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전후사의 재인식
김도연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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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그런 걸까. 같은 구간을 오랜 기간 왕복하는 경우, 운전하다 보면 꼭 어느 지점에서 눈에 띄는 표식을 발견할 때가 있다. 터널지나고 나면 왼편에 큰 공장이 있다든지 대형광고판이 나타나면 오른쪽에 무덤이 있다든지 반복되는 풍경속에 어디만큼 왔다하는 무의식의 내비게이션. 흡사 나만의 약속된 이정표라고 할까.

내 경우 출퇴근하는 고속화도로가 끝나는 지점에 놓인 휴지통이 그랬다. 휴지통이 나타나면 집에 다왔다는 신호인데 그건 곧 도로가 끝나고 횡단보도와 신호등이 그 장소에 위치하므로 잠시 멈추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 은색 휴지통이 언뜻 꼭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보일 때가 있었다. 야근을 하고 열두시가 넘어 반졸음 상태로 운전하다 휴지통 지점에 이르면 깜짝 놀라 잠이 깨곤 했는데 어느날 우두커니 서있는 그 휴지통이 아버지로 보이는 것이다. 아버지는 내가 첫 아르바이트 월급으로 사드린 초록색 겨울 점퍼를 입고 모자를 쓰신 채 지팡이를 짚고 계셨다.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부릅떠보면 아버진 아주 느린 걸음으로 유유히 횡단보도를 건너고 계셨다. 아버진 십오 년 동안 신장병으로 투병생활을 하셨고 나는 아버지를 태우고 병원을 갔다가 투석이 끝나면 다시 태우러 가는 기사역할을 십여 년 했다. 병원에 내려드릴 땐 문제가 없었는데 끝나고 나오는 아버지를 태울 땐 병원측의 차량통제로 정차가 수월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정확하게 시간이 맞지 않거나 많이 바쁜 날엔 유턴할 시간이 없어 기운없는 아버지에게 횡단보도를 건너 서계시라 짜증섞인 부탁을 하곤 했다. 고속화도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마치 나를 기다리는 것 마냥 서계시던 아버지는 바로 투석을 마치고 내 차를 기다리던 아버지의 옷차림 그대로였고 횡단보도를 힘없이 건너가던 그 모습은 바쁜 내 시간을 줄여주려 지팡이를 짚고 길을 건너던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 시절 나는 퇴근할 때 조금만 피곤해도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고 그 순간이 너무나 섬뜻해 다른 길로 우회하고 싶었지만 또 막상 퇴근할 시점이 되면 그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늘 같은 길을 택하곤 했다. 처음 아버지를 보았을 땐 두려웠고 잠도 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도 익숙해지니 슬슬 아버지를 잠깐 스칠 수 있는 그 찰나도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희안한 건 정신을 차리고 아버지를 기다리면 휴지통은 그냥 휴지통으로 보일뿐이었다는 것. 내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 한창 졸려서 운전이 버거워 죽겠는 그 순간에 아버진 얄궂게도 내 정신을 일깨우시며 만남을 걸어오셨다. 나는 이 이야기를 살면서 아무에게도 해본 적이 없다. 혹시 누구에게라도 말하고 나면 아버진 그냥 휴지통이 되버릴 것 같았기 때문에. 내가 너무나도 바빴던 그 시기의 내 비현실은 사실 같은 시기 가장 분명한 내 현실이기도 했는데 돌이켜보니 아버지 돌아가시고 칠 팔년을 나는 휴지통 아버지와 매일 극적인 조우를 하며 집에 들어간 것이었다.

