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과연 존재하는가

 

무더운 여름의 어느 날, 나는 <장미의 이름>을 만나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엉망으로 쌓인 책탑을 헐어 <장미의 이름>을 상권을 찾아냈다. 하권은 바로 옆에 있었는데 도대체 상권은 어디에 있었는지.

 

이 무더운 날씨에 나의 지적 허영과 독서의 재미까지 모조리 잡아준 그런 책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아쉽게도 책은 아직 다 읽지 못했고, 대신 작년에 나온 8부작 미니시리즈는 이틀 동안 다 봤다. 1986년에 나온 영화도 봤는데 영화가 책의 풍부한 설정을 잡아내지 못해 개인적으로 졸작으로 평가한다. 역시 원전만한 게 없더라.

 

하지만 이번 미니시리즈는 일단 시간 제약이 없기 때문에 아주 방대한 스케일로 소설의 디테일을 잘 잡아냈다. 다만 원작에는 없는 각색된 부분들이 상당 부분 추가된 점이 원작과 다른 점이라고나 할까.

 

일단 소설 <장미의 이름>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멜크 수도원 출신의 아드소라는 수도사가 남긴 수기를 발견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미겔 세르반테스 이래 작가들이 애용하는 고전적인 수법이다. 이건 내가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 누군가 남긴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다시 들려주는 거랍니다. 클래식한 시작이다.

 

때는 132711월말, 북부 이탈리아 모처에 있는 베네딕트 수도원이 공간적 배경이다. 이 수도원의 자랑은 방대한 양의 책들을 품은 장서관이다. 원래 요새였다고 했던가.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인 영국사람 배스커빌의 윌리엄 그리고 멜크 수도원 수련사 아드소가 등장한다. 윌리엄은 당시 아비뇽에 유수된 교황 요한 22세와 치열한 세속권 투쟁을 벌이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의 밀사로 수도원에 파견된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한 세기 앞둔 당시, 교권의 타락상은 이루다 말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드라마에서는 프란체스코 수도회 출신 수도사가 논쟁 가운데 교황이 만든 입에 담을 수 없는 죄들에 대한 속죄비용으로 그들의 일탈과 타락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당대의 사제들이 얼마나 망가졌는지 한 번 드라마를 보면 알 수 있다.

 

교황과 교황의 대리인으로 나오는 희대의 악당 베르나르 기(실존인물이다)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가 돈주머니를 차고 있다는 장면으로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 수도사들이 그리스도의 청빈 사상을 내세우는 것을 비웃는다. 당대 최고의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 선생은 어쩌면 중세 기독교가 지배하던 시절에도 물질주의가 만연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던 걸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만큼 중요한 게 또 없다는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이 연상된다. 자본 중심주의라는 도그마만 유지한다면, 현대극으로 옮겨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그런 설정이다.

 

수도원에서 전권을 행사하는 수도원장 아보 역시 타락한 사제의 전형이다. 그는 지하묘지에서 발견한 성모 마리아상에 자신이 몰래 취득한 온갖 보석으로 치장하며 자신만의 법열에 빠져든다. 나중에 밝혀지는 이야기지만, 원래 귀부인이었던 그의 어머니가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주장에 빠져 모든 재산을 가난뱅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했던가. 그렇게 부유한 어머니와 재산을 모두 잃은 아보는 자신만의 방식(어쩌면 물질주의 페티시즘일 지도 모르겠다)으로 욕정을 채운다.

 

