미용사가 최초로 획득한 자기방어의 도구였으며 최후까지 잡고 있을 것으로 보이는 공격의 장치이다. 예상했듯이 가위를 손에 쥔 이들은 모두 여성이었고 이들은 사회적 약자이면서 하나같이 빈곤층에 속하는 경우였다. 손끝의 고통을 잃어버린 딸아이와 그 딸아이를 버린 미용사, 그 아이를 받아 기른 미용사. 이들은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것에 가위로 커트함으로써 생을 지켜내온 공통의 이력이 있다. 머리카락을 잘라 쓰레기로 처리하듯 그렇게 상처도 매장시켜 온 것이다. 상처를 매장하는 것은 이들 여성이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경쟁력이자 삶의 수동적 전략이었다. 황정은의 <옹기전>에선 특이하게도, 실제로 항아리가 매장당한다. <커트>에서 ‘가위’처럼 <옹기전>은 ‘항아리’가 이야기를 끌고 간다. 항아리가 실마리고 항아리가 함정이다. 어린 소년이 항아리 하나를 머리에 이고 무법자처럼 자기식대로 밀고 나가는 모습은 꼭 작가 황정은의 소설작법과 닮았다. 철거가 한창인 옆 동네에서 우연히 발견한 항아리가 매일 밤 서쪽으로 가면 다섯 개가 더 있다는 소식을 전해줌으로써 소설은 속도감을 더해간다. 하지만 어렵사리 도착한 서쪽 끝에서 그들 항아리는 늘 반복되 오던 전몰의 광경을 선사하고 우리는 (원래부터)구경꾼인 채 그 무엇도 그곳에서 건져오지 못한다. 공사꾼들이 쉬지 않고 매장하는 항아리는 문학이 환유할 수 있는 공사판 한국사회의 뒷모습일 터이다. 이 작품은 보다 본질적으로 확실히 매장하는 서사의 진수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어쩌면 이 수상집이 전언하는 장소에 가장 근접한 작품일 수 있을 것 같다. 연쇄살인범이 자신의 가족과 지인과 자신의 인생마저도 매장하는 과정을 우발적 서사의 메타포로 그러나 무덤덤하게 연출한 정소현의 <실수하는 인간>은 역으로 우리가 그들을 사회적으로 매장해온 이력을 묻고 있다. 누군가 그들의 행복과 희망을 처절하게 외면하고 깊숙이 묻어 버렸기 때문에 그들이 사람과 세상을 매장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게 된 것이 아니냐 반문하는 것이다. 정소현은 단편의 서사에서 장편의 호흡과 드라마틱한 전개및 결말을 선호하는 작법이 감지된다. 이 작가의 장편이 기대되는 이유이다.

   내가 대학생 시절에 ‘묻어버린 아픔’이라는 가요가 유행한 시절이 있었다. 주로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안타까와하던 청춘이 자신의 욕심을 가슴에 묻고 그 애절함으로 부르짖는 노래였다. 가사중반에 ‘변한 게 세상이라지만 우리 사랑 이대로 간직하며 먼 훗날 함께 마주 앉아 둘이 얘기할 수 있으면 좋아’라는 아픈 구절이 있다. 묻어버린 아픔이 먼훗날 행복으로 승화하는데는 오래 간직만 하고 사랑했던 순간의 기쁨만을 추억으로 새겨두는 자세가 필수적인 것이다.

   사랑하지 않고 사랑받지 못한 사람들은 상처를 묻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자기 가슴에 묻는 방법을 배운 적 없기 때문에 남의 가슴에, 혹은 남의 장소에, 심지어는 남의 삶까지도 잔인하게 묻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이 작품에서 매장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사랑, 그 하나가 죽을만큼 절실했는지 모를 일이다. 사랑을 가슴에 묻고 사는 사람들은 남들의 가슴에 못을 박지는 못하지 않을까. 우리가 묻고 살아야 할 것이 나의 실수나 과오, 내가 저지른 탐욕, 복수의 결과뿐이라면 우리는  그렇게 매장하는 생을 중단할 확률은 없어 보인다. 나는 그 사실이 제일 슬프고도 쓸쓸했다.