사람에게 어떤 환상은 터무니없거나 허깨비같은 비현실이 아니고 자신에게 가장 생생한 상처로서의 아련한 증거가 아닐까. 그때 내가 보았던 아버지의 환영(幻影)은 엄연한 내 현실의 반영(反影)은 아니었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휴지통 아버지에게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던 야근 시절을 떠올렸다. 소설은 휴지통이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가 휴지통이 되는 사연들로 가득했다. 그래서 사연들은 하나같이 각자의 상처와 후회, 그리움과 연민을 자아내는 애틋한 색조가 많았다. 떠난 사람, 죽은 사람은 언제나 그렇듯 비현실적으로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내 현실속에서 사라지는 건 아닌 것이다. 나 역시 살면서 헤어져버린 모든 인연을 생각해보면 그들은 사라졌기로 더욱 내 영혼과 가까워졌다는 생각마저 든다. 가만 보면 우리는 그들을 언제나 내키는 대로 불러내고 돌려보냈다가 또 어떨 땐 그들의 내키지 않는 방문에 가슴을 쓸어내리고 돌아가지 않는 그들 때문에 번민의 시간을 가지곤 한다. 그것이 그들과 헤어진 내가 헤어짐을 견디는 방법은 아니었나, 그런 생각이 든다. 이 소설, 내게는 사람이 이별하고 난 후 헤어짐을 견디는 여정을 기록한 기행문이었다. 꼭 가야 할 도착지를 알고 있으면서 몇 번이나 그 주변을 맴돌다가 포기하다가 또 찾아가기를 반복하는 되돌이표 운행을 멈추지 못하는 어떤 운전자를 떠올리게 했다. 눈이 무섭도록 내리는 강원도의 어느 산골짜기 하염없는 폭설을 뚫고서라도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는 사람처럼 그는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대관령 아흔 아홉 고개쯤은 애초부터 문제가 될 것으로 보이지 않았고 겹겹이 쌓여가는 흰눈 쯤은 되려 그를 포근히 감싸안는 모성이나 고향의 시원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며칠 헤메이다 설령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돌아가는 길은 사방도처가 그이의 소식을 전하는 전령사들로 가득했기에 결코 쓸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고 할까. 그는 어쩌면 누군가를 찾으려 떠난 것이 아니고 그렇게 헤매이고 싶어, 헤매이다 발을 헛디디고 싶어, 마침내 쓰러져서라도 잠시 꿈속에서 만날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은 아닐까. 몇 날 며칠을 헤매이다 돌아갈 지언정 눈처럼 쌓여버린 그리움의 회한이야 녹여지지 않겠지만 다시 돌아온 현실의 눈바닥은 거뜬히 즈려 밟을 수 있었을 것이기에.

1. 착시의 터널을 지나

여덟 편의 단편이 강원도를 가는 여행길이었다면 나는 꼭 지금은 폐쇄된 옛 영동고속도로를 힘겹게 타오르는 초보운전자가 된 느낌이었다. 지금은 내비게이션 덕분에 앞으로 펼쳐질 도로상황을 미리 예측할 수도 있고 운전하는 것이 지루하지 않지만 장시간 무작정 도로나 앞 차만 보고 운전하다 보면 순간적으로 착시현상이 일어날 때가 많다. 특히나 한밤중에 운전자는 원근감과 속도감에 둔해져 반절만의 정신으로 페달을 밟고 있을 경우가 허다하다. 이 책의 반 이상은 바로 장시간 고속도로 주행시 불현듯 찾아오는 착시현상을 연상시킨다. 유난히도 작가는 산길을 타고 넘는 주인공이나 고개를 넘어가는 운전자의 시야를 세밀히 묘사하는 방식으로 인물의 심리상태를 대변하는 것에 능숙한 듯 했다. 강원도 출신 작가가 오랜 기간 같은 길을 오가며 상념에 빠진 시간들과 비례하는 것이었을까. 산도 타버릇한 사람에겐 정상까지의 시간이 단축되는 법이니까.「꾸꾸루꾸꾸 빨로마」,「메밀꽃 질 무렵」,「사람 살려!」의 이야기는 수백 번 고향길을 오가며 운전상의 도로에서 환상으로만 만나고 헤어졌던 모든 추억의 인물들을 부러 찾아가는 이야기로 느껴졌다.