이제 곧 황제가 지지하는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순전히 교황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의도다)과 교황파 사제들이 격돌한 대논쟁을 앞두고, 수도원에서 일단의 살인사건들이 잇달아 발생하기 시작한다. 종교적 갈등에 살인사건까지. 하지만 아보 수도원장은 문제의 근원인 장서관의 출입은 엄격하게 금지한 채, 윌리엄에게 사건해결을 의뢰한다. 아니 손발 다 묶어 두고 무슨 사건을 해결하란 말인가.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였던 채식사 아델모는 투신한 것으로 보이고, 문서 사자실의 동료 베난티오 역시 돼지피를 젓던 항아리에 익사한 채 발견된다. 정신 나간 것처럼 보이는 알리나르모인가 하는 이탈리아 수도사는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나팔 소리의 계시대로 수도사들이 죽어나간다는 요사스러운 계시를 주절댄다. 그러니까 윌리엄과 아드소는 온갖 요설과 음모 그리고 비밀들이 어지럽게 난무하는 가운데 중차대한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소설과 드라마가 결정적인 차이를 보이는 장면은 20여 년 전에 피렌체에서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한 돌치노와 마르게리타의 딸 안나가 부모의 복수를 위해 잔혹한 이단 심판관 베르나르 기를 추적하는 것과 소설에서는 그렇게 비중 다뤄지지 않은 아드소가 사랑에 빠진 처녀의 역할이다.

 

소설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식료계 담당 수도사 레미지오와 그의 수하 살바토레 역시 돌치노파로 신분을 감춘 채, 수도원에서 조용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윌리엄과 그의 라이벌 베르나르 기의 등장으로 정체가 발각된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단전문가 베르나르 기가 현장에 있었으니 그들의 운명은 이미 결정난 게 아니었을까.

 

흥미진진한 이야기만큼이나 캐릭터들 사이에서의 갈등 구조도 에코 선생은 역시나 대가다운 솜씨로 풀어나간다. 한 때 뛰어난 조사관으로 명성을 날린 로저 베이컨을 스승으로 모신 배스커빌 사람 윌리엄은 자연과학을 마술로 여기던 당대의 참 지식인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는 셜록 홈즈 뺨치는 지식과 추리력으로 미궁에 빠진 연쇄살인의 단서들을 추적한다. 그의 조수로 등장하는 십대소년 아드소는 왓슨 같은 역할이라고나 할까. 가끔 그가 무심결에 던진 말들이 자신의 마스터에게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이단을 깊숙하게 연구하다 보니 어느새 이단이 아닌가 할 정도로 박식한 지식을 자랑하는 프란체스코 수도사 윌리엄은 13세기를 대표하는 지식인으로 상징된다. 게다가 소설은 우리 책쟁이들이 환장하는 책에 대한 이야기로 우리를 유혹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결국 어떤 물체에 집착하는 수도사들 간에 벌어지는 애욕과 질시 그리고 살인까지도 마다하지 않게 만드는 그 무엇인가 <아프리카의 끝(Finis Africae)>라는 장서관의 비밀 공간에 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흥분되지 않는가 말이다.

 

어둠의 시기라는 중세 시대 지식의 보고이자 지식 전수의 장이었던 수도원의 모습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윌리엄은 수도원의 장서관이야말로 기독교 세계의 보물 같은 그런 장소라고 격찬해 마지않는다. 평생을 신에게 서원한 수도사들은 문서 사자실에서 자신의 능력을 최대치로 발휘한다. 아델모 같은 채식사들은 한껏 능력을 뽐내면서 글이 필사된 양피지를 아름답게 채식한다. 베난티오 같은 그리스어 번역가들은 아랍 세계를 거쳐 유럽으로 전수된 고전 그리스 문헌들을 다시 당시 공용어였던 라틴어로 번역한다. 도서관 사서인 말라키아는 물론이고 그의 조수인 베렝가리오 그리고 베노 같은 수도사들 모두 금지된 책, 그러니까 금서의 존재를 아는 순간 모두 달려들어 책에 대한 자신의 욕정을 채우려고 시도한다. 어쩌면 수도원장과 수도원의 진짜 실력자였던 눈먼 호르헤 수도사는 그런 금지의 유혹으로 수하의 수도사들을 통제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그들의 시도는 당시 교황을 필두로 한 교권 기득권 세력이 사랑, 정의 그리고 평화라는 이름으로 민중을 지배하려고 했던 것과 병치된다. 그들은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주장하는 초기 기독교 시절 그리스도의 청빈에 대한 주장을 두려워했다. 도대체 교회가 왜 물질이 필요하단 말인가? 그리스도가 금화 한 닢이라도 수중에 가지고 있었던가? 자신들의 세속적 욕망을 채우고 민중을 지배하기 위해 그들은 정통 교리마저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해석했다. 그리고 돌치노파처럼 위험한 주장을 하는 이들을 모두 이단으로 몰아 화형대의 말뚝에 세웠다. 그들이 보인 광기는 현대에도 반대파를 정치적으로 탄압하기 위해 씌우는 프레임 전쟁과 닮아 있다. 항상 그렇지만 역사는 희극으로 한 번 그리고 다시 비극으로 한 번 반복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상황이 이러니 아비뇽의 교황 요한 22세에게 프란체스코 수도회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고,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는 적의 적은 나의 편이라는 속설대로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지원한다. 그래서 그들은 전장에서 철검으로 맞부딪히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드라마의 첫 장면이 바로 그런 전투 씬이 아니었던가. 소설에서는 에코 선생이 진입장벽을 높이기 위해 당대 시대적 배경에 대한 설명을 의도적으로 빼먹으신 것 같은데, 드라마에서는 상대적으로 그런 부분들을 잘 짚어준 것 같다. 물론 원작에서 너무 멀리 나간 것 같은 설정도 다수 있었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영화보다는 훨씬 낫다는 느낌이다. 주인공 윌리엄 역할은 존 터투로 보다는 션 커네리가 낫지 않나 싶다. 아드소 배역은 크리스천 슬레이터보다는 다미안 하둥이 더 멋지더라.