3. 매립埋立의 꿈

   그렇다면 매몰되고 매장하는 이 고독한 세계에서 구멍난 그곳은 영원히 방치된 채 외면당해야 하는가. 누군가 파헤치고 깨끗이 묻어버렸다면 겉으로는 이상이 없어 보일지 모르겠다. 소중한 실체가 사라졌다 해도 시각적으로 무언가 사라졌다는 느낌은 받지 않을 것이다. 마치 이 화려하고 거대한 자본주의에선 하나둘 사라지는 모든 것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듯이. 이 책에서 젊은 작가들은 하나를 살리기 위해 희생된 하나, 그 나머지 하나의 구멍을 메우는 방법으로 매립을 선택한 듯 했다. 언뜻 보기에 근본적인 대책이 아니라 일시적인 미봉책으로 여겨질 수 있으나 중요한건 나름대로 메우는 행위를 통해 조심스레 복원되는 우리네 현실일 것이다. 그 현실은 거의 진실에 육박하는 무게감을 조성한다. 어떤 책에서보다 이번 수상집에서는 현실을 메우는 방법이 독특했는데 나는 그것이 작가들의 내부 자아들간의 치열한 싸움의 흔적이라 생각한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양가적으로 동등한 대립항들이 그대로 소설로 노출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아주 오래전 옛날 이야기를 메우고, 자신이 잃어버린 놓쳐버린 관계를 메우고, 혼란스런 자아를 메우는 듯 보였다. 열심히 메워서 이루어진 것은 어느 한쪽의 완성이 아니라 여전히 완성되지 않는 같은 비율의 양쪽 동등함이었다. 저울로 잰듯 그들은 중립과 균형만이 서사의 목적이라 여기는 듯 했다. 그들이 전해준 저울위 팽팽한 에너지야 말로 다른 작품들이 허물어 놓은 거대한 구멍을 다시 채울수 있을 만큼.

   나는 최제훈의 <괴물을 위한 변명>을 『현장 비평가가 뽑은 2010 올해의 좋은 소설』과 『퀴르발 남작의 성』이라는 작품에서 만났으니 이번에 세 번째이다.『현장 비평가가 뽑은 2010 올해의 좋은 소설』에선 단연 가장 참신한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었고 외려 『퀴르발 남작의 성』에서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 얌전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이번 수상집에서는 원래 이야기를 자기 스타일로 매립하는 솜씨좋은 기술자로 보였달까. 작가는 메리 셰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분석, 재해석하는 과정을 서사로 이끌어 가면서 프랑켄슈타인이 괴물로 인식되기까지의 그 변질된 진실을 허구로 구성해낸다. 무언가 최초 원작에서 감지한 허점에 자신만의 논리를 덧대고 그 자리를 능숙하게 봉합해 완전 다른 이야기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최제훈이 말하는 괴물에 대한 변명은 궁극에는 누가 괴물인지 질문하는 섬뜻함으로 남겨진다. 작가는 이야기 전승과정에서 진실의 누락 및 수정 여부를 허구로 추적, 심문하는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그는 괴물이라는 환상에 대한 개념 사용여부와 목적 및 이용 행태는 모두 우리 인간의 몫이었음을 주장한다. 가장 극적인 논리는 박사의 괴물적 자아가 곧 괴물 프랑케슈타인이라는 분석이다. 이는 슬몃 그동안 우리가 보고 떠들어온 프랑켄슈타인이라는 괴물은 우리안의 온갖 추악한 욕망과 허영, 광기의 조각들을 한데 묶어 놓은 집합체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아닐까. 이 작품을 세 번 읽으면서 얻은 깨달음은 누구나 자신속에 자기가 만든 괴물이 살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최제훈 작가에 괴물조각이 소설이라는 문학으로 바느질되어 탄생한 것이라면 우리들에게도 내재된 괴물조각은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완성되리라 하는 타당한 변명을 내밀수 있었다. 결국 그는 자기속의 괴물, 또 다른 자신으로서의 자아를 확인하기 위해 괴물을 깨끗하게 매립했고 그것의 결과는 꿈처럼 이루어졌다. 이제 그가 창조한 괴물을 우리에게 비추어 볼 때가 아닐까.

   김유진은 배경이 되는 공간과 인물간 관계를 암시하는 정황을 글로 섬세하게 그려내는 작가이다. 캐릭터나 사건이 분명하지 않고 말 그대로 <희미한 빛>을 의지삼아 안개처럼 시공간을 장악한다. 그런데 묘하게도 대단한 일 하나 없이도 시종일관 독자를 긴장하게 하는 에너지를 지녔다. 나는 회화적, 감각적, 미학적이라는 수식과 더불어 연극적이라는 작법을 덧붙이고 싶다. 이번 작품에서 감지되는 연극적 기운은 나와 나의 옛날 남자친구 B, 지금 내가 동거하는 L, 그리고 L의 여자친구라는 우연한 사각관계이다. 나는 한마디로 그 누구와도 제대로 소통하지 않으며 고립된 존재로서 그저 얽혀있는 관계 속에서만 긴장을 발휘하는 경우였다. 그녀가 소통의 부재, 관계의 상실을 메우는 방법은 일상의 습관이면서 그것의 관찰 혹은 묘사의 디테일로 보인다. 주인공이 자신이면서 마치 자신은 연출자나 관람객처럼 카메라에서 빠져나와있는 듯한 무심함이 고독한 일상을 견디게 해주는 핵심이었다. 김선재의 <독서의 취향>은 이 책에서 가장 철학적으로 느껴졌으며 가장 관념적인 주제를 아무렇지도 않게 밀고 나가는 작가의 의뭉스러움이 놀라웠다. 이 작가가 자신을, 소설을, 이야기를 메우는 방식은 자기해체였는데 그 환상은 지독히도 현실적이어서 반전스러울 정도였다.