첫 번째 이야기였던 「꾸꾸루꾸꾸 빨로마」 는 까마귀 울음소리와 함께 깜짝 출연하는 추억속의 사람들로 이해되었다. 죽을 병에 걸린 중년의 남자가 허름하기 짝이 없는 약수터 민박에서 한겨울을 나고 있던 중 까마귀와 함께 나타나기 시작하는 오래전 기억들. 무슨 병이 걸렸는지는 모르지만 ‘쉬지 않음 죽을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대로 쉬고 있던 와중에 나타난 그들은 옷장수, 체장수, 개장수등의 모습으로 산신당에 하나둘 찾아든다. 그들은 오래전 죽은 애인이거나 부모님이거나 적어도 한 동네 고향 사람들인 듯 한데 어쩐지 반란이나 살인사건을 예고하는 까마귀 울음소리와 늘상 함께인 것이었다. 길인지 흉인지 아리송한 가운데 이들을 한자리에 불러 들인 것은 까마귀일지 몰라도 산신당에서 한바탕 굿판을 벌인 후에 연기처럼 사라지는 그들은 필시 죽음을 앞둔 남자를 위로하러 온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어찌보면 오락가락한 환자의 정신으로 귀신을 보았다는 이야기로 귀결되는 구성이었지만 조심조심 돌다리를 건너가듯 작가가 산신당을 찾아가는 여정은 짐짓 처량하고도 숙연했다. 지금은 가족하나 없는 고향집이지만 내 삶의 근원지를 찾아 홀로 발걸음을 시작한 우리네 그리움이 새소리, 물소리, 눈소리에 잘 스며들어 뜻깊은 재회라도 하고 돌아온듯, 이 작품은 누구에게나 고향과 부모님을 생각게 하는 미덕을 가졌다. 정말로 강원도의 까마귀는 ‘꾸꾸루꾸꾸 빨로마’ 라고 우는 것인지 산골짜기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는 어떤 기분일지 우는 것도 추억과 함께라면 위로가 되는 것인지 궁금해지는 소설이었다.

「메밀꽃 질 무렵」에서도 아버지는 건재했다. 이효석의 단편 ‘메밀꽃 필 무렵’의 속편과도 같았던 이 소설은 동이가 허생원의 아들임을 암시하는 ‘메밀꽃 필 무렵’의 마지막을 다시 소설로 계승했다. 봉평 장거리에서 싸구려 신발을 팔고 있는 허동이라는 신발장수가 장돌뱅이 아버지 허생원을 추억하는 방식은 봄날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지고 마는 꽃들마냥 처연해보였다. 「꾸꾸루꾸꾸 빨로마」에서 까마귀 울음소리가 추억의 전령사였다면 이 작품에선 등짐을 지고 나선 나귀의 방울소리가 그였다. 방울소리는 ‘달밤에 어울리는 얘기를 주절주절 나누며 고개를 넘고 개울을 건너는 운치는 장돌뱅이들의 세계에서 사라진지 이미 오래’였지만 그 고되고 흐뭇한 밤길을 걸어가던 장돌뱅이 허생원의 모습은 같은 방식으로 인생을 배워왔던 동이를 통해 더욱 생생해진다. 인생을 휘감고 있던 안개를 걷어내듯 아버지의 목소리는 방울소리만큼 선명하고 눈가루처럼 눈부시다. ‘장보러 왔다가 장보고 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아버지의 한마디는 이 세상에서의 삶을 ‘아름다운 소풍’으로 여긴 천상병 시인의 ‘귀천’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한 평생 장에서 장으로 가는 길이 꽃이 피고 지는 자연의 운명과 같다하니 장돌뱅이 삶의 애환을 노래한 신경림의 ‘목계장터’의 마지막 구절,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하는 향토적 서정시도 절로 떠오른다.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작가가 아닌 1930년대 작가가 노래하는 고향시처럼 이 작품은 전통적 서사와 서정적 향수를 한껏 발산하는 글이었다. 꼭 고향길을 가던 중 멈춰선 휴게소에서 흘러나오는 전통가요의 한자락처럼 낯설지 않은 친근함, 그것 역시 작가가 평생 길러온 오래된 그리움의 이야기는 아니었을까.