 

수도원에 물자를 공급하는 대다수 농민들이 하루 벌어먹고 사는 가난함이라는 적과 맞서 싸웠다면, 문서 사자실의 수도사들은 그들이 추구하는 진리, 다시 말하자면 장미의 이름이나 장미의 향기를 흠향하기 위해 대중의 고통을 외면하고 자신들의 임무에 전념했다. 베르나르 기 같은 기득권층의 수호자들은 그들이 만들어낸 정통 교리에서 벗어난 일절의 다른 해석도 용인하지 않았고, 검과 고문 그리고 화형대의 횃불로 생각이 다른 이들을 정죄했다. 같은 신을 믿으면서도 이렇게 서로 다른 층위의 사람들이 복닥거리며 사는 세상에 과연 하나님이 편하게 임재하실 공간이 있는가에 대한 윌리엄의 질문은 그야말로 화두처럼 다가왔다.

 



소설에 비해 이번에 새로 만들어진 드라마는 <장미의 이름>의 확장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에서 다뤄지긴 했지만, 시각적으로나 내러티브상 좀 더 흥미를 줄만한 소재들을 찾아 극대화하는데 주력한 느낌이다. 돌치노와 마르게리타의 딸 안나의 등장, 바라지네 사람 레미지오가 돌치노파에 합류해서 활동하는 장면, 귀족의 개 노릇을 하던 살바토레(<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가 연상됐다) 등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신에게 서원한 수도사들이 모여 지내는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사건이란 소재는 대단한 픽이 아닐 수 없다. 처음 아델모와 베난티오가 죽었을 때만 해도 일대 충격적인 사건이었지만, 욕망의 구덩이였던 수도원의 비밀과 비리들이 하나둘씩 밝혀지면서 다음 차례는 누구인가하는 호기심으로 전이되는 과정을 드라마에서는 잘 잡아냈던 것 같다. 신의 섭리가 담긴 책들을 필사해서 후대에 보존하는 성스러운 장소에서 지상의 그 어떤 곳보다도 속되고 타락한 곳으로 드러나게 되는 설정 그리고 그 중심에는 욕망의 대상이 된 책이 존재하고 있다는 전개에 그만 압도된 느낌이라고나 할까.

 

처음에는 책 읽는 속도가 빨랐으나, 결국 드라마가 주는 시각적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드라마부터 먼저 보게 되었다. 책은 처음의 속도에 비해 느린 속도로 읽고 있다. 뭐에 쫓기는 것도 아니니 천천히 읽는 것으로.

 


댓글(5) 먼댓글(0) 좋아요(4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0-07-22 1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7-22 1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7-22 13: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treehyun 2020-07-22 12: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드라마가 좋았다는데 저는 놓쳤네요. 영화를 보고 책을 읽었어요. 지식을 독차지 하려는 기득권의 욕망이 끔찍했지요. 말의 왜곡이 이렇게 생겨난 것인가 했지요.
여름에 읽기 좋겠네요.

