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과연 존재하는가

 

무더운 여름의 어느 날, 나는 <장미의 이름>을 만나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엉망으로 쌓인 책탑을 헐어 <장미의 이름>을 상권을 찾아냈다. 하권은 바로 옆에 있었는데 도대체 상권은 어디에 있었는지.

 

이 무더운 날씨에 나의 지적 허영과 독서의 재미까지 모조리 잡아준 그런 책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아쉽게도 책은 아직 다 읽지 못했고, 대신 작년에 나온 8부작 미니시리즈는 이틀 동안 다 봤다. 1986년에 나온 영화도 봤는데 영화가 책의 풍부한 설정을 잡아내지 못해 개인적으로 졸작으로 평가한다. 역시 원전만한 게 없더라.

 

하지만 이번 미니시리즈는 일단 시간 제약이 없기 때문에 아주 방대한 스케일로 소설의 디테일을 잘 잡아냈다. 다만 원작에는 없는 각색된 부분들이 상당 부분 추가된 점이 원작과 다른 점이라고나 할까.

 

일단 소설 <장미의 이름>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멜크 수도원 출신의 아드소라는 수도사가 남긴 수기를 발견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미겔 세르반테스 이래 작가들이 애용하는 고전적인 수법이다. 이건 내가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 누군가 남긴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다시 들려주는 거랍니다. 클래식한 시작이다.

 

때는 132711월말, 북부 이탈리아 모처에 있는 베네딕트 수도원이 공간적 배경이다. 이 수도원의 자랑은 방대한 양의 책들을 품은 장서관이다. 원래 요새였다고 했던가.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인 영국사람 배스커빌의 윌리엄 그리고 멜크 수도원 수련사 아드소가 등장한다. 윌리엄은 당시 아비뇽에 유수된 교황 요한 22세와 치열한 세속권 투쟁을 벌이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의 밀사로 수도원에 파견된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한 세기 앞둔 당시, 교권의 타락상은 이루다 말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드라마에서는 프란체스코 수도회 출신 수도사가 논쟁 가운데 교황이 만든 입에 담을 수 없는 죄들에 대한 속죄비용으로 그들의 일탈과 타락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당대의 사제들이 얼마나 망가졌는지 한 번 드라마를 보면 알 수 있다.

 

교황과 교황의 대리인으로 나오는 희대의 악당 베르나르 기(실존인물이다)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가 돈주머니를 차고 있다는 장면으로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 수도사들이 그리스도의 청빈 사상을 내세우는 것을 비웃는다. 당대 최고의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 선생은 어쩌면 중세 기독교가 지배하던 시절에도 물질주의가 만연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던 걸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만큼 중요한 게 또 없다는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이 연상된다. 자본 중심주의라는 도그마만 유지한다면, 현대극으로 옮겨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그런 설정이다.

 

수도원에서 전권을 행사하는 수도원장 아보 역시 타락한 사제의 전형이다. 그는 지하묘지에서 발견한 성모 마리아상에 자신이 몰래 취득한 온갖 보석으로 치장하며 자신만의 법열에 빠져든다. 나중에 밝혀지는 이야기지만, 원래 귀부인이었던 그의 어머니가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주장에 빠져 모든 재산을 가난뱅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했던가. 그렇게 부유한 어머니와 재산을 모두 잃은 아보는 자신만의 방식(어쩌면 물질주의 페티시즘일 지도 모르겠다)으로 욕정을 채운다.

 

이제 곧 황제가 지지하는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순전히 교황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의도다)과 교황파 사제들이 격돌한 대논쟁을 앞두고, 수도원에서 일단의 살인사건들이 잇달아 발생하기 시작한다. 종교적 갈등에 살인사건까지. 하지만 아보 수도원장은 문제의 근원인 장서관의 출입은 엄격하게 금지한 채, 윌리엄에게 사건해결을 의뢰한다. 아니 손발 다 묶어 두고 무슨 사건을 해결하란 말인가.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였던 채식사 아델모는 투신한 것으로 보이고, 문서 사자실의 동료 베난티오 역시 돼지피를 젓던 항아리에 익사한 채 발견된다. 정신 나간 것처럼 보이는 알리나르모인가 하는 이탈리아 수도사는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나팔 소리의 계시대로 수도사들이 죽어나간다는 요사스러운 계시를 주절댄다. 그러니까 윌리엄과 아드소는 온갖 요설과 음모 그리고 비밀들이 어지럽게 난무하는 가운데 중차대한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소설과 드라마가 결정적인 차이를 보이는 장면은 20여 년 전에 피렌체에서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한 돌치노와 마르게리타의 딸 안나가 부모의 복수를 위해 잔혹한 이단 심판관 베르나르 기를 추적하는 것과 소설에서는 그렇게 비중 다뤄지지 않은 아드소가 사랑에 빠진 처녀의 역할이다.