「사람 살려!」는 한 술 더 떠 우리네 구수한 옛날 이야기속에 단골로 출연하던 호랑이사연을 맛깔나게 각색한 고품격의 귀신 이야기였다. 어느 강원도 마을의 땅부잣집 한량 도련님이 멀고 먼 한양을 가던 길에 벌어진 어드벤쳐 로드무비였달까. 하필 도련님의 이름이 ‘강릉 김씨 송림파의 후손 김성기’라는 점이 에로틱한 상상을 불러올 수 있겠으나 이야기는 性적이기 보다 오히려 聖스러운 농담쪽에 가까웠다. 도련님은 개똥이와 함께 가는 길에 미녀 구미호와 갓을 빼앗는 호랑이, 인육먹는 산적, 외다리 도깨비에 이어 끝내 물귀신까지 만나게 된다. 물귀신은 여지껏 우여곡절로 만나게 된 환영을 파노라마로 비추어 보는 거울과도 같았는데 그동안 양반의 폼만 잡다가 할 수 없이 ‘사람살려’라 입을 트이게 해준 장본인이기도 했다. 한양 가는 그 먼 길에 귀신들을 벗삼아 대장부의 포부를 꿈꾸었는데 그만 ‘사람살려’라 말하는 순간부터 도련님은 사람으로서 사람이 보는 것만 보고 들으며 발걸음을 뗄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이제부터 시청률은 내리막길이 아닐까. 저들 모두는 내가 사람이라고 알리는 동시에 사라지고 마는 다른 세상의 사람아닌 존재들이었다. 그러므로 ‘사람살려’는 고독한 반전의 외침이었다. 그것은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 슬픈 현실이었다. 우리는 어쩌면 사람아닌 모든 것과 얼마나 친분을 과시하며 사람아닌 그들에게 얼마나 과분한 의지를 하고 살아가는지 모른다. 설사 그 친분과 의지가 ‘귀신과 농담따먹기’의 한 나절일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향해 살려달라 말할 수 없는 존재들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사람으로 살고 보는 건 결국 자신이 아는 모든 귀신을 떨쳐버리는 염치 없는 일이지만 그렇기에 生은 쓸쓸해질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걸 깨닫게 해준 소설이었다. 우리들은 귀신이 아니고 사람이기 때문에 별 수 없는 거라는 아이러니, 그 씁쓸함이 문득 슬퍼지는 옛날 이야기였다.