레삭매냐 2020-07-22 13:09   좋아요 0 | URL
제가 책과 드라마를 병행해서 보다 보니
드라마가 원전을 좀 비틀지 않았나 뭐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쥐꼬리만한 기득권을 고집하다가 결국
에는 모두 다 놓치게 된다는 역사의 교
훈을 배우지 못하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체리
니코 워커 지음, 정윤희 옮김 / 잔(도서출판)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OMG! 전직 미군 메딕 출신 베테랑, 헤로인중독자 그리고 은행강도로 현재도 감옥에 수감 중. 감옥에서 4년 동안 쓴 소설로 대박났네. 책의 영화판권 100만 달러에 팔았다고. 너무 궁금하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oonnight 2020-07-22 11: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저도 궁금합니다@_@;

레삭매냐 2020-07-22 11:36   좋아요 0 | URL
외국 신문 기사를 보니 연쇄 은행강도
라고 하더라구요.

세상에 11건인가 은행을 털었대요 !

지금 빵에 있는데, 올해 11월 출소라고
합니다. 가막소에서 글도 쓰고, 영화판
권도 팔고... 천조국 다운 스케일이네요.

잠자냥 2020-07-22 1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저도 궁금하던데, 아직 읽으신 것은 아닌???

레삭매냐 2020-07-22 11:37   좋아요 0 | URL
그건 아니랍니다 :>

오늘 아침에 신간으로 보다가
알게 된 책인데... 흥미가 마구
자극하는 고런 책이네요.

거미소년 톰 홀랜드가 주인공
역을 맡아 삭발해서 화제가
되었다는...

젤소민아 2020-08-09 0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가들의 전직은 천차만별인데 이젠 은행강도로군요! 뭐, 고무적인 전적은 아니지만, 독자로서는 흥미가 갑니다. 독자도 도덕은 따져가며 읽어야겠지만요~. 그 마음세계에서 빚어진 창작의 소치가 궁금하긴 하네요!

레삭매냐 2020-08-09 07:33   좋아요 0 | URL
원체 작가 자신의 라이프나 책이
흥미진진하다 보니 바로 책의 판권
이 팔려 영화로 만들어진다고 하네요.

아무리 그래도 연쇄 은행강도 출신
작가의 책이라니...

아무래도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는
것으로.
 
너 좋아한 적 없어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체스터 브라운 지음, 김영준 옮김 / 미메시스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에 소개된 폴란드 작가 비톨트 곰브로비치(W.G.)의 소설들을 사기 위해 중고책방에 들렀다. 공간은 시원했으며 사람도 없었다. 달랑 목표했던 책만 사가지고 나오기에는 무언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만화라도 한 편 읽고 오자고 마음 먹고 집어든 책이 바로 체스터 브라운의 <너 좋아한 적 없어>라는 만화였다.

 

숙인 리가 누구인지 그 사람에게 헌정한다는 어쩌구의 문구가 있었고. 나중에 말미에 적은 노트를 보니 아마 작가가 이 그림을 그릴 당시 만나던 사람이었는지. 관계는 사라지고, 글과 기록은 영원할지니.

 

만화의 주인공 체스터는 누가 봐도 뻔한 작가의 페르소나다. 십대 소년으로 어머니의 말은 드럽게 듣지 않으며, 심부름도 간단하게 거부하고 주일 교회 복장도 거부하면서 엄마의 속을 뒤집어 놓는다. 그 땐 다들 그랬지.

 

특이한 것이 욕을 입에 달고 사는 또래들(예나 지금이나)과 달리 소년 체스터는 C8이라는 단어에 혐오라도 가지고 있는 듯, 절대 그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친구들은 하나같이 그가 그 말을 사용하게 하려고 내기까지 걸 판이다. 그냥 냅두면 안되나? 나와 다른 꼴을 보지 못하는 장면에서는 최근 터진 스포츠계의 고질적인 폭력이 연상되기도 했다. 우리의 체스터에게 물리적인 폭력이 가해지진 않았지만, 친구들의 놀림도 일종의 폭력이 아니었을까.