 

소설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식료계 담당 수도사 레미지오와 그의 수하 살바토레 역시 돌치노파로 신분을 감춘 채, 수도원에서 조용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윌리엄과 그의 라이벌 베르나르 기의 등장으로 정체가 발각된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단전문가 베르나르 기가 현장에 있었으니 그들의 운명은 이미 결정난 게 아니었을까.

 

흥미진진한 이야기만큼이나 캐릭터들 사이에서의 갈등 구조도 에코 선생은 역시나 대가다운 솜씨로 풀어나간다. 한 때 뛰어난 조사관으로 명성을 날린 로저 베이컨을 스승으로 모신 배스커빌 사람 윌리엄은 자연과학을 마술로 여기던 당대의 참 지식인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는 셜록 홈즈 뺨치는 지식과 추리력으로 미궁에 빠진 연쇄살인의 단서들을 추적한다. 그의 조수로 등장하는 십대소년 아드소는 왓슨 같은 역할이라고나 할까. 가끔 그가 무심결에 던진 말들이 자신의 마스터에게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이단을 깊숙하게 연구하다 보니 어느새 이단이 아닌가 할 정도로 박식한 지식을 자랑하는 프란체스코 수도사 윌리엄은 13세기를 대표하는 지식인으로 상징된다. 게다가 소설은 우리 책쟁이들이 환장하는 책에 대한 이야기로 우리를 유혹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결국 어떤 물체에 집착하는 수도사들 간에 벌어지는 애욕과 질시 그리고 살인까지도 마다하지 않게 만드는 그 무엇인가 <아프리카의 끝(Finis Africae)>라는 장서관의 비밀 공간에 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흥분되지 않는가 말이다.

 

어둠의 시기라는 중세 시대 지식의 보고이자 지식 전수의 장이었던 수도원의 모습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윌리엄은 수도원의 장서관이야말로 기독교 세계의 보물 같은 그런 장소라고 격찬해 마지않는다. 평생을 신에게 서원한 수도사들은 문서 사자실에서 자신의 능력을 최대치로 발휘한다. 아델모 같은 채식사들은 한껏 능력을 뽐내면서 글이 필사된 양피지를 아름답게 채식한다. 베난티오 같은 그리스어 번역가들은 아랍 세계를 거쳐 유럽으로 전수된 고전 그리스 문헌들을 다시 당시 공용어였던 라틴어로 번역한다. 도서관 사서인 말라키아는 물론이고 그의 조수인 베렝가리오 그리고 베노 같은 수도사들 모두 금지된 책, 그러니까 금서의 존재를 아는 순간 모두 달려들어 책에 대한 자신의 욕정을 채우려고 시도한다. 어쩌면 수도원장과 수도원의 진짜 실력자였던 눈먼 호르헤 수도사는 그런 금지의 유혹으로 수하의 수도사들을 통제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그들의 시도는 당시 교황을 필두로 한 교권 기득권 세력이 사랑, 정의 그리고 평화라는 이름으로 민중을 지배하려고 했던 것과 병치된다. 그들은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주장하는 초기 기독교 시절 그리스도의 청빈에 대한 주장을 두려워했다. 도대체 교회가 왜 물질이 필요하단 말인가? 그리스도가 금화 한 닢이라도 수중에 가지고 있었던가? 자신들의 세속적 욕망을 채우고 민중을 지배하기 위해 그들은 정통 교리마저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해석했다. 그리고 돌치노파처럼 위험한 주장을 하는 이들을 모두 이단으로 몰아 화형대의 말뚝에 세웠다. 그들이 보인 광기는 현대에도 반대파를 정치적으로 탄압하기 위해 씌우는 프레임 전쟁과 닮아 있다. 항상 그렇지만 역사는 희극으로 한 번 그리고 다시 비극으로 한 번 반복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상황이 이러니 아비뇽의 교황 요한 22세에게 프란체스코 수도회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고,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는 적의 적은 나의 편이라는 속설대로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지원한다. 그래서 그들은 전장에서 철검으로 맞부딪히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드라마의 첫 장면이 바로 그런 전투 씬이 아니었던가. 소설에서는 에코 선생이 진입장벽을 높이기 위해 당대 시대적 배경에 대한 설명을 의도적으로 빼먹으신 것 같은데, 드라마에서는 상대적으로 그런 부분들을 잘 짚어준 것 같다. 물론 원작에서 너무 멀리 나간 것 같은 설정도 다수 있었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영화보다는 훨씬 낫다는 느낌이다. 주인공 윌리엄 역할은 존 터투로 보다는 션 커네리가 낫지 않나 싶다. 아드소 배역은 크리스천 슬레이터보다는 다미안 하둥이 더 멋지더라.