2. 부처님의 휴게소에 들러

첩첩산중 강원도 시골에서도 한스런 여인, 비극의 여주인공은 여지없이 존재했다. 「떡-병점댁의 긴 하루」는 이 책에서 가장 가슴아픈 사연으로 새겨졌다. 하고 많은 나라 중 하필 우리나라에 그것도 강원도 촌구석에 시집온 ‘병점댁’은 아버지 같은 남편 사후 공사판에서 떡과 거피를 팔아가며 하루하루 살아간다. 가난했던 베트남 처녀가 이역만리 타국 한국땅에서 술주정뱅이 남편의 구타를 견디며 버텨온 힘은 다름 아닌 우리 ‘떡’에 있었다. 인절미의 구수함과 백설기의 포근함에 기대어 시집살이를 견뎌온 병점댁은 울음을 삼키듯 떡을 삼키고 상처를 달래듯 떡을 오물거리며 자신을 위로했다. 남편과 시어머니가 죽고 나니 더더욱 사람들은 자신을 물건취급하며 반말을 일삼고 사람취급을 하지 않았다. 병점댁은 사내들이 떡과 커피를 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원했음을 알고 기꺼이 몸도 메뉴에 얹어 팔기 시작한다. 그런데 모처럼 운이 좋아 다섯명의 사내를 상대하며 열심히 돈계산을 하고 있을 즈음 죽은 남편이 그녀 곁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 남편은 왜 살아서 그녀를 위해 울어주지 못하고 죽고 나서야 부질없는 눈물을 보이는 것일까. 이 작품의 최대슬픔은 다섯 명의 사내에게 몸을 내주고 받은 돈을 꼭 남편과 눈이 닮은 청년이 모조리 빼앗아 가고 난 후, 그때마저도 인절미를 꼭꼭 씹어 삼키던 그녀의 울분이었다. 떡을 삼키며 설움을 견뎌낸 그녀는 남겨진 떡을 오래 오래 씹는 것으로 生의 비루함을 처절하게 씹어 버린다. 이 소설을 덮으면서 사람은 눈물대신 떡을 삼킬 줄 아는 기특한 존재이지만 제 살같은 육질을 베어 물어야 눈물을 견뎌내는 잔인한 존재임을 다시금 깨우쳤다. 병점댁의 떡과 함께 그녀의 살마저도 씹어 삼켜버린 사내들이 구역질나는 이야기였다. 그들이 병점댁을 범하는 모습은 꼭 떡이 아닌 육고기를 갈기 갈기 찢어 먹는 탐욕스런 인간의 본성을 목격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병점댁의 긴 하루만큼이나 다른 소설보다 몇 배나 더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떡-병점댁의 긴 하루」가 휴게소에서 만난 슬픈 처자의 사연같았다면 「북대」 그 휴게서 근처 다방에서 일하는 아가씨들의 사연을 듣고 나온 기분이었다. 쉬면서 하기 딱 좋은 이야기는 행여나 길가다가도 만날 일 없는 젊은 처자의 불행이 아니던가. 그렇게 흘려들은 이야기는 언젠가 내 무의식에 잘 자리하고 있다가 불쑥 불쑥 다시 그 지방을 찾을 때 즈음 귀신처럼 생각날 이야기 일지도 몰랐다. 「북대」는 택시 기사청년과 다방 아가씨의 참을 수 없는 연애소설이다. 그러나 신분상 하층계급의 비천한 사랑의 단면을 통속이상의 종교적 질문과 대치시키며 무상한 인생에 사랑의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이 소설에서 ‘북대’는 ‘오대산에 가장 깊고 높은 곳에 자리한 암자’라는 장소적 상징성을 가지지만 그들은 한번도 ‘북대’에 가보지는 못한다. 그곳을 가고 싶어 했고 그곳을 가던 중이었고 그곳을 가보자 약속했지만 끝내 다다르지 못한 곳. 소설속 ‘북대’는 속세 사람들의 ‘알프스’쯤으로 생각되었다. 모텔과 절을 오가는 아가씨는 당구장과 절을 오가는 청년과 ‘밀당(밀고 당김)’을 주고받고 금강경 독송을 응원삼아 ‘절 같은 집이나 한 채 지어 놓고 살아’ 보고 싶은 소박한 시골 젊은이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아무리 백팔번의 절을 하고 자신들이 ‘갠지즈강의 모래알 수 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중의 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해도 그들의 인생은 눈덮인 기나긴 겨울밤의 모양새를 벗어나지 못한다. 사랑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은 곧 영원히 ‘북대’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는 암시와 중첩되며 이들은 인생에서 ‘가 보지 못한 길‘에 대한 서운함을 금강경의 불교식 교리로 달래기로 한다. 하지만 알면서도 달려야 하는 것이 인생이듯 우리네 여행은 다음이라는 정거장으로 몸을 이동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 소설은 점점 멀어져 가는 불경소리와 같이 멀어지는 꿈을 아스라하게 만들며 아득해지는 울림을 주는 작품이다. 그것은 한 때 사랑했지만 지금은 헤어져야 함으로 귓전에서 울려오는 뱃고동소리에 질끈 눈을 감고 마는 야속한 애상(哀相)곡과도 같았다. 세상의 이루지 못한 모든 사랑은 이 소설의 ’가보지 못한 길‘일 것이고, 그렇지만 언제라도 가볼 수는 있을 것 같은 ’북대‘를 향한 두 마음의 약속이 아닐까.

휴게소에서 만난 병점댁과 밀크세이크, 그리고 택시기사는 모두들 각자 ‘부처’라는 슬픈 이야기 보따리를 싸들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사연이야말로 ‘아니기에 비로소 맞다’는 그 유명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아니었을지. 휴게소를 나와 이동할 장소가 없었다면 그대로 부처님을 뵈러 가고 싶었던 소설이었다.