 

나도 체스터처럼 십대 시절에는 누구 못지 않게 음악을 들었던 지라, 체스터가 관심을 보이는 밴드 이름이 눈에 쏙쏙 들어와 박혔다. 레드 제플린을 필두로 해서, 키스와 데이빗 보위 아마 비틀즈는 이미 유행이 지났던 시절이지 싶다. 캐나다 터론토 인근의 샤토게이라는 곳을 배경으로 한 체스터의 이야기에는 어디에서나 비슷한 청소년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누구를 사랑할 줄도 모르고(심지어 엄마조차!), 관계 형성도 쉽지 않은 그런 시절의 경험담들.

 

나의 감정도 추스르지 못하는 판에 누구의 감정을 어루만진단 말인가. 오랜 고민 끝에 스카이란 친구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지만 진전이 전혀 없다. 체스터는 여전히 피터와 존(한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같은 찌질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느라 시간가는 줄 모른다. 다른 이들에게는 한심한 관계이겠지만, 당시 그에게는 세상 전부를 준다고 하더라도 바꾸지 않을 그런 친구들이지 않았을까.

 

그런 어느 날 어머니는 정신과 치료를 받기 위해 집을 떠나시고, 체스터는 여행을 떠났지 아마. 아버지와 같이 어머니 병문안을 간 체스터는 어머니의 충격적인 모습을 목격한다. 하지만 결국 어머니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하지 못하고 돌아선다.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자신을 찾아온 스카이의 데이트 신청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잔디 깎는데만 열심인 체스터. 에라 쪼다 같은 자식아.

 

왜 그렇게 불필요하게 흥분을 하냐고? 왜냐하면 나도 그 시절에는 체스터 같은 쪼다였기 때문이다. 넘쳐흐르는 에너지를 주체할 줄 몰랐고, 사람들과의 관계마저도 정말 엉성했었지.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기 위한 도약의 시간들이 되었어야 할 중요한 시간에 그놈의 입시라는 지옥문을 통과하기 위해 씨잘데기 없는 시간들이 녹여야했지. 생각할수록 아쉽고 억울하고 뭐 그렇다. 몇 년 뒤에 다시 돌아온 비슷한 시기에도 달라진 게 없었지. 요령만 늘었을 뿐. 무언가 뚜렷한 삶의 목적이 있었다면 지금의 내 삶과 달라졌을까? 아마 그렇지도 않았으리라.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뭐 하고 넘기지 않았을까나.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20-07-11 1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뭐, 하고 넘긴다면 위로가 될 듯합니다. 저도 사실은, 이번 인생은 만족스럽지 않아... 이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인생 설계라는 것 자체가 없이 살았기 때문이에요.
이십 대 젊은 시절에 계획이나 목표 같은 게 없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참 아까운 시간들이었어요. ㅋ

레삭매냐 2020-07-12 08:48   좋아요 1 | URL
정말 공감하게 됩니다.
오늘 아침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보았네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살아왔구나...

지금이라도
주어진 시간 동안에 열심히
살아야겠습니다.
 
비단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김현철 옮김 / 새물결 / 200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상에 허명은 없더라. 알레산드로 바리코의 <비단>을 읽으면서 느낀 점이다. 그것은 마치 하이쿠 연작을 읽는 듯한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대륙을 가로 질러 프랑스 라빌디외와 세상의 끝 지팡구를 오가며 벌이는 주인공 에르베 종쿠르의 러브스토리는 참.

 

전직 군인 출신 주인공 에르베 종쿠르는 제사업자 발다비우에게 발탁되어 누에알 상인으로 변신한다. 종쿠르와 천상의 목소리를 지닌 아내 엘렌 사이에는 아이가 없다. 그런 결핍을 보충이라도 하듯, 종쿠르는 잠균병이 휩쓴 유럽을 떠나 아프리카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세상의 끝 지팡구, 그러니까 일본에까지 원정에 나선다. 시간적 배경은 1861년이다. 아메리카합중국에서는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고, 플로베르는 <살람보>를 쓰고 있었다지 아마.