  이 작품에서 나와 안나, 그리고 안네의 관계를 의심할 수 있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시는 시인이 쓰고 나는 책이나 팔고 나와 살지 않는 안나는 나를 사랑했고 나와 사는 안네는 나를 지상에 단단이 묶었다.  
-363P

 
   


   이 소설은 ‘나’라는 인간을 ‘안나’와 ‘안네’로 분리하는 그 곳의 분열과 혼란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안나’가 나의 가장 안쪽(內)에 있는 나도 알 수 없는 나, 즉 내가 아니라 생각하는 나라면 ‘안네’는 그 안쪽에서 ‘안나’와 대치하는 입장의 상대적 개념(네)으로서의 2인칭 나라 할 것이다. 결국 나는 원래 ‘나’와 ‘안나’와 ‘안네’의 총합인 것이 이 작품을 이해하는 전제인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 조건을 받아들이기가 말처럼 쉽지는 않은데 그것은 세 명의 자아가 서사를 통해 각기 주장하는 바가 상이하고 그것들이 상충되는 위치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말더듬이면서 시인이면서, 독서가이면서 서적외판원인 나는 나를 감상하기 위해 취향을 분리하고 현실 오작동이라는 장치를 통해 자기 현실을 메워버린 것이다. 결국 나는 이 작품 말미에 늘 그렇듯 모든 것이 ‘개인적 감상이 만들어낸 형식적 오류’라는 것을 인정하고 분리된 현실을 제자리로 복원시킨다. 이것이 나가 말하는 자신의 ‘독서의 취향’이라 여겨진다. 하지만 현실은 취향이나 감상의 문제가 아니고 진심이나 비밀과 별 상관없는 종류의 텍스트였으며 그곳은 나의 분리가 필요치 않은 여기, 이곳인 것이다. 잔인한 건 언제나 현실이라는 사실만 믿을만한 사실이었다.



   먼저 출발한 <젊은 작가상 수상집>의 경우와 비교하자면 <웹진 문지 문학상 수상집>은 조금 더 중립적이다. 물론 중립의 기준은 순전 독자인 내 기준일 터이다. 질문하는 영역이 간접적, 내재적이며 답하는 방식이 관념적이다. (작가의 인터뷰를 육성으로 꼭 듣기를 권한다) 젊음이 이런 것이라면 젊은 작가는 지금 한국문단에서 가장 치열하게 생각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틀림없다.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반가우면서도 또 가장 괴로울 때가 소설가의 질문이 곧 내 인생의 질문과 일치할 때가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 이장욱의 <곡란>은 최근에 내가 하고 있는 고민과 가장 많이 겹쳐진다. 나는 언젠가부터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오늘을 살았구나 보다는 오늘도 죽었구나, 이런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된다. 하루하루가 살아내었다는 생각보다 이로써 오늘은 다 소진했고 내 인생에서 죽어진 날이 되었구나 싶은 것이다. 하루 죽었다... 산다는 것을 죽는 그날까지의 마이너스 여행이라 보았을 때 오늘 하루는 그 전체 일정에서 다 써버린 날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렇듯 누구나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 실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의 같은 실상임을 나는 스스로 깨닫게 된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레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되는 일이었다. 아는 것이 힘이고 모르는 것이 무서운 것이므로 죽음을 알고 싶다는 생각으로 발전하게 되면서 그렇지만 사람은 누구도 죽음을 알면서 그것을 알았다고 말하거나 글을 쓸 수는 없겠구나를 가슴치며 땅을 치며 마침내 실감하게 되었달까.

   하지만 나는 답이 없어도 자꾸 묻다보면 어느새 내가 무언가를 말하고 있거나 무언가를 쓰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오늘 이 작가들이 내게 던져준 질문들은 모두 소중한 계기가 되어 오늘도 죽어가는 내 자신을 한편 살아가게 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다. 삶은 그렇게 죽음을 번복하며, 자신을 전복함으로써 답을 찾아가는 여정의 반복일 것이다. 또 하나의 길을 만들어준 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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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1-07-15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젊은 작가상..이제 겨우 절반 읽었는데 말입니다. 문학상 수상집이 좀더 피곤하다는 말씀, 적극 공감입니다. 히
그래서 좀더 쉬었다가 나머지 절반 읽으려고요. 아..근데 웹진문학상..그것도 문지..이라니까 자꾸 읽고 싶어집니다요. 중립적이라는 말씀도 좀 궁금하구요. 아..qr코드를 배워서 저 동영상, 꼭 볼겁니닷. 아이폰도 있는데 말입니다. 써먹지를 못하네요..ㅠ.ㅠ

저는 <게발선인장>이 제일 눈이 가네요. 주위에서 좀 보는 할머니들이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