3. 안전운행의 동반자와 함께

계속되는 운전와중에 지금 가장 당면한 문제가 도로위에 펼쳐지는 경험은 익숙한 풍경이었다. 「바람자루 속에서」「저 언덕으로 건너가네」 드라이브 소설로서 주인공의 내면갈등이 마치 조수석의 동반자처럼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바람자루 속에서」는 심야의 영동고속도로를 운행함에 있어 내비게이션의 목소리가 서사의 진행을 암시하는 형식이었다. 전방에 급커브, 전방에 추락주의, 전방에 낙석주의, 전방에 안개지역, 기타 강풍주의, 미끄럼주의, 과속주의, 야생동물 주의....이 소설을 읽다보면 세상에서 운전만큼 위험한 일은 없어 보여 사방천지가 위험투성인 것으로 느껴진다. 시간강사로서 다음 학기 강의를 따내기 위해 교수에게 접대를 하고 돌아가는 그의 운명은 다리난간에 매달린 바람자루와도 같았다. 아내 몰래 외도해온 정부 Y는 그동안 성실하게 살아온 자신에게 허용된 최소한의 배려였을까. 그런데 지난 삼십 여 년 간 하루가 멀다하고 오르내리던 그 도로에 자존심을 버리게 한 K교수와 그것을 보상해주는 Y와 그로인해 죄책감을 갖게 한 아내가 약속이나 한 듯 번갈아가며 다채롭게 출현한다. 재수 없으면 차에 치여 죽기 일쑤인 고라니와 멧돼지로 분한 그들의 영혼은 차마 내비게이션이 예상치 못한 존재들이었다. 그는 자신의 차가 마침내 바람자루 속에 들어가고 고라니와 멧돼지가 보이지 않게 되자 비로소 ‘다음 신호시까지 직진’이라는 음성을 들으며 어렴풋이 아가위 나무의 흰 꽃 그늘을 감지한다. 그에게 내비게이션은 과연 안전운행의 동반자였을까.

내비게이션이 안전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말을 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 첨단의 시스템인 내비게이션을 주인공의 내재된 불안을 자극하는 장치로 활용하며 서사를 극적으로 전개시킨 작가의 운행능력이 탁월했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이다. 인생은 금방 깨어질 것같은 ‘빙판’위를 달리는 위험천만한 여행이기에 난간위에 매달린 ‘바람자루’처럼 늘 변덕스럽고 불안한 운전을 숙명으로 한다. 그렇기에 안개와 강풍이 가득한 위험지역은 어쩌면 더 이상 위험아닌 일상지역일지도 모른다. 일상은 바로 내비게이션에서 한발 앞서 알려주는 지극히 친근한 우리 현실이기도 할 것이다. 즉, 야생동물인 고라니와 멧돼지는 늘 우리와 같이 살고 있는 우리 생의 동반자였던 것이다. 중요한 건 안전이나 위험의 선택적 조건이 아니고 안전속에 존재하는 위험, 위험이 내포된 안전이야말로 바람같은 목숨주머니를 달고 살아가는 우리네 삶의 가장 분명한 증거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신호시까지 직진하여 가는 것이 ‘바람속에서’ 바람을 견디는 일이라는 것, 그것이 아닐까.

「저 언덕으로 건너가네」에서도 택시기사는 갈등한다. 도박과 술로 전전긍긍해온 택시기사양봉주는 우연히 운전 불자회 신도들과 함께 관광버스 성지순례를 따라 나선다. 약장사 같은 스님의 말씀을 들으며 양봉주는 비임균성 요도염, 임질이라는 성병에 걸려 그녀와 집사람 영희 모두로부터 의심받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떠올린다. 누가 뭐래도 최초 감염자를 찾고 싶은 그에게 진실은 생각할수록 오리무중에 빠지고 때맞춰 운전기사는 고의적인 난폭운전을 감행한다. 불안한 기사대신 운전대를 잡은 그 앞에 닥친 것은 눈보라가 가득한 고속도로였고 그에게 관광버스는 길고 넓은 택시로 여겨진다. 그가 눈보라를 헤치며 자신의 새로운 택시에 태운 것은 누구일까. 그는 왜 저 언덕으로 건너가지 못할 정도로 자신을 짓누르는 모든 갈등들을 다 같이 태워버린 것일까. 아슬아슬 줄타기 하듯 위태로운 양봉주의 운전모습이야말로 어쩐지 성지순례의 본코스 같기도 했다. 자신이 가진 모든 마음의 짐을 다 이고서 언덕을 건너가려는 택시기사 양봉주, 그가 짐을 모두 내려놓고 성지순례를 마치고 무사히 귀환할 수 있을까. 혹시 누구라도 다 내려놓고 돌아오는 경우라면 그들에겐 돌아오는 순간 같은 양의 짐이 나타나거나 돌아간 순간 그들만의 짐이 다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언덕을 넘어보려는 그 누구에게도 그건 늘상 힘겹고 무거워 건널 수 있겠다는 생각은 전혀 할 수 없는 두려움은 아닐까. 그렇지만 그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늘 저 언덕을 건너가기 위해 오늘도 나만의 택시를 몰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 안전 운행의 동반자는 친절한 내비게이션이나 관광기사가 아니라 빈번한 안개, 낙석과 강풍, 불투명한 진실, 알 수 없는 불안, 그리고 그들이 눈처럼 담겨진 백색의 상상자루는 아닐까. 위험이라는 동력 때문에 더욱 안전을 꿈꾸는 우리 인생이 더 강하고 질겨지는 비결이야 말로 그들 눈보라 때문은 아닐까.