 

그런데 왜 에르베 종쿠르의 목적지가 일본이었을까. 바리코 작가는 일단 자본주의 시대의 도래에 즈음해서 유럽 대륙을 가로 지르는 위험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제국주의 시대 자본의 도전정신을 누에알 밀수꾼 에르베 종쿠르라는 인물을 통해 형상화한다.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서라면, 일본 국법이 금한 누에알 밀수도 아랑곳하지 않는 이들이 바로 제국주의 시대 상인들이었다. 그들은 잠균병에 손상되지 않은 건강한 누에알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사지도 마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막대한 이윤이 저간의 고생과 투자를 만회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high risk, high return. 무력을 동원해서 일본을 강제로 개항시킨 당시 떠오르는 미국의 힘에 대한 서술도 인상적이었다. 미국이나 프랑스나 타국을 침략한 제국주의 국가로서는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일본에서 종쿠르는 하라 케이라는 사업 파트너를 만난다. 그리고 운명적으로 그의 애첩과 썸씽이 발생한다. 아니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를 다시 일본으로 소환해내기 위해서는 누에알이라는 장치만으로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곧 루이 파스퇴르가 등장할 테고, 인조견사도 발명될 테니까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점이 있다. 소설의 중요한 소재로 사용되는 비단. 영어로는 silk 그리고 이탈리아어로는 seta가 인간 생활에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한 마디로 말해 없어도 그만인 사치품이라는 것이다.

 

비단의 존재 가치는 묘하게 종쿠르를 홀려 버린 하라 케이의 애첩의 이미지와 공명한다. 고향에 멀쩡한 아내 엘렌이 있는데, 말도 통하지 않는 땅에서 기괴하기 짝이 없는 애정행각에 빠져 드는 남정네의 심정이란. 비슷한 시기에 읽기 시작한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에 등장하는 25세 청년 시몽의 넋두리가 자꾸만 떠오른다. 아마 세상 헛 살았다고 고백했지 싶다. 오독이어도 상관없다, 어디까지나 독서는 주관적인 거니까 말이다. 종쿠르가 쫓는 몽환적 로맨스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긴 하지만 한 번 빠지면 도대체 헤어날 수 없는 그런 수렁 같은 감정.

 

하라 케이가 정숙한 여인에게 선물했다는 새장의 의미는 각별하다. 세상의 귀하고 값진 새들을 모은 거대한 새장의 존재는 하라 케이의 수중에 들어가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그야말로 서구인의 시선에서 바라본 그녀, 다시 말해 오리엔탈리즘의 정수 같은 존재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부질없는 욕망에 대한 묘사야말로 작가들의 로망이 아닐까. 비단, 세타 그리고 실크 그 무엇이라고 부르던 간에 실체 없는 욕망을 쫓는 감정은 한 줄의 하이쿠처럼 그렇게 날아가 버린다. 일단 새장에 갇힌 새들은 풀어줘도 다시 돌아올 거라는 숙명을 담은 말처럼. 그런데 어쩌면 진짜 새장의 포로로 잡힌 건 바로 에르베 종쿠르가 아니었을까.

 

모두가 말렸던 종쿠르의 마지막 도일은 사업적으로 대실패로 귀결된다. 일본 정국은 정부군과 바쿠후군과의 내전으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상상을 초월하는 새장을 지닌 환상 속의 그녀를 만나기 위해 에르베 종쿠르는 마지막 일본행을 감행한다. 그리고 종쿠르가 어떻게 다시 부활했더라... 사실 그건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었으리라. 영원히 동방에 남은 세이렌의 유혹에 빠진 남자에게는.

