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김현철 옮김 / 새물결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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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허명은 없더라. 알레산드로 바리코의 <비단>을 읽으면서 느낀 점이다. 그것은 마치 하이쿠 연작을 읽는 듯한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대륙을 가로 질러 프랑스 라빌디외와 세상의 끝 지팡구를 오가며 벌이는 주인공 에르베 종쿠르의 러브스토리는 참.

 

전직 군인 출신 주인공 에르베 종쿠르는 제사업자 발다비우에게 발탁되어 누에알 상인으로 변신한다. 종쿠르와 천상의 목소리를 지닌 아내 엘렌 사이에는 아이가 없다. 그런 결핍을 보충이라도 하듯, 종쿠르는 잠균병이 휩쓴 유럽을 떠나 아프리카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세상의 끝 지팡구, 그러니까 일본에까지 원정에 나선다. 시간적 배경은 1861년이다. 아메리카합중국에서는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고, 플로베르는 <살람보>를 쓰고 있었다지 아마.

 

그런데 왜 에르베 종쿠르의 목적지가 일본이었을까. 바리코 작가는 일단 자본주의 시대의 도래에 즈음해서 유럽 대륙을 가로 지르는 위험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제국주의 시대 자본의 도전정신을 누에알 밀수꾼 에르베 종쿠르라는 인물을 통해 형상화한다.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서라면, 일본 국법이 금한 누에알 밀수도 아랑곳하지 않는 이들이 바로 제국주의 시대 상인들이었다. 그들은 잠균병에 손상되지 않은 건강한 누에알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사지도 마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막대한 이윤이 저간의 고생과 투자를 만회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high risk, high return. 무력을 동원해서 일본을 강제로 개항시킨 당시 떠오르는 미국의 힘에 대한 서술도 인상적이었다. 미국이나 프랑스나 타국을 침략한 제국주의 국가로서는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일본에서 종쿠르는 하라 케이라는 사업 파트너를 만난다. 그리고 운명적으로 그의 애첩과 썸씽이 발생한다. 아니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를 다시 일본으로 소환해내기 위해서는 누에알이라는 장치만으로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곧 루이 파스퇴르가 등장할 테고, 인조견사도 발명될 테니까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점이 있다. 소설의 중요한 소재로 사용되는 비단. 영어로는 silk 그리고 이탈리아어로는 seta가 인간 생활에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한 마디로 말해 없어도 그만인 사치품이라는 것이다.

 

비단의 존재 가치는 묘하게 종쿠르를 홀려 버린 하라 케이의 애첩의 이미지와 공명한다. 고향에 멀쩡한 아내 엘렌이 있는데, 말도 통하지 않는 땅에서 기괴하기 짝이 없는 애정행각에 빠져 드는 남정네의 심정이란. 비슷한 시기에 읽기 시작한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에 등장하는 25세 청년 시몽의 넋두리가 자꾸만 떠오른다. 아마 세상 헛 살았다고 고백했지 싶다. 오독이어도 상관없다, 어디까지나 독서는 주관적인 거니까 말이다. 종쿠르가 쫓는 몽환적 로맨스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긴 하지만 한 번 빠지면 도대체 헤어날 수 없는 그런 수렁 같은 감정.

 

하라 케이가 정숙한 여인에게 선물했다는 새장의 의미는 각별하다. 세상의 귀하고 값진 새들을 모은 거대한 새장의 존재는 하라 케이의 수중에 들어가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그야말로 서구인의 시선에서 바라본 그녀, 다시 말해 오리엔탈리즘의 정수 같은 존재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부질없는 욕망에 대한 묘사야말로 작가들의 로망이 아닐까. 비단, 세타 그리고 실크 그 무엇이라고 부르던 간에 실체 없는 욕망을 쫓는 감정은 한 줄의 하이쿠처럼 그렇게 날아가 버린다. 일단 새장에 갇힌 새들은 풀어줘도 다시 돌아올 거라는 숙명을 담은 말처럼. 그런데 어쩌면 진짜 새장의 포로로 잡힌 건 바로 에르베 종쿠르가 아니었을까.

 

모두가 말렸던 종쿠르의 마지막 도일은 사업적으로 대실패로 귀결된다. 일본 정국은 정부군과 바쿠후군과의 내전으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상상을 초월하는 새장을 지닌 환상 속의 그녀를 만나기 위해 에르베 종쿠르는 마지막 일본행을 감행한다. 그리고 종쿠르가 어떻게 다시 부활했더라... 사실 그건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었으리라. 영원히 동방에 남은 세이렌의 유혹에 빠진 남자에게는.

 

집중해서 읽는다면 금세 다 읽을 분량의 그런 책이었지만, 여운은 생각보다 길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여지가 많아지는 그런 사골곰탕 같은 맛이라고 해야 할까. 짧디 짧은 문장의 빈 여백에 무언가 내 생각을 마구 채워 넣고 싶어지는 그런. 말미에 등장하는 연서의 내용은 왜 그렇게 관능적이던지, 퇴근길 버스에서 읽으면서 얼굴이 다 화끈해지더라. 에피쿠로스적 쾌감이 폭발해 버리는 순간이라고나 할까. 필립 로스의 <죽어가는 짐승> 이래 이렇게 야하고 뭐 그런 책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존재마저 몰랐던 작가와 그들의 책들을 연달아 발굴해 읽으면서 나는 팬데믹 시절의 암울한 순간들을 그렇게 시간 속에 녹여 내고 있었다. 나의 선택과 시간투자가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분 좋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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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0-07-09 09: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이 책 읽고 일요일에 독후감 써놓았는데요! ㅋㅋㅋㅋ

레삭매냐 2020-07-09 11:37   좋아요 1 | URL
저는 이번에 안드레아 카밀레리
작가의 책을 보다가 우연히
알게 되어 구해다 읽었네요 :>

자목련 2020-07-09 10: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레산드로 바리코의 <이런 이야기>가 넘 좋아서 구매한 책인데 저는 아직 읽지 못했어요. 책장 어딘가에 ㅎ
저도 찾아서 읽고 싶어집니다.

레삭매냐 2020-07-09 22:32   좋아요 0 | URL
<이런 이야기>는 그나마 구하기가
쉬운데 다른 책들은 죄다 품절-절판
이네요... 불끈! 그럴수록 더 도전의지
가 생기네요.

읽어 보시면 후회하시지 않으실 겁니다.

다음에는 <시티>를 만나 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