4. 톨게이트를 빠져 나오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표제작인 「이별전후사의 재인식-그녀와 그의 연평해전, 그리고 즐거운 트위스트를 말 할 차례이다. 이 소설은 1997년과 2007년에 행해진 이별이라는 스펙트럼을 패러랠하게 비교하고 있다. 시선은 시종일관 냉소적이었지만 목소리는 재즈가수의 그것처럼 끈적하다. 시간적 배경은 십년차를 두고 만남과 재회의 심경을 서술하지만 감지되는 분위기는 팔십 년대의 주점식 정서였달까. 팝십 년대 끝무렵에 대학교에 입학한 내게 있어 이 작품이 말하는 이별의 방식은 너무나 익숙해서 청승맞은 구석이 다분했다. 대체로 그 시절 가난했기에 헤어졌다고 믿고 있는 우리들이 다시 만난 연인과 어느 정도 돈이 있어도 다시 헤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을 확인할 때 새삼 알게 된 인생이란 아마도 ‘인식’이 아닌 ‘재인식’의 문제일 것이다. ‘만남’이 아닌 ‘재만남’의 법칙이야 말로 ‘재인식’이 합당해보였고 그래서 ‘재이별’은 두 번 살았기로 두 번 죽어지는 비극의 필요충분조건이었다. 작가는 1997년 IMF 사태를 맞아 중단된 일자리와 삭감된 임금 때문에 위기를 넘기지 못하고 헤어진 연인들을 2007년 각자의 가정을 가진 채로 불륜커플이 되어 만나도록 심술을 부리셨다. 이들을 다시 재회하게 한건 순전 다시 헤어지도록 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다는 듯 다시 예전처럼 사랑을 나누고 이 나라의 대통령을 걱정하고 스포츠 스타에 정을 주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나라엔 대통령도 필요했고 스포츠 영웅도 필요했다. 그건 꼭 우리에게 사랑은 언제나 필요하지만 그 대상은 바뀔 수 있다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누가 되었건 대통령에 당선될 것이고 어떤 경기든 영웅은 탄생할 것이었다. 이변이 없다는 생각에서였을까. 다시 만난 연인이 나누는 대화는 전혀 소설적이거나 영화같지 않아 외려 얼굴이 후끈 달아오를 정도로 민망했다. 이들이 ‘세상에 낙오되지 않았다는 위안으로 손을 잡고 TV를 시청하던 소중한 시간’은 ‘밤나무 골짜기의 밀실같은 방갈로’를 지나와 옷벗기기 게임을 하던 ‘모텔’ 을 통과해 이제 각자가 가야할 곳을 정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던 것. 그들의 드라마는 아름답지 않았고 나는 절대 재방송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인간은 왜 한 번 헤어진 사랑과는 그 헤어짐이 아무리 고통스러웠다 해도 다시 만나 그전처럼 같은 불길을 태울 순 없는 걸까. 닭을 먹고 술을 마시고 화투를 치고 옷을 벗어 봐도 심지어는 ‘행복’하다고 말을 해봐도 왜 행복할 수 없는 것일까. 어쩌면 다시 만나는 순간에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한번 확인해보고 싶은 스스로의 고집은 아니었을까. 직접 당사자의 입으로 ‘좋은 사람 만나길 바랄게’ 같은 인사를 들어야지만 더 이상 꿈꾸지 않게 되는 것일까. 같은 사람과 두 번 헤어지는 것은 두 번 만나지 못한 것의 몇 백배로 가슴아프다. 하지만 이 소설은 이상하게도 도착지의 톨게이트를 막 빠져나오듯 후련한 구석이 있었다. 시원섭섭이란 말은 이럴 때 하는 것일까. 어찌되었건 나는 강원도에 도착했다는 안도감 같은게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중간에 다시 돌아갈 수도 있었고 사고같은 위험상황도 있었지만 이제 요금마저 지불했으니 다른 생각은 나지 않을 터였다. 아주 긴 이별의 터널을 빠져나와 지금껏 달려온 거리만큼이나 스스로가 대견해지는 순간, 그건 모든 이별후에 다시 일어서야 하는 새로움의 서막이었을까. 혹시 세간에서 말하는 강원도의 힘이란 이런 느낌은 아닐까. 폭설로 오도가도 못하는 고립을 견디고 살아온 그네들의 밑천이란 이렇게 모든 이별후에 쌓여지는 하얀 눈의 결정은 아니었을지.