 

집중해서 읽는다면 금세 다 읽을 분량의 그런 책이었지만, 여운은 생각보다 길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여지가 많아지는 그런 사골곰탕 같은 맛이라고 해야 할까. 짧디 짧은 문장의 빈 여백에 무언가 내 생각을 마구 채워 넣고 싶어지는 그런. 말미에 등장하는 연서의 내용은 왜 그렇게 관능적이던지, 퇴근길 버스에서 읽으면서 얼굴이 다 화끈해지더라. 에피쿠로스적 쾌감이 폭발해 버리는 순간이라고나 할까. 필립 로스의 <죽어가는 짐승> 이래 이렇게 야하고 뭐 그런 책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존재마저 몰랐던 작가와 그들의 책들을 연달아 발굴해 읽으면서 나는 팬데믹 시절의 암울한 순간들을 그렇게 시간 속에 녹여 내고 있었다. 나의 선택과 시간투자가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분 좋은 밤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alstaff 2020-07-09 09: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이 책 읽고 일요일에 독후감 써놓았는데요! ㅋㅋㅋㅋ

레삭매냐 2020-07-09 11:37   좋아요 1 | URL
저는 이번에 안드레아 카밀레리
작가의 책을 보다가 우연히
알게 되어 구해다 읽었네요 :>

자목련 2020-07-09 10: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레산드로 바리코의 <이런 이야기>가 넘 좋아서 구매한 책인데 저는 아직 읽지 못했어요. 책장 어딘가에 ㅎ
저도 찾아서 읽고 싶어집니다.

레삭매냐 2020-07-09 22:32   좋아요 0 | URL
<이런 이야기>는 그나마 구하기가
쉬운데 다른 책들은 죄다 품절-절판
이네요... 불끈! 그럴수록 더 도전의지
가 생기네요.

읽어 보시면 후회하시지 않으실 겁니다.

다음에는 <시티>를 만나 보고 싶네요.
 
이 인간이 정말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주 오랫동안 서가에서 나의 독서를 기다리던 책과 만났다. 바로 성석제 선생의 <이 인간이 정말>가 오늘의 주인공이다. 자그마치 7년 전에 나온 책인데, 무슨 연유에서인지 그동안 읽지 않고 뻐팅겼단 말인가. 고전읽기에 지친 나에게, <이 인간이 정말>은 그야말로 불량식품 같은 맛으로 그렇게 나에게 다가왔다.

 

모두 8개의 단편소설로 이루어진 소설집인 <이 인간이 정말>에서 내가 최고로 꼽고 싶은 작품은 바로 <찬미>. 처음에는 사람의 이름인 줄 알았고, 두 번째는 讚美라고 착각했으나 이도저도 아닌 贊美였다. 자고로 수컷들은 아름다움에 지극히 약했다. 아름다움의 공인은 누가 해주었던가? 자신의 기준으로 볼 때 아름다움이 중요한 걸까? 아니면 자타가 공인하는 그런 아름다움을 칭하는가? 아무래도 후자에 더 가깝지 싶다. 나레이터를 비롯한 모든 남자들은 이민주에게 그렇게 불나방처럼 들이댔다. 화자는 아마도 그런 아름다움을 가까이 했다가 자신이 입을 화를 걱정했던 걸까? 왜 나는 격렬하게 작가의 페르소나가 구사하는 그런 이야기 속으로 뛰어들었을까. 끊어질 듯 하면서도 이어가는 인연 속에 엔딩에 준비된 묵직한 한 방은 이제 더 이상 소년이라고 부를 수 없는 수컷들의 멘탈붕괴를 유도한다. 이 정도는 되야지 그렇지?

 

그때 나는 아름다움에는 사람을 다치게 하는 독성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반 사람과 유별나게 다르게 되는 데는 어떤 대가든 치러야 한다. 그것이 아름다움이라고 하더라도. 유별난 사람과 접촉하는 데에도 대가를 치러야 한다. 나는 도망칠 준비를 했다. (90)

 

표제작 <이 인간이 정말>에서는 소개팅 혹은 선자리에 나선 남정네의 넋두리에 그만 넉다운이 되고 말았다. 부동산 부자인 어머니의 후광으로 먹고 사는 놈팽이가 분명한데, 기막힌 미인을 앞에 두고 객쩍은 썰을 푼 게 화근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상대방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자기 이야기만 하릴 없이 늘어놓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또 반대로 생각해 보면, 그만큼의 재물의 여유가 있어 사는데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지식들을 쌓았고 또 선자리에서 점점 더 지루해 하는 상대방에게 난사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요즘 햄버거병으로 알려진 용혈성 어쩌구로 스테이크를 기운차게 썰려던 상대방의 식욕을 사라지게 만들었으며, 면화 1KG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물이 필요하다는 자리에 걸맞지 않은 이야기로 그녀를 불편하게 만든 대역죄는 어쩌란 말인가.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놈이 하는 말이 다 족족 상황마다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녀의 일갈, 멋진 결말이 아닐 수 없다고 단언한다.