 

수도원에 물자를 공급하는 대다수 농민들이 하루 벌어먹고 사는 가난함이라는 적과 맞서 싸웠다면, 문서 사자실의 수도사들은 그들이 추구하는 진리, 다시 말하자면 장미의 이름이나 장미의 향기를 흠향하기 위해 대중의 고통을 외면하고 자신들의 임무에 전념했다. 베르나르 기 같은 기득권층의 수호자들은 그들이 만들어낸 정통 교리에서 벗어난 일절의 다른 해석도 용인하지 않았고, 검과 고문 그리고 화형대의 횃불로 생각이 다른 이들을 정죄했다. 같은 신을 믿으면서도 이렇게 서로 다른 층위의 사람들이 복닥거리며 사는 세상에 과연 하나님이 편하게 임재하실 공간이 있는가에 대한 윌리엄의 질문은 그야말로 화두처럼 다가왔다.

 



소설에 비해 이번에 새로 만들어진 드라마는 <장미의 이름>의 확장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에서 다뤄지긴 했지만, 시각적으로나 내러티브상 좀 더 흥미를 줄만한 소재들을 찾아 극대화하는데 주력한 느낌이다. 돌치노와 마르게리타의 딸 안나의 등장, 바라지네 사람 레미지오가 돌치노파에 합류해서 활동하는 장면, 귀족의 개 노릇을 하던 살바토레(<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가 연상됐다) 등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신에게 서원한 수도사들이 모여 지내는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사건이란 소재는 대단한 픽이 아닐 수 없다. 처음 아델모와 베난티오가 죽었을 때만 해도 일대 충격적인 사건이었지만, 욕망의 구덩이였던 수도원의 비밀과 비리들이 하나둘씩 밝혀지면서 다음 차례는 누구인가하는 호기심으로 전이되는 과정을 드라마에서는 잘 잡아냈던 것 같다. 신의 섭리가 담긴 책들을 필사해서 후대에 보존하는 성스러운 장소에서 지상의 그 어떤 곳보다도 속되고 타락한 곳으로 드러나게 되는 설정 그리고 그 중심에는 욕망의 대상이 된 책이 존재하고 있다는 전개에 그만 압도된 느낌이라고나 할까.

 

처음에는 책 읽는 속도가 빨랐으나, 결국 드라마가 주는 시각적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드라마부터 먼저 보게 되었다. 책은 처음의 속도에 비해 느린 속도로 읽고 있다. 뭐에 쫓기는 것도 아니니 천천히 읽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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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2 1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7-22 1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7-22 13: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treehyun 2020-07-22 12: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드라마가 좋았다는데 저는 놓쳤네요. 영화를 보고 책을 읽었어요. 지식을 독차지 하려는 기득권의 욕망이 끔찍했지요. 말의 왜곡이 이렇게 생겨난 것인가 했지요.
여름에 읽기 좋겠네요.

레삭매냐 2020-07-22 13:09   좋아요 0 | URL
제가 책과 드라마를 병행해서 보다 보니
드라마가 원전을 좀 비틀지 않았나 뭐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쥐꼬리만한 기득권을 고집하다가 결국
에는 모두 다 놓치게 된다는 역사의 교
훈을 배우지 못하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