예전엔 강원도를 가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서울에서 얼추 대여섯 시간은 걸린 듯 하다. 특히 지금은 폐쇄된 옛 영동고속도로를 떠올리면 생각만으로도 멀미가 나는 것 같다. 그땐 대관령이나 한계령, 미시령 어떤 길이든 난코스였는데 그중에서도 기억나는 건 속초로 이어지는 악명높은 미시령 고갯길이었다. 경치좋은 드라이브 코스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길이지만 주변 경치에 취해 운전하다보면 도로사정과 운전감각이 어긋날 때가 있다. 생명은 한순간에 자연에 흡수될 수 있는 것. 또 하나, 보통 서울에서 강원도를 향하는 운전이란 대도시에서의 탈출이라는 일탈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아 강원도를 다녀오는 것은 다른 여행길보다 무리수를 두게 두는 경우가 많다. 여러 가지로 보아 내 청춘의 강원도는 반 이상이 위험을 내재한 파격의 드라이브를 상징했다. 돌아와 일상으로 복귀한 내 모습은 물론 기억나지 않는다. 이 책은 다시 가보는 강원도 길이 그 옛날 위험한 환상의 코스였음을 일깨워 줄 것이다. 무엇보다 입체적인 여행길을 이끌어준 작가의 다채로운 이야기들은 훌륭한 문학의 내비게이션이었다. 고개를 넘는 건 역시 환타스틱했고 커브는 물론 스릴만점이었다.

이별을 견디는 건 이별한 사람들과의 근사한 재회가 아니라 내가 이별한 사람이라는 서글픈 인식에 있었다. 내가, 그토록 사랑한 사람들과 이별도 겪어낸 사람임을 알아보는 마음에 있었다. 그만큼 사랑하며 살아온 사람이란걸 인정하는 일이었다. 언제나 그것은 이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고통이자 生의 선물이었다. 혹시 나보다 더 많은 이별을 하였을지 모를 작가에게도 박수와 위로를 건네본다. 당신도 나처럼 이별한 적 있을까. 나처럼 이별하고 이별한지도 모르고 살아왔을까. 그래, 그렇다면 나처럼 강원도로 떠나길 바란다. 가는 길이 위험하야 가끔 두려울지 모른다. 가는 동안 누군가 생각나 자꾸 눈물이 날지도 모른다. 눈물이 앞을 가려 내리는 흰 눈이 앞을 막아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을 것이다.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 역시 이별하였기로 다시 볼 수 없는 그리움의 눈발이야 누구보다 하얄 것이기에. 그 하얀 눈발 위로 다시 떠오르는 더 하얀 그들, 그들과 함께였던 우리 생의 반짝이는 시간, 눈의 결정만큼이나 깨끗해진 우리의 눈물, 돌아오는 가슴에 간직하고픈 하얀 보석, 그 영원한 이별을 찾기 위해, 강원도로 가자. 그대 여기, 이 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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