 

두 중년남자의 라오스 여행기를 다룬 <남방>을 읽다 보니 이제는 갈 수도 없게 된 해외여행에 대한 뜨거운 욕망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우리는 왜 고달픈 해외여행을 가고자 하는 걸까? 무언가 이곳에서는 이룰 수 없는 기이한 경험이 단조로운 삶에 필요해서가 아닐까? 우스갯소리로 문지방을 넘는 순간부터 고생이라는 말을 굳이 할 필요는 없겠지. 그들의 라오스 기행에서 가장 유혹적이었던 것은 값싼 물가였는데, 오래전에 갔던 캄보디아 여행에서 너무 저렴한 가격에 잔뜩 구입한 망고스틴(처음 먹어 보았는데 완전 반해 버렸다)을 쉴 새 없이 까먹으면서 느낀 죄책감도 슬며시 고개를 들기도 했다.

 

성석제 선생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문학의 위력을 느낄 수가 있었다. 시공간에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으면서, 그야말로 종횡무진 누비는 이야기의 힘은 대단했다. <유희>에서는 5백 년 전 임진왜란 시절로 돌아가, 전쟁에는 무능했지만 개인적 복수에는 능했던 복수장의 비겁하기 짝이 없는 복수극에 방점을 찍는다. 백성의 지아비라는 역대급의 무능한 군주는 자신의 영토와 백성을 지키는 데는 실패했지만, 몽진이란 이름의 도망에는 LTE급 실력을 보여주었다. 굳이 압록강을 넘어 명나라로 넘어가겠다는 걸 간신히 뜯어 말리지 않았던가.

 

전쟁이 끝난 뒤, 암군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던 군주는 변변찮은 무장과 대의만으로 근왕군을 자처하며 일어난 의병들에게 베푼 포상은 적었지만 자신을 호위한 자들에게는 내시까지도 호종공신인가를 제수했다지 아마. 이런 학습 효과 덕분에 훗날 일어난 또다른 전란에서 백성들이 왕을 지키겠다고 나선 근왕군이 있을 턱이 있나 그래. 작가 선생은 계속해서 그렇게 억울하게 죽어간 채유희에 대한 에피타를 강조한다. 죽은 뒤에 뭔 놈의 허울 좋은 관작이 중요하냐며.

 

<홀린 영혼>의 주인공(벌써 이름도 까먹어 버렸다) 썰에서는 왠지 작고한 김소진 작가의 울프강이 연상됐다. 희대의 노가리꾼, 뻥쟁이이자 거짓말쟁이였던 주선의 행적은 어쩐지 작가의 초기작 <조동관 약전>의 똥깐이가 떠오르기도 했다. 구전과 불확실한 기억만으로 전승되던 신화가 더 이상 유효하게 되지 않은, 어쩌면 전통적 내러티브 구조의 이야기가 실종된 유투브 세상이 세상의 관심을 집어 삼키기 전의 연대기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이번에 성석제 선생이 짧은 소설을 발표했다고 하는데, 궁금하다. 선생의 글을 읽다 보니 어느 순간 이야기에 지나치게 자신을 매몰하고 있는 자아를 발견하고 놀랐다. 그렇게 격렬하게 자신의 감정을 투사해서 몰입할 만한 그런 멋들어진 이야기였다는 증거이리라. 만족스러운 독서였다고 고백한다. 진심으로.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20-07-11 1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움에 독성이 있다고 하니 독버섯이 생각납니다.

레삭매냐 2020-07-12 08:49   좋아요 1 | URL
자신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을
얻기 위해서는 무언가 대가
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성석제 선생은 글로 보여 주
시